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0:32-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종말 배도자
1. 말씀배경
종말이 가까울수록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영적 배도자가 일어날 것입니다.
3년에 걸친 세계적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1/3 수준) 이런 현상을 보아도 더 극심한 핍박과 영적 환경이 주어지는 종말에는 배도자가 많이 일어날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① 먼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요이 1:7),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인 것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통하여 큰 이적을 행하기도 할 것입니다 (계 13:13-14) ② 또한 그들을 따르지 않는 자나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많은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계 13:15)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렇게 되면,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가 확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마 3:12, 마 25:32, 눅 3:17)
▶ 그들은 때와 법을 고쳐서 합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7:25]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때를 고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연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변화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때를 인위적으로 앞 당기거나 후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를 바꾸어서 좋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믿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더 좋지 않는 때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법을 고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 코로나 때에 방역지침을 가지고 사람들과 교회를 지배하고자 했습니다. 법을 만들어서 강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냐냐는 문제와 함께 현행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함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많은 손해를 보고, 박해까지 당하면서 말씀과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며 살아가는 자가 적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세상을 거슬려 올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 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는자가 더 적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복음 13: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 적으니이까 (에이 올리고스, 작은, 소수의, 조금, 약간)
구원의 문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처럼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인 것입니다. (눅 13:24)
▶ 바울의 시대에도 세상이 좋아서, 믿는 자에게 다가오는 핍박이 싫어서 떠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던 데마도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고 (딤후 4:10). 구리장색 알렉산더도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습니다 (딤전 1:19). 오늘 말씀을 보아도 뒤로 물러가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8-39절)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양다리 걸치고 믿음 생활하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서 예수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눅 9:62), 손에 잡은 쟁기는 먹고 사는 것을 포함하여 세상 살아가는 수단들인 것입니다.
▶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벧후 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다시 정리하면, 믿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더 안좋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씻었다가 다시 더렵혀지는 모습으로 개가 토한 오물에, 돼지가 구덩이에 있는 똥들로 다시 더렵혀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마지막 때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종말의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 히브리서가 기록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빛을 맛 보았고 은사도 맛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 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다시 타락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 6:4-6, 히 10:32).
특별히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 세상으로 가고 있었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다른 복음에 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진리가 혼잡하게 된 상황속에서 그들에게 믿는다는 이유로 큰 고난이 다가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고난의 큰 싸움이 있었고 (32절), 비방과 환란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33절), 갇히고 소유를 빼앗기는 (34절) 등 많은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믿음에서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 히브리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① 히1:4-4:13절까지는 그리스도가 그 어떤 피조물보다 우월함을 논증해주고 ② 그리고 히4:14-10:18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불안전한 제사장들을 통하여 드리는 구약의 동물 제사보다 더 우월함을 논증해주고 있으며
특히 오늘 말씀이 포함된 ③ 히10:19 – 13:17절까지는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런 척박한 영적 환경에서 어떻게 신앙을 유지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2.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어떻게 믿음을 지키는 것이니까?
세상은 온갖 화려함과 감각적인 것들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고, 믿는다는 이유로 각종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을 때에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배도자가 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1) 34절을 보면, 더 낫고 /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더 낫다(헬, 크레잇손)는 것은 원어적으로 “더 높은, 더 뛰어난, 더 유익한, 더 좋은”의미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차원이 수준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영구하다 (헬, 메노)는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것은 없어지지만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불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재산이 빼앗기고 생산활동이 제한되고 때로는 참여 기회마저 없어지는 상황이지만 이 땅에서 빼앗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나은 것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영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을 빼앗겨도 기쁘게 당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업을 하다보면, 조금만 말씀을 어기면 큰 이익이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구한 소유를 얻기 위하여 없어질 것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조합이라는 것을 통하여 공동으로 생산과 판매활동을 하는데 믿는 자들은 출교를 당하므로 경제 생활과 신앙생활의 제약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① 당연히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 거처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거처를 준비하러 가셨고 거처가 예비되면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요 14:2-3). 그 거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영구한 소유인 것입니다.
지금과 비교도 안되는 환경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빼앗길 이 땅의 것과 비교도 안되는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볼 때에 아무리 믿음 생활이 어렵고 삶의 환경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②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핍박으로 죽음을 당해도 이 땅의 생명을 끊어지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믿음을 가진 자들은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당당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기꺼이 사자의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한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래서 동굴속 카다콤에서 살면서 믿음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③ 영구한 소유를 35절에서는 큰 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큰 상이 있음을 알고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담대함(헬, 팔레시아)은 확신이며 신뢰입니다. 큰 상 (헬, 메가스 미스다포도시아)은 큰 보상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그가 한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히 11장에서는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 평등한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그가 이룬 만큼 누리는 것입니다.
▶ 36절에, 하나님께서는 영구한 소유, 큰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약속은 되어 있지만 인내하지 못하면 그 상을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므로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히 11:11).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2)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종말 신앙입니다. 그래야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37절에, 잠깐 후면 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방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그들에게 닥친 핍박도 끝이 나고 그들을 괴롭혔던 악인들도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며, 더 낫고 영구한 소유를 받는 하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 초대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자기 세대에 이루어 질 것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견디어 냈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속히 (헬, 타퀴)는 신속히, 즉시라는 뜻 그대로입니다. 오리라 (헬, 엘코마이)는 중수디포동사로서 오고, 가다의 뜻인데 디포동사는 수동태이면서 능동의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로, 주어가 자신과 관련된 어떤 수동적인 행위를 하는 것일 때 사용됩니다. 자신의 행위에 능동적, 수동적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주님은 올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도 내 의지만 있으면 포기하기도 하는데 남의 의지가 함께 있으면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 바울도 임박한 종말관을 가지고 바울서신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의 첫 번째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4 :13-18절에 기록된 주의 강림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받고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하기까지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그런데, 인간 역사의 시간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베드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① 먼저는,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들의 시간이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시대에 사람들도 주의 강림 약속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대답을 이렇게 합니다.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들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더디 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무도 멸망을 받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회개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주의 날이 도둑같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는 도둑이 오는 것을 알 듯이 주님을 도둑같이 맞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더디 오실 수 있지만 우리들이 종말신앙을 가져야 세상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는 머지 않아 심판이 있을 것을 아는 종말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유 1:14-15)
에녹이 자기 아들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는데 그의 이름의 뜻이 “그가 죽을 때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을 때 므두셀라가 죽을 때가 되면 세상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65세에 종말신앙을 가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365세에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는데 그가 죽는 해에 홍수가 있었습니다. 에녹이 심판의 말씀을 듣고 므두셀라의 나이 만큼, 969년 후에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지금까지 가장 오래 산 인간이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시작되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계속 지체하신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장 오래 산 것입니다. 여기서도 얼마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연기하고 계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심판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심판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때문에 오랜 기다림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심판도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각자의 심판을 미루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이 회개의 기간인 것입니다.
3. 우리들이 뒤로 물러가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영혼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38-39절).
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뒤로 물러간다는 것은 마치 차가 뒤로 후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후진기어가 없어야 합니다. 오직 전진 뿐입니다. 속도는 늦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믿음, 신앙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고난의 큰 싸움을 싸우고 많은 핍박과 환란 속에서 견디고 인내하며 이루어 놓았는데, 후진하면 이런 것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됩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것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는 “멸망할 자”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기뻐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우셨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습니다 (눅 19:41, 요 11:35)
그리고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눅 10:21).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습 3:17)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퇴하는 것을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침체되어 물러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하나님 기뻐하지 않으시고 슬퍼하십니다. 우신다는 것입니다. “간증: 예수님 지금 울고 있습니다”
<맺는 말>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많은 핍박과 아픔이 따릅니다. 사탄의 공격도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이 듭니다. 믿음의 싸움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아말렉과 대대로 우리와 함께 싸우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출 17:14-16). 그리고 승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그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 생활로 인하여 세상의 것들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주어질 것들은 그것보다 더 낫고 영구한 것들입니다. 잡고자 했던 이 땅의 그것들은 다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위하여 다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가야 합니다. 돌아가면 멸망이 기다립니다.
▶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할 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만 것을 교훈삼아야 합니다.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원어적으로는 본다면, 그녀의 의지를 가지고 계속 돌아보았고, 돌아보자 마자 바로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형, 미완료, 사역형).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그의 마음은 이미 영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소금 기둥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감각이 둔해져 마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연연하여 뒤를 돌아본 결과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을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다면 들에도 머물면 안됩니다.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창 19:17)
롯도 육신적인 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의 눈은 도시의 화려하고 안락하고 쾌락한 곳에 마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는데 그는 소알성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산까지 가다가 죽을까 염려함이라”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도시의 성에서 누릴 수 있는 세상적인 것에 미련이 남아 있어 작지만 소알성으로 가게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큰 성보다는 덜 타락하고 덜 화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들에도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들은 도시와 산의 중간지대입니다.
소알성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롯의 그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는 다시 산으로 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도시에 있어 포도주를 마시고 산에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술 취하여 딸들과 관계를 맺고 영적 비주류인 암몬과 모압족속을 낳는 일들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창 19).
오늘날도 세상의 환란과 유혹이 다가올 때 영적인 산으로 올라가서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하지 않습니다. 소알성의 신앙, 들의 신앙, 뒤를 돌아보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다시 세상으로 도시로 성으로 가서 세상 사람들과 썩여서 세상 물을 마시고 살면 안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신앙의 후퇴를 가져오게 되어 데마나 알렉산더와 같이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신앙의 거룩한 산으로, 큰 산으로, 대산으로 가서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