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악습의 현실과 대안
- 교회악습의 원인, 교회성장주의 비판 -
남오성 목사(일산은혜교회, 개혁연대 협동사무국장)
강의를 들어가며
교회가 욕먹고 있다. 교회재정 횡령, 교인 성추행, 교계 권력 투쟁 등과 관련된 수치스러운 뉴스 없이 한 주가 조용히 지나가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게 다 교회 악습 때문이다. 목사가 가게 개업하듯이 혼자 교회를 개척하고, 목사에게 과도한 권력이 몰리고,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헌금 출납에 대해 감시가 허술하고, 목사와 그 가족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지출되고, 예배당은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짓고, 은퇴한 목사는 원로목사가 되고, 후임 담임목사직은 전임자의 자녀가 세습하거나, 아니면 후임 담임목사에게 일종의 권리금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나쁜 관행들이 판을 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병리현상들이 개별 교회를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결국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교회 악습의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의 죄성인가? 그렇다. 그런데 그 죄성을 억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심 없이 발휘될 수 있도록 만드는 나쁜 교회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이 한국 교회의 생태계에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성장주의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이 네 글자는 아프리카 정글 동물의 세계만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냉혹한 무한경쟁시대 인간 군상들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 또한 정확히 표현한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에게 잡아먹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목회자들은 많은 교인, 큰 건물의 교회를 지향하고, 교인들은 브랜드에 눈멀어 천박한 명품가방 같은 교회를 선호한다. 한국에는 두 종류의 교회 밖에 없단다. 큰 교회, 그리고 커지고 싶은 교회.
이 슬픈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올곧은 남은 자들은 교회론을 고민한다. 과연 교회성장론은 바른 교회론 인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큰 교회가 큰 사명을 감당하는가? 교회는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어떻게 큰 교회를 지향해 왔는가? 교회성장학과 대형교회주의에 담긴 위험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고려해야 할 바른 대안은 무엇인가?
1. 교회론과 전도론
교회성장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인가? 많은 교인, 큰 건물을 목표로 삼는 교회성장론은 전도와 관련 있다. 교회성장주의자들은 전도가 교회의 최우선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전도에 동기부여 할 때 주로 인용되는 두 구절을 살펴보자.
첫째,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과연 이 본문은 양적 성장론을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본문은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를 말할 뿐이다. 어디에도 많은 사람, 큰 건물을 연상하게 하는 구석은 없다. 본문은 제자화, 세례, 교육과 실천과 같은 교회의 사명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한 교회에 대형군중이 몰려드는 상황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둘째, 사도행전 1장 8절을 살펴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교회의 수직적 “성장”이 아닌 수평적 “확산”을 말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혈통적으로, 인종적으로, 사회적으로 교회가 널리 퍼져갈 것을 명하고 있다. 한 교회가 위로 위로 커져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가 옆으로 옆으로 퍼져가는 모습이다.
전도우선주의적 교회론에 대해 존 스토트(John Stott)는 단호히 부정적이다. 그는 「살아있는 교회」(IVP, 2009)에서 예배의 우선성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흔히 교회의 우선적 책임은 전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소한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지 않다.
첫째, 전도는 이웃에 대한 의무라는 표제 밑에서 나온다. 반면에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이웃에 대한 의무에 우선한다.
둘째, 비록 우리가 모두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전도는 또한 일부 사람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 혹은 ‘카리스마’(charisma)다(엡4:11).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도자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적·공적으로 예배자다.
셋째, 전도는 잠정적인 행위로서, 주 예수님이 그분의 왕국을 완성하러 오실 때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41)
소위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자”라 불리는 존 스토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기지 않는다. 의외다 못해 충격적이다. 물론 그가 전도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같은 책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전도의 중요성을 말한다(55~80). 다만 전도는 예배에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바른 교회론은 전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물론 전도는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지만 최우선의 사명은 아니다. 잘 전하기에 앞서 잘 알아야 한다.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금 되어야 하고, 빛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빛 되어야 한다. 온전한 공동체로서의 자기 정체성 정립은 전도의 사명에 우선한다. 전도하기에 앞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큰 교회와 큰 사명
교회의 사명은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실천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선교와 전도의 공동체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큰 교회가 큰 일 한다고들 한다. 과연 큰 사명을 감당하려면 큰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먼저 ‘큰 교회'라는 개념을 향해 문제제기 해보자. 큰 교회란 사람 많은 교회, 화려하고 큰 건물의 교회인가? 이 크기의 개념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세상인가, 성경인가? 우리는 성경적 개념 즉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담아내는 크기 개념을 가져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적 개념으로 보았을 때는 결코 큰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셨다. 높디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디 낮은 여물통에 태어나셨다. 가장 작은 자로서 평생 섬김의 삶을 사시면서, 작은 밀알과 그보다 더 작은 겨자씨를 들어 천국복음을 전하셨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복음을 전하시며, 제자들에게 작은 자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성경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을 ‘크다’ 하는 것은 그 분의 큰 섬김, 큰 희생, 큰 나눔, 큰 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크기 개념은 세상과 다르다. 인간이 크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작다 하시고, 세상이 작다 하는 것이 천국에서는 크게 인정받는다. 하나님께서는 크기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 큰 교회를 기대하는 마음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번영을 꿈꾸는 죄악된 본성이 꿈틀대고 있지는 않나?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그 자리에 혹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갈구하는 더러운 욕망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나?
3. 교회성장주의의 역사
처음부터 교회는 큰 교회를 지향해 왔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초대교회에서는 교회성장론을 발견 할 수 없다. 우선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세례 받은 3000명의 신도들이 큰 건물을 짓고 한 교회에 모여 예배 드렸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2:41).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았기에 교회 성장 따위를 생각할 수 없었다.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중세기까지는 교회성장은 떠올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기독교는 국가종교였고, 모든 사회구성원은 기독교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유아세례 받지 않은 갓난아기 외에는 불신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교구제로 관리되었기에 수평이동은 생각할 수 없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중 1500년 동안에는 교회성장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전도대상자가 없으니 전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교회성장론은 전도대상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교회의 시대’ 중세가 막을 내리고 ‘이성의 시대’ 근대가 열리면서 기독교는 수세에 몰린다.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내쫓은 시대에 대해 교회는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했다. 첫째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기독교의 내용과 형식을 수정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오히려 더욱더 강고히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며 시대에 저항한 방식이다. 전자는 시대에 흡수되고 후자는 시대로부터 고립되어, 결국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교회는 양적 위기를 겪는다. 교회로부터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이탈한 교회 밖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 즉 불신자가 발생한 것이다. 교회로 품어야 할 대상 즉 전도대상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부흥운동이라 불리는 전도운동이다.
18세기 부흥운동으로 인해 교회는 양적성장에 눈을 뜨게 된다. 전도 대상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그들 사이로 들어가 전도 집회를 열었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얼마나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느냐로, 하나님의 역사와 개인 전도사의 능력이 판단하는 시대가 열렸다. 때로는 규모와 인원을 과장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영혼구원’이라는 구호 앞에 교구제도 무너졌다. 교단은 쪼개졌고, 교회는 다양해 졌다. 드디어 교회선택의 여지가 생긴 것이다. 교회가 시장경쟁의 논리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19세기 부흥운동시대에 들어 전도를 위한 보다 정교한 방법들이 등장한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는 더 세련된 장치들을 이용하여 부흥에 접근하였다. 편리한 환경, 감정을 울리는 음악, 화려한 이벤트, 부흥사의 쇼맨십, 틀에 깨는 설교 등이 그 현상이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로 이어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회심한 조직 폭력배 등을 간증자로 세워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성주의의 등장뿐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서도 전도대상자들은 발견되었다. 유럽인들은 평면지구론의 포기와 항해술의 발전으로 인해 세상에는 전도해야 할 불신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가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선교반대론자들을 설득시켜야 했고, 이에 사용된 성경적 근거가 바로 이미 살펴본 마태복음 28장 18~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을 근거로 한 선교지상명령론이다. 이 이론의 설득력은 커서 이미 살펴 본대로 기독교 교회론의 우선적 위치를 차지하는 냥 오해 받기도 하는 것이다.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은 교회성장학을 탄생시켰다. 그 시조격인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은 교회를 향해 새로운 목표를 제공했다. 부흥운동의 목표는 ‘영혼구원’이었고, ‘선교운동’의 목표는 ‘세계복음화’이었다면, 맥가브란이 교회에 제시한 목표는 ‘교회성장’이다. 그는 전도와 복음화의 결과는 구체적으로 측정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복음의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그 결실을 추수하여 도표화, 수치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맥가브란의 사상은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를 통해 ‘교회성장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와그너는 비영리 기관으로서의 교회 또한 경영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전도를 위한 모든 노력은 수적 결과로 나타나야만 했다. 건강한 교회라면 자동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보았기에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죽었거나 병든 교회요, 성장시키지 못하는 목사는 무능력자로 간주되었다.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은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인데, 그는 ‘긍정적인 사고’라는 이름으로 목회자와 성도의 세속적 야심을 합리화시켰다. 그는 노골적으로 교회를 비즈니스와 연결시켜, 장사 잘 하는 방법을 들여다가 교회성장학에 덧붙였다.
4.대형교회주의와 소형교회주의
비만은 건강에 해롭고, 체중조절은 건강유지에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성장학에 현혹되어 큰 교회를 지향하는 대형교회주의를 따르다 보면 교회의 건강성에 위험이 닥치기에, 교회의 사이즈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다이어트 즉 소형교회주의가 필요하다. 왜 그러한가?
첫째, 대형교회주의는 ‘영적 소비자주의’를 조장하기에 위험하다. 대형교회를 지향하게 되면, 교회는 상품이 되고 교인은 소비자가 된다. 교회라는 상품은 소비자에게 선택되기 위해 노력한다. 편리한 시설과 쾌적한 환경뿐만 아니라 소비자 기호에 맞춘 예배와 설교를 제공한다. 예배당은 좌석이나 스크린뿐만 아니라 그 본질상 극장을 닮아 간다. 헌금으로 티켓을 사고 들어와 설교라는 공연을 말 그대로 ‘보는’ 것이다. 예배의 중심은 더 이상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는 교인’에게 맞춰진다. 설교도 그렇다. 듣기 좋은 설교가 잘 팔린다. 구약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껄끄러운 예언서보다는 ‘이지리스닝’에 적합한 시편 23편이 베스트셀러다. 잘 팔리는 설교가 가치 있다. 또한 이웃교회는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쟁업체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대형교회에서는 예배가 무너지고, 말씀은 왜곡되고, 교회는 본질을 상실한다.
반면 작은 교회에서는 이런 위험성에서 보다 자유롭다. 커지지 위한 목적을 갖고 있지 않기에 교회는 교회다울 수 있다. 교회는 본질상 세상과 구별된다. 예배는 불편할 수 있고, 설교가 거북할 수 있다. 물론 청중을 위해 적절한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하지만, 내용이 훼손될 필요는 없다.
둘째, 대형교회에서는 공동체성이 훼손된다. 대형교회는 익명성을 보장한다. 귀찮게 하지 않는다. 교회는 주일날 예배 보러 몰려드는 군중들의 집단이 된다. 성도 간에 진실하고 친밀한 교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목사님과의 개인적 접촉은 꿈도 못 꾼다. 담임목사실은 감춰져 있고, 목사님은 이미 범접하기 힘든 높디높은 분이시다. 목자를 자임하는 자가 자기 양된 성도들은커녕 직분 맡은 집사들의 이름도 못 외운다면, 아니 외울 수 없는 구조라면, 이게 교회인가?
작은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가족과 같은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하고, 목사와의 영적 스킨십이 이루어진다. 목사는 성도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 진정한 교제와 나눔과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큰 교회보다는 작은 교회가 더 유리하다.
셋째, 대형교회는 민주적 교회운영이 불가능하기에 위험하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다. 어떠한 한 인간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교회에서 목사독재체제는 우상숭배로 직결된다. 하나님의 뜻은 목사 개인의 뜻이 아닌 성도의 뜻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성도들의 의견을 묻고 듣는 공동의회 하나 제대로 여는 것이 대형교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소수자의 작은 음성에 귀 기울이신 예수님의 방법을 적용하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 하다면 교회라 부르기 곤란하다.
작은 교회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교회의 작은 일 하나하나 교인들의 토론을 통해 처리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쉽지 만은 않다. 불편함과 어려움도 있겠지만, 이는 목사 독재가 가져다주는 부작용보다는 덜 위험하다.
넷째, 대형교회는 교회의 역동성이 훼손되기에 위험하다. 교회는 대안 공동체다. 마치 물살을 차고 오르는 연어처럼 죄악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야지, 죽은 고래처럼 세속의 파도에 휩쓸러 가서는 안 된다. 교회가 커져서 관리해야 할 건물과 주차장이 많아져서 챙길 기득권이 커버리면, 목회자는 예언자적 설교를 하기 힘들어지고 교회 구조는 세상의 올바른 변화를 선도하기 곤란해진다.
가진 게 많지 않은 작은 교회는 잃을 것도 많지 않기에 세상 유혹으로부터 훨씬 자유롭다. 혹자는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 생계를 걱정한다. 그렇다. 이는 힘든 문제이다. 허나 욕심을 버리면 부담감은 훨씬 적어진다. 낡은 집과 후진 차에 감사하고, 사교육과 명문대가 결코 궁극적으로 자녀의 행복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실천하면 된다. 어차피 부자가 되려고 목사가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교인으로서 헌금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30명만 있으면, 교회사역과 목회자생계유지에 재정적인 지장은 없다는 함께여는교회 방인성 목사의 경험담이 작은 교회에도 전하는 이에게 도움이 되기 바란다.
물론 소형 교회가 대형 교회보다 항상 건강하지는 않다. 다만 소형교회가 대형교회보다는 교회의 본질을 지키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크기가 작더라도 그 안에 성령의 임재와 사랑의 역사가 없다면 이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거인증이란 병이 있다. 성장 호르몬이 과잉 분비되어 키가 비정상적으로 자라는 병인데, 잘못하면 일찍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거인증에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들보다 키가 좀 작은 건 괜찮지만, 너무 커 버려서 일찍 곁을 떠나는 것은 절대 원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교회가 거인증에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수년간 인원이 늘지 않는 건 그럴 수 있지만, 너무 커 버려서 급기야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지경에 이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는 성장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뜨내기 교인을 걸러 내고 수평 이동을 막는 일도 필요하지만, 또한 중요한 것은 늘어나는 회심자를 흩어 내는 문제이다. 교회를 떼어 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거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는 안 커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맺는 말
교회성장론은 예수님의 명령보다는 바벨탑이야기와 더 닮았다(창11:1~9). 교회를 크게 하여 그 브랜드 가치를 높여 자기 “이름을 내고”, 잘게 널리 “흩어짐을 면하자”는 모습은 대형교회와 닮았다. 결국 대형교회는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인간의 세속주의가 교회에 스며든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지면에 흩으”실 것이며, 결국 실패할 것이다.
이상으로 교회악습의 원인이 되는 교회성장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지적했다. 한국교회를 물들이고 있는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에 머무르고 있는 한 교회 악습은 계속 될 것이다. 커다란 건물 규모와 교인 수와 헌금 수입을 유지하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몰상식적인 작태들은 앞으로 여전할 것이다.
이제 곧 성탄절이다. 한국의 교회들이 예수님께서 낮고 낮은 마굿간 여물통에 탄생하시어, 천하디 천한 세리 창기들과 어울리시면서, 머리 뉘일 곳도 없이 살다가, 자기 무덤도 없이 돌아가신 의미를 되새기는 이 겨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