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육의 여명 4>
감고당 길과 여성 독립운동가의 길
- 휘문, 풍문, 덕성여고
1. 휘문과 풍문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고 그리고 ‘안동별궁(安洞別宮)’은 묘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휘문고교는 민영휘 선생이 세운 학교이고, 풍문여고는 그의 처 안유풍 여사의 유지(遺志)로 안동별궁 터에 세워진 학교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전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 네거리 북쪽에 풍문여고가 있었습니다.
2017년에 강남 내곡지구로 이사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서울공예박물관’이 한창 준비 공사 중입니다.
원래 이 곳은 조선 500년 동안 왕실 소유의 땅이었습니다. 한 때는 성종 임금님의 형 월산대군이 ‘풍월정’이란 정자를 짓고 음풍농월하기도 했는데. 고종은 아들 순종의 혼례를 앞두고 이곳에 ‘안동별궁’을 짓고 가례도감을 설치했습니다.
갑신정변 등 역사의 고비에도 자주 등장하던 ‘안동별궁’은 순종이 순명효황후 민비를 맞아들이는 대례를 치룬 곳이고,
민황후가 죽자 1906년 순정효황후 윤비와 가례를 올린 명소입니다.
<안동별궁에서 순종과 순정효황후 가례 재현 2016. 풍문여고>
휘문의숙을 세운 민영휘 선생은 명성황후 민비의 친척으로 이조판서의 요직을 거쳤으며 친군 경리의 일을 보며 이재(理財)에도 밝아 재산가로도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1904년 종로구 경운동 자택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세워 신학문의 문을 열자 이를 가상히 여긴 고종 임금은 1906년 그의 이름자에서 한 글자를 취하여 ‘휘문의숙(徽文義塾)’이란 교명을 하사하고 관상감(觀象監) 터를 학교 부지로 내려 교사를 짓게 했습니다. 현재 계동 현대건설 본사가 들어선 곳입니다.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근처입니다. 1978년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길 때까지 휘문은 이 곳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박종화, 정지용 김영랑 이태준 등 1920, 1930년대 문단에 회자되던 많은 문인들이 휘문 출신입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 정지용 <호수>
민영휘 공의 아들 민대식 선생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돼버린 ‘안동별궁’터 4천여 평을 사들여 1937년에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우고, 1944년에는 민대식 공의 손자 민덕기 선생(민영휘의 증손자)이 증조모 안유풍 여사의 유지를 받들어 안동별궁 ‘휘문소학교’ 터에 ‘풍문여학교(豊文女學校)’를 세웠습니다. 할머니 성함에서 ‘풍’자를 따서 학교 명칭을 정한 것입니다.
민영휘 부부와 그 후손 4 대에 걸쳐 등장한 학교 이름은 광성의숙 → 휘문의숙 / 휘문소학교 →풍문여학교로 정리 되는데 2017년 안국동에서 강남 내곡지구로 옮겨간 ‘풍문여자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 되어 ‘풍문고등학교’가 되었습니다.
풍문여고는 반효정, 손숙, 김을동, 김해숙, 등 많은 연예인을 배출했습니다. 가수 김상희도 풍문 출신입니다.
2. 덕성여고
‘덕성여고’의 뿌리는 1920년 차미리사 선생이 세운 ‘근화여학교’입니다.
근화(槿花) - 무궁화꽃이라는 학교 이름부터가 민족정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덕성(德成)’이라는 이름은 1938년에 생겼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뿌리를 상징하는 ‘근화’란 이름이 불온하다 하여 폐교를 종용하여 ‘덕성’으로 교명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차미리사 선생은 무궁화 꽃 모양의 교표와, 무궁화의 푸른 잎과 보라색 꽃을 상징하는 초록색 바탕에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교복치마는 그대로 입게 하여 학생들이 조선의 딸임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무궁화꽃 자수(刺繡)는 이 학교의 오랜 전통으로 전해 내려 왔습니다.
2020년 11월 23일 종로구 ‘도로명주소위원회’는 건학 100주년을 맞이하는 덕성여고 앞길(율곡로 3길)을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 새로 명명하여, 지금까지 불리던 ‘감고당(感古堂)길’과 함께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안국동 네거리 옛 풍문여고 앞에서 덕성여고를 거쳐 옛 경기고교(정독도서관)에 이르는 길입니다. 1930년 광주학생 만세운동의 열기가 전국에 확산되자 근화여자학교 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외치며 뛰쳐나왔던 그 장소를 기념하여 제정된 명예도로명입니다. 주체적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참한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근화여학교 졸업생 21명을 ‘독립유공자’로로 서훈했고, 차미리사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니 덕성여고 앞길을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 명명한 것은 참으로 시의 적절한 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덕성여고 정문 앞에는 ‘감고당(感古堂) 옛터’라는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감고당은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6년여 폐서인 생활을 하며 시련을 견디던 여흥 민씨의 사가(私家)입니다. 고종의 비 명성황후 민비도 8세 때 여주 생가에서 상경하여 왕비로 간택될 때까지 이곳에 거하던 것을 기념하여 옛 풍문여고 - 덕성여고 - 경기고교로 이어지는 길을 ‘감고당길’이라 불러 오다가 금년에 새로 ‘여성독립운동가길’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교육의 뿌리를 내린 사람치고 간난고초를 겪지 않은 분이 한 분인들 있을까만 덕성여고와 덕성여대를 일구신 차미리사 선생님은 진정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마포 공덕동에서 태어나서, 당시의 풍습대로 16세에 결혼하였는데 19세에 남편과 사별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생은 교회를 통하여 남편 대신 신앙을 얻게 됩니다. 차미리사(車美理士)라는 이름도 이때 교회에서 지어준 세례명 ‘mellisa’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지금 남대문 시장에 자리한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나가면서 신교육에 눈뜨게 되고 여권신장의 필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선생의 성실함이 주변에 들어나자 읠리엄 스크랜턴, 헐버트 같은 선교사가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보내주었는데 선생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까지 가서 10여 년간 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봉사의식에 눈뜨게 됩니다.
1917년 귀국한 선생은 배화여고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며, 교사로 함께 근무하던 남국억 선생을 만나면서 그의 민족의식은 더욱 강해지고 무궁화 사랑은 확고해집니다.
1920년 5호선 경복궁역 근방의 도렴동 종교교회(宗橋敎會)의 방 한 칸을 빌려 불우한 여성들을 모아놓고 ‘야간 강습소’를 운영한 것이 근화학교의 시작이고 덕성여고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21년 차미리사 선생은 8개월여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자후를 토합니다. 감동한 독지가들이 다소간의 학교 발전 성금을 기탁하자 이것으로 종로 청진동에 한옥 한 채를 장만하여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고, ‘양복과’와 ‘상업과’를 신설해 여성의 원활한 사회 진출을 위한 ‘실업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34년에는 안국동의 2층 목조 건물을 구입하여 제대로 된 학교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산실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던 곳이고. 지금의 덕성여중 자리입니다. 갑신정변의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서광범의 집터였다는 설도 있는 곳입니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유명 배우 김지미와 한혜숙, 전원주 같은 탤런트가 덕성여고 출신입니다.
지금 우리가 북촌이라 부르는 곳에는 많은 중등교육기관이 터 잡고 있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의 길’(감고당길)로 연결되는 풍문, 덕성, 경기. 헌법재판소 자리의 경기여고와 창덕여고, 계동길로 연결되는 휘문, 대동, 중앙 등 그 많은 학교 중 아직도 북촌을 지키고 있는 학교는 덕성 중앙 대동 세 학교밖에 없습니다.
첫댓글 北村이며서 Book촌이네요
역시 이 교수님의 촌철살인은 유효합니다.
Book 촌은 보통명사고 고유명사는 정독도서관인가 합니다.
그 많던 학교 앞 Book店들은 다 어디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