'양심개황'이라는 말을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들 맡은 곳에서 맡은 바의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그곳에서 열심히 뛰고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뛰었으면 하고
그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그야말로 각자의 양심개황을 잘 해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모두가 각자가 개황해야 할 인연을 찾아
안배되어 있는 듯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곳에서 제가 뛰어넘어야 할, 원만히 해야할 인연과 같이 하면서 저 자신의 개황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제 자신과의 싸움이죠.
정말 요즘들어 반성하는 것은요..
모두가 다 부처이고 慈氏佛인데 저만 부처인 줄 알고 남의 옳고 그름, 시시비비, 장장단단점을 감시하듯 바라보고 또 마음속에서 배척,
경시하거나 혼자 불평,불만하느라 평화로운 웃음을 짓고 살질 못했다는 것이에요.
'단순'해야 자성이 밝아진다고 합니다. 성불성현의 첫걸음이라고도
해요. 그러나 지금껏 제가 단순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가 저랑 똑같이
慈氏佛의 종자라는 것을 꿰뚫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종종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너,나의 겉모습과
습관의 다름, 생각의 다름등에서 분별, 상대가 생겼습니다. 또 남을
존경내지는 예경, 감은, 또 저심하기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부처라는 걸 깨달아야만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민심
내지는 자비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쪼끔씩, 쪼끔씩 들어요.
그야말로 하늘아래 부끄러운 존재가 바로 미매한 이런 나!아닐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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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란
"당신 앞의 모니터입니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동산선사는 "마삼근"이라 했고
운문선사는 "마른 똥막대기라" 했고
조주선사는 "뜰앞의 잣나무라" 했습니다.
장자는 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붕위에 개와장"이라 했지요.
부처라는 한 생각을 내어도 마치 구름이 계곡을 가려 새들이 집을 찾지 못하는거와 같습니다.
한 생각 내지 않으면 전체가 들어납니다. 생각하므로 부처, 혹은 중생의 상대적인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가 됩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모두가 진리지요. 모두가 부처지요.
낙엽이 눈처럼 흩날리는 것도 진리고요. 낙엽을 쓸어 모으는 것도 진리고요. 운치가 없다고 낙엽을 다시 갖다 뿌리는 어느 스님의 행동도 진리고요...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가 됩니다..분별을 내지 마세요.
깨달음을 구하면 깨달음에서 멀어지고 부처를 구하면 부처에서 멀어집니다. 내려놓으세요. 그러면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는 본래 이름도 모양도 없습니다. 생각을 내므로 산과 강, 바다, 부처와 중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답변을 하여도 틀리고, 답변을 하지 않아도 틀립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