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년도 | 유 럽 | 아시아 | 아프리카 | 아메리카 | 호 주 | 총계 |
1992 | 132 | 10 |
| 99 | 1 | 242 |
1993 | 161 | 19 | 1 | 144 | 3 | 328 |
1994 | 208 | 23 | 2 | 166 | 3 | 402 |
1995 | 336 | 23 | 6 | 184 | 5 | 554 |
1996 | 430 | 32 | 14 | 220 | 7 | 703 |
1997 | 448 | 37 | 11 | 244 | 7 | 747 |
1998 | 477 | 35 | 15 | 220 | 7 | 754 |
1999 | 478 | 36 | 11 | 221 | 15 | 761 |
2000 | 469 | 38 | 13 | 217 | 15 | 752 |
2001 | 481 | 40 | 9 | 224 | 15 | 769 |
2002 | 486 | 47 | 9 | 230 | 6 | 778 |
2003 | 469 | 42 | 9 | 269 | 8 | 797 |
2004 | 455 | 42 | 4 | 250 | 5 | 756 |
2005 | 458 | 33 | 1 | 241 | 2 | 735 |
공유경제를 통해 도움을 받은 전 세계의 빈곤자들을 살펴보면 유럽에 14%, 아시아에 20% 아프리카에 19%, 아메리카에 32% 그리고 그 외의 협력자들에게 15%이다. 공유경제에서 빈곤층이 사용한 총금액을 분야별로 살펴보면 음식비로 49%, 장학금으로 20%, 치료비로 17%, 거주비로 11%, 그 기타 3%이다. '새로운 사람들' 양성을 목적으로 기업들이 보내는 금액의 50%는 양성 교육 운영과 필요한 재료들을 마련하는데 쓰였다.
표-10은 ‘공유경제’ 사업체 분야별 현황이다. 상업분야에서는 의류, 식품, 가구, 자동차 서적, 교육재, 의료재, 기타재 등 8개 분야에서 148개의 사업체가 있고, 생산분야에서는 의류, 농산물, 수공업, 식품, 가구, 농자재, 건축재, 인쇄, 기계, 플라스틱, 비데오, 기타 등 12개 분야에서 188개의 사업체가 있고, 서비스 분야에서도 전문 상당, 회계, 사진, 부동산업, 일반 안내, 변호사, 관리사, 의사, 기획사, 쉼터, 학원, 전화국, 전기, 전자, 운송, 여행업, 기타 등 17개 분야에서 366개의 사업체가 있어서 총 735개의 사업체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다방면에서 공유경제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10 ‘공유경제’ 사업체 분야별 현황(세계 ‘공유경제’사무국 제공)
상업 분야 | 생산 분야 | 서비스 분야 | 종합 분야 | ||||
종류 | 개수 | 종류 | 개수 | 종류 | 개수 | 종류 | 개수 |
의류 | 23 | 의류 | 18 | 전문상담 | 88 |
| 33 |
식품 | 25 | 농산물 | 24 | 회계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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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 10 | 수공업 | 3 | 사진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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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 4 | 식품 | 33 | 부동산업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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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 9 | 가구 | 17 | 일반안내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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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재 | 3 | 농자재 | 24 | 변호사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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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재 | 16 | 건축재 | 25 | 관리사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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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재 | 58 | 인쇄 | 7 | 의사 |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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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 | 15 | 기획사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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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스틱 | 7 | 쉼터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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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데오 | 4 | 학원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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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7 | 전화국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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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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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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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송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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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업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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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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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분야 | 148 | 생산분야 | 188 | 서비스 분야 | 366 | 총 계 | 735 |
1.3. 공유경제의 목표
‘공유경제’는 가난을 제거하여 평온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공유경제’의 목표는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가급적 감소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 원리는 경제영역에서의 창조성, 생산에서의 책임감, 사유재산, 시장경제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적 나눔을 경제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주는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주는 문화’는 각 사람과 회사들이 철저히 자신들에게 필수적인 것들만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윤은 거지에게 동냥하는 것처럼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재물을 공유하고 있다가 사회 보조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이익은 기업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내놓고 기금을 조성한다. 이익을 공동으로 출연하여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공동으로 내어 놓은 이익금은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첫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사용한다. 그 이익금은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한다.
두 번째는 이익금을 자신들의 회사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용한다. 만일 회사가 도산한다면 일터를 잃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익금을 ‘공유경제’의 원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만일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공유경제’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새로운 사람들’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한 ‘소도시’가 요청된다. 또한 이런 ‘소도시’는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제반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소도시’는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경제활동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유경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이 활동은 인간이 이윤이나 물질에 의하여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윤이나 물질을 지배하고 상호간에 봉사할 수 있도록 이윤이나 물질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출연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 내지 기부’를 통하여 세상의 재화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재화를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아버지로서, 부유한 자본가나 가난한 노동자를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재화와 개개인이 가진 정신적인 재능, 기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온 영적인 모든 은총들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물적이며 영적인 보화를 모든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베푸신다. 따라서 자연의 재화와 은총의 보화는 모두 하느님이 주신 인류 공동의 유산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유경제’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경제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공유하도록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에 대한 공유는 ‘공유경제’의 최종 목적이며, 공동선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공유경제’의 개념은 재산의 공유가 도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기업체 내에서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면서 이윤을 얻도록 하라는 요청이다. ‘공유경제’는 ‘인간을 위한 경제 만들기’를 목표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경제’의 원리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인간을 위한 경제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것이다. ‘공유경제’의 원리로 운영되는 기업들은 모든 활동에 있어서 인간에게 필요하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들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려고 하며, 그들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관심을 두고 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장 안에서 활동하며 외형적으로는 여타의 다른 기업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유경제’의 목표인 ‘인간을 위한 경제 만들기’를 위하여 그들의 모든 경제활동을 공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유경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재산, 능력 등을 서로 나누기를 희망하면서,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제활동의 사례에서 많은 경우 사회 계층 간 또는 이익 집단 간에 갈등 관계가 형성되기 쉽다. 그러나 ‘공유원리’에 따라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반목하는 관계를 지양한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한 마음과 정신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공유경제’의 기업들은 서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때 이익의 일부를 할애하여 긴급한 필요를 도와주며, 기업내부의 인간관계에서는 물론 소비자, 경쟁기업, 납품업자, 지역 공동체 등과도 신뢰의 관계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 기업들은 ‘주는 문화’, ‘평화의 문화’, 법률을 준수하는 문화, 그리고 기업의 안과 밖의 환경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문화를 창출하고 확산시키고 있다.
이렇게 ‘공유경제’는 ‘인간을 위한 경제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행전 4, 34)고 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과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장차 ‘공유경제’의 원리로 운영되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그 만큼 빈곤 없는 세계가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이 ‘공유경제’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세상이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경제체제 앞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 이 시대에 대안으로 내놓아야 할 합당하고 심오한 경제원리라고 할 수 있다.
1.4. 공유경제의 특성
‘공유경제’의 성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⑴ ‘공유경제’는 주는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주는 문화’의 의미는 ‘소유 문화’에 바탕을 둔 소비주의 경제와는 전혀 다르다. ‘주는 문화’란 누가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나 내어 주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사랑 안에서 남에게 내어주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실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구는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들 존재의 가장 깊숙한 마음속에 있다.
‘공유경제’는 단순히 박애심이나 인류애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따른 인간의 주체성과 목적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공유경제’는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며, 브라질, 남미, 유럽 등의 여러 지역에서 실천적인 경험들이 확산되고 보편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공유경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원리에 따라 살아갈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양성했을 때 가능할 것이다.
⑵ ‘공유경제’에 참여하는 기업은 일반 기업들의 경영방식과 다르다. ‘공유경제’의 기업들은 주식회사이든 협동조합이든 그 외형에 있어 종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관습적 경영방식과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유경제’ 기업들은 법률을 엄격히 준수하고 노동자의 권리는 물론 소비자, 경쟁기업, 사회, 국가 그리고 환경의 권리를 존중하는 가운데 그들의 생산 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도록 한다든지, 효율적 경영을 통하여 스스로 이윤을 증식할 뿐 아니라, 이익의 많은 부분을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또는 빈곤한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유경제’는 모든 경제 주체들과의 연대와 나눔을 통하여 효율성을 제고하려한다. 그러한 기업들은 인간 존엄성과 인류 공동체를 존중하는 가운데 자본을 축적하고 이윤의 증대를 도모하는 경영방식을 취한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⑶ ‘공유경제’에 참여하는 기업은 고용주와 피고용자들 사이에 긴밀한 일치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치 안에서 기업의 내부와 외부에 긍정적인 상호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기업 활동에 있어 인간관계는 모든 경영활동에서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공유경제’의 기업들은 노사 간의 화해와 일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창의력 증진, 생산기법 및 기술혁신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하여 비용절감과 높은 효율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⑷ ‘공유경제’는 무미건조한 물질생활을 역동적이고 도덕적인 경제생활로 전환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일용품, 식품, 서비스 등과 대면하고, 교환 수단인 돈과 관계하면서 물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예속되는 경향을 갖는다. 이런 태도와 자세는 타인을 늘 부정적 경쟁자로서 보거나 제거되어야 할 상대로 간주한다. 그러나 ‘공유경제’에 참여하는 기업의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은 현대 경제학의 원리나 관행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문화의 원리에 의해서 경제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곧 소유 문화가 아닌 공유의 원리에 의한 경제활동이다. 자신의 소유 재물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한 표현이다. ‘주는 문화’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이라는 개념이 아닌 공유의 개념이다. ‘주는 문화’는 개인주의에서 유래한 자선사업의 형태나 복지 분배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공유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선이다. 인간은 지상에 존재하는 만물의 중심이고 정점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가치는 모든 물질세계를 초월한다. 인간의 가치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존재가치에서 나온다. 세상의 어떠한 가치도 인격 그 자체인 인간의 가치를 능가하지 못한다. 주는 삶의 선택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공유하려는 태도이다.
⑸ 내어주는 모든 행위가 ‘주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욕심으로 줄 수도 있고, 주는 행위를 통하여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실상 그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이기적인 표현이며 받는 사람에게는 모욕과 멸시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을 기회주의적으로 또는 편의주의적으로 이용하려는 행태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나눔이란 상호간에 깊은 존경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공유경제’는 개인적인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정당한 배분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고유한 인간적 가능성을 계발시켜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와주고, 그들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 향상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공유의 원리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약간의 자선행위를 통해서 빈곤한 사람들을 단순히 돕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업 전체의 이익을 공동으로 자유롭게 내어놓는 삶을 구현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구체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공유경제’의 근본적인 목적은 보다 전인적 복지의 차원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데 있다. ‘공유경제’는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소유 문화’에 대응하여 ‘주는 문화’ 곧 사랑의 문화를 확립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유경제’는 주는 삶에 바탕을 두며, 그러한 삶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공유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보다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계가 보장될 것이다. ‘공유경제’는 모든 노동과 경제활동의 결실을 함께 일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생산성 있는 기업체를 설립하며,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자신의 기업에만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한다든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공유경제’는 이익을 축적하기보다는 자신의 경제활동을 ‘주는 문화’에 중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이 강제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한다는데 ‘공유경제’의 의의가 있다. ‘공유경제’는 경제 주체들이 시장경제 질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경제활동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공유경제’에서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이라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공유경제’에 대한 제안은 곧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의 초청이다. 그러한 선택은 곧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의 선택은 기업 경영에 있어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유경제’는 기존의 경제와는 출발과 그 과정이 대단히 상이하다.
1.5. 연구 동향
뜻있는 일부 경제학자들이 ‘공유경제’의 원리가 오늘날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제이론의 근본적 바탕인 개인주의적 구조를 탈피하여 주도적 공헌을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개인주의적 구조들은 사회 경제적 생활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공유경제’에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참여하여 그들이 ‘공유경제’의 이론적이고 실질적인 적용을 시도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공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 사상을 가진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많은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발표된 경제학적 논문들은 ‘공유경제’에 대한 새로운 사상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공유경제’가 대두된 이후 1993년에 2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이태리 말따 대학에서 “나눔의 경제와 사업체 안에서의 적용에 관한 논문”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공유경제’는 나눔의 경제이며 나눔의 경제인 ‘공유경제’를 어떻게 사업체 안에서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독일에서 베아테 노박(Nowak Beate)이 “실질적인 업무 안에서 '공유경제개념'에 따른 대안”(Konzeptionelle Ideen gemaess der Idee ‘Die Wirtschaft der Gemeinschaft’ anhand der Arbeit in der Praxis)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4년에는 6편, 1995년에는 5편, 1996년에는 7편, 1997년에는 18편, 1998년에는 15편, 1999년에는 15편, 2000년에는 21편, 2001년에는 14편, 2002년에는 32편, 2003년에는 34편, 2004년에는 35편, 2005년에는 27편, 2006년 8월까지 7편 등 세계 공유경제 사무국에 집계된 논문은 총 238편이다.
영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권에서 발표된 이 논문들은 현대 경제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진정한 경제활동이 되도록 해야 하며, ‘공유경제’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유경제’는 기존의 경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원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공유경제’를 올바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대 경제학의 틀 안에서 ‘공유경제’의 적용과 실행을 상세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경제 이론들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선택된 이유가 아니라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다. 즉 그것은 가치와 동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 대하여 ‘공유경제’는 인간 상호관계와 구성원간의 동기 유발에 대한 질적 가치에 우선권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공유원리를 따라 전개되는 경제활동들은 기존의 경제활동과는 상이할 수밖에 없다. ‘공유경제’는 필연적으로 사업이나 생산의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모든 면에서 중요시된다.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다. 기업가들이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어떤 상품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구매자들 까지도 ‘공유경제’의 정착을 위해 초대받고 있다.
또한 ‘공유경제’는 일반적인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도 연구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환전(換錢)관리에 관한 법 등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저개발지역에 있는 회사를 돕기 위해 한 국가에 있는 회사가 다른 국가에 있는 회사로 자금을 보낼 필요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경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설득하기 위하여 경제 전문가들의 연구가 요청된다. 경제 전문가들은 ‘공유경제’에 대한 직감, 희망, 예상, 분석에 의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1년도에 세계 ‘공유경제’ 사무국에서는 이태리 로카 디 빠빠(Rocca Di Papa)에서 ‘공유경제’ 탄생 10주년을 맞이하여 ‘공유경제’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에서는 소유 문화에 기초를 둔 소비주의 경제와는 달리 ‘공유경제’는 함께 소유물을 나누는 문화에 바탕을 둔 경제임을 강조하였다.
‘공유경제’는 어렵고 험난하며 영웅적인 행위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내어주고, 사랑하는 것에서 자아실현을 이루기 때문에 ‘나눔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의무에 속한다. 특히 각 개인의 인격은 남들에게 개방적이며 동시에 남에게 선물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발전한다. ‘공유경제’에 관한 연구 논문들은 이 방향을 주목하고 있으며, 상응한 주제에 관한 논문, 예를 들면 경제에 있어서의 인간 상호관계의 역할이라든가 신용에 관해서, 또한 행복과 이익에 관한 것과 같은 심도 있는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어야 하겠다. 공유경제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의 학자들이 교류하면서 바람직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2. ‘공유경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공유경제’의 근거는 성경과 교회문헌, 특히 역대 교황들의 사회회칙에서 발견된다. 본란에서는 ‘공유경제’의 근거와 배경이 되는 성경과 교부문헌, 그리고 교회문헌 등의 가르침을 살펴보겠다.
2.1.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구약성경에는 재화와 부(富)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가 발견된다. 우선적으로 물질적 재화는 삶에 필요한 것이기에 부유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 한 물질적 풍요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축복이다. 다른 하편 지혜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가난은 우매함 또는 근면성 부족 등의 부정적 결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기, 고리대금업, 착취, 추잡한 부정을 비난한다.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비록 억압받고 약하고 빈곤한 처지가 악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세상 사물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재화를 관리하고 나누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가난은 창조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인식하기 위한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그의 믿음을 하느님이 아닌 물질적 소유욕 안에 두기 쉽다.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 안에서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은 비로소 그 모든 소유물들의 첫 번째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의 경제적 소유물을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데 사용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재물의 사용에 있어서 구약의 전통을 따른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고, 정의, 우애, 일치 그리고 나눔 속에서 인간사회 생활의 새로운 모습을 소개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고, 괴로워 우는 자를 위로해야 할 소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 인간이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물질적 재화를 선하게 관리하는 것은 자신과 모든 이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는 올바르게 보존되고, 활용되며, 증식되어야 한다. 경제활동은 인간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보다 인간적인 사랑과 결속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고, 다가올 세상을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성을 성숙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믿는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가르친다.(마르꼬, 11, 23-24) 경제는 인간과 사회와 삶의 질을 놓이기 위한 발전의 도구로서 활용될 때 유익한 것이다.
한편 인간이 경제적 재화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항상 보편적 목적을 갖는다. 모든 소유물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그분의 뜻대로 관리하고 궁극적으로 그분께 돌려드려야 하는 보편적 목적을 갖는다. 재물만을 위해 사는 일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교회의 교부들의 사상에서 볼 때 인간은 하느님께서 위탁하신 재화의 관리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는 “만약 우리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 요한 금구 성인은 “부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부를 나눔으로 해서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부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과 축적은 죄악의 근원이다. 성 바실리오는 “부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같은 것이기에, 부자들은 그들의 창고 문을 열라. 물을 자주 빼내면 빼낼수록 더욱 샘물은 맑아지고, 샘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두면 오염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 그레고리오는 “부유한 자는 단지 그가 소유한 것의 관리자일 뿐이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겸손하게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재화는 그것들을 분배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만을 위해 부를 보유하는 사람은 옳지 못하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빚을 갚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소유물은 관리하고 나눔을 갖도록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제활동과 물질적 진보는 인간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며, 삶의 질을 발전시키는 도구로서 활용되어야 한다. 봉사와 나눔을 위하여 부여받은 소유물을 올바르게 활용하고 보존하며 증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부를 소유한 사람은 그 소유한 것의 관리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소유물들은 그 주인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위탁되어 관리되고 있는 것이며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 공유의 원리이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 공동체가 재물을 공유하였다고 소개한다. “신도들의 무리는 한 마음 한 정신이 되었고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누구든지 밭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팔아서 그 대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치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저마다 필요한 만큼 각자에게 나누어졌다.”(사도행전 2, 42. 44-45; 4,32. 34-35; 5, 4.) 예루살렘의 초대 공동체는 이처럼 재물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였고,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회개한 신자들이 성령을 받고 성체성사의 신비를 깊이 깨달아 친교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룬 것이다.(사도행전 3, 42.)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 재물에 대한 관리자요 운영자 일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단지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평등을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 그 재물을 서로 나눌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공동체 일원들 간에 있는 완전한 일치, 한 마음과 한 정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살고자 재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부족하게 살지 않도록 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재물을 포기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가난한 것을 원해서 그들의 재물을 나누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 사이에 형제애를 실천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결과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재물의 공유는 재물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분배나 가난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형제들로 구성된 가족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사회 안에서는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주는 부자와 받는 가난한 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정신적, 물질적 선물을 상호 교환하여 주고받았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2코린 8, 14.)라고 하였다. 루카는 재물의 공유에 대한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행전 4, 34.) 이것은 마지막 날에 실현될 현실인 “너희 가운데에는 가난한 이가 없을 것”(신명기 15, 4)이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공동체의 모습은 미래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델이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확고한 사실들은 부의 공유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자유의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사도행전 5, 4.) 예수께서는 재물이 부자의 마음을 닫게 하고 하느님 나라와 타인의 필요를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므로 구원에 장애가 된다고 말한다. 회심한 사람은 소유한 재산으로 사람들을 일치시키고 서로 친구가 되게 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사도행전 4, 34.)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실천한 재물의 공유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직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공동체에 돈을 기부하고 싶은 사람은 사도들 앞에 재물을 가져다 놓았다고 루카는 말한다.(사도 4, 35.) 사도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물을 나누어주었으며,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많은 활동을 하였다.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인 부자는 자신의 집을 교회의 모임 장소로 내어주는 것과 공동체의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 이익에 관한 대립이 있을 경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으며,(1코린 6,7.)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물을 공유하도록 하였다.(2코린 8, 13.)
사도 바오로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 부를 완전히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남는 것을 이웃을 위하여 내어주라고 요청한다. 그는 평등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코이노이아(koinoia) 즉 친교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하는 것은 사랑의 복음에서 나온 나눔과 봉사정신이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 3.)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행한 재물의 공유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회심에 의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늘날의 ‘공유경제’의 원리가 사도시대에 있어 나눔의 문화 또는 사랑의 복음정신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2. 현대교회 문헌의 가르침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란 이름으로 교황 레오 13세가 1891년에 반포한 ‘노동헌장’은 근대 교회역사상 첫 사회회칙이며, 지금까지 사회교리에 관한 교회의 후속 회칙이나 문헌의 기초가 되었다. 이 문헌 이후 계속해서「40주년」(Quadragesimo Anno, 비오 11세, 1931),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요한 23세, 1961),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요한 23세, 1963),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Gaudium et Spes, 1965),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바오로 6세, 1967), 「80주년」(Octogesima Adveniens, 바오로 6세, 1971),「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요한 바오로 2세, 1981), 「사회적 관심」(Sollicitudo Conscientia, 요한 바오로 2세, 1987), 「백주년」(Centesimus Annus, 요한 바오로 2세, 1991)이 반포되었고, 성경의 가르침과 함께 이러한 사회교리의 문헌들은 1991년 ‘공유경제’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공유경제’는 성서와 가톨릭 사회교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관점에서 경제의 도덕적 질서를 규정하고자 하며, 이는 결국 ‘공유경제’가 추구하는 도덕적 질서와 동일한 궤도상에 있는 것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경제가 가진 도덕적 함의를 강조한다. 특히 회칙「사십 주년」에서 교황 비오 11세는 경제와 도덕성의 관계에 대해 경제학과 윤리학이 각각의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가 서로 무관하지 아니하다고 언급하였다. 오히려 도덕성과 경제학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고 본질적이다. 경제적 활동과 도덕적 행위는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도덕성과 경제의 구분이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두 분야의 분리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필연적인 긴요한 상호관계를 갖는다. 마치 윤리분야에서 경제에 관한 논거와 필요조건들을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경제 분야도 윤리 분야의 요구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 “경제적․사회적 영역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온전한 직업 그리고 전체사회의 복지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증진되어야 한다. 모든 경제적․사회적 삶의 원천, 중심 그리고 목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경제의 도덕적 차원에서 볼 때, 경제효율과 인간개발은 양자택일적인 두 개의 목표가 아니라 단일한 하나의 목표이다. 경제활동과 도덕성은 서로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도덕성은 경제 그 자체 내의 사회적 효율성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빈곤한 사람들 또는 그 사회 집단을 희생시키면서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경제활동의 도덕성은 반드시 사회와 인류를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자국(自國)의 발전과 전 인류가족의 진보에 따른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이에 대해 물질적 나눔을 갖는 것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연대와 정의에 대한 의무이며, 모든 인류에게 경제적 진보를 가져다주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활동을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각자 개인들의 연대감을 구체화하는 길이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웃들과의 영적 친교를 돈독히 하는 일이다. 보다 공평한 사회와 더욱 인간적인 세상을 조성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도전이지만, 경제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경제학 연구에 연관된 사람들의 본분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이 인간의 전반적 발전과 성실하게 생활하고 노동하는 사회의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다. 경제적 재화의 축적 그 자체는 비록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한 재화의 지나친 유용성과 쉽게 인간을 소유욕의 노예로 만들고, 일시적 만족의 노예로 만드는 경제적 발전 속에 숨겨진 기만을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비문화 혹은 소비자 중심주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시장경제 또는 단순히 자유경제에 대하여 도덕적인 평가를 한다. “만일 자본주의가 기업, 시장, 사유재산의 기본적이고 긍정적인 역할 그리고 경제부문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성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결과적 책임을 인식하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면 그 대답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만일 자본주의가 경제부문의 자유를 총체적 인간의 자유에 봉사하는 그리고 윤리와 종교의 핵심인 자유를 확립하는 강력한 법률 체계 안에 한정시키지 않는 체제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일 것이다.” 이처럼 가톨릭 사회교리의 관점에서는 경제활동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환경에 관해서 그것의 규칙뿐만 아니라 그것의 도덕적인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새로운 사태」반포 이후의 모든 사회교리 문헌들은 앞에서 지적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져온 여러 가지 병폐를 지적하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적 계급투쟁을 통한 노동자들의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경제관의 오류도 주의 깊게 비판한다. 한편 모든 사회교리 문헌들은 개인 재산의 인정과 자연 재화와 은총의 공유, 인간 존엄성, 절약과 애덕 실천을 통한 계층 간의 갈등해소, 인류의 공동선을 실현하고 이 세상으로 부터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충실한 복음적 방도를 촉구한다. 그 결과 사회교리의 정신에 충실한 ‘공유경제’가 나타난 것이다.
3. ‘공유경제’의 원리인 ‘주는 문화’
‘공유경제’는 성경과 가톨릭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대응하고 현실의 경제 환경을 복음정신으로 쇄신하여 그것을 세계적으로 확산해 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공유경제’는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주는 문화’를 기반으로 하며, 따라서 ‘공유경제’의 질서를 성공적으로 확립해 나가려면 그 복음적 원리인 ‘주는 문화’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본란에서 ‘주는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3.1. ‘주는 문화’에 대한 이해
오늘날 세계는 심한 불평등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몇몇 부국들은 물질적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문화에 빠져있고, 인간존재의 본질보다 오히려 소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하여 가난한 국가들은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경제현실에서 ‘주는 문화’는 생명의 문화이며 이는 곧 복음의 문화이며, 성경에 기초한 문화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 38.)라는 성경말씀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이러한 정신으로 생활한다면 오늘날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다.
주는 문화란 누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나 내어 주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웃을 사랑할 때 선물을 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주고 타인들과 나누고 싶어 하는 본능도 가지고 있다. 그 본능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며 따라서 ‘주는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곧 온 세상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누는 모든 행태가 무조건 공유원리의 바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욕심으로 주는 경우도 있다. 또한 주는 행위를 통해서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행태도 있다. 사실상 그것은 이기적 표현이며 받는 사람에게는 모욕이며 멸시이다. 또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근거하는 행태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주는 행위를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행태이다.
성 바실리오는 “당신이 쌓아둔 그 빵은 배를 곯는 사람의 것입니다. 당신이 옷장에 보관하고 있는 그 외투는 헐벗은 사람의 것입니다. 당신이 숨겨둔 그 돈은 가난한 사람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의 수만큼 당신은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쳤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부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여분의 것이라고 소비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강탈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주는 문화’란 그리스도의 사랑의 문화이다.
3.2. ‘공유경제’와 ‘주는 문화’의 관계성
‘공유경제’는 자선 활동이 아니라 ‘주는 문화’에 기초하는 경제활동에 관한 새로운 계획이며 체계이다. ‘공유경제’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 또는 자본, 저축, 이윤의 사용, 기술이전 등에 있어서, 특히 협동조합 형태의 서비스나 생산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주는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공유경제’의 원리는 기존의 경제학적 관점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 휴머니즘’이라고 말씀하였던 교황 바오로 6세의 인간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유경제’는 일정한 틀을 가지고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정황을 반영하는 가운데 세계의 곳곳에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주는 문화’에 기초하는 ‘공유경제’에 대한 많은 경험들이 축적되어가고 있다. ‘공유경제’는 인간의 생활수준을 평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며, 각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정당한 배분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유한 인간적 가능성을 발전시키도록 도와주고, 그들에게 일자리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도록 도와준다. ‘공유경제’의 발전은 자신이 소유한 부를 ‘주는 문화’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유경제’는 궁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공유경제’는 기업과 관련한 사람들을 참여시키려고 한다. ‘공유경제’에 충실하다면, 여분으로 가진 것뿐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까지 내어 주어야 하며 이런 내어 줌은 무한한 이자를 낳는다는 생각으로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주도록 해야 한다. ‘주는 문화’는 복음의 문화요, 복음 자체이다. ‘주는 문화’는 단순히 이익을 주는 것이나 보석과 땅과 집 등 무언가를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는 문화’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기업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공유경제’의 원리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약간의 자선 행위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업이나 회사 전체의 이익을 자유롭게 공동으로 내어놓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생산하기 위해 공유경제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적 관계는 기업의 재능과 능력, 전문성이 공동의 선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공유원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양심 속에서 성숙되어야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공유경제’의 근본적인 목적은 경제 현실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공유경제’는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의 모습인 소유의 문화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문화, 즉 사랑의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사랑의 문화는 복음적인 사랑의 문화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 그리고 성경의 요약인 복음을 실천할 때에만 가능하다. 한마디로 ‘공유경제’는 ‘나누는 경제’이다. 소유의 문화에 바탕을 둔 소비주의 경제와는 달리, ‘공유경제’는 ‘나누는 경제’이다.
‘공유경제’의 실현을 통해서 경제의 도덕성 내지 인간성을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의 확산으로 사회적 상황을 새롭게 전개하며, 쇄신된 도덕성과 사회 환경은 다시 ‘공유경제’의 발전을 견인하는 두 가지 동력으로 작용한다. 우선 사람들은 ‘공유경제’를 체험하면서 경제와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고 도덕적 양심에 자극을 받는다.
공유경제의 경험을 통해 기업인들은 생산 활동을 하는 가운데 새로운 체험과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어, 부지불식간에 물질적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부터 해방되도록 한다. 이러한 효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위한 경제 만들기에 동참하게 한다. 공유경제의 원리를 체험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공유원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할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공유경제’의 실현과 정착을 위해 애쓰고 있다. ‘공유경제’의 원리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직업 그리고 회사를 공유원리의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공유원리의 방식으로 활용한다. 빈곤한 사람들도 고유한 창조력을 발동하여 자신을 내어놓는다. 이렇게 ‘공유경제’는 경제활동을 통하여 도덕성 내지 인간성을 성장하도록 자극한다. 특히 ‘공유경제’는 인간의 한 측면인 경제활동을 통하여 인간 존재 전체의 새로운 조화를 도모해 나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오, 6, 24.)고 가르친다. ‘공유경제’는 인간이 물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을 향한 순례자로서 걸어가야 할 삶의 방식이다.
한편 ‘공유경제’는 경제영역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영역으로 확산되어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며, 동시에 ‘주는 문화’를 통하여 쇄신된 인간관계는 ‘공유경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발판이 된다. ‘공유경제’는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어 재물을 서로 나누고, 일에 협력하기 위해서 서로 동업자가 되고,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응력으로 일상생활에서 균형을 맞춘다.
또한 ‘공유경제’의 정신에 따라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연대와 ‘새로운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게 될 이익의 일부를 내어놓겠다는 것을 미리 선서하고 경제활동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생산 활동을 하거나 일상용품들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사람과 물건과 돈의 관습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그런 가운데 비인격적인 무미건조한 사회상황이 조성되면서 인간 상호간의 존재가 희미하게 인식된다.
그리하여 서로 이해관계가 발생했을 때 상대방이 부정적인 존재가 되거나, 사업상의 경쟁자를 짓밟아서 제거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것이 오늘날 경제사회가 그런 경향을 갖고 있으며,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하다. 그러나 ‘공유경제’는 그러한 무미건조하고 관습적인 일상의 경제생활을 역동적으로 전환시키면서 도덕적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도록 강조한다.
4. ‘공유경제’가 제시하는 경제활동
그리스도교인은 이 세상의 경제·사회생활을 통하여 확신과 긍지와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 엠마우스의 제자들이 빵을 쪼개는 나그네의 모습을 보고 주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듯이, 오늘날 사람들도 현대의 경제생활 안에 부를 생산하고 이를 분배하고 소유하며 소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의 경제 및 사회발전에 적극 참여하여 정의와 사랑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자신이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이 같은 활동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고,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얻어, 그리스도와 복음에 충실하여 현세 활동에 있어서 바른 질서를 보존하고 개인적 내지 사회생활 전체가 진복팔단의 정신, 특히 청빈의 정신으로 충만해야 한다. 여기서는 ‘공유경제’가 제시하는 경제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4.1. 공유경제 실천방법
재물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공유경제’를 탄생시켰다. 재물을 공유하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재물을 공유하는 것은 이웃을 돕기 위해 재물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재물의 공유는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하고 공유의 삶을 살려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 서술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내어놓았다. 그들은 재물의 공유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없도록 하는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공유경제’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본보기를 오늘날의 사정에 맞게 자유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물을 공유하는 것은 재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재물을 공유함으로써 재물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며 그리고 조직적으로 나눔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물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복음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생각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재물을 공유하는 것은 사회적 균형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공동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재물의 공유는 ‘공유경제’라는 특별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 ‘공유경제’를 통해 형성된 자본을 하느님의 자본으로 여기고 큰 관대함을 가지고 그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재물의 공유는 경제행위의 더욱 명확한 형태와 실체를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재물을 공동의 몫으로 내어놓는 것은 재물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분배의 측면에서 볼 때 재물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재물을 많이 생산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측면에서 공동의 몫으로 놓았던 재물의 결실로 또 다른 부를 생산하고, 더 많아지도록 하기 위해 내어놓는 것이다.
‘공유경제’가 시작된 이래 재물의 공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공유된 재물은 ‘공유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재물의 공유는 ‘공유경제’의 정신을 신장시켰다. 그 정신은 재물의 사용에 대한 복음적 삶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재물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근본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루카 14, 33) 사람들은 재물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밭을 확실하게 버리는 행위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재물을 사람들의 선익을 위하여 운영해야 하는 하느님의 재산으로 인식하여 밭 가운데에 그들의 마음을 놓는다.
이 두 자세는 모두 다 예수 말씀의 영역 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레위와 자캐오에게 각각 다른 것을 청한다. 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경제활동으로 회심하라고 한다.
이지노 죠르다니(Igino Giordani)는 사회적 관계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뿌리인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복음적인 삶의 행위를 분석하면서 “예수는 재물을 갖는 것에 대하여 단죄하지 않는다. 그들의 남용을 단죄한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애착이 구원에 이르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하며 재물을 우상화하는 것을 단죄하였고,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도록 권유하였다.(참조: 마태 5,3; 루가 6,20)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재물을 공유하면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한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각자의 경제활동을 통해 재물을 내어 놓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가능성과 형제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고려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섬세하게 만드는 것이며, 가정의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염두에 두고 각자가 자유롭게 정한 수준으로 ‘공유경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부분적으로나마 재물을 공유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습은 재물이나 자신을 내어주는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된다.
재물을 공유하려고 할 때 자유 안에서 내어 주어야 하며, 남는 것이라는 개념보다는 깊은 의미를 가진 나누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루카 11,41) 그것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공동체적인 의미의 주는 행위이이며, 양심적이고도 적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필요에 의해 남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요구되었을 때, 가능하다면 자신의 재물 전부를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을 돕기 위해서는 각자 가지고 있는 지적 재능이나 노동력 그밖에 모든 실현 가능한 형태의 것들을 제공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재산을 내어 주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정신과 완전하게 부합하는 의향을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땅에 묻지 않고 더 불어나게 만들어 결실을 풍성히 한 사람들을 칭찬한다.(마태 25, 14-30; 루가 19, 12-27)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이웃 사랑을 하기 위하여 물질적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칭찬한다.(루카 16, 8-9)
재물의 공유는 예수로부터 복음적 칭찬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실천한다.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 중에 노동을 강조하였으며,(참조: 1데살 4, 11; 2데살 3, 7-12)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에페 4, 28)라고 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노동은 개인의 의무이며, 먹는 권리가 노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 안에는 노동에 대한 엄하고 활동주의적인 생각이 들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직한 경제활동에 대한 개인적 임무와 경제활동 안에서 표출해야 할 기업성과 획득해야 할 생산성 그리고 경제활동에 영감이 될 사회적 목적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한다.
재물을 공유하려는 이러한 정신은 모든 이들을 위하여 재물이 불어나게 하고 생산적 노동과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바로 이러한 정신은 ‘공유경제’를 움직이게 한다.
‘공유경제’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여 얻은 경험과 함께 사회, 경제, 문화적 상황들 안에 이러한 정신이 적용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공유경제’의 원리로 활동하고자 하는 기업들은 경제적 신자유주의로 활동하고자 하는 기업과 노동자들 속에 침투한다.
‘공유경제’의 원리로 기업을 하는 목적은 기업의 자원을 서로 나누고 계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함이다. 그 기업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결속을 보여주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공유경제’는 공동체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마련하고자 하며, 사유재산, 개인적 활동에 대한 권리,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예정된 자원을 창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제적 생산과 재물의 세계적인 나눔을 실천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유경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대안 경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유경제’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실행되는 곳에 가난이 끝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각자의 노동의 존엄성이 유지되고 개인적 자유가 침해받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정의로운 방법으로 재물을 분배하는 가운데 구매력이 도덕적 요구에 따라 사용되는 경제원리라고 할 수 있다.
‘공유경제’의 원리를 실천하는 시도들은 지금은 가난하지만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찾아 그 사람의 삶이 더 나아지고 노동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경제발전과 청빈의 조화, 금전사용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갈등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청빈의 본질은 하느님이 주신 물질적 선물을 경시하고 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지상의 부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적 원의이다. 그러나 지상의 부는 그 자체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목적을 망각하여 근본을 소홀히 하는 것은 부가 지닌 위험이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 그리스도인은 재물만을 쫓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재화를 이용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류애와 그 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청빈의 본질이다. 그래서 진실로 청빈한 자는 인류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기적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여 모든 사람이 그 이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한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보다 굳세고 보다 순결한 사랑을 받아 제 모든 형제를 도와주고 사랑의 충동으로 정의의 사업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보다 굳세고 보다 순결한 사랑으로 모든 형제를 도와주고 사랑의 충동으로 정의의 사업을 완성하라고 말한다. 사랑이야말로 정의를 수립하는 힘이다. 사랑이 순수하고 강할수록 정의의 수립이 보장된다. 사랑은 물욕에 빠진 마음에는 타오르지 않으며, 오히려 꺼진다. 복음을 충실히 따르며 복음에서 힘을 얻는 신자들은 정의를 사랑하고 모든 사람과 일치하여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하느님께 이 과업에 대한 결산 보고를 바쳐야 할 것이다.
4.2. 공유경제의 분배와 소유
인간이 경제활동에서 생산자로서 노동에 의하여 위대함을 발휘하는 것처럼 분배와 소유에 있어서도 인간의 위대함을 발휘하고 추구해야 한다. 곧 경제활동에 있어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동등한 자격 곧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참석하여, 다 함께 형제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인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가장 높은 모습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상의 모든 부는 창조주가 모든 인간을 위해 내어 준 선물로서 모든 사람이 이를 향유하고 나누고 이용하면서 그 소명을 실현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물인 생산된 물품은 그것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분배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분배의 정의에 맞는 것이고, 이 정의는 하느님의 창조적 원의에 응답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정의로운 분배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한다. 민족들의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재화의 이 보편적 목적만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한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하도록 사용하라는 뜻이다.” 부의 분배양식, 소유형태는 모든 사람이 부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적 원의는 오직 모든 사람이 재물을 나누어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물질적 선물인 재화는 이를 끊임없이 증식함으로써 끊임없이 태어나는 인류, 끊임없이 증가하는 인류의 수요를 충족해야 한다. 따라서 ‘공유경제’는 하느님의 선물을 끊임없이 더욱 증식하기 위한 자본을 필요에 따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물자 생산을 증대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경제생활에서 자본축적과 투자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경우 의를 추구하고 빛나게 해야 한다. 자본축적과 투자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가페에 참여할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란 오늘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내일 살 사람, 계속 태어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 내일을 예견치 못하고 하느님의 선물을 소비하는 행위는 불의이다. 그래서 “투자는 오늘과 내일의 국민을 위하여 충분한 노동기회와 수익을 보장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투자계획을 결정하는 사람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국가이건 중책을 자각해야 한다. 즉 한편으로 개인과 공동체에 요구되는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도록 배려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미래를 예견하여 개인과 집단을 위한 현재 소비의 요청과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의 필요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발전한 부국들은 오직 자국의 현재 내지 장래만을 생각지 말고, 세계자본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경제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는 국가의 국민을 위하여 아낌없이 재화를 사용하는 것이 절실하다.
“저개발국가와 지역의 긴급한 요청도 항상 고려해야한다.” 투자와 자본축적에 있어서 경제활동에 수반하여 지극히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화폐이다. 때때로 국제통화가 불안하여 세계경제가 동요함으로써 경제적 아가페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통화행정에 있어 자국과 타국의 이익이 저해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 약소국가들이 화폐의 가치변동으로 부당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물인 재물에 대한 분배는 만인의 아가페, 만인의 공유를 그 근본원리로 해야 하며, 부의 소유 또한 그 근본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사유가 인간의 존엄성에 합치되고 이를 빛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사유재산이나 외적 재화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은 개인과 가정의 자립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생활권을 제공하는 것이며 인간 자유의 연장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또 의무와 책임을 실천케 하는 자극제이므로 시민적 자유의 한 가지 조건도 된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의한 존재적 아가페가 경제의 본질이어야 함을 단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로부터 강요되어 부를 생산하고 강요되어 나누어주고 강요된 물품을 소비하는 대신에, 자주적으로 책임을 가지고 부를 생산하며 자주적으로 책임을 가지고 생산한 부를 기꺼이 나누어주고 자유로이 선택한 물품을 자기의 개인적 요구에 합당하게 소비할 때 그 위대함과 행복을 인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4.3. 공유경제의 저축과 소비
공유경제로 기업하는 이들은 이익의 3분의 1은 실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고용된 자들에 대한 급여 등 기업에 재투자하고, 3분의 1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3분의 1은 ‘주는 문화’를 위해 일할 ‘새로운 사람’들을 양성할 기관을 위하여 할당하도록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와 같이 이익의 3분의 1은 그들이 생계를 유지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며, 3분의 1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방법을 창출하기 위해서이고, 3분의 1은 복음화 된 ‘새로운 인간’ 없이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공유경제’를 실현시켜 가기 위한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대개의 경우 생존단계 이상의 광범위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들은 그들의 돈을 저축할 것인지 또는 소비에 충당할 것인지에 관한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경제적 실체에 중대한 영향을 행사한다. 그리고 저축과 투자는 경제 메카니즘을 통하여 작용하는 가운데 그 금융자원의 활용을 위한 평가는 예상 수익(expected return)이나 상대적 위험에 기초할 뿐 아니라 투자 사업에 대한 가치 판단에 의존한다.
구매력은 반드시 정의와 연대라는 도덕적 요구와 사회적 책임의 맥락 속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사랑의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의무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무언가를 제공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넘치는 풍요를 나누어주어야 하는 의무, 그리고 때때로 누군가가 요구하지 않더라도 나누어주어야 하는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는 구매될 물건의 가격과 품질뿐 아니라 자연환경의 보호, 노동환경의 상태 등을 배려하는지에 대한 개인적 또는 집단적 선호에 영향을 주게 되고, 그러한 영향은 소비자로 하여금 생산자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소비주의(consumerism) 현상은 존재보다는 소유의 성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성숙한 인간성 형성에 방해가 되는 인위적인 욕구와 새롭고 차원 높은 형식의 인간욕구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기준”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항하기 위해서, “진리와 미와 선의 추구와 공동 발전을 위한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가 소비, 절약 그리고 투자의 선택을 결정하는 생활양식을 만들 필요가 있다.” 다양한 소비주의적 생활 방식이 소비, 저축 등의 경제적 행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비주의가 취하고 있는 문화적 도전에 대하여, 장차 지나치고 무질서한 소비주의에 의해 약탈당한 자연 환경에서 위험하게 살게 될 미래의 세대를 고려할 때, 반드시 큰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볼 때 ‘공유경제’는 현대의 소비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에서 오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잘 인지하고 있고, 가톨릭 사회교리의 정신에 충실한 ‘공유경제’야 말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복음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공유경제’의 전망과 과제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적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에 의해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고 있는 반면, 선ㆍ후진국을 불문하고 반대의 소리 또한 세력을 더해가고 있다. 반대의 목소리 중에서 그 논점과 접근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현실 문제를 크게 중시하는 비판세력과 이론문제를 중시하여 논의하는 세력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이론적 설득력이 약하고 후자는 실행 가능한 구체적 정책 제언을 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빈곤문제와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의 대안으로 제시된 ‘공유경제’의 전망과 과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5.1. 전망
지금 세계는 시장경제의 영역 안에서 자유경쟁이라는 냉정한 법칙 아래 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수만이 부자라는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최근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몰락한 이후, 일부 경제, 금융의 권력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적 신자유주의는 모든 계층의 공동선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인 경제적 조화에 도달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더욱 모호한 방식으로 언급한다. 시장경제의 절대적인 원칙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회교리도 최대의 권위를 가지고 비판하고 있으며 전통적 경제학자들의 비판도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공유경제는 사회경제적 추상적 이론의 결과물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1)는 계명에 투철한 신앙적, 사회적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모호한 이론이나 이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이 가능하며, 또 이미 실행되고 있는 확고한 경제원리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여기서는 ‘공유경제’의 전망은 어떻게 나누는 문화와 소도시들을 형성하며, 양성학교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어떻게 양성하느냐에 달려있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5.1.1. 주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하나의 특별한 문화, 곧 친교와 일치의 문화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랑의 문화를 지향한다. 이 문화를 ‘나누는 문화’라고 하는데, ‘나누는 문화’는 특히 경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불평등 분배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이미 종교적 활동과 문화적 결속의 많은 형태 안에 존재한다. 또한 민족 간의 일정한 관계 안에 존재한다.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 도움을 주는 것,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민족들에게 이윤을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고 있다. 이윤 없이 주는 것도 경제활동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공유경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개혁을 실현하는 경제활동을 이루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이 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공유경제’에서 말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을 말하는가? 그것은 복음에서 말하는 이웃이요 형제이다. 어렵고 영웅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주는 문화’야 말로 ‘공유경제’의 실체와 그것의 세계적인 전파를 위한 희망의 기반을 제공한다. 사실 나누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본 딴 인간 본성의 가장 심오한 욕구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주는 것인데, 주는 것에서 인간의 자아실현을 이루게 된다.”
‘공유경제’는 단지 사람들 사이에 주는 것과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들 간에 주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은 주면서 자아실현을 한다. 존재하기 위해 주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실천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숙하게 된다. 민족들도 줌으로써 성숙할 수 있으므로 한 민족이나 국가는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향하여 줄 수 있을 때 성숙해 진다. ‘공유경제’는 ‘주는 문화’를 올바로 실천할 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5.1.2. ‘소도시’를 형성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소도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공유경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기업을 운영하는 경제원리이기 때문에, ‘공유경제’로 운영되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새로운 경제활동을 이끌어갈 중심점인 ‘소도시’들 주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소도시’들은 이미 이루어진 사회적 연관 관계를 무시하지 않으며, 다른 사회와 단절되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 ‘소도시’의 최종 목표는 모든 인류가 일치된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소도시들은 아라첼리(Araceli. 브라질), 오히긴스(O'Higgins, 아르헨티나), 로피아노(Loppiano, 이태리), 폰템(Fontem, 카메룬), 루미노사(Lumonosa, 뉴욕), 타카이타이(Tagaytay, 필리핀), 몬테(Montet, 스위스)에 건설되었다. 1991년 5월에 세워진 아라첼리 소도시는 모범적인 공유경제 단지이다. 이 소도시는 브라질의 여러 지역 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회사들의 이익금으로 건설되었으며, 공업, 수공업, 농업, 축산학, 상업, 다른 종류의 서비스 활동을 유치하기 위하여 체계화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오히긴스(O'Higgins) 소도시는 일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소도시’의 도움으로 건설되었으며, 그 후 동유럽의 소도시들을 포함한 다른 12개의 소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이 소도시 안에서 작지만 매우 광범위한 시도들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도들은 단순히 저금이나 부업을 하는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수공업적 차원이거나 그 이상의 규모의 개인적, 협동조합적 회사들이 생겨났다. 이 회사들 중에는 이윤을 서로 주고받는 체계화된 회사도 있고, 소도시에 지사를 세우는 회사도 있으며, 새로 생겨나는 회사들도 있다. 그러나 공유경제의 정신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은 ‘소도시’들 안에서 서로 연계성을 갖고 있으며, 공유경제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처럼 ‘공유경제’가 올바로 형성되기 위해 ‘소도시’를 더 많이 건설해야 할 것이다.
5.1.3. 새로운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새로운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경제활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사람’이란 복음정신에 따라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사람’은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복음정신에 따라 살며 서로간의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친교의 영성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만일 ‘공유경제’를 실천하고자 하는 새 사람들이 없다면, ‘공유경제’로 하는 기업들이 탄생할 수도 없고, 제대로 가동될 수도 없다. 새 사람이 없으면 새로운 경제도, 새로운 정치도, 새로운 과학도, 새로운 의학도 이룰 수 없으므로 ‘공유경제’를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이 있어야한다. 이미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기업가와 경제학자, 경제학 교수와 학생들, 기업체의 구성원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양성해야 한다. ‘공유경제’를 자유로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경제활동을 통하여 이윤창출과 분배가 분리될 수 없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윤리 도덕적인 관념들이 경제적인 요구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 자율 및 정의 등의 가치에서 창출되는 결과와 무관하게 이 가치를 믿거나, 또는 이와 반대되는 결과에서 나오는 위험성에 대하여 감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기업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이 기업들은 인간적인 조직관계를 방해하거나 마비시키는 내부의 대립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며, 나아가 고객과 납품업자와 투자자들로 하여금 신뢰와 호평을 갖게 함으로써, 더 많은 발전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 여러 해 동안 ‘공유경제’가 발전하도록 하는 본질적인 요인은 ‘공유경제’의 원리로 운영되는 기업들이 구체적인 경제활동에 있어서 하느님의 섭리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업들은 보통의 사업 관행으로는 있을 수 없는 시대사조를 거스르는 선택을 할 때마다 기대하지 않은 수입이나, 예상치 못한 기회, 새로운 협력의 제안, 성공을 기약하는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 등을 경험하곤 한다. ‘공유경제’는 오늘날 경제학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활동 방식을 뛰어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열쇠가 될 것이다.
특히 ‘공유경제’는 세계화의 물결에 의하여 지배되는 현실 앞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인류애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조성한다. 또한 ‘공유경제’는 자유경쟁을 좇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평등과 정의사회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21세기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며, 현시대 경제주류에 의하여 과소평가 되고 있는 도덕성, 인류복지, 인간 존엄성, 공동선, 환경의 생태학적 균형 및 사회적 조화를 환기시키기 때문에 오늘날 새로운 경제의 복음화를 실천하고 있다.
5.2. ‘공유경제’의 과제
‘공유경제’는 가장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추구해야 한다. ‘공유경제’의 기업은 그 지역문화에 따르는 기회와 요구사항들에 대한 인지능력, 진지함, 준비, 기술적 기업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시도들은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의 조언과 공동체의 도덕적, 실질적 지지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개별적으로 ‘공유경제’를 따르고자 하더라도 세계적인 경험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공유경제’의 원리를 따라 시도하는 다른 사업체들과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원리로 하는 모든 기업들은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사회적 문제를 형제적 사랑으로 함께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공유경제’의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공유경제’는 경제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희망, 기업 경영의 새로운 노선, 노동에 대한 영적인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하며, 양성학교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양성하고, 친교의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복음적인 삶과 나눔’이 계속해서 실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5.2.1. 경제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국제적 경제문제들을 포함하는 경제활동의 기본적인 과업은 인류를 위하여 연대성을 갖는 통합적 발전을 성취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과업은 모든 사람과 인류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
이 과업을 성취하려면, 국제적 수준에서 공평한 자원분배를 보증하는, 그리고 상호의존의 인식에 공명하는, 현대인을 경제적․정치적 및 문화적으로 결합시키는, 그리고 윤리적 필연성에 의해서 그것들을 연계시키는 경제에 관한 비젼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5.2.2. 새 기업경영의 노선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새로운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경제활동이기 때문에, 이 원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기업들에게 기업경영의 새로운 노선을 요구한다. 그것은 복음적 사랑에 반대되는 행위들을 피함으로써 인간과 인간관계를 그 중심에 두도록 하는 것이다. 고객과 납품업자와 공공기관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윤리 도덕을 존중함으로써 법을 지키도록 요구하며, 근로환경과 자연환경 존중에 관심을 갖도록 요구한다.
5.2.3. 양성학교를 통한 새사람을 양성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다른 기업이나 사회적인 현실과의 협력이 잘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면서, 구체적인 경제활동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개입과 그분 섭리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유경제’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정책을 이끌고 실현해 갈 ‘새로운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정책에 따라 기업을 운영할 사람들을 교육할 양성학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양성 학교들은 기업과 기업의 모든 구성원들이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이기고 굳건히 남아 있을 수 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최근 몇 해 동안 태어난 학교들은 많은 결실을 맺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한 경제적 행위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이 길은 자유로이 선택하게 될 친교의 길이기 때문에, 이는 미래의 희망이다. 그동안 ‘새사람’ 양성은 ‘소도시’에 있는 회사와 여러 학교를 통하여 공부하면서 노동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유경제’가 올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양성학교를 많이 세워서 가능한 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배출해야 할 것이다.
5.2.4.노동에 대한 영적인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공유경제’는 영신적인 현실일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현실이며, 인간적인 활동이다. ‘공유경제’가 구체적인 인간적인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구체적인 일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공유경제’를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유경제’가 하느님의 사업이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세계에서 보다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여러 해 동안 사생활을 하셨을 때, 혼자 외딴 곳으로 가서 묵상하고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신분으로 생활하셨다. 그분이 이를 선택하신 사실은 인간 생활에서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도 노동은 인간 생활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노동을 박탈한다면, 인간존재의 참 의미가 실종될 것이다. 특히 인간은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게 된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에 수반되는 노고를 견딤으로써 창조주와 구세주의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자연과 우리 노동의 모든 좋은 결실들을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법칙에 따라, 땅 위에 전파시킨 다음,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모든 더러움이 정화되고, 빛을 받고, 변화된 것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금 영원하고 보편적인 나라를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유경제’에 속한 사람들도 가능한 한 능동적으로 훌륭하게 노동을 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활용하여 정확성, 질서, 조화의 걸작품을 만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좀 더 잘 일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시켜 가야 한다는 사실을, 고유한 연구를 통해서도 자신의 직업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생생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공유경제’의 정신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완성한다고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결과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게 된다 할지라도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그 다음 자신이 해야 하는 일 뒤에는, 자기가 맡은 힘든 일 너머에는, 자신에 의해 작동하고 있는 그 기계 뒤에는, 자신이 포장하고 생산하는 상품들 너머에는, 자신이 한 일의 결실을 누리게 될 마지막 단계에는 형제들이 있음을 잊자 말아야 할 것이다.
‘공유경제’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들의 봉사를 받게 되는 개인이나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일을 잘 함으로써 소비자, 고객, 동료, 책임자에 대한 경청, 개방, 환영, 주의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태도를 키워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여러 직업의 전형적인 도구와 함께 참된 가치와 진정한 덕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성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공유경제’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맡겨진 과업이 무거울 때, 대인관계가 어려울 때, 그들이 만날 수 있는 모순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전형적인 고통과 고뇌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5.2.5. 친교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공유경제’의 정신으로 기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의 기초에서부터 모든 측면에 이르기까지 서로간의 사랑으로 친교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일치된 형제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부활하신 분이 거기에 현존하신다.(마태 18, 20) 이는 ‘공유경제’의 기업체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그룹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유경제’의 정신으로 기업을 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도록 노력해야 하며, 항상 서로 간의 사랑으로 그들 사이에 예수의 현존을 새롭게 의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유경제’ 안에서 하느님과 형제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노동은 이런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기업주에서 모든 직원에 이르기 까지 이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간의 사랑을 유지하면서 일을 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모든 구성원이 함께 노동하며, 계획에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경영의 조직 형태를 찾게 될 것이고, 그들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기업체를 새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기업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교의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공유경제’의 기업체들은 인간들 사이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5.2.6. 계속적인 ‘복음적인 범람’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복음을 생활한 결과로 복음이 말하는 생명수가 솟구쳐 올라(요한 4, 14) 다양한 인간 생활 안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즉 경제활동에 복음의 정신이 침투하여 ‘복음적 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복음적 활화산’은 실지로 경제계에서 학문과의 사이에 많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고, 전문가들이 뛰어난 경제학자들과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복음의 불길’이 계속 퍼져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국 ‘공유경제’는 하느님의 사업이므로, ‘공유경제’에 기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동료들과 고객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직접 일하시도록 해드려야 한다. 사실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의 깊은 원인들 중의 하나는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극심한 불균형에 있다. 이 불균형은 원한, 증오, 복수를 낳으며, 이렇게 해서 과격파들은 보다 쉽게 이 같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세계가 재난과 공포, 증오, 그리고 전쟁의 바다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형제적 유대와 연대가 시급한 과제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유경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될 수 있으며, 다른 선의의 세력들과 함께 폭력의 행사와는 다른 평화와 공존의 풍조를 조정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보편적 형제애를 향해 나아가야 하며, 이를 기초로 할 때 높은 수준의 공유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6. 요약
지금까지 경제적 신자유주의정책에 관한 대안경제로서의 ‘공유경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991년에 브라질에서 시작된 ‘공유경제’는 회칙「백주년」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대교회처럼 철저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이윤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내어놓는다. 그런데 ‘공유경제’는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 권리인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와 자유 시장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진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경제적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경제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공유경제’는 재산을 축적하지 아니하고 ‘나누는 문화’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경제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유경제’는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개인의 영리를 목적으로 이윤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공유경제’의 지상목표는 가난이 끝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 사람의 개인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정의로운 방법으로 재물을 나누는 길이다. 그러므로 ‘공유경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원리이며 재화를 공동 소유하고자 한다.
‘공유경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모든 사람들 사이의 일치와 형제애를 지향한다. 또한 구성원 각자가 경제활동을 통해 재물의 공유를 실천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해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재원을 마련하여 지역적, 국가적, 세계적인 나눔을 실천한다. 한국 상황에서 ‘공유경제’가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과제이다. ‘공유경제’는 긴 기간 동안 활동해야하기 때문에,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적은 자본으로 처음으로 시작되는 중소기업은 다소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꾸준히 운영하다보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복음과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공유경제’는 오늘날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폐단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