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영(자-명기, ? - 1752. 삼향읍 임성리 용강. 경주인)
용강 마을의 입향조는 경주김씨 김치영이다. 삼향읍에서는 경주김씨가 이 마을에만 거주하고 있지만 경주김씨 족보를 보면 여러 마을에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와동 종월촌 등 삼향면 군데군데에 경주김씨의 선산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문중의 관리 소홀로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실지 소유는 없다고 한다.
김홍려(金弘呂. 자-진원. 고성인)
공은 무오년 평난공신 양혜공 김윤길의 후손이고 김연의 아들이다. 성격이 강개 하였고 일찍 문장을 이루었다. 인조 2년(162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병자란(1636)때 창의하여 의병 수백명과 병량 백여 석을 모아 근왕하러 나섰다. 수원에 이르렀을 때 청나라 병사를 만나 힘껏 싸워 수백 명을 죽이고 급히 나아가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명령을 받들어 적의 탄환과 화살을 무릅쓰고 성벽을 순찰하였는데 애쓴 공이 많았다. 화의가 성립됨에 분통함에 통곡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둔하며 지내다 죽었다.
김대휘(金大徽. 광해군 代. 해제면 천장리 장동. 선산인)
공은 장동마을 선산김씨 입향조로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난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6세손이다. 1623년 임진왜란 이후 해제면에 있는 임치진성의 어모장군 임치도 진관으로 재임하였고 검모포 만호 훈련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왕조로부터 해제면 광산리 성포와 세룡동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이런 연유로 인하여 후손들이 이곳 장동 일대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김식(1801-?. 해제면 천장리 장동. 선산인)
공은 선산인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김공은 어머니께서 몸이 약해지자 주변의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취하여 달여 드렸다. 뿐만 아니라 좋은 음식이면 꼭 남겨두었다가 어머니께서 잡수신 다음에야 먹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수일간의 목숨을 더 잇게 하였다. 그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불효함을 한탄하였다. 이러한 공의 효행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1883년(고종 20년) 정여를 포상하고 마을 앞에 효자각을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김용달(1803-1886. 자-문경. 무안읍 신학리 학동. 상산인)
원래 학동 마을의 형성과정은 옆 마을 병곡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현재 이 마을의 입향조와 관련이 있는 상산 김씨 김상후(1777 - 1810)는 장성군 동화면에서 살다가 청계면 상마리로 이사 와 병곡 마을 출신인 현풍 곽씨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중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곽씨 부인은 남편을 정성스럽게 간호했으나 효험이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고 허벅지 살을 잘라 봉양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남편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부인은 남편을 따라 생을 마감하려 하였으나 시모와 아이 때문에 죽지 못하고 3년 동안 청계면 상마리에서 남편의 시묘살이를 하며 삶을 추스렸다. 이후 부인은 친정인 병곡 마을로 옮겨 생계를 꾸려 나가며 아들을 키웠다. 그 후 아들이 장성하자 1800년대 중반에 옆 마을인 학동에 터를 잡아 일족이 번성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곽씨부인은 옆 마을인 병곡마을 효자인 곽의완의 고모이다. 해서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상후의 아들인 김용달이다. 공은 효자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나라로부터 동몽교관을 증직 받았다.
김성규(金星圭. 자-보형, 호-초정. 1864- . 해제면 임치리. 안동인)
조선 후기의 대한제국시대의 관료이자 학자로 충청북도 연풍군 현내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원래 경북 문경 지역에서 세거하다가 할아버지 대에 해제면 석용리로 이주했다. 아버지 병욱이 현재 괴산궁에 해당하는 연풍현감을 지낼 때에 공이 태어났다. 조선 선비로서는 드물게 유학을 포함한 수학을 공부하고 1887년(고종 24) 광무국주사가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영국·독일·러시아·벨기에·프랑스공사의 서기관이 되어 유럽 지역으로 나갔다가 1889년 귀국하였다.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정원급분·상의원주부 등을 지내고 이어 1894년 고창현감·1897년 장성군수 1903년 무안군감리로서 근무했다. 1904년 정부가 지방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자 청렴결백한 관리를 뽑아 지방으로 보내게 되자 강원도순찰사로 뽑혀 강원도의 탐관오리를 숙청하였으나 조정 권신들의 모함을 받아 1905년 파직되었다. 공은 6대 무안감리로서 1년 정도 재임하였다. 이때 지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른 관리들이 일본인 눈치 보기에 급급할 때 소신을 가지고 조선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의 활동이 ‘무안보첩’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1903년 일본 상인들의 횡포에 대한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쟁의 때 일본 낭인들이 감리서에 난입하여 갖은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으나 이때도 공은 일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단호하게 조선노동자들 편에 서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자주적인 입장을 보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목포로 옮겨 현재 목포시 북교동 성당 주변에 ‘성위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주민들은 이 집을 ‘김장성댁’이라고 불렀다. 공은 또한 목포·장성 등지에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1908년 조정에서 정2품의 품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때 나병에 걸렸는데 이때 비관 끝에 《병오사(病烏詞)》를 지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초정집》이 있다. 무안의 주민들은 장성군수에서 무안감리로 온 것을 계기로 공을 김장성으로 불렀으며 본인을 포함한 그 가족의 묘가 해제면 임치리 임치진과 석용리 용흥마을 앞에 있다. 가족으로는 근대극작가의 효시이자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몸을 던진 김우진과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목포신간회운동에 참여한 김철진, 자신이 유산으로 받은 전재산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그리고 천주교인의 삶을 산 김익진 등의 3남7녀를 두었으며 삼향읍 남악리에 유한당이라는 집을 지어 말년을 보냈다. 전해지는 말로는 한때 남악리 간척지의 30%가 김성규의 땅이었다고 한다.
김철진(1905-1971. 삼향읍 남악리. 안동인)
공은 최초의 무안감리였던 김성규의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김우진의 동생이고 사회주의자 김익진의 형이다.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거쳐 1927년 도지샤 대학을 졸업했다.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가 설립되자 전남청년연맹의 하기 강좌의 강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공은 지역의 언론을 주도하면서 지역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설립운동에 참여를 한다. 목포고보 설립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의 모체가 된 목포상과대학의 설립에도 관련을 맺는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발행했던 ‘목포신보’를 인수해서 ‘목포일보’로 바꾸고 4대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공은 목포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 호남평론을 설립하고 동아약업회사를 창립하기도 하며 1935년에는 목포부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한다. 1951년에는 목포상과대학 2대학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공이 무안과 관련이 있는 것은 지금은 전남도청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간척지로 뻘밭이었던 남악리 일대의 땅 상당수가 공의 아버지 김성규의 소유였다. 이 농토를 그대로 공이 물려받으면서 남악리 일대 농민들과 소작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해서 자방포 앞에 있는 조그만 산 기슭에 ‘법학사도회의원김철진영덕기념비’라 쓴 비가 서있다. 이는 1941년 보은사소작인일동이 세운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