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새날입니다.
1주차는 책 소개와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1. 능력주의의 승자와 패자’
2주차 ‘2. 능력주의의 명암’,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3주차 ‘5. 성공의 윤리’,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을 같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주차인 이번 주는 ‘7. 일의 존엄성’,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을 살펴보겠습니다.
〈 읽고, 정리하고, 생각 나누기 〉
CHAPTER 7. 일의 존엄성
일의 존엄성 하락,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분노
지난 40년 동안 대졸자와 고졸자의 수입 격차는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1979년,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40퍼센트 정도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2000년대에는 80퍼센트까지 높아졌습니다. 또한 1979년 이후 일인당 국민소득은 85퍼센트 늘어났지만, 비대졸자 백인 남성의 소득은 1979년 당시보다 실질적으로 낮습니다.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각자의 주머니에 얼마나 들어오느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각자가 경제 활동에서 갖는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느냐도 포함합니다. 40년 동안의 세계화 과정에서 뒤처지고 불평등까지 심화된 가운데, 고통은 단지 봉급 수준의 정체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랜 두려움, 즉 ‘내가 고물이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의 현실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더 이상 별 쓸모가 없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들의 직무 환경이 열악해지면서, 노동 연령의 사람들이 아예 일을 손에서 놓아 버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구직 포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수가 삶 그 자체를 포기합니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이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망률 증가 원인은 자살, 약물 과용, 알코올성 간질환의 만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저학력자는 오랫동안 대졸자에 비해 알코올, 약물, 자살로 죽을 위험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있어서의 학력 간 균열은 최근에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 끝의 죽음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 배나 많았습니다.
절망 끝의 죽음은 저학력 백인 노동자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성 상실을 의미합니다. 능력을 지나치게 따지는 사회에서는 많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평가하기가 쉽습니다. 하층계급이 이처럼 도덕적으로 취약해진 적은 없었습니다.
경제적 진보는 그들의 살림을 더 어렵게 했으며 소수 엘리트에게만 혜택을 주었습니다. 하위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자동화, 해외 아웃소싱, 다문화 정착민들의 위력 등등으로 부서져 버렸습니다. 동시에 그들 90퍼센트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의 경쟁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급기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분노했습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이 새치기쟁이들뿐 아니라, 본인들을 ‘인종주의자’, ‘보수 꼴통’, ‘백인 쓰레기’라고 비하하는 엘리트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일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부족
보다 정의로운 사회는 GDP 증대와 같은 전반적인 번영의 수준을 높이는 것과 함께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도 염두에 둡니다. 예를 들어 세계화의 득을 본 기업과 개인의 증대된 이익은 세금을 통하여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직 노동자들의 직업 훈련 지원비로 쓰이게 합니다.
이런 접근은 미국과 유럽의 주류 중도좌파(그리고 일부 중도우파) 정당들이 1980년대 이래 취해 오던 접근입니다. 세계화와 그것이 초래한 번영을 받아들이되 그 수익으로 국내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로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습니다. 대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걷잡을 수 없이 늘리기만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GDP 증대 정책이 비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동반하더라도, 생산보다 소비를 강조하게끔 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생산자보다 소비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정체성은 양쪽 모두입니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버는 돈 거의 전부로 가능한 한 싸게, 원하는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길 바랍니다. 그런 것들이 해외의 저임금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고임금 미국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말입니다. 그리고 생산자로서 우리는 만족스럽고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비자 정체성과 생산자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 프로젝트는, 그리고 소비자 복지 우선주의는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에 대한 악영향에 눈을 감습니다. 또한 세계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그것이 초래한 불평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의 존엄성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정치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제대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만 합니다. 이 분노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서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생산자로서 우리는 우리 동료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만들면서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여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우리가 받는 급여액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급여액은 수요과 공급의 우연적 상황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여분의 참된 가치는 우리 노력이 향하는 목표의 도덕적, 시민적 중요성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에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입니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줍니다.
시장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기술이나 인정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조합과 같은 기구가 필요합니다. 그런 기구는 오직 두 가지 조건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합니다. 첫째,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둘째,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기여적 정의는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듭니다. 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법무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애,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단지 함께 물건을 사고 소비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런 가치들은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 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 개인이 그의 지역사회에, 그의 가정에, 그의 나라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오늘날 그런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습니다. 로버트 케네디 이후 수십 년이 지나자 진보파는 공동체, 애국심, 일의 존엄성 같은 것을 대체로 내버렸으며 대신 사회적 상승의 담론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습니다. 임금 정체, 아웃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당신이 배운 것에 달려 있답니다. 하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이 필요한 때입니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고, 이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그런 논쟁이 어떤 합의를 반드시 낳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덕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결국 일의 존엄을 살리려는 정치 어젠다는 세금 제도를 써서 명망의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세금 징수는 세입을 올리는 방법만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과연 무엇을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여기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습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습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은 아닙니다.
극소수 사람들의 영웅적인 성공 사례에 고무되면 다른 이들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합니다.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습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며 쇼핑하고 놉니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닙니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는 약속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전은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됩니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새날의 생각 나누기
일의 존엄성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이하 출처1 참고). 사람은 매일 매 순간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일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활동을 말합니다. 다양한 일 중에서 경제적 수입을 얻기 위한 생산적 활동을 고정적으로 수행할 때 우리는 이를 직업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직업을 가진 대가로 돈을 받고,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경제적 대가만을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직업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아를 실현함으로써 정신적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경제적 대가가 매우 작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직업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직업이 분화되어 각 개인은 서로 다른 직업을 수행하며 상호 의존합니다. 따라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면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노동’은 작업복을 입고 땡볕에 나가 땀을 흘리며 돈을 버는 활동을 연상하고, ‘일’은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며 돈을 버는 활동을 생각하는데, 실제 ‘노동’과 ‘일’은 같은 개념입니다. ‘일’은 순수 우리 말이고 ‘노동(勞動)’은 한자 표기일 뿐입니다(이상 출처2 참조).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둘을 구분하여 노동을 터부시 하는 경우가 있어 왔습니다.
이에 대해 『공정하다는 착각』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파업 중인 쓰레기 노동자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젠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한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이하 출처3 참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집에 머물게 됐고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평소에는 이런 분들의 노고를 우리가 잘 알아차리지 못 했었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딜리버리 해 주는 배달원들, 또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해 주는 병원의 의료진들, 또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분들, 또 식료품점에서 일하시는 분들, 또 트럭드라이버, 또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원의 교사들, 또 요양원에서 일하는 분들, 이 모든 사람들의 노동에 우리가 정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에 걸맞은 급여나 존중을 받지 못 하고 계시는 이런 분들의 급여도 높여주고, 또 사회적인 명망도 더 높여줘야 하는 그런 걸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공공의 논의를 하는 적절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를 통해서 이분들이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선진국들은 노동의 가치에 대해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이하 출처4 참조). 즉 사회가 재난상황에서도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일선에서 아픈 자를 치료하고, 필수 물자를 전달하며, 취약한 이들을 보듬는 사람이 없다면, 사회가 마비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필수노동자(Essential worker)', 영국에서는 '핵심노동자(Key worker)'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 처우개선에 나섰습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9월부터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필수노동자 지원 조례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의료·배송·돌봄을 포함했던 필수노동자 범주에 택시기사나 경찰관 등이 추가로 들어가 더 포괄적인 개념이 됐습니다.
하지만 필수노동자 담론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은 감염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필수'라는 용어에 걸맞은 처우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특히 배송이나 돌봄의 경우 상대적으로 비숙련인 특징 탓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정성도 내포하고 있는 직종입니다.
정리하면 일의 존엄성은 단순히 노동자들에게 더 형평성 있는 보수를 제공하는 경제적인 정책만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존엄성의 회복은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청소하는 일, 누군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물건을 가져다주는 일, 아이, 청소년, 노인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돌보는 일이 반도체나 IT, 디지털 산업만큼이나 우리 사회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공기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들을 보고, 눈길을 마주치고,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이 기계의 자동화로 대체되는 위협에 놓인 이 시대에 일의 존엄성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부에 저자는 능력주의로 발생한 불평등의 해결 방안으로 ‘공동선’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공동선은 쉽게 말하면 ‘사회나 여러 사람에게 선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또 다른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바로 공동선이라고 합니다(이하 출처5 참조). 저자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첫째, 시민의식, 희생, 봉사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둘째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선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셋째로 불평등의 심화를 극복하기 위해 연대의식과 시민의 미덕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마지막으로 도덕적인 참여정치의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결국 '정의는 공동 선을 추구하며 이를 만들기 위해서 시장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공동선의 추구는 어쩌면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부터가 시작이지 않을까 합니다. 공동체 의식은 한 사회에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과 감정이며, 공동의 문제 해결에 함께 참여하려는 의식입니다(이하 출처6 참조). 또한 참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서 배려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존중받기를 원하고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역시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공동 노동조직인 두레를 통해 상부상조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해 왔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인식하고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한 조상들의 지혜를 계승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 책 닫기 〉
이상으로 책의 내용 전반을 요약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책은 미국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입해 보면 맥락적으로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의 학력주의와 우리의 학벌주의는 상황적으로 약간 다른 면도 있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명문대를 선호하고 이것이 능력주의와 연결되어 사회 불평등을 낳는 구조적 측면에서는 그 유사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입 입학에 따른 입시 부정사례에서도 우리나라에만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미국에서도 그런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 포퓰리즘 측면에서도 선거에서 표를 의식해 선심성 정책을 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공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일의 존엄성 하락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에 있어서 신자유주의로 인한 세계화와 능력주의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는 약속으로 출발했으나, 이런 비전은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능력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성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만이 성공의 전부가 아니라 운이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에 있어 운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을 살필 여지가 생기고 또한 성공의 과실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공동체 의식이 되살아나고 공동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견해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정하다는 것에 대해 그 이면을 들여다볼 줄도 아는 지혜를 갖춰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불평등한 사회가 공정한 사회로 한 순간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열망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파괴적 혁신 4.0』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참조글 〉
O 출처1: 일의 의미와 중요성
O 출처2: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가치
O 출처3: [뉴스공장]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 벗어나 노동의 가치 존중해야” - TBS
O 출처4: 필수노동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
O 출처6: 공동체 의식
〈 참고 도서 〉
O 출처5: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김영철 옮김, 와이즈베리 출판, 2014.11.20 출간, 443p, 정의란 무엇인가 - kyobobook.co.kr
〈 마인드 맵으로 한 장에 보기 〉
〈 소통과 성장의 장 〉
카페 : 새날과 함께하는 책 모임 - Daum 카페, https://cafe.daum.net/bookand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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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는 일이 늘 반복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더불어 함께, 새로운 오늘을 충실히 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남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 나와의 비교를 통해 하루하루 성장하는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새날 드림/Dream
첫댓글 〈 이야기 자리 주제 〉
저자가 말하는 공동선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공동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일깨워 주고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개인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감염병의 위험에 노출된 많은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노력, 야외 임시선별검사소의 의료진들이 추운 겨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이은 방한물품의 기부 행렬, 온라인 주문의 폭증으로 택배 배달하는 분들에게 간단한 음료라도 드시라며 간식거리를 문 밖에 비치해 주시는 분들, 자신도 어려우면서 더 힘든 이들에게 선뜻 공짜치킨, 생일피자를 내어주시는 가게 주인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착한 가게 돈쭐내자”는 사회적 움직임 등 수 많은 미담 사례가 우리 사회를 코로나19 만큼 훈훈하게 달구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부자들의 동참이 보태어지면 더 좋을텐데 아직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매우 큽니다. 특히나 그들의 기부가 절실한 시기임에도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다수가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또 커지고 있다는 것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