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죽도성당과 공소들- 흥해, 청하, 송라
흥해 지역 공소의 변천사
세례자와 주소지 중에 첫 세례자인 정 빈첸시오의 주소지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1946년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조 베드로 세례 장소가 용천동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용천동이 구 교우의 집인지 정 빈첸시오의 집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신부님이 용천동에서 세례를 집전했다는 사실은 흥해 공소의 첫 출발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죽도 성당이 1950년 본당으로 출발하였지만 한국 전쟁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성당은 파괴되어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안정을 찾은 1953년 흥해 지역도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죽도 세례 대장을 근거로 흥해와 청하 , 송라지역으로 나누어 정리하여 보았다.
1) 흥해 옥성리 공소
1953년 2명의 성인 세례에 이어 1960년까지 유아와 성인의 세례는 이어져 과거의 구 교우들까지 합치면 공소 예절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공소 활동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1961년 12월 24일 죽도 성당에서 흥해 옥성리 53-10번지를 흥해 공소 주소지로 하여 모일환 요셉(1896년생)의 세례로 시작된 옥성리 공소는 1962년 8월 14일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세례를 받고 본집은 흥해 공소로 제공되어 두 번째 흥해 공소의 중심 역할을 하였는데 모 요셉의 부인인 배 마리아가 세례 대장에 없는 것으로 보아 구교우 일 것이고 배 마리아의 권유로 모두가 신앙 가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해 복지 회관 뒤의 옥성리 공소는 1960년대 죽도 성당의 안 베드로 신부님의 공소 순방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교세 통계표가 없어 집회에 관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1970년 죽도성당 제6대 김영환 베네딕도 신부님의 흥해공소 방문 회고록
– 죽도성당 50년사 발췌
( 맥주 대접을 받았는데 비싸 먹지 않고 막걸리를 먹은 이야기 )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본당 수녀님이 찾아와서 “신부님, 술 잡숫지 마세요.” 라고 정중하게 권고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전임 신부는 맥주밖에 안 마시기 때문에 공소 나간 신부를 대접하기 위해 맥주를 사 준다는 것이다. 그때 맥주 값이 200원, 혼자서 대여섯 병을 마시면 그것 만해도 1,000원이다. 나중에 몇 명 되지 않는 신자들이 부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썽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좋은 술이 맥주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술을 못한다고 딱 잡아뗐다. 그런데 한번은 흥해 공소에 갔을 때 안 마신다고 했는데도 맥주를 두 병이나 사왔다. 그래서 나는 못 마시니 여러분들이 마시라 사양했더니 “이런 비싼 술을 우리가 어떻게 마십니까, 갖다가 물러야죠” 맥주는 한쪽으로 치우고 주전자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한 대접씩 마시는데 보니까 막걸리가 아닌가.
그래서 그게 뭐냐고 능청을 떨었더니 “이거 농주인데 못 마십니더” 하기에 한 번 맛을 보자고 한 잔을 가득히 받아 마셔보니 술맛이 기가 찼다. 단숨에 한 대접을 비우니까. “술 못 하신다더니 우째” 하며 옆에서 보던 수녀님이 킥 웃는다. 그래서 이런 막걸리는 어려서 집에 일꾼들이 마시는 데서 조금 얻어 먹어봤다고 또 능청을 부렸다. 그때 신자들이 속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이왕 내친 김에 두 잔을 얻어 마셨다. 예수님! 죄송해요.
옥성리 흥해 공소의 증언
흥해 옥성리 공소 (1981년) 김영애 벨라뎃다 자매님
정말 오래된 일이네요. ~
1981년 저는 덕수성당 어르신 레지오(신비로운 장미 Pr) 서기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 흥해 지역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심하신 모일환 요셉 할아버지와 배 마리아 할머니 부부를 만났습니다. 대화 중에 두 분께 흥해에도 공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선뜻 우리 집을 공소로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덕수성당 흥해공소” 세로 간판을 대문 오른쪽에 부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린이 교리반을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그 학부모들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습니다. 덕수성당 신부님이 매주 일요일 오후에 미사를 집전해 주셔서 청하 신자들도 흥해공소에서 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일반신자와 예비신자가 30여명 정도로 늘어나 작은 방에서 미사를 할 수 없어서, 덕수본당으로 이동하여 교리와 미사 참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년쯤 지나고 망천동 공소가 생겼습니다.
모일환 요셉 할아버지는 여동생을 논 세마지기 팔아서 수녀원 보낸 것을 가끔 자랑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시간이 지나 모일환 요셉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부인이신 배 마리아 할머니가 자녀들과 조문객들에게 아무도 울지 말라고 하시며 “청사초롱 불밝혀라 내 낭군 하늘 나라 들어간다”고 하시며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모습도 생각이 납니다.
두 분은 정말 신앙이 깊으시며 인자하신 분이셨습니다.
1981년 6월 14일부터 덕수 본당 초대 김문순(끌레멘스)신부님이 매주 일요일에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셨고 김영애(벨라뎃다)의 지도로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덕수 본당 자료에 의하면 1983년말 등록 흥해 교우수가 19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 전에는 기록이 없어서 초기에 몇 명으로 출발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망천리 공소의 추억
홍숙경 모니카
1979년 흥해로 이사를 오면서 흥해 공소를 알게 되었고 덕수 성당이 신설되어 주일미사는 덕수 성당으로 나가게 되었다.
당시 흥해 공소는 현재의 복지회관 남쪽 배나무 식당 뒤 함석지붕 3칸집의 작은방을 공소 건물로 사용하면서 김영애 벨라뎃다 자매님이 교리 봉사 활동을 하였고 건물이 비좁고 교우들은 늘어나는 상황에서 걱정을 하던차 1984년 이성한 베르나르도 신부님의 도움과 덕수 성당 이재명 바오로 신부님이 망천동 939번지 500평 대지에 50평 기와집을 공소로 구입해 주셔서 공소는 발전 할 수 있었다.
1986년 12월 19일 흥해 지역에 애덕의 모후 레지오를 창단하면서 초대 단장을 맡게 되었고 흥해 지역 레지오의 출발이 되었다. 모임이 있는 날 이성한 베르나르도 신부님이 가끔 오셔서 레지오 훈화를 해 주시는 날은 단원들 모두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곤 했으나 2003년 해체되니 안타까운 마음의 눈물만 흘렸습니다.
1988년 덕수성당 4대 조환길 타대오 신부님께서 부임하시고 공소를 찾아 오시어 교우들 가정을 전부 방문하시면서 가정 축복을 해 주셨을 때 좁은 방에 무릎을 펼 수가 없어 무릎을 마주 세우고 교우들을 위로해 주시는 신부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9년 이양치 스테파노 형제님이 공소 회장 겸 구역장으로 오시고 내가 1반 반장 김단선 안나가 2반장으로 임명되니 교우들의 도움과 모두의 노력으로 공소는 안정 될 수가 있었다. 구역장이신 이 스테파노 님 가족이 공소 건물로 주소를 이전하고 이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장 베드로 가족이 기거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배 디모테오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이후 주일학교가 활성화 되면서 장 베드로 가족은 공소를 떠나게 되었으며 교우들의 수가 늘어나자 이성한 베르나르도 신부님이 흥해 본당 초대 주임신부님으로 오셨을 때의 감동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공소시절 함께 도움과 애환을 한 잊을 수 없는 교우들 이름을 남겨 봅니다.
공소 회장인 이양치 스테파노 부부를 시작으로 박근출 안드레아, 이상호 시몬, 김승환 프란치스코, 심진석 요셉, 김석주 야곱, 배성한 디모테오 부부들
덕수 본당 이재명(바오로)신부님께서 1984년 12월 9일 망천동 939번지 대지 500평 건평 50평짜리 새로운 공소를 구입해 주시고 등록 교우가 24명에서 47명으로 늘어났으며 85년 7월 14일 집수리를 하여 공소로서의 모습을 정비하고 8월 15일 흥해 공소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1986년 9월 3일에는 덕수 본당 주관으로 흥해 공소 피정 활동을 하였다.
1989년 5월 30일 이양치(스테파노)씨가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흥해 지역의 아파트건설 공사가 시작되고 전입자가 늘어나자 90년말 교우들도 122명에서 92년도에 228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공소 미사 예절에 참여하는 인원은 20명 내외로 저조하였으며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는 50여명 정도였는데 이는 대부분의 등록 교우들이 죽도나 덕수 본당에서 미사를 바치는 것으로 공소에서의 미사예절에는 한계가 있었다.
1993년 11월 15일자로 장성 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공소 관할권이 장성 본당으로 넘어갔으나 94년 전입 교우들의 증가로 8월 26일 흥해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등록 교우가 722명으로 늘어났다.
김석주 야곱, 배성한 디모테오씨 (망천리 공소 증언)
망천리 공소 시절 ‘일치의 모후’가 창단되었는데 이양치 스테파노, 이상호 시몬, 이동필 요아킴, 심진석 요셉, 김승환 프란치스코, 박 마테오가 그 일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애덕의 모후’가 먼저 있었으나 후에 없어졌다. 이양치 스테파노가 사목회 부의장으로 활동을 가장 많이 하였다. 유일광 요셉은 평협회장으로 망천리 공소가 흥해 본당이 되고 난 뒤에 대해본당에서 이사 온 경우이다.
흥해 본당으로 승격 후 사회분과 위원장으로는 김석주 야곱이 맡아 사회복지, 위령회, 환경분야 까지 모두 맡아 하였다. 후에 위령회는 이상호 시몬이 맡게 되었다. 신자 중에 초상이 나면 시신 수습까지 장의사 자격도 없는 위령회원들이 하다보니 술의 힘이 아니면 안 될 정도로 힘들었고 실질적인 이익은 장의 업체를 운영하던 원 요셉에게 돌아갔다.
망천동 공소 건물이 오래된 기와집인데 비가 새는 열악한 환경이 있다. 초기 주일 학교 인원이 20 여명 (연말에는 40여명)이었는데 첫 영성체 반이 덕수성당으로 다닐 때 김석주 야곱이 봉고 차량으로 봉사를 하였다. 달전 검문소 통과 시 정원초과 단속을 피하려고 검문소 전에 일부는 내려 걸어가게 하고 통과 후 다시 태워가야 하는 어려움까지 있었으며, 제반 비용은 교리 봉사자들의 몫이었다.
서두원 초곡 공소회장의 이야기로는 김석주 야곱 형제가 운영하는 로타리 슈퍼에 초곡 나환자들이 물건을 사러 온다고 흥해 읍내 주민들이 찾아오지 않았던 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망천리 공소가 덕수성당에서 장성성당으로 이관된 후 망천리 공소로 장성성당 신부님이 오셔서 매주 미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공소 예절만 하였다. 공소 시절 사용하던 촛대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망천리 공소 시절 비신자의 자녀들이 많다 보니 자녀가 첫영성체 반에 들게 되면서 자연스레 비신자인 그 부모님들도 많이 세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주일 신앙학교는 처음에는 비학 초등학교와 기계 단구 초등학교를 이용하였고, 덕수본당의 지원은 전혀 없어서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하였다.
본당 초기 시절 옥성리 성당 부지 구입은 장만석씨를 통해 평당 40만원에 부지 일부를 구입하였고, 강당 주변의 땅까지 합쳐서 구입하였다.
흥해 망천리 공소 초대회장 이양치스테파노 형제님을 추모하며 — 류성호 유스티노
제가 이양치 스테파노 형제님을 만난 것은 2010년 4월 은총의샘pr에 입단 한 후 몸이 불편하셔서 장기유고로 집에 계시는 형제님을 병문안하면서 인사하게 되었다. 초로에 머리가 하얗게 서리가 내렸지만 병중에 계시면서도 눈빛은 살아 있고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만 말씀마다 여운을 남기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파서 성당에 못나가니 항상 허전함을 느낀다고 말씀하시며 한숨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죽도성당에 다니면서 육일택시 기사로 재직하던 중 신부님의 권유로 흥해공소에 거주하면서 흥해공소 운영을 위탁받아 흥해에 왔으나 공소에는 장만석 베드로 가족이 살고 있어서 입주를 하지 못하고 배 디모테오 형제님 아래채에 세들어 살게 되었다.
1989년 5월30일 덕수성당 흥해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어 회사일보다는 공소일이 우선이 되었고 운전기사들의 모임인 윤일회에 봉사하는 등 가정생활을 소흘하게 하다보니 자매님과 가족들이 힘든 생활을 하였다. 본당이 설립이 되고 나서 택시회사의 부도로 실직상태가 되었으나 개인택시 면허가 나와서 생계에 도움이 되는 듯 하였으나 성당일이 우선이다 보니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으며 교구청에 본당건축기금 지원을 받는데 힘을 써 1억원을 얻어 오기도 하였다.
또한 연령회장으로서 초상이 나면 상갓집에서 굿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을 만큼 열정을 다 하였었다. 본당 건립 때는 주택은행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200만원을 봉헌하기도 하였다.
그후 건강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지만 이미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절망하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삼사일 전 병문안을 가보니 제 손을 꼭 잡고 하시는 말씀이 나를 위한 단원들의 기도소리가 귓가에 들린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 형제님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 청하 공소
청하 지역은 1812년 김 프란치스코가 태중 교우로 태어나 우리 신앙인의 모범적인 삶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으나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교세는 발전할 수가 없으며 상황에 따라 피신하는 생활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곳 청하와 송라 지역은 교통의 오지 인지라 문화의 전파도 늦어 1926년 경주성당 설립 이후 한국 전쟁이 진행 중인 1950년 8월 14일 청하면 미남리에 주소를 둔 정 아오스딩은 박 야고보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아 청하 지역의 첫 세례자가 된다. 이후 1959년 김호현 라파엘과 이정희 안나 부부의 노력으로 청하 공소가 설립되고 죽도성당 안 신부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발전하였다.
청하공소의 증언 자료
청하공소가 설립 된 것은 1959년 5월 5일이다.
이정희 안나 할머니(90세)의 남편 이셨던 김호현 라파엘 회장님은 천주교에 입교하고 싶었는데 포항 성당까지 갈려면 정말 큰맘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즘은 30 분이면 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당시에는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힘이 들었다. 그래서 김 라파엘 회장님은 포항 성당(현 죽도성당)의 안덕화 베드로 신부님(프랑스 외방 선교회 신부님)을 찾아가 상의 드린 후 청하에 공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때부터 준비에 들어가 청하 면민에게 안내장을 보내고 1959년 5월 5일 청하 초등학교에 몰려온 많은 사람들에게 청하에도 ‘포항 성당 청하공소’가 설립되었음을 알렸다.
공소 건물이 없던 관계로 안나 할머니 댁에 포항 성당 하상일 빠스칼 전교회장을 상주시키며 공소 예절을 주재하셨으며 아침저녁으로 교리를 가르쳤고, 성가는 초등학교 교사 한분으로부터 아코디언으로 배웠다.
신부님께서 매달 수녀님을 동반하셔서 미사를 집전을 하셨고 예비 신자들이 많아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드릴 땐 마당이 꽉 채워졌었다고 한다.
1959년 8월 15일, 신부님께서 안나 할머니 가족 모두에게 청하에서 처음으로 영세를 주셨다. 그후 12월 성탄 때에 십여 명이 영세를 받았다.
신부님은 주말마다 죽도 성당 원수희 베드로 회장과 수녀님을 동반하여, 어떤 때는 복사까지 데려와서 저녁 미사부터 시작해서 아침 미사까지 드리고 가셨다.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1962년 청하공소는 대지 215 평에 방 네 칸의 기와집을 사들여 개조하여 그해 11월경 공소 축성식을 가졌다. 라파엘 회장님은 안동에서 주교님을 모시고 와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공소 건물이 생기면서 전교 회장으로 하 바오로, 김 엘리사벳 부부를 공소에 상주시켜 신자들을 관리하게 하였고, 주교님께서 견진성사, 안 신부님께서 혼배성사를 주관하였으며, 어떤 해에는 청하 초등학교에서 야외 미사도 드렸다.
1959년 5월부터 1969년 8월 5일, 안 신부님이 떠나실 때가지 10 년간 눈물겨운 추억들이 많았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듯 신자들은 직장을 찾아 혹은 결혼을 하여 청하를 떠났으며 멀리는 하와이까지 날아가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그 후 하상일 전교 회장도 구룡포 성당으로 떠나갔다.
1978년 덕수 성당이 설립되어 청하 공소는 덕수 성당으로 옮기게 된다. 김 라파엘 회장님은 1980년 2월에 돌아가기 직전 “공소의 맥이 이이지고 본당이 설립되도록 열심히 기도를 드려라. 나는 저 세상에 가서도 열심히 돕겠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 라파엘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그러던 중 덕수 성당 초대 김문순 신부님으로부터 청하 공소 부지가 향교로 보전등기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안나 할머니 혼자서 공소를 되찾기 위해 향교 재단, 법률사무소, 대구 법원을 찾아다녔다. 동네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김 신부님에 이어 조환길 신부님에 이르기까지 수차 호소하였다. 1988년 조환길 신부님께 공소를 꼭 찾아야 된다고 다시 말씀드리며 증빙 자료와 함께 신부님의 도움으로 대구 교구 사목 관리 과장을 찾아갔다. 총대리 신부님을 뵙고 서류를 제출하여 법원에 소송을 냈다. 향교 재단에서 쉽게 동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을 하여 결국은 승소를 하였다. 이렇게 되찾은 공소를 덕수 성당에 다시 기증하셨다.
재판에 승소한 후 건물을 헐어버리고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조환길 신부님이 신자들을 동원하여 철거를 했다. 조 신부님이 떠나고 황주철 신부님이 와서 조립식 건물을 설계하여 신청을 냈지만 규제에 묶여 무산되고 말았다.
또다시 공소 신자들의 뜻을 모아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였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텃밭으로 쓰고 있다.
결국 안나 할머니 집에서 예비자 교리를 실시 하였다. 1987년 원종한 요셉씨를 초청하여 교리를 가르쳐 세 차례나 영세를 시켰다. 이 때 학생 교리도 시작하였다. 교리 교사로는 카타리나, 안젤라, 헬레나 자매님 등이 수고하였다.
황주철 신부님이 병환으로 요양차 떠나신 후 권혁시 모세 신부님이 오시면서 청하 공소는 덕수 성당에서 장성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 후 또다시 흥해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 후 흥해 성당 이성한 신부님과 함께 공소 신자들도 열심히 성전 건립에 많은 봉헌을 하였다. 신부님께서 공소 부지 (장차 청하 본당 예정지)를 보러 다녔지만 IMF 여파로 어려워졌다.
이성한 신부님께서 가시고 김철재 신부님 지금의 공소 건물이 들어선 이곳을 매입하셨다.
공소 건물이 없던 관계로 매달 반 모임이나 구역 미사를 드릴 장소가 마땅하지 않아서 늘 애를 먹었다. 신자들이 반 모임 때마다 조금씩 기금을 마련하며, 공소 부지에 감자, 고구마, 고추, 배추 농사도 짓고 조금씩 저축도 하며 장차 공소 건물을 지을 생각에 모두들 열심이었다.
김철재 신부님이 가시고 오창수 신부님께서 부임하셔서 청하 공소 건물을 짓기로 하셨다. 신자들은 기쁨에 넘쳐 성전 건립 기금을 마련하였다. 그 후 손종현 신부님께서 새로 부임하시고 공소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오창수 신부님께서 50평을 짓겠다고 하셨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30평으로 결론이 났다. 신자들이 간절히 청원하여 지금의 40평 공소 건물이 지어지게 되었다.
공소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는 10 평 남짓한 컨테이너에서 여름엔 초가 휘어지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겨울엔 담요 몇 장에 의지한 채 촛불을 켜고 레지오 회합을 가지기도 했던 추억이 있다.
공소가 지어지기 전에 사제관이 먼저 지어지고 권혁시 신부님께서 공소에 기거 하시면서 컨테이너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컨테이너에 40여 명이 포개어 앉아 혹은 문 밖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2007년 11월 3일 조환길 부주교님을 모시고 청하 공소 축성식을 하였다. 공소 가족들의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년이 지나서 지금은 은퇴하신 조정현 바드리시오 주교 대리 신부님께서 저희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렇게도 바라던 매일 미사를 함께 봉헌하고 있다.
청하 공소 신자 수는 교적상 200 명 정도 된다. 현재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인원은 60 명 내외로 경당과 대화방까지 꽉 채워질 때가 많다.
현재 3 개의 레지오와 3 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입 교우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목요일 오후 8시에 교리반을 운영, 세 분이 교리를 받고 있다.
대구 대교구 최 변방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청하 본당이 설립 될 것을 바라며 사랑의 공동체로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공소이지만 신부님을 모시고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은 어느 본당 부럽지 않게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불편한 교통 관계와 여러 사정으로 쉬는 교우가 많습니다. 공소가 풀어야할 숙제 입니다.
청하 공소의 역사는 51 년이나 됩니다. 앞서 고생하신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정희 안나 할머니(2 대 공소 회장)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죽도 성당 60년사에 기록된 이정희 안나 할머니의 회고록을 참고하였습니다.)
3) 송라 공소
송라 지역은 1952년 첫 세례자가 있었으며 1958년 9월 14일에 설립된 송라 공소는 공소회장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으나 공소회장의 이거로 인하여 구심점이 상실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어 지금은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장차 동해안이 관광 산업의 발달로 송라 지역의 인구와 세력이 늘어나고 청하 지역과 함께 교세를 확장한다면 청하 본당도 설립이 가능할 것이다.
12. 덕수성당과 공소들 – 초곡, 신광
1) 초곡 공소
1953년 대송면 제내리에 있는 베다니아 요양원에서 18세대가 천주교의 지원으로 재활 교육과 신앙교육을 받고 생활하던 중 정부의 배려로 현재의 초곡리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그 후 남 루이델랑드 신부님이 설립한 성모 자애원이 후원단체가 되어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으며 길 신부님이 1964년 8월 12일 군막사용 천막을 지어 공소가 설립되고 24명의 영세자로 출발하면서 식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79년 3월 1일 예수성심 시녀회의 관할권이 덕수 본당으로 40세대 150명의 신자가 이관되었다.
1981년 4월 12일 16명이 이 비오 교리교사의 지도로 세례를 받고 82년도 24명 세례로 200여 교우가 집회할 장소가 없어 83년 8월 6일 대지 200평 건평 100평의 2층 공소 건물 기공식을 하였고 그해 말에 준공되었다. 당시의 건축 공법은 불편한 몸인데도 순수한 인력만으로 집터를 고르고 건물을 세우며 축산업과 신앙생활을 함께 영위해 나갔던 것이다.
대구(수성구)에 있는 성당의 배치도를 보고 그와 비슷하게 설계하여 준공한 건물이 초곡 공소로 태어나게 되었다.
당시 덕수 본당에서 많은 지원과 교리 교육 등으로 65세대 교우들이 미사 예절 때 자리가 부족하여 서서 미사에 참여할 정도가 되었다. 그 후 정부 지원금 문제로 성모 자애원과 충돌도 있었으나 1991년도에 시작한 건설업체의 토지 매입으로 주민이주 계획이 실시되어 영덕 신애원 6세대, 성곡리 10세대, 경주 희망농원 6세대, 기타 전국각지로 흩어지니 1995년 공소건물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1964년에서 40여 년 간 계속되어온 초곡 공소 교우들은 50~60대에 질병으로 많이 돌아가시고 2018년 현재 흥해성당 등록 교우는 몇 안 되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초곡 공소에 대한 증언
공소회장 안달원 라파엘
1953년 영일군 대송면 송정리에 파리외방전교회 남 루이델랑트 신부님이 예수성심수녀원을 설립하고 활동하던 중 남 신부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파리외방전교회 오스트리아의 길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오신 후에 1958년 수녀님들과 8명의신자를 대송면 괴동동 한적한 곳에 살게 하고 수녀님들이 교리를 지도했다. 그후 정부에서 정착사업을 시작하면서 1964년 8월 12일 영일군 흥해읍 초곡리에 해병대 군인들의 협조로 24인용 천막을 설치하고 베타니아공소로 명명하고 출발했다. 6,25후에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생활이었지만 믿음의 열기는 대단하여 수녀님들이 320문항을 작성하여 일대일 교리를 시작하면서 빠르게 공소가 안정되고 발전하여 초대공소회장(안달원 라파엘)이 선출되고 매일 아침기도 삼종기도 저녁기도를 바치고 한 달에 두 번의 미사를 할 수가 있었다. 차츰 신자들이 불어나니 공소가 좁아서 어려움도 많았다. 어려운 가운데 주민들은 집도 지어야 하고 축산업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던 중 1979년 개신교 단체가 초곡동에 교회건물을 짓는다는 계획과 함께 지역주민들을 양분시키는 일이 일어나자 예수성심시녀회 소속 베타니아공소 신자들과 주민들 230명 정도와의 소요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수녀원 땅과 주민들이 매입한 땅으로 베타니아를 지켜내기로 뜻을 모우고 밤낮으로 싸웠다. 그당시 행정당국으로부터 베타니아원 정착지란 이름이 걸림돌이 되어서 동네 이름대로 초곡농장과 초곡공소로 살아 가겠다고 주민들과 협의 후 소요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문희 주교님께서 죽도성당 박병기 신부님을 농장공소에 급파했다. 이때 공소회장과 운영위원장2명이 1979년11월에 감금되었고 1980년3월에 풀려났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공소회장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지만 주교님과 박병기 신부님께서 “신자들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순교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해온 열과 성을 돌보아 주실 것이다”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열심히 하면서 신자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하였다. 덕수성당의 지원을 받아 열심히 교리공부를 하고 영세자들을 배출하면서 여러 곳에서 예수성심상도 기증받고 안양 이경재 신부님께 부탁하여 성모상 제막도하고 1983년 8월 6일 대지200평 건평120평의 2층으로 성당 같은 커다란 공소를 세웠다. 이렇게 되니 개신교는 초곡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세 받지 않은 사람도 퇴출 시켰다. 한편 주일이 되면 죽도, 덕수성당에서 많은 신자들이 들어와 힘을 실어 주어 공소가 날로 번성하였다. 그런데 수질이 좋지 않아 지하수를 개발해도 석회수 때문에 주민들이 암으로 죽어가고 가축은 질병으로 쇠퇴하여가서 마을주민과 신자들은 총회를 열고 마을 전체를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그 동안 살면서 받은 신앙의 은총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마을 회장 축산조합장 공소회장의 기도와 협조로 주민들을 설득시켜서 성당부지만은 남겨두고 3년이 걸려서 매각이 완료되었다. 그 후 타지로 희망하는 가족은 원하는 곳 영덕 신애원 6세대, 성곡리 10세대, 경주 희망농원 6세대로 보내고 돌아가신 분들은 초곡묘지로 이장하니 초곡공소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당부지로 남겨둔 1906평은 원래 재단인 예수성심시녀회로 이관된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대구대교구청으로 재 이전되면서 현재 초곡 공소 부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2) 신광 공소
<신광면 마북리 인피골>
마북리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인동 장씨와 안동 권씨가 들어와 개척한 마을이며 이 마을의 북쪽 산 아래에 사람이 피난한 곳이라는 인피골이 있다.
마북길 376에 거주하는 박동해(86세 2015년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피골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가는 바람에 인피골에서 마북리로 이사와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으로 인피골에는 관헌들의 추적을 피해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피신하여 살았던 곳이며 현재 확인되고 있는 사람은 동학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이 인피골 아래에 있는 검은골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2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여 20여세대가 살았던 곳이라고 하는 바 이는 천주교 을해박해 시기와 맞으며 이들이 피신하여 신자촌을 이루었을 가능성에 대해 좀 더 조사해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일성록 자료에 의하며 을해박해 시 청송 노래산에서 경주부로 압송된 40명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이름이 인피골에 거주한 후손들의 족보나 가첩에 기록되어 있다면 인피골은 우리 4대리구 지역의 첫 신자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계속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2015년 4월 11일 인피골 답사에서 주거지와 농경지를 확인하였으며 행정 기관의 협조와 후손들의 협조가 있다면 사실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 여겨진다.
을해 박해시 경주 감옥에서 석방된 사람(19명)
박사운, 이종량, 박복지, 신귀덕, 안성광, 여자 호주들인 순단, 감단, 갑여, 유녀, 현금, 일문, 쾌단, 선녀, 태완, 막녀, 상점, 만덕, 고석, 박소사
대구로 압송되신분 14명
최봉한, 안치룡, 김화춘 , 고성대, 고성운, 서석봉, 이선복, 김진성, 김악지, 신광채, 손두동, 구성렬, 김윤덕, 방만동,
경주옥에서 옥살이 7명
김상선, 박유달, 김가팔리, 김순득, 김도치, 여자인 김도치, 갈장금 –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형을 받고 석방됨
박유달, 김가팔리- 경주에서 옥사함
1988년 11월 10일 신광 냉수리에서 예비자 교리반을 30명이 신청하여 덕수성당 사무장인 원종한(요셉)씨의 파견 교리로 11명이 세례를 받고 신부님이 신광으로 찾아 오셔서 공소에서 성사가 이루어지고 1990년 2월 19-21일 신광 공소 회장 양종호(알로이시오)가 왜관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가졌으나 지금은 전출과 냉담 등으로 당시 교우 중 흥해 성당에 나오는 교우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