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③
* 발해에 대하여
- 제시 자료는 유득공의 ‘발해고’이며, 통일신라와 발해의 정립을 남북국이라 하였다.
-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건국 초 당이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3성 6부 중앙 정치 조직을 완성하였고,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발해가 가장 응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그리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조직이 완비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① 백제 성왕(523~554)은 웅진(공주)보다 하류에 있어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②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의 부족장들을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두어 중앙 귀족에 편입하는 골품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④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414년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였다.
⑤ 통일신라기에 촌주는 촌락마다 그 지역의 토지 크기·인구 수·소와 말의 수·특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민정문서)를 3년마다 만들고, 조세·공물 부역 등을 거두어 국가에 바쳤다.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된 서원경(청주)의 사해점촌 촌락 자료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