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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임숙녀 전교사님이 쓰신 자서전 <조신부님과 임회장님>입니다. 두 분께서 마지막 봉사를 하셨던 게쎄마니 피정의 집을 지나면서 두 분이 생각났습니다. 두 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피정의 집에서 많은 추억을 떠올렸었지요.
2007년 1월 7일에 작고하신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생전에 이 글들을 제 홈페이지에 실어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서석성당 친구들 카페에도 소개합니다.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자신의 글이 자신을 돋보이려는 자랑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을까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취지를 헤아려주시면서 믿음 외의 목적으로 활용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임숙녀 전교사님께서 집필하셨으며, 조 필립보 신부님의 한국전쟁 회상기 '기나긴 겨울'에도 일부 인용된 바 있습니다. 저는 네이버 오픈 백과에 조 필립보 신부님이나 임 숙녀 전교사님 또는 서석천주교회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임숙녀 전교사님의 이 글을 토대로 하여 쓴 것입니다.
제가 네이버에 올린 글들이 여러 블로그나 카페 등에 옮겨진 것으로 보아서, 하느님께 평생을 봉헌한 두 분의 삶에 대해 감동을 느끼는 분이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옮겨간 것에 대해, 저로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 (이 글을 바탕으로 하여 쓴 저의 글과, 제 글을 옮겨 간 다른 게시판의 글 포함)에 대한 모든 권리는 임숙녀 전교사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997년 절약 정신을 실천하신 신부님
조신부님께서 무릎과 어깨의 관절이 편찮으셔서 한림대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물리치료실에서 치료를 하라는 진단이 내려서 그곳으로 갔다.
담당 박사는 카톨릭 신자로서 신부님과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물리 치료를 받기 위해 웃옷을 벗으시니 런닝셔츠가 너무 낡아 보였다. 오랫동안 입은 탓에 색도 변색되어 더럽고 추하게 보일 정도였다.
"신부님께 새 옷 좀 사드리시지 이게 뭡니까?"
박사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박사님이 신부님의 성품을 모르시고 실수하고 계시다고 생각했다.
신부님께서는 즉시 박사님께 말씀하셨다.
"이 런닝셔츠는 세탁한 것이기 때문에 냄새가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리 치료실에 있는 다른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나름대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다.
"신부님, 병원에 가실 때는 새 옷을 입고 가시면 좋겠어요."
돌아온 뒤 내가 말씀드렸더니 신부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박사 부자 정신입니다. 이 옷은 앞으로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요."
물리치료실의 박사 선생님은 조신부님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한 대에 25.000원 하는 주사를 열 대나 맞아야 했는데, 주사 값을 박사님이 담당하시겠다고까지 했다.
신부님께서는 이틀에 한 번씩 치료를 받으시고 주사를 맞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신부님께서는 병원에 가시지 않았다. 박사님이 직접 전화를 주시면서 치료를 받으러 오시라고 했지만 끝내 가지 않으셨다.
신부님께서는 낭비가 많은 우리들에게 몸소 절약 정신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 것이다.
1997년 8월, 힘겨워도 원칙을 지키시는 신부님
조신부님께서는 양 무릎, 양손, 양어깨의 관절이 부었다 내렸다 하면서 통증이 심해지셨다. 신부님의 주치의인 메리 수녀님은 "젊어서부터 심한 노동을 너무 많이 하시면서 관절을 쓰셨기 때문에 퇴행성관절염이 왔다."고 말씀하셨다.
1997년 8월, 서울 한양대 부속병원의 김성윤 박사의 진료 예약일이 되어서 서울로 가셨던 날의 일이었다. 내가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신부님께서는 두 사람의 여비도 염려하시고, 혹시 치료가 늦어져 당일에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셔서 혼자 다녀오시겠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오후 네 시에 진료를 마치신 신부님께서 동서울 버스 터미널로 오시니 차표가 매진되어 입석밖에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서서 오시게 되었다.
그 무렵은 휴가철이라 수도권에서 설악산 방향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 서서 가는 사람이나 앉은 사람의 수가 거의 같을 정도로 버스가 붐볐다고 한다. 서 계셔도 편히 기댈 수도 없을 정도로 대만원이었던 것이다. 편찮으신 어깨와 손으로 손잡이에 의지한 채 네 시간 반이나 서서 오셨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셨을까?
밤 열시에야 돌아오셨는데 너무 피곤하셨는지 성무일도 기도만 바치신 뒤 바로 주무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신부님은 걸어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 하셨다. 발등과 발바닥이 얼마나 부었는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심하게 부운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신부님이 외국인이라고 무시해서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은근히 화가 났다.
"신부님께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일어나면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맙지만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는 입석표를 약속했으니 서서 가야하고, 그 젊은이는 좌석을 맡았으니 앉아서 가야 합니다. 본 신부 때문에 긴 시간을 서서 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합니까?"
신부님의 대답이었다.
서울에 있는 신부님의 주치의 메리 수녀님께 전화를 드렸다. 신부님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약을 부탁드렸다. 병세가 악화된 원인까지 말씀드렸더니, 수녀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며 조용히 우시는 듯했다. 듣기를 마친 수녀님이 내게 물으셨다.
"손님 중에 자리를 양보한 분이 없었습니까?"
내가 신부님께서 자리를 사양한 연유를 말씀드렸더니 수녀님께서 말씀하셨다.
"신부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수녀님은 그러시면서 스스로 울음을 참으셨다. 그리고 우선 약을 속달로 보낸 뒤에 시간을 보아서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 후 신부님께서는 무릎 관절이 더욱 악화되어 무릎에서 물을 빼는 치료를 받으셨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의 삶을 사는 세상에서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몸은 망가지더라도 먼저 이웃을 생각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주어진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것, 그것이 신부님의 삶이었다.
한국에서의 이모저모
***고향으로 귀환***
(1998년 11월 12일)
사회에서 드리는 상
조신부님께서는 6·25 직후 홍천본당에서 사목하시면서 전쟁 고아 2명(남녀 1명씩)을 양육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사제관 옆에 방을 붙여서 그들을 기거하게 했다. 그들은 사제관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면서 홍천초등학교에서 홍천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 각기 직장을 잡아 나갔다.
신부님께서는 그외에도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물심양면의 도움을 주셨다. 그로 인해 홍천 경찰서 등 여러기관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신부님께서 청소년 선도 등에 끼친 공을 기리어 공로상을 주겠다고 초청했다. 신부님께서는 한 번도 가시지 않았다.
강원도지사, 홍천군수 등이 전쟁 이후로 빈민 구제와 환자 돌봄의 공이 크다며 시상 연락을 했지만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도청, 군청, 경찰서 등에는 조신부님의 공로상들이 쌓여 있다고 본당에서 신부님을 모셨던 한복사님이 말씀하셨다.
1970년 간성본당에서 사목하실 때의 일이다. 서울에 있는 호주대사관에서 대사의 비서가 전화를 했다. 신부님께서 외출 중이라 내가 전화를 받았다. 호주 대사관에서 어떤 행사를 하는데 필립 크로스비 신부님께서 대사님이 주는 상을 받게 되었으니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신부님이 돌아오신 뒤에 호주 대사님과 전화를 연결해 드렸다. 통화를 마치셨을 때 신부님께 상황을 여쭈어 보았다.
"상을 받으러 서울로 오라고 하는데 본 신부는 그런 상 받기가 부끄러우니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호주 대사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사님께서 크로스비 신부님(조신부님)을 방문하고자 하는데 괜찮은지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좋다고 하셨다.
그 때 속초 경찰서에서 고성 경찰서로 높은 분이 고성 쪽으로 갔다는 연락을 했다고 한다. 고성 경찰서는 비상이 걸렸다. 높은 분이 관할 구역을 무사히 지날 수 있도록 경호 준비를 했다.
호주 대사님이 탄 고급 차가 천주교회 정문에 들어설 때 성당 주변에는 경호에 임하는 경찰관들이 줄을 서 있었다. 대사 부부는 선물을 가득 싣고 오셨다. 신부님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겸손하신 분이시므로 만나보고 싶었고 인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경찰서 직원들은 높은 분이 시골에 오셔서 꼭 만나보고 가셔야 할 분이 천주교 신부님이라니, 조신부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성 경찰서 수사과장(천주교 신자)이 내게 들려준 말이다.
1997년 신남 게쎄마니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호주 대사관에서 비서가 전화를 했다. 신부님께서 ORBE 오스트레일리아 훈장을 받게 되었으니 서울 대사관으로 오시라는 것이다. 이 상은 호주 정부가 내리는 훈장이라고 했다. 신부님께서는 이 때도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사양하셨다.
훈장!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명예롭고 귀한 상이지만 신부님께서 사양하심으로써 훈장은 호주 정부로 되돌아갔다.
그 후 대사부부는 성인에 가까우신 조신부님을 만나 뵙기 위해 초행길의 고생을 무릅쓰고 게쎄마니까지 다녀가셨다.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들
조신부님께서는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나셨다. 다음은 신부님께 들은 그 시절의 회고담이다.
1950년 6·25 전쟁 때 남한 땅에 남아 있던 외국인들은 서울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천주교 관계 인사로는 구토마스 주교님, 방주교님, 조신부님 외 몇 분의 사제들과 수녀님들이 계셨다. 그밖에 프랑스 대사를 비롯하여 미국인, 일본인, 프랑스 인, 미국 선교사, 상인들 등 50여명의 외국인이 함께 갇혔다고 하셨다.
유치장에 있는 동안 식사는 하루 종일 꽁보리밥 1개가 전부였다. 그것을 주먹만하게 신문지에 싸서 넣어줄 뿐이고, 물도 조금밖에 주지 않아서 갈증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납치된 외국인들은 밤중에 기차에 올라 서울을 떠났다. 평양에 도착한 후 하룻밤을 자고 만포진에서 미군 포로들과 만나니 수용인원이 모두 750여명이 되었다. 신부님을 포함한 이들 750여명은 다시 압록강 부근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되었는데, 거기까지 160여km를 걸어야 했다.
극도로 지친 750여명 중에는 노인이나 환자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 포로의 대표자는 수송책임 장교에게 민간인 중 노인이나 환자를 트럭에 태워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그러자 장교는 호통을 쳤다고 한다.
"쓰러져 죽을 때까지 걸어가라!"
그로 인해 당시 포로들이 걸어간 코스에는 <죽음의 행진>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60km를 걸어가는 도중 이런저런 사유로 100여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중에는 쌀뚜르 바오로회 비야트레스(당시 70세) 수녀원장님이 계셨다. 그 분은 너무 고령이시어서 도무지 걷지를 못하셨다. 젊은 수녀가 부축을 했지만 자주 앉으시고 뒤떨어졌다. 그러자 인민군 장교가 수녀원장님을 산골짜기로 데리고 갔다. 인민군은 수녀님 을 총살하신 것이다.
수용소에 도착한 후, 인민군 책임자는 한 달 먹을 양식을 배급 주며 포로들 스스로 끓여 먹으라고 했다. 포로들은 자체 회의를 해서 50명씩 조를편성했다. 각 조에서 4명씩 당번이 되어 1주일씩 돌아가면서 취사를 담당하기로 했다. 양식은 가끔 옥수수나 흰콩을 주었으며, 주식이 좁쌀이었고, 쌀은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 부식은 소금과 배추를 주었고, 그나마 겨울에는 꽁꽁 언 배추였다고 한다.
한 달간 먹으라고 주는 양식은 너무도 부족했다. 하루에 세 번은 고사하고 두 번의 식사를 할 수 있는 날도 드물었다. 매일 한 번 정도의 깡조밥 1공기와 소금만 넣은 배추 국물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난방이나 취사용 나무는 산에 가서 베어다가 땠다. 수용 기간이 길어지자 인근에서는 나무를 구할 수 없으므로 점점 멀리 가야했다. 식수 역시 먼 곳에 가서 길어 와야 했다. 겨울이면 물이 얼어서 도끼로 얼음을 깨고 길어왔다고 한다.
조신부님은 당번이 아닌 날에도 매일 같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셨다. 높은 산에까지 올라가서 나무를 해서 운반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여러 번 일어났다고 하신다. 겨우 조밥 한 공기를 드시고 하루종일 중노동을 하셨으니 얼마나 힘들고 시장하셨을까.
그런 신부님을 보신 갈멜회 수녀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일을 하라고 창조하신 것 같다."
그 때 수용되었던 분들은 수녀님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시고 남자 분들이 모든 일들을 다 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자진해서 여성을 보호해 주었다.
수용 기간 동안 묵주는 다 빼앗겼으므로 손가락으로 묵주 기도를 하셨다. 감시병들은 5명 이상만 모여도 소리를 지르며 해산 시켰다. 그래서 기도도 각자 혼자서 드려야 했다.
항상 배고팠고, 헐벗어서 추위에 떨었다. 병에 걸려도 약이 없었다. 각종 사고나 영양실조 또는 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매일매일 늘어갔다. 3년 간의 억류 생활을 거치는 동안 750여명의 억류자 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250여명뿐이었다고 한다.
1953년 소련 수상 스탈린이 죽었다. 소련은 인심을 얻기 위하여 각 나라대사들에게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들이 있으면 알려달라. 그러면 석방시키겠다."라고 통보했다. 여러 절차를 거친 끝에 1953년 5월에 그 때까지 생존해 있던 250여명의 외국인들이그리던 고국으로 귀환되었다.
6·25 전쟁 때 납치되거나 포로로서 인민군에게 억류되어 3년간 생사를 같이 했던 250여명은 그 후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한 번씩 미국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신부님께도 초대장이 왔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가지 않으셨다.
"올해도 안 가십니까?"
초대장이 올 때마다 나는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다.
"물론 가고 싶지요. 옛친구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참아야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다.
"비행기 값이 없어서입니까?"
신부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래서 내가 권해보았다.
"제가 구해드릴 테니 다녀오십시오."
"휴가 때도 아닌데, 사목해야 할 본당 신부가 1주일씩이나 저 개인을 위해서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신부님의 모습이 더욱 존경스러웠다.
생사를 같이했던 친구들은 모임 때마다 오지 않으시는 신부님을 몹시 그리워했다. 모임에서는 신부님을 공식적으로 초대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1990년 모임 때는 초대장과 함께, 회원들이 모금한 비행기 왕복여비를 동봉했다.
그 때는 신부님께서 본당 사목에서 은퇴하시고 게쎄마니 기도의 집에 계실 때이다. 신부님께서는 석방된 지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모임에 참석하셨다. 그 동안 작고하신 분들도 있고, 연로해서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그래도 100여명의 회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거의 반세기만의 상봉이었다. 서로들 얼마나 반가우셨을까!
8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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