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g - Violin Concerto 'To the Memory of an Angel'
알반 베르그 - 바이올린 협주곡 '어느 천사의 회상
Alban Berg [1885 ~ 1935]
Arthur Grumiaux (violin)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Igor Markevitch (conductor)
전악장 연속듣기
1악장 Andante - Allegretto
2악장 Allegro - Adagio
Alban Berg 1885. 2. 9 오스트리아 빈 ~ 1935. 12. 24 오스트리아 빈.
오페라 룰루를 작곡하고 있던 베르그는 1935년 4월 22일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바 말러와 건축가인 Walter Gropius의 딸이자 작곡가가 깊이 아끼고 사랑했던 18세 소녀 Manon Gropius가 투병 끝에 사망했다는 부음이었다. 평소 작곡가는 그 소녀를 친딸같이 사랑했기에 꽃도 피우지 못하고 질병으로 사망한 소녀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베르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사실 마농의 죽음때문에 작곡된 것은 아니었다. 마농이 죽기 몇달 전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인 Louis Krasner로부터 바이올린 협주곡을 의뢰받았는데 12음 기법에 대해 연주자가 그렇게 공감하는 눈치도 아닌것 같고 비루투오적인 곡의 작곡도 그리 경험이 없었음으로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농의 죽음을 접한 후 이 곡을 마농을 위한 레퀴엠으로 헌정하겠다고 생걱하고 불과 4개월만에 작곡을 거의 마쳤다고 한다. Krasn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그는 "이 곡에 내가 당신보다 더 놀랐으며 너무나 많은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이 곡이 성공하리라 희망합니다.... 아니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기술했다. 소녀에 대한 추억과 명복을 기리기 위해 'To the memory of an angel' 이라는 부제를 붙였다고 한다.
이 곡은 베르그의 마지막 완성작으로 몇개월 후에 악성 종양으로 작곡가도 사망하고야 만다. Louis Krasner에 의해 1936년 4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 현대음악 축제에서 초연되는데 애초에 예정된 지휘자인 Anton Webern이 친구인 베르그의 죽음에 너무 충격을 받아 못하고 대신 Hermann Scherchen이 지휘했다고 한다.
2악장 구조인데 1악장은 몽환적이고 가끔은 밝은 분위기로 마농에 대한 감미롭고 즐거운 추억을 표현했다. 2악장은 가끔은 비통하고 조용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로 마농의 죽음을 애도하는 부분이다. 바흐의 코랄 선율이 인용되었다고 하는데 대단히 분위기가 묘하고 표현주의적이다.
바이올린 협주곡이지만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에서 분리된 솔로가 아니라 거의 오케스트라의 일부분이 되지만 대등한 위치로서 역할을 한다. 오케스트라도 단순 반주이기를 거부하는 것 역시 베토벤, 브람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솔로가 티가 안나 처음엔 잘 느껴지지 않지만 솔로 바이올린으로서 굉장히 어려운 곡이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튀지 않아야 하고, 그러면서 존재감이 있어야 하니 보통 공력이 요구되는 곡이 아니다.
Alban Berg 1885. 2. 9 오스트리아 빈 ~ 1935. 12. 24 오스트리아 빈.
무조성(無調性) 계열의 오스트리아 작곡가.
〈5개의 관현악적 노래 Five Orchestral Songs〉(1912)를 비롯한 관현악곡과 실내악, 가곡,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던 2곡의 오페라 〈보체크 Wozzeck〉(1925)·〈룰루 Lulu〉(1937) 등을 남겼다.
베르크는 연주를 위해 잠시 외국에 나가거나 매년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지방에 여름휴가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생 동안 거의 빈에서만 보냈다. 낭만주의에 이끌려 처음엔 문학을 전공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빈의 가정처럼 그의 집에서는 빈이 지니고 있던 일반적인 음악적 분위기에 걸맞게 자주 음악이 연주되고, 그것을 즐겼다. 베르크는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형제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작곡 공부를 했다. 100곡 이상의 가곡과 피아노 이중주곡을 작곡했는데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다. 1904년 9월 베르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났는데 이것이 베르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베르크는 아버지를 여의고 작곡 레슨을 받을 만한 돈조차 없었으나 쇤베르크가 이내 베르크의 재능을 인정하고 무료로 그를 가르쳐주었다. 쇤베르크가 보여준 음악적 가르침과 인간됨은 그후 6년간 베르크의 예술 성향을 결정했다.
쇤베르크에게 배우던 시절인 1907년 가을 베르크는 최초로 공개 연주회에서 피아노 소나타 작품 1(1908)을 연주했다. 이어 4곡의 가곡 작품 2(1909), 현악 4중주 작품 3(1910)을 선보였는데, 이들 작품에 젊은 베르크가 숭배하던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약간의 재산을 상속받은 베르크는 1911년 오스트리아 고위 관리의 딸인 헬레네 나호프스키와 결혼했다. 빈의 한 아파트에 정착해 빈의 지적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면서 죽을 때까지 음악에만 헌신했다. 현대 조각의 개척자인 아돌프 루스(1870~1933), 화가 오스카어 코코슈카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베르크는 작곡할 때 대부분 갑자기 떠오른 악상을 형식으로 옮기기까지 매우 느렷고 때로는 주저하기도 했다. 이처럼 까다롭고 완벽주의적인 작곡 방식 때문에 비교적 작품수는 적다. 1912년 베르크는 쇤베르크에게 배우던 시절부터 작곡하기 시작한 〈5개의 관현악적 노래〉 작품 4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친구이자 적이었던 빈의 괴짜 시인 페터 알텐베르크가 보낸 엽서의 글귀에서 영감을 받고 작곡한 것이다. 때로 선정적이기까지 했으며 일반 사회규범에 따르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던 이 글귀에 이끌린 베르크는 이를 자신의 과거 작곡방식보다 훨씬 덜 전통적인 음악의 배경으로써 이동했다. 그러나 1913년 3월 문학 음악 아카데미 소사이어티에서 이 노래들 중 2곡이 연주되었을 때는 연주자들이나 청중이 자유로이 참여함으로써 거의 소동이 벌어졌다.
천재 베르크의 최초의 극음악은 게오르크 뷔흐너의 인상적인 연극 〈보이체크 Woyzeck〉(1813~37)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극의 내용은 부정한 연인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가난한 노동자와 이처럼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음에도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 주변에서 노는 데 여념이 없다는 줄거리이다. 이 주제는 베르크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베르크가 'Wozzeck'라고 철자를 바꿔 부른 이 오페라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작곡이 지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베르크는 좋지 않은 건강상태로 국방부에서 일했다. 작곡이 시작되자 3막 25장이라는 엄청난 작업량이 그를 짓눌렀다. 1917년 대본은 그럭저럭 완성되었으나 음악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드디어 1921년 완성해 베르크는 젊은시절 빈에서 음악생활을 지배했던 작곡가 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에게 헌정했다.
〈보체크〉는 무조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이다. 이 작품은 또한 베르크가 오페라 형식으로 사회문제를 다룬 최초의 시도였다. 직접 각색한 오페라 대본의 대사를 검토해보면 베르크는 이 오페라에서 단순히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을 묘사하는 것 이상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이 주인공을 인간 실존의 상징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파사칼리아, 소나타 같은 전통적 음악형식과 대중음악으로부터의 발췌 음악, 농밀한 반음계주의, 극단적 무조성, 전통적 조성으로의 일시적 접근 등 다양한 양식의 시도들을 균형있게 배치했고, 이 모든 것들이 이 오페라를 심리적·극적 충격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쇤베르크의 초기 12음 곡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고 있지만, 12음 기법의 반음계를 사용한 주제를 출현시키기도 한다.
137회의 리허설을 거친 후 1925년 12월 14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 무대에서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로 그 전모를 드러냈다. 비평은 혹독했으며 〈도이체 차이퉁 Deutsche Zeitung〉지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 당시 가장 지배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극장을 떠나면서 나는 극장에 있다 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있다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반 베르크는 음악 사기꾼이며, 사회에 위험한 인물이다." 그러나 또다른 비평가는 이 음악을 "가엾고, 참담하며, 불분명하고 혼란스런, 보체크의 정신상태를 그린 것이다. 그것은 음향에 의한 투시이다"라고 했다.
이미 뛰어난 작곡가였던 베르크는 〈보체크〉를 완성하고 나서 실내악으로 방향을 돌렸다. 바이올린, 피아노, 13개의 목관악기를 위한 〈실내 협주곡 Chamber Concerto〉 작품 8은 쇤베르크 탄생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이어 또다른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대본을 물색했다. 독일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1864~1918)의 〈대지의 정령 Erdgeist〉과 〈판도라의 상자 Büchse der Pandora〉라는 2개의 희곡에서 오페라 〈룰루〉의 주인공을 따왔다. 이 작품은 별로 중단되지 않고 다음 7년 동안 작곡되었으나 3막의 관현악 편성은 베르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리드리히 체르하가 완성해 1979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음). 〈룰루〉는 완전히 12음 기법에 의한 곡으로 상징적이며 음악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법상 대단히 표현주의적이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베르크는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 스승 쇤베르크와는 달리 베르크와 동료 안톤 폰 베버른은 유대계가 아니었음에도 이들은 쇤베르크와 함께 대표적인 '타락한 예술가'로 단죄되었고, 독일에서는 갈수록 이들의 음악이 연주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미미한 반응밖에 얻을 수 없었던 베르크는 그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대표적인 관현악곡 작곡가로 명성이 높아졌고, 주요음악제에서 연주되었다.
베르크의 마지막 작품인 바이올린 협주곡은 특이한 사연을 거쳐 나오게 되었다. 1935년 미국의 바이올린 연주자 루이스 크래스너가 베르크에게 자신을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해달라고 위촉했다. 처음에 베르크는 여느때와 같이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알마 말러(당시에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의 18세 난 아름다운 딸 마농이 세상을 떠나자 이 작품을 일종의 진혼곡으로 작곡해 '한 천사를 추모하면서'라는 말로 바치고 싶어했다. 오스트리아령 케른텐에 있는 별장에 틀어박혀 열심히 작업에 몰두해 마침내 완성된 이 곡은 1936년 4월 크래스너가 바르셀로나에서 초연했다. 이 곡은 마농 그로피우스의 진혼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르크 자신의 진혼곡이 되고 말았다. 20세기 대표적인 바이올린 곡인 이 작품은 12음 기법과 다른 기법을 써서 음악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매우 개성있고 정서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1935년 베르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빈으로 돌아왔다. 오페라 〈룰루〉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12월 패혈증으로 입원해야 했다. 처음에는 호전되는 듯 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대단히 매력있는 외모를 지녔으며 품위있고 귀족적인 집안 출신으로 친구 관계에서나 편지에 나타난 성격은 대단히 관대했다. 아울러 제자들에게 스스로 자신들의 뜻에 따라 곡을 쓰도록 격려해주는 뛰어난 스승이기도 했다. 생전에 커다란 명예는 얻지 못했지만 죽은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20세기의 빈 악파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폰 베버른과 함께 전통을 부수고 진보적인 기법을 통달하여 전통과 개혁을 혼합한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베르크의 강렬하고 복잡한 작품은 광범위한 음악적 자료를 이용한 것이지만 몇몇 중요한 기법만을 주로 사용했다. 실질적으로는 전통적인 조성의 틀 안에 남아 있지만 조성이 모호한 복잡한 반음계적 표현주의를 사용했으며, 아울러 고전적인 음악 형식을 무조적 내용으로 재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특정 중심음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조성 구조를 버리고, 스승 쇤베르크가 만들어낸 12음 기법을 무조 음악 작곡방법으로 사용했다. 베르크는 새로운 매체를 매우 능숙하게 다루었으나 고전적인 유산을 없애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현대음악의 고전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말이다.
W. Reich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