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농사일로 무척 바빴습니다. 논에는 모내기를 하랴, 밭에는 고추며 참깨며 콩 심기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도 저녁때가 되면 사람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나 둘씩 동사무소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하며, 수몰 보상금이 어떻게 지급되는지 등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는데, 도곡의 윗마을 사람들은 윗마을 사람대로, 아랫마을 사람들은 아랫마을 사람대로 수몰로 인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윗동네는 20여 가구밖에 되지 않은 작은 마을입니다.
하지만 아랫마을은 40여 가구나 되는 제법 큰 동네였습니다. 만일 아랫마을이 이사를 가고 나면 윗마을은 아주 작고 외로운 마을이 되고 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랫마을 사람들보다 윗마을 사람들이 걱정을 더 많이 했습니다.
댐이 완공되고 나면 교통도 지금처럼 편리하지는 못할 것이고, 농사지을 땅도 많이 없어지게 될 테니까요. 배 한 척이 지급된다고 하지만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에겐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차를 타려면 새로 나게 될 뒷산길로 한참을 돌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윗마을 사람들은 아랫마을 사람들을 더 부러워했습니다. 그 중에는 이 기회에 거창이나 대구 같은 곳으로 이살 가려고 마음먹은 사람도 있었고요.
동사무소는 자연히 마을 사람들이 아픔을 함께 나누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을 아저씨들은 술로 아픔을 달래기도 했어요.
밤이 깊어지면 술에 취해서 몇 번이고 넋두리처럼 불러 보는 '수몰망향가'라는 민요도 있었습니다. '수몰망향가'는 오래 전 이곳에 댐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였습니다.
수몰망향가
합천이라 봉산면 살기는 좋은데
살기나 좋은 곳은 시샘이 많아서
나는 눈물이 나네 눈물이 나네
합천이라 봉산면 살기도 좋은 곳
합천군 봉산면 니 잘만 있거라
물 좋고 산 좋은 내 고향이지만
불쌍하다 이내 신세
고향도 없구나 고향도 없구나
믿을 데가 없어서 내 못 살겠네
타향 타향 그 곳에서 내 어찌 살려노
타향 타향 그 곳에서 눈물만 나겠네
그리운 내 고향 꽃 피는 내 고향
물 밑에 넣고 내 어이 떠날까
요내야 몸은 거창에나 갈란다
요내야 몸은 거제도 갈란다
내 고향 없어져 슬픔뿐이네
서럽고 서럽다 이내 몸
내 사는 고향을 어이타 어이타 물 밑에 넣노
'알리겠습니다. 알리겠습니다. 도고 주민들께 동사무소에서 알리겠습니다... ...'
느티나무에 매달린 확성기에서 아침 일찍부터 울려 나오는 이장님 목소리였습니다.
'에, 오늘 오후 3시부터 수몰 보상에 관한 마을 회의가 동사무소 앞에서 있을 계획입니다. 면사무소의 여러 직원들과 면장님이 직접 우리 마을을 방문하여 수몰 보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십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나와서 그 동안 궁금했던 수몰 보상에 관한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동사무소에서 알리겠습니다... ...'
마을 회의가 있다는 내용이 확성기를 통해서 몇 번 더 울려 나왔습니다.
'수몰 보상금 지급을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요? 조금이라도 더 받아야 될 긴데.'
아침 준비를 하던 동혁이 어머니가 확성기가 울려 나오는 동사무소 쪽을 바라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보상 위원회가 구성되어 보상 업무를 시작했다 카더라. 아마 보상 위원회에서 주민들의 도움을 얻으려고 면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모양이제. 우리 동네는 영철이 아버지가 주민 대표로 뽑혔는데 잘 해낼지 모르겠다카이.'
'영철이 아버지야 배운 것도 많고 경혐이 풍부하니까 잘 해내겠지예. 영철이네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부자 아닙니꺼. 영철이 아버지는 땅 하나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지는데... ... 보상금 받아 내는 데는 영철이 아버지가 딱 맞겠네예.'
'어차피 여기야 희생을 해야만 하는 곳이라 보상을 잘해 주겠다고는 하는데, 나중에 마을 회의에 나가 봐야 알겠데이.'
학교 갈 준비를 하던 동혁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습니다.
동혁이는 마을 회의 때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는지 궁금했습니다. 수업 시간표를 보았습니다.
마침 수요일은 특별 활동이 있어서 다른 날보다 한 시간 더 일찍 마치는 날입니다. 동혁이는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멀리 느티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확성기 소리도 간혹 들려 왔습니다. 동혁이는 마을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보상금이 많이 나와서 이사를 가는데 도움이 돼야 될 긴데.'
이사 가는 것을 원하지 않던 동혁이도 어머니,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보상금만큼은 많이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느티나무 아래로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들은 넓은 평상과 돗자리가 펼쳐진 그늘진 자리에서 술과 음료수를 들고 계셨고, 마을 아주머니들도 마당 한켠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까르르 웃음바다가 되곤 했습니다.
동사무소 앞에는 탁작가 놓여 있었고, 마이크와 앰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양복 입은 낯선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보였고요.
이윽고 이장님이 탁자 앞으로 나오셔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에,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모이시라고 한 것은 확성기로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수몰 보상에 관한 마을 회의가 곧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에, 그 동안 말로만 있었던 댐에 대한 이야기와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에,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우리의 아픔을 이 자리에서 마음껏 나누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장님의 말씀이 끝나자, 면장님이 댐 공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 이 곳은 우리 조상님들이 삶의 터전을 가꾸어 온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하지만 이 곳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부터 댐 예정지로 정해 놓았던 터라, 오래 전부터 개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낙후 지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면장님께서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이라고 표현될 만큼 정겨운 곳이기도 합니다.우리들이 살아 온 고향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소중한 고향을 댐 건설이라는 국토 종합 개발 계획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댐 건설 사업은 국가 발전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큰 공사로서... ...'
면장님은 댐 공사의 필요성과 건설 과정을 계속해서 설명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면장님이 말씀하시는 내용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면장님요!'
술에 취해 있던 훈범이 아버지가 불쑥 면장님 말씀을 가로막으면서 일어섰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훈범이 아버지 쪽으로 쏠렸습니다.
'면장님 말씀은 조금 어렵지만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겠습니다요. 하지만서도 지금 우리들은 신주 단지를 품에 안고 물 속으로 함께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라예. 고향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곳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들의 고통스런 마음을 알아 주신다면 정신적 보상과 물질적 보상에 대한 말씀부터 먼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더.'
'아따, 그 어르신 성질 되게 급하시네요.'
'하하하하... '
조용했던 회의장이 한바탕 웃음으로 넘쳐났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제 이야기도 곧 그 이야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에, 우리들은 어쨌던 국민 전체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사무친 아픔을 조금이라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첫째는 물질적 보상으로... ...'
면장님의 말씀이 끝난 뒤, 보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보상 위원회에서 나온 분이 하셨습니다. 동혁이는 어려운 내용들이라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보상 문제에 대한 설명이 있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질문은 보상금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보상금을 조금이라도 많이 타 내려고 큰 소리로 따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동혁이도 은근히 보상금을 많이 탈 수 있기를 바랐지만, 보상금 문제만 가지고 싸움하듯이 큰 소리로 따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마을 회의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습니다. 묵묵히 앉아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용목이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면서 일어섰습니다.
'지는예,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일었났습니다. 지는 이 곳에서 태어나고 이 곳에서 자라서 이 곳에서 결혼도 한, 이 지역 토백이입니다예. 하지만서도 지지리 복도 없어서 아들 하나 낳고 남편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는 기라예. 그나마 아들 하나 있는 것도 일 년 전에 집 나가서 어디에 있는고 잘 알지도 못하는기라예... ...'
용목이 어버니의 눈시울이 어느 새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 보던 마을 사람들은 숙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닦고 난 용목이 어머니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 다시 말씀을 이어 갔습니다.
'여기서 대대로 살아 온 우리 조상들의 땅을 물 속에 잠재우고, 무덤마저 물을 피해 이장시키고 나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 갈 것이며, 무슨 용기로 저승에 가서 조상님을 뵙겠습니까예? 다들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타 낼라꼬 그러시는데 참 너무들 하십니다예. 이 곳이 얼매나 정이 든 곳이데... ...
저는 보상금도 필요 없었니다. 마지막 남은 소원이 하나 있는데예. 우리 용목이 좀 찾아 주이소. 우리 용목이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이소. 안 그라만 나도 우리 집과 함께 팍 물 속에 빠져 죽을랍니다! 알것지예. 제발 우리 용목이좀 찾아 주이소.'
용목이 어머니는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치마 속에 묻고 흐느끼고 계십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용목이 어머니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 드립니다.
마을 회의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남아서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동혁이는 마을 회의가 끝난 뒤, 책가방을 집에다 두고 넙득바위로 나왔습니다. 마을 회의 때 용목이 형 어머니 우시는 모습이 동혁이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넙득바위에 닿을 때까지 용목이 형 생각이 동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용목이 형은 분명 서울에 있을 거라고 동혁이는 믿고 있었습니다.
거창에서 공부하는 봉조 누나의 친구인 용목이 형은 운동을 무척 잘 했습니다. 싸움도 누구한테든지 뒤지지 않았습니다.
형은 거창에 있는 실업계 고등 학교에 들어 간 뒤, 2학녀을 마치기도 전에 어디론가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용목이 어머니는 갈 만한 곳을 다 찾아 보았지만, 용목이 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이 몇 번이나 다녀가신 뒤, 학교에서는 용목이 형을 퇴학시켜 버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동혁이는 용목이 형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은근히 봉조 누나를 좋아했는지 남몰래 동혁이에게 시켜서 편지를 건네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용목이 형은 동혁이에게 참 잘 해 주었습니다.
용목이 형도 넙득바위를 좋아했는지 넙득바위에 오랫동안 앉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넙득바위에 앉아 있는 용목이 형 곁으로 동혁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으면
'너는 커서 뭐가 될 끼고?'
하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동혁이에게 갑자기 하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먼 하늘을 오래도록 말없이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서울로 갈 기다. 그 곳에서 열심히 운동해서 세계 챔피언이 될 기다.'
동혁이는 그런 용목이 형이 틀림없이 서울에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동혁이는 용목이 형이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보았습니다.
멀리 덕유산 자락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동혁이는 용목이 형이 꼭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서산마루에서 빛나기 시작한 밝은 맑은 별빛처럼 말입니다.
첫댓글 한 편의 고향이 그려진다..열심히 앍고 있어니까 빠지지말고 올리거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