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지리산둘레길 1구간(주천-운봉)
여행일 : ‘21. 9. 4(토)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운봉읍 일원
여행코스 : 주천면(둘레길 안내센터)→내송마을(1.1km)→구룡치(2.5km)→회덕마을 (2.4km)→노치마을(1.2km)→가장마을(2.2km)→행정마을(2.2km)→양묘장(1.7km)→운봉읍(서림공원, 1.4km)(거리 및 시간 : 14.7km/ 실제는 15.43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둘레길이 시작되는 주천-운봉 구간을 걷는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원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운봉고원(해발 500m)의 너른 들녘과 마을길을 걸으며 즐기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이 자랑거리이다. 하지만 해발 583m인 구룡치를 넘어야하는 힘든 구간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들머리는 지리산둘레길 남원주천안내센터(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완주-순천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국도 17호선을 타고 구례·남원 방면으로 내려온다. 방자교차로(남원시 광치동)에서 산업로(구례·순천방면)로 옮겨 고죽교차로(남원시 고죽동)까지 간 다음 국도 19호선으로 바꾸어 탄다. 잠시 후 육모정교차로(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에서 빠져나와 지리산국립공원·정령치 방면으로 1.5km쯤 들어오면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063-635-0850)’가 나온다. 안내센터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둘레가 800리에 이른다는 지리산. 그 둘레를 걷는 길로 이은 것이 ‘지리산 둘레길’이다. 지리산을 한 바퀴 걷는 동그라미 형태로 22개 구간, 약 300km에 걸쳐 이루어져 있으며, 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도보여행(순례)길이 되었다. 이 길의 특징은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한 땀 한 땀 수놓듯 잇고 보듬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모든 생명들의 속삭임을 귀 기울이며 걸어보자.
▼ 남원시 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주천면 외평마을(장안리)과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코스. 운봉고원의 너른 들녘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 그리고 제방길로 구성되는데, 하루 코스로 적당한 거리(14.7km)지만 초반에 구룡치(해발 583m)를 넘어야하기 때문에 만만하게 볼 수만은 없다. 다만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 즉 주민들이 남원장이나 운봉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옛길의 모습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니 이를 염두에 두고 걷다보면 힘든지 모르고 완주할 수도 있겠다. 특히 걷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은 1코스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 첫 발을 떼는데 기념사진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남원 권역의 지도가 들어간 안내판을 배경 삼아 사진부터 찰칵! 지리산둘레길 전 구간이 다 들어갔더라면 금상첨화겠지만 눈에 띄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꿩 대신 닭’이랄까?
▼ 지원센터 앞 도로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다시피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많을 걸 보면 우리처럼 ‘스탬프 북(1만원이라는데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는 우리 부부는 구매하지 않았다)’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 ‘장안교’ 옆의 들머리에는 1구간(주천→운봉)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특이한 외형의 이정목이 더 눈길을 끈다. 저 이정목은 ‘장승’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장승라는 게 본디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신물이니 제대로 가져온 셈이다. 진행방향(화살표)은 ‘벅수(지리산둘레길에서 부르는 장승의 또 다른 이름이다)’의 귀에다 붉은색(순방향)과 검정색(역방향)으로 표시했다. 거리는 벅수의 가슴 부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개울가를 따르다 잠시 후에는 그 물길을 건넌다. 산수유로 유명한 용궁마을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인데 징검다리를 놓아 예스러운 멋을 더했다.
▼ 개울 건너에는 ‘지리산권역 홍보관’이 들어앉았다. 내부까지 기웃거려보지 않고도 설치목적은 대충 알겠는데, 옥상에 설치해놓은 풍차조형물만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상징이랄 수 있는 풍차와 ‘지리산’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을까?
▼ 목교를 이용해 ‘원천천’을 건넌다. 주천 들녘을 적셔주는 물줄기로 조선말까지 이 부근에 있었다는 ‘원천원(元川院 : 국가에서 운영하는 숙박업소)’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참고로 통일신라 때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이곳 외평마을은 국가에 납품하는 물자를 생산해낸 지역(원부곡)이었으며, 1885년(고종 22년) 면 중앙지로서 위치를 정하고 하원천방(下元川防)의 소재지로서 원터라는 마을 명칭으로 불려왔다.
▼ 다리를 건너자 ‘비부정’이란 식당이 길손을 부른다. ‘나그네가 쉬어가는 곳’이라며 말이다. 잘 꾸며진 식당은 규모도 제법 크다. 하지만 그보다는 안내판이 더 눈길을 끈다. ‘그 옛날 그 길목에 주막 하나 있었네’로 시작되는 안내판은 이곳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전남지방(동부에 경남 일부가 포함되었을 것이다)에서 한양으로 가는 유일한 옛길에 지금은 ‘비부정(沸釜亭)’이란 쉼터가 들어섰단다. ‘끓을 沸’자에 ‘가마 釜’자를 썼으니 분명 음식점인데 ‘정자 亭’자를 덧붙여 하마터면 옛 정자로 깜빡 속을 뻔했다.
▼ 조금 더 걸으면 남원-주천을 잇는 ‘장백산로’로 올라서는데, 가로수 대용으로 심어놓은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수십 년은 족히 묵었음직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눈요깃거린데 거기다 외모까지 잘 생긴 것이다.
▼ 4분쯤 걷자 작은 쉼터가 잠시 쉬어가란다. 내송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느티나무 그늘에다 반달 모양의 예쁜 의자를 배치했다.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식수대와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췄다. 작지만 알찬 쉼터라 하겠다. 참! 길가에는 음식물을 사먹을 수 있는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 쉼터에는 오르막 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해발 600m의 운봉고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곳의 고도는 170m. 2km를 걸으며 고도를 400m나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큰일이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구룡계곡을 구경하면서 회덕마을(지리산둘레길과 합류되는 지점이다)로 가려고 스틱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구룡계곡 코스가 막힌 것도 모르고 계획을 짠 내 무모함이 부른 화이니 참고 견딜 수밖에.
▼ 내송마을로 들어가는 길. 널디너른 들녘 너머로 펼쳐지는 헌걸찬 산릉은 만복대에서 고리봉과 세걸산을 지나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일 것이다. 저 가운데 고리봉부터는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고리봉에서 바래봉으로 흐르는 지맥을 갈려 보낸 백두대간은 고기리로 내려가고, 이어서 노치마을을 거쳐 수정봉으로 오른다.
▼ 둘레길은 산길이나 들길, 물길을 따라 걷는 게 일반적이다. 마을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마을 안길과의 첫 대면은 내송마을(이정표 : 개미정자 450m/ 육모정/ 외송마을 버스정류장 250m)에서 이루어진다. 마을에는 와야재(臥野齋)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집도 보였다. 엎드려 들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주인장의 여유로운 삶이 엿보이는 이름이다.
▼ 마을에는 ‘와야제’ 같은 현대식 건물만 있는 게 아니다. 예스런 느낌을 퐁퐁 풍기는 전통가옥도 눈에 띈다. 탐방로는 그런 가옥들을 스치듯 지나 산속으로 파고든다. 도중에 아담한 ‘은송저수지’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랑논’도 눈에 담을 수 있다.
▼ 벌초 삼매경에 빠진 농부도 눈에 띈다. 추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중요한 민족의 대 명절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벌초’부터 떠 올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추석이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숲속으로 들어선다. 1구간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입(이정표 : 운봉 13㎞/ 주천 1.7㎞)에서 ‘개미정지 쉼터’를 만났다. 그런데 ‘개미정지’라는 지명이 낯선 듯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 왜일까? 이웃 동네인 순창(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에서는 ‘부엌’을 ‘정지’라 부른다. 그러니 ‘개미’라는 곤충의 뒤에 붙일만한 단어는 아니다. 어쩌면 ‘개미정자 쉼터’가 변음되지 않았나 싶다. 정자나무가 특정한 나무를 가리키지 않고 마을의 소원을 비는 신앙처이자 휴식을 주는 큰 나무를 이르니 말이다. 안내판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내송마을 출신 조경남 의병장이 이곳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는데, 개미들이 발을 물어뜯어 적의 침입을 알렸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 이 길은 예전 운봉 사람들이 남원장에 가기 위해 넘던 길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던 서어나무는 이제 세월의 녹이 끼었고 속이 비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이를 거절함이 없이 여전히 그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그래선지 ‘지리산둘레길’과 ‘전북천리길’ 모두 이곳에 ‘스탬프보관함’을 설치해놓았다.
▼ 산길이 시작된다. 이 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로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고 한다. 하긴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다니던 살아있는 길이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아무튼 내송에서 회덕까지의 옛길(4.2km)은 길 폭이 넉넉하고 노면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니 옛날 운봉고원의 사람들이 남원으로 장보러 다니던 심정으로 걸어보면 어떨까. 어깨에 걸려있는 배낭을 당시 민초들이 지었을 등짐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 혹자는 이 길을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걸을만하다고 했다. 맞다. 길은 대부분 완만했고 약간이라도 가팔라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돌계단이 놓았다. 사람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덜 타게 하려는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자 능선의 안부에 올라선다. 통나무의자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데, 양쪽으로 길이 나 있으니 이정표(이정표 : 운봉 12.1㎞/ 주천 2.6㎞)의 진행방향 표시를 잘 살펴보도록 하자. 오른편으로 난 길도 또렷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서 걷던 등산객 몇도 오른편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 길은 능선의 허리를 잘라먹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에 저렇게 홈이 파였을까 싶다. 그런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자 또 다른 쉼터가 나온다. 그런데 이곳은 솔숲에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첨부된 지도에 나오는 ‘솔정지’가 아닐까 싶다.
▼ 내송마을은 ‘안 내(內)’에 ‘소나무 송(松)’자를 쓴다.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은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름에 걸맞게 둘레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 세상이다. 그것도 나이가 사오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은 노송이 대부분이다.
▼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던 산행대장의 설명과는 달리 구룡치로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아홉 마리 용이 또아리를 튼 듯,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야만 한다. 하긴 백두대간은 아닐지라도 그 곁에 붙어있는 산자락이니 어디 그게 만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선지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이들을 꽤 자주 만날 수 있었다. 1구간은 주천(해발 170m)에서 운봉방향의 구룡치고개(580m)로 치고 오르는 지형이다. 그러니 저 사람들은 1구간 답사를 가장 편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즘에야 ‘구룡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개미정지를 출발한지 5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10분 만이다. 이정표(운봉 11,1㎞/ 주천 3.6㎞)와 구호지점표시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높이 580m의 고지를 점령했으니 그 보상으로 잠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그것도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 숲속에서 말이다.
▼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다는 것 뿐. 구룡치 고갯마루는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었다. 명찰 달린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참고로 ‘구룡치’는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사는 구룡계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리산둘레길은 구룡계곡을 들르지 않는다. 혹여 구룡계곡을 둘러보고 싶다면 국제신문의 탐방 기사를 참조하면 되겠다.
▼ 회덕으로 내려가는 길은 운치있는 숲길이다. 길은 넓지도 좁지도 않다. 소나무 숲이 워낙 좋다. 해마다 백중날이면 마을별로 구간을 나눠 이 고갯길을 보수했다더니 그게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공동의 길이니 말이다.
▼ 10분쯤 내려오자 작은 나무가 큰 나무를 휘감아 도는 형상의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용소나무’라는데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비상하려는 용(龍)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거나 소원을 빌면 행운과 건강이 오래오래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령스러운 나무이다. 용소나무 아래 팻말에는 소설가 윤영근이 쓴 ‘사랑은 하나이어라’는 시(詩)가 적혀 있었다. <백두대간 천 세월 묻어둔 이야기로/ 아낌없이 몸 비벼 싹 튀운 정/ 산 속에 잠재운 그 사랑노래 늘 아름답구나>
▼ 이후로는 편안한 소나무 산책길이 이어진다. 솔향기가 코를 찌르는 솔숲 길을 느긋이 걷다보면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가을의 초입이지만 이런 산길에서는 소매도 걷고 가슴자락도 풀어 헤치는 게 좋다. 사람에게 그리도 좋다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느끼는 산림욕 숲속 길. 집사람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답게 걷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 작은 연못도 만날 수 있었다. 샘이 아니라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이만하면 산짐승들이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게다가 웃자란 잡초에 둘러싸여 풍경까지도 괜찮지 않은가.
▼ 하산을 시작한지 20분. ‘사무락다무락(이정표 : 운봉 9.8㎞/ 주천 4.9㎞)’을 지난다. 구룡치를 넘는 소나무 숲길에 돌을 얹고 무사안위를 기원하던 곳으로 ‘사무락’은 사망(事望)에서 변화된 말로 소망을, 그리고 ‘다무락’은 담벼락을 뜻하는 남원지역의 사투리이다. 그러니 ‘소망을 비는 돌담’이라 할 수 있겠다.
▼ 그렇다면 ‘사무락다무락’이란 저 축대를 이르는 말이 된다. 옛날 산에다 논밭을 만들 때 축대를 쌓아 외형을 잡았는데 그 축대를 ‘다무락’이라 부르기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믿음은 가지 않는다. 높이가 600m에 가까운 고갯마루를 힘들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어느 겨를에 저런 축대를 쌓아올릴 수 있었겠는가.
▼ 그 옆에 있는 돌탑에 더 믿음이 가는 이유이다. 회덕·노치 등 운봉고원에 살던 사람들이 남원장터에 물건을 내다팔면서 갈 때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돌 하나 쌓고, 오는 길에는 가족들 잘되라고 다시 돌 하나 쌓으면서 지나다녔다니 딱 저런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았겠는가.
▼ 이후로도 둘레길은 걷기 딱 좋은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자 작은 개울(비로 물이 불면 우회로를 따라야 한다)을 만나고, 징검다리를 건너자 2차선 도로에 올라선다. 도로변에는 화장실까지 만들어놓았다. 구룡치 옛길을 넘어온 순례자들에게 꾹꾹 눌러온 생리현상을 해결하라는 배려일 것이다. 참! 화장실 뒤에 있는 ‘정자나무 쉼터’는 들러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른 쉼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둘레길 것과는 다른 이정표(운봉방면 8.3㎞/ 구룡폭포 1.3㎞/ 주천방면 6.0㎞)도 눈에 띈다. 구룡폭포 순환코스가 포함된 안내판도 함께 세워놓았다. 맞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구룡계곡’이 나온다. 뱀사골이나 피아골·대원사계곡·대성골 같은 지리산 주능선의 계곡들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계곡이다. 길이는 짧지만 굽이굽이 이어지는 수많은 소와 폭포가 만들어내는 비경은 여느 계곡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한국자연보존회가 선정한 ‘한국의 100명수(名水)’에 끼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특히 판소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에 속하는 명창들이 득음을 위해 수련을 쌓은 계곡으로도 유명하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도로(구룡폭포길)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회덕마을(이정표 : 운봉 8.7㎞/ 주천 6.0㎞)에 이른다. 회덕마을의 옛 이름은 ‘모데미’. 사람들이 모였던 마을이란 뜻이다. 양반부터 장돌뱅이까지 주막이 있었던 회덕마을에서 쉬었다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모데기를 ‘모덕’이가 변음된 것으로 보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괴질이 피해갔을 정도로 이 마을은 오랫동안 평온하고 번창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불타버렸다. 지리산 공비가 완전히 소탕된 뒤 다시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해서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억새를 이용해서 만든 샛집(전북 민속문화재 제35호)은 둘레길을 지나면서 꼭 들러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하지만 난 들러보지 못했다. 아니 들머리를 찾아 헤매다 귀찮아져 그만 포기해 버렸다.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일반가옥도 볼거리지만 그보다 집 앞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줄지은 봉우리들이 일품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회덕마을 다음은 노치마을이다. 10분쯤 도로변을 따르던 탐방로는 노송 대여섯 그루가 무리를 짓고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노치마을로 향한다. 이때 운봉고원의 풍요로운 들녘을 옆구리에 차고 걷게 된다. 고원을 에워싸고 있는 지리산 서북능선도 조망된다. 고리봉과 만복대, 세걸산, 바래봉 등을 잇는 산세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지리산 주능선의 변화무쌍한 산세를 조망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길이다.
▼ 서북능선을 바라보다 문득 산이 나를 바라보게 하지 말고, 자신이 산을 바라보라던 법정스님은 말씀이 떠오른다. 스님은 산을 그저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뿐이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자신이 산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분주하게 살아갈 때는 산이 나를 내려다보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자신이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도 했다. 늘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에 여유를 갖고 살아가라는 메시지이지만 트레킹을 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도 딱 맞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앞만 보고 걷다보니 막상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들을 많이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 회덕마을을 지난 지 20분 만에 노치마을에 이른다. 노치(蘆峙)는 ‘갈대가 많은 고개’ 즉 ‘갈재’라는 뜻이다. 정령치(6km)와 여원치(6.7km)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둘레길은 노치마을 앞(이정표 : 운봉 7.5㎞/ 주천 7.2㎞)에서 오른편으로 휜다. 하지만 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노치마을은 둘레길과 백두대간 길이 만나는 곳. 백두대간 종주의 옛 추억을 더듬어보기 위해서이다. 19년이나 지난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렸으나 강행군(당시는 매 구간마다 20km가 넘었었다)의 여독을 풀던 추억이 솔솔 돋아나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먼저 찾아본 곳은 동구 밖 느티나무. 수령이 500년도 더 되는 느티나무는 ‘산천은 의구(依舊)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옛날이나 다름없이 그 넉넉한 품을 나그네에게 내주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것도 눈에 띈다. 백두대간과 14정맥을 담은 한반도 조형물 및 호랑이 한 쌍을 배치해 이곳이 백두대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자랑한다. 맞다. 이곳 노치(蘆峙)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관통하는 전국 유일의 마을이다. 때문에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마룻금을 중심으로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이 존재하는 특이한 얘깃거리도 제공한다.
▼ 슬픈 역사를 품은 ‘목돌(목 조임석)’도 생소하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정기의 기(氣)와 맥(脈)을 끊으려고 설치한 것들로, 마을 앞들의 경지정리를 하던 중 출토되었다고 한다. 반원형으로 생긴 목돌을 서로 연결하면 하나의 조임석이 되는데, 노치마을 앞들에 방죽을 파 지맥을 끊으면서 그 안에 목돌 3기(6개)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쇠말뚝이 이곳에서는 목돌로 바뀌어 나타난 셈이다.
▼ 정자나무 뒤로 돌아가자 추억의 ‘노치샘’이 옛날처럼 달고 시원한 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해 바가지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금방 청소를 끝낸 것처럼 주변도 깨끗했다. 하긴 매월 1회씩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온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마음 놓고 마시라며 수질분석표까지 붙여놓았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실컷 마신 것만으로도 부족해 물통까지 가득히 채워올 수 있었다.
▼ 골목길을 통과해 마을 뒤로 오르면 네 그루의 오래된 거송을 만난다. 백두대간 마루금에 서서 마을을 굽어 보살피는 이 소나무(산림청 보호수)는 수령이 무려 260년이나 되었단다. ‘天龍后土地之神位’라는 빗돌이 세워진 걸 보면, 신목으로 모시고 당산제까지 지내는 모양이다. 이곳은 백두대간 종주꾼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헌걸찬 마루금을 가슴에 담다보면 그간의 피로가 씻을 듯이 사라진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회덕·노치마을 사람들이 운봉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을 따른다.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는데 저 멀리 건너편으로 지리산 서북능선이 따라 온다. 이 구간에서는 유일하게 논두렁길을 걷기도 한다.
▼ 오른편으로 덕산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탐방로는 저수지를 피해 산자락을 휘감아 돈다.
▼ 노치마을을 출발한지 15분 만에 ‘질매재’에 도착했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농로를 버리고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이곳도 구룡치 옛길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산길이지만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예쁜 길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잘생긴 한 아름 노송에 다가가 안아도 보고 기대기도 해보는 여유를 부린다. 그녀에게도 이 구간이 흥에 겨웠던 모양이다.
▼ 또 다른 눈요깃거리도 있다. 왼쪽 사면이 활짝 열리면서 운봉고원(雲峰高原)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신선의 땅’이라 회자되는 운봉고원은 조선 중기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살기 좋은 열 곳을 일컫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꼽혔으며,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운봉이 없으면 호남도 없다.’라고 했을 만큼 예부터 정치․국방의 요충지였다. 최근에는 고대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알려진 철을 생산하던 다수의 제철유적이 발견되었고, 철을 바탕으로 가야의 기문국을 비롯하여 후백제까지 찬란한 문화를 펼쳤던 역사의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 그렇게 걷길 10분. 잘 단장된 ‘동복 오씨’ 묘역에 이른다. 후손들은 그 아래에 마음을 닦는다는 뜻의 심수정(心修亭)을 지어놓았다. 정자에 올라 덕산 저수지를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닦인다는 뜻일까? 정자 아래에는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양심함이란 계산대가 놓여있는 걸로 보아 무인점포인 모양인데, 컵라면 외에는 먹고 마실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 운봉막걸리에 해물파전으로 목을 축이려던 내 작은 소망은 어쩌란 말인가.
▼ 정자 앞에는 소망탑도 만들어져 있었다. 옛날 장꾼들이 운봉장에 들렀다 각종 생필품을 둘러메고 낑낑 올라오면서 하나씩 올려놓은 돌들이 저렇게 쌓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기에는 정성들여 쌓아올린 흔적이 너무 역력하다.
▼ 묘역에서 내려서자 ‘가장마을(이정표 : 운봉 5.4㎞/ 주천 9.3㎞)’이다. 가장마을은 ‘아름다운 가(佳)’에 ‘농막 장(庄)’자를 쓴다. 운봉고원의 널찍한 들녘에 들어선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옛날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하는 형국이라 하여 ‘아름다울 가(佳)’자와 ‘분장할 장(粧)’자를 썼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옥녀봉 아래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라고 믿는단다.
▼ 오늘은 꽃 대신에 탱자를 꼽아봤다.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를 위시해서 들국화, 철지난 능소화 등 많은 꽃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누렇게 익은 탱자 또한 가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특히 비타민이 풍부해 피부미용과 피부질환에 효과가 좋고, 감기를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과일인가.
▼ 가장마을 앞에서 탐방로는 60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게 되는 ‘덕산교’에서 이별을 고한다. 이때 오른편에 보이는 마을이 ‘덕산마을(德山里)’이다. 1580년 무렵 김씨와 오씨가 수정봉의 정기가 맺힌 명당터를 찾던 중 버려진 황무지가 명당인지라 터를 잡고 정착했다는 마을이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주촌천의 강둑을 따라 내려간다. 이때 오른편 개울 건너로 덕산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저 들녘은 원래 황무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가꾸어보니 기름진 옥토더란다. 살림이 풍요로워지면 인심 또한 좋아질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한번 정착한 사람들은 마을을 떠날 줄 모른다는 마을이다.
▼ 10분 후, ‘가장교(이정표 : 운봉 4.2㎞/ 주천 10.5㎞)’를 건너면 이번에는 주촌천을 왼편에 끼고 걷는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것이 다음에 만나게 될 마을은 넉넉한 살림이 보장되겠다. 참! 제방에서 만난 웃자란 풀을 보고 ‘갈대’라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된통 얻어들었다. 아직도 억새와 갈대를 혼동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그 둘이 적당히 뒤섞여 있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 풍요로움이 넘치는 들녘을 7분쯤 걷다가 행정마을로 들어선다. 행정마을은 ‘은행나무 행(杏)’에 ‘정자 정(亭)’자를 쓰는데, 개척 시조인 ‘창녕 조씨’가 새로 들어와 정착할 무렵 이곳 일대가 은행나무가 숲을 이뤘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게 아름다워 은행마을 또는 은행몰이라 불리었는데, 이게 한문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은행리(銀杏里)’가 되었고, 또 이걸 줄이면서 ‘행정’으로 고쳐져 지금에 이른단다. 하지만 지금은 ‘서어나무’로 주인이 바뀌었고, 또 이게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으로까지 꼽히고 있으니 서어나무 숲도 한번쯤은 꼭 찾아보자.
▼ 동구 밖 행정교에서 개천을 따라 잠시 내려가자 ‘서어나무 숲’이 나온다. 행정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200여 년 전 조성한 인공 숲으로, 마을을 지켜 주는 비보림(裨補林)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풍수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마을 숲들은 대개 풍수적으로 마을의 위치와 방향, 주변의 산세 등을 고려해 인공으로 조림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행정리 주민들의 쉼터로 바뀌었는지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참고로 행정리 서어나무숲은 지난 2000년 새 천년을 맞아 산림청과 ‘생명의숲’이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 숲 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 아씨와 이 도령이 노닐던 그 숲이기도 하다.
▼ 숲속으로 들어서자 200여 년 된 서어나무 70여 그루가 빼어난 질감을 자랑한다. 하나같이 훤칠한 키에 미끈한 몸매를 과시하는 근육질이다. 그래서 서어나무를 ‘근육질나무’로 부르기도 한단다. 한때 저 나무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이가 타던 그 그네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 속 장면으로만 남았다.
▼ 숲을 빠져나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람천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운봉고원의 너른 들녘이 눈에 들어오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그저 람천과 주촌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볼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말이다.
▼ 람천을 따르던 둘레길은 날머리를 1.6k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산림청의 ‘남원양묘사업소’ 안마당을 가로지른다. 양묘사업소는 국유림이나 가로수로 쓸 묘목을 키우는 곳. 낙엽송(물을 주고 있던 분이 알려주었다)이나 잣나무·전나무·금강소나무·느티나무 등의 묘목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 1만8000여 평의 부지에는 각종 나무 외에도 들꽃 300여 종이 식재되어 있단다. 양묘사업소를 관통하는 둘레길 양쪽에 식재된 ‘천일홍’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나에게 천일홍은 첫 만남이다.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양묘장을 벗어나 조금 더 걸으면 운봉(雲峰) 읍내로 들어선다. 이곳 운봉은 백두대간의 동쪽 고원지대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생산해낸 창의적 땅이었다. 동편제의 소리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흥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기문가야(己汶國)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지로 주목 받고 있다. 하나 더. 조선 중기의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은 이곳을 난리를 피해 살기 좋은 열 곳을 일컫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민초들의 이상향이랄까?
▼ 중심가에서 ‘동편제 소리길’ 조형물을 만났다. 맞다. 이곳 운봉은 동편제의 본고장이다. 동편제의 시조로 불리는 ‘송홍록(宋興祿)’과 근대 5대 명창의 한 사람인 ‘송만갑(宋萬甲)’을 비롯해 김정문과 이화중선, 박초월, 강도근 등 수많은 명인·명창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참고로 판소리는 전승계보에 따라 음악 특성이 달라지는데 이를 ‘제’(制)라고 한다. 호남의 판소리는 대개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은 동편제(東便制), 서쪽은 서편제(西便制)로 불린다. 운봉·남원·구례·곡성 등에서 발달한 동편제는 대마디 대장단을 선호하며 잔기교를 덜 부리고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을 구사한다. 소리를 꿋꿋하고 튼실하게 내며 소리 끝을 여운 없이 탁 그치며 마친다. 영화 ‘서편제’로 잘 알려진 서편제는 익산·고창·광주·나주·목포 등지에서 발달했는데, 소리가 애절하고 구성지며 기교적이다.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 운봉농협도 ‘동편제 거리’ 홍보를 거들었다. 문화센터 벽면을 할애해 이곳 운봉이 ‘동편제 소리’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그 오른편에는 ‘조선 십승지’ 중 하나라는 내용도 적어 넣었다. 하긴 조선시대의 이상향, 즉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니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 상가의 벽면은 아예 판소리(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다섯 마당으로 도배를 해놓았다. 판소리란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 장단에 맞추어 창·아니리·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이다. 원래는 12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등 다섯 5마당만이 전한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 탐방로는 운봉초등학교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학교 앞에는 이 길이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 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풀려난 뒤에는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에 임하라는 ‘백의종군’ 명령을 받는다. 이로부터 120일 후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 받을 때까지 장군이 움직인 동선(動線)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이다. 당시 장군은 운봉에서 이틀을 머물었다고 한다.
▼ 날머리는 서림공원 앞 주차장(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42)
읍내를 빠져나와 국도(24호선)을 건넌다. 이 지점(이정표 : 인월 9.9㎞/ 주천 14.7㎞)이 지리산둘레길 1구간과 2구간이 나뉘는 지점이다. 2구간(운봉→인월)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도 이곳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산악회 버스가 세워진 서림공원 주차장까지는 100m쯤 더 걸어야 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5.43km를 찍고 있다. 해발이 580m나 되는 구룡치 옛길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
|
출처: 비공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