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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本貫ㆍ姓貫) 이란,
- 관적(貫籍)·본적(本籍)·성관(姓貫)·본(本)·관향(貫鄕)·적관(籍貫)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姓)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본관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고려 성종 14)경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시 초기의 본관제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對民)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은 입사(入仕)·입산(入山) 등을 통한 신분이동이나, 방수(防戍)·행상(行商) 등 역(役)의 수행이나 직업상의 필요, 또는 사민(徙民) 유배 등 정책적인 경우를 비롯하여 기타 공식적으로 허용받은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유망민으로 간주되어 본관 지역으로 되돌려졌다. 본관은 양인(良人) 이상에게만 주어졌으며, 노비와 양수척(楊水尺) 등의 천인(賤人)들은 본관제 질서에서 배제되어 국가에 대한 국역(國役)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려 정부는 지역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성(土姓) 및 직역(職役)을 분정(分定)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부세(賦稅) 징수 등의 행정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토성은 신라 말, 고려 초 변동기의 자위조직의 기초집단인 성(城)을 중심으로 분정되었는데, 이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읍(封邑)’과 같은 공동체 관계로 파악한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에서 각 성관의 시조들이 해당 지역에 식읍(食邑) 또는 채읍(采邑)을 사봉(賜封)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래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고, 유망이 극심하게 일어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현상이 확대되어갔다. 이제는 본관 지역을 이탈한 농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籍)을 붙여서 수취를 도모하는 방편이 보다 편리해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同姓)은 처음에는 동본(同本)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姓貫)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改貫)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조선 후기에는 족보 편찬이 활발해졌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 배씨 성관(姓貫ㆍ本貫)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 고려사 열전(高麗史列傳) 권 제5(卷第五).
▶ 배현경(裵玄慶);...전략...<玄慶初名白玉衫慶州人膽力過人起行伍累進大匡...중략...太祖征討四方玄慶功居多十九年疾篤太祖幸其第執其手曰嗟乎命矣夫卿子孫在其敢忘太祖出門而玄慶卒遂駐駕命官葬事而後還諡武烈子殷祐>.
※:고려사열전의 "경주인(慶州人)"이 본관(本貫)의 표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고려시대의 배씨선조의 본관; <※:역대인물정보시스템의 자료를 본관중심으로 재 편집>
▶배경성(裵景誠) : <고려시대의 문신>
시대 : 고려 중기
본관 : 협계(俠溪)
생졸년:1083~1146.
▶배원우(裵元祐) : <고려의 민란주모자>
시대 : 고려 중기
본관 : 미상(未詳)
생졸년: ? ∼1202.
▶배극렴(裵克廉) : <고려개국공신>
시대 : 고려 후기
본관 : 경산(京山) . (京山:지금의 星州)
자 : 양가(量可)
호 : 필암(筆菴)/주금당(晝錦堂)
시호 : 정절(貞節)
생졸년:1325~1392.
▶배언(裵彦) : <고려의 관인>
시대 : 고려 후기
본관 : 미상(未詳)
생졸년: ? ∼1380.
▶배원룡(裵元龍) : <분성군(盆城君).김해배씨시조>
시대 : 고려 후기
본관 : 김해(金海)
생졸년: 미상.
▶배정지(裵廷芝) : <고려시대의 무신>
시대 : 고려 후기
본관 : 대구(大丘)
자 : 서한(瑞漢)
호 : 금헌(琴軒)
생졸년:1259~1322.
▶배중손(裵仲孫) : <고려원종때 장군. 삼별초지휘관>
시대 : 고려 후기
본관 : 미상(未詳)
생졸년: ? ∼1271.
▶배천경(裵天慶) : <달성군(達城君)>
시대 : 고려 후기
본관 : 대구(大丘)
생졸년: 미상.
※:"고려사절요"에는 서른일곱 분(37人)의 배씨선조님의 휘(諱)가 계십니다.
□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지삼(卷之三).
※ 姓氏 ; ...전략... <按羅史我國之裴其源出於新羅六部加里村之姓. 興海:興海君裴佺之後. 星州:按家譜以裴良袂爲始祖其後至裴仁卿位大匡封興安君星州之裴皆出於良袂而仁卿之後最盛. 金海:按金官志裴爲本府大姓麗末裴元龍位大匡封金海君子孫蕃衍. 大丘:本府吏姓間有脫吏籍爲士族者裴廷芝大丘人...중략...官至密直>
(해): 성씨 ; <신라사를 보니 우리나라 배씨의 근원은 신라6부가리촌의 성이다. 흥해(배씨)는 흥해군 배전의 후손이다. 성주(배씨)는 성주가의 보첩을보니 시조가 배양몌이고 후손 배인경이 벼슬이 대광에이르러,흥안군에 봉해졌다. 김해(배씨)는 김관지(김해읍지)를 보니,김해의 대성이다,고려말 배원룡은 벼슬이 대광에 이르고,김해군에 봉 받았으며,자손이 번연했다. 대구(배씨)는 본부관리의 성이었다,관리의 적을 벗고 사족이된 배정지는 대구인이고 관직은 밀직이었다.>
※ : 대동군부운옥은, 1589년(선조22)에 퇴계문인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찬술한 역사백과사전이며,보물878호이다. ※배씨의 성관(姓貫)이 외부기록(역사사전)으로는, 처음 기록된 소중한 자료이다.
□ 배씨 5파 위계변 ; <무열공본전 저자 배상철(裵相哲) 씀>
...전략...'문헌비고'에는 배씨가 136본이 기록되어있으나 방목속에 실재한 본관은 28본이었다, 이 28본중에서 변이(變移)와 이관(移貫)등을 거쳐 현재는 10여본이 되었으며, 1764년 갑신보 창보에는 분성,성산,달성,흥해,곤산 등 5파가 참여하였다. 영조 40년(甲申)에 비로소 칠곡 송림사에서 분성,성산,달성,흥해,곤산 5파의 합보를 시창히니,즉 갑신보인 경주배씨대족보이다.
당시에는 무열공까지 계대를 대(잇)는 파가 없었다. 분성배씨는 휘 헌(軒)으로 시조를 삼었고, 성산배씨는 휘 실(實)을 시조로, 달성배씨는 휘 손적(遜迪)을 시조로, 흥해배씨는 휘 경분(景分)을 시조로 삼았었다...이하 약...
□ 기묘보(己卯譜): <1759. 김해배씨세보 서문 中> -국역문-
...전략... 삼한(三韓) 전에는 원래 배(裵)씨성이 없었으므로,계림 탄강초(誕降初)에 비로소 배(裵)씨성을 얻어서, 국내의 배(裵)가 혹 곡강(曲江),고부(古阜),곤양(昆陽) 등의 관향(貫鄕)이 있는바 과연 같은 조상인지? 다른 관향인지? 알 수 없다. 또한 각.각 다른 원류의 파(派)인지, 족속(族屬)이 아닌지 도 알 수 없다. 년대가 오래되어 문헌을 증거 할수 없으므로 ...중략... 려말(麗末)에 휘 헌(軒)은 평장사이고, 子 휘 사혁(斯革)은 가락군이고,子 휘 원룡(元龍)은 선대의 봉작을 이어받아 분성군(盆城君)에 봉 하여 자손이 이를 관향으로 하였다. ...하략...
□ 곡강(興海)배씨세첩 서문 中. -국역문-
...전략... 신라와 고려 이 두 왕조를 거쳐오는 동안 시대가 요원하여 고증할 문헌이 없기 때문에 검교공(檢校公) 휘 경분(景分)을 비조(鼻祖)로 계대가 소연히 전해온지 백여년이 되었다. ...하략...
□ 성산배씨족보(임술보) 서문 中: <1922년간> -국역문-
...전략... 배(裵)씨가 신라 6부장의 한분인 김산장(金山長)께서 신라 태조의 좌명공신이 되셨고, 또 그 후에 태사 무열공(太師武烈公) 휘 현경(玄慶)께서 고려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셨으나, 태사 이전이나,이후에도 기록이 없으니, ...중략... 고려 중엽에 벽상공신에 녹훈되신 휘 실(實)이 계셨으나 이 또한 실전하여 드디어 벽상공신 휘 위준(位俊)을 상조(1세)를 모시고. ...하략...
□ 배씨상계의 의난 및 분규의 기인과 유래의 증언; <1977년 분성 裵文會 저>
- 동국정사를 살펴볼 때, 신라개국원훈에 부장공 지타와, 고려원훈에 태사 배현경( 裵玄慶)과 같은 역사적 위인이 계셨지만, 년대가 요원하고, 소목이 미상하여 직접 세대의 계승이 불가능 하므로, 나라 안 배(裵)씨가 모두 그 실지 소몽조(所蒙祖)를 모시고 족보를 만들어 왔던것이다. 그 실 예를 들면,
*분성배씨는, 분성군이상 2대 평장사 휘 헌(軒)을 상조(上祖)로.
*성산배씨는, 분성군과 동시대였든 정절공(克廉)의 11대이상 삼중대광 휘 위준(位俊)을 상조로.
*달성배씨는, 분성군에 조금앞선 달성군 휘 천경(天慶)이상 7대 평장사 휘 숙(淑)을 상조로.
*흥해배씨는, 분성군의 조금 앞인 흥해군 휘 전(詮)이상 6대 검교장군 휘 경분(景分)을 상조. 로, 각 각 수보하였던 것이다. ...하략...
□ 국조 방목(國朝榜目) 에, 기록된 배씨 본관.
※조선조 문과(文科)방목;
▶ 곤양(昆陽)배씨 <2명>
배영성(裵榮成) 현종4년 (1663) 식년시(式年試)병과17위.
배은성(裵殷星) 고종11년(1874) 정시(庭試)병과2위.
▶ 공주(公州)배씨 <1명>
배상인(裵相仁) 순조5년 (1805) 별시(別試)병과32위.
▶ 김해(金海)배씨 <6명>
배대유(裵大維) 광해군 (1608) 별시(別試)병과10위.
배맹후(裵孟厚) 세조8년 (1462) 별시(別試)정과5위.
배문보(裵文甫) 중종21년(1526) 별시(別試)병과5위.
배세적(裵世績) 중종2년 (1507) 식년시(式年試)병과18위.
배인(裵寅) 세종2년 (1420) 식년시(式年試)동진사12위.
배홍우(裵弘祐) 광해10년(1618) 증광시(增廣試)병과20위.
▶ 대구(大丘)배씨 <4명>
배경후(裵慶후) 영조2년 (1726) 식년시(式年試)병과15위.
배성유(裵聖兪) 영조32년(1756) 식년시(式年試)을과4위.
배익신(裵益臣) 성종23년(1492) 별시(別試)1위.
배진명(裵晉明) 영조5년 (1729) 식년시(式年試)병과19위.
▶ 성산(星山)배씨 <12명>
배덕문(裵德文) 명종8년 (1553) 별시(別試)병과25위.
배무화(裵舞和) 숙종5년 (1679) 식년시(式年試)병과11위.
배상익(裵尙益) 인조2년 (1624) 증광시(增廣試)병과4위.
배수동(裵壽仝) 중종8년 (1513) 식년시(式年試)병과5위.
배윤(裵閏) 태종11년(1411) 식년시(式年試)을과2위.
배윤명(裵胤命) 경종3년 (1723) 증광시(增廣試)병과22위.
배응경(裵應경) 선조9년 (1576) 식년시(式年試)을과6위.
배정휘(裵正徽) 현종14년(1673) 식년시(式年試)을과7위.
배추(裵樞) 태종11년(1411) 식년시(式年試)동진사3위.
배한(裵瀚) 순조4년 (1804) 식년시(式年試)병과10위.
배한(裵閑) 태종14년(1414) 친시(親試)을과3위.
배헌장(裵憲璋) 헌종14년(1848) 별시(別試)병과1위.
▶ 함흥(咸興)배씨 <1명>
배덕수(裵德秀) 선조15년(1582) 식년시(式年試)병과11위.
▶ 화순(和順)배씨 <1명>
배홍렬(裵弘烈)改字:승무(承武)선조19년(1586)별시(別試)병과3위.
▶ 흥해(興海)배씨 <11명>
배강(裵杠) 세종8년 (1426) 식년시(式年試)동진사5위.
배남(裵楠) 태종11년(1411) 식년시(式年試)동진사12위.
배둔(裵屯) 태조2년 (1393) 식년시(式年試)동진사23위.
배삼익(裵三益) 명종19년(1564) 식년시(式年試)병과8위.
배상규(裵相奎) 헌종9년 (1843) 식년시(式年試)병과10위.
배상현(裵象鉉) 헌종15년(1849) 별시(別試)병과2위.
배소(裵 素) 태종8년 (1408) 식년시(式年試)동진사15위.
배용길(裵龍吉) 선조35년(1602) 별시(別試)을과1 위.
배한주(裵漢周) 고종29년(1892) 별시(別試)병과6위.
배환(裵 桓) 태종1년 (1401) 증광시(增廣試)병과6위.
배효숭(裵孝崇) 세종29년(1447) 식년시(式年試)병과2위.
▶ 본관 미상(未詳) <6명>
배금(裵 錦) 태종1년 (1401) 증광시(增廣試)동진사16위.
배숙기(裵淑綺) 중종35년(1540) 별시(別試)병과16위.
배약(裵 약) 태종17년(1417) 식년시(式年試)동진사10위.
배은성(裵殷星) 고종13년(1876) 중시(重試)병과3위.
배철순(裵哲淳) 고종31년(1894) 전시(殿試)을과6위.
배한(裵 澣) 태종2년 (1402) 식년시(式年試)동진사23위.
※조선조 사마시(司馬試)방목 ;
▶ 김해(金海)배씨 <12명>
배견룡(裵見龍) 선조18년(1585)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7위.
배극소(裵克紹) 철종1년 (1850)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1등[장원].
배근(裵瑾) 중종5년 (1510)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 2위.
배문보(裵文甫) 중종5년 (151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6위.
배석지(裵錫祉) 선조3년 (157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3위.
배여민(裵汝閔) 효종2년 (1651)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21위.
배임(裵任) 명종4년 (1549)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위.
배찬(裵瓚) 고종11년(1874)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1등 2위.
배한휘(裵澣輝) 중종8년 (151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12위.
배홍모(裵弘謨) 숙종31년(1705)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3위.
배홍우(裵弘祐) 광해8년 (1616)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50위.
배홍필(裵弘弼) 경종1년 (1721)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7위.
▶ 성산(星산)배씨 <30명>
배겸(裵謙) 선조3년 (157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59위.
배덕린(裵德璘) 중종5년 (1510)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8위.
배상룡(裵象龍) 헌종6년 (184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8위.
배상호(裵尙虎) 인조2년 (1624)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2위.
배석곤(裵錫坤) 고종10년(187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78위.
배석기(裵石麒) 중종5년 (151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9위.
배성오(裵星五) 고종19년(1882)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21위.
배순룡(裵舜龍) 인조13년(1635)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45위.
배순명(裵順命) 세종29년(1447)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38위.
배승희(裵升喜) 고종13년(1876)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43위.
배신(裵紳) 명종16년(1561)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7위.
배우(裵祐) 정조14년(1790)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8위.
배윤명(裵胤命) 숙종39년(1713)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21위.
배윤성(裵胤性) 숙종40년(1714)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 1위.
배윤장(裵允章) 고종19년(1882)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46위.
배윤휴(裵胤休) 영조 3년 (1727)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4위.
배응경(裵應褧) 선조 6년(1573)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8위.
배응곤(裵應袞) 선조12년(1579)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0위.
배이장(裵以章) 고종19년(1882)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22위.
배이장(裵以張) 연산2년 (1496)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2위.
배익휘(裵益徽) 숙종22년 (1696)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 2위.
배장환(裵章煥) 고종10년 (187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9위
배정휘(裵正徽) 현종10년 (1669)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52위.
배정희(裵鼎喜) 고종13년 (1876)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57위.
배준수(裵俊秀) 명종13년 (1558)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16위.
배진강(裵振綱) 중종29년 (153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6위.
배진휘(裵晋徽) 숙종22년 (1696)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5위.
배충범(裵忠範) 선조 3년 (157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3위.
배한(裵閑) 태종14년 (141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6위.
배한룡(裵漢龍) 선조24년 (1591)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54위.
▶ 고부(古阜)배씨 <1명>
배경(裵褧) 정조 7년 (1783)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53위.
▶ 대구(大丘)배씨 <20명>
배경국(裵經國) 영조50년 (1774) 식년시(式年試)생원(生員) 3등 18위.
배기(裵紀) 효종 3년 (1652)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 16위.
배덕유(裵德裕) 중종 2년 (1507)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0위.
배면주(裵冕周) 헌종 6년 (184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2위.
배세익(裵世益) 숙종40년 (1714)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14위.
배수공(裵秀恭) 연산군2년(1496) 증광시(增廣試)생원(生員) 3등 16위.
배수동(裵壽仝) 성종14년 (148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1위.
배숙기(裵淑綺) 중종35년 (1540)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56위.
배엽(裵曄) 정조16년 (1792)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4위.
배우현(裵禹玄) 고종 4년 (1867)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 3위.
배원순(裵元淳) 고종31년 (1894)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91위.
배위(裵緯) 효종 5년 (165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위.
배정신(裵鼎臣) 중종 5년 (151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38위.
배정좌(裵正佐) 숙종43년 (1717)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2위.
배진신(裵震臣) 명종19년 (156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0위.
배형손(裵亨孫) 중종14년 (1519)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8위.
배홍업(裵弘業) 광해군4년(1612)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4위.
배환(裵絙) 인조17년 (1639)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1위.
배훤(裵暄) 정조10년 (1786)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6위.
배흘(裵紇) 인조11년 (1633)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1위.
▶ 풍산(豊山)배씨 <1명>
배경룡(裵顈龍) 고종 1년 (1864)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80위.
▶ 시진(市津)배씨 <1명>
배문상(裵文祥) 선조24년 (1591)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39위.
▶ 흥해(興海)배씨 <8명>
배삼익(裵三益) 명종13년(1558)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54위.
배상련(裵相璉) 헌종 3년(1837)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59위.
배상은(裵相殷) 고종 4년(1867)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4위.
배상익(裵相益) 순조 4년(180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 3위.
배선만(裵善萬) 헌종15년(1849)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9위.
배용길(裵龍吉) 선조18년(1585)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11위.
배회주(裵會周) 고종 2년 (1865)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40위.
배희목(裵熙穆) 고종22년(1885)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28위.
▶ 달성(達城)배씨 <2명>
배상선(裵相善) 고종13년 (1876)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8위.
배상익(裵尙益) 광해군8년(1616)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43위.
▶ 경주(慶州)배씨 <2명>
배상익(裵尙益) 광해군8년(1616) 증광시(增廣試)진사(進士) 3등 43위.
배상익(裵尙益) 광해군8년(1616) 증광시(增廣試)생원(生員) 3등 47위.
배유화(裵幼華) 효종 3년 (1652)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59위.
▶ 해주(海州)배씨 <1명>
배석조(裵碩祚) 정조13년 (1789)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38위.
▶ 분성(盆城)배씨 <3명>
배석주(裵碩柱) 고종10년 (187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200위.
배양호(裵養浩) 고종31년 (189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27위.
배정모(裵廷模) 고종28년 (1891)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280위.
▶ 장기(長기)배씨 <1명>
배세침(裵世忱) 선조 3년 (157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위.
▶ 화순(和順)배씨 <5명>
배숙(裵璹) 명종13년 (1558)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1위.
배연(裵練) 선조6년 (1573)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38위.
배징(裵澄) 선조 24년(1591)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2위.
배현(裵絢) 명종13년 (1558)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0위.
배홍렬(裵弘烈) 선조12년 (1579)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4위.
▶ 임회(臨淮)배씨 <1명>
배윤(裵綸) 명종 1년 (1546)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7위.
▶ 나주(羅州)배씨 <1명>
배의곤(裵義坤) 고종1년 (1864)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97위.
▶ 영암(靈巖)배씨 <1명>
배지대(裵志大) 영조11년(1735)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23위.
▶ 개성(開城)배씨 <1명>
배찬옥(裵贊玉) 순조 1년 (1801)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15위.
▶ 본관미상(未詳) <7명>
배경엽(裵敬葉) 광해군4년(1612) 증광시(增廣試)생원(生員) 3등 18위.
배대유(裵大維) 선조23년 (1590)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4위.
배득인(裵得仁) 선조23년 (1590)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55위.
배성업(裵成業) 광해군4년(1612) 증광시(增廣試)생원(生員) 2등 25위.
배영수(裵穎秀) 영조39년 (1763)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21위.
배의도(裵宜度) 태종14년 (141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8위.
배의문(裵宜問) 태종14년 (1414)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9위.
※조선조 무과(武科)방목;
▶ 신창(新昌)배씨 <1명>
배가지(裵加之)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3884위.
▶ 수원(水原)배씨 <1명>
배경남(裵京男)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2377위.
▶ 경주(慶州)배씨 <7명>
배경도(裵景度)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654위.
배산복(裵山福)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3952위.
배업룡(裵業龍)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978위.
배용(裵龍)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3081위.
배천남(裵天男)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4296위.
배한흥(裵漢興) 숙종25년 (169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2위.
배험련(裵險連)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2710위.
▶ 김해(金海)배씨 <11명>
배경일(裵京一)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842위.
배경종(裵敬宗)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901위.
배상민(裵尙敏)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5083위.
배성(裵晟) 현종13년 (1672) 별시(別試) 병과(丙科) 376위.
배여언(裵汝言) 현종13년 (1672) 별시(別試) 병과(丙科) 168위.
배예길(裵禮吉)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2120위.
배이전(裵以絟)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866위.
배이진(裵以紾) 인조14년 (1636) 별시(別試) 병과(丙科) 225위.
배홍렬(裵弘烈) 인조22년 (1644) 별시(別試) 병과(丙科) 83위.
배홍록(裵弘祿) 광해군4년(1612)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위.
배홍일(裵弘鎰) 인조14년 (1636) 별시(別試) 병과(丙科) 83위.
▶ 우봉(牛峰)배씨 <1명>
배계남(裵季男)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793위.
▶ 곤양(昆陽)배씨 <3명>
배곤희(裵昆希) 인조15년(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2414위.
배봉해(裵奉海) 인조15년(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1971위.
배인호(裵仁好) 현종13년 (1672) 별시(別試) 병과(丙科) 187위.
▶ 남해(南海)배씨 <3명>
배능(裵綾) 현종14년 (1673)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
배연일(裵連一)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314위.
배운학(裵云鶴)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1525위.
▶ 김제(金堤)배씨 <1명>
배범련(裵凡連)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4936위.
▶ 대구(大丘)배씨 <5명>
배상도(裵尙度) 인조14년 (1636) 별시(別試) 병과(丙科) 332위.
배우량(裵友良)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788위.
배운봉(裵雲奉) 인조15년 (1637) 정축별시(別試) 병과(丙科) 3887위.
배진량(裵晉良)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342.
배천경(裵天京)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3496위.
▶ 성산(星山)배씨 <8명>
배상순(裵尙舜) 숙종13년 (1687)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6위.
배상형(裵尙珩) 현종1년 (166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7위.
배선복(裵善福)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4317위.
배설(裵楔) 선조16년 (1583) 별시(別試) 병과(丙科) 45위.
배시량(裵時亮) 인조8년 (1630)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장원].
배우량(裵友良) 현종1년 (1660)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4위.
배택주(裵擇柱) 현종13년 (1672) 별시(別試) 병과(丙科) 165위.
배홍적(裵弘績) 현종13년 (1672) 별시(別試) 병과(丙科) 372위.
▶ 흥해(興海)배씨 <3명>
배상진(裵相禛)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5272위.
배인춘(裵仁春)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1199위.
배호례(裵好禮)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4848위.
▶ 남양(南陽)배씨 <1명>
배성길(裵成吉) 현종7년 (1666) 별시(別試) 병과(丙科) 19위.
▶ 곤미(昆眉)배씨 <1명>
배신(裵信) 선조16년 (1583) 별시(別試) 병과(丙科) 43위.
▶ 안동(安東)배씨 <1명>
배신룡(裵信龍) 인조15년(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4570위.
▶ 의녕(宜寧)배씨 <1명>
배영준(裵永俊)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529위.
▶ 화순(和順)배씨 <2명>
배응록(裵應祿) 선조17년(1584) 별시(別試) 병과(丙科) 126위.
배효립(裵孝立)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622위.
▶ 남양(南陽)배씨 <1명>
배의열(裵儀悅)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3455위.
▶ 괴산(槐山)배씨 <1명>
배일련(裵日連)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1829위.
▶ 여주(驪州)배씨 <1명>
배일룡(裵一龍) 인조15년 (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 531위.
▶ 신계(新溪)배씨 <1명>
배준학(裵俊學) 현종14년 (1673)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9위.
▶ 협계(俠溪)배씨 <1명>
배충우(裵忠佑) 인조2년 (1624)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2위.
▶ 진주(晉州)배씨 <1명>
배홍발(裵弘發) 효종2년 (1651) 별시(別試) 병과(丙科) 1138위.
▶ 본관미상(未詳) <3명>
배숭도(裵崇度) 인조22년 (1644) 정시(庭試) 병과(丙科) 67위.
배이관(裵以寬) 인조14년 (1636) 별시(別試) 병과(丙科) 385위.
배찬(裵燦) 성종2년 (1471) 별시(別試) 을과(乙科) 3위.
※:국조방목에는,<곤양, 공주, 김해, 대구, 성산, 함흥, 화순, 흥해, 고부, 풍산, 시진, 달성, 경주, 해주, 분성, 장기, 임회, 나주, 영암, 개성, 신창, 수원, 우봉, 남해, 김제, 남양, 곤미, 안동, 의령, 괴산, 여주, 협계, 진주.> 등 33개본관이 있다.
□ 배씨종사보감(裵氏宗史寶鑑) ; <1999년 배씨대종회 간>
- 배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나 <증문헌비고>에, <경주, 분성, 김해, 성산ㆍ성주, 달성, 흥해, 곤산ㆍ곤양, 화순, 함흥, 협계, 남해, ...이하 생략...>등 을 포함,122 개여 본이 기록되여 있으나, 경주, 분성ㆍ김해, 성산ㆍ성주, 달성, 흥해, 곤산, 화순, 함흥, 협계, 남해 등 10여 본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모든배씨는 시조인 문양공 휘 지타(祗타)와 중시조인 무열공 휘 현경(玄慶)의 후손으로서 분파(分派)ㆍ분적(分籍)된 것이다. ...중략...따라서 경주배씨의 갈래로서,분성, 성산ㆍ성주, 달성, 흥해, 곤산 등 5파 외에 상계의 소목이 실전된 경주처사공파, 성산복야공파, 화순진사공파, 함흥교서공파, 협계합문사인공파, 남해감사공파 등의 분파가 있다.
[※참고]: 배씨종사보감(裵氏宗史寶鑑)은 1999년 배씨대종회에서, <배씨역사의 보배로운 거울(寶鑑)>이라고 편찬(편찬위원장 裵相賢ㆍ동국대학교 명예교수)하였으나, 내용에 역사 왜곡과, 날조, 등으로 종사를 오도(誤導)하고 있다. 진정, 배씨종사 발전에 보감(寶鑑)이 였는지? 오감(誤鑑)으로 역기능 한 것인지? 는 전 종문 차원의 검증이 필요 할 것이다.
□ 인터넷 검색, "배씨의 유래"<1985년 조사>에는, 배씨의 총 본관은 45개이며, 인구는 323.004명이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편집자 주];
- 성관(姓貫ㆍ本貫)은, 성(姓)의 역사와는 내력을 같이 한다.
배성(裵姓)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에 한지부(漢祗部)에서 배(裵)로 득성한 이래 신라왕조가 끝나는 884년간, 고려왕조 474년간을 거쳐,16세기까지는 세계나, 성관이나, 배씨사(史)를 체계적으로 고증 할 기록이 부전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사 중에,두 분의 휘(諱ㆍ 裵賦. 裵萱伯)와, 후삼국 궁예막하의 배총규(裵悤規)장군이 올라있고,
고려사에는, 건국초에 무열공(휘 裵玄慶ㆍ고려개국공신.874~936)과 개국2등공신인 배운태(裵運泰), 그 외 서른다섯 분(35人)의 휘(諱)가 고려사절요에 올라 있으나, 역시 배씨의 세계나 혈통에 관하여는 기록이 부전한다.
- 무열공께서는, 초명이 백옥삼(白玉衫ㆍ白玉)으로, 고려 건국의 공훈으로 태조로 부터, 배현경(裵玄慶)으로 사성명(賜姓名)받았다 고 역사는 전한다.
※<고려태조는 많은 개국공신 들에게 사성(賜姓)하였는데, 1등공신 4태사인, 홍술(弘述)은 홍유(洪儒)로, 백옥삼(白玉衫)은 배현경(裵玄慶)으로, 삼능산(三能山)은 신숭겸(申崇謙)으로, 복사귀(卜沙貴)는 복지겸(卜智謙)으로 사성하였다> 한다.(※종사보감 下권 273쪽 참조)
※ 이 기록은 배씨 혈통에 많은 의구심 ? 을 이르킨다.
※ 배씨 성관(姓貫ㆍ本貫)의 내력을 위 기록 등에서 살펴본다.
- 대동운부군옥(1589), 배씨5파위계변(년대미상), 기묘보(1759)서문, 곡강세첩(년대미상), 성산임술보(1922)서문, 배씨상계 의난유래(1977) 등 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다. 즉 배씨 성관(姓貫ㆍ本貫)은 생,성 년대와 과정 등이 명료하게 고증되지 않으나, 각,각 근원(根源)을 달리하는 동성 이족(同姓異族)이다, 는 것이다.
- 국조 방목(榜目)에도, 조선조에 문과(文科), 사마시(司馬試), 무과(武科)를 통털어 급제한 배씨는 204명이다, 이 204명의 본관(本貫)은, 33개 로 기록되였다. (※ 국조방목 참조)
- 그 외, 다른 문헌에도, 배씨는 성관별로 시조(始祖)를 달리하였고, 전래한 족보 나, 세보 등에도, <OO裵氏>또는 <X X 裵氏>등으로 소속 성관을 표시 하였으며, 각 선영(先塋)의 묘갈(墓碣) 등 모든 금석물(金石物)에도 <OO裵公>ㆍ<X X 裵公>으로 소속 성관을 명기 하였고(※종사보감 上卷 사진 참조), 각 종문의 제향 질서에도, 자기들 성관을 명시적으로 기록하여 유지, 전승 시키고 있다.
- 배씨가 동성 이본(同姓異本)인 증거는, 'O O 배씨' 족보에, 중대(15~6 세기)의 몇 몇 분이, 본관이 다른 'X X 배씨' 간 통혼(通婚)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는 배씨가 동성(同姓)임은 사실이나, 동본(同本)은 아닌 '동성 이본(同姓異本)'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 1764년(갑신년)에, 무열공을 기세조(1세)로 한 "경주배씨대족보(갑신보)"가 만들어진다. 이 갑신보는, 세계가 왜곡되고 굴절된 내용으로 많은 비판이 있었고, 갑신보가 위보(僞譜)라는 판정도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논쟁은 피 할것이나, '보(譜)'의 이름을 "경주배씨대족보" 라 하여, 배씨의 성관(姓貫)에, 또 한번의 혼란을 가중 시켰던 것이다. 이 갑신보는, 새로운 "경주배씨"를 창관(創貫)시켜 전 배씨를 개관(改貫)까지 의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득성(得姓)으로부터 1700 여 년이 지난 때에, 후생(後生) 일부가 의기투합해서, 족보를 꾸미면, 창관(創貫)도 되고, 개관(改貫)도 되는 것 인지? 는 상식이 답을 해야 할 것이다.
- 이때, 족보상으로만 경주배씨가 만들어짐으로, 드러난 모순의 하나는, 당시 배씨 성관(姓貫) 중 에는, 조선 성종조(1470~1494)에 경주처사로 호(號)가 내려진 휘 충과(忠果ㆍ醫書習讀官)공을 시조로 한 '경주배씨'일문(一門)이 엄연히 계대승손하고 있었음이다. 갑신보(1764)의 경주배씨가, 이미 수백년을 번연하고 있는 진짜'경주배씨'와는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인가? 부끄러운 행적이 아닐 수 없다.
- 갑신보의 경주배씨족보는, 갑신보를 지지하고, 추종하는 세력들의 족보였지. 전 배씨의 대동보로는 공인받지 못했음이, 국조방목(※공문서)에서도 나타난다. 즉, 조선조에 과거에 급제한 배씨는, 204명인데, 163명은 갑신보(1764) 전(前) 에 급제하였고, 41명은 갑신보 후(後) 에 급제 하였다. 갑신보(1764) 후 에 급제한 41명의 방목(榜目)도, <곤양배씨, 공주배씨, 성산배씨, 흥해배씨, 김해배씨, 고부배씨, 대구배씨, 풍산배씨, 달성배씨, 해주배씨, 분성배씨, 나주배씨,개성배씨>등 13개본관 이다. 이 41명은 조선후기인 1800년 전 후에 등과(登科) 하였는데, 전(全) 배씨가 갑신보(1764년)에서 "경주배씨"로 합의 개관(改貫)했다면, 의당 '경주배씨'로 방목에 올랐어야 마땅하였을 것이다. 또한, 기존 '경주배씨' 에서도, 갑신보(1764) 전 에, 광해군 8년(1616)에 증광시 진사.생원 양과에 급제한 배상익(裵尙益)과, 효종 3년(1652)에 증광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한 배유화(裵幼華), 외 무과에 급제한, 배경도(裵景度ㆍ효종 2년ㆍ1651), 배산복(裵山福ㆍ인조15년ㆍ1637), 배업룡(裵業龍ㆍ효종2년ㆍ1651), 배용(裵龍ㆍ인조15년ㆍ1637), 배천남(裵天男ㆍ인조15년ㆍ1637), 배한흥(裵漢興ㆍ숙종25년ㆍ1699), 배험련(裵險連ㆍ인조15년ㆍ1637) 등 아홉분(9人)은, 역시 '경주배씨'이다. 이 아홉분은 갑신보 후의 경주배씨와는 어떤 관계와 의미 를 갖는가? 깊이 새겨 볼 일이다.
- 1999년에 발간한 배씨종사보감에서는;
배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나,<증문헌비고>에, 122개여 본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10여본 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모든 배씨는 시조인 문양공과 중시조인 무열공의 후손이며, "경주배씨"의 갈래라고 적시 하고 있다. 이런 이치에도 합당치 않는 기록들이 배씨의 혈통이나, 성관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키우며, 종사에도 혼란만 가중시키는 위필(僞筆)인 것 이다.
- 본관(本貫ㆍ姓貫)이 다르다 함은, 낙동강과 압록강이 같은 강(江)은지만,그 시원(始源)이 다르고, 같은 소나무라도 뿌리가 다르듯이, 성(姓)은 같으나 뿌리[始源]가 다르다는 뜻이다. 122개의 다른 뿌리가 있었다면, 그 뿌리들이 다른 근원을 갖었다는 뜻 아닌가? 다른 근원을 가진 122개본관이 어떻게 경주배씨의 갈래이고, 현존하는 10개의 본관도, 경주배씨의 갈래인가?
갈래는, 뿌리가 가지[派]로 둔갑하여, '경주배씨'란 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支派]라는 뜻 아닌가?
1764년에 생긴 경주배씨에서 어떻게 가지[支派]가 생기고 갈라질 수 있다고, 갈래[派]라고 하는가?
□ 갑신보가 본관(姓貫)을 '경주'로 선택 한 근거는 합당한가? 살펴보자.
첫째: 무열공의 려사열전 의,"경주인(慶州人)" 이란 기록이 본관을'경주'로 선택한 배경이였다면, 무열공 탄생년대 보다 856년 전 한지부에서 배씨가 득성된 사실과, 시조(祗타)공의 가리촌장 역사를 거부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둘째: 배씨득성의 터전(땅)이 지금의 지명(地名), '경주'가 선택의 배경이라면, 경주역사기록을 외면한 것 이다. 경주라는 지명이 처음 생긴년도는 서기917년, 고려태조가, 김부(경순왕)를 '경주사심관'으로 임명한데서 경주라는 지명이 처음 쓰였다.
배성(裵姓)은 이미, 경주라는 지명이 생기기 855년 전에 창성(創姓)되었고, 지타공은 경주가 생기기 900여년 전 분으로, 살아계셨을 년치가 아니기 때문 이다.
- 배씨종사보감에, ...<서라벌 6부촌장(지타공 포함)들은 '천강(天降)하신 신인(神人)'이라 기록된바 있고....>이다. 하면, 배씨의 본관도,'경주배씨'보다 "하늘배씨"는 어떨가?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의, "비록 자손이 흩어져 수 백대(代)를 살아도 본관(姓貫)은 바꾸지 않는다" 는 말씀을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 이다 !.
[제공]: 우강 배재기(배씨종사연구위원ㆍ성산배씨 29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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