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
변천내용 |
1500년 중반(명종조) |
서당형태의 강학소로 시작. 퇴계선생이 고산재, 구도문 명명 |
1592년(선조25) |
임진왜란 병화로 소실 |
1605년(선조38) |
향유들에 의해 고산서당으로 재건. 대구부사 정경세, 제독 이삼성(또는 이여송) 수차례 참강. |
1644년(인조22) |
향유들 중심으로 퇴계, 우복 양 선생을 기리는 서원 설립 발의 |
1697년(숙종23) |
퇴계, 우복 양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고산서원으로 승격하여 창건. 고산서원유림계 결성. |
1734년(영조10) |
강당과 동·서재 건립 |
1776년(영조52) |
원우 중수 |
1789년(정조13) |
문루 건립. 정도권이 모필한 ‘구도’ 편액을 문호로 설치 |
1868년(고종 5) |
훼철령으로 훼철 |
1872년(고종 9) |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 세움. 현령 이헌소 지음 |
1879년(고종16) |
고산서당으로 복원. |
2014년 현재 |
‘고산서당유림회’가 결성되어 ‘고산서원’으로의 복원을 추진 중 |
이제 고산서당으로 들어가 보자
고산서당은 고산의 북동쪽 끝자락인 대구시 수성구 성동 163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서당의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함께 이 지역의 젖줄인 남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서당 바로 앞에 형성된 하식애를 보면 옛날에는 이 남천이 지금보다 훨씬 더 고산서당 앞쪽으로 붙어서 흘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제법 높은 하식애 위에 자리한 고산서당의 앞뒤에는 넓은 대지가 있다. 이는 아마도 영화를 누렸을 옛 고산서원 시절의 유허지(遺虛址)로 보인다. 서당 정문을 마주보고 섰을 때 좌측으로 최근에 조성된 「공덕추모비」와 「충의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좌우 각 1칸씩은 방인데, 마당 쪽으로 반 칸 정도 나온 툇마루를 갖추고 있다. 동실(東室·동쪽 방)의 마당 쪽 방문 위에는 「고산서당」이라 적힌 흰 바탕의 편액이 하나 걸려 있다. 이 편액은 「고산유허서당기」를 지은 이만승의 작은 아들 이중철(李中喆)이 쓴 것이다. 그런데 「고산유허서당기」에 의하면 서당마루의 이름을 「고산서당」이라 명명했다고 하니 사실상 이 편액은 대청마루에 걸려 있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이 편액과 함께 이중철은 「오산재(吾山齋)」라는 편액도 썼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의 고산서당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한편 서실(西室)의 대청 쪽 방문 위에는 「구도」 편액이 걸려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편액은 퇴계의 친필 편액이 아닌 복사본으로 1789년(정조13)에 정도권이 퇴계의 글씨를 모필한 것이다. 대청에는 이외에도 「고산유허서당기」, 「고산서당창건기사」, 「구도문기」 등의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대청에 올라 바깥을 조망해보면 멀리는 반야월의 초례봉, 가까이는 넓은 들과 함께 남천이 시야에 들어온다.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풍광이다. 하지만 이는 서당 앞을 좌우로 길게 가로막고 있는 2개의 거대한 고가도로가 없다고 가정한 필자의 상상 속 풍경이다. 실제 대청에서 바라본 풍광은 전혀 다르다. 2개의 고가도로가 마치 사람의 목에 바짝 들이댄 칼처럼 느껴진다. 잠시만 바라보아도 목이 시려오고 이내 숨이 턱턱 막힌다.
한편 서당의 대청 천정에는 고산서당 복원 때 쓰인 상량문이 아직 남아 있다.
「숭정 252년 기묘 4월 16일 사시 수주상량(崇禎 252年 己卯 4月 16日 巳時 竪柱上樑)」
이는 기묘년인 1879년 4월 16일 사시(09-11)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는 말이다. 이 건물의 사주를 사람의 사주로 놓고 보면 오행의 기운이 토(土)로 과도하게 기운 사주로 볼 수 있다. 이는 호시우행(虎視牛行)하는 우직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해석이 가능한데, 아마 복원 이후 서당의 굳건한 건재를 바랜 상량택일로 보인다.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 강학 유허비
이 유허비는 고산서당과 함께 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등록되어 있다. 우리 지역에서 고산서당이 지닌 의의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퇴계선생이 「고산」과 「구도」두 이름을 직접 명명했다는 것과 퇴계, 우복 양 선생이 이 서당에서 강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유허비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유적이 혹여나 후세에 사라질까 염려해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인 1872년(고종9) 7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당시 경산 현령인 이헌소가 지었다. 이헌소는 완산인(完山人)으로 경산현령 재임 시 덕치(德治)로 이름이 나 지역에만 2개의 선정비가 세워진 인물이다. 특히 숙천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선정비는 대구 유일의 철비(鐵碑)로 매우 희귀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무기 제작용 쇠붙이로 이 철비를 뽑으려다 도저히 빠지지 않자 포기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시지 아산장씨 덕산재의 「덕산재기」를 지은 이도 역시 이헌소이다.
덕산재 자료 클릭 ☞ http://cafe.daum.net/3169179/Dbvq/3
강학유허비가 세워진 곳은 고산서당 바로 뒤편 언덕 위 평지인데, 이 일대가 옛 고산서원의 유허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자리는 옛 사당 터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실제 서당 뒷담장과 유허비 사이의 경사에는 옛 돌계단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고,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 직사각형의 넓은 공간은 단으로 높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산유허서당기」에서 ‘퇴계, 우복 양 선생의 위판을 묻은 곳에 배례를 하였다’는 장소 역시 이곳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산서당을 답사할 때는 비록 위패를 모신 사당은 없지만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 앞에서 약식으로 예를 표하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고산서원 복원 반드시 이루어져야한다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경산현에 세워진 고산서당. 당시 경산현은 영남의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퇴계선생은 「고산」이라는 재호와 함께 「구도」라는 친필 문호를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서당에 내렸다. 어디 이것뿐인가? 퇴계는 동유(東遊)길에 이 서당에 들러 직접 강회까지 열었다. 이후 대구부사로 부임한 우복 선생과 명나라 제독 이삼성(또는 이여송)도 수차례 강회에 참석했다. 또한 대구의 큰 선비인 동고 서사선이 일정기간 고산서당 강회를 주도한 사실도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고종의 서원철폐령 등으로 화려했을 고산서원의 옛 모습과 문화는 이제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신의 가호가 있었을까? 천만다행으로 옛 강당자리에 복원된 고산서당과 옛 사당자리에 세워진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가 고산서원 500년 역사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재 대구의 모 단체는 대구 최초 서원인 「연경서원」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연경서원」 복원을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정확한 옛 연경서원 터를 검증하는 일과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설 부지에서 서원 복원을 위한 부지를 확보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고산서당의 조건은 얼마나 유리한가! 이미 고산지역 대표문중들로 구성된 「고산서당유림회」가 조직되어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일차적으로 「고산서당」이 복원되어 있다. 또한 옛 서원의 터가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며, 「강학유허비」는 옛 사당자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게다가 원본은 아니지만 퇴계선생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되는 「고산」,「구도」 2개의 편액도 남아있다. 고산서당은 이처럼 복원에 필요한 인적, 물적, 역사성 등의 기본조건이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외로워서 고산이었다. 하지만 퇴계가 고산이라 이름 불러준 이후로는 외롭지 않았다. 지금의 고산은 다시 외롭다. 누군가 「고산서원」이라 이름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 끝...
----------------------------------------------------------------------
※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018-525-8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