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부여는 그동안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 “(연나라는) 북쪽으로는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 조선, 진번에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라고 기록된 것이 최초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결과 부여는 기원전 2~3세기에 건국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일주서』왕회해편의 ‘이윤조헌(伊尹朝獻)·상서(商書)’에는 상 탕왕 시기에 동쪽에 부루(符婁)가 있다고 했는데, 필자가 보기에 부루는 부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산해경』대황북경에 등장하는 “호불여국(胡不與國”도 부여를 나타낸다.
『상서』 무성 공씨전에는 “바다 동쪽의 여러 동이족들은 구려, 부여, 간맥에 속했는데, 주 무왕이 상에 승리했을 때 모두 그 길로 통했다.”라고 해서 상나라가 멸망하던 시점에도 부여가 존재하고 있었다. 부여는 선진 시기 오래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나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킨 이후 주공은 상대(商代)의 대국이었던 엄(奄)국을 강력하게 토벌했다. 그리고 웅영을 멸망시켰다. 엄땅인 곡부에는 노(魯)나라를 건국했다. 이에 상의 유민들은 주나라의 탄압과 보복에 저항하기 위한 대규모 저항을 조직화했다. 회이족을 대표한 서국(徐國) 세력은 가장 강력하게 주나라와 대립했다.
이들은 서언왕 시기에 드디어 주나라의 도성을 공략하여 주와 병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서이의 일부와 색국의 주력이 동북으로 이주하여 은허 이북에 부여국을 재편했다.
상이 멸망한 이후 동이족들은 발해만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을 건국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기자조선 등이 성립되면서 기존의 고조선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동이족 나라들이 병존한 것이다. 그 결과 춘추시대에 들어서 발조선, 발숙신, 불리지, 리지, 영지, 산융, 북융, 무종, 래이 모국 등 수많은 나라들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 나라들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발조선으로 통칭할 수 있는데, 발조선은 망명한 부여족과 토착 고조선족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여는 상나라를 건국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상을 계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사이의 계승관계는 다음과 같은 두 나라의 여러 가지 공통 특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째로, 상과 부여의 건국은 모두 난생사화 및 궁시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상의 시조 설은 그 모친 간적이 제비알을 받아 먹고 태어났다. 『산해경』에는 제준(=제곡)이 명궁인 예를 시켜 태양새를 떨어 뜨리도록 명한다. 『논형·길험편』과 『후한서·부여전』에는 부여 동명왕의 모친이 “달걀만한 기운이 내려와 임신이 되었다”고 말했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색리국을 도망쳐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고 했다. 상과 부여의 난생사화 또는 새토템은 이들이 모두 조이족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로, 상과 부여는 태양신을 숭배하던 태양족이었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태양신 제준(帝俊)은 상의 시조 제곡과 동일한 존재인데, 제준은 희화(羲和)와 혼인하여 열 개의 해를 낳았다. 그런데 제준은 후직(后稷)을 낳은 것으로도 나오기 때문에 제곡과 같은 사람이다. 상나라는 자신들의 시조를 태양신으로 섬겼던 것이다.
제준은 10교대 근무를 하던 열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올라 천지가 불타오르자 예를 시켜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죽인다. 그런데 1986년 발굴된 사천성 삼성퇴 유적에서는 이와 모티브가 동일한 청동나무가 발굴되었는데, 놀랍게도 나무에 9마리의 태양새들이 앉아 있다. 부여는 그 명칭의 어원이 ‘밝’(=광명)에서 기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태양을 국가명으로 삼았다. 발, 번, 불, 부리 등 발계 지명은 모두 태양으로서 부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밖에도 부여는 은력 정월(殷歷正月)에 제천행사를 거행하였고, 흰옷을 숭상하였으며, 밤낮 없는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리고 길흉을 점치는 관습, 순장, 홍수나 가뭄 시 국왕 처벌 등 은나라 풍습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부여는 상나라를 계승한 나라였던 것이다.
-시리즈 9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