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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말바위 안내소 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말바위로 부터 창의문까지 구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곳입니다.
따라서 신분증이 없이는 이곳을 방문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 성곽의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돌들이 있습니다. 이는 대개 성벽축조 당시 천자문 글자에서
따온 공사구역표시(검劒 강崗 진辰), 공사담당 군현(의령, 흥해 등) 그리고 공사일자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입니다.
서울성곽은 태조5년(1396) 처음 쌓을때 부터 전체 59,500자 (약 18.2km)를 600자(약 180m)단위로 나누어
총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순으로 표시하였습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자에서 시작한 구획표시는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조민벌죄(弔民伐罪:불쌍한 백성을 돕고 죄지은 자를 벌하다)의 조(弔)자에서 끝납니다.
성벽 곳곳에는 진자종면(辰字終面:진 자 구역의 끝지점),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강 자 구역 600자)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 조선 팔�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하였기 빼문에 도(道) 또는 현(縣)의 담당지역을 표시하여
의령시면(宜寧始面:경남 의령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面:경북 영일군 흥해 시작지점)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공사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가경9년(1804) 갑자10월일(嘉慶九年 甲子十月日) 패장(牌將) 오재민(吳再民),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邊首:기술자, 편수) 용성휘(龍聖輝)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합니다.
잘 찾아보기 바랍니다.
서울성곽안내 관광지도입니다.
숙정문에서 바라 본 북악 스카이웨이의 팔각정입니다.
다소 먼 거리라 흐릿합니다.
숙정문에서 말바위 안내소로 내려오다가 성밖을 보면 커다란 건물이 보입니다. 삼청각입니다.
이 삼청각은 부자동네인 성북동의 바로 옆에 있고 위치와 경관이 뛰어날 뿐 아니라 정부청사에서도 가까와서
정치인들과 부호들의 출입이 잦았던 곳입니다.
삼청각은 1972년 건립된 1970~1980대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던 곳입니다. 여야 고위정치인들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 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에 예향으로 이름을 바꾸고 일반음식점
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후 건물과 부지를 인수한 건설업체가 고급빌라를 짓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나 문화재 보존여부에 대한 판단문제
로 건축허가가 유보되다 2000년 5월에 서울시가 삼청각의 부지와 건물을 도시계획시설상 문화시설로 지정하여,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후 2001년에 새로운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운영은 세종문화회관이 맡고 있습니다.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 한식당, 찻집, 객실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대지 5,884평, 연건평 1,331평에 6채의 한옥이 있습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연중 전통공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출입지역 허가증인 패찰을 반납하고 나서도 성벽은 계속됩니다. 중간에 와룡공원 출입을 위한
도로 때문에 잠간 끊어지는곳이 있으나 서울과학고등학교 까지 성벽은 계속됩니다.
계속되던 성벽은 평지인 서울과학고등학교에서 끊어 지고 없습니다.
길 건너에 경신고등학교가 있는데 일부 성벽이 학교 담장의 기초가 되기도 하다가 일반 주택들이 있는
곳에서는 성벽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울과학고등학교 근처에는 성벽길에서는 다소 멀어지나 가 볼만한 곳이 꽤 있습니다.
서울과학고등학교 후문인 혜화로에서 성북로로 나가면 서울성북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초등학교의 왼쪽으로 뒷편에 간송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국보급 문화재를 다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매년 개방때 마다 긴 줄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거부중 한사람 이었던 간송 전 형필선생께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자
전 재산을 바쳐 일본과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들인 문화재로 가득한 곳입니다.
또 성북파출소의 맞은편 골목안에는 정갈한 한옥인 최 순우 옛집이 있습니다.
또 이 성북길에서 삼청터널로 가는 길을 조금 더 가면 상허 이태준 고택이 있는데 지금은 그 후손들이 수연방이라는
찻집을 만들었다 하며, 더 가다보면 왼쪽으로 오르막을 더 올라가서 심우장이라는 집이 있는데 만해 한 용운
선생께서 만년을 보내신 곳이라 합니다. 조선총독부를 보기 싫어서 성벽을 등지고 남쪽으로부터 돌아 앉은 집이라
햋빛이 잘 들지않아서 한낮에도 쓸쓸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합니다.
경신고등학교 담장을 지나고 나면 성벽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민가의 가운데를 지나게 됩니다.
이 길을 가다 성벽이 다시 나타나면 그 끝이 서울시장의 공관입니다.
이 성벽은 일부가 수리되어 있으나 하부는 조선초기의 성벽 양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길 때문에 성벽은 끊어 졌으나 그 끝자락에 서울시장 공관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의 뒤는 바로 혜화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입니다.
혜화문은 동소문의 정식 이름입니다.
혜화문은 숙종10년(1684)에 문루를 새로 지은후에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에 문루가 퇴락하여 이를 헐어
버리고 홍예만 남겨두었는데 일제가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져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문은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북쪽으로, 1992년에 다른 문들을 참고하여 새로 지은 것입니다.
혜화문이 다른 소문들과 다른 점은 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뿐만이 아니라, 다른 소문들은 지키는 출직호군(위병)
이 20명인데 반해 이곳 혜화문에는 대문들과 같이 30명의 출직호군들이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북대문인 숙정문과 북소문인 창의문이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늘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소문인
이곳이 실질적인 북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래 혜화문이 있었던 길입니다.
이 길은 예부터 양주 포천 방면으로 통하는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혜화문에서는 큰길이 있어서 바로 길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까지 가서 돌아와야
합니다. 혜화문의 맞은편에서 부터 성곽이 나타 나는데 여기서 부터 동대문까지 성곽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길은 서울시에서 밤에 걷기 좋은 길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언덕길은 한참 올라 가다보면 조그만 암문이 있고 이 암문을 들어가면 낙산공원이 나타납니다.
낙산은 산 모양이 낙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낙타산으로도 불립니다.
서울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전망과 오밀조밀한 낙산 아래 동네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에게
촬영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장으로도 애용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상 주산인 북악의 좌청룡에 해당합니다. 서편의 우백호인 인왕산과 대치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로서의 한양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로 산의 정점이 없고 꼭대기에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여 놓았습니다.
낙산공원이 끝나는 곳의 성곽안쪽으로 마을이 들어서 있습니다. 오래된 한옥들이 많은 마을인데 골목길의
지저분함을 감추고자 벽에 그림들을 그려놓아 벽화마을로 유명합니다.
벽과 계단에 그려 놓은 꽂그림은 유명합니다.
일박이일이란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이 승기가 다녀간 후에, 천사의 날개를 그린 그림은 유명세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밤 늦게까지 시끄럽게 하여 민폐가 심하므로 작가가 지웠다고 합니다.
밑의 사진은 성곽근처 집의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입니다.(이 여인은 관광객입니다).
낙산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가다 성곽이 끊어진 곳에 흥인지문(興仁之門)이 있습니다. 동대문이라고도 하지요.
현판에 특별히 지(之)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 앞의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라고 합니다.
흥인지문은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입니다. 문루를 2층으로 만든것도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습니다.
이 문은 성곽을 쌓기 시작할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태조7년(1398년)에 완성하였습니다.
단종원년(1453년)에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6년(1869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흥인지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문루는 구조의 맞춤은 간단하고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보물 1호의 건물입니다.
도성의 성문중 유일하게 성문 바깥쪽으로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지형이 낮고 평탄해서 외침을
막기에는 부족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지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왜구가 가장 먼저 입성했던 문이 바로 흥인지문이라 합니다.
편액은 오행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의(義)는 서쪽을 상징해서 돈의문(서대문)
예(禮)는 남쪽을 상징해서 숭례문(남대문), 지(智)는 북쪽을 상징하며 정(靖)과 의미가 상통하기에
숙정문(북대문)에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신(信)은 방위상 중앙에 해당하므로 도성의 중심에 위치한 종각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으로 지었다 합니다.
1899년 전차가 등장했을때 전차는 흥인지문의 홍예안으로 다녔는데 전차가 복선화되면서 1908년 흥인지문의
좌우의 성곽이 헐려 나갔고 1910년에 흥인지문의 북쪽으로 도로와 전차노선이 들어 섰다고 합니다.
동대문에서 성곽길을 따라가면 바로 근처에 오간수교(五間水橋)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성곽을 쌓을때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홍예위에 성곽을 쌓아 올려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다섯 칸의 수문을 설치 했다고 하여 오간수다리,오간수문 등으로 불렸으나 성종 12년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고
후에 몇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 되었습니다.
이 수문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 밖으로 빠져 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안으로 잠입하는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명종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 났다 합니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
하였다가 1926년 다시 확장 건설하였으나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없어 졌습니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되었으나 완전하게 복원하지 못하고 다리옆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 아치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간수교를 지나 옛 동대문 운동장쪽으로 가면 그 자리에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재개발하다 보니 조선시대의 유물과 석물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물들로
역사문화공원의 일부는 유구전시장으로 조성하고 있는데, 그 끝에 성곽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습니다.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조성한 두칸 구조의 수문으로 윗부분은
홍예로 되어 있습니다. 수문 내외측 에는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형태의 석축시설이 있으며
이 문을 통해 성안쪽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설치된 목책도 복원하여 놓았습니다.
이간수문을 지나서 흘러간 물은 동대문 밖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게 됩니다.
동대문 운동장은 1925년 당시 일본의 세자였던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돼 1984년
잠실 주경기장이 건립되기 까지 주요 경기가 열렸던 곳입니다.
일제가 운동장을 건설하면서 성곽과 다리를 묻어 버리고 공사를 하여 이간수문을 복원할 때에는 운동장 건설을
위하여 박은 파일들이 유적들을 훼손하고 있었다 합니다.
지금은 운동장 자리에 동대문 디자인파크플라자를 건설하고 있는데 일부를 성곽터 위에 짓고 있습니다.
어찌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반대편에서 찍은 이간수문입니다.
성곽길을 따라 가려면 곳곳에 이런 표시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적고 없는 곳도 많아서 안내표지판을
더 많이 세워야 할 듯 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없어서 길을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오면 광희문이 있습니다.
이 광희문은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성밖으로 내보내던 시구문(屍軀門)입니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1396년 도성을 축조할때 창건되었으며 세종4년(1422)에 개축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숙종실록에 숙종 37년(1711)에 민진후의 건의로 금의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에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습니다.
광희문 옆의 일부 이 외의 성곽은 헐리고 없습니다.
다만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있다하나 개인의 주택의 일부이므로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주택가의 길을 따라가면 장충체육관에서 동호대교로 가는 길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부터 성곽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성곽의 안쪽부터는 신라호텔의 부지 입니다.
신라호텔의 바깥쪽에 있는 성곽입니다. 숙종때의 성곽 모습입니다. 이 성곽은 남산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성곽옆으로 산책길에 나무를 깔아 놓아 다니기가 편합니다.
시대별로 성곽을 쌓은 모습이 다릅니다.
세종시절에 쌓은 성곽형식으로 보입니다.
성곽을 따라 멀리 신라호텔이 보입니다.
이 길은 반얀트리호텔(구 타워)의 뒤편입니다. 편의를 위하여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죽 이어지던 성곽은 여기서부터 남산까지는 없습니다.
60년대말에 개관되어 당시로서는 최고급호텔로 날리던 타워호텔입니다.
2000년대 말에 주인이 바뀌고 재개장하여 반얀트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합니다.
국립극장 바로 앞에 있습니다.
장춘단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국립극장과 반얀트리호텔 사이의 길인데 예전에 이곳에 남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세조3년(1457)이며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된것은 한강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지 12년만인 예종1년(1469)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해 폐지되는데
그 이유는 실용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양가(陰陽家)에서 손방(巽方:正東南方)을
꺼려 하였기 빼문이라 합니다.
문을 설치한 뒤로 의경세자(懿敬世子:世祖의世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 뒤 명종, 숙종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개진되었으나 풍수금기설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혀 끝네 개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래 사진은 남산의 다른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국립극장앞에서 부터 남산의 성곽은 다시 시작됩니다.
산을 따라 올라 가는 길이라 경사가 급합니다. 이 성곽은 서울타워 근처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계속 됩니다.
남산에서 바라본 한남동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지는 한남대교와 강남의 일원입니다. 시계가 좋지 못합니다.
남산의 중턱에 있는 산성입니다. 건설초기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아래쪽에서 남산타워에 이르는 길을 운행하는 친환경 버스입니다. 전기차로 운행됩니다.
몸이 약한 사람들도 쉽게 올라 올 수 있지요.
팔각정과 N서울타워 입니다. 팔각정은 1959년에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 4.19의거 때 철폐되었으며 1968년에 팔각정으로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N서울타워는 1969년 말에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 3개 민영방송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종합전파탑과
함께 관광전망대의 허가를 받아 6년간의 공사끝에 1975년 8월에 완공하였습니다.
남산공원의 정상에는 이런 자물쇠를 매단 곳들이 많아서 또 다른 볼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국사당은 산신당(山神堂)의 다른 이름입니다. 개성의 송악산 서울 남산의 신사(神祠)가 대표적입니다.
남산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후에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습니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남산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였습니다.
남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년 동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습니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5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현재의 남산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복원한 것입니다.
남산공원의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잠두봉 포토아일랜드에 이릅니다.
이 근처에 케이블카 정류소가 있습니다. 남산2호터널 입구에서 출발하지요.
서울시를 조망하기 아주 좋은 곳입니다.
잠두봉에서 본 신라호텔입니다. 케이블카가 옆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잠두봉에서 본 서울시내입니다. 롯데호텔과 북악산이 보이고 뒤로 북한산도 보입니다.
서울시 과학교육원(구 어린이회관)과 안중근의사 기념관 광장에서 남산팔각정으로 가는 계단입니다.
이 성곽 우측에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일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1919년 7월 일본 내각고시로 조선신사를 서울의 남산의 한양공원(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 기념관,
남산도서관 일대)에 창립키로 하고 천조대신과 일본 명치천황을 제신으로 삼다가, 조선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가 1925년 조선신궁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신사에 둘 3종신기(三種神器)라는 상징물을 일본에서 가져와 진좌제(鎭座祭)행사를 갖고 한국인들에게도
참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참배 강요 압력이 늘어남에 따라 참배자도 격증하여 1942년에는 264만여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제는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갖고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 한 후 나머지는 그들의 손으로 소각하고 철수 하였습니다.
안 중근 의사 기념관입니다. 안의사의 유물과 행적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서울시 과학교육원입니다. 구 어린이 회관이지요.
서울시 과학교육원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사이의 광장에는 주차장과 공원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안의사와 여러 사람들의 글씨등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서울시 과학교육원과 안 중근의사 기념관에서 남대문쪽으로 내려 가면 바로 아래에 김 구 백범 광장이 있고
한쪽에 백범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1968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서울역앞의 힐튼호텔 뒤편에서 남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백범광장입니다.
여기서 부터 조선신궁터가 있던 계단의 입구 까지는 성곽이 허물어지고 없습니다.
남산공원 입구에서 남대문쪽으로 이어진 성곽은 지금은 SK빌딩의 담벼락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려가면 바로 남대문입니다. 성곽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성곽을 따라서 돌던 내 발길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다.
글도 모자라고 사진도 별것이 없습니다. 그저 심심해서 옛것들을 찾아보고, 본것을 올린 것입니다.
보시고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틀린점을 지적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어느 하루 시간을 내시어 간편한 복장으로도 좋고, 배낭이 있으면 막걸리라도 한병 준비하여 친구들과
성곽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성곽을 돌아보는 내내 조상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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