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음 중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당의 통치체제를 받아들여 3성 6부를 기본으로 하는 행정 조직을 갖추었다.
② 주요한 사상으로 불교가 유행하였고, 유교도 중요시되었다.
③ 수도인 상경을 비롯하여 5경을 두었고, 중요한 지역에는 15부를 설치하였다.
④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의 유민이었다.
⑤ 건국초기에는 당과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정답: ⑤
* 발해에 대하여
-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 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 고구려 불교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문왕은 스스로를 불교적 전륜성왕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수도였던 상경에서 발굴된 10여 개의 웅장한 절터와 불상은 발해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 준다.
발해는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는데, 당의 국자감 관제를 거의 본뜬 것이다.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러 명이 나온 것으로 보아 유교도 중요시한 것을 알 수 있다.
-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수도인 상경을 비롯한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렸다. 발해의 주민 중 다수는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에 이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 발해는 건국 초기인 2대 무왕 때에 당.신라와 대립적이었다. 발해가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며 세력을 확대하자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 3대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