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들의 신방
이순금
농부의 봄은 마음이 먼저 논밭으로 달려 나간다. 땅이 풀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기까지는 춘분을 지나 청명과 곡우가 돼야 하는데, 물론 노지 재배를 하던 때의 얘기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입춘이면 봄을 기다리며 논밭을 바라보고, 우수 경칩이 되면 혹시라도 푸른 싹이 어디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들을 살폈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제일 먼저 큰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가놓는다. 그런 뒤 논에 거름을 펴고 갈아엎은 후에, 물길이 좋고 볕이 잘 들며 흙이 고운 배미 중에서도 명당을 골라 못자리판을 만들었다. 두둑을 넓적하고 약간 높이 한 뒤에 쇠스랑으로 흙을 곱게 고르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면 열손가락으로 한 번 더 흙덩이를 곱게 부순다. 못자리 배미는 사방을 돌아가며 얕은 둑이 되게끔 진흙으로 쌓아 두었다. 필요에 의해서 물을 대기도 하고 빼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둑이 잠길 만큼 물을 가두고 흙탕물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햇살이 따스하고 바람이 자는 날에 불린 볍씨를 못자리판에 골고루 뿌린다. 그리고 뿌리와 싹이 균형을 맞춰 자랄 수 있도록 물의 높이를 조절해 줘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문안을 하며 정성을 바쳐야 한해 벼농사의 시작이 순조롭게 된다. 맑은 물 속에 흩어진 노란 씨앗들은 농부에겐 한 해의 희망이다. 볍씨가 싹이 트고 물위로 목을 내밀면 못자리판은 연두색이 아른거린다. 이때 농부는 한시름 놓게 된다.
그해 봄에는 비가오지 않아 모두가 애를 태웠다. 전답이 말라서 작물 파종도 제때에 하지 못하고 겨우 물을 대서 못자리만 끝내고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작은 물웅덩이에 밤새 물이 차오르면 아침부터 어머니와 오빠는 맞두레를 잡고 물을 퍼 올렸다. 그래야만 소중한 못자리 논에 물을 댈 수가 있었다.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 농부는 왜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로가 닿지 않는 다랑논은 하늘의 비만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오후엔 빗방울이 대지를 적실 만큼 조용히 내렸다. 논둑에 축 늘어졌던 풀들도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단비를 만난 초저녁의 풍경은 제법 싱그러워졌다. 간혹 들리기 시작하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이 깊어갈 수록 점점 크게 어우러졌다. 녀석들도 목을 축이며 비맞이 축제를 여는 것 같았다. 말라가는 흙을 피해 몸을 숨겼다가 촉촉해진 대지의 고마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저리 목청을 돋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내일은 평화스러울 것만 같은 밤이 흘렀다.
동이 트자마자 어머니는 논으로 나가셨다. 다랑이마다 물꼬 단속을 하고 한 배미라도 더 물을 가두려고 분주했다. 햇살이 엷게 비치자 이웃사람들의 모습도 같이 바쁘게 움직였다. 물을 머금은 다랑논들은 밤사이 푸릇푸릇 물풀들을 살려내어 품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낮은 쪽에 있는 못자리 논에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나도 부리나케 뛰어갔다. 어제까지 연둣빛이 아른거리던 못자리판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죽-죽- 사방으로 밀고 다닌 자국에다 볍씨는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부초의 신세가 되어 물위로 둥둥 떠다녔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흙탕물이 덜 가라앉았다. 사람마다 범인을 추리하며 말을 하고 있었다.
“이집 못자리가 싹도 잘 트고 농사가 잘 되니까 누가 샘을 부렸나봐유….”
상상의 비약이 절정에 이를 때 나는 흙탕물 속에서 반짝이며 움직이는 눈망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또 옆에 두 눈을 꿈벅이며 몸을 꿈틀대는 놈들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등위에 올라 앉아 짝짓기를 하기도 하고 물 속에 몸을 숨긴 채 망을 보기도 했다. 온 동네 개구리들이 이곳에 모여 밤을 새워 짝을 부르고 사랑의 춤을 추고 놀다가, 아침 해가 뜨자 잠시 물 속에서 쉬는 듯 했다. 밤새 평화롭게 불러대던 그 ‘개굴가’의 무대가 우리 집 못자리판이라니 기가 막혔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잊은 채 망연해 하였다. 그리고 체념한 듯 한마디 뱉으셨다.
“참, 고놈들도 풍수쟁이를 따라다녔나벼. 워~찌 명당자리는 알아가지고서 내 논에 까지 와서 신방을 차리고 지랄들여! 올핸 새끼는 원 없이 치것구먼. 니들도 어젯밤에 지은 죄가 있으니 똥은 반드시 내 논에 와서 싸거라. 알것냐?”
하고는 논둑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해 논농사는, 모자라는 모를 이집 저집 동냥을 해다 심었다. 그래도 개구리들이 찾아와서 거름을 주었는지 병충해가 없이 쏠쏠히 잘 여물었다. 어머니는 제일 잘 여문 배미를 골라 다시 볍씨를 받았다. 탈곡할 때 호롱기를 쓰지 않고, 홀테에 수작업을 한 뒤 정성껏 키로 까불러서 실한 것들만 골라 통풍이 좋은 곳에 보관을 했다.
그곳의 사계절은 어김없이 돌아갔다. 가을걷이가 끝난 골짜기의 다랑논에는 물이 얼어 빙판이 되고 아이들은 거기서 썰매를 탔다. 그 논둑 밑으로는 아기주먹만 한 구멍이 있었다. 반질반질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가으내 양식을 물어다 쌓은 서생원의 집이다. 지난봄 한바탕 소동을 벌인 개구리들은 모두들 동면에 들어 시침을 뚝 떼고 있다. 그 많던 메뚜기도, 우렁이도, 방개도, 골칫거리 잡초들도…
농부는 잘 알고 있다. 봄은 또 오고 수많은 생명과 늘 함께 할 것이란 사실을.
2012년 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