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문학(임실문인협회)에서 소개된 수필가 곽병술(郭秉述)인의 글입니다. 2007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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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주천리
1, 수은과 호은
노산의 정기 받은 아름다운 터 /
호은님 수은님이 이터를 닦아
대대로 이어나온 평화의 고장 /
사랑과 협동으로 복된 주천리.......>
주천 마을 노래를 불러 애향 정신을 일으켰던 일을 생각하며 내 고향 주천리의 옛날을 더듬어 본다.
15세기 무렵, 마을에 뛰어난 두 인물, 곽 수은과 이 호은이 살았다. 둘 다 연산군의 부패 정치를 몹시 싫어하여 좋은 자리를 버리듯 내놓고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숨어 살았다.
조금 먼저 왔던 호은공은 태종 임금의 증손자로 태어나 궁중에서 남달리 자랐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보며 치열한 왕권 다툼에 끼어 두려움을 느끼자 몸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동구 밖 냇가에 나가서 낚시질을 하는데, 이 낚시터에는 술바위가 있고 매일 술이 한잔씩 나와, 이 술과 잡은 물고기로 괴로운 세월을 잊고 살았다.
수은공은 청백리로 소문난 전남 담양 부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혜롭게 자라 약관의 젊은 나이로 곡성 현감을 지냈다. 그러나 당시 연산군 시대의 어지러운 사회에서는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관직에서 벗어나 1476년 이 노산 아래에서 묻혀 살았다.
후학(後學)을 가르치며 자신의 뜻을 적은 고장에서나마 펴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자의 이상을 이 곳에 나타내려고, 뒷산 이름을 노산(魯山)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이구동(尼丘洞)이라 지었다. 주위 환경을 공자의 나라와 이름과 자로 각색한 다음,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 오직 자라는 청소년만을 바라보며,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르치며 살았다.
남을 끌어내리고 그 위에 오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던 바르지 못한 정치 관료에서 떠나, 바르고 선한 무언의 힘으로 이 좁은 곳에서 평화의 고장을 만들고자 한, 수은의 숭고한 정신은 참으로 존경할 일이다.
노산에서 동쪽으로 굽이치며 줄기 차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마을 바로 뒤에 멈췄는데 여기에 곡성공의 산소가 있다. 이 산소는 옥토망월(玉兎望月), 또는 기사득와(飢蛇得蛙)혈로 소위 명당이다. 이 산소에서 약 300m 앞에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어 개구리 모양 또는 달 모양으로 보여 옥토망월로 볼때는 달이고 기사득와로 볼때는 개구리가 뛰어가는 모양이다. 주린 뱀이 뛰어 가는 개구리를 덮치는 모양이 너무도 흡사하다.
여기서 가까운 도장골이라는 먼데서는 잘 않보이는 옴팡진 곳이 있다. 이곳이 약 400년전 정유재란으로 피에 젖은 역사의 현장이다.
1597년 일본군이 성난 파도 처럼 북진할 때 주천리에도 처들어 왔다. 힘 없는 여자나 노인, 아이들은 도장골로 달아나 숨고, 장정들은 도끼나 쇠스랑을 휘두르며 막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이 왜군들 한테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이때 인물 곱고 얌전한 여인이,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이려는 찰라, 앞을 막고 "나 먼저 죽이고 이 어른을 죽여라" 하고 대들었다.
이에 오랜 전투 생활로 여자에 굶주린 왜적들이 갑자기 나타난 미인을 보자 칼질을 멈추고 개침을 흘리며 만지고 희롱하려하자 가슴에 품고 있는 장도칼을 뽑아 자결하니 왜병들이 그 의거에 멍청히 구경하다 감동되어 더 진격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바람 앞에 촛불의 운명이었던 많은 인명을 이 여인이 구했다. 숭고한 정절이 남편과 시부모, 또 많은 마을 사람들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산재한 많은 군소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에도, 이 여인 흥덕 장씨에게는 오히려 비각을 세워 길이 보존하라는 특별 명령이 내렸다.
마을의 한 복판에 충효열을 기리는 흥덕 장씨 비각이 있고, 그 옆에는 반송당의 비원이 있다.
반송당은 곡성공의 후예로 1592년 5월 고을에서 의병을 모아 거느려 평양 싸움 등 여러 차례의 전투에 큰 공을 세워 나라에 충성했다. 왜란이 끝난 뒤 선조 임금이 전공을 치하하고 벼슬을 주어 불렀지만 전원에서 글을 벗삼아 살겠다는 강한 뜻으로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일생을 깨끗이 마치니 후세 사람들이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반송당의 비원(碑園)을 조성했다.
곡성공의 그 정신이 그 후예들에게 계승되고 훌륭한 좋은 가문을 이뤘기에 이 여인을 비롯한 애국자들과 효자, 효부, 효녀가 그후에도 계속 나와 수십명 많은 이름이 보첩(譜牒)과 향지(鄕誌)를 빛내주고 있다.
이 마을은 이렇게 유교로 자랐다.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어도 마을에 질서가 있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알아주는 마을이다.
이구동이란 마을이름이 오래 불리워지고, 이구면 또는 이구군으로 확대됐어야 좋았는데, 그 반대로 호은공이 술마시던 술바위에 밀려, 이구동이란 이름이 널리 불려지지도 못한채,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기억하는 사람 조차 없다.
수은과 호은의 후예들은 500여년 동안, 한 마을의 친구로 사이 좋게 경쟁도 하며, 볕과 그늘처럼 곽씨가 성했다 이씨가 성했다하며 지내오고 있다.
오늘도 수은과 호은의 귀노재와 호은재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데, 호은은 전설의 현장 술바위를 지키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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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라진 이구동
주천리는 임실군 오수면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뒤에는 노산이라는 해발 545 m나 되는 큰 산과 606m나 되는 매봉, 이 두 산이 마을의 서쪽에 둘러 있고 윗뜸, 안뜸, 아래뜸 이렇게 세 뜸으로 이뤄졌으며 내가 전주로 이사오던 1977년만 하더라도 130여호, 750여명이 살았었다.
마을 오른쪽은 굴뫼(雲山)라는 산으로 둘러 있고 그 안쪽에 진산뫼라는 낮고 조그마한 산이 길다랗게 뻗어 있고 마을 왼쪽에는 평지산이라는 역시 낮으막한 산이 그 보다 훨신 길게 뻗어 있다.
노산에는 석정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그 중간에 대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대바위는 평평하여 1940년대 까지는 천년 휴게소였다.
이곳을 지나가는 장꾼과 나뭇꾼이 날마다 수십명 이상이 쉬었다 가는 곳이며 장날이면 이 보다 훨신 더 많이 수백명이 지나 가다가 이 대바위에서 쉬게 되던 곳으로 이 초로길은 오수장과 갈담장으로 연결되는 길목으로 큰 장길이었다.
대바위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는 서방 바위, 각시 바위가 50m 사이를 두고 서 있는데 그 바위가 하나는 사모를 쓰고 관대 차림을 한 신랑 같고, 하나는 족도리에 원삼 차림의 신부 같다. 대바위 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는 해방 직후 까지 늑대떼가 살았던 얼음밭골이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한 50m 더 가면 베틀굴이 있다.
이 굴에는 오랜 옛날에 쳉이만큼이나 큰 지네가 살았다고 하며 그 근처에 농바위 라는 정6면체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밑에는 시루 만큼이나 큰 두꺼비가 살았다고 하는데 이 두 괴물이 비내리기 전날쯤 나와서 싸우는데 연기 같은 독을 피워 내며 싸웠다고 한다.
이 베틀굴에는 귀신들이 있어 여자나 아이들은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며 6, 25 전란 주에는 빨지산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또 이 근처 물만언골이라는 작은 폭포가 있는데 여기에서 물을 맞으면 피부병이 나았으며 1940년대 초에는 문둥병 환자가 치료되었다고 한다.
물맞는골에서 북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도장골이라는 먼데서는 잘 않보이는 옴팡진 곳이 있다. 이곳이 약 400년전 왜적들의 만행으로 피에 젖은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이 1597년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고 성난 파도 처럼 북진해 올때 주천리에도 처들어 왔었다. 힘 없는 여자나 노인, 아이들은 도장골로 달아나 숨고 장정들은 도끼나 쇠스랑을 휘둘으며 대항했지만 정예부대 왜군들 한테는 초개처럼 목숨만 날리고 상대가 되지 못해 도장골이 있는 노산 밑 쪽으로 밀려났다. 왜적들은 여기까지 추격하여 도장골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들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이때 현풍곽씨 집안에 인물 곱고 얌전한 부덕 높은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 곽해(郭海)와 시아버지 곽율을 죽이려는 찰라 뛰어 들어가 앞을 막고 "나 먼저 죽이고 이 어른을 죽여라" 하고 대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오랜 전투 생활로 여자에 굶주린 왜적들이 갑자기 나타난 미인을 보자 칼질을 멈추고 개침을 흘리며 아릿다운 자태를 보며 만지고 희롱하려들자 가슴에 품고 있는 장도갈을 뽑아 자결하니 금수 같은 왜놈들이 그 충효에 감동되어 더 살육을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고 한다.
이 여인이 이 지방 모든 사람들에게 충효를 목숨으로 가르쳐준 유명한 흥덕 장씨이다.
노산 상봉에서 동쪽으로 굽이치며 줄기 차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마을 바로 뒤에 멈췄는데 여기에 호남지방에 사는 현풍 곽씨 곡성공파의 파조 산소가 있다.
이 산소는 옥토망월(玉兎望月), 또는 기사득와(飢蛇得蛙)혈로 명당이라고 한다. 이 산소 앞에는 약 300m 앞에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어 개구리 모양 또는 달 모양으로 보여 옥토망월로 볼때는 달이고 기사득와로 볼때는 개구리가 뛰어가는 모양으로 주린 뱀이 뛰어 가는 뱀을 덮치는 모양이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다.
마을 뒤 매봉 중턱에도 흔들 바위라는 전설이 얽힌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먼 옛날 양씨 남매가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의 혼담도 있기 전에 누이의 혼담이 성사되어 결혼 날이 잡히고 기다리던 중에 오빠한테 수자리 살러 가라는 관가의 명령이 내렸다. 말하자면 국방의무에 따라 군대에 나가라는 징집 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할수 없이 오빠가 수자리 를 마치고 돌아온 후로 결혼날을 미루고 정혼한 남녀는 그 날을 손 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오빠는 돌아올때가 되어도 오지 않고 양씨 처녀를 애타게하였다. 신랑쪽에서는 결혼을 독촉하게 되고, 더 기다려 보자는 양씨 처녀의 뜻을 묵살하고 다른곳으로 결혼하고 말았다. 이렇게 혼처를 놓치고 미칠듯이 오빠 돌아 오기만을 식음을 폐하고 기다리다 지쳐서 쓰러지고 오빠는 일이 잘 못되어 수자리를 곱으로 살고 돌아와 보니 누이는 시체로 되어 있었다.
오빠도 실의에 빠져 날마다 울고 지내다가 숨을 걷웠다는 애절한 남매의 이야기가 무심한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어 인생 무상을 느끼게 하고 있다.
마을 복판에는 흥덕 장씨 효렬각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곽병식 공의 효자비가 있고 왼쪽에는 반송당 곽흥무 장군의 비원이 있다.
반송당은 1592년 5월 그 고을에서 의병을 모아 거느려 평양 싸움 등 여러 차례의 전투에 큰 공을 세워 왜란이 끝난 뒤 선조 임금은 벼슬을 주어 불렀지만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일생을 깨끗이 마치니 후세 사람들이 그 숭고한 정신을 본 받고자 이곳에 곽흥무 의병장 전공기념비를 세워 비원을 조성하였다.
수필가 곽병술씨는 임실 오수 출신으로 지난 95년 월간 문예사조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그는 이어 97년 월간 한맥시를 통해 시인으로도 등단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임실문인협회 이사, 전북수필문학회·전북문인협회·영호남수필문학회·한국수필가협회·한국문인협회·한국크리스찬문학회·국제펜클럽한국본부·한국전쟁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신문학협회 감사를 역임했다. 저서로 수필집 ‘돌아본 그 시절’과 ‘고향의 달’,‘막차에 탄 사람들’, ‘명산 찾아 10년’, ‘가는 정 오는 정’등과 시집 ‘봄이 오는 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