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 등반가 허영호[許永浩1954.4.16.∼ ], 남극대륙 최고봉인 매시프(해발 5,140m) 등정, 세계 최초로 3대극점과 7대륙 최고봉 정상을 정복 *[허영호 한국 산악인] -1995년 12월 12일 허영호는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에 오름으로써 3극점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가 되었다. 1995 한국 빈슨매시프 원정대 대장으로 등반에 나선 허영호는 대원 두 명과 함께 12월 7일 빈슨매시프 남쪽 브란스콤 빙하상의 베이스 캠프(해발 2,100m)를 출발, 닷새 만인 12일 오후 2시 20분에 빈슨매시프 정상(5,140m)을 정복했다. 이로써 그는 1987년 12월 22일 세계 최고봉이자 아시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을 필두로 1992년 남미 아콩카구아(6,959m)와 북미 매킨리(6,194m),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정상을 오르고 1994년 오세아니아 칼스텐즈(4,884m)와 1995년 유럽 엘브루즈(5,642m)를 정복했다. 1994년 남극점, 1995년 북극점 도보탐험에도 성공한 바 있는 허영호는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가 된 것이다. 극점 탐험과 7대륙 최고봉 등정은 그가 20여 년 이상 정열을 바쳐 매진해온 탐험 역정의 결정체였다. 허영호씨는 전문 산악인으로 세계 최초로 3극지 등정과 세계 최초로 7대륙의 최고봉 등정으로 한국인으로서의 끈기와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신 정말 멋진 산악인이시죠^^ (내용출처 : http://preview.britannica.co.kr & ME) (출처:네이버백과 100.naver.com) *[활동사항] : 고려대학교자연자원대학원졸 / 1982년 세계 제5위봉 마칼루봉(8481M) 등정/1989년 히말라야 로체(8516M)단독등정 /1994년 남극점 도달 /1997년 티베트 초오유봉 무산소 등정 /2004년 엘브루즈 등정 (출처:네이버백과 100.naver.com)
1994 미8군 제17항공여단 소속 OH58헬기가 군사분계선 동북방지역에 불시착 (30일 송환)
1994년 12월 17일 오전 10시 45분 경, 미 8군 제 17 항공여단 501 대대 소속 OH-58 정찰 헬리콥터가 강원도 원통 군사분계선 북방 5Km 지점(북한 측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에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사고로 헬리콥터의 부조종사 ‘데이비드 하일먼’ 준위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정조종사 ‘보비 홀’ 준위가 북한 당국에 억류됩니다.
이날 오전 10시 2분, 춘천의 캠프 ‘페이지’를 이륙한 헬리콥터는 사전에 계획된 항로에 따라 북동쪽의 검문소(체크 포인트) 84로 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헬리콥터는 10시 26분까지 한국군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지만, 잠시 후 레이더에서 사라집니다. 10시 38분, 비행금지 구역에 있던 국군 병사가 헬리콥터를 목격하지만, 조명탄을 쏘아 경고하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리죠. 10시 40분, 휴전선을 감시하는 12사단 전방초소에서 미군 헬기가 휴전선을 넘어 북쪽으로 비행하는 것이 목격됩니다. 향로봉 북서쪽 10Km 지점이었습니다. 3분 뒤인 10시 43분, ‘홀’ 준위가 한국군 무선망으로 “체크포인트 84로 귀환했다”고 송신합니다. 하지만 교신 당시 실제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던 지점은 휴전선을 6Km나 넘어간 북한 영공이었습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장교 출신 탈북자 이정연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헬리콥터는 자신들이 북한 영공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으나, 인민군 제2사단 6연대 지역에서 화성포(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에 꼬리날개를 맞고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의 평양, 중앙방송 등 2개 방송은 이날 오후 1시 5분 긴급보도를 통해 “오늘 오전 10시 45분경 적 직승기(헬리콥터)가 전선 동부 군사분계선을 넘어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 상공 깊이 불법 침입했다”면서 “우리의 사회주의 조국의 영공을 경각성 있게 지키던 조선 인민군 고사포병들의 자위적 조치에 의해서 단발에 적 직승기는 우리측 지역에 격추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느긋하게 토요일 오후를 즐기던 미군과 한국군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한미연합사는 모든 정보 자산들을 총동원, 헬리콥터가 사라진 지점을 정밀탐색하면서 감시태세를 강화하죠.
사고의 원인으로는 헬리콥터를 조종했던 두 조종사 모두 주한미군에 전입한지 겨우 한 달 밖에 되지 않아 한국지형에 어두운데다, 사고 당시 눈이 1m나 쌓여 있어서 군사분계선을 알아보지 못하고 월경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또 이 사건은 한국군과 미군의 방공체계에 커다란 허점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헬리콥터로부터 통신이 두절된 때로부터 한미양국군이 헬리콥터의 월경 사실을 파악할 때까지 30분이나 걸렸고(오산방공통제소에서 사고 헬리콥터의 항적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지만, 실제 헬리콥터의 착륙지점을 확인한 것은 오전 11시 9분 경이었죠), 헬리콥터의 비행계획이 사전에 비행지역의 일선부대에 통지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이와 같은 우발적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이 북한 당국에 유감 표명을 한데이어, ‘허바드’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당국과 조종사의 석방교섭을 벌입니다. 북한 당국은 12월 22일, 사망한 하일먼 준위의 시신을 미군 측에 인도하고 30일에는 홀 준위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습니다.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은 성명서를 발표, “홀 준위의 가족과 국방부 사람들에게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인 인도주의적 행동만큼 멋진 새해 선물은 없을 것”이라며 홀 준위의 송환을 환영합니다.
1994 이홍구 제28대 국무총리 취임
이홍구(李洪九,1934년 5월 9일 ~ )는 대한민국의 학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였고,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중 미국에 유학하여 에모리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모리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69년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88년 국토통일원 장관, 1991년 주영국 대사, 1994년 통일원장관 겸 부총리를 거쳐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6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신한국당 대표로서 한때 김영삼 대통령의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노동법 날치기를 강행하였다가 전국민적 반발에 부딪치면서 신한국당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여일간의 인선구상 끝에 1998년 3월 24일 주미 대사에 이홍구를 내정하였다. 당시 한나라당 고문인 이홍구가 주미대사에 내정된 것은 향후 정계개편과 관련, 정가의 관심을 모았다. [1]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 집권당 대표를 지냈고 비록 중도에서 포기했지만 대통령후보 경선에까지 뛰어들었던 그를 영입한데 대해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에서는 "초당적 외교를 펼쳐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정가에서는 김대통령이 당시 이수성 전총리를 민주평통수석부의장으로 내정한 일과 무관치 않은 포헉으로 봤다. [2] 이홍구는 6공 시절부터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정관계의 요직을 계속 맡아왔을 만큼 처세가 뛰어나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영국에 가 있을 당시 주영대사를 지냈다.
1993 이회창[李會昌, 1935.6.2 ∼] 제26대 국무총리 취임
*[이회창李會昌] -대법관, 8대 선관위 위원장 됨, *1953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법학과, 1970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를 거치면서 법학 공부를 하였다. 1957년 제8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공군 중위(법무관)로 예편하였다. 1960년 이후 서울지방 법원 인천지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의 판사, 부장판사를 두루 거치고 1980년 법원 행정처 조사국장, 기획조정실장을 지내다가 1981년부터 대법원 판사에 올라 1993년 2월까지 대법관으로 있었다. 그 사이 1988년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민주화합추진위 위원을 겸하였고 1993년 2월 법관 생활을 마치고 제15대 감사원장에 임명되고, 같은 해 12월 제26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4월에 물러났다. 1996년 1월이 되자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대두되어 신한국당에 입당하고, 이로부터 신한국당 제15대 국회의원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 1997년 3월 제3대 신한국당 대표위원이 되고 같은 해 7월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어 제2대 신한국당 총재에 올랐다. 이 무렵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이인제가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결성하자 민주당과 통합하여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어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으나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에게 패배하였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여 정계은퇴 산언을 하였다. 저서에 《주석 형법 각칙》 《아름다운 원칙》(1997, 김영사), 논문집 〈법과 정의〉 등이 있다.(두산백과)
1991 - 47개국 '유럽에너지헌장'에 서명
[오늘의 경제소사/12월17일] 에너지헌장
1991년 12월17일 헤이그. 47개국이 ‘유럽에너지헌장(European Energy Charter)’에 서명했다. 골자는 에너지 무역의 자유화. 유럽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고 옛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자유로운 투자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동ㆍ서 에너지협력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에너지 헌장의 배경은 서유럽 에너지 안보. 산유국인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이 사용하는 석유와 가스의 60%를 공급하던 소련이 무너지자 안정적인 공급 시스템을 갖추자는 위기감에서 출발했다. 옛 소련에서 갈라진 나온 나라들도 낙후한 설비를 교체하고 생산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서방 자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 동서 에너지협력 체제에 들어왔다.
선언에 머물던 헌장은 3년 후 ‘에너지헌장 조약’으로 바뀌었다. 시추 단계에서 원유 생산까지 자유로운 투자와 매매ㆍ수송을 명시한 협정문에 대부분의 국가가 동의했지만 뜻하지 않았던 두가지 복병을 만났다.
우선 미국이 돌연 서명을 거부하고 나섰다.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환경보호를 강조한 협정문에 부담을 느낀데다 옛 소련의 나라들과 유럽 간 밀월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러시아 의회가 협정 비준을 거부하며 틀어진 구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름만 유럽에너지헌장에서 에너지헌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러시아의 벽에 막힌 ‘에너지 분야의 세계무역기구(WTO)로 발돋움한다’는 청사진은 쉽게 실현되지 못할 전망이다. 소련 붕괴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건이 좋아져 자신들의 에너지 주권을 제한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큰 진전이 없어도 유럽 각국은 에너지헌장 기구의 조직을 차츰 강화해가고 있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필요해질 날이 온다는 장기적 안목에서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2/16 18:10
1989 -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 브라질 대통령 /조선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
1989년 12월 17일 실시된 브라질 대통령선거에서 우익국가재건당의 페르난도 콜로르 데멜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리오데자네이루 출신인 콜로르는 시장경제를 옹호하며. 인플레를 잡기 위해 정부지출을 줄여야한다고 주장, 중산층과 우익의 지지를 받아왔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당시만 해도 그는 지명도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으나 행운과 TV에 맞는 용모, 그리고 기민한 선거전략의 3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당선됐다. 잘생긴 얼굴을 충분히 활용, 유권자의 인기를 끌면서 현정부의 부정과 부패를 맹공, 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에게 신선감을 주었다.
할아버지는 노동장관, 아버지는 상원의원을 지낸 명문가문에서 태어난 콜로르는 13개의 라디오방송국, 1개의 TV방송국, 그리고 `가제트`라는 신문을 소유하고 있는 언론재벌이었다. 1949년생으로 가라데 유단자이며 브라질 가라데 선수권대회에서 2위로 입상하기도 했다. /조선
1987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사망
1987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Yourcenar, Marguerite,1903.6.8-1987.12.17] 사망,
*본명 마거리트 드 크레이엥쿠르(Marguerite de Crayencour). 벨기에 출생.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유럽 및 중동의 각지를 전전하며 보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에 정주하였다. 처녀작 《알렉시스 또는 헛된 전투 Alexis ou le Trait du vain combat》(1929)에 이어 《최후의 일격 Le Coup de Grce》(1939),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 Mmoires d’Hadrien》(1951)으로 일약 문명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역사소설의 체제 속에 인간의 전체성을 파헤친 것으로 《흑(黑)의 과정 L’œuvre au Noir》(1968, 페미나상 수상)이 그 하나이다. 회상록 《Souvenirs pieux》(1974), 《Archives du Nord》(1977) 외에 H.제임스와 A.V.울프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여성작가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1980)이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986 - 세계 최초로 심장, 폐, 간 동시 이식수술(영국 캠브리지 팝워스 병원, 다비너 톰슨을 대상으로)
심장·폐·간 동시 이식수술 미국에서 첫 성공(1998.8.21)
심장과 폐를 연결하는 폐동맥없이 태어난 어린이에 대해 세계 최초로 심장과 폐 및 간을 동시에 이식하는 수술이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담당의사들이 11일 밝혔다.
플로리다州(주) 데이토나 비치에 거주하는 브렌던 에드니(3)는 현재 수술후 상태가 매우 좋아 2주이내에 재활센터로 옮겨질 예정이라고 담당의인 조지 레이에스 박사가 말했다.
이식수술은 지난 8월 21∼22일 피츠버그 어린이 병원에서 20시간에 걸쳐 집도됐으며 의사들은 브렌던이 살아날 것으로 확신될 때까지 수술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레이에스 박사는 “현재 회복단계에 있는 환자가 점차 병원의 도움을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 기증자를 찾기 위해 10개월이상 기다려야 했던 이 어린이 환자는 지구상에서 1백명밖에 발견되지 않은 선천성 희귀 유전병 ‘앨러질 신드롬’에 걸려 폐동맥없이 태어났다. 심장과 폐 및 간을 이식하는 수술은 성인의 경우 86년 영국에서 처음 실시됐으며 미국에서도 96년 한차례 시술된 바 있다.
1983 -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완공
역사속 오늘[1983년 12월 17일]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완공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가 1983년 오늘 완공됐다.
2백6십9만 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여객청사와 대형 활주로 2개를 갖췄다.
제주국제공항은 1942년에 일본의 육군비행장으로 처음 건설됐다.
1962년부터 국내선이 정기운항된 제주공항은 1968년 4월 국제공항으로 승격됐다.
제주국제공항은 제주도가 국내 제일의 관광지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YTN 2009-12-17 목
1978 2차 석유파동
*1978년 12월 17일 알 오비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장은 “원유가격을 내년에 단계적으로 14.5%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제2차 석유파동의 시작이었다. 강경론을 주도한 나라는 리비아였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1969년 엑손모빌, 로열 더치 셸 등 선진국 거대 석유기업의 고압적 거래관행을 깨고 유가 인상을 관철시킨 ‘강골’이었다. 반면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을 주도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경제에 몰아닥칠 한파를 우려해 5%의 소폭 인상을 주장했다. 결론은 강경파의 승리였다. 미국은 “OPEC의 결정은 세계 인플레를 악화시킬 것”이라며 재고를 요청했지만 OPEC는 “유가 인상분을 선진국들이 수출품 가격에 반영하면 추가 인상을 단행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란이 ‘호메이니 혁명’의 혼란 탓에 원유 수출을 중단하자 유가는 1년 사이 3배로 급등했다. 인상폭은 1차 석유파동 때보다 작았지만 한국의 피해는 더 컸다. 1차 파동 때 한국은 산업화가 미진해 석유의존도가 낮았고 중동 건설 수주를 잇달아 따내면서 산유국들로부터 달러를 되레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육성에 매진한 1970년대 후반에는 에너지 소비가 크게 늘었고 석유의존도도 1978년 63%에 달했다. 이에 따라 70년대 중반 8%대를 유지하던 경제성장률이 1980년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1980∼82년 물가상승률과 무역수지 적자 규모도 이전 3년간에 비해 16.7%포인트, 12억5000만 달러씩 증가했다. 유가 인상을 반영해 국내 기름값을 59% 올린 1979년 7월 서울시내 음식점 300곳이 문을 닫았다. 1, 2차 석유파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스라엘과 거대 석유기업에 대한 적의(敵意)로 촉발된 1차 석유파동은 산유국들에 ‘자원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반면 가격 카르텔의 욕심을 드러낸 2차 석유파동은 산유국들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로 산유국들은 기대만큼 재미를 보지 못했고 석유소비국들은 옛 소련 등 비(非) OPEC 국가로 수입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2차 석유파동은 OPEC의 전성기를 사실상 끝낸 자충수였던 셈이다. (동아일보 [책갈피속의오늘] 2004.12.17. 김준석 기자 donga.com)
1977 - 구마고속도로 개통
박대통령이 구마고속도로준공기념각을 둘러보고 있다. /조선
구마고속도로 개통
대구와 마산간을 잇는 구마고속도로가 1977년 12월 17일 개통됐다. 1976년 7월에 착공,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1년 4개월 만에 준공됐다.
총공사비 2백37억원을 들여 준공된 이 도로는 총연장이 84.5km로 도로폭은 13.2m 2차선이다. 이 고속도로 개통으로 대구-마산간 자동차 주행시간은 종래 3시간20분에서 1시간20분으로 단축됐으며, 승객 및 각종물자수송비용은 평균 24.5%∼35.5%까지 절감됐다.
이 도로는 남해안 임해공업단지와 대구산업을 잇는 중요한 동맥구실을 하게 되어 창원·마산 공업단지들의 중화학·기계공업 발전과 낙동강유역의 농업개발 및 내륙관광지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구마고속도로 완공으로 국내 고속도로 총연장은 1226km로 늘어나게 됐다. /조선
오늘의 역사] 12월 17일 구마고속도로 개통
1977년 12월 17일 대구 북구 금호동과 마산 회원구 내서읍을 잇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됐다.
1976년 6월 착공하여 총연장 84.2㎞의 왕복 2차로로 개통됐다.
이후 2001년 8월 25일 마산~현풍 구간(54.2㎞)이 중부내륙고속도로로 편입되면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대구광역시 북구 금호동 구간(30㎞)으로 축소됐다.
구마고속도로의 개통은 공업지역인 대구에서 마산·진주·하동 등지에 이르는 차량의 운행거리를 크게 단축시키고, 나아가 영남과 호남을 ‘1일생활권’으로 묶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영배 /부산매스미디어뉴스 2009/12/17 11:32
1974 대법원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에 사형 확정
오전 10시 23분,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하던 대통령을 향하여 청중석 뒤에서 문세광이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하였다.
다행히 총탄이 빗나가 대통령은 연설대 뒤에 몸을 피하여 무사하였으나, 이어 발사한 제2탄이 단상에 앉아 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의 머리에 명중하였다. 범인은 계속 2발을 발사,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육영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급송되어 5시간 이상의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 사망하였다.
범인 문세광은 재일조총련계 한국교포 2세로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였고,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한 자였다. 조사결과 1974년 5월에 북한의 대일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그해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의 경찰관서에서 절취한 것이라는 사실, 범인이 소지하였던 위조여권을 발부한 데 대한 책임, 저격범의 공범 중에 일본인이 끼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일본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때 한일관계가 불편해졌으나, 일본정부가 책임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9월 19일 집권당인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陳謝特使)로 한국을 다녀감으로써 양국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범인 문세광은 그해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20일 집행되었다.
1965 이효상 국회의장 피선
1906∼1989. 시인·정치가.
생애 및 활동사항
대구 출생. 호는 한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독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현 大倫高等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0년 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주로 지방의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광복 후 경상북도 학무국장을 지냈으며, 1952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1954년 벨기에의 루뱅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수학하였으며, 귀국한 뒤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새로이 실시된 선거에서 경상북도의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체제에 의해서 1963년부터 공화당 경상북도지부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1963년과 1971년 사이에 대구 남구에서 공화당 입후보자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냈다. 그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적인 기풍이 강하였다. 특히, 카톨릭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가와는 차이가 있었다.
시인으로서의 ‘한솔’이란 이름은 정치가의 성격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때로는 선문답과도 같은 표현으로 한 시대의 정치를 은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국제신문협회(IPU)·아시아신문협회(APU) 한국대표를 지냈고, 영남대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하여 재단인 영남학원의 이사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로 대구지방의 지도적 인물이기 때문에 1962년 대구매일신문사의 이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정희대통령의 특별한 이해를 얻고 있었고, 그 자신 특별히 정치적인 계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시인으로서의 정치가적인 이미지로 인하여 때로는 정치적인 감각이 약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로 하여금 상당기간 국회의장과 민주공화당의 중요한 간부로 일할 수 있게 하였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정치가로 활동하면서도 시집을 간행하였고 저술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집으로는 ≪산≫(1948)·≪사랑≫(1955)·≪안경≫(1960) 등이 있고, 그 밖에 ≪문화와 종교≫·≪나의 강산아≫·≪교육의 근본문제≫·≪인간문제≫ 등의 저서가 있다. 카톨릭적인 철학사상의 연구에도 조예가 깊어 철학자 샤르댕(Chardin)의 전집을 번역, 간행하기도 하였다.
1979년 10·26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 향리인 대구근교로 하향하였다. 정계를 물러나 시작(詩作)과 샤르댕의 번역에 몰두하다가 별세하였다.
1964 우주선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수상한 미국 물리학자 빅토르 프란츠 헤스사망,
1964 우주선(宇宙線)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1936년)수상한 오스트리아 태생 미국 물리학자 빅토르 프란츠 헤스[Hess, Victor Francis,1883.6.24-1964.12.17]사망,
* 오스트리아 그라츠 부근의 발트슈타인에서 출생하였다. 1901∼1905년 그라츠대학교, 1905∼1908년 빈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10년부터 S.마이어의 조수로 빈과학아카데미 라듐연구소에 재직하였다. 1911∼1913년 경기구(輕氣球)를 사용한 고공(高空) 관측을 실시, 초방사선 즉 우주선(宇宙線)을 발견하고, 그 성질을 정밀히 조사하여 우주선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연구로 1919년 리벤상(賞)을 받고 그라츠대학교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921~1923년 미국 라듐협회 연구소장, 1922∼1925년 미국 광산국 고문 물리학자, 1923년 귀국하여 그라츠대학교 교수, 이어서 인스부르크대학교 교수, 1931∼1937년 이 대학에 신설된 방사능연구소장을 겸임하였다. 1936년 우주선 연구 업적으로 미국의 C.D.앤더슨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38년 나치스에게 쫓겨 미국으로 가서 1944년 귀화하고, 뉴욕의 포덤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출처: 두산백과)
1964 - 서울가정법원 고백않은 혼전부정은 이혼사유 된다고 판시
[책갈피 속의 오늘]1964년 혼전동거 이혼사유 판결
A(여) 씨는 애인과 1년간 동거를 했다. 결혼은 중매로 만난 다른 남자와 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남편이 지방출장을 자주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A 씨가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그러니까 사실혼 관계로 6년을 살았다.
A 씨는 남편을 상대로 ‘사실혼 관계 해소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서울가정법원은 “결혼 전의 부정(不貞)행위도 서로 초혼인 부부에 있어서 이를 고백하지 않고 있다고 판명될 경우 그로 인해 가정이 파탄되고 혼인을 계속시키기 곤란하다고 인정될 경우 이혼 원인이 될 수 있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또 “부부는 적극적으로 애정의 순환을 위하여 전 인격을 경주해야 할 것은 물론 적어도 상대방의 기본적 신뢰를 저버리는 따위의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결혼 전의 동거는 이혼 사유에 해당하며 남편은 위자료를 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재판장의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자.
“이번 경우와 같이 사전 고백이 없었던 데다 사후에도 상대방 배우자에게 납득과 감명을 줄 만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불신을 초래케 하고 가정이 파괴되었다면 상대방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는 민법 840조 6호의 기타 이혼의 중대 사유가 된다고 보고 서로 해방시켜줌이 억지로 묶어두는 것보다 서로를 구제해 줄 기회가 된다고 본다.”
법원은 결혼 전의 동거를 부정행위라고 해석했다. 결혼 후의 외도가 아니라 결혼 전의 동거를 문제 삼았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또 결혼하겠다는 내용의 영화에 박수를 보내는 요즘 여성이 1964년 12월 17일 나온 이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참, A 씨가 요구한 위자료는 얼마였을까. 2억8000만 원도, 2800만 원도, 280만 원도 아닌 23만8000원이었다.
위자료 23만8000원이라…. 돈의 가치와 윤리기준 모두 많이 변했다고 새삼 느끼게 하는 얘기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동아닷컴 2008-12-17 03:03
1963 최두선 제8대 국무총리 취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각천(覺泉)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거쳐, 대한민국 제8대 국무총리(1963.12.17-1964. 5. 9)를 지냈다.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중앙(中央)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1922년 독일의 마부르대학 ·예나대학 ·베를린대학 등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귀국, 1932년 보성(普城)전문학교 상무이사가 되었다. 1938년 교육계를 떠나 경성방직(京城紡織) 상무이사에 취임하고 광복과 함께 사장이 되었다. 1947년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의 자유수호에 힘썼다.
1960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하였고,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1960년-1972년)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61년 정부의 친선사절로 미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진력하였다. 1963년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난국타개에 힘썼으며 1964년 사임, 서독 정부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하고, 그 해 다시 경성방직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유엔 한국협회 회장이 되었다. 1965년 대통령 특사로 친선외교사절단장이 되어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 국제외교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1970년 통일원 자문위원으로 활약하는 동시에 한독협회장(韓獨協會長)에 취임하였다. 청조소성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독일연방공화국의 공로훈장을 받았다.
1963 -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 제3공화국 발족
1963년 12월 17일 오후 2시, 박대통령이 중앙청앞 광장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서 무궁화 훈장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조선
역사속 오늘[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탄생
개헌안이 확정된 후 1년이 지난 1963년 오늘!
오전 9시 15분 제6대 국회가 개원됨으로써 제3공화국 헌법이 발효됐다.
제6대 국회의 의장에는 공화당의 이효상 의원이 선출됐다.
민정 불참 선언을 번복하고 두 달 여 전 (10월 15일 대선실시)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도 국회개원식에 참석했다.
이어 오후 2시 중앙청 광장에서 박정희 제5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취임식을 마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최두선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YTN 2009-12-17 목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 제3공화국 발족
5.16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씨가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만주국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활약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국방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거쳐 국군 장교가 되었다. 여순반란사건에 이은 숙군(肅軍) 과정에서 남로당 비밀당원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1963년 민주공화당 후보로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박정희는 경제를 발전시켜 절대빈곤을 해결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집권 후기로 갈수록 반민주적인 독재체제를 강화시켜 수많은 반대 세력을 낳았다. 결국 정치적,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도화선이 되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살해됐다. /조선
제5대 대통령 취임 기념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고 부패와 빈곤으로 인한 국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5ㆍ16혁명에 뒤이어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 및 동년 11월 26일의 국회의원선거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1963년 12월 17일에 우리 민족과 자유세계 우방 각국의 기대와 축복 가운데 제5대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제3공화국이 탄생되어 경제안정과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새 터전을 마련하여 역사적인 거보(巨步)를 내딛게 되었다.
이 날을 길이 기념하고 나아가서 조국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제5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바이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3 제6대 국회 개원 의장에 이효상, 부의장에 장형순, 나용균 선출 |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혁명정부는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를 대통령책임제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확정하고, 같은 해 12월 26일 개정헌법을 공포하였다. 또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는 헌법 공포일로부터 1년 이내에 실시한다는 헌법 부칙 규정에 따라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
1962 -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국민투표 실시, 78.78%의 찬성으로 가결. 제3공화국 성립
국민투표를 하고 있는 모습 /조선
역사속 오늘[1962년 12월 17일] 대통령제 개헌안 국민투표
1962년 오늘!
제3공화국의 기틀이 될 개헌안의 찬반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전국 187개 투표소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치르는 국민투표다.
민정 불참 선언을 한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도 투표에 참여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부의 민정이양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제3공화국 헌법!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양원제를 단원제로 바꾸며 헌법 개정 때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치도록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개헌안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관심으로 투표율은 85.3%를 기록했다.
개표 결과 유효투표 78.8%의 찬성으로 제3공화국 헌법이 확정됐다.
/YTN 2009-12-17 목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국민투표 실시, 78.78%의 찬성으로 가결. 제3공화국 성립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한 제5차 개헌안이 1962년 12월17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됐다. 78.78%의 찬성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최고회의 의원과 학자, 전문가 등 21명으로 구성된 헌법심의위원회를 1962년 7월 11일 발족시켜 이 곳에서 결정된 헌법요강을 11월 5일에 공고했다.
개헌안은 12월 6일 최고회의 의결을 거친 후 이날 국민투표에 붙여져 통과됐다. 개헌안은 1)국회를 단원제로 해 국회의 조직과 운영을 간소화-능률화하고 2)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해 행정의 신속성과 효율성을 기하고 3)국민의 기본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1949 한국문학가협회 결성
1949년 12월에 설립된 문학단체. 이보다 앞서 1947년 2월 12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약칭 文總)가 조직되어 기존문학단체 거의 대부분과 미술 · 음악 · 연극 · 영화 등 각 분야별 단체가 망라된 바 있다. 문총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이해 12월에 전국문화인총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시국에 임한 문화인의 처지를 밝히고, 좌익언론출판기관 및 좌익문인에 대한 중대한 경고를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문단내에는 자유진영 중심의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한편 좌익문인들은 대부분 월북하고 기타 좌경잔류파와 이른바 중간파 또는 초월파 등이 분산되어 화합적인 범문단적 조직은 형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정부수립 후 이와같은 이질적 구성요원이 다함께 전국적 규모로 결합할 것을 목적으로 발족된 것이 이 단체이다.
즉, 전조선문필가협회의 문학관계자 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전원, 좌익에서 전향한 문인들(정부수립 이후 문학가동맹 기타의 좌익단체에 가입하였다가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있던 사람들) 전원, 중간파 문인 전원, 기타 공인된 문인 전원을 회원으로 하였다. 서로 반목, 대립하였던 문인들이 같은 목표로 화합함으로써 한국문단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 뒤 단체는 박종화(朴種和)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 서정주(徐廷柱)· 황순원(黃順元) 등이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6 · 25 뒤 내부사정으로 분열되어 자유문학자협회가 따로 분리되었다. 한국문학가협회는 주로 《현대문학(現代文學)》, 자유문학자협회는 《자유문학(自由文學)》지를 통하여 발표해 나가며 문학강연회 등을 활발히 펼쳐 나갔다. 한국문학가협회상도 제정, 운영하다가 5 · 16 뒤 정부의 모든 사회단체 해체 조처에 따라 해산되었다.
1949 - 한국 만국우편연합에 재가입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우정사업은 완전히 우리 정부에 이양되어 윤석구(尹錫龜) 초대 체신부장관이 취임하였다. 1949년 8월에는 우편국을 우체국으로 개칭하고 1949년부터 대폭적인 기구 개편과 획기적인 우정 시책이 나왔다. 1949년에 12월 17일자로 만국우편연합에 재가입하여 우리나라 우편업무는 명실상부한 도약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손석진 기자 /서라벌신문 2006년 07월 08일 (토) 00:00:00
[12월 17일] 한국 만국우편조약에 가입
1949년 12월 17일 한국은 만국우편조약에 가입하였습니다.
만국우편연합(UPU)은 우편에 관한 모든 업무의 조직 및 완성을 보장하고 이 분야에서 국제협력의 촉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874년 베른조약에 의하여 일반우편연합이 창설되고, 78년 파리조약에서 현재 명칭으로 고쳐졌습니다.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현행 조약은 1951년 브뤼셀에서 서명하여 53년에 발효한 것입니다.
1945년] 김일성(金日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에 취임
조선공산당은 이후 1945년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소군정은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의 "1국 1당원칙"에 의거해 조선공산당을 승인하고 김일성에게 '북조선분국'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1945년 12월 17일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이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갑자기 찬탁으로 바뀐 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는 조선 공산당이 인민들에게 외면받는 원인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은 김일성의 빨치산파의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빨치산파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자 남조선에서도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세워졌다. /Google
1944 - 미국, 일본계 이민자들 석방 발표
[어제의 오늘]1944년 미국, 일본계 이민자들 석방 발표ㆍ12만명 2년반 만에 수용소서 풀려나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미국 쪽으로 한참 기울어진 1944년 12월17일 미국 정부는 억류했던 자국 내 일본계 미국인들을 풀어준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후 미국 정부가 서부해안 지역에 살고 있던 12만명 정도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미국 전역의 수용소에 가둔 지 2년반 만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42년 2월 ‘군사지역’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퇴거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각 지역 사령관에게 주었고, 이에 미군은 미 서부해안 전체를 군사지역으로 규정했다. 이곳은 일본계 이민자들 대다수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다분히 일본계 이민자들을 겨냥한 법안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일본계 이민자들의 70%는 이민 2세 또는 3세로 대부분 미국 시민이었다.
88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생존한 일본계 피수용자들과 유족들에게 모두 16억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사과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법안은 일본계 미국인들을 억류한 것이 “인종적 편견, 전쟁 공포 그리고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서 비롯된 미국 정부의 과오였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이 일본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계 미국인들은 간첩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백인에 의한 일본인 차별은 심각했다. 1905년 제정된 캘리포니아주의 인종간 결혼금지법은 백인과 ‘몽고인’(당시 미국에서 일본인을 지칭하는 말)의 결혼을 금지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계 이민자들이 아시아 이민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일본계에 대한 차별은 곧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로 이해되었다. 이는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해 미국과 싸운다는 명분이 되었고, 조선과 만주의 많은 젊은이들을 일본의 전쟁에 동원하는 주요 근거로 작용했다. 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이 겪었던 고초는 전쟁 후 침략자이기보다 피해자로서의 일본인들의 정체성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계 이민자들은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았다. 하지만 재일 한국인 또는 조선인들은 아직 지방참정권조차 없다. 전쟁 피해자로서 일본인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일본인들은 ‘선택적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일까.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경향닷컴 2009-12-16 17:44:20
1939 시인 정현종[鄭玄宗, 1939.12.17 ∼] 출생,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였고,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다.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었으며,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시집에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갈증이며 샘물인》(1999)을 비롯하여 시론집 《숨과 꿈》(1982) 등이 있으며,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의 번역서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24 - 우리나라 최초 민간 라디오방송 실험 성공
조선일보사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하고 있는 홍난파 선생(오른쪽). 그의연주가 무선전화를 타고 우미관에
전달되자 청중들이 환호했다. /조선
우리나라 최초 민간 라디오방송 실험 성공
1924년 12월 17일, 서울 종로 우미관 앞은 아침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무선전화방송 실험을 눈으로 직접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총독부 체신국이 이미 실험방송을 한 바 있었지만 한국인이 주관했다는 점에서는 ‘국내 최초’가 된다.
무선전화방송은 라디오방송의 옛 표현이다. 방송 진행자는 한국 최초의 여기자인 조선일보 최은희기자였고, 처음 전파를 탄 사람은 독립운동가인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 쏘아올린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우미관 안에 전달되자 사람들은 신기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했다. 윤극영의 동요 ‘반달’과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가 이어지면서 청중들의 반응도 절정에 달했다.
12월 18일자 조선일보는 ‘경이(驚異)의 눈! 경이의 귀!’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전한다. 둘째 셋째날은 좀더 넓은 경성공회당으로 옮겼지만, 인천 수원 개성 등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 전차 왕래가 중단될 정도였다. 그리고 2년3개월 후 1927년 2월 16일, 우리나라 최초의 경성방송국이 탄생한다. 미국에서 정시 라디오방송을 시작한 지 7년 만이었다. /조선
1922년] 이집트 투탄카멘왕 묘 발굴
← 1995년 촬영된 투탄카멘 왕묘 내부 사진
1922년 12월 17일, 3000여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있던 이집트 투탄카멘 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였다. 3중으로 된 관에는 왕의 미라가 누워있었고, 머리에는 황금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얼굴은 순금으로, 눈은 아라고나이트석과 흑요석으로, 눈썹과 속눈썹은 청색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고고학자들을 감동시킨 것은 초상의 이마 위에 놓여진 한 묶음의 화환. 청상과부가 된 왕비가 남편에게 바치는 마지막 작별의 선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등극해 재위 10년 만인 18세에 요절한 투탄카멘, 그에게 숨을 불어넣고 다시 명성을 누리도록 도와준 사람은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였다.
카터가 그를 발견한 곳은 나일강 중류에 위치한 룩소르의 한 골짜기. 기원 전 2000년부터 1000년 사이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파라오들의 무덤이 들어찬 곳이다. 하지만 발굴의 기쁨도 잠시 뿐,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가 시작된다. 재정후원자이자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카나본경이 발굴 이듬해 4월, 모기에 뺨을 물린 것이 원인이 돼 폐렴으로 갑자기 죽고, 발굴에 참여했던 20여명이 2∼3년 안에 목숨을 잃자 세계언론들은 ‘투탄왕이 저주를 내렸기 때문’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석관 위에는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조선
1903년] 라이트 형제,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
←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플라이어 1호`가 날아 오르고 있는 모습
1903년 12월 17일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동력(動力)을 이용한 비행에 성공했다. 15세기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와 닮은 모형을 설계했다. 1709년경 브라질 성직자 바르톨로미외 로렌소 데 구스망은 오늘날의 기구(氣球)에 가까운 비행물체를 만들었다.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기구에 승객을 태우고 25분 동안 파리 상공을 비행했다. 1853년 영국의 G. 케일리는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했다. 1903년 12월 17일 아침, 라이트 형제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키티호크 해안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력을 이용한 비행에 성공했다. 이것이 현대 항공기 산업의 출발이었다. 1908년 라이트 형제는 유럽에서 라이트 비행기를 면허 생산할 수 있다는 계약을 맺었다./브리태니커
1903년 12월 17일 오전 10시 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해안에서 인류 최초의 비행기가 이륙했다. 자전거포를 운영하던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는 엔진달린 수냉식 복엽기 `플라이어 1호`로 중력을 뿌리치고 12초 동안 36m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날 플라이어호는 59초 동안 2백90m를 나는 첫 기록을 세웠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지방신문 편집장에게 알렸다. 그러나 편집장은 "그럴 가능성도 없고, 그런 묘기는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종이를 구겨버렸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뒤, 플레이어 3호가 38분동안 45km 비행에 성공했을 때였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종이었다. 플레이어 3호는 4기통 13마력의 가솔린엔진을 단 최초의 동력비행기다. 풍동실험을 거쳐 활공하기 좋게 설계한 날개, 날개의 앞 부분을 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 승강키, 그리고 비행기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수직 테일핀을 단 방향키 등을 갖춤으로써 마음대로 하늘을 날 수 있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기 전까지 `비행`은 인류에게 오랜 꿈이었다. 태양까지 날아오르다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는 바람에 추락해 죽은 이카루스 신화는 그런 욕망의 표현이다. 고대인들은 새 깃털을 몸에 달고 비상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비상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1785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가 더운 공기를 채운 기구를 이용해 하늘을 난 것이다.
자신의 근력으로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인간은 19세기 들어 동력비행으로 비상을 시도했다. 자동차 산업으로 불붙기 시작한 엔진개발의 열기가 동력비행을 성공시키는 열쇠가 됐다. 최고의 발명품인 비행기는 라이트형제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개발돼, 1909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가 3기통 엔진을 부착한 비행기를 타고 도버해협(34km)을 34분 만에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 후 비행기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 1930년대 들어 민간항공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조선
1892년] 차이코프스키(Chaikovskii)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 초연
2막 3장. 1891∼1892년에 작곡, 18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는 독일의 작가 E.T.A.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와 쥐의 임금님》(1819)을 대본으로 하여 쓴 것으로 소녀 클라라가 크리스마스에 호두까기인형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인형이 꿈 속에서 쥐의 대군을 퇴치하고 아름다운 왕자로 변하여 클라라를 과자의 나라로 안내한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되었다. 1934년 영국의 로열발레단에 의해 상연된 후 유럽에서도 자주 상연된다.
또 이 발레음악을 작곡자 자신이 편곡한 같은 이름의 2종의 관현악모음곡도 있으며 그 중 제1모음곡이 특히 유명하다. 제1모음곡은 3부(3악장)로 되었는데, 제1부는 경쾌한 작은 서곡, 제2부는 개성적 무곡으로 〈행진곡〉 〈별사탕의 춤〉 등의 6곡으로 이루어졌으며 제3부는 〈꽃의 왈츠〉로 끝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48년 서울발레단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naver
1830년] 프랑스의 형제작가 쥘 공쿠르(Jules de Goncourt 콩쿠르형제 중 동생) 출생
← <극장 객석에 앉아 있는 공쿠르 형제>, Paul Gavarni의 석판화(1853)
공쿠르 형제, 형 에드몽(Edmond de Goncourt, 1822∼1896)과 동생 쥘(Jules de Goncourt, 1830∼1870)은 당시의 명문 출생으로, 형 에드몽은 내향적인 공상가였고 동생 쥘은 정열적인 활동가였는데, 두 사람 모두 병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였다. 이 형제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 합작(合作)의 형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주로 형이 작품을 구상하고 동생이 문체를 다듬었다. 소설 《18××년에》(1851)가 처녀작이며, 처음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사회·여성·미술에 대해서 연구하여 《대혁명기의 프랑스 사회사》(1854) 《18세기의 여성》(1862) 《18세기의 미술》(1859∼1875) 등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역사가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소설가는 현재를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정밀한 관찰기록에 입각한 소설을 잇달아 써서 《샤를 두마이》(1860) 《피로멘 자매》(1861) 《르네 모프랭》(1864)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5) 《마네트 살로몽 Manette Salomon》(1867) 《제르베제 부인》(1869)을 발표하였다. 그들의 작품에는 급격히 발전한 물질문명의 소산으로서 얼마간 변질적인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심리분석보다는 병리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은 자연주의의 선구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편 ‘예술적 문체’라고 하여 특이하고 정교한 문체를 이루어, 예민한 감각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조성함으로써 인상파풍의 시각적인 효과를 노렸다.
동생이 죽은 후로는 형이 단독으로 집필을 계속하여 《매춘부 엘리자》(1877) 《장가노 형제》(1879) 《라 포스탱》(1882) 등의 소설을 썼다. 동생과 함께 썼던 《공쿠르의 일기》(9권, 1887∼1896)는 19세기 후반기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며, 일기문학의 걸작이다. ‘공쿠르상(賞)’은 에드몽의 유언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3년에 설립되었다. /naver
1830 -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볼리바르(Bolivar, Simón) 사망
[역사속의 인물] 남미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
'나는 바보였다.'
6개 나라에서 국부(國父)로 숭앙받고 그의 이름을 딴 나라(볼리비아)도 있다.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남미 역사 그 자체다. 남미를 스페인 치하에서 해방시킨 군인이었고, 남미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려던 이상주의자였다. 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볼리바르를 앞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카라카스에서 광산업자이자 크리올료(스페인계 이민자 후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1810년 독립전쟁에 나선 그는 갖은 고생 끝에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군을 내쫓았다.
왕이 되라는 권유도 거부하고 미국 같은 연방국가인 대(大)콜롬비아 공화국(현재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나마, 페루)을 꿈꿨지만 각지 토호들의 방해로 좌절됐다. 자신의 이상이 깨어지는 순간 대통령 자리도 내놓았다. 부자로 태어났지만 1830년 오늘, 결핵으로 죽을 때는 낡은 셔츠 한 벌뿐이었다.
"세상에 바보가 세 명 있는데 예수,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혁명과 권력의 무상함을 꿰뚫고 있던 풍운아였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2월 17일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볼리바르(Bolivar, Simón) 사망
볼리바르 [Bolivar, Simón, 1783.7.24~1830.12.17]
[책갈피 속의 오늘]1830년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사망
“이순신+한니발+링컨=?”
도를 넘은 우상화는 위대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위의 도식이 지나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니, 세 영웅을 각각 능가한다고 해도 터무니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링컨보다 46년 앞서 노예해방을 이뤄냈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한니발처럼 안데스 산맥을 넘어 페루의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에 졌지만 그는 결국 승리를 이뤄냈다. 베네수엘라 독립운동에 실패한 뒤 아이티에서 다시 베네수엘라로 출발할 때 그가 가진 것은 이순신 장군의 12척보다 적은 7척의 배와 250명의 군사뿐이었다.
‘해방자(El Liberator)’로 모든 남미인의 추앙을 받는 시몬 볼리바르. 그는 1783년 스페인 식민 지배하의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백인 귀족이라는 선택받은 신분이었지만 당시 남미에는 본국에서 파견된 백인과 식민지에서 태어난 ‘열등한’ 백인 사이에 차별이 엄존했다.
사부 시몬 로드리게스에게서 장 자크 루소의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1811년 베네수엘라 임시정부를 세우는 작업에 투신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네 차례나 망명과 귀국을 거듭한 끝에 1819년 뉴그라나다(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1822년 키토(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세 지역을 통합해 ‘대콜롬비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1824년에는 페루를, 1825년에는 볼리비아를 해방시켰다. 오늘날 무려 다섯 개 나라의 국부(國父)로 숭앙되는 이유다.
그는 탁월한 정치사상가이자 예언자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된 남미가 조각날 가능성을 항상 염려했다. 뻗어 나가는 미국의 국력을 감안할 때 남미의 분열은 결국 미국에 대한 종속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뻔히 내다보이는 분열을 결국은 막을 수 없었던 데 그가 가진 비극성이 있었다.
각 지역의 분리 독립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반란세력을 제압하지 못한 그는 결국 1830년에 대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직을 내놓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해 12월 17일 그의 병사(病死)는 너무도 이르고 갑작스러웠다. 실의가 컸던 탓일 것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남미 각국의 광장과 기념물에 남아 있다. 볼리비아는 국호(國號)로, 베네수엘라는 ‘볼리바르’라는 통화 명칭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동아닷컴 2005-12-17 03:02
1807 미국 시인 존 휘티어[Whittier, John Greenleaf, 1807.12.17∼1892.9.7])출생,
"밤은 낮의 어머니
겨울은 봄의 어머니
낡고 썩은 것 위에도
새로운 초록색 이끼가 낀다."
*매사추세츠주 출생. 가난한 퀘이커 교도의 농가에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R.번즈의 시집 등에서 영향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잡지 편집에 종사하는 여가에 쓴 시 ·산문을 모은 《뉴잉글랜드의 전설 Legends of New England》(1831)을 발표하였다. 남북전쟁 전부터 열렬한 노예해방론자로서 활발한 논진(論陣)을 폈으며, 《바바라 프리치 Barbara Frietchie》(1864), 《신을 찬미하라 Laus Deo!》(1865) 등을 남기는 한편, 만년에는 열렬한 퀘이커 교도로서 종교적인 시를 많이 썼다. 그 밖에 유명한 장시(長詩) 《눈에 갇혀서 Snow-Bound》(1866)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1770년]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출생
1770년 12월 17일 태어남 / 1827년 3월 26일 죽음
"다른 이의 귀에는 양치기의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내겐 전혀 들리지 않았을 때의 그 굴욕감! 이러한 일들이 나를 절망의 벼랑으로 몰아갔다. 조금만 더 밀렸어도 하마터면 내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을 터이나, 그런 나를 말린 것은 예술, 오로지 그것이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하일리겐슈타트 유언장>(1802)
베토벤의 ‘운명’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고전주의 음악을 마지막으로 꽃피우고 새롭게 낭만주의 음악의 장을 연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그를 음악신동으로 키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독일 서북부에서 점차 명성을 키워 나가던 그는 1792년부터는 당시 음악의 중심지이던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옮겨 하이든과 살리에리를 비롯한 몇몇 음악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빈을 중심으로 연주가·작곡가로 활동했다. 1800년 후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청각 장애의 징후가 나타났고 결국 1819년경에는 청각을 완전히 잃었다. 한때 장애를 비관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이를 극복하고 작곡활동에 전념했다. 교향곡 9번 <합창 Choral>, <장엄 미사 Missa Solemnis>처럼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 중 일부는 그가 완전히 청각을 잃었던 시기에 나왔다. 베토벤은 음악 형식면에서 전통적인 소나타·교향곡 등을 개혁하고 확장했을 뿐 아니라 후원인의 기호나 요청에 맞추어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작곡가 상(像)을 구현했다.
1619 - 프린스 루퍼트 출생
[오늘의 경제소사/ 12월 17일] <1578> 프린스 루퍼트
'루퍼트 왕자의 구슬(Prince Rupert's Drops)'이라는 유리 공예품이 있다. 올챙이처럼 생긴 이 구슬은 신기한 구슬로도 불렸다. 앞머리 부분은 쇠망치로 내려쳐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반면 가는 꼬리 부분을 부러뜨리면 전체가 부서져 가루가 되기 때문이다. 꼬리에 흠집만 내도 폭발하는 경우도 있다.
신기한 현상의 원인을 알아내려는 과학자들을 괴롭혀온 이 구슬을 만든 사람은 영국의 루버트 왕자. 제임스 1세의 외손자이며 찰스 1세의 조카인 그는 1619년 12월17일 프라하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와 스페인ㆍ보헤미아ㆍ영국을 오가면서 각국의 문물을 익히며 자랐다. 다채로운 경험은 그에게 기병대 지휘관과 해군 제독에서 동판화가ㆍ발명가까지 다양한 직업과 취미를 안겨줬다.
신기한 구슬 발명은 1640년께. 녹은 상태의 유리액을 찬물에 떨어뜨렸더니 가늘고 긴 꼬리를 가진 물방울 모양이 나왔다. 대신들을 골탕 먹이려고 발명한 구슬의 신비가 완전히 규명된 것은 19세기 말. 찬물에 떨어진 유리액의 둘레는 급격히 식어 유리로 변하는 반면 속은 서서히 굳는 과정에서 인장력이 구슬 안에 갇혔다는 것이다. 물의 온도차와 유리의 인장력으로 탄생한 구슬의 원리는 오늘날의 강화유리를 낳았다. 방탄유리의 원조로도 꼽힌다. 귀족의 놀이가 과학으로 발전한 대표적인 사례다.
루퍼트 왕자는 캐나다 곳곳에도 흔적을 남겼다. 미국과 캐나다 중부를 포함했던 광활한 루퍼트 랜드가 허스든 회사의 초대 총독이었던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프린스 루퍼트는 우리 귀에 보다 익숙해질 것 같다. 태평양과 맞닿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북부에 위치한 천혜의 항구 프린스루버트가 천연자원ㆍ목재 등의 아시아권 수출확대를 노리고 항만시설을 크게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2/16 18:03:43
668 고구려 멸망, 신라 삼국통일
신라의 삼국통일(新羅-三國通一)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최초의 민족 통일로 간주되는 사건으로, 76년 신라가 한반도의 제국가를 통일한 사건이다.
신라가 가야, 백제, 고구려, 보덕국 등 한반도 내부에 있던 제국가들을 차례로 멸망, 병합시켰고 676년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통일을 달성하였다. 신라에 의한 민족단일국가 성립에 의미를 두는 견해와 함께, 한반도 남부 지역만을 통합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반론도 있다.
편집] 통일 이전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법흥왕 때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점으로 불교를 국교로 도입, 내부의 결속과 단결을 꾀하였으며 국호를 사로국, 서라벌에서 덕업을 일신에 망라한다는 뜻의 ‘신라(新羅)’로 개칭하여 삼국 통일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북쪽으로 함경남도 지역, 서쪽으로는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북으로 팽창하여 꾸준히 영역을 확장시켰고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킴으로써 한강 유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 내부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가야계 세력의 필두인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한편 선덕여왕 때는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변의 9국(백제, 마한, 옥저, 고구려, 거란, 말갈, 왜, 유구, 수·당)을 평정하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출처 필요]
[편집] 전개 과정
[편집] 가야의 멸망
532년 가야 연맹의 중심국인 경상남도 김해, 진해 지역에 있던 금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구의 영역을 복속시켰고 563년 최종적으로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서 신라는 낙동강 주변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후에도 가야 연맹이 있던 지역에서 반발의 기운이 일자 신라는 금관가야의 왕 구형왕의 후예 등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켜 가야계의 반발을 희석시키기도 했다.
[편집]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 · 당과 혈투를 전개하는 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특히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대백제 전선(對百濟戰線)의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현재의 합천)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는 모험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김춘추은 귀국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대전의 동쪽)을 넘어서게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거듭되는 승전에 교만해져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 · 흥수(興水) 등 충신은 축출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하고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분패하고, 결국 의자왕은 신라에 항복하고 백제는 660년 멸망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유신(遺臣)의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 : 한산(韓山))에 웅거하고 흑치상지 등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을 삼고 사비성 · 웅진성 등을 포위 · 공격하여 당군(唐軍)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나 · 당 연합군의 재침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로 주류성이 함락되고, 부흥군은 계속 패배하여 4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였다.
당나라는 옛 백제의 영토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편집] 고구려 멸망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공격의 화살을 고구려로 돌렸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항전으로 일시 지탱할 수 있었으나, 거듭되는 전쟁에 의한 전력 소모와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로 민심이 이반되어 있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동생 및 아들들 간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세가 쇠약해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군도 이에 호응하여 출동하니 고구려는 1년간 항쟁을 계속하다가 668년(보장왕 27년)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검모잠(劒牟岑) 등이 왕족 안승(安勝)을 받들어 약 4년 동안 부흥운동을 계속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옛 고구려의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했다
[편집] 통일의 완성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욕을 신라로서는 감수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나라의 축출을 꾀하고, 또 백제 옛 땅에 군대를 출동시켜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671년(문무왕 11년) 신라는 결국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 정벌을 감행하였다.
675년 신라는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676년 4월 5일[1] [2]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한반도 대동강 원산만 이남에 대한 지배권을 거머쥐었다.
~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 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