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우리는 많은 궁금증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시고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가? 두 형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으셨는지 거부하셨는지 어떻게 알았는가? 가인은 왜 하나님에게 화내지 않고 오히려 아벨에게 분개하는가? 그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흘기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가인은 무엇으로 자기 동생을 죽였는가?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기 위해 주신 표적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은 아담과 하와뿐이며 세상에는 아벨과 가인 형제 밖에 없는 데, 왜 가인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일까봐 두려워 하는가(4:14)?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궁금증을 하나씩 풀 뿐 아니라, 나아가 이 본문이 오늘날 형제들과 이웃 사이에 불화와 반목을 날마다 경험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형제간의 사랑과 화목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지 듣고자 한다.
가인과 아벨의 탄생과 갈등의 배경(4:1-2)
가인이 자신의 아우 아벨을 죽인 사건은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한 순간에 생긴 갈등으로 말미암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서로 다른 삶의 구조에서 형성된 악한 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것은 가인이 충동적으로 아벨을 살해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긴 과정 속에서 형성된 그의 우월감이 상처를 받은 후 아벨을 의도적으로 유인하여 죽인 것으로 보게 한다. 가인의 우월감은 그의 어머니인 하와의 첫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자('ish)를 낳았다"로부터 시작한다(1절).
왜 하와는 "내가 아들을 낳았다"(개역)거나 혹은 "남자 아이를 낳았다"(표준새번역)고 말하지 않고 "남자('ish)를 낳았다"고 말하는가? 유대의 미드라쉬인 <아담과 이브의 생애> 21:3에 따르면, "가인은 태어나자 마자 활기가 넘쳤으며, 즉시 이 아이는 일어나 달렸고 자기 손에 갈대(히브리어 qaneh)를 가져와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으며, 이리하여 그의 이름이 가인(qayin)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Kugel 85). 하와는 너무나 잘생기고 똑똑하고 건강한 아들을 낳고 마치
자기 남편 아담에 비기는 "남자를 낳았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 같다.
가인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다. 여기에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주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와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언급함으로써 창세기 3:15에 명시된 인류를 장차 구원할 "씨"(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벌써 얻었으며 이런 약속을 이렇게 쉽게 이룬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듯 하다.
혹은, 이 구절을 "나는 주님과 똑 같이 남자를 창조하였다"(I have created a man equally with the Lord)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하와는 주님께서 사람을 만든 것처럼, 자신도 사람을 만든 것을 자랑하고 있는 셈이다. "첫 여인은 첫 아들을 낳고 기쁨에 넘쳐 자신의 창조적인 힘을 자랑한다. 그녀는 자신이 거룩한 창조력을 가진 것으로 여긴다. 주님께서는 첫 사람을 만드셨고(2:7), 나는 두번째 남자를 만들었다. 나도 '창조주의 반열에서 그와 동등하게 서있다' "(Cassuto 201).
"가인"이란 이름도 흥미롭다. 이 이름은 "창, 투창"(삼하 21:16)을 뜻하기도 하며, "만드는 자, 창조자"를 뜻하기도 한다. 아랍어에서 가인은 철을 다루는 자, 즉 "대장장이"라는 뜻이다. 창세기에서도 두발가인이 철 연장의 아버지이다(4:22).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자신의 창조력을 자랑하며 이와 동시에 첫 아들에게 희망을 건다. 가인은 장자로서 하와의 "창"도 되며, "창조자"로서 미래를 개척하고 창조하는 자이다. 혹은 "소유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강사문 48), 가인은 장차 물질적인 복을 독점하여 하와의 집에 복덩이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와는 자신의 모든 희망을 힘과 능력의 화신으로 보이는 가인에게 걸고 있다. 자신의 능력과 장남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갖고 있는 하와는 가인을 위해 치마바람을 많이도 날렸을까?
하와는 이어 아들을 더 낳고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한다(2절). 이 이름이 충격적이다. 동양에서 이름은 어떤 운명과 미래를 시사하는데, 하와는 둘째 아들을 "아벨" 즉 "거품, 무"로 부르고 있다(시 144:4. 욥 7:16). 마치 아벨에게는 생명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인은 활기 자체이지만, 아벨은 정체가 없다"(Brueggemann 56). 하와는 아벨에게 전혀 희망을 걸지 않으며 마치 그를 "타고난 낙오자"(born-looser)처럼 여기고 있다. 어쩌면 하와는 아벨을 "형의 그늘 아래에 두고 있는 것 같다"(틸리케 192).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편애"와 왜곡된 서열의식으로 짜여진 가정의 구조는 이미 어떤 비극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하와의 모습은 장자 중심의 가정 구조를 짜고 있는 우리 주위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며, 가인(기득권자)과 아벨(소외자) 이야기는 우리의 장자와 차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는 말을 통해 저자는 두 형제는 가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분업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 가축을 기르는 것과 농사하는 것은 삶의 두 영역이었다. 창조 기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벨이 양치는 것은 "모든 육축을 다스리는 것"이며(1:26, 28), 가인이 "땅을 가는 것"은 에덴 동산의 시작과 끝 이야기와 이어진다(2:5; 3:23).
현시점에서 "유목"과 "농경"의 두 직업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나타나지 않는다. 두 형제는 각자의 몫을 동등하게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의 직업을 멸시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땅의 경작자들"이 "유목민"을 멸시하였다거나(von Rad) "도시민과 유랑민 간의 알력"이 여기에 나타난다(서인석 121)고 보는 사회학적 해석은 지나쳐 보인다.
가인과 아벨의 갈등(4:3-8)
1) 두 제사(3-5절)
이제 세월이 흘러 새로운 장면이 시작된다. 한 어머니에게서 두 형제가 태어났고, 첫 아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부모의 사랑의 받으나, 둘째 아들은 처음부터 그림자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나온" 장자는 가정의 모든 특권을 누리며 의기양양하게 자라고, 차자는 그늘진 인생을 살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둘의 운명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우리들은 어떤 기대를 걸며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장자 가인은 자신의 특권에 걸맞는 책임을 다할까? 차자 아벨에게도 볕들 날이 있을까? 요람에서부터 편애와 차별대우를 받은 두 아들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모든 우선권을 어릴 때부터 다 차지한 가인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인생의 동반자와 동역자로 여길 수 있을까? 그는 모든 좋은 것을 당연시하는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 빠지지 않을까? 부모의 편견으로 소외된 둘째 아들은 왜곡된 가치관을 갖고 비뚤어진 인생을 살지는 않을까?
두 형제는 차별적인 성장과정을 겪으며 자라던 중, 어느 날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올 기회가 생겼다. 이제 이들은 다 성인이 되었고 각자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하와는 자신의 장자인 가인을 종교적인 인물로 교육하는 데도 성공한 것 같다. 가인은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3절). 그는 "땅의 소산" 즉, "땅에서 거둔 곡식"(표준새번역)을 주님께 가지고 나온다. 여기에서 "가져오다"는 제의적 용어로서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다(레 2:2, 9). 그는 높으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제물을 드리고 있다(창 32:13참조).
궁켈은 가인이 "분명히 최고의 것"을 바쳤다고 보나, 랍비들(Bereshit Rabba 22:5)은 "가장 저급한 질의 곡식"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 두 해석은 다 잘못 되었다(Cassuto 205).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온 것이다. 저자는 가인 제물의 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벨은 목동으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온다. 그러나 저자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절 상)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제물이 가인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벨은 "첫 것"을 가져오며, 동물 제사에서는 가장 좋은 "기름"을 가져온다. 이 기름은 불태워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벨은 최선의 제물을 주님께 바치고 있다. 그는 "첫 것"의 종교성에 관심을 가지나, 가인은 무관심하다. 이런 대조적 관점에서 본다면, 아벨은 주님께 뜻과 성품을 다 바치고 있지만 가인은 단지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고 한다. 주님은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동시에 받으신다. "열납하다"는 "쳐다보다, 세심히 보다"(Akk, seu, "look closely into")라는 뜻으로서 "호의를 가지고 가납하다"는 뜻이다(서인석 119). 아벨에게 있어서는 그의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종교 기술자가 아니었고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며(롬 12:1), "신령과 진정으로"(요 4:23) 예배하는 자였다.
그러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 (창 4:5)라는 본문에서 보듯 가인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제물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위 "장자 신학"의 신봉자로서, 하나님께서 장자를 사랑하시므로 장자가 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해 주실 줄로 믿었다. 그는 자신이 "피리를 불면 하나님은 당연히 춤을 추도록 되어 있다"고 믿었다(틸리케 194).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모든 헌신을 아끼지 않는 자기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두 형제의 제물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셨을까? 오래된 옛 번역을 보면 (데오도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아벨의 제물을 삼켰으나 가인의 것은 태우지 않았다"(enepurisen)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가인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자신의 제사 향기가 뭉개 구름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을 때, 아벨의 것은 땅바닥에 자욱하게 깔리기를 기대했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다. 카수토는 좀더 자연스러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후에 주님께서 아벨의 양떼에는 복을 내리시고, 가인의 들판에는 내리지 않았다"(Cassuto 207). 인간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도 자기 형제와 경쟁한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거절된 것을 알고 화를 심하게 낸다. 분노는 가끔 살인의 전조이다(창 34:7; 삼상 18:8). 그는 하나님(4:4 하)과 동생(4:8)에 대해 동시에 분노하고 있다. 적개심이 그의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난다. 또한 그의 "안색이 변한다"(창 4:5). 원어는 "그의 얼굴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다(욥 29:24; 렘 3:12). 그는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상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는 시무룩해지며, 사기가 저하된 모습을 드러낸다. 가인은 한번도 상상조차 못해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는 한번도 아벨이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한 순간에 아벨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이 거절되는 것을 느끼자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는 평소 아벨을 인정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 조금만 우월해져도 견디지 못하고 증오심을 드러낸다. 동생의 우월성 때문에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가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우월감으로 자존심을 달래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높일 때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분노하고 좌절하는 가인을 구속하시고자 하신다.
2) 주님의 권면(6-7절)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너희는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다"(요일 3:12)고 말하는 신약의 빛 속에서 우리는 늘 가인을 보기 때문에 이 소절에서 주님께서 가인을 호되게 꾸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E. Jacob의 주장처럼).
그러나 창세기에서 주님은 범죄자조차도 감형하시고 구원의 길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시므로, 가인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아버지의 권면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내 아들아 너가 지금 슬퍼하고 낙담할 이유가 없다. 너에게 새로운 제사의 기회가 있을 수 있지 않니?"
주님은 이와 동시에 강력하게 가인에게 호소하신다. "너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왜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주님은 세 번이나 "너는 왜?"라고 물으신다. "너가 분노할 이유는 없다. 너 자신과 너의 신앙을 먼저 살피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이어서 주님은 두개의 가정절을 제시하신다. "네가 선을 행하면…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가인은 기로에 서있다. 비록 사람이 타락했지만(3장), 그는 여전히 선악을 선택할 수 있다. 주님은 가인에게 "선을 선택하라"고 권하신다. 만약 선을 행하면, 그는 "들 것이다"에서 원문에는 목적어가 없다. 개역은 "얼굴을 들다"로 해석한다. "낯을 든다"(nasa' panim)는 바로 앞 절의 "낯을 떨어뜨린다"(napal panim)와 대조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가인의 태도에 달렸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가 선을 택하면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악을 택하면 다른 운명이 기다릴 것이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에서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영상은 너무나 강렬하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서 "엎드린다"가 고대 앗시리아의 문턱 귀신(doorstep demons)에 대한 토속신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Duhm, Speiser). 그렇지만 이 영상은 창세기 4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도 죄를 이렇게 귀신화 시키지 않고 있으며, 문턱 귀신이 문 앞에 기다린다는 개념은 구약의 가르침에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세기 49:9에 따르면, 유다 지파는 "그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엎드림"은 먹이를 노리는 동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만약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을 때, 죄가 야생동물처럼 가인 자신을 먹이로 노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는 가인의 "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 그가 평소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다. 가인을 삼키기 위해 잠복하고 있는 죄의 그림은 너무나 생생하다. 죄는 배고픈 사자처럼 언제든지 가인을 덮칠 준비가 되어 있다(렘 5:6). "죄는 단지 법칙을 깨는 것이 아니다. 죄는 가인을 덮치기 위해 매복해 있다. 죄는 가인보다 더 큰 자이며 그의 목숨을 자기 것으로 취하고자 한다(롬 7:17참조). 죄는 치명적이다"(Brueggemann 57). 따라서 가인은 자신의 분노와 좌절감을 극복해야 한다. 형제간의 갈등과 혼란을 슬기롭게 다루지 못하면 무서운 짐승 같은 죄가 잠복하며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을 주관적인 심리적 범주로 다루나, 성경은 우는 사자와 같은 무서운 권세로 다룬다(엡 6:12).
특히 여기에서 "죄가 가인을 사모하다"라는 표현이 충격적이다.
창세기 3:16에서 이 단어는 남녀가 서로를 향해 가지는 왜곡된 갈망과 지배하고자 하는 감정을 보여 주었다. 이제 죄는 가인을 사모한다. 의인화된 죄가 동물적인 굶주림으로 가인을 탐하고 있다. 그러나 가인은 아직까지 죄의 파괴력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주님은 가인에게 그가 처한 위험을 말씀하신 후, 대안을 제시해 주신다. 비록 죄가 문 앞에 잠복한 짐승처럼 위협하나, 가인이 그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신다. "다스리다"는 용어는 창세기 1:28에서 남녀 인간이 모든 식물과 창조계를 다스리며, 두 광명이 밤과 낮을 다스리는 맥락에서 나타난다(1:16-18). 이와같이 가인은 문 앞에 웅크린 짐승을 길들여야 한다.
3) 가인의 아벨 살해(8절)
"죄를 다스리라는 초정과 도전과 약속"(Brueggemann 59)을 가인은 잘 받아들였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는 어느날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였다"(8절)고 한다.
여기에서 "고하다"('amar)는 동사는 "말하다"(dabar)라는 동사처럼 목적어 없이 절대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여러 해석자들은 목적어를 첨가하였다. "오라 우리 같이 들에 가자"(탈굼). 혹은 "우리 넓은 들로 가자"(페쉬타).
여기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한 말은 설화의 구성에서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 속에서는 가인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암시가 있다. "고하다"는 단어는 이디오피아어에서는 "보이다, 시사하다"는 뜻을 가지므로 "만날 장소를 정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카수토 215).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은 아벨을 쳐죽일 장소로 은밀하게 유인하고 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일한 부모의 유전인자를 공유하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이 세상에서 처치하는 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은 너무나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둘은 공존할 수 없으며,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우리도 가인처럼 자존심이 상처받을 때, 생사를 건 혈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가인은 아벨을 "들"로 유인해 낸다(8절 하). 그는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아벨을 불러내고 있다(신 22:25-27). 그리고 "가인이 일어나(qum) 아벨을 쳐죽인다." 가인은 동생을 만나는 장소를 살해의 장소로 바꾸고 있다. 우정의 장소를 배신의 장소로 바꾸고 있다. "일어나"(qum) 그를 죽이니라"는 표현이 너무나 섬찍하다. 이 표현은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qum)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면"이란 신명기의 규례를 상기시켜 준다(신 19:11).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고, 가인을 기다리던 죄는 결국 가인을 삼킨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다스림을 받으며, 매복한 정욕에게 지배되며 파국적인 종점까지 간다.
하나님의 심문과 심판(4:9-16)
이 본문은 하나님의 소송과 재판을 보여 준다. 이 소송은 창세기 3장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소송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사실을 직접 확인하시고(4:9-10절), 언도하시며(11-12절), 피고의 하소연을 듣고 감형하시며, 최종적으로 추방하신다(16절). 3장과 4장 사이에 있는 구조적 유사성을 보라(Westermann 303).
가 인 아담과 하와
심 문 4:9-10 3:9-13
언 도 4:11-12 3:14-19
감 형 4:13-15 3:21
추 방 4:16 3:23, 24
1) 심문과 반문(4:9-10)
앞 절에서 가인이 자기 동생에게 말했으나(8절), 이제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다(9절). 3장에서와 같이 주님께서 범죄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 찾아오시고 범행사실을 확인하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는 주님의 질문은 통렬하다. 이것은 앞장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과 같다. 두 질문 모두 우리 존재의 근본을 치는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가 아벨의 시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 오시고 물으신다. 아무도 본 자가 없으나 주님은 아시고 물으신다(신 21: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너는 당연히 아벨과 함께 있어야 하는 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와 함께 걷던 네 동생은 왜 더 이상 보이지 않는가? 너와 함께 어머니의 젖을 빨던 아벨은 어디 있느냐? 늘 한솥밥을 먹던 아벨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이 세상에서 너와 가장 닮은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며 반문한다. 가인의 마음 속에 아벨을 향한 가시와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 아우를 지키는 분은 당신이지 어째서 저입니까?"
왜 가인은 "그의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가?" 이 무지는 자신의 동생의 행방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자기의 참다운 정체에 대한 무지이다"(서인석 134). 형제는 그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가장 잘 안다. 두 형제는 사랑하든 미워하든 서로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그러나 가인은 "나는 알 바 없어요"라면서 하나님께 대든다.
나아가 가인은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신성 모독적인 농담"(W. Zimmerli)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키다"는 동사가 놀랍다. 이 동사는 주로 목자가 양을 지킬 때 사용된다. 즉, "아벨이 나에게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양처럼 지키는 자입니까?"(문자적 번역).
2) 언도(4:11-12)
이제 주님은 가인에게 판결을 선언하신다. 먼저 땅이 무죄한 자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생명력을 더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 좋은 농산품을 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11-12절 상).
죄의 결과로 인간의 노동이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땅은 아무 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죄에 있어서 너와 땅이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에 심판도 너와 같이 받을 것이다. 땅과 사회정의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의가 넘치면 땅도 생명력을 드러내며, 죄가 깊어지면 땅도 피폐해진다(시편 72:3, 16).
또한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 표현은 가인이 방랑하는 목자가 될 것이란 뜻은 아니다. 목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유리하는 자"가 아니다. 가인이 받은 저주는 자신의 가정과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이다(시 109:9-10). 그가 받은 저주는 그의 후손에게까지 미친다.
가인이 받을 심판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유사하다(신28:16-19 참조). 가인에 대한 주님의 심판은 후대에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에 대한 은유가 된다(사 26:21). 그들은 가인처럼 "방랑하며"(암 9:9), 이방 나라에서 유리할 것이다(사 27:1-5).
우리는 이 기사를 읽으며, 왜 형제를 죽인 가인에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는지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사형제도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기존해 있는 악의 세계를 청산하는 것 뿐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는 목적이 있다. 이 순간 가인을 죽여 살인자의 죽음으로 교훈을 삼을 자가 아직 세상에는 없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에게 유배를 선언하신다.
3) 감형과 보호장치(4:13-15; 3:21 참조)
13-15절 사이에는 가해자와 재판장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오고간다. 주님은 가인에게 유배형을 처하셨고 가인은 불모지에서 살아야 했다(11-12절). 그러나 가인은 자비를 구한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는 가인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13절) 이것은 가인의 불평인가, 애통인가, 혹은 자신의 "죄"에 대한 후회인가?
여기에서 "죄벌"('awon)이란 단어는 주로 "죄악"으로 번역되며, 이것의 어근('awa)은 기본적으로 (1)"굽히다", "비틀다" 혹은 (2)"잘못하다", "잘못가다"는 두개의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의미는 인격이 왜곡되고 비뚤어진 것을 뜻한다(distortion). 둘째는 "잘못 간 것"으로서,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을 뜻한다(perversion). 전자는 왜곡된 성격에서 나온 비정상적인 행동을 뜻하고, 후자는 바른 길을 떠나, 전도되고, 뒤집어지고, 도착된 상태를 보여준다. 이 단어를 "죄벌"로 번역할 때에는 "죄"와 "벌"을 포함하는 사건을 묘사한다.
따라서 가인의 고백은 "내 죄가 너무 큽니다"로 볼 수도 있다. 루터는 "내 죄는 용서받기에 너무나 큽니다"로 해석하였다 (M. Luther; H. Schultz, A. Dillmann 등). 혹은 "내 벌이 너무 큽니다"라는 뜻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가인은 불평하고 있다.
가인은 이제 후회와 죄책감으로 가득 찬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무서운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쫓김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끝없는 방랑과 노동의 저주를 느낀다. 그는 땅 위에서 "도망자, 방랑자"가 된다. 그는 "길 없는 길"과 "끝 없는 길"을 걷는다. 목적이 없고 근심에 사로잡힌 방랑 생활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의 죽음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더 이상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14절).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에서 보듯 그는 살해될까 봐 두려워한다.
이 구절은 가인 시대에 이미 아담, 하와, 가인 외에 인간들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들은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어서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4:17)를 읽을 때, "도대체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했는가?"는 질문을 던진다.
사실 어거스틴도 이 구절에서 아주 큰 어려움을 느꼈다(신국론 XV, viii). 비평학자들은 이미 가인과 아벨 시대에 인구가 많았거나, 혹은 더 원시적인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5:4)는 말씀에 근거하여, 가인은 자기의 여동생과 결혼하였으며, 그가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는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영국의 보수주의 학자인 데렉 키드너(Kidner 29-30)는 이 난제를 다루며 우리의 전제에 문제가 있을 것을 비추면서, "아담 안에서의 인간의 통일성은 유전적인 것이 아니고, 연대성에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카수토의 입장이 더 흥미롭다.
"가인은 모든 인류가 그를 죽일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모든 인류가 그에게 피의 복수자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살해한 동생이 첫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살해된 자의 가족만 오직 피의 복수를 생각한다. 어떤 외인들이 복수를 하는가?"(Cassuto 194).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은 장차 태어날 아담 집안의 식구들이 그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죽은 자의 피가 헛되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 아니듯이(10절), 여기에서 살인자의 방어적 애통도 헛되지 않음이 나타난다. 가인의 고백이 참된 회개는 아니지만(14절), 그래도 주님은 그에게 자비와 보호를 약속하신다(15절).
"그렇지 않다"로 주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이것은 앞의 저주를 모두 철회하는 것이 아니다. 가인은 도망자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의 생명은 보장된다.
"저주받은 가인"과 "보호받는 가인"의 모습 사이에는 갈등이 없다. 가인은 쫓겨난 자이나 보호받는 자이다. 가인은 법익을 박탈당한 자(outlaw)이나, 법의 보호를 받는다. 특히 여기에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에서 "벌을 받다"(naqam)라는 용어는 "법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창 4:24; 출21:21).
가인을 죽이는 자가 벌을 칠배나 받을 것이라는 것은 비록 살인자라 할찌라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도록 하여, 피의 보복을 금지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가인은 형제를 죽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판결을 집행할 권리는 없으며 그의 인권을 유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칠배"는 완전수로서 "완전한 잣대로" 혹은 "가장 엄격한 벌로서"라는 뜻이다(창 4:24; 레 26:18, 21, 28; 시 79:12; 잠 6:31). 주님은 사람들이 가인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게 그에게 "표"를 주신다(15절). 본문은 이 표가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는다. 가인이 받은 "표"는 종족 표시(B. Stade)나 일반적으로 보호하는 표식이 아니라, 살인자를 돌보는 법적인 규례와 연관된 것 같다. 따라서 이 표는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받는 표이다. "가인에게" 혹은 "가인을 위하여" 주어진 표는 "그의 몸에 찍힌 표"가 아니다. 이 본문은 후에 나오는 도피성 기사와 여러모로 유사하다(민 35:9-34). 하나님은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를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도피성"을 만들어 주신다. 도피성의 기본적인 목적은 고발당한 자가 피의 보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님은 가인에게 도피성을 허락해 주신다.
4) 추방(4:16; 창 3:23, 24 참조)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16절)에서 "놋 땅"은 "놋"이라는 이름의 땅일 수 있고, 혹은 은유적으로 "방랑의 땅"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는 이곳 저곳으로 계속 옮겨다니며 산다(Cassuto 228).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떠난다. "표"에 대한 이야기 바로 다음에 "도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가인의 도시는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는 "표시"였다. 이것은 도피성의 목적과 일치한다(민 35:12). 가인의 도시는 "살인자"를 위한 도피처였다. 이곳에서 그와 그의 후손이 산다(신 19:11-13 보라).
가인의 후손들(4:17-24)
인류 역사의 여명에 에덴의 동쪽 마을에서 형이 동생을 처음으로 살해한 그 끔직한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가인의 이야기를 보면, 죄의식과 두려움 속에 살던 그는 자신의 추억이 어린 동네를 떠나 "놋"이란 땅으로 간다(4:17). 여기에서 "놋"이란 말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가인은 "놋 땅" 즉 "방랑의 땅"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자신 보다 더 우월해 보이는 동생을 제거한 후 그가 명실상부한 "장자"와 "상속자"가 되어 더 큰 자신의 세계가 구축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는 "방랑자"가 되어 방랑자의 땅에서 살고 있다. 그의 거처는 결코 항구적이 되지 못하며 그는 여기 저기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세월이 지나 가인은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으며, 그의 첫 아들을 "에녹"으로 이름 짓는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4:17, 개역개정). 아마 가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성을 세운 후, 그것을 봉헌한다는 뜻으로 그의 아들의 이름을 "에녹"으로 지은 것 같다. "방랑자"가 "성"을 세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아마 자신을 은폐하기 위하여, 혹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세울 결심을 한 것 같다. 가인의 "성"은 열린 성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성으로 세워진 듯 하다. 이런 가인의 성은 사람들이 함께 자유롭게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첫 살인자의 살기가 감도는 성 안에는 "집단적인 폭력과 살인 충동"이 머물고 있지는 않을까? 가인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성을 세우지만, 그의 성은 어떤 공간이 될까?
흥미롭게도 가인의 성에는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며, 그곳에서 문화가 꽃피고 있다. 특히 문화의 창달은 가인계통으로 볼 때 아담의 7대 손인 라멕의 세 아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라멕은 최초의 일부 다처주의자로서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으며, 그의 첫 아내인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의 두번째 아내인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 ('날카로운 기계'; 개역)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고 한다(4:20-22).
즉 가인의 도시에 문화가 꽃피며 농사는 야발로(20절), 음악과 예술은 유발로(21절), 기계는 두발-가인으로(22절), 법은 라멕(23-24)으로 발전하고 있다.
라멕의 세 아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다 비슷한 이름으로서 모두 "야발" 즉 "생산하다, 가져오다, 이끌다, 인도하다"라는 어근에서 나왔다. 이들은 다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실용적인 것으로 이끌어 내는 통찰과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흥미롭게도 예술이 살인자의 활력과 연관된다. 프로이드는 "욕망과 문화"에 대해 쓰면서, 욕망이 없는 문화는 없으며, 욕망이 순환되고 다스려지지 않는 문화가 없다고 보았다(서인석?). 따라서 예술과 도시 배후에 7절의 "욕망"이 있다. 가인의 가족은 드디어 욕망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 같다. 라멕의 딸 중 하나인 나아마는 "귀여운, 아름다운"이란 뜻이다. 나아마는 가인의 성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와 예술이 가인의 원죄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과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이 본문에서 벌써 청동과 철이 나타나는 점이 해석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청동제품은 주전 3500년으로, 철제품은 18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주전 1200년경부터 힛타이트 족속이 철기 문화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1) 아담을 상대적으로 후기의 인류로 보든지, (2) 초기의 청동과 철기 제련 방법이 잊혀졌다가 훨씬 후기에 새롭게 발견되었든지, (3) 여기에 기록된 가인의 계통은 꼭 직계가 아니라 수많은 세대를 포함하여 긴 세대로 해석하기도 한다(Youngblood 70). 두번째와 세번째의 해석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가인의 후손들 이야기는 "검가" 혹은 "복수가"로 알려진 라멕의 짧은 시로 갑작스럽게 끝난다. 라멕은 자신의 두 아내를 부르며,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보복을 하였는지 자랑하고 있다. "라멕"은 원래 "강한 젊은 이"라는 뜻이며, "아다"는 "장식품", "씰라"는 "그림자", 혹은 "짤랑짤랑"처럼 여성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Cassuto 234).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는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과 매혹적인 소리를 상징해 준다(아가 2:14에는 "얼굴"과 "소리"가 쌍을 이룬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라멕의 검가는 완전한 히브리시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평행법과 강력한 영상과 숫자의 병행(x와 x+1)이 나타나지만, 내용은 야만적이기 짝이 없다. 라멕은 조그만 "창상"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살해"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조그만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생명을 빼앗는다." 그것도 당당한 용사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구체적으로 그 사람은 바로 "소년"이었다. 라멕은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에 대한 노기로 가득 차 있다. 혹은 우리가 "인하여"(le)라는 전치사를 "하자 말자"로 번역한다면, "내가
때리자 말자, 나는 사람을 죽였고, 내가 상처를 주자 말자, 소년은 죽었다"가 된다(Cassuto 240). 그렇다면 라멕은 자신의 아내들에게 자신의 팔뚝이 얼마나 굵은지를 자랑하고 있다. "내가 잽만 먹여도 죽고, 훅만 넣어도 숨이 끊어진다." 그는 자신의 잔인한 살인을 아내들에게 뽐내고 있다.
나아가 라멕은 어떤 도전과 복수도 자신이 용인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가인의 예를 들어 뽐내고 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24절).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이 세운 성에는 농업과 목축과 음악과 예술과 각종 산업이 발전하고 있지만, 이 문화는 근본적으로 그 창시자가 "여호와의 앞을 떠나" 세운 것이므로(4:16), 생명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가치가 없다. 가인의 성에는 억제되지 않은 살인 충동이 분출하며, 끝이 없는 복수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소외되며 인간성은 파괴되고, 이 세상은 무서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을 준다. 라멕의 자랑은 가인 성과 그 문화를 기초부터 흔들고 있다.
하나님의 새로운 복(4:25-26)
우리는 천지 창조 직후의 이야기(2:4-4:26)에서 그동안 (1) 에덴 동산 이야기 (2:5-25)와 (2) 인간의 타락 이야기(3:1-24)와 (3) 가인과 아벨 이야기(4:1-16)와 (4) 가인의 후예들 이야기(4:17-26)를 보았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이야기의 끝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짤막한 이야기를 전하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준비를 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사는 새로운 아들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라"(25절). 여기에서 하와의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나도 여호와처럼 창조자가 되었다"고 자랑했으나, 이제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고백한다(여기에서 "내게"는 하와를 가리킨다). 즉 4장을 시작하는 말, "내가 득남하였다"와 "하나님이 내게 다른 씨를 주셨다" 사이에 강한 대조가 있다.
여기에서 히브리어로 "셋"은 "주어진다"(granted)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자신이 낳은 것 보다 훨씬 더 좋다. 특히 하와는 셋이 가인을 대치한다고 말하지 않고, 아벨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가인은 장자이지만, 축복을 상속하지 못하고, 동생이 한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씨"를 주신 것이다.
가인의 족보와 그 파괴적인 절정과 대조적으로, 새로운 희망이 한 씨를 통해 주어진다. 가인의 성과 문화에 대안적인 역사가 셋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셋과 그의 후손 시대로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한다(4:26; 12:8; 13:4; 26:25). 더 이상 물질문명이 아니라, 순교자의 피로 이어지는 참된 경건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이후로부터 인류의 흐름은 가인 계통으로 추적되지 않는다. 그의 족보는 라멕으로 끝난다. 이제부터는 셋으로 이어진다. 새 생명이 셋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26절).
김정우
총신대 신대원 교수
한국신학정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