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물편
2.11 정승공(政丞公)휘(諱)정응(鄭 膺)
공의 휘는 응(1216-1273년)이시고 정승공 파의 파조이시다, 공의 활동 연대는 고려 제23대 고종
(高宗)조로 당시 고려 조정은 원(元)의 침공의 거국적(擧國的)으로 항전(抗戰)하던 비상시국
(非常時局)이었다, 원(元)은 인류사상(人類史上) 유례(類例)가 없는 초강대국(超强大國)으로
아시아 대륙의 태반은 물론, 유럽 대륙의 일부를 병탄(倂呑)하여지만, 등하불명(燈下不明)으로
고려와 일본은 그들의 지근지처의 거리에 있음에도 정복하지 못하였거니와 유럽 대륙에의 침략
(侵略)이 일단락 되자 눈을 안으로 돌려 고려를 침략하여 왔다, 그들이 노리는 바는 고려를 정복
(征服)하여 이를 교두보(橋頭堡)로 삼아 일본열도(日本列島)를 힘 안들이고 수중(手中)에 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18년(1231년) 철례탑이 이끄는 대군이 질풍(疾風)같이 침입하였지
만 고려 특유의 용감성(勇敢性)과 기백(氣魄)으로 물리치니, 이듬해(1232년)에 다시 침입함으로
고려는 개경(開京)에서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여 끈질기게 항전하였다,
그것은 몽고군은 육전(陸戰)에는 능(能)하나 해전(海戰)에는 경험이없어 약한단점을 이용함이었다,
그리하여 고종 46년(1259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침입한 몽고군을 번번히 방어 하였고, 사령관인
철례탑(撤禮塔)이나 차라대(車羅大)가 고려군에 의하여 사살(射殺)되거나 폭사(爆死)하는 등의
막대한 손실을 입은 바 이었다,
근년에 추심(推尋)한 문헌(文獻)에 의하면 공은 고종3년 병자(1216년)생으로 등과(登科)하여 당시
조정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인 김방경(金方慶)장군과 친교(親交)하셨다고 안동김씨 세보에 기록
되고 있다,
구보(舊譜)에 덕종조(德宗朝)에 사관(仕官)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5세손인 묵은공(默隱公-熙)과
의 년조 차이에 착안한 후손들에 의한 착오임이 확인되어, 정확한 년조를 찾기 위하여 부심(腐心)
하던중 고려환관록(高麗宦官錄)에서 생년과 등과년도, 임인년사(壬寅年史)등에서 추심(推尋)되었다,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는 진(稹)이 고종(高宗)과는 동서지간(同壻之間)이고, 원종(元宗)의
이모부(姨母夫)가 되기 때문에 내린 호(號)에 연유(緣由)된 것이다,
(거제도 사고의 규장각 서류)
년조 착오은 덕종이 임신(壬申)에 즉위하여 갑술(甲戌)에 승하하니 재위(在位)는 3년이요, 그 후
백팔십년 후인 고종 원년이 갑술년인데 여기서 오류가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종(元宗) 계유(癸酉 1273)에 향년 58세에 별세 하셨다,
공의 위계(位階)와 관직(官職)은 실직(實職)이 아니고 증직(贈職)인 것 같으며, 따라서 계. 사. 직
(階 . 司 . 職)이 맞지 않고 증직 위계 순서도 맞지 않다,
이는 공이 1216년에 태어나시어 1273년에 별세하셨는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는 1060년
(문종 14년)에서 1275년(충렬 1)까지 종 2품 이었다가 1356년(공민 5)에서 1362년(공민 11)까지
종 1품이었으나, 이 때는 시중(侍中)이나 정승(政丞)은 의동삼사(儀同三司)거나 삼중대광
(三重大匡)으로 정 1품이었다,
그리고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는 1293년부터 실시한 관부(官府)이고, 좌우정승(左右政丞)은
1330년후부터 두었던 관직이므로, 위계는 공이 생존(生存)해 계실 때 있었던 것으로 가(可)
하다고 할수 있어나, 사 , 직은 공의 사후(死後)에 실시한 제도이기 때문에 공의 관직은 실직이
아님을 알수 있고, 계. 사. 직은 금자광록대부는 종 2품(종1 품)이고, 도첨의좌정승154)은
종 1품(정 1품)이며 태자첨사(太子詹事)155)는 종 3품이라 당시의 증직 관제에 맞지 않다,
※ 예(例) ; 김방경(金方慶, 1212-1300년)증직 삼중대광(정 1품),
첨의중찬(僉議中贊-정 1품).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정 1품),
세자사(世子師-정 1품),
가첨의령(加僉議令-정 1품),
공의 손자이신 하천군(河川君) 휘(諱) 계(綮)의 공(功)으로 증직되셨다면156) 금자광록대부157)
평장사(정 2품)가 하천군의 위계니까 하천군의 부(父)이신 성(晠) 자(字)는 정 3품 은청광록대부
(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가(可)한 것 같은데 조부(祖父)이신 응(膺) 자(字)는
하천군보다 높은 정 1품 정승이라는 것은 증직위계 순서에 맞지 않는다,
미루어 생각컨데 종 3품인 광록대부(光祿大夫) 상서좌승(尙書左丞)을 후세 사람들이 위계에
금자(金紫)를 붙이고 좌승(左丞)을 좌정승(左政丞)158)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 응(膺) ; 태자첨사(太子詹事, 종 3품), 광록대부(光祿大夫, 종 3품), 좌승(佐丞, 종 3품)
※ 지족당(悏-협, 1642년생)공이 정승공파 초보(初譜)인 기사보(己巳譜) 1689년(숙종 15) 서문과
동관 석의전을 쓰셨는데, 공은 정승공(政丞公) 응(膺)을 첨사공(詹事公)이라 하였음,
※ 금자 광록 대부(金紫 光祿 大夫) ; 고려 문관의 위계로서 1060년(11대 문종 14년)부터 종 2품관
으로 정하였으며, 1275년(충렬왕 1년)에는 광정 대부(匡靖大夫)로 개칭하였다가, 1356년(공민
왕 5년)에 종 1품 上 을 금자광록대부로 칭하였다,
※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 ; 1293년(충렬왕 19년)에 개칭한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으뜸
벼슬로 품계는 종 1품임,
※ 검교 ; 고려말과 조선초에 정원 이외에 임시로 증원한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에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이는 말,
태자궁 첨사(太子宮詹事) ; 고려 때 태자궁의 종 3품 벼슬,
154) 1362년 2월부터 그 다음해까지 있었던 관직임,
155) 태자첨사는 진(稹-복야공)이 고종(高宗-고려 23대 王)과는 동서지간(同壻之間)이고 원종(元宗-고려 24대
王)의 이모부(姨母夫)가 되기 때문에 원종이 내린 호(號)에 연유된 것이다,
156) 988년부터 상참관(常參官) 이상의 부조(父祖)를 증직 하였는데 1대(代)를 으를때마다 1품계씩 감계 하였음,
157) 하천군은 1309년에 봉군 되셨는데 그 때는 이 위계가 없었음,
158) 승(丞)자가 정승 승(丞)자 이므로,
1. 응(膺)공에 대한 기록 원문(原文)
1) 발원설. 고려개국초 하동지방의 장으로 민병을 주관하던 사족의 후손
「高麗開國初 河東地方의 長으로 民兵을 主管하던 士族의 後孫」
2) 1635년 을해보(乙亥譜) 삼정동관전(三鄭同貫傳) 차서(次書)
일파즉 호장 정득신지자 응 등제 기가위검교태자첨사 전자성
「一派則 戶長 鄭得臣之子 膺 登第 起家爲檢校太子宮詹事 傳子晠」
3) 1866년 병인보(丙寅譜) 정승공파(政丞公派)
진 득신 후 기록 이상사적재동사급 경주정씨보 정승공휘 응파계 소상왈지상십일대손
유 휘초 시문경 우각 시대부합 연 난감 천질이 정승공 위중시조 고사일후
「稹 得臣 後 記錄 以上事蹟載東史及 慶州鄭氏譜 政丞公諱 膺派系 昭詳曰之祥十一代孫
有 諱招 諡文景 尤覺 時代符合 然 難敢 擅質以 政丞公 爲中始祖 姑俟日後」
4) 거제도 사고 보관 규장각 문헌 정승공 출생 년대 시정 경위
「서기 1216년 3월生 1273년卒 서기 1273년 10월 송함순 9년(宋咸淳 九年)이요 원(元)나라
지원 10년(至元 十年)이다,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는 진(稹)이고종(高宗)과는 동서지간
(同壻之間)이요 원종(元宗)의 이모부(姨母夫)가 되기때문에 내린 호(號)에 연유(緣由)된
것이다,」
2. 하동정씨 응(膺)공파의 발원설과 제 기록 종합 결론.
1998년 3월 15일 한국문화연구소 전통예의 실천 국민운동본부에서, 발행자 안영도(安永徒)
감수자 한갑수(韓甲洙) 정주영(鄭周永)외 4명이 발행한 성보(姓譜)와 정윤식(鄭潤植),
정환상(鄭煥常) 부자(父子)가 공저(共著)한 하정 삼시조 전고에 의하면 응파의 발원설은
「고려 개국초에 하동지방의 장(長)으로 민병(民兵)을 주관하던 사족(士族)의 후손이다」하여,
도정(道正)공을 시조로 모신 밀직공파의 발원설 「삼국지계인(三國之季人)으로하동호장
(戶長)을 지내면서 수위본관(遂爲本貫)하고 단련향병(團練鄕兵)으로 고려에 귀부한 후
향리지족(鄕吏之族)으로 범공거 역시시제사족언(凡貢擧歷試視諸士族焉)」한
도정공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으며, 그리고 1636년 손위(遜位)공의 15세손인 고암공 입(雴)이
81세에 쓴 삼정동관전(三鄭同貫傳)에서 응공의 대하여 기록하기를 ※ 河東鄭氏族譜 鄭 雴書
호장 정득신지자 응 등제 기가 위 검교 태자첨사
戶長 鄭得臣之子 膺 登第 起家 爲 檢校 太子詹事 라 하였는데,
이는 호장을 지낸 정득신의 아들 응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일어키고 검교 태자첨사라는
고려 말 태자궁의 종 3품 명예직의 관작을 받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응공은 득신공의
아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득신공의 상계(上系)는 어디인가?
1967년에서 1972년 사이 응공의 24세손인 창모(昌模)라는 분이 노산 이은상(李殷相)씨를 수행
하여 거제도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규장각(奎章閣) 문헌 중 고려와 조선조 사료(史料)
등을 열람하던 가운데 규장각 부제학 정봉서에게 요청하여 초(草)하여온 응공의 출생연대
시정 경위를 보면 서기 1216년생으로, 고려 고종 3년 병자년이고 송(宋)영종 가정9년이며
단기 3549년 생이다,
졸년은 1273년 10월 송(宋)함순 9년, 원(元)지원 10년에 다음과 같은 작호(爵號)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자첨사는 진(稹-복야공)이 고종과는 동서지간이고 원종은 이모부가 되기 때문에 내린 호
(號)에 연유된 것이다, 하여 공은 음서(蔭敍-조상의 음덕으로 관직을 받는 일)로 관직을 받은
것으로 봐서 복야공(稹)의 후손임이 확실하다,
1866년 공과의 병인보(丙寅譜) 정씨구계(鄭氏舊系)에 응공의 기록을 보면 복야공 후 득신공의
아들 난에 난감천질이 정승공 위 중시조 고사일후(難敢 擅質以 政丞公 爲中始祖 姑俟日後)라
하였는데 이는 득신공의 아들 정승공의 근본을 잘 알수가 없어 임의자전(任意自專) 즉 마음대
로 천단(擅斷)하기가 난감하므로 중시조로 모시는 것은 아직 후일 을 기다려야겠다고 하여 본
파에서는 1866년까지 응공의 바탕을 잘 모른다 하여 중시조로 모시는 것도 난감하다 하였는데
어찌 1800년에 간한 경신보 서문, 그것도 자기네 선조가 쓴(덕필 서-德弼 序) 삼한 발원설은
믿지 않고, 또 해석도 자기네 종파(宗派)인 보성공파에서 해석한 것을 무시하고 타성(他姓)인
송환기가 쓴 기록을 잘못해석해 놓고 응공을 하동정씨 시조라고 고집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다,
※ 상기의 입증 기록으로 봐서 복야공 진(稹)의 아들은 득신(得臣)공이고, 득신공의 아들은 응(膺)공임이 확실하다,
2.13 부사공(副使公) 휘(諱) 정성(鄭 晠)
공의 휘는 성(1235-1301)이시고, 정승공의 아들이시다, 고종 22년 을미(乙未, 1235년생이시며,
등과년조는 실전(失傳)이며, 문헌에는 원종(元宗) 11년 경오(庚午 1270년)에 추밀원 부사로 송(宋)
나라에 가시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8월에 귀국하셨는데, 송에서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를
받으셨다 한다, 충렬왕(忠烈王)20년 신축(辛丑 1301)에 별세하시니 향년66세이시다, 추밀원은
원래의 중추원(中樞院)인데 현종(顯宗) 1년(1095)에 개칭한 관부(官府)로 충렬왕24년(1298)에
밀직사(密直司)로 개칭한 왕명(王命)의 출납과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당시의 고려 조정은 원(元)의 내정간섭(內政干涉)으로 문무(文武)의 여러 제도까지도 개정해야
하는 난국(難局)이었다,
2. 16 하천군(河川君) 휘(諱) 정계(鄭 綮)
공의 휘는 계(1257-1327)로 정승공의 손자이시다, 고종 44년 정사(丁巳, 1257)생이시고 등과년조는
실전이나 충선왕(忠宣王) 1년 기유(己酉, 1309) 9월에 하천군(河川君)에 봉군(封君)되셨어며, 배위
(配位) 군대부인(郡大夫人)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충성군(忠誠君) 성비(成庇)공의 여(女)이신데,
문화유씨 세보에 의하면 1녀 유간(柳玕)은 검교첨의(檢校僉議)요, 2녀 이근(李根)은 낭장(郎將)
이며, 3녀 민시(閔時)는 중랑장(中郞將)에, 4녀 정계(鄭綮)는 하천군(河川君)이며 5녀 허윤당
(許允當)은 판서(判書)라 기록되고 있다,
군호(君號)만 기재되고 직위(職位)는 없으니, 당시만 해도 봉군(封君)이 최고의 영예로 여겼음을
알수있다, 졸년은 충숙왕(忠肅王) 9년 임술(壬戌)로 향년이 71세이시다,
출처; 하동정씨 세적실록 2008년인쇄본
雲鶴 炳逸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