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평 】
BOOK REVIEW
낯익은 주제의 낯설게 하기
- 심윤경의 『달의 제단』
김 현 종*
Ⅰ. 서언
심윤경의 달의 제단(2004년, 문이당)은 그의 처녀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2002년, 문이당) 이후 두 번째로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성장 소설로서 미려한 문체와 여성 특유의 감각적 언어를 구사하여 아름답게 써 내려간 한 편의 동화라고 한다면, 달의 제단은 여성으로서는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종족주의나 가문주의의 테마를 조선조의 내간체 문장으로 빗질하여 격조 높게 구사함으로써 일부 신세대 여성 작가들의 속된 감상적 아류를 멀찌감치 벗어나는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작품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200여 년 전의 고대사와 현대사를 병치구조로 직조하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신 구세대의 갈등이나 남성 우월주의 같은 전근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 셋째는 인물간의 갈등 구조를 다양하게 전개하여 갈등의 진폭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Ⅱ. 작품의 병치 구조
이 작품은 화자인 조상룡이 전개하는 현대사와, 200여 년 전의 언찰에서 친정할머니와 손녀딸(10대 조모인 안동김씨 소산할매)이 전개하는 고대사가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병치되고 있다. 여기서는 스토리의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1. 조상룡 따라가기
‘나’(조상룡)는 서안 조씨 17대 종손으로 할아버지의 반대로 인하여 정상적인 결혼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서자로 태어났다. 가문의 중흥을 일으킨 할아버지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버지에게 종부(宗婦)로서의 격에 맞는 해월당 유씨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으나, 아버지는 이를 어기고 중학교 미술교사와 결혼하며 나를 낳은 후 아버지는 자살하고 만다. 나는 서자로서 종손이 되기는 하였으나 할아버지는 종손으로서의 성품을 갖추지 못한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나 역시 종손으로서의 역할에 늘 불안해하면서 열등감으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낸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효계당으로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와 아들을 낳지 못해 내침을 당한 행랑어멈인 달시룻댁, 반 병신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딸 정실과 함께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로부터 선산 봉분을 수습하던 중에 나온 10대 조모의 내간 언찰을 해독하라는 명을 받게 되고 모두 8편의 언찰을 차례로 해독해 나간다. 언찰에는 14대조 판서 벼슬의 조원찬 할아버지가 하녀를 탐하여 그녀의 정인을 죽이고 하녀 역시 자살하여 그 원혼 탓에 가문이 대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으나 할아버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모정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나는 달시룻댁의 딸 정실에 대한 질투심을 품다가 급기야 정실과 애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며 임신에 이르게 된다. 이후 정실과 결혼하겠다는 나의 말에 할아버지는 정실을 납치해 떠나보내고 가문 명예에 반하는 언찰을 불사르기 위해 일으킨 불로 효계당은 잿더미로 변하며 할아버지와 나 역시 불 속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2. 서한 따라가기
의고투 내간체인 소산할매의 서한은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지만 주석을 참고해 가면서 읽다보면 당대 여인들의 예스러운 정서를 가깝게 느껴볼 수 있다. 특히 이 언찰들은 조상룡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궤를 같이하면서 갈등의 진폭을 상승시키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편의상 편별로 나누어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편) 시아버지의 생신에 선물을 보내주신 친정할머니에게 감사하는 글
→ 손녀딸을 시집 보내고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는 글
2편) 자신이 임신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할머니의 병환을 걱정하는 글
→ 회임을 기뻐하며 병이 나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글
3편) 아들 민재를 낳아 잘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글
→ 아이를 탈 없이 잘 키우고 며느리로서 예의범절을 지키라는 글
4편) 남편이 와병하여 집안이 흉흉해지고 와병의 탓이 며느리를 잘못 들인 때문에 그렇다는 것과 옛 조상 중에 하녀를 탐하여 그 정인을 죽이고 하녀도 자살한 일이 있음을 전하는 글
→ 조신하게 처신하여 집안을 평안하게 하라는 글
5편) 아들 민재가 돌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글
→ 손녀딸에 대한 위로와 웃어른을 잘 모시라는 글
6편) 남편마저 병이 깊어 시름이 많으나 다행히 잉태하게 되었다는 글
→ 하늘이 도와 생남하기를 바란다는 글
7편) 남편이 죽자 시아버지가 딸을 낳으면 자진하라고 했다는 글
→ 딸을 낳더라도 자진하지 말고 기별하면 데리러 가겠다는 글
8편) 딸을 낳게 되자 시아버지가 아이를 밟아 죽였다는 내용과 여자의 몸으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고 하며 자진한다는 글
Ⅲ. 여성으로서의 남성 보기
심윤경의 두 소설은 주제나 소재뿐만 아니라 구조면에서 전혀 공통점이 없어 동일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화자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작가는 30대의 여성임)이 굳이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감추어진 의도가 있지 않겠느냐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여성 작가가 남성의 시각으로 작품을 쓴 예는 많지만 그것 자체의 신기성보다는 여성의 남성적 시각이 온당하고 또 그만큼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
이 작품은 화자를 남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 화자였다면 자칫 학대받는 여성의 입장에서의 자기 한탄이나 신세타령에 그칠 수 있는 주제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작자의 목소리를 담은 화자인 조상룡이 온전한 남성 정체성의 모델이라고 보기엔 무리한 점이 있다. 예컨대, 아들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그리웠던 생모와의 만남이 사건 전개의 아주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모자간의 끈끈한 혈육의 정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플롯 전개의 한 장치로만 기능하게 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흔히 말하는 ‘가문’의 중시나 남성 우월주의가 단순히 여성을 폄하하고 짓밟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은 아닐진대 손녀딸을 밟아 죽이는 몰인간성으로 남성을 규정하는 전횡은 성별을 떠나서 인간의 본성을 넘어선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가부장적 권위는 한 가정을 이끄는 세련된 위엄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지키려는 고독한 결단의 산물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을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게다가 “개뿔 잘난 것도 하나 없는 내가 그나마 내세울 것이라고는 유서 깊은 가문의 종손이라는 것뿐이었다.”(111쪽)라는 식의 자기 냉소주의는 편집증적 자학으로 보기에 충분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상룡이라는 남성 화자가 끊임없이 여성을 옹위하는 입장에 서서 그 동안 왜곡되어 왔던 남성 우월주의의 편향을 극복해 보려는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비본질적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남성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려 하지 않고, 본질적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남성을 동반자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을 줄기차게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즉 가부장적 전통주의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소설들이 견지하고 있는 남성에 대한 적대적 입장보다는 정실에 대한 조상룡의 인간형의 변화를 통해 점점 성숙해 가는 발전적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그것이다.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남성 작가가 쉽사리 다루지 못할 접근법이라고 말한다면 섣부른 생각일까?
Ⅳ. 갈등의 미학
이 소설은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 남성 대 여성의 갈등을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할아버지와 나로 대표되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은 가문을 중시하는 할아버지와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조상룡의 갈등으로 대표될 수 있으며, 남녀 간의 갈등은 정실에 대한 나의 생각의 진행적 변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쏘아보는 눈빛과 항상 꼿꼿한 허리’로 ‘선비의 풍모가 꼿꼿하게 살아’ 있었고 ‘재력과 세도’에서 범속함을 넘어서고 있는 할아버지는 쇠락한 가문을 중흥시킨 입지전적 인물로서 명문 종가의 위신과 전통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영웅적 인물이다.
집안으로 보자면 17대 할아버지인 양정공 조춘억은 양정(襄靖)이라는 시호와 불천위(不遷位)의 교지를 받은 조선 선조 때의 무관이었으며, 14대 판서 벼슬을 지낸 원찬 할배 때 최대 융성기를 맞은 이후 차츰 가세가 쇠락하여 상민과 다름없는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가 다시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큰 돈을 벌어 집안을 부흥시켰다.
할아버지의 가문에 대한 애착은 봉분을 수습하다 나온 언찰의 해석을 내게 맡기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일은 앞으로 우리 집안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이다. 혹여 집안의 명예에 해악이 될 말이 섞여 있을 줄 누가 짐작하겠느냐? <중략> 가문의 운명이 좌우될 만한 일이라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조심해 보는 것이 온당하다.”(19쪽)면서 전문가에게 맡겨야 될 일을 국문학을 전공하는 내게 맡기게 된다. 이는 조상의 행적 중 가문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내용이라면 세간에 그 내용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가문 제일주의적 사고방식의 결과이다.
할아버지와 나의 갈등은 언찰의 해독과정에서 골이 깊어진다. 14대 원찬 할배는 집안의 유일한 당상관으로 추앙받는 어른이었으나 아랫것에 욕심을 내 동침을 강요하다가 처녀가 정인과 모의하여 달아나려고 하자 총각을 때려죽이고 처녀도 혀를 깨물고 자결하고 만다는 내용의 언찰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할아버지에게 갖다 드린다. 할아버지는 이에 대해 조상의 부끄러운 일을 수습하여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 종손으로서 마땅한 일을 언찰에 쓰인 그대로 내미는 것이 종손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다그친다.
갈등의 최고조는 마지막 언찰에서 소산할매가 딸을 낳자 시아버지가 밟아 죽였다는 처참한 소식과 자기도 역시 자진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해석하여 갖다 드리는 부분이다.
나는 “효계당의 주인이자 이 집안의 계승자로 살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사람에게, 아무리 진실이라 한들 이토록 가혹한 결말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진정 부당한 일임에 틀림없다”는 뜻으로 언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언간이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를 더 이상 이 집안의 종손이 아니라고 내치며 언간을 불사른다. 결국 언간을 지키려는 나와의 몸싸움도 무위로 끝나고 언간에 붙은 불은 효계당 전체로 번지게 된다. 최후의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불 속에서 나를 원망하며 나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나는 불 속에서 혼령으로 살아난 조상 할머니와 해월당 어머니, 정실이 가 내미는 손을 잡으려 하나 나 역시 업보의 무게로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할아버지는 언찰의 진위와는 관계없이 가문의 중흥이라면 진실마저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가문 제일주의 인간형이다. 할아버지는 가문을 위해서 아버지가 선택한 여인보다는 명가의 종녀인 해월당 유씨를 택하도록 하였고, 내가 선택한 정실마저도 임신한 배를 사정없이 발길질하도록 하여 내쫒아 버리고 만다. 할아버지는 모름지기 종부는 조상이 맺어주는 것으로 핏줄이 중요하며, 어떤 가르침으로 양육되었는가가 중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렇게 할아버지는 전횡적 권력을 행사하는 영웅적 인물이기는 하지만, 반면에 집안을 일으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금욕생활은 물론이고, 자신의 할 도리는 다하면서 자꾸 엇나가는 하나뿐인 혈육을 위해 살아온 불쌍한 사람이기도 한 양면성의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영웅적 인물인 것이다.
이에 반해 손자 조상룡은 생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생의 근원이 똑바르고 당당하지 못한 서자로서의 열등감, ‘탕녀(생모)’와 ‘자살부(아버지)’의 기억으로 살아온 ‘반영웅적 소외자’이다. 그는 영웅적 인물인 할아버지로부터 공격받거나 지탄받는 피해자로서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조심스러운 일탈을 꿈꾼다. 그의 이러한 일탈 행위는 대학 1학년 때 만난 소진이라는 여학생과의 섹스로 나타나지만 그녀의 배신은 그를 더 큰 소외감으로 몰게 되고 급기야는 ‘아이러니 열등인’인 정실과의 정사로 발전하게 된다. 정실은 일상인에 비해 정신적, 육체적 불구자로서 소외자인 조상룡에게는 그의 열등의식을 해소하고 그 동안 받아왔던 피해 의식을 투사할 수 있는 대상으로 기능하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별별 험악한 욕설을 퍼부으며 황소라도 때려잡을 기세로 거칠게 내리찍어 댔지만 겹겹이 완충제로 포장된 그녀의 몸뚱이는 짐승 취급을 받는 모욕조차 깨끗이 흡수해 버리는 듯했다.”(122쪽)
조상룡의 소외의식을 위무하는 또 다른 기재는 언찰의 해독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옹위하는 가문의 명예가 사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찰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할아버지에게 내보이는 데서 나타난다. 즉 집안에 계속되는 절손의 위기는 악행을 저지른 조상의 업보로 그리 된 것이며, 그런 피해자의 한 가운데 상처받은 여자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의 전형적 인물로 정실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나와의 갈등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으며 결국 두 사람 모두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할아버지가 언찰의 내용을 인정한다는 것은 지금껏 자신이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찰을 불태워 버린 것이고, 나 역시 할아버지의 완고한 생각을 고쳐보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초월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2. 남성과 여성의 갈등
이 소설에서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은 정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실은 아들을 낳지 못해 효계당의 행랑어멈으로 전락한 달시룻댁의 병신 딸이다. 정실은 두 다리가 성치 못할 뿐만 아니라 몹시 뚱뚱하여 여자로서의 매력 이나 효계당의 종손부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추하고 천하다는 말만으로는 그 비루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밥맛 떨어지는 정실은, 주제에 한참 맞지 않게 훌륭하고 따뜻한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건 몹시 불공평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견디기 힘들었다.”(95쪽)고 할 정도로 못난 여자였지만 정실에게는 내가 갖지 못한 어머니가 있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나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할 정도로 나는 모정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청소 잘못한 것을 기화로 정실을 짐승처럼 겁탈하게 된다. 그러나 정실은 나의 이러한 폭력을 오히려 감싸며 나 역시도 정실과의 정사를 ‘내 몸을 두기에 이토록 아늑한 공간은 난생 처음’(128쪽)으로 느낄 정도로 편안함에 안도하게 되지만 심리적인 갈등은 병신을 범하였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다가 정실을 범한 사람이 여럿 있다는 말을 듣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우직하게 돌아오는 사랑과 믿음의 메아리는 끝없이 목말라 하고 두려워하며 의심하는, 상처받은 마음에 더할 나위없는 치료제가 되어 주었다.”(172쪽)
정실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가는 중 정실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자 아이를 낙태시키려 하지만 “머라 해도, 얼라는 내 끼다.”라며 오히려 좋아하는 정실을 보자 할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알리고 정실과 결혼할 것을 결심하지만 할아버지는 정실과 달시룻댁을 내쫒아 버린다.
정실은 불구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와 도덕적 위장에 대한 풍자와 고발의 기능을 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실은 조상룡의 생모를 “하루도 사내를 품지 않고서는 잠을 못 자”는 색녀라고 말하기도 하고, “더러운 밑구멍으로 들락거린 사내가 나 말고도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조상룡과 그의 가문의 위선을 조소하기도 한다. 이런 정실에 대하여 조상룡은 애증의 감정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정실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되면서 가문의 허상보다는 인간적인 삶에의 귀착을 꾀함으로써 정실과의 갈등을 해소하게 된다.
Ⅴ. 결언
봉건시대의 전제적 유물인 가문 제일주의는 오늘날에 있어서 외형상 사라져 버린 구습의 한 편린일 수 있겠지만 언제든지 다시 재현될 수 있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달의 제단은 조선시대 여성이 겪었던 수난사를 현대라는 공간에 수납하여 보기 좋게 진열해 냄으로써 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진정한 혈연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 작품은 주제를 형상화함에 있어서 현재와 과거의 두 시간 축을 차례로 교직하면서 긴장의 파고를 높여갔으며, 여성이 여성의 입장에서가 아닌 남성의 입장(다소 불만스럽긴 하지만)에서 여성의 수난사를 위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신 구세대의 갈등이나 남녀 간의 갈등을 인물의 성격적 갈등으로 치환하여 인간의 본성을 천착해 내는 과정으로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조선조 때의 내간을 거리감 없이 읽히도록 애쓴 결과를 고스란히 살려내는 작가의 역량 또한 그 어느 것보다 값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