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하루는 무조건 쉬었다.
그저 이 집 마놀로 가족과 어울려, 그들이 자주 다닌다는 이 부근의 한 생선시장(개인이 운영하는)에 갔다 돌아와, 집 담장 철재 기둥의 녹을 조금 벗겨주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녹을 다 벗겨내야 새롭게 페인트 칠을 한다는데, 일단 그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어차피 난 이 집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라도 해주고 갈 생각이다. 그러자면, 한 사흘은 걸릴 것 같다.)
그런 뒤 점심을 맛있게 먹었고,
오후엔 아버지 마놀로네 친가와 처갓집 부모님을 방문했다.
양가 집의 부모님들은 동양인 친구(나)의 방문에 다소 놀라면서도, 아주 친절하게 맞아주어서 고맙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바르셀로나에 살 때 알게 된 일이지만,
마놀로(Manolo)의 처 '까르멘(Carmen)'은 음식도 잘하지만 인정이 많고 손도 커서, 휴가를 맞은 온 가족에게 풍성한 음식을 제공하고 있어서, 나 역시도 여기서 맘 편하게 풍성한 음식을 즐기면서 잘 쉬고 있다.
그런데 내일이 '아버지 마놀로'의 50회 생일이라 점심을 인근에 있는 '뽄떼베드라(Pontevedra)'의 한 식당에서 성대하게 치를 모양인데, 나도 당연히(?) 그 초대 멤버에 낀 모양이다.
8 . 17
#'마놀로(Manolo)' 부자#
스페인의 일반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아들(특히 큰아들)의 이름이 같은 경우가 많다.
나와 연관된 가까운 사람들 만을 봐도,
전에 내가 바르셀로나에 살 때(1990년대) 내 스페인 가족이랄 수 있는 아랫집의 '호아낀(Joaquin)'씨네가 대표적이었는데,
'아버지 호아낀'씨는 나에게 스페인 비노(와인) 맛을 들이게 해 준, 그러면서도 나에겐 은인이랄 수 있는 좋은 분이었고,
그 분의 '아들 호아낀'은, 나에게 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가게끔 길을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물론 이제는 그런 일에 많이 익숙해져 있고, 또 한 집안의 순수한 혈통(대?)을 그렇게 이어간다는 의미 정도야 익히 알고 있지만, 처음의 나에겐 부자간에 같은 이름이란 사실이 낯설기도 했지만 여간 호기심 어린 사안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경우는, 그 시절 역시 같은 동네에 살던 여기 '마놀로(Manolo)'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호이낀씨네의 경우는 내가 아버지 호아낀 씨와 훨씬 더 가까웠던 반면,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여기 '갈리시아'의 집 주인인 '마놀로'네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그러니까 내가 두 가족을 알게 된 건, 스페인에 오자마자(바르셀로나) 처음 집을 구해 살았던 동네 '깐 까라예우(Can Caralleu: 바르셀로나 도심의 외곽인 산 동네)'에서였는데,
'호아낀'씨네는 내가 살던 바로 아랫집에 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도 날마다 서로가 보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아주 가까운 이웃'이었던 반면,
'마놀로'네는, 그저 같은 동네에 살긴 했지만 거리 상으로는 먼, 그러면서도 그저 얼굴만 아는 약간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그런데 첫 해, 5월엔가 마을의 청년회에서(성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주최한 '춘계 소풍'이 있었는데,
당시 호아낀씨의 부인 '아말리아(Amalia)'가,
"인야, 우리 마을 사람들도 사귈 겸, 성당에서 주최하는 봄소풍에 한 번 따라가 봐."하고 나를 반 강제로 떠밀다시피 해서 참여했던, 기기묘묘한 바위로 유명한 '몬세랕(Montserrat) 산'에 갔다가,
그 동네 청년회의 주축이었던 다섯 명의 청년들('루이스(Luis)'를 비롯한 청년회로, 그 뒤로 그들 다섯이 초창기의 나를 참 많이도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나는 그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깐 까라예우의 다섯 친구들'이다.) 중의 하나가 바로 '아들 마놀로(Manolo)'였다.
'여기에는 그 그림을 첨부해야겠지?' 하면서 이 인야는, 그림 자료집에서 그 이미지를 가져왔다. 100호 크기로 상당히 큰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이 그림은 거기서 전시할 때 팔릴 뻔하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그림 값을 깎아달라고 해서... 일언반구도 않고 '싫다'고 거절했던 그림이기도 하지......' 하기도 했다.
그 당시엔 물론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 당시의 아들 마놀로는 갓 대학 1년생인 것 같았는데,
늘 웃는 얼굴에 농담도 잘하는 청년이었고, 30대 중반이었던 나와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상당히 젊어 보였던 '아버지 마놀로'는, 비록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호아낀(Joaquin)'씨와는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나하고는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였는데,
'가예고(Gallego: 갈리시아 사람들)'라고 했고 퍽 퉁명스런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의 나는,
'아들은 안 그런데, 왜 아버지란 사람이 저따위야?' 할 정도로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가지 않는) 사람 같았는데, '갈리시아 사람들이 다 저런가?' 하기도 할 정도로 비호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동네서 내가 햇수로는 5년을 살았는데,
나중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에야,
한국으로 부쳐야 할 내 이삿짐을 해상운송사가 있는 바르셀로나 항구에 실어가야 할 일을, 아버지 마놀로가(그는 건축업을 하고 있어서 커다란 트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도와준 일로 해서, 그나마 조금 가까워졌는데,
그러니까 내가 '마놀로 집'에 발길을 주기 시작한 건(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된) 그 동네를 떠날 즈음에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만큼 갈리시아 사람들을 사귀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처음의 그 무뚝뚝했던 마놀로가 알고 보니 의외로 다정다감하면서도 속정이 깊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고,
나와 아버지 마놀로와의 관계가 바로 '정들자 이별'이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가 바르셀로나의 한 구역인 '깐 까라예우(Can Caralleu)'라는 동네에 살게 되면서 알게 되었던 두,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은 집안과 친구가 된 경우인데,
그 뒤로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여전히 내가 '마놀로의 가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여기 갈리시아 지방의 '빌라노바 데 아로우사(Vilanova de Arousa)'라는 시가 그들 부부의 고향인데, 국도를 사이에 두고 위에는 '산 미겔(San Miguel)', 아래는 '산 로께(San Roque)'라 불리는 마을로 갈라진 것 같은데,
아랫마을 '산 로께' 토박이인 '마놀로(Manolo)'는 윗 마을 '산 미겔'에 사는 '까르멘(Carmen)'과 상당히 어린 나이에(20대 초반) 연애결혼하여, 아들 '마놀로(Manolo. 근데 이들은 아들을 약칭인 '마누(Manu)'라고도 부른다.)'를 낳았고,
그 뒤에 돈 벌러 바르셀로나로 이민을 가서 성공한,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이들 가족을 처음 알았을 때는, 큰 아들 마놀로(마누)가 대학생이면서 그 아래로 여동생과 막둥이(남)까지 3남매를 둔 가족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마놀로'는, 여기 빌라노바 데 아로우사의 한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20대 이른 나이에 돈 벌러 바르셀로나로 과감하게 갔고, 그의 능력을 인정 받아 사업이 번창해, 더구나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내가 바르셀로나에 살 때)을 맞아 한 몫을 잡아 탄탄대로에 들어선 대표적인 예라고 하는데(듣기로는),
그래선지(나는 이들의 재산 같은 것엔 별 관심은 없지만), 그들에겐 고향인 이 근방에 건축 사무소가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상당한 부동산(땅과 집)도 있다는 것 같다.
아무튼 마놀로 부부는 여기 고향에 근사한 집을 지어놓고, 매년 여름 온 가족이 고향에 와서 한 달 정도 휴가를 지내다 돌아가는데,
이번은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끝낸 게 그들의 여름 휴가와 겹치는 우연으로, 엉겁결에 나도 그들과 여기 갈리시아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잘 몰랐는(관심 밖이었는)데, 오늘이 아버지 마놀로의 50회 생일이라고 하는 걸로 보면,
내가 아들 마놀로와는 약 15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아버지 마놀로와는 다섯 살 밖에 차이가 없으니,
어쩌면 아버지 마놀로와 친구라는 게 더 어울릴 법하긴 하다(그건 한국인의 생각이지만)......
어쨌거나 이 집도 부자의 이름이 같은데,
그저께 내가 이 집에 올 때까지는 '아들 마놀로'(약칭인 '마누(Manu)'와 더 가깝기도 했고 또 그가 중심이었는데,
여기 도착한 이후는, 주로 모든 일을 '아버지 마놀로'와 함께 하게 되어,
아예, 지금부터는 아들 마놀로는 '마누(Manu)'로 부르고, '아버지 마놀로'를 '마놀로(Manolo)'로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는 아버지 마놀로와 더 밀접한 관계가 된 듯하니...... #
*
오늘은 마놀로의 생일이었다.
원래는 뜻 깊은 50회 생일이라 모든 식구들(이근방에 사는)을 모아 한 커다란 식당에서 식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마놀로의 하나 밖에 없는 누이 동생이(남 동생도 하나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수술을 하는 바람에, 잔치를 벌일 수 없어서, 그냥 자기네 식구들만 여기 '빌라 노바 아로우사'의 한 식당에 모여 조촐하게 식사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식당에서 여기 갈리시아 지방의 여러가지 술을 맛보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오늘의 주인공인 마놀로가 바로 옆에 앉아서 자꾸만 술을 따라주고, 또 너무나 잘 대해줘서 자꾸만 마셔댔다.
그런 뒤 오늘은 마놀로 부부가 마놀로의 여동생 병문안을 가는 길에 나도 따라서 '뽄떼베드라(Pontevedra)'에 갔다.
그런데 그 병원은 면회가 세 사람으로 한정되어서, 우리는 따로따로 교대로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에겐 처음 보는 마놀로의 여동생이었는데, 목발을 짚은 그녀는 또 어찌나 친절하고 나에게 호감을 갖고 대하는지, 내가 어리벙벙해지기도 했다.
마놀로의 친부모님들은 사람은 좋아 보여도 말수가 적었는데(그래서 마놀로도 무뚝뚝했나 본데), 그녀는 어찌나 상냥한지...
"내가 아프지만 않다면, 인야, 당신을 우리 집에 초대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을 드러내는 등, 나를 쉽게 놔두려 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사실 그 당시의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지. '아델라(Adela)'였는데, 그녀의 남편이 '꾸꼬(Cuco)'인 것도...' 하다간, '그 때는 꾸꼬가 없었어. 아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었고, 그 몇 년 뒤에야 알게 되었고, 어디 그 뿐이었던가? '크리스티나(Cristina)'는 보았는데, 걔가 그들 부부의 무남독녀인 딸이라는 사실도...... 그런데, 그들 가족과 내가 그 몇 년 뒤부터, 그토록 친한 사이가 될 줄은 더더욱 몰랐었지.' 하면서 이 인야는, '지금 일흔이 다 된 나인데, 엊그저께도 꾸꼬의 문자가 왔는데, '왜 올 여름엔 안 오느냐'는 바람을 보일 정도로 우리는 가깝지......' 하면서 핸드폰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데,
낮에 하도 잘 먹어서 별 생각이 없는데도, 까르멘은 어느새 풍성한 저녁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불렀다.
그래서 식탁에 앉았는데, 저녁 메뉴엔 '비에이라(Vieira : 우리의 가리비)'조개도 있었는데,
'산티아고 가는 길'을 끝마친 나에게 맛을 보이기 위한 까르멘의 배려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며칠 전에 자기들 아는 어부에게 특별히 주문해 두었는데, 오늘 가져온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가리비' 조개껍질은 '산티아고 가는 길'의 심볼로도 사용하는데, 나는 90년대 한국에서 놀러왔던 친구 P와 유럽 여행을 하다가 여기 갈리시아 지방 산티아고에 들렀을 때, 그 조개 맛을 보고 싶었지만, 어찌나 비싼지 입맛만 다시고 지나쳤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그 조개 맛을 본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썩 맛있지는 않았다.
어저면, 오늘은 너무 배가 불러서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그런데 우스웠던 건,
그렇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까르멘의 사촌이라는 뚱뚱한, 빵집을 한다는 여자가 커다란 케잌과 수북하게 여러 종류의 디저트용 빵(이들은 이것을 빠스텔(Pastel)'이라고 부른다.)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물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먹을 게 풍년인데, 그런 빵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빵이라는 것들이 하나 같이 다 크림이거나 초콜릿 등을 덮은 것들이어서,
'이런 음식들을 먹으니, 어떻게 살이 안 찔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물론, '이 집에, 못 먹고 죽은 귀신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 내심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는데,
그 순간이었다. 까르멘도 날 보더니, 눈짓을 하며 어깨를 으쓱 올리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은 킥킥대며 웃고 말았는데,
아, 먹을 걸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먹을 건 자꾸 생기고......
하도 기가 막혀(?),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좌우간 이 집엔, 먹을 것이 넘쳐난다.
그러니, 마놀로 부자가 덩치가 산 만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8 . 18
*
이렇게 이들과 어울려 지내다보니, 나는 마치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마놀로(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 동양인은 바르셀로나에서 알게 된 친구인데, 바로 며칠 전에 '까미노'를 끝내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사람이야!" 하고 약간은 자랑스럽게(?)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를 하면,
그들은 하나 같이 들,
"정말이야? 동양사람이, 나도 못한 까미노를 끝마쳤다고?" 하고 놀라면서도,
반겨주는 건 물론 약간의 존경심까지 갖는 듯 호의를 베풀어 주는 자세로 돌변하다 보니,
가는 데마다, 생각지도 않았던 환대를 받는 기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마놀로의 차를 타고 가다, 여기 갈리시아의 아련한 풍경이 있는 길을 보면서 갑자기 나는,
걷는 그리움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아, 이제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그 떠도는 생활이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그나저나,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어떡한다지?
오늘은 비가 내렸고,
아들 마놀로(Manu) 부부는 일 때문에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
사실, 오늘은 이 집 담장 철재에 페인트칠을 해주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비가 내려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며칠, 까르멘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날 편하게 해주려고 여러 가지로 배려도 많이 해준다.) 나는 여기서 너무나도 잘 지내고 있다.
그녀는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8 . 19
#아! 까르멘(Carmen)...#
그저께,
그러니까 내가 여기 온 다음 날, 점심을 맛있게 먹은 뒤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마놀로가 나를 이곳 '빌라 노바 데 아로우사(Vila nova de Arousa)'를 한 바퀴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차로 '아로우사(Arousa)'섬까지 들어가 여러 지역을 돌아보다, 바닷가에서 홍합을 몇 개 따기도 하는 등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내 방에 들어와 쉬려고 방문을 열었는데,
"아!" 하고 혼자 소리를 지를 정도로 나는 침대를 보며 감동을 하고 말았다.
내 침대 위에는 내 옷들이, 마치 군대시절 각을 맞춰 옷을 정리한 것처럼 너무나 가지런하게 개어져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 마놀로랑 동네 한 바퀴 돌러 나가기 전에 까르멘이 나에게,
"인야, 당신 빨래 안 해? 어차피 까미노를 끝낸 뒤 끝이니, 옷을 한 번 깨끗하게 빨아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물어왔을 때,
"그렇긴 한데, 까르멘, 사실은, 내 옷은 두 달을 까미노에서 땀에 절어서... 더럽기도 하고, 다 닳은 것들이라... 이따가 그냥, 내가 조용히 할 게......" 하고, 가급적 내 더러운(두 달을 까미노를 걸어왔던 옷이라 땀내에 절었던) 옷을 그녀에게 보여주기도 싫었고, 더더욱 맡길 생각은 없어서, 곤란한 어투로 말을 하자,
"인야, 어떻게 하려고?" 하고 묻기에,
"까미노에서 하듯, 손으로 빨면 되잖아......" 하고 그녀에게 맡기기는 싫었는데,
"그냥 내 놔. 내가 세탁기를 돌리는 김에 우리 빨래랑 함께 하면 되잖아?" 하기에,
"그래도... 너무 꾀죄죄해서... 그러기가......" 하고, '차라리 그냥 모른 척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왠 빨래를 해준다고 하느냐고?' 하는 마음에 더욱 찜찜해 하는데도,
"인야, 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더더욱 깨끗하게 빨아야 하지 않겠어? 그런 걱정 말고, 내놓고 나갔다 와." 하는데도,
"까르멘, 그냥 내가... 나중에... 할 게......" 하고 사정하다시피 하는데도,
"그게 무슨 소리야? 걱정 말고 내 놔." 하고 눈을 흘기기에,
빨랫감을 챙겨 내놓으면서도, 뭔가 내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는데,
어느새 그 옷들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는 것도 모자라,
겉옷이야 그렇다 쳐도, 내 속옷까지가 이미 다림질까지 한 상태로 너무나도 정성스럽게 개어져 있어서,
'아니, 이럴 수가!' 하면서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감동도 이런 감동이 없었다. 내가 마흔 다섯이 될 때까지 이렇게 내 속옷(팬티와 양말까지)을 다림질까지 해서 가지런히 놓여진 경우는 처음이도록 놀랍고도 신선한 감동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누님도 이렇게까지 해준 적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내 어머니와 누님이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이런 건 문화적인 차이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더구나 외갓남자(외국인)의 두 달 여 까미노를 걸으면서 땀에 절고 절어 이젠 어느 정도 헤어질 모습의 허름한 속옷까지 다림질을 해서 개 놓았다니!
뭐랄까? 나는 뭔가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은 기분이었고, 평생 잊을 수 없을 감동적인 일이어서,
'내가 이 옷을 입을 수 있을까?'(그 상태에서 다시 더럽히고 싶지 않은 생각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깝고도 소중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아, 이런 큰 은혜(친절)를 받다니! 이 걸 어떡한다지?' 하는 걱정까지 드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두 달에 걸쳐 '까미노'를 걸으면서 그려왔던 그림들 중 하나를 선물로 놓고 가자.' 하는 생각까지 해두었다.
그런데 오늘도 점심은 해물 중심이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바닷가이기도 하고 여기 갈리시아 해안의 해산물이 맛도 있어서 그럴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여기 특산이라는 게인 '네꼬라(necora)' 찜이 나와서,
그걸 먹으면서도 나는,
'이걸 한 번 그려볼까?' 하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게 요리가 남아서, 나는 그 중 한 마리를 조용히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밖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나가지 못할 상황이어서, 낮잠을 자는 대신 나는 그걸 수채로(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겠지만, 주황색의 익은 게 모습이 아주 앙증맞고도 정감이 가게 그려져 나왔다.
그리고 저녁 무렵 나는 슬그머니,
"까르멘, 이것 좀 봐봐......" 하면서 그 그림을 보여주었는데,
"아이고, 세상에! 이거 언제 그린 거야?" 하고 기절할 듯 까르멘이 놀라다 못해,
"마놀로! 이것 좀 봐봐!" 하고 소리를 지르자, TV를 보고 있던 마놀로도 오더니,
"인야, 이거 정말... 니가 그린 거야?" 하고 놀라면서 묻기에,
"여기, 내 싸인이 있잖아?" 하고 가리키니,
"인야, 너, 정말... 예술가구나!" 하고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내 그림을 보며 난리가 났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아, 다행이다! 그래, 이 그림을 까르멘에 대한 고마움으로(보답으로) 이 집에 놓고 가야겠다.' 하고 생각해 두었다.
그림이 내 맘에도 들었기 때문에 남에게 주기가 썩 내키지 않긴 했지만, 까르멘에게는 아깝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내가 처음에 바르셀로나에서 살 때는,
그 동네 입구의 첫 번째 집에서 살던 마놀로의 가족과는(큰 아들 '마누'를 제외한), 이따금 내가 바르셀로나 도심으로 오르내리면서 얼굴만 마주치다 목례를 하는 정도로만 알고 지냈었는데,
그 때의 까르멘에 대한 인상은,
늘 앞치마를 걸치고 말수도 없이 집안에서 뭔가를 하던 수수하고 평범한 모습이었고,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나 귀국하려던 즈음에야(마놀로가 자기네 트럭으로 내 짐을 옮겨주는 친절을 베푼 걸 계기로) 처음으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식사 초대),
그 이후로 내가 2-3년마다 한 번씩 바르셀로나를 올 때는, 자연스럽게 그 집에 들락거리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보면, 마놀로가 건축 일을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직원 등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까르멘은 늘 그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음식도 잘하지만 손도 큰 그녀의 성품이나 특색을 알게 되면서는,
'까르멘은 조용히 남편의 내조를 참 잘하는구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까미노를 끝내고 이들과 함께 같은 집에서 지내다 보니, 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히 그녀의 집안에서의 역할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 와서도 까르멘은 시집과 친정집을 날마다 단 한 차례 빠트리지 않고 방문을 해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건 물론, 뭐가 필요한지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채워주는 역할도 척척 해나가는 모습에,
'아, 만약에 한국이라면... '효부상'을 받을 만한 큰 며느리 역할은 물론, 남들의 모범이 될 만한 '현모양처'로구나!' 하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결혼을 마다 하고 혼자 살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 '까르멘' 같은 여인이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심정이기도 하다. 어떤 남자가 이런 여인을 싫어할 수 있을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훌륭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까르멘을, 불손하게 여인으로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건 아니다. 그럴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나는 여기에 와서 그녀의 살아가는 모습에, 뭔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건 어쩌면 그녀를 존경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이 마흔 다섯에 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은 뒤, 여기 갈리시아에 와서... '까르멘'이라는 여인으로 인해 인생의 새롭고도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고, 뭔가 커다란 자산이 늘어난 기분이기도 하다.
내가 이 집에 와서 일주일 정도를 지내다 떠나게 되는데,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가 있는 보상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와서, '까르멘이라는 여인'을 존경하게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
*
내일 떠나려고 했다.
이 집에서 너무 잘 먹고 편히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1주일이 돼 가니 너무 오래 된 것 같기도 해서,
그리고 아무리 좋아도 난 이 집의 손님일 뿐이고, 나도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해야 될 일도 있어서다.
그런데 까르멘이,
"인야, 내일 우리 집에 손님들이 오는데, 그 분들이 오면, 우리가 그 분들을 모시고 여기 갈리시아 북부의 '죽음의 해안(Costa de Muerte)'에 구경시켜드리러 갈 거거든? 그러니, 여기서 내일 하루 더 지내고, 모레 아침 우리가 일찍 거기로 출발할 때, 인야, 당신도 함께 가면 되잖아?" 하기에,
어차피 내가 이번에 산티아고에 도착한 다음, '피니스떼레(Finisterre)'에 들르지 못한 서운함이 있었기에,
그리고 여태까지 가보지 못했던 '죽음의 해안'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강했고, 어쨌거나 오늘 이 집 담장의 철재에 페인트칠도 끝냈기 때문에 마음이의 부담도 줄어든 상태라서,
까르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8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