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17. 【용강서원】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의 후손 김해허씨
글·송은석 (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은 불과 이십 여 년 전만해도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도시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신도시 지역으로 탈바꿈을 했다. 이곡동(梨谷洞)은 배나무 골짜기라는 동명 외에도 ‘선원(仙源)마을’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동명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도화(桃花)가 아닌 이화(梨花)가 만발한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선원로를 기준으로 용강서원이 있는 북쪽지역은 해발 295m의 와룡산을 끼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도시와 전원이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은 대구의 좌청룡이자 성서일대의 성지에 해당하는 와룡산 자락의 용강서원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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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후손 김해허씨
가락국 다시 말해 가야의 건국신화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구지가’와 ‘6개의 황금알’ 그리고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는 ‘수로왕’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고대건국신화이다. 6가야의 큰 형님뻘인 금관가야의 수로왕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런데 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태어난 2째와 3째 아들은 허황옥의 청으로 왕비의 성씨인 허씨로 대를 이어 가게 된다. 이러한 유래로 지금 우리나라의 허씨(김해허씨, 양천허씨, 태인허씨, 하양허씨)는 거의가 허황옥의 후손이다. 그래서 허씨는 본관이 달라도 서로 혼인을 맺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있다. ‘인천이씨’의 경우도 허씨들과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인천이씨는 본래 허씨였다. 그런데 ‘안록산의 난’에서 공을 세운 신라사람 허기(許奇)는 당나라 현종의 명으로 황제의 성씨인 이씨 성을 하사받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인천이씨는 허씨들과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다.
김해허씨는 허황옥의 35세손이자 가락군에 봉해진 ‘허염(許琰)’을 시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본관을 김해로 삼은 것은 허염의 후손들이 김해를 중심으로 세거한 탓에 김해를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김해허씨가 지금의 성서지역에 세거를 하게 된 것은 김해허씨 이곡 입향조인 ‘허승립(許承立)’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임난 때 선산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후, 선산지역에서 은거를 했다. 이후 1622년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선산 도개를 떠나 자신들의 근원처인 김해로 가던 중 이곳 성서 갈산리(葛山里·현 장동) 중마라는 곳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이때 허승립은 이 고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속이 마음에 들어 김해를 포기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성서에 정착한 허승립은 손자 대에 이르러 2명의 걸출한 손자를 배출했다.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1597-1637)’과 ‘낙암(洛庵) 허복량(許復良·1602-1637)’이다. 사촌 간인 이들은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이 두 인물은 병자호란 때 광주(廣州) 쌍령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참고로 김해허씨 인물 중에 ‘허유전(許有全·1243-1323)’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고려 원종 말에 문과급제를 하고 1314년(충숙왕1)에 가락군에 봉군되었으며 1321년(충숙왕8)에 정승을 역임한 인물이다. 정계를 떠난 허승립은 노년에 원나라 티베트로 귀양 간 충선왕의 편지를 한통 받게 된다. 이에 허승립은 충선왕의 환국을 위해 81세의 고령으로 원나라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사연이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용강서원
용강서원은 달서구 성서 이곡동 선원초등학교 서편에 자리하고 있다. 와룡산 등산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인근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허씨재실’로 잘 알려져 있다. 서원 뒤편에는 ‘김해허씨 현감공파 사세팔위(四世八位)의 제단·제단비’와 와룡산의 영험이 서려 있다는 연못 및 샘이 있다. 또한 인근에는 조선 고종 때의 효자인 ‘허호’의 효행을 기린 「포효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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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龍岡書院)의 역사는 「충열사(忠烈祠)」라는 묘우에서 시작되었다. 「용강서원기」에 의하면 용강서원은 1696년(숙종22) 지금의 달서구 장동(갈산)에 상무헌 허득량과 그의 종제인 낙암 허복량을 봉향하기 위해 「충렬사」란 이름으로 처음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1804년(순조4)에 성서 와룡산 아래인 현 위치로 이건해 「용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충렬사」는 훼철되고 말았다. 그러나 후손들은 충렬사의 옛터에 사당이 아닌 문중 재실인 「용강재(龍岡齋)」를 다시 건립하였으니 때는 1920년이었다. 1990년에는 이 「용강재」는 그대로 두고 주위에 묘우와 강당을 복원해 다시 「용강서원」으로 승격된다. 용강서원 충렬사에는 상무헌·낙암 양 선생의 9대조인 고려문하시중 충목공 허유전을 주향으로, 상무헌·낙암 양 선조를 종향으로 배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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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건물로는 외삼문인 지지문(知止門), 강당인 숭현당(崇賢堂), 동실인 수덕헌(修德軒), 서실인 사의설(思義室), 내삼문인 상의문(尙義門), 묘우인 충열사(忠烈祠), 재실인 용강재(龍岡齋), 원정비(院庭碑), 충목공유적비(忠穆公遺蹟碑), 김해허씨 현감공파 종회건물 등이 있다. 앞서 언급한 김해허씨 4세8위 제단 및 제단비와 연못, 샘 등은 재실 뒤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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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대구의 서쪽 끝에 자리한 와룡산은 대구 서부지역의 상징적인 산이다. 성서지역은 도시개발로 인해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산자락으로 들어가면 아직 전원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많다. 평야지대는 개발을 피할 수 없었지만 산자락은 그래도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와룡산 자락에는 아직 몇 몇 문중의 재실들이 유지·관리되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곡동의 선원마을. 이 지역의 도로명 주소는 모두 ‘선원로00’으로 시작된다. ‘신선 선(仙)’에 ‘근원 원(源)’을 써서 선원이다. 동명의 정확한 유래는 잘 모르겠으나 이글을 정리하다보니 문득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상무헌 허득량, 낙암 허복량 양 선생은 「선원(仙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 형제의 문인이었다’
이상끝...
2014.8.1.
송은석(유학칼럼니스트)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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