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유(安裕)의 시에, “수면 위에 한 잎 날아들고, 범왕궁(梵王宮) 금벽(金碧) 칠이 공중에 빛나네. 고갯 머리 푸르름은 산의 그림자 아니요, 돌 위에 졸졸거림은 빗소리 같구나. 햇살 따사로운 뜰에 핀 꽃은 옅은 푸름을 지녔고, 서늘한 밤이 찾아온 산에는 달 떠올라 어스름 한 빛 보내오네. 백성을 염려해도 도탄에서 건져내지 못하니, 부들 자리에 앉아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다.
○ 이견간(李堅幹)의 시에, “선동(仙洞)에 오가면서 관평(寬平)함을 얻었고, 연방(蓮坊 절)이 고을 성과 멀리 있음을 기뻐하네. 삼면으로 반공(半空)은 모두 산 빛이요, 한 자락 빈 데엔 강물 소리 들리네. 앞 마을 아득해 고기잡이 등이 어둡고, 별원(別院)이 쓸쓸한데 안탑(雁塔)만이 환하구나. 어찌 임금을 받들어 축수하지 않으리, 자색 금니(金泥)로 포의의 선비를 기용하였네.” 하였다.
금강사(金剛社) 부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 불훼루(不毁樓)가 있다. 하륜(河崙)이 기문에, “김해(金海)는 옛날의 가락(駕洛)이니, 가야(伽倻)이다. 가락은 신라와 함께 일어났고, 수로왕의 탄생은 참으로 기이하며, 내려온 습속에는 아직도 순박한 풍속이 있다. 또 등림하기에 좋은 경치도 남방에서 첫째인데, 그 중에서도 금강사의 소헌(小軒)이 제일이다. 사(社)에 산다수(山茶樹)가 있어 온 뜰을 덮었으니, 전조(前朝) 충렬왕이 보련(寶輦)을 여기에 멈추고 장군이라고 칭호를 내렸으므로 부로들은 이 일을 미담으로 서로 전해 온다. 내가 소년 시절에 객으로 왔었는데, 한 창 중춘(仲春)이어서 산다화가 활짝 피어 있기에 반나절이나 구경하였으나 흡족하지 않았다. 다만 마루가 낮고 작으므로 나뭇가지와 잎이 서로 가리워서 멀리 내다보기가 어려웠다. 문을 나서자 그제야 산과 바다의 참모습을 보게 되어 두루 거닐고 읊조리면서 한참 있다가 돌아왔다. 그 뒤에도 가끔 다시 유람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곳의 부사 우균(禹均)이 부 사람인 전 현감(縣監) 옥사문(玉斯文)을 나에게 보내 와서 청하기를, ‘유후(留後) 안공(安公)이 일찍이 본부 부사로 있었고, 도관찰(都觀察)이 되어서는 금강사를 두 번이나 유람하였는데, 그때 부사였던 현맹인(玄孟仁)에게 이르기를, 「사 남쪽에 작은 누(樓)를 지으면 반드시 기이한 경치가 될 것이오. 예전에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소. 지금 또한 백성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으니, 만약 사의 중들을 시켜서 힘쓰게 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오.」 하였소. 현군이 이에 공인을 청해서 터를 잡아 짓기 시작하였는데, 중들이 각자 힘을 다해서 두어 달이 못 되어 완성하니, 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게 되었소. 또 누 남쪽에 물을 끌어 못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 연을 심었으며, 다시 그 동쪽에는 흙을 쌓아서 뜰을 만들고 그 위에다가 대를 심었소. 가까우면서 즐길 만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자네는 부디 이름을 지어주고 또 기문을 지어 누를 빛나게 해주시오.’ 하였다. 나는 나의 글이 비졸(鄙拙)하다고 사양하였는데 지금 그 부의 현량(賢良)으로 절제(節制)를 지낸 송득사(宋得師)군이 또 우군의 뜻으로 거듭 간청하였다. 생각하건대, 금강 불훼(金剛不毁)라는 것은 석씨(釋氏)의 말이니, 내가 그 뜻을 부연(敷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의 터가 이미 사의 경내(境內)에 이어져 있고, 누를 완성한 것도 또한 사 중들의 손으로 지어졌으니 사를 이름한 말을 따서 누 이름으로 하여도 또한 구차하지 않으리라. 사가 허물어지지 않으면 누 또한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며, 누가 허물어지지 않으면 여러분의 이름도 또한 없어지지 않으리라. 대개 누관(樓觀)을 짓고 제목으로 하여 글을 짓는 것이 세도와 관계가 없을 듯하나, 여기에서 세도의 오르내림을 볼 수 있다. 만약 정사가 화평하지 못하거나 송사가 다스려지지 않으며, 시절(時節)이 화하지 못하거나 풍년으로 여유롭지 않으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려는 뜻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하니 여러분이 정성스럽게 한 계획이 완성되었고, 우군이 누의 기문과 이름을 구하는 데 유의(留意)하는 것이 어찌 모두 세도를 위해서 기쁜 일이 아니리오. 하물며 내가 옛날에 거닐던 곳임에랴. 내 이 때문에 굳이 사양하지 않고, 누를 불훼(不毁)라 이름하며, 또 예전에 일찍이 보고 들은 것과 오늘날 마음에 느낀 바를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이 누에 올라서 이 글을 보는 자가 진실로 제 마음을 반성하여, 지나치게 즐기다가 그 절제(節制)를 허물지 않고, 방종과 오만으로 그 덕을 허물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마음으로 공도(公道)를 허물지 않고 편견으로 올바른 사리를 허물지 아니하며, 털끝만한 혹독함으로 인(仁)을 허물지 않고, 털끝만한 사욕으로 의를 허물지 아니하며, 국가의 전칙(典則)을 허물지 않을 바를 생각하고, 부조(父祖)의 훈계를 허물지 않을 바를 생각하여, 무릇 한 몸의 사업을 허물지 않을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 없어서 영원토록 허물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이 누에 오른 이익이 진실로 적지 않으리라. 풍경의 묘함과 지음새의 정밀함은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자세히 적기는 어렵다. 어찌하면 하늘이 세월을 빌려주어 벼슬을 마치고 시골에 돌아와서, 촉석강(矗石江)에 배를 띄우고 흐름을 따라 내려와 황산포(黃山浦)에 이르러 한 번 누 위에 올라 다시 글 한 편을 지을 수 있을까. 안공의 이름은 순(純)으로 판문하(判門下) 쌍청 선생(雙淸先生)의 손자이며, 개국공신 흥녕군(興寧君)의 아들이니, 이번 일로 볼 때 그 분도 또한 아담한 도량과 문장의 풍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말 가는 대로 따라서 이름난 구역 다 지나고, 분성(盆城) 북쪽에 절을 찾았네. 금관(金官)은 옛 나라니 하늘도 땅도 늙었네. 옥련(玉輦)이 노닐었던 세월도 아득하다. 시조왕릉 그윽한데 산은 적적하고, 장군 나무 늙었는데 풀은 무성하다. 가야 옛 물건 가야금 아직 남아 있으니, 가인(佳人)을 시켜서 다시 한 번 나지막이 창(唱)하여 볼거나.” 하였다. 귀암사(龜巖寺)ㆍ십선사(十善寺)ㆍ청량사(淸涼寺) 모두 신어산(神魚山)에 있다. 이세사(離世寺) 신어산에 있다. ○ 고려 곽여(郭與)의 시에, “늦은 가을 푸른 바다 천 길 물결에 한 잎의 조각배 만 리 가는 사람일세. 멀리 종소리 듣고 절 찾아 와서, 잠깐 풍어(風馭 바람에 날리는 돛대)를 머물러 신선이 되고자 가야국 왕업은 강가 풀밭에 이어져 있고, 수로왕 후손은 고을 백성이 되었네. 남방 옛 도읍을 이제 이미 보았으니, 조각배 돌려 바다와 산의 봄을 멀리 향하고 갈거나.” 하였다. 운점사(雲岾寺) 운점산에 있다. 진국사(鎭國寺)ㆍ명월사(明月寺) 모두 명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분산(盆山)에 있다. 송악당(松岳堂) 금강사(金剛祠)에서 서북쪽으로 2백 보쯤 되는 지점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송악당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려 원종(元宗)이 원 나라의 명을 받들고 장군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금강사에 머물렀다. 그때에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지낸다. 여단(厲壇) 부 북쪽에 있다.
【능묘】 수로왕릉(首露王陵) 부 서쪽 3백 보 지점에 있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부중(府中)의 부로들이 함께 모여서 제사지낸다. ○ 한(漢) 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에 가야국 시조 수로왕이 훙(薨)하니, 성 북쪽에 장사지내고 능 곁에 있는 밭 30경(頃)을 바쳐 봄ㆍ가을 제사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 신라 말에 장군 충지(忠至)가 금관성(金官城)을 진수(鎭守)하였는데, 영규(英規)라는 자가 장군의 위세를 빙자하고 제물을 빼앗아서 치고(致告)였더니, 사당의 들보가 부러지면서 영규의 이마에 떨어져서 마침내 죽었다. 충치가 두려워하여 왕의 진영(眞影)을 그려서 사당 벽에다가 봉안하고 조석으로 제사하였더니, 사흘이 되자 진영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에 고인 것이 거의 한 말이 되니, 충지가 두려워서 태워버렸다. 그 뒤에 도둑떼가 능 안에는 반드시 금은 보화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 여겨서 무덤을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병사가 능 안에서 나와 여덟 사람을 쏘아 죽이니, 도둑이 놀라 달아났다. 며칠 뒤에 다시 갔는데,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뱀이 능 곁에서 나와서 아홉 사람을 물어 죽이니, 나머지 도둑들이 모두 엎어지면서 달아났다. 순화(淳化) 2년에 양전사(量田使) 조문선(趙文善)이 능 밭을 반으로 줄여 백성에게 주려 하였더니, 그날 저녁 꿈에 신인(神人) 7, 8명이 칼을 들고 와서, “네가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고자 한다.” 하였다. 조문선이 놀라 깨어 병이 나서 밤에 도망하다가 길가에서 죽었다.
○ 고려 문종(文宗) 때에 지주사(知州事)가 능명(陵銘)을 짓기를, “원태(元胎 천지)가 비로소 열리고 이안(利眼 선악을 가리는 눈)이 처음으로 밝았다. 사람의 무리는 태어났으나, 임금 자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조정은 여러 대를 지났으나, 동국은 서울이 갈라져 계림(鷄林)이 먼저 정하고, 가락은 나중에 경영하였다. 본래 제대로 맡은 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살피리. 이에 하느님[玄造]이 저 창생을 돌보시어, 부명(符命 명령)을 전수하고 특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다. 산중에 알을 내리니, 안개 속에 형체를 감추었다. 안쪽은 오히려 막막하고 겉도 또한 어두웠다. 바라봐도 형상 없는 듯하나 이내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무리가 노래하며 연주하고 대중이 춤을 추며 올렸다. 이레 뒤에 한때를 만나, 바람 불고 구름 걷혀 공중이 파랗고 하늘이 푸르렀다.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렸는데 한 가닥 자색 끈이 드리웠다. 먼 지방 다른 지역에 집이 나란히 섰고 대마루가 잇닿았는데, 구경하는 자가 담같이 둘러섰고 보는 이들이 국처럼 들끓었다. 다섯 사람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이 성에 남았다. 같은 때와 같은 자취가 아우 같고 형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았고 세상을 위해 법을 만들었다. 보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청명하였다. 궁궐은 옛법을 따르고 흙 섬돌도 오히려 편평하였다. 만 가지 일[萬機] 비로소 힘쓰니 서정(庶政)이 시행되었다.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짓지 아니하며, 오직 한결같고 오직 정(精)하였다. 길 가는 자가 서로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가 밭두둑을 사양하였다. 사방이 베개를 편히 베고 만백성이 화평하였다. 얼마 후에 해로(薤露)가 마르니 춘령(椿齡)을 보전할 수 없었다. 천지간에 기운이 변하니 조야가 마음 아파하였다. 금으로 그 자취를 형상하고 옥이 그 소리를 거두었다. 묘예(苗裔 후손)가 끊어지지 않아, 올리는 제물은 오직 향기로웠고, 세월이 가도 의식은 기울지 않았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금릉(金陵) 지난 일은 누구와 함께 말하리. 천고에 오직 수로왕의 능만 남았네. 귀지곡(龜旨曲) 없어지고 사람도 안 보이나, 가야금은 남아 묘한 소리 들을 만하네. 동타(銅駝) 있던 옛 마을에 산이 창 같고, 옹중(翁仲) 빈 터에 나무만 구름 같네. 백 60년 동안 국가를 누렸으나, 가련하다. 황량한 무덤에 몇 번이나 저녁 해 비꼈던가.” 하였다. 허왕후릉(許王后陵) 귀지산 동쪽에 있다. 전설에, 왕비가 아유타국(阿踰陀國) 왕녀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고도 한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 부른다. 고을 사람들이 왕릉에 제사할 때에 함께 제사한다.
【고적】 수로왕궁(首露王宮) 지금 부 안에 옛터가 남아 있다. 망산도(望山島)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7월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에게는 망산도에서 바라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에서 바라보도록 명하였다. 붉은 돛과 꼭두서니 빛 깃발이 바다 서남쪽에서 북쪽을 지향하는 것을 보고, 신귀가 달려와서 아뢰니, 왕이 궁 서쪽에다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높은 봉우리에서 쉬면서,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서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쳤다. 왕후가 이르자 왕이 장막으로 맞아들이고 이틀 뒤에는 같은 연(輦)을 하고 대궐에 돌아와 후(后)로 삼았다. 그 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 3월에 후가 승하하였는데, 수명이 1백 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처음 와서 배를 매어 놓았던 곳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 벗던 곳을 능현(綾峴), 꼭두서니 빛 깃발이 들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하는데, 주포촌 왼쪽에 있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왕후사(王后寺) 옛 터가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수로왕 8대손 질지왕(銍知王)이, 그때에 장막치고 합혼(合婚)하던 곳에다가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하였는데, 뒤에 절은 파하고 장(莊)으로 만들었다. 초현대(招賢臺) 부 동쪽 7리 지점에 있으며 작은 산이다. 전설에는, 가락국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點山) 담시산인(旵始山人)을 초청하니, 담시가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져와서 서로 더불어 즐겼으므로 그대로 이름하였다. 왕이 앉았던 연화석(蓮花石)과 바둑판 돌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호계(虎溪) 가에 있으며 5층이다. 돌빛이 붉게 아롱졌으며 질은 좋으면서 무르고, 조각한 것이 배우 기이하다. 전설에는, 허왕후가 서역(西域)에서 올 때에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 한다. 진례성(進禮城) 부 서쪽 35리 지점에 옛터가 있다. 신라 때에 김인광(金仁匡)을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로 삼았다. 수다부곡(水多部曲) 부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제을미향(齊乙彌鄕) 부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화례향(省火禮鄕) 부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달음포향(達音浦鄕)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감물야향(甘勿也鄕) 부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분산성(盆山城) 석축이며 둘레가 1천 5백 60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성안에 우물 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나 마르지 않는다. 조전성(漕轉城) 부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백 65척이다.
【명환】신라 김인광(金仁匡)ㆍ충지(忠至) 고려 송언기(宋彦琦) 정사를 청렴하고 공평하게 다스리니 간사하고 사나운 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김훤(金晅) 방어사(防禦使)로 있었는데 그때에 밀성(密城) 사람이 그 고을 원을 죽이고 삼별초(三別抄)와 호응하여 이웃 고을에 첩문(牒文)을 보내니, 모두 바람 따라 쏠리듯 하였다. 김훤이 정병(精兵)을 출동시켜서 먼저 적의 진로를 끊고 경주 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을 불러 와서 군대를 훈련하였으며,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淑眞)에게 적을 토벌할 계책을 하게 하였는데, 숙진이 겁내어서 술승(術僧)을 불러 길흉을 점치며 일부러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김훤이 손에 칼을 쥐고 그 중을 치니 숙진이 두려워서 그 계책대로 따랐다. 적이 이 소식을 듣고 저들의 괴수를 베어서 항복하였다. 삼별초가 군사를 나누어서 경상도 방면으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금주(金州)가 변방에 있으므로 적의 침공을 먼저 받았다. 김훤이 계책으로 항전하여 적이 들어오지 못하니 온 도가 그의 덕분에 편안하였다. 논공(論功)할 때에 본주(本州)를 금녕부(金寧府)로 승격하고, 김훤은 예부 낭중(禮部郞中)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대로 도호(都護)로 삼아서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한강(韓康) 수령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토지의 부세(賦稅)가 항상 액수를 채우지 못하여 그 때문에 연좌되어 파직된 수령이 많았다. 한강이 와서는 황폐된 둔전(屯田)을 다시 개간하여 곡식 2천여 석을 얻으니 아전이 단속되고 백성이 편안해졌다. 치적이 첫째를 차지하였으므로 불러올려 예부 낭중을 삼았다. 최득평(崔得枰) 수령으로 있었는데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였다. 벼슬이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이르렀다. 이우(李瑀) 수령이었을 때 인애(仁愛)하는 정사를 남겼다. 전신(全信) 부사였는데 백성이 오래도록 사모하였다. 윤선좌(尹宣佐) 장서기(掌書記)를 지냈다. 안축(安軸) 사록(司錄)을 지냈다. 이암(李嵒) 수령을 지냈다. 이언중(李彦仲) 목사를 지냈다.
본조 안순(安純)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치(金峙)ㆍ우균(禹均)ㆍ윤기견(尹起畎) 모두 부사를 지냈다. 이맹현(李孟賢) 부사를 지냈다.『신증』 하경리(河敬履)ㆍ김숭해(金崇海)ㆍ김의형(金義亨)ㆍ손중돈(孫仲暾) 청렴ㆍ명백한 정사를 하니 아전이 두러워하고 백성이 감사하였다.
과 거
【문과】
<본조> 金銚[영락신묘 科], 金墩[영락신유 科], 이하<별지>
【무과】
첨부 <별지>
【인물】신라 김무력(金武力) 수로왕의 10세 손으로, 신주도 총관(新州道摠管)이었다.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百濟王)을 잡았다.
김서현(金舒玄) 무력의 아들이다. 벼슬이 소판 대량주 도독 안무 대량주 제군사(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김유신(金庾信) 서현의 아들이다. 서현이 일찍이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로 있었는데, 경진일(庚辰日) 밤 꿈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왔다. 아내 만명(萬明)도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당(堂)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얼마 있다가 아기를 배었다. 20개월 만에 낳으니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이고, 수(隋) 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년이었다. 서현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 길몽을 꾸고 이 아이를 얻었으니, 이것으로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禮)에, 일월(日月)로써 이름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경(庚) 자는 유(庾) 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서로 같으니 어찌 그것으로 명명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유신이라 이름하였다.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여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뒤에 신라 태종(太宗)을 도와서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나이 79세에 죽으니 비(碑)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고, 뒤에 흥덕왕(興德王)이 추후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하였다.
○ 김부식(金富軾)이 사론(史論)에, “어진 이를 임용하여서는 바꾸지 않고, 간사한 이를 버리는 데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건대, 친근하여서 간격이 없고, 위임하여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모의한 것은 실행되고 말은 들어주어,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육오 동몽(六五童蒙 아랫사람 말을 믿고 자기의 뜻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의 길함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신이 제 뜻을 행할 수 있었으며, 상국(上國)과 꾀를 합하여 세 나라를 합쳐 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공명(功名)으로 끝마쳤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義勇)이 있었으나, 중국 문서가 없었으면 사라져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의 경우에는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稱誦)해 마지않는다. 사대부가 알고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마는 초동 목수[蒭童牧豎]도 또한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남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김삼광(金三光) 유신의 아들이다. 김원술(金元述) 삼광의 아우이다.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를 배반한 백성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크게 노하여 장수에게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장군 의복(義福) 등을 보내어 대방(帶方) 들판에서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였다. 원술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고자 하였으나 담릉(淡凌)이 만류하였다. 서울에 돌아오니 그의 아버지 유신이,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 또한 저버렸으니 참(斬)해야 한다.” 하였다. 왕이 용서하였으나 원술은 부끄럽고 후회되어서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전야(田野)에 숨어 살았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에게 뵈옵기를 청하였는데, 어머니는, “부인은 삼종(三從)하는 의(義)가 있으니 자식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원술은 이미 그 아버지에게 자식이 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어머니가 될 수 있으랴.” 하고, 마침내 보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면서, “담릉 때문에 그르쳐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버렸다. 그 뒤에 당 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니, 원술은 전일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힘껏 싸워서 공과 상이 있었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한 것을 안스럽게 여겨서 벼슬하지 않고 몸을 마쳤다.
김윤중(金允中) 유신의 손자이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벼슬이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중추일(仲秋日)에 왕이 월성 잠두(月城岑頭)에 올라서 조망(眺望)하면서, 시종관과 술자리를 벌이고 윤중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간(諫)하는 자가, “종실(宗室)과 척리(戚里) 중에 좋은 사람이 많은데, 어찌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하니, 왕이,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하고 무사한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 덕이다.” 하였다. 드디어 윤중을 불러서 가까이 앉도록 하고, 그의 할아버지의 평생 사적을 언급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물러가겠다고 아뢰자 절영산(絶影山) 말 한 필을 하사하니, 여러 신하가 섭섭해하였다.
김암(金巖) 윤중의 서손(庶孫)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방술(方術)을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이찬(伊飡)이 되었고 당(唐)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로 있으면서, 가끔 스승에게 가서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웠다. 스스로 둔갑입성(遁甲立成)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부끄러워하면서, “자네의 밝게 앎이 여기까지 도달하였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고 이후로는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대력(大曆) 연간에 나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양주(良洲)ㆍ강주(康州)ㆍ한주(漢州) 태수를 지냈고, 뒤에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다.
고려 허유전(許有全) 원종(元宗) 말년에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가락군(駕洛君)에 봉하였다. 그때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藩)에 유배되었는데, 유전이 민지(閔漬) 등과 원(元) 나라에 가서 송환하도록 청하였다. 그때에 유전의 나이가 81세였고, 아내도 또한 늙고 병들어서 말리니, 답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오. 그런데 어찌 아내가 병들고 제 몸이 늙었다 하여 임금을 잊고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소.” 하였다. 아들 허영(許榮)에게 간호하도록 부탁하고 영결(永訣)한 다음 떠나가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이 감탄하였다. 그 뒤 9일 만에 아내가 죽었다.
김보(金普) 충혜왕(忠惠王) 때에 지밀직(知密直)으로 임명되었고, 공민왕(工愍王) 때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전임되었다. 연저(燕邸) 시종한 공이 1등으로 기록되어서,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송천봉(宋天逢) 충목왕(忠穆王) 때에 과거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첨서밀직사사 김해군(簽書密直司使金海君)이 되었다. 문장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유(金庾)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고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다.
본조 김조(金銚) 처음 이름은 빈(鑌)이다. 과거에 올랐고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세종(世宗) 때 흠경각(欽敬閣) 간의대(簡儀臺)를 창설할 적에, 김요가 김돈(金墩)과 함께 참여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김계희(金係熙)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김극검(金克儉) 과거에 올랐고 또 병술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뽑혀서 벼슬이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이르렀다. 성품이 청렴개결(淸廉介潔)하여 살림에 힘쓰지 않았다.
【우거】본조 권형(權衡)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다. 뒤에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와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죽자 슬퍼하는 것이 지나쳐서, 이 때문에 병에 걸려 벼슬하지 못하였다.
【효자】본조 반석철(潘碩徹) 부모 상(喪)을 당하자 직접 스스로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거려(居廬)하면서 슬픔을 다하였다. 상을 마친 다음에는 초하루마다 사당을 배알하고, 출입할 때에 반드시 고하여, 돌아가신 부모 섬기기를 살아계신 분 섬기듯 하였다.
【열녀】본조 성이(性伊) 부의 아전 허후동(許厚同)의 아내이니, 20세 때에 남편이 죽었다. 아침저녁으로 전(奠)의 제물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여, 솥과 제기를 별도로 두고 사용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그 철에 알맞은 옷을 짓고, 그 철에 나는 물품을 갖추어서 제사하며 제사한 다음에는 불살랐다. 항상 강포(强暴)한 자에게 욕을 당할까 염려하여, 칼과 노끈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칼로 자결하지 못하면 끈으로 목매겠다.” 하였다.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으며 일찍이 남과 얼굴을 대한 적이 없었으니, 일이 나라에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돈지(頓之) 백성 김종(金宗)의 아내이니, 김종이 죽자 남과 말한 적이 없었다. 3년을 마치고도 오히려 상복을 입으니, 그 어머니가 빼앗아서 불태우려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신증』 현금(賢今) 율생(律生 법률을 공부하는 학생) 배문생(裵文生)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여 아내인 현금을 버렸다. 그러나 현금은 항상 술과 음식을 갖추어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그 아버지가 개가(改嫁)시키고자 하니, 현금은 옷을 갈아입고 방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제영】 초현대하해파명(招賢臺下海波明) 주열(朱悅)의 시에, “수로왕릉 앞에 풀빛이 푸르고, 초현대 밑에 바다 물결 밝구나. 봄 바람은 유망(流亡)한 집에 고루 들며, 매화를 피워서 객의 마음 위로하네.” 하였다. 금중소월일륜명(琴中素月一輪明) 전녹생(田祿生)의 시에, “바다 위 일곱 점 선산(仙山)이 푸르고, 거문고 타니 한 바퀴 흰 달이 밝구나. 세상에 곱디고운 손길 없으면, 누가 능히 태고적 정을 타려[彈] 하리오.” 하였다. 칠점산전풍엽추(七點山前楓葉秋)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삼분수(三分水) 가엔 갈대꽃이 눈 내린 듯 칠점산 앞엔 단풍잎이 가을이라. 중류에 꽃배 띠우고 퉁소와 북 울리니, 한 구역 신선 경치 여기가 금주(金州)라네.” 하였다. 일대풍운성태고(一代風雲成太古) 권근(權近)의 시에, “한 시대 풍운도 태고적 일이 되었구나. 천년 능묘(陵墓)는 지금만 같구나. 주렴에 제비 나니 황매우(黃梅雨) 오고, 동산에 꾀꼬리 우니 녹수(綠樹)가 그늘지네.” 하였다. 칠점산여화(七點山如畵) 우균(禹均)의 시에, “칠점산은 그림 같고, 삼차수(三叉水)은 공중에 닿은 듯하다.” 하였다. 천요해접공(天遙海接空) 송득사(宋得師)의 시에, “산이 빼어나니 구름이 낮에도 생기고, 하늘이 아득하니 바다가 공중에 닿았네. 길다란 대는 섬돌에 흔들리며 푸르르고 아름다운 나무는 뜰 가득히 붉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좌부(左部)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우부(右部) 서쪽 끝이 15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하동(下東)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활천(活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대야(臺也)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칠산(七山) 서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15리이다. 율적(栗赤)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주촌(酒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진례(進禮)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유등야(柳等也)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잉천(芿川)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하계(下界)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태산(太山) 본래는 태산부곡이다.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중북(中北)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하북(下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주림(朱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부내(部內) 끝이 5리이다.
○ 수다부곡(水多部曲) 동쪽으로 15리이다. 고을미향(高乙彌鄕)은 남쪽으로 20리, 성화례향(省火禮鄕)은 남쪽 40리, 달음포향(達音浦鄕)은 동쪽으로 25리, 감물야향(甘物也鄕)은 동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고려 신우(辛祐) 때에 이 고을 부사(府使) 박위(朴葳)가 쌓았다. 둘레는 4천 6백 83척이며,
옹성(甕城)이 4, 샘물[泉]이 28, 여울[溪] 하나, 못[池] 하나였다.
분산성(盆山城) 둘레 1천 5백 60척, 우물2.
분성(盆城) 흙으로 쌓았다. 둘레 8천 6백 83척.
진례성(進禮城) 서쪽 35리이다.
○ 신라 때에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 제군사(諸軍事)로 삼았다. 조전성(曹轉城) 동쪽으로 18리이고, 둘레는 2백 60척이다. 가곡산성(歌谷山城) 서쪽 20리에 있는데, 둘레는 6백 척이며, 우물이 하나이다. 마현성(馬峴城) 과녀산성(寡女山城)이라고도 한다. 북쪽으로 30리, 둘레 1천 30척. 우물 하나이다. 신답산성(新沓山城) 서쪽으로 15리, 둘레 7백여 척이다. 망산도성(望山島城) 이 고을 부사 박위가 지었다. 죽도왜성(竹島倭城) 남쪽으로 10리이고, 임진왜란 때에 왜인이 지은 것인데 둘레가 5백 80척이며, 외성(外城)의 둘레는 6백 15척이다. 마사왜성(馬沙倭城)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흙으로 지었는데, 둘레는 7백여 척이다.
【영아】 별중영(別中營) 인조조 때에 두었다.
○ 별중영장(別中營將) 겸 토포사(討抱使)가 1명인데, 부사가 겸한다.
○ 속읍(屬邑) 김해ㆍ창원ㆍ함안ㆍ고성ㆍ칠원ㆍ거제ㆍ웅천(熊川)ㆍ진해.
읍창 셋.
○ 산창[蒜倉] 동쪽 30리 냇가에 있다. 영종 20년에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36년에 별장을 없앴다. 해창(海倉) 남쪽으로 6리다. 설창(雪倉) 서북쪽으로 30리이다.
【진도】 뇌진(磊津) 북쪽으로 48리, 해양강(海陽江)에 있으며, 밀양(密陽) 용진(龍津)의 하류이다. 태산진(太山津) 태산역(太山驛)에 있으며, 밀양ㆍ수산(守山) 앞의 나루터이다. 동원진(東院津) 동쪽으로 40리인데, 월당진(月唐津)이라고도 한다. 덕산역(德山驛) 아래 있으며 양산군(梁山郡)과 통한다. 불암진(佛巖津) 동쪽으로 40리에 있으며, 동래(東萊)와 내왕하려면 이곳에서 배를 탄다. 양산의 용당(龍堂)에서 일박하고 황산강(黃山江) 하류로 해서 죽도(竹島)로 들어간다.
【교량】 삽교(揷橋) 신교천(薪橋川)에 있다.
【토산】 김[海苔]ㆍ감.
【능묘】 수로왕릉(首露王陵) 서쪽으로 3백 보(步)이데, 납릉(納陵)이라 부르며 봄과 가을에 제를 올린다. ○ 감(監) 1명인데 후손에게 시킨다. 수로왕비 허씨릉(首露王妃許氏陵) 구지봉(龜旨峯)에 있는데 왕릉과 함께 제사지낸다.
【사원】 신산서원(新山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웠고, 광해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曹植) 진주 편을 보라.
[주1]곽숭도(郭崇鞱)가 자의(子儀)에게 배례(拜禮)하던 일 : 곽숭도는 중국 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의 재상이었다. 그 근본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인데, 당 나라의 곽자의(郭子義)가 그의 조상이라고 자칭하고 그의 무덤에 절하였다 하여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한다.
[주2]삼물(三物)과 팔형(八刑) : 옛날 주(周) 나라에서는 시골에서 세 가지 도의, 즉 도의 근본이 되는 지덕(至德), 행실의 근본이 되는 효덕(孝德), 악(惡)과 역(逆)을 알 수 있는 민덕(敏德)을 삼물이라 하여 교육의 근본으로 삼고, 죄를 다스리는 법 여덟 가지, 즉 불효, 불목(不睦), 불연(不婣 여자로서 동서끼리 화목하지 못함), 부제(不悌), 불임(不任 맡은 일을 잘못함), 불휼(不恤 재화를 당한 사람을 구휼하지 않음), 조언(造言 유언비어를 지어냄), 난민(亂民 직접 반란이나 소요를 일으킴)을 벌하는 법이 있어 팔형이라 하였다.
[주3]구장(鳩杖) :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어야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을 수 있었다. 그 지팡이 머리에 비둘기를 새겨서 다는데 비둘기는 먹은 것을 잘 소화시킨다 하여, 짚는 노인도 소화가 잘 되시라는 뜻이니, 비둘기를 새겼다 하여 구장(鳩杖)이라 한다.
[주4]금휘(金徽) : 그때에 쇳소리가 날 정도로 잘하던 일의 남은 소리이다.
[주5]원교(員嶠)와 방호(方壺) : 동해 바다 속에 신령스런 산이 다섯이 있어 옥황상제가 큰 자라 열 다섯 마리에게 명하여 한 산을 셋씩 지고 있게 하였는데,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낚시로 큰 자라 여섯을 잡았으므로 신령스런 산 둘, 즉 원교와 방호는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한다.
[주6]등왕각(滕王閣) : 중국 강서성(江西省)은 옛날에 홍주(洪州)라 하였으므로, 그 주(州)의 수부동 남창(南昌)을 홍도(洪都)라 하였으니, 등왕각(滕王閣)이 유명하다.
[주7]악양루(岳陽樓) : 호북성 악주(岳州)의 옛 지명이 파릉이었다. 바로 동정호(洞庭湖) 가에 있는데 악양루(岳陽樓)가 유명하다.
[주8]팽려(彭蠡) : 남창(南昌) 앞에 있는 파양호(鄱暘湖)의 별명이다.
[주9]완화계(浣花溪) :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시내인데,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그 시냇가에다 초당을 짓고 살았다. 두 공부는 두보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었기 때문이다.
[주10]우계(愚溪) : 당 나라 문장인 유종원(柳宗元)이 영주(永州)로 귀양가서 우계에서 살았다. 유주는 뒤에 유종원이 유주 자사(柳州刺史)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11]영근(郢斤) : 옛날에 석공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주12]버들잎[楊葉]을 뚫었으니 : 백 보(步) 밖에 있는 버들잎을 활로 쏘아서 뚫었다는 말이니 무과(武科)에 급제했다는 뜻이다.
[주13]소리개가 하늘을……자연의 묘함[飛魚] : 만물이 각기 그 자연의 자세에서 즐김을 형용한 것이다.
[주14]활수(活水)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 물의 근원이 있어서 항상 흘러가는 것을 활수라 하는데, 여기서는 도(道)를 물에 비유한 것이니, 활수의 근원을 찾는다는 말은 도의 근원을 찾는다는 말이다.
[주15]금니(金泥) : 옛날에는 공문서를 진흙으로 봉하였으므로 봉니(封泥)라 하였다. 여기서는 평민을 부를 적에 지극히 대우한 것을 형용한 것이니, 임금의 친서를 금 진흙으로 봉했다는 것이다.
[주16]금관(金官) : 가야금(伽倻琴)을 말하는 것이다. 가야금이 가야 땅에서 창작되었으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주17]치고(致告) : 말로만 고하는 것이다.
[주18]해로(薤露) : 해(薤)는 지금의 당파라 하는 것인데, 옛날에 전횡(田橫)이라는 사람을 장사지낼 때에 장사 행렬을 따르던 사람들이, “염교 위의 아침 이슬 어찌 그리 쉬 마르나.[薤上朝露奚以易晞]”라고 노래하였으므로, 후세에서 장송(葬送)의 노래를 해로가(薤露歌)라 하였다.
[주19]춘령(椿齡) : 춘(椿)은 상상의 나무로 8천 년을 산다 한다.
[주20]동타(銅駝) 있던……옹중(翁仲) : 동타는 구리로 부어 만든 낙타인데, 번화하던 서울이 난리를 당하여 다 불타버리고 동타만 남았다는 고사가 있고, 옹중은 무덤 앞에 돌로 만든 사람이다.
[주21]연저(燕邸) : 고려 시대에는 임금들이 많이 원 나라 서울인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가 있었으므로, 거기에다 집을 정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연저(燕邸)라 했다.
[주22]황매우(黃梅雨) : 매실(梅實)이 누렇게 익을 때인 양력 6ㆍ7월은 비가 많이 올 때이므로, 그 비를 일러 매실을 익게 하는 비[黃梅雨]라 한다.
※ 본 김해부읍지는 조선 영조조때 [작자 미상]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고, 구 한말 인쇄본을 번역한 것으로 이후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