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④
* 발해에 대하여
- 보기의 자료는 발해의 수도인 동경과 상경 출토 치미(용마루 끝의 장식 기와)와 석등이다.
-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건국 초 당이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3성 6부 중앙 정치 조직을 완성하였고,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발해가 가장 응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그리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조직이 완비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① 발해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왕들이 인안(무왕), 대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④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조선 후기에 중앙군으로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의 5군영 체제가 완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