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배경
오늘 말씀 속에서 바울이라는 사울의 회심 사건은 우리들에게 많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행 13:9)
행 13:7절부터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짐, 사울은 바울의 유대식 이름, 바울은 헬라어 파울루스의 음역, 오늘 말씀은 사울로 전하고자 함.
사울이 구약의 율법적인 지식이 아무리 해박하더라도 어둠이 그의 영의 눈을 가리고 있을 때에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을 하게 되고,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서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가 영적 빛을 체험하게되니까 비록 육신은 빛으로 눈이 멀어 보지 못하게 되었고,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던 눈도 비늘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고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즉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을 하게 됩니다.
사울의 회심되는 방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죄인된 자연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쓰임을 받는 과정의 영적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대하여 말씀을 전한 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가득하다고 창세기 1장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 이 모습은 예수를 믿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되신 성자 예수님과 함께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창 1:2) ① 첫째 날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십니다. 왜요, 흑암이 세상에 가득하니까 세상을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창 1:3), 이 빛은 분명 넷째 날에 창조된 태양빛과 같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고 지난주 말씀드렸습니다.
어둠과 상대되는 개념의 영적인 빛인 것입니다.
② 그리고 혼돈되어 있는 세상을 “나누는 작업”을 통하여 질서 있게 하시는데, 먼저, 빛과 어둠을 나누셨고, 그리고 궁창을 사이에 두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셨고, 바다와 육지를 나누심으로 혼돈한 세상을 질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창 1:4-10). 믿는 자들은 대체로 정리를 잘하는데 하나님의 창조 속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돼지우리처럼 해 놓고 사는 사람치고는 신앙이 좋은 사람 많지 않습니다.
③ 그리고 이제 공허한 곳을 채우시는데, 공허한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나무로 채우고, 하늘 궁창에는 광명체들로 채우고, 하늘에는 나는 새들로, 바다에도 큰 바다 짐승들과 물고기들로 채우시고, 땅에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짐승과 가축을, 땅에 기는 것들로 그 종류대로 채우셨습니다 (창 1: 11-31). 공허한 곳이 다 채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흑암은 빛으로, 혼돈은 질서로, 공허는 채워짐으로 창조사역이 완성된 것입니다.
▶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포함하여 온 세상이 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죄는 모든 것을 흑암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둠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기리게 되었고, 백성들은 흑암에 앉아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 60:2, 마 4:16)
죄로 인하여 다시 세상이 어둠으로 덮혔고, 하나님의 법이 지켜지지 않는 무질서하게 되었고,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물질로는 그 공허한 마음을 다 채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것으로는 아무리 채워도 다 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보따리가 욕심의 보따리입니다.
이제는 공허한 우리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의 것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된 세상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셔서 다시 회복하고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재창조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약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는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보낸 당시 유대총독 빌라도의 편지를 통해서도 증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지금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이런 류의 사람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교회를 잔멸하고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영적인 빛이 없으면 진리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분별이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와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유대 율법의 잣대로 보니 교회공동체는 완전히 이단이요, 예수님은 이단의 괴수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여지없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자기들의 틀, 전통,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렇지 않는 교단에서는 바로 이단으로 정죄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이기도 한 “시기심”도 한 몫합니다. 이단으로 정죄하는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실지 모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라고 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 3:9)
사울이 가진 해박한 율법적 지식이 오히려 사람들을 심판하고 사망으로 몰아 넣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이 따릅니다.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은 전형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구약에만 머물면 초기의 사울처럼 됩니다. 이런 분들은 빨리 예수님에 대한 진리의 눈을 떠야 합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울처럼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런 그가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고후 5:14)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2.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로부터 빛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그에게 비친 빛은 이 땅의 물리적인 빛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온 빛이었습니다.(행 9:3, 22:6, 26:13)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덮고 있던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서 먼저 빛을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볼 수 있고 (3,22:6),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4-6, 22:7-10)
주변에 있던 바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도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빛이 둘러 비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행 22:9, 26:13)
※ 행 9: 9절에서는 이와 반대로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체험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분은 빛을 보았고, 어떤 분은 소리를 듣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사울의 회심은 빛이 비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빛이 임해야 합니다. 빛으로 덮혀 있는 어둠을 몰아내야 예수가 구원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를 믿고 주님을 영접했다면 그에게는 빛이 이미 비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강렬한 빛은 아니지만 하늘의 빛, 영광의 빛이 영접한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임하면 그도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그에게도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후 3:18). 빛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에 계속 잡혀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전도가 잘 안됩니다. 마치 수건이 그이 눈을 가리워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후 고후 3:14). 회심은 빛을 받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빛이 비칠 때에 영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에는 전하는 자가 먼저 빛이 되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울에게 임했던 그 빛이 온 세상을 덮어 수많은 영혼들이 영의 눈을 뜨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사울을 빛을 경험한 후에 육신의 눈은 보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육신의 자아가 죽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사울이 가진 세상적인 스펙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비교할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아가 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천부장과 백성들 앞에서 자기의 세상 스펙에 대해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사도행전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자아를 깨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강렬한 하늘의 빛을 통하여 먼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스스로는 어딘가로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가야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는 젊은 청년으로 육신의 힘이 있고 지식도 갖추었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잡기 위하여 온 예루살렘 성을 다녔고, 급기야 외국의 성 다메섹까지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이 보이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음식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8-9). 그래서 이 기간은 육신이 죽는 기간입니다.
그는 아마 금식하는 사람처럼 힘이 빠져 축 늘어져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눈을 뜨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누워있는 시간은 그의 장사 시간이며 무덤에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3일간 무덤에 계셨고 요나도 3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쓰임 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세상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게 묶여 있는 시간 말입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어쩌면 시작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아나니아를 준비하십니다.
저도 오래동안 저의 영적 “아나니아”를 붙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혼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처럼 제 영의 눈을 뜨게 하고 안수받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한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10)
그리고 직가로 가서 기도 중에 있는 사울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도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할 것과 그로 인하여 보게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11-12).
아나니아가 직가로 갔습니다. 사울을 만나 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기도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17-18).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도 먹고 강건하게 됩니다(18-19)
▶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사는 디아스포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10)
먼저 아나니아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영의 눈을 뜨게 하고, 세례를 베풀어 성령 충만하게 하고, 그들을 제자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 28:19절에 있는 예수님의 유언을 지키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그가 안수하니 눈에 비늘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는데, 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 보지 못한 눈이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영의 눈이 떠졌다는 것입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져야 볼 수 있습니다. 비늘은 보지 못하게 하지만 세상의 것에 유의하지 못하게 하는 좋은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무덤에 들어가 세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의 영적 무덤의 기간 동안에는 비늘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것, 각종 채널 등 우리들의 눈을 잠시도 떼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잠시라도 눈을 감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늘이 일정 기간 동안에는 필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영의 눈을 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 충만해 졌습니다. 그리고 건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영육이 회복되어 진 것입니다.
사역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 사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과 물세례가 같이 갔습니다. 예수님도 물세례 받으시고 나오시면서 바로 성령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 3:13-17, 막 1:9-11, 눅 3:21-22).
고넬료 가정도 성령세례를 받고 바로 물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0:44-48).
물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고백이므로 그들은 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수를 믿는 외적 증거와 교회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표로 물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사람들이 물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세례는 받지 못하는 괴리가 생긴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물세례는 받고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는 현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행 19:2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은 것입니다.
물세례, 성령세례의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 성령론 가지고 엄청나게 교단 간에 다투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성령세례는 다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 다른 쪽에서는 아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다 등등
5. 사울이 빛을 받고 자아가 죽고 영의 눈이 떠지고 성령충만을 하니 즉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4)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순절날에 임한 것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해야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행 1:8)
사울이 구약적 요한의 물세례 차원으로 머물러 있었을 때에는 구약적 사람으로서 핍박자가 되었지만 성령세례를 받으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구원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 3:5)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복음 사역을 위하여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용어 정의와 개념이 달라서 성령에 대한 교리가 다양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물세례를 받고 죄사함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 2:38). 물론 성령세례를 먼저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으심에 따라서 성령을 강하게 받는냐 그렇지 않느냐는 차이는 있습니다.
▶ 성령을 받고 성령이 내 안에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있는 것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반응을 보면 압니다.
죄를 지었는데 마음의 불편함이 있고 답답함이 있어 견디기 어려워 회개할 수 밖에 없다면 그는 성령이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죄 가운데 빠져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성령이 임하지 않았거나 소멸된 상태일 것입니다. 또 그 속에 빛이 있어 진리가 분별되면 성령님이 계신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자는 삶은 진리편에 서고 하나님 편에 서게 됩니다. 성령을 오순절적으로 강력하게 받지 않아도 그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이 사탄이 좋아하는 행동과 언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성령이 아니라 악한 영에 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는 어둠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이므로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방언을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시면 안됩니다. 방언은 은사입니다 (고전 12:10). 그리고 믿는 자의 표적의 하나입니다 (막 16:17). 그러나 성령이 임할 때 방언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성령 받은 자의 증거도 되고 믿는 자라는 표적이 됩니다.
그렇지만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 받지 못해서 지옥간다고 하면 안됩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울이 어떻게 회심을 하고 부름을 받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빛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빛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어둠을 분별하는 빛입니다. 빛이 비추어져야 진리를 알고 회심이 가능합니다.
빛을 받고 자아가 죽어지면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각자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점검하시고 사울처럼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영적 아나니아가 필요한 경우 가까이에 있는 좋은 참된 영적 리더에게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안수할 때 눈이 열려지고 성령 충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울과 같은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