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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農 許楗 강신교 양천, 남농 생몰연대 : 1907년 ~ 1987년 대표작 : 금강산 보덕굴, 산촌, 4월 산촌록, 운림동 소견
목차 ⓵ 개설 ⓶ 생애 및 활동사항 ⓵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남농(南農).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남종화의 대가인 허련(許鍊)의 손자이며, 직업 화가였던 허형(許瀅)의 아들이다. ⓶생애 및 활동사항 화가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러나 생활의 빈궁함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목포상업전수학원에 들어가 상업을 공부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타고난 그림 자질이 발휘되어,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동양화부에 수묵 담채(水墨淡彩)의 사실적인 풍경화로 입선하였다. 1944년까지 연달아 입선과 특선에 오르면서 전통 화단에 진출하였다. 1940년에 제작된 수묵 채색화 「금강산 보덕굴(普德窟)」과 같은 무렵의 「산촌(山村)」은 광복 전의 대표작이다.
광복 후에는 그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경쾌한 붓놀림과 현실적 감각의 담채(淡彩) 및 농채(濃彩)의 기법으로 전통적인 산수화의 맛과 현실적 시각을 조화시키는 수법으로 시골 풍경을 주제 삼은 「4월 산촌록(山村錄)」(1948년), 「산사(山寺)」(1955년), 「운림동 소견(雲林洞所見)」(1957년)을 그렸다. 그밖에 무한한 향토애가 담긴 계절적인 산수 풍경화를 연작하였다.
1952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참가하여 추천 작가·초대 작가·심사 위원을 역임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그리고 1957년 김기창(金基昶), 이유태(李惟台), 김영기(金永基), 김정현(金正炫), 박내현(朴崍賢), 천경자(千鏡子) 등과 중진 한국화가 단체 백양회(白陽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1970년대 중엽까지 지속된 그 연례 회원 작품전에 출품하였다.
18세 때부터 목포에 정착한 이래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하였다. 진도 출신으로 1920년대 이후 호남을 대표한 남종화풍의 대가로 광주(光州)에서 활동한 허백련(許百鍊)과 더불어 호남 전통화파의 상징적 고봉(高峯)으로 일컬어진다.
상훈과 추모
1979년목포 성옥문화상(聲玉文化賞)을 받았으며, 1982년 은관문화훈장 및 목포시민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1985년 전라남도 무등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毅劑 許百鍊
의재 허백련은 한국 남화의 대가로, 화법은 소치에 그 뿌리가 있고, 형상보다 뜻을 더 중요시했으며, 화찬을 정한 후 붓을 들었는데, 이것은 문인화의 시, 서, 화 3절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와 서를 우위에 놓기 때문이며, 특히 의재의 산수에서는 밋밋한 황토산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전라도 산의 진경을 그린 것으로 1951년 이후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1891 전남 진도에서 출생, 호는 의재(毅齋).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3년을 수료하였으나 그림공부에 전념하여, 1935∼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수석입선으로 화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그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 서, 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회고전을 가졌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받았으며,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 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의제가 무등산에 기거하다 타계하기까지 30여년 동안 春雪軒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으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로, 남화의 개척자 의제 허백련이 그 화풍을 전수하며 후학들을 길렀던 곳으로 사시사철 차 향이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섞여 마르지 않는 곳이다.
의재는 이당 김은호를 비롯한 친구들이 서울에 올라와 조선미술관을 만들어 보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연진회를 생명처럼 아꼈다. 그는 항상 "그림을 그리는데 서울과 시골이 따로 있는가. 중국에서도 남종화는 강남지방에서 꽃피우지 않았는가?"라고 강조하며 이 곳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수, 남화의 일가를 이루었다.
의제는 산 기슭에 차나무를 가꾸어 가공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늘 차의 생활화를 강조하며 차나무의 곧은 마음을 좋아했으며, 자녀의 결혼식 폐백도 술 대신 녹차를 이용했다.
차나무는 옮기면 죽는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했으면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며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다.
무등산 춘설헌 주인 의제와 찻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은상 시인은 다음과 같이 그 감회를 읊었다.
무등차의 고향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 내어 초의선사 다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출처] 남종화의 전통, 꿋꿋이 지켜온 의제 허백련 화백 |작성자 정의와 평화
◎ 林田 ◎ 南宗畵 [정의] 북종화에 대비되는 동양화 양대 분파의 하나.
[개설] 남종화는 남종화가로 분류되는 여러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산수화의 복합적 양식을 일컫는다. 남종화라는 용어는 중국 명나라 만력연간에 막시룡(莫是龍)[1537~1587], 진계유(陳繼儒)[1588~1639], 동기창(董其昌)[1555~1636] 등 문인 서화가에 의해 주창된 남북종론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종화파의 분류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수묵산수화의 시조라 불리는 당나라 왕유를 남종화의 선구로, 착색산수화를 그린 당나라 이사훈(李思訓), 이소도(李昭道) 부자를 북종화의 선구로 보았다.
이후 같은 기준에 의해 남종화가와 북종화가를 분류하였는데, 실제로는 화풍상의 분류라기보다는 문인과 직업화가라는 화가의 신분에 따른 분류이다. 이 때문에 남종문인화라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는 17세기에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화가들의 문인화 작품이 직접 유입되기도 하였고, 청초에 발간된 『고씨화보(顧氏畵譜)』나 『당시화보(唐詩畵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화보를 통해 형식화된 모습으로 유입되어 그 전파가 가속화되었다.
이후 18세기에는 강세황(姜世晃)이나 이인상(李麟祥),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한 문인화가뿐 아니라, 김홍도나 이인문 등 화원화가들의 그림에서도 남종문인화풍이 보이게 되었다. 즉, 문인화의 본래 개념인 문인이 여가로 그린 그림에서 특정한 준법이나 구도의 전형이 이루어지면서 형식화되었다.
19세기에는 18세기 조선 남종화의 기초 위에 추사 김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이방운(李昉運), 신위(申緯), 정수영(鄭遂榮) 등 문인화가들뿐 아니라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련(許鍊) 등 여항화가들의 활약이 남종화의 발달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이후 남종화는 본연의 취지나 정신에서는 멀어지고 하나의 양식으로서 간주되어 명맥을 이어왔다.
[형성배경]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허련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31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서화수업을 하였다. 문인화를 중심으로 특유의 필치를 구사한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도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빼어났으며 당시 화단을 풍미하였다.
허련은 49세 때인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1852~1931],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 방손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해 호남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내용 및 특징] 호남남종화의 본고장인 진도에서는 허련과 허형의 뒤를 이어 많은 화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허련의 집안에서만 해도 허형의 아들인 南農 許楗과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을 비롯하여 허림의 아들 임전(林田) 허문(許文), 허건의 장손자인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허진을 비롯한 여러 후손들이 화업을 잇고 있다.
허건은 그림을 시작한 초기에는 가전화풍인 허련의 화법을 따라 전통회화의 계승에 노력하였으나, 남종문인화를 현대적 화풍으로 승화시켜 특유의 ‘신남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구어낸 화가이다. 소치에서 미산을 거쳐 내려온 전통 남종문인화의 맥을 이어 허백련과 더불어 현대 호남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동생과 조카,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화맥을 계승케 하였다. 허건의 문하에서는 도촌(稻邨) 신영복(辛永卜),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김명재(金明在) 등이 남농의 회화정신을 바탕으로 각자 독특한 화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허백련은 남농과 함께 한국남화를 남도의 전통화풍으로 자리 잡게 한 중심인물이다. 허백련은 중국의 전통 남종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남도 특유의 자연환경이나 감성이 녹아든 사의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는 1938년 광주에 정착하여 전통서화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표로 연진회(鍊進會)를 결성하여 많은 화가를 길러냈다.
[현황] 19세기 허련에서 시작된 진도 남종화의 맥은 현대에까지 이어진다. 진도 출신의 화가들은 허건이나 허백련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으며 호남과 전국 각지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특히 허백련이 발족한 연진회가 그 발판이 되었다.
허백련의 동생인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 제자인 옥산(沃山) 김옥진(金玉搢), 시경(時耕) 박익준(朴益俊), 백포(白浦) 곽남배(郭南培) 등은 국전을 비롯한 여러 전람회에 거듭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성장하였다.
이외에도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치련(穉蓮) 허의득(許義得), 정전(丁田) 박항환(朴亢煥), 우남(又南) 이옥성(李沃城), 연사(蓮史) 허대득(許大得), 당암(堂岩) 이영식(李永植), 우산(又山) 정서진(丁西鎭), 동작(東作) 김춘(金春), 송당(松堂) 강지주(姜知周), 현원(玄園) 곽국환(郭國煥), 야정(野丁) 곽권옥(郭權玉), 우림(芋林) 김정욱(金正旭), 정원(丁園) 김달석(金達錫) 등 수많은 화가들이 활동하여 진도가 한국 남종화의 뿌리임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회화뿐 아니라 서예에 있어서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영향을 받은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를 비롯한 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작품 감상
石田黃旭筆寬則壽 너그러우면 장수한다. 종이에 먹. 가로 40, 세로 64
石田 黃旭(1898~1992) 호는 石田, 南固山人, 七峯居士, 白蓮山人 전라북도 고창 출신,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20년 금강산 돈도암에 들어가 서예에 정진하였는데, 왕희지와 조맹부의 법필 중심으로 서예공부를 하였다. 그의 필법은 국내에서 유일한 악필법인데, 이는 붓을 손끝으로 잡지 않고 손바닥으로 움켜잡아 운필하는 특이한 필법이다. 이러한 필법을 익힌 것은 작가가 60세 이후부터 수전증을 앓아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 석전은 오른손의 마비 중세로 붓을 다시 왼손으로 옮겨 잡아 악필법을 사용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놀란 뱀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듯이 생동감 넘치는 그 특유의 악필법을 사용하기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노년이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石田 黃旭
생몰연대 : 1898년~ 1992년 향년 95세 대표작 : 독립기념관 장건상선생어록비문, 구례 화엄사 일주문 편액, 불국사 종각 편액, 금산사 대적광전 편액
[내용] 호는 석전(石田)·남고산인(南固山人)·칠봉거사(七峰居士)·백련산인(白蓮山人). 전라북도 고창 출신.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20 년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 들어가 서예에 정진하였는데,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법필을 중심으로 서예공부를 하였다.
1930년 32세 때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와 15년간 신위(申緯)를 사숙하며 서예에 정진하는 한편, 육예(六藝: 중국 교육의 여섯 가지 부문, 禮,樂,射,御,書,數)를 익혀 거문고와 글씨에 마음을 의지하는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이때 그는 행서(行書)에 탁월한 경지를 이루어 친교가 있던 정인보(鄭寅普)·김성수(金性洙) 등의 격찬을 받았다.
황욱이 서예가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3년 75세 때 전주에서 지방유지들의 초대로 회혼기념서예전을 열면서부터였다. 1960년경부터 오른손 수전증으로 붓을 잡기 어렵게 되자, 왼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꼭지를 눌러 운필하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하였다. 이에 따라 중풍으로 오른손에 마비가 와서 좌수서예가로 유명했던 유희강(柳熙綱)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을 들었다.
1974년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열린 서울 작품전(문예진흥원미술관)을 필두로 1991년 역시 동아일보사 주최의 회고전 때까지 해마다 전시회를 갖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서울 서예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악필 행초서(行草書)는 역대서법이나 기교를 초월한 기세(氣勢)의 웅강(雄强)과 순박, 그리고 초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악필로 인하여 미세한 점획의 처리가 어렵게 되자 그는 행간의 운율과 운필의 단순화에 의하여 격을 유지하는 독특한 경지를 체득하였다.
법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자칫 특징을 찾기 어려운 많은 서예가들 가운데 그의 글씨가 유독 돋보이는 것은 이 같은 무기교(無技巧)와 육예에 의한 탈속의 초연한 인품에서 유래된 것이란 평도 있다. 대표적인 금석문으로 독립기념관 장건상선생어록비(張建相先生語錄碑)와 구례 화엄사 일주문, 불국사 종각, 금산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의 편액이 있다 ※ 육예(六藝)는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여섯 가지 기예를 가리키는 말이다. 6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며, 이는 각각 예학(예의범절),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악필(握筆)의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님을 그리며
근대에 전라북도에는 걸출한 서예가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암 송성용(1913~1999)선생님과 석전 황욱(1898~1993)선생님이 뛰어 났는데 오늘은 악필의 대가 석전 황욱선생님에 대해서 논하여 보고자 한다.
필자가 석전 황욱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12월 중앙일보사 초대전으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석전 황욱 망백전’ 전시를 할 때 이다.
전시장에 있는 석전선생님의 작품을 관람하고 현장에서 좌수 악필로 휘호하는 선생님을 뵙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즉 필(筆)의 골기(骨氣)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강건하고 굳셀 뿐 아니라 기암절벽의 노송 같은 생동감이 90세를 넘긴 망백의 노인이 쓴 글씨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때의 인연으로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논문주제를 ‘석전 황욱의 서예연구’로 정하였고 2000년도에 ‘석전 황욱의 서예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추사가 절망적인 유배생활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듯이 석전선생님 또한 어려운 고난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악필서체를 완성시켜 갔다는 점에서 대단히 존경스럽다.
석전선생님께서는 고창 성내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초년 에는 한학과 서예에 정진하였고 활쏘기와 가야금 등 육예(禮,樂,射,御,書,數)를 익히며 호강하게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이란 경술국치를 당하자 1920년 금강산 돈도암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지필묵을 벗 삼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6.25후 남로당 전주시당 위원장이였던 큰 아들이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석전선생님이 간절한 탄원서를 올리자 명필에 감복한 이승만 대통령은 무기로 감형 재 결재를 해 주었다.
회갑을 지나면서 수전증이 오더니 갈수록 심하여 정상적인 집필법(執筆法)으로는 글씨를 쓸 수가 없자 붓대를 손바닥으로 움켜잡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하여 서예에 정진하였다.
바깥세상과 단절한 체 오직 글씨만 써온 석전선생님은 1973년 4월 나이 76세에 아들 황병근씨의 권유로 전주 아담다방에서 3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때까지 서단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석전선생님의 독특한 서풍과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악필 작품을 보고 전시장을 둘러본 사람들은 물론 이미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강암 송성용선생님께서도 “요즘 모양만 근사하게 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석전선생의 서예전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필력의 경건(勁健)함은 오랜 경험과 예술가적 인격에서 우러나온 응당한 소산이라고 본다” 라고 평을 하였다.
76세에 첫 전시를 연 후 그 여세를 몰아 다음해에 서울에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희수전(喜壽展)을 열어 당당히 중앙무대인 서울에 입성을 하였고 그 뒤에도 서울 현대화랑, 서울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석전선생님께서는 나이 86세 때 오른손 수전증이 더욱 심해져 87세 때부터 좌수악필로 일관하였다.
1988년 중앙일보사 호암아트홀 초대 ‘석전 황욱의 망백전’이 개최되었는데 대작인 소동파의 적벽부18폭 병풍을 비롯하여 70여점이 전시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같은 유명 정치인들과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와 관람을 하였다. 그 뒤에도 부산일보 초대전과 동아일보 초대 회고전이 이어졌다.
석전선생님의 좌수악필 전성기는 90~94라고 볼 수 있다. 이 전까지는 자형(字形)이 좌우 수평이거나 오른쪽이 약간 올라갔으나 이 때 부터는 오히려 오른쪽이 내려가는 자형의 작품을 많이 하였다.
자형의 오른쪽이 내려간 어색함을 상하좌우로 불규칙하게 흔들어서 그 단점을 보완하였다.
높은 예술적 감각과 불굴의 의지로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90세를 넘기면서 좌수악필을 꽃 피우던 석전선생님은 1992년부터 노환으로 앓다가 1993년 3월22일 우리나이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석전선생님은 표면으로 보여 지는 부분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꿋꿋이 이겨내면서 쌓은 깊은 내면의 세계를 토해낸 서예와 그러한 심오한 정신이 어우러져 좌수악필의 서예술을 꽃 피웠다고 본다. 1999년 5월에 아들 황병근씨가 석전선생님의 유작 418점을 비롯한 문화재급 각종 유산 5,200여 점을 전주국립박물관에 기증하여 석전기념실이 상설되어 있고 2016년에 석전선생님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석전선생님이 떠난 지 어언 25년이 흘렀지만 선생님의 예술 혼은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영원할 것이다.
/ 글 = 원암 오광석(전북미술협회 서예분과 이사)
작품 감상
오른쪽 액자 丁酉年春丁月下浣書於節秋史室南窓下 정유년 봄 정월 하순 추사실 남창 아래에서 쓰다.
栽竹盡成新鳳尾 재죽진성신봉미 심은 대나무는 모두 봉황새끼의 꽁지를 이루었고,
왼쪽 액자 種松皆作老龍鱗 종송개작노룡린 심은 소나무는 모두 노룡의 비늘을 지었네.
素筌 孫在馨 소전 손재형
세한도를 찾아 온 素筌 孫在馨
(생몰 1902년∼1981년) 대한민국의 서예가. 정치인. 호는 소전(素筌). 190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출생했다.
1925년 양정의숙을, 1929년에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고, 그해부터 1932년까지 중국의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에게서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소전체작품들
1930년 조선서화협회에서 특선, 1933년 조선 서도전 심사위원, 1934년 조선 서화협회 이사 및 동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45년 조선서화연구회 회장, 1947년 고향에 진도중학교를 설립, 이사장이 되었다. 1947년-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고 서울시 문화위원이 되었다. 1949년-1959년 국전 심사위원, 1954년 1960년 각각 제1대 및 제2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素筌 孫在馨의 승선암도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진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2년 한국미술가협회 이사와 5월문예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동년 예술원장 작품상을 수상했다. 1965년 예술인총연합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0년 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진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서예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드신 분이다. 이전에는 서도 혹은 서법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행서와 해서를 쓰다가, 이후에 예서와 전서를 쓰면서 독창적인 문체를 만들어냈다. '소전체'라고 하는 문체는 현재까지도 서예인들 사이에서 호평과 비판이 오가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은 "추사 이후로 한국 최고의 서예가"라고 칭송한다.[2]
손재형의 승설암도. 추사의 세한도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보통 서예가지만, 이분은 일본으로 반출된 세한도를 되찾아 오신 적이 있다. 일재시대에 추사의 세한도는 그를 신봉한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스카 지카시가 갖고 있었다. 지카시는 세한도를 제일 좋아했기에 돈을 줘도 팔지 않겠노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손재형이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와서 돌려달라고 요청을 하였다[4]. 결국 100일 동안 찾아와 요청을 하는 손재형의 끈기에 손을 든 후지스카는 세한도를 반환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후지스카의 집은 폭격을 당했고, 보관 중이던 추사의 서화와 유품 일부가 이때 소실되었다. 손재형이 아니면 현재 국보 180호인 세한도도 재가 되었을지 모른다.[5][6]
[1] 중국에서 최초로 갑골문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본좌급 학자다.
[2] 여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손재형에게 서예를 사사했는데 손재형을 직접 청와대로 초청하면서까지 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3] 세한도 외에 다른 추사의 서화나 유품을 갖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부가 불타고 나머지는 그의 아들이 한국 정부에 반환했다.
[4] 이게 정말 대단한 게, 이때 벌써 미군 폭격기가 이 동네에서 폭탄을 떨구고 다닐 시점이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죽을 것을 각오하고 찾아갔던 것이다.
[5] 그 후 손재형 선생은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맡겼는데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이고 현재는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
[6] 단 소유권은 손창근이 가지고 있음
秋史 歲寒圖
[정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에 그린 문인화.
[개설] 「세한도」(歲寒圖)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白眉)이다. 갈필(渴筆)과 검묵(儉墨)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인화로서, 제주도 유배 중에 그려졌다.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원악절도(遠惡絶島)라고 하는 제주도 유형지에서 힘겨운 유배 생활을 하던 1844년(헌종 10)에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에서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칭송하며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형태 및 구성] 종이에 먹으로 그려진 두루마리 형식이다. 그림이 그려진 화면 오른쪽에는 화제(畵題) ‘歲寒圖(「세한도」)’라고 가로로 쓰여 있고, 세로에 작은 글씨로 ‘藕船是賞(우선시상)’이라는 관지(款識)가 있으며, 正喜(정희), 阮堂(완당)이라는 圖印(도인)을 찍어놓았다.
그림 왼편으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는 이치에 빗대어,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여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귀양 오기 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귀양 온 뒤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그러나 귀양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일컬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귀양 온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음을 받을 만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내용의 발문을 그림 끝에 붙여놓았다.
그 뒤를 이어서 이상적이 이듬해 북경에 가서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그곳의 명사 16명의 찬시(讚詩)를 곁들어놓았다. 또한 훗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인 김석준(金奭準)의 찬(讚)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긴 두루마리에 적혀 있다.
[특징] 「세한도」는 거친 필묵만 단아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화면 중앙에서 무게 중심이 좌우 두 그루의 나무 가운데 소나무에 쏠려 있고, 그 소나무의 가지가 세월과 추위를 이기듯 강고하게 표현되었다.
갈필로 빠르게 그려진 집 한 채는 군더더기를 뺀 사의(寫意)가 집약된 표현인 듯하다. 여백의 배분 또한 세 개의 화면 분할로 이루어져 화면의 정적인 안정감이 높다. 절제되고 고아(高雅)한 서화 일치의 멋을 풍기는 「세한도」는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 일파의 서화 이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의의와 평가] 김정희 자신의 그림 솜씨와 문장, 그리고 여러 명사들의 시와 감상문이 어우러진 시·서·화의 품격이 전해지는 작품이자, 외롭고 고된 귀양살이에서도 단아하고 고고한 품위를 잃지 않았던 추사 자신의 사의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 감상
毅齎許百鍊筆盡地之利
盡地之利 지세의 잇점을 모두 이용한다. 요해처로서 지리의 잇점을 철저하게 이용한다는 뜻. 毅道人 : 毅齎許百鍊을 나타냄
화선지에 먹 가로 154, 세로 51
毅齎許百鍊 (1891~1977)
허백련의 본관은 陽川, 호는 毅齎, 전라남도 진도 출생 일제강점기 화단에 등장한 이후, 타계할 때까지 동양 수묵화의 전통을 지키면서 漢詩와 古典 畫論에 통달하고 書藝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 서, 화 겸전의 전형적 남종화가로서 호남 서화계의 상징적 거봉으로 추앙되었다. 행서체로 구사된 이 글씨는 힘 있는 필력이 느껴지며 毅道人이라는 낙관의 명칭은 작가가 스스로 밝혔듯이 正道를 걷고 싶은 마음에서 노자의 道德經을 본 따 道자를 사용한 것이다.
◎ 毅劑 許百鍊
남종화의 전통, 꿋꿋이 지켜온 의제 허백련 화백 |작성자 정의와 평화
의재 허백련은 한국 남화의 대가로, 화법은 소치에 그 뿌리가 있고, 형상보다 뜻을 더 중요시했으며, 화찬을 정한 후 붓을 들었는데, 이것은 문인화의 시, 서, 화 3절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와 서를 우위에 놓기 때문이며, 특히 의재의 산수에서는 밋밋한 황토산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전라도 산의 진경을 그린 것으로 1951년 이후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1891 전남 진도에서 출생, 호는 의재(毅齋).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3년을 수료하였으나 그림공부에 전념하여, 1935∼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수석입선으로 화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그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 서, 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회고전을 가졌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으며,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 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의제가 무등산에 기거하다 타계하기까지 30여년 동안 春雪軒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으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로, 남화의 개척자 의제 허백련이 그 화풍을 전수하며 후학들을 길렀던 곳으로 사시사철 차 향이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섞여 마르지 않는 곳이다.
의재는 이당 김은호를 비롯한 친구들이 서울에 올라와 조선미술관을 만들어 보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연진회를 생명처럼 아꼈다. 그는 항상 "그림을 그리는데 서울과 시골이 따로 있는가. 중국에서도 남종화는 강남지방에서 꽃피우지 않았는가?"라고 강조하며 이곳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수, 남화의 일가를 이루었다. 의제는 산 기슭에 차나무를 가꾸어 가공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늘 차의 생활화를 강조하며 차나무의 곧은 마음을 좋아했으며, 자녀의 결혼식 폐백도 술 대신 녹차를 이용했다.
차나무는 옮기면 죽는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했으면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며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다.
무등산 춘설헌 주인 의제와 찻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은상 시인은 다음과 같이 그 감회를 읊었다.
무등차의 고향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 내어 초의선사 다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출처] 남종화의 전통, 꿋꿋이 지켜온 의제 허백련 화백 |작성자 정의와 평화
普停金正會筆行書作品感想
普停 金正會 1903~1970
普停 金正會 先生은 고창 출신으로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의 후손이며 예술가이자 대유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고등교육 기관의 하나인 현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경학원(명륜 전문학원)에서 경학을 가르쳤다. 보통 때 그 분은 매화, 난초, 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특히 대나무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 대학자로써, 또 서예가로써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세인으로 하여금 항상 진한 묵향을 느끼게 한다. 현재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는 고조 때부터 살던 곳으로 1993년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작품 기증 : 진철우
[작품 해설] 龍能變化愁金翅용능변화수금시 용은 변화할 수 있지만 금시조(金翅鳥 가루라)를 근심하고, 虎亦猛雄畏火獅 호여맹웅외화사 범 또한 맹수 중 으뜸이나 불사자(火獅)를 두ㅓㅕ려워 한다. 凡物世間老有屈 범물세간노유굴 세간의 모든 물건은 노성하면 강해지니, 卑恭終作萬人師 비공종작만인사 자기를 낮추고 항상 공손히 하면 마침내는 만인의 스승이 되네.
보정 김정회 [상세정보] 성격 : 유학자, 서화가 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10-2 성별 : 남 생몰년대 : 1903~1970 본관 : 안동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고창 출신의 유학자이자 서화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립(中立), 호는 보정(普亭)이다. 190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10-2번지에서 태어났다.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회천(晦泉) 김재종(金在鍾)이다.
[활동사항] 김정회(金正會)는 어려서부터 종조할아버지 항재(恒齋) 김순묵(金純黙)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약관에 경사자집(經史子集)[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諸子), 문집(文集)의 네 부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 두루 통달하였다. 1929년 27세 때 한갓 시골 선비로 옛 것만을 고수하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지 않는 것은 시류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하여 29세 때 경학원(經學院), 즉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에 입학하여 청나라에서 수입된 학문을 익히면서 국내의 석학들과 밤낮으로 학문을 연마했다. 또한 당시 서화로 이름난 海岡 金圭鎭의 문하에서 글씨와 그림을 익혀 일가를 이루어 1938년 전일본문예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으며, 1940년 전일본국전(全日本國展)에서 「풍죽(風竹)」이 특선으로 입선되었다.
1934년 고향집 만수당(晩睡堂)에서 도산보통학교를 개교하였고, 다음해인 1935년 아버지가 희사한 대지에 새로 학교를 지어 그 곳으로 옮겼다. 1941년 39세 때 경학원 강사로 선임되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혼란한 정치상을 보고 다시 귀향하였다.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불러 전답을 나누어 주고 왕등도로 들어가 艮齋 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94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55년과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작품이 거듭 입선하였다. 1970년 68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연연당문고(淵淵堂文稿)』 10권이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普停 金正會 古家
위치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1길 16 (고창읍) 문화재 지정 :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9호(1993년 08월 13일 지정)
* 일제강점기 때 대학자의 고택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에 있는 김정회가 살았던 조선 후기 고택으로 일제강점기 때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보정 김정회(1903-1970)가 살던 옛 집이다.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학자이며, 예술가인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 1903∼1970)는 기우만(奇宇萬)에게 한학을 배우고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워 사군자를 잘 그렸는데, 그 중 난초와 대나무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 두터운 덕망을 갖춘 유학자 *
普停 金正會는 상류 사회 출신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덕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계도하였다. 타계한 후에도 사람들은 김정회의 두터운 덕망을 기리고 있다. 유학자로도 명성이 높아 고창 도산초교와 고창여중고를 설립하는데 사재를 지원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경학원(經學院)에서 경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정회 고가는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당 등 4동과 정자, 화장실 등 모두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용마루를 얹은 팔작지붕의 남향 건물로, 나중에 동, 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 잡고 있는 안채의 양식은 다른 집에 비하여 특이하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만수당(晩睡堂)’이라고 쓴 편액이 있다. 기단의 네 모퉁이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받기 위한 돌확이 놓여 있다.
* 조선 후기 상류계층의 가옥 형태 * 동쪽에 창문이 두 개 있다. 안채 서쪽으로는 ‘수정(水亭)’이라 쓰인 편액이 걸린 사각 정자가 있으며, 뒤뜰에 연못으로 보이는 웅덩이가 있다. 안채 뒤편의 복분자밭 너머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축대의 높이는 약 250㎝ 정도이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전형적인 상류 계층의 가옥 형태를 볼 수 있으며, 이중 용마루를 가진 팔작지붕, 홑처마, 그리고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 잡고 있는 안채의 가옥 양식이 일반적인 고가와 비교했을 때 색다르게 보인다.
一中金忠顯筆“唯德爲隣”作品感想
一中金忠顯筆唯德爲隣 [唯]오직 유, 비록~하더라도. [隣] 이웃 린, 돕다, 이웃하다. [덕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一中 金忠顯
생몰년대 : 1921년 ~ 2006년 대표작 : 유관순 기념비, 서도집성書道集成, 근역서보槿域書譜, 일중 김충현 서집 본관요약 1921~2006. 20세기에 활동하며 한글 서예의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서예가. 김충현은 서예가로, 한글 서예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초 김응현의 형이다.
[생애]
1921년 5월 9일(음력 4월 2일) 김윤동(金潤東)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경(恕卿), 호는 일중(一中)이다. 김창집(金昌集)의 6형제 중 막내 김창립(金昌立)의 후예로서, 증조부 김석진(金奭鎭)은 고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조부 김영한(金甯漢)은 광무연간에 용인 군수를 지내는 등 조선 후기 학예를 주도했던 안동 김씨 집안에서 가학을 이었다.
[활동사항]
경성 삼흥보통학교와 중동학교를 졸업했으며, 일가이자 조부의 절친이었던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1942년 중동학교 졸업 당시 한글 서예 학습서인 국문서법연구서(國文書法硏究書)를 완성한 이래로 한글 서예 보급에 남다른 성과를 보였다. 당시의 저술에서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가미하여 고안한 서체를 선보였는데,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일명 ‘고체(古體)’로 명명된 글씨였다. 궁중에서 쓰던 궁체(宮體)를 연구하여 한글 서예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1947년에 쓴 「유관순 기념비」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가 되었다.
경동공립중학교·경동고등학교 국어교사,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창립, 일중묵연(一中墨緣) 개설, 오산학교(梧山學校) 이사장 등을 통해 후진 양성을 하였고, 한국 서예가 협회장, 국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등을 역임하며 서단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2006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작품으로 「윤봉길 열사 기의비」(1949), 「백범 김구 선생 묘비」(1950), 「사육신 묘비」(1955),「4.19 혁명 기념탑」(1960), 「탑동공원 사적비」(1967), 「삼국통일 기념비」(1977), 「인촌 김성수 선생 묘비」(1989) 등이 있다. 저서로 『우리 글씨 쓰는 법』, 『우리 글씨체』, 『서도집성(書道集成)』, 『근역서보(槿域書譜)』, 『일중 김충현 서집(一中金忠顯書集)』 등이 있다
學汀 白洪基筆 “晝畊夜誦”作品 解說
화선지에 먹 1533 * 47 학정 백홍기 가. 학정 백홍기(1913~1990)는 1954년부터 국전에 입선하여 1969년에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고 1976년부터 초대작가가 되었으며, 1980년에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 하였다.
활달하고 힘이 넘치는 행초서와 대소강약의 조형적인 전서가 뛰어났으며 근대 전각예술에 일조 하였다. 인장에 제작자의 이름을 표시하는 행위는 明의 문팽(文彭 1498~1573)에서 비롯한다. 우리나라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이 근대 전각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후 현재의 전각예술에 디딤돌이 되었던 전각가들을 보면 석봉 고봉주, 이태익, 석불 정기호, 성재 김태석, 검여 유희강, 철농 이기우를 비롯해 학정 백홍기도 포함된다.
나. 학정 백홍기는 전주생으로 국전에 19회 입선했으며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작품은 상형적인 미를 가지고 있는 전서체에 변형을 가하여 조형미를 추구한 것으로 글씨에서 회화적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古筠 金玉均筆“回天正倫”作品 感想
諫言(웃 어른이나 임금에게 하는 충언)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는다. 화선지에 먹. 가로 143, 세로 52. 조선 말기의 정치가., 본관은 安東, 지는 伯溫, 호는 古筠, 또는 古愚, 충청도 공주 출신. 1872년(고종 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 정언 등을 지냈다. 1884년 12월 갑신정몆을 일으키고 새 내각을ㄹ 조직한 후, 호조 참판애 되어 국가의 재정권을 쥐었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김홍집의 건의로 죄가 용서되고, 순종 때 규장각 대제학으로 관위를 높여 주었다. 저서는 ‘갑신일록’ 등이 있다.
古筠 金玉均 알아보기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는 병력 부족으로 청나라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
본관은 장동(신 안동),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 망명 중에는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가명을 썼는데 갑신정변 실패 직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千歲丸)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란 가명도 사용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기도 하다.
芝雲 金綴洙筆“先從隈始”作品 感想
, < 선종외시 > 큰일을 하려면 먼저 작은 일에셔부터 시작한다. 화선지에 먹. 가로 144, 세로 48 隈 : 굽이 외. 물굽이, 낭떠러지.
芝雲 金綴洙
芝雲 金綴洙 선생은 저라북도 부안 출신. 이명은 銅再. 初峯, 昌律, 昌根. 191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재일본 유학생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916년 중국인들과 연계하여 新亞同盟團을 결성하고 한중 연합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하고 1926년 제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박헌영에 반대하다 물러나 1946년 여운형 선생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 1947년 이후 일체의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낙향하여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글씨는 그의 강직한 신념을 보여주는 듯 단정하게 정자로 쓰여졌다.
선생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47명 및 애국지사 214명과 함께 독립운동의 과업이 인정되어 200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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