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성균관대학교 국정관리대학원)
초록
‘정부에서 거버넌스로(from government to governance)’라는 표현이 잘 말해주듯이 거버넌스는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행정학의 경우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이례현상이 나타나고 이러한 이례현상의 지속적인 누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위상과 패러다임 대체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학술적인 주도권 다툼은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만을 초래할 뿐이므로, 다양한 패러다임간의 경쟁을 통한 이론적 발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 패러다임은 연구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통약불가능하고, 상호학습이 가능하되, 의미 있는 방법으로 타성(otherness)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양한 구성원들 간의 자발적 협력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핵심 연구과제로 갖는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전통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경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이전 과학 수준에 머물고 있는 행정학의 패러다임의 경우, 필요한 것은 학문적 주도권 다툼이 아니라 각자의 타성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단절적인 대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을 지속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을 통한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I. 서론
정부가 해결하는 문제보다 정부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가 훨씬 더 많다는 비판이 존재한다(Zinsmeister, 1995). 이렇게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정부에 대한 신뢰의 붕괴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급진적인 행정개혁의 추진은 이제 이미 전세계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부의 비효율성과 낮은 생산성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전통적인 행정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행정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여 다양한 행정학 이론이 등장하였다. 신공공관리론(NPM: New Public Management), 거버넌스(governance),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 등이 행정개혁을 위한 처방을 제공해 온 대표적인 ‘새로운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 중 신공공관리론 등 일부 이론들은 전통적인 행정학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Pollitt, 2000).
새로운 이론들이 행정개혁에 많은 실질적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 새로운 이론들이 행정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전통적인 행정학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공공관리론에서 강조하는 ‘기업처럼 관리되는 정부’라는 처방은 전통적인 행정학에서도 이미 제시되었던 것으로 학문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한편 ‘좋은 행정’을 구현하기 위한 대안을 제공해 온 전통적인 행정학이 최근 들어 오히려 행정의 비효율성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문제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전통적인 행정학, 또는 관료제 패러다임은 독자적인 학문체계로서의 학문적 정체성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에 시달려 왔다(Henry, 1975; Golembiewski, 1977).
행정학의 패러다임과 관련된 논의에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행정학의 ‘학문적인 정체성’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행정학의 경우, 심지어 전통적인 행정학의 경우에도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서의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널리 인정되는 통일된 독자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Rutgers, 1998).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치학, 경영학 등 인접학문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행정학은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학문영역의 전문지식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특성을 갖는 사실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II. 패러다임의 사회과학적 함의
Kuhn의 과학혁명에 대한 이론은 과학적인 발견이 이루어지고 과학이 진보하는 과정과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요인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Kuhn의 이론의 특징은 과학이 특정 이론이나 개별적인 발견이 아니라 ‘패러다임(paradigm)’의 출현과 대체로 특징지워지는 일련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사전적으로 ‘이론적인 틀’로 정의된다. 그러나 Kuhn의 이론에서 패러다임은 이론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일반적인 법칙, 이론, 이론의 적용, 그리고 연구방법론, 또는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념, 가치관 등을 포함하는 총제적인 개념으로 정의된다(Kuhn, 1970: 10, 175).
Kuhn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과학의 발전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과학은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확보하게 되면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인정받은 과학은 ‘공통 가정(common assumption)’을 형성하고, 이 가정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근거한 이론으로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례현상(異例現象, anomalies)'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례현상들이 누적되면서 패러다임은 위기를 맡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이 설명하던 현상은 물론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던 이례현상까지 성공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의 지위를 상실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Kuhn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간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존재이다. 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은 조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기본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은 같은 문제에 대한 이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요한 문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한 패러다임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다른 패러다임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통약불가능성을 갖는 대립하는 패러다임간의 타협이나 협상을 통한 통합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오직 한 패러다임의 다른 패러다임에 대한 승리 또는 대체에 의해서만 패러다임간의 대립이 해결될 수 있다.
요컨대, Kuhn의 논리에 따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i) 기존의 패러다임이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례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동시에 (ii) 기존의 패러다임이 성공적으로 설명해온 현상들을 모두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만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Gow and Dufour(2000)에 의하면 Kuhn의 패러다임은 3가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패러다임은 형이상학 또는 인식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수준의 패러다임은 신념체계, 형이상학적 추론,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 등을 의미한다. 둘째, 패러다임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적 업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이론적 수준의 패러다임으로, 신념, 가치관, 상징, 그리고 이론 등을 포함한다. 셋째, 패러다임은 범례(exemplars) 또는 인공물(artefact)을 의미한다. 범례는 패러다임에 의해 제시되는 문제해결모형 즉,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는 문제, 사례, 실험, 정의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범례 수준의 패러다임은 구체적인 문제해결방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범례수준에서 이례현상이 탐지되면, 이론적 수준 또는 형이상학적 수준 패러다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게 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설명된 과학혁명과 패러다임에 대한 Kuhn의 이론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라는 Kuhn의 저서의 출간으로 사회과학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각자의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Frederickson, 1980). 그러나 사회과학의 경우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모호하게 정의되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경우에 따라서 패러다임은 단순하게 병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특정한 이론이나 모형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통약불가능성을 갖는 가치나 상징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Kuhn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에 대한 많은 비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Kuhn 자신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21개의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Gow and Dufour, 2000).
사회과학의 경우 패러다임의 의미와 패러다임 전환 및 대체가능성에 대한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회과학의 경우 경쟁이론보다 우월한 이론으로 증명된 이론이라는 의미의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과학자들은 하나의 패러다임에만 국한하여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탐색할 수 없으므로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다양한 패러다임간의 통약불가능성이 존재하나 어느 한 패러다임의 우월성이 입증되지 못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한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실질적인 비교가 불가능한 다른 패러다임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과학을 포함한 응용과학의 경우 순수과학과는 상이한 과정을 통하여 패러다임의 선택과 대체가 나타난다. 순수과학의 경우 이론의 청중 또는 독자는 일반적으로 과학자로 구성된 공동체이므로, 과학자로 구성된 공동체에 의해서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와 선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응용과학의 경우 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과학이론을 실제에 활용하는 전문가, 특히 사회과학의 경우 정치인들까지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와 이를 토대로 한 패러다임의 선택․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자연과학에서도 이러한 ‘과학 외부적인 요소’의 영향이 중요하나, 특히 지배적인 패러다임이나 정상과학이 존재하기 어려운 사회과학의 경우 이러한 과학자 이외의 청중이나 독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영향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III. 전통행정학의 패러다임
1. Nicholas Henry(1975)의 행정학 패러다임
Henry(1975)의 행정학 패러다임 또는 행정학의 발전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Henry의 설명에 의하면, 학문적 영역으로서의 미국 행정학의 발전은 중첩되는 4개의 패러다임의 계승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Henry는 초점(focus)과 거점(locus)라는 기준을 통하여 행정학 패러다임의 특성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초점은 학문영역의 연구대상의 특성을 의미하고, 지점은 연구대상의 제도적인 위치를 각각 의미한다.
4개의 패러다임 중 첫 번째 패러다임은 ‘정행이원론(1900-1927)’이다. 거점을 강조하는 첫번째 패러다임은 공공행정이 이루어지는 정부관료제에 관심을 갖는다. 첫 번째 패러다임의 핵심은 행정과 정치는 뚜렷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측, 정치는 행정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되며, 관리는 독자적인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므로, 행정학은 경제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정학의 두 번째 패러다임은 ‘행정원리주의(1927-1937)’이다. 행정원리주의의 핵심은 행정의 과학적 원리가 존재하므로, 이러한 과학적 행정원리를 발견하고 실무에 적용하는 방법을 습득하면 행정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원리론은 공사부문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초점을 강조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두 번째 패러다임이 지배적이던 1930년대가 ‘정통행정학의 황금기(high noon of orthodoxy)’라고 평가된다.
행정학의 세 번째 패러다임은 ‘정치학으로서의 행정학(1950-1970)’이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정통행정학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Simon에 의해 제기된 주류행정학에 대한 도전의 핵심은 (i) 행정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ii) 행정의 원리는 상호논리적인 모순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으로 행정학은 정체성 위기를 맞게 되고, 비판을 극복하고 행정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로 대두된다. Simon은 행정학을 (i) 사회심리학에 기초를 두고 행정/관리의 순수과학과 (ii) 현실에서 공공정책을 처방하는 응용과학분야로 구분하면서 행정학과 정치학의 연계를 강조한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의 결과로 행정학은 ‘정치학으로서의 행정학’으로 재정의되고, 정부관료제에 대한 연구를 핵심으로 하는 거점이 강조되게 된다. 이러한 세 번째 패러다임에서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서의 행정학의 정체성을 일정부분 훼손되게 된다.
마지막으로, 행정학의 네 번째 패러다임은 ‘관리과학으로서의 행정학(1956-1970)’이다. 정치학의 하위분야로서의 행정학의 학문적 지위를 수긍하지 않는 일련의 학자들은 관리과학(administrative science)을 중심으로 행정학이 학문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관리과학으로서의 행정학은 관리라는 초점을 강조하면서 정치학으로부터 독자적인 행정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공부문이라는 거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어렵게 되고, 따라서 ‘공익’이라는 행정학의 중요한 가치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초점과 거점을 모두 적절하게 포함할 수 있는 행정학의 다섯 번째 패러다임, 즉 ‘행정학으로서의 행정학’이 요구된다는 것이 Henry의 주장의 핵심이다. 행정학으로서의 행정학은 (i) 조직이론과 관리과학 등 순수과학적인 초점과, (ii) 정부를 포함하는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민간부문에서 이루어지는 행정까지를 유연하게 포괄하는 거점, 그리고 (iii) 정책과학, 정치경제학, 정책분석 및 정책평가 등 인접 관련분야를 광범위하게 포함함으로써 초점과 거점을 조화롭게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Henry가 말하는 행정학 패러다임은 통약불가능성이나 패러다임의 대체 등을 특징으로 하는 Kuhn의 패러다임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관리과학으로서의 행정학이나 정치학으로서의 행정학 등 다양한 패러다임이 병렬적으로 존재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정상과학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므로, 이들의 장점을 포괄할 있는 행정학으로서의 행정학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 Henry의 주장의 핵심이다.
2. Golembiewski(1977)의 행정학 패러다임: 미니패러다임(miniparadigm)의 충분성?
Golembiewski는 그의 저서 Public Administration as a Developing Discipline: Perspectives on Past and Present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행정학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행정학의 경우 아직 학문적 발전수준이 ‘종합 패러다임(comprehensive paradigm)’을 가질 정도로 성숙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한 패러다임에서 다음 패러다임으로의 단절적인 전환은 이루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행정학의 종합 패러다임이 다루어야 할 내용으로 다음의 5가지를 제시한다(Golembiewski, 1977: 37).
1. 행태적, 합리적-기술적 특징을 포함하는 공공행정체계의 내부과정
2. 고객 만족과 구성원의 성과와 관련되는 산출측정
3. 공공부문 및 민간부문 등의 외부체계와의 거래/상호작용
4. 법률, 전통 문화 등을 망라하는 행정체계의 환경
5. 1에서 4항까지의 내용과 연결되는 관계, 산출 및 제도를 평가하는데 필요한 가치 또는 규범적 기준
Golembiewski는 행정학에서 위에서 제시된 조건을 충족하는 종합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지만, 행정학자들이 전통적인 패러다임, 사회-심리학적 패러다임, 그리고 인본주의적-체제적 패러다임 등을 포함하여 최소한 3번의 새로운 패러다임 출현을 주장한 바 있다고 설명한다. 비록 행정학의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고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 적은 없으나 패러다임에 따라 학문적인 관심이 변화하였다는 점에서 패러다임은 행정학자나 행정실무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행정학의 대표적인 종합 패러다임으로 관료제 이론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패러다임(traditional paradigm)’을 제시한다. 전통적인 패러다임은 권력은 단일권력 중추를 중심으로 통합될수록 책임성이 수월하게 확보된다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철학적 전제를 갖는다. 전통적 패러다임은 공식적인 법규에 근거하는 정당한 권위와 책임성을 중심개념으로 강조하면서, 경제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계층제적 질서의 완벽화가 필요하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한편, 행정원리주의나 전통적인 조직이론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원리는 (i) 수직적, 계층제적 권위, (ii) 제한된 통솔범위, (iii) 기능별 부서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Golembiewski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 비하여 방법론적인 발전단계가 낮은 행정학의 경우 종합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정학에서의 종합적인 패러다임의 위치나 중요성과 관련하여 Golembiewski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행정학이 현재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종합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다. 행정학이 현재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종합 패러다임이라고 널리 인정되고 있는 패러다임의 부적절성 때문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지적이다(Golembiewski, 1977: 217-218).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Golembiewski는 다양한 다수의 미니패러다임(miniparadigm)의 유용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학문적인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적절한 문제를 인식하는 지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행정학의 경우 이러한 지침을 보다 적절하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종합 패러다임이 아니라 미니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다수의 미니패러다임의 가치를 인정하고 미니패러다임을 사용함으로써 현재의 학문적인 가치가 매우 문제시되는 하나의 종합 패러다임을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선정하려는 불필요한 학문적 다툼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Golembiewski의 패러다임 또한 Kuhn의 패러다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문적 성숙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행정학의 경우 정상과학의 위치에 걸맞는 종합적인 패러다임을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또한 불필요한 학문적 다툼만 초래할 뿐이므로, 다양한 다수의 미니패러다임의 존재 및 유용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 Vincent Ostrom(1989)의 행정학 패러다임: 민주행정이론
행정학의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Ostrom은 그의 저서 The Intellectual Crisis in American Public Administration에서 전통적인 행정학의 처방으로 오히려 미국 행정이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미국 행정학의 지적 위기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인 행정학을 윌슨 패러다임(Wilsonian paradigm)이라고 부르면서, 윌슨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은 기본 전제에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1. 모든 정부에는 단일 권력중추가 존재하고, 단일 권력중추에 의해 행정이 통제된다.
2. 권력은 분산될수록 무책임해진다.
3. 민주주의사회의 정부에서는 국민의 대표에게 절대적인 통치권한이 부여된다.
4. 행정의 목표와 과업은 정치에서 결정되며, 행정은 정치와 분리되는 존재이다.
5. 행정기능이나 조직과 관련하여 모든 국가는 강한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
6. 전문 관료들로 이루어지는 계층제의 완성이 “좋은” 행정의 구조적인 필요조건이다.
7. 계층제적 조직의 완성은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8. 이상의 조건을 충족하는 “좋은” 행정의 완성이 인류문명과 인류복지 증진의 필요조건이다(Ostrom, 1989: 24-25).
Ostrom은 윌슨 패러다임의 핵심이 단일 권력중추를 갖는 계층제적 구조, 즉 관료제의 우월성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은 그동안 조직인본주의, 정책학, 신행정학 등으로부터 많은 이론적 도전을 받아 왔으나, 전통적인 행정학의 핵심 가정인 ‘단일중심성(monocentricity)’의 우월성에 대한 이론적인 도전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는 것이 Ostrom의 설명이다. 요컨대, 관리과학이나 정책학 등 Henry가 말하는 행정학 패러다임이나, Golembiewski가 말하는 사회-심리학적 패러다임과 인본주의적/체제적 패러다임 등을 포함한 다양한 행정학 패러다임과 이론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패러다임과 이론들은 모두 윌슨 패러다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Gow and Dufour(2000)가 말하는 패러다임 수준의 개념을 활용하여 설명하자면, 행정학의 다양한 이론들은 단일중심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윌슨 패러다임이라는 형이상학적 수준의 패러다임에 근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 상이한 이론적 수준의 패러다임, 또는 범례적 수준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Ostrom은 이러한 윌슨 패러다임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면서, 행정학의 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수준 패러다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대전환(Copernican revolut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윌슨 패러다임이 이전의 다양한 이론을 포괄하는 종합 패러다임이나, 이례현상의 축적으로 발생한 행정학의 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행정학의 새로운 종합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민주행정이론이라 부르면서, 다음과 같은 민주행정이론의 기본전제를 제시한다:
1. 정부관료 또한 일반국민과 마찬가지로 부패에 관여할 수 있다.
2. 권력이 집중될수록 권력낭비가 심해진다.
3. 다양한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헌법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는다.
4. 행정은 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5. 다양한 행정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조직구조가 사용될 수 있다.
6. 전문 관료들로 이루어진 계층제의 완성은 행정의 대응성을 저해할 수 있다.
7. 계층제적 조직의 완성은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지 못한다.
8. 다수의 중첩되는 관할권과 다양한 의사결정 단위가 보유하는 잠재적인 ‘거부권(veto power)’이 다중심적이고 안정적인 정치제체를 유지하고 인류복지를 증진하는 필요조건이다(Ostrom, 1989: 98-99).
Ostrom은 주류(主流)행정학의 핵심인 윌슨 패러다임의 단일중심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기본전제는 현실 행정에서 나타나는 이례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이례현상의 지속적인 축적으로 윌슨 패러다임은 심각한 학문적, 실천적 위기에 봉착했으며, 따라서 윌슨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며, 민주행정이론이 대안적인 새로운 패러다임, 특히 형이상학적 수준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Ostrom의 민주행정 패러다임의 핵심은 ‘다중심 체제(polycentricity)’의 우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중심 체제는 상호독립적인 다양한 의사결정 단위가 존재하며, 이들 의사결정 단위가 협동, 경쟁, 갈등, 그리고 갈등해결 등의 과정을 통하여 다른 의사결정 단위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서 행동하는 구조를 말한다. 다중심성은 또한 중첩되는 관할권과 권한의 단편화(斷片化)라는 특징을 갖는다. 중첩되는 관할권과 권한의 단편화는 관료제 이론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행정학에서는 정부 비효율성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으나, 민주행정이론에서는 오히려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원칙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여 Ostrom은 공공서비스에 대한 시민의 수요를 파악하고 적절한 공급방법을 결정하는 ‘공급(provision)’과 결정된 내용에 따라 공공서비스를 실제로 제공하는 ‘생산(production)’의 분리, 그리고 공급과 생산의 다양한 형태의 연결 가능성 등을 실질적인 행정개혁의 대안으로 제시한다(이명석, 2006b).12)
주12) Toonen(1998)은 Ostrom의 새로운 행정학 패러다임으로서의 민주행정이론의 특징으로, (i) 기업가적 정부, (ii) 성과지향적 관리, (iii) 공공서비스 전달 및 기능적 대응성 개선 강조, (iv) 공급(provision)과 생산(production) 분리 강조, (v) 내/외부 계약, (vi) 자치와 공동생산(coproduction) 강조 등을 들고 있다.
요컨대, 윌슨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대전환과 같은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Ostrom의 설명은 통약불가능성과 패러다임의 대체를 특징으로 하는 Kuhn의 패러다임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Toonen, 1998). 아울러, 이러한 관점에서 Ostrom이 생각하는 민주행정이론은 Golembiewski가 말하는 종합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Ostrom은 윌슨 패러다임이 전혀 유용성이 없으므로 완전히 용도폐기 되고 민주행정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민주행정이론의 논리의 핵심은 윌슨 패러다임이 모든 정부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좋은 행정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윌슨 패러다임이나 민주행정이론이 형이상학적 수준의 패러다임, 또는 Golembiewski의 종합 패러다임의 특징을 가진다고는 할 수 있으나, Ostrom 또한 Kuhn이 말하는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패러다임의 대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자면, (i) 다양한 행정학 패러다임이 존재하였으나, (ii) 이러한 패러다임들은 형이상학적 수준의 패러다임이라기보다는 이론적 수준, 또는 범례적 수준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iii) 관료제 이론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행정학 패러다임, 즉 관료제 패러다임이라는 형이상학적 수준의 패러다임에 의해 통합될 수 있고, (iv) 관료제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에 가장 가까운 위상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종합 패러다임이며, (v) 민주행정이론은 관료제 패러다임의 강력한 경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IV. 신공공관리론: 행정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현재까지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위상을 위협하는 다양한 학문적 시도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학문적 시도 중 가장 큰 관심을 받아 온 것이 신공공관리론과 거버넌스 이론이다.
1980년대 이후 나타난 신공공관리론은 공공부문의 운영방식과 관련하여 전통적인 행정학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이다(Page, 2005). 신공곤관리론은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의 핵심인 ‘잘 갖추어진 중앙집권적인 계층제 조직의 공식적 규정이라는 강한 구조적 유사성’이 오히려 관료제의 비효율성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관료 개인은 민간조직의 관리자보다 비효율적이지 않으나, 관료들을 관리하는 공식적인 제도, 즉 관료제의 지나친 세부규정이 관료들의 창의성과 능률성을 저해하는 ‘족쇄’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신공공관리론은 (i) 관료들을 관료제의 세부규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율성을 확보할 것과 (ii) 계층제적 통제를 대신하여 성과의 측정과 평가를 인센티브와 연계하여 관료제에 경쟁의 원리를 도입할 것 등을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처방으로 제시한다.
법률과 규정을 통해서 효율성과 책임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제적인 독점체제가 관료제 패러다임의 핵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신공공관리론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Osborne and Plastrik(1997)은 기업가적 조직이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러한 변화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패러다임 전환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신공공관리론에 대한 비판이 다수 존재한다. Gow and Dufour(2000)는 신공공관리론이 행정의 개념과 가치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와 주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수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론적 수준과 범례적 수준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관리와 관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리주의(managerialism)에 근거하고, 사례연구와 최선사례(best practice) 연구를 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수준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신공공관리론 이론이 서로 연계되지 않은 채 산재되어 있을 뿐, 공통의 가정에 근거한 신공공관리론의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론적 수준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된 이론의 부재로 범례수준의 패러다임도 될 수 없다. ‘고객만족’, ‘방향잡기’ 등의 범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이론에서 연역되는 범례가 아니므로 경험을 대신하여 사용될 수 있는 범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공공관리론이 아직 이론적, 범례적 수준의 패러다임이 아니라는 지적은 신공공관리론의 이론적인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의 패러다임은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양한 인접학문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이질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매우 이질적인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 행정학의 경우, Weimer(1992)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어떤 이론이 과학적 패러다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울러, 이렇게 엄밀하게 공통의 가정에 근거하는 일반이론의 존재여부를 이론적 수준 패러다임의 기준으로 적용할 경우, 대다수의 사회과학분야에서 패러다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론은 매우 제한적인 수치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공공관리론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유용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과학을 포함한 응용과학의 경우 학자뿐만 아니라 실무자들이 공동체의 중용한 구성원으로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신공공관리론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유용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반화된 이론의 부재 속에서도 신공공관리론은 많은 학자와 행정실무가들의 지지로 현실 행정개혁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공공관리론이 일반화된 이론의 결여 등의 이유로 비록 Kuhn의 기준에서는 완전한 패러다임이라 하기 어렵다하더라도 현실적인 활용도면에서 “전문적 패러다임(professional paradigm)”이라고 할 수 있다(Gow and Dufour, 2000).
그러나 신공공관리론이 전문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유용성을 인정받는다는 것과 신공공관리론이 행정학이 새로운 ‘지배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신공공관리론은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을 아직 대체하지 못하였으며, 대체가 바람직한지 여부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신공공관리론이 관료제 패러다임과 완전히 통약불가능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Lynn(2001)은 신공공관리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오해되는 이유는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핵심이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관료제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계층제적인 구조를 강조하는 것이 관료제 패러다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행정 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만족과 국민에 의한 행정통제는 신공공관리론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에서도 중요한 연구주제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공공관리론은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과 통약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공공관리론과 관료제 패러다임의 통약불가능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신공공관리론은 행정 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만족과 국민에 의한 행정통제를 확보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에 대하여 관료제 패러다임과 차별화되는 대안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공공관리론은 단순히 행정 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만족과 국민에 의한 행정통제의 중요성이라는 ‘목적’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차별화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신공공관리론의 구체적인 대안이 일반화된 이론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나, 계층제적인 통제를 통하여 책임성이나 효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부적절하므로 관리자에게 재량권을 부여하여야 한다는 기본전제에 근거한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수준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효율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공공관리론은 관료제 역량 극대화와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조화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을 성공적으로 대체하였다고 할 수 없다(Dobel, 2001). 행정 분야 중에는 신공공관리론의 처방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좋은 행정’을 구현할 수 있는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행정과 경영의 본질적인 차이로 신공공관리론의 처방이 모든 행정 분야에 적용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제 패러다임의 처방이 신공공관리론의 처방보다 더 적절한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공공관리론이 공식적인 책임성 확보체제의 문제점과 한계라는 관료제 패러다임의 이례현상을 모두 설명․해결하고, 관료제 패러다임이 성공적으로 설명․해결하던 현상들을 보다 성공적으로 설명․해결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 주도적인 사회문제해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과 통약불가능성을 갖는 종합 패러다임이라고 하기 어렵다. 신공공관리론은 Ostrom이 제시한 윌슨 패러다임의 8가지 핵심 가정 중 ‘계층제적 조직의 완성이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조건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V.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거버넌스 이론
1. 제 3의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거버넌스
최근 사회과학자들에게 거버넌스는 매우 매력적인 개념이다. 정부나 행정 등 전통적인 용어가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배제하고 무엇인가 새롭고 개혁적인, 그러나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모호한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거버넌스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이명석, 2002). 그러나 거버넌스는 좋은 것을 모두 모호하게 포괄하여 표현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거버넌스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먼저, 거버넌스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자원과 인력이 조정되는 방식을 의미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경우 거버넌스에는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중앙집권적 처방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 방법이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정부와 함께 대표적인 사회문제 해결양식으로 활용되어 온 시장에 의한 문제해결도 광의의 거버넌스에 포함될 수 있다.
다음으로 거버넌스는 특정한 유형의 사회적 조정양식을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회적 조정(social coordination)’ 양식인 계층제(hierarchy), 시장(market) 이외의 제 3의 사회적 조정 양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협의의 거버넌스의 특징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이명석, 2002). ‘사회적 조정’은 다양한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조정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조정 양식은 계층제와 시장 등의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여, 공식적인 권한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거버넌스는 독자적인 사회적 조정양식이라기보다는 계층제와 시장의 중간적인 속성을 갖는 일종의 혼성물(hybrid)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제 3의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거버넌스는 계층제나 시장 등 다른 두 가지 사회적 조정양식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다(Powell, 1990; 이명석, 2002). 먼저, 계층제의 경우 공식적인 법규에 근거하는 권한에 의한 강제적인 조정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사회문제 해결과정에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도적인 설계가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조정 양식으로서의 계층제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손(visible hand)’이라고 불린다. 반면에 거버넌스는 공식적인 법규에 의한 강제나 법적 제재 등에 의존하지 않고 신뢰나 호혜성에 근거한 자발적 협력과 사회적 제재 등에 의한 조정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한다.19)
주19) 참고로,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기 위하여 Visser(2005)는 강제적인 규정과 공식적인 권위에 의한 사회적 조정을 ‘구(舊)거버넌스(old mode of governance)’, 자기규제와 비공식적 네트워크와 규범에 의한 사회적 조정을 ‘신거버넌스(new mode of governance)’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시장에서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체적인 수준의 의도적인 설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어떤 강제적인 조정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직 개인들 간의 자발적인 선택과 교환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된다. 이렇게 의도적인 설계와 강제를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권위의 존재 없이 개인들의 자발적인 교환에 의해 사회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시장은 흔히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 불린다. 반면에 거버넌스의 경우 개인들은 의도적인 설계 없이 선택하고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협동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설계를 하고, 의도적인 설계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협조한다.
요컨대, 새로운 사회적 조정 양식으로서의 거버넌스의 핵심적인 특징은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Beetham, 1996). 제 3의 사회적 조정 양식으로서의 거버넌스에서는 시장과는 달리 정치적 권위에 의한 강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계층제와는 달리 거버넌스에서는 공식적인 권위에 의한 법적 강제력이 아닌, 자발적인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적․규범적 강제력에 의존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조정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버넌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나 ‘보이는 손’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보이는 협력하는 손(visible handshake)’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헌에서 거버넌스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 또는 ‘새로운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경우, 거버넌스는 일반적으로 제 3의 사회적 조정양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Stoker(1998)는 거버넌스의 특징으로 정부와 민간을 망라하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정부의 공식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Rhodes(1997)는 거버넌스의 특징으로 비정부 조직 등 다양한 조직을 포함하는 조직 간의 상호의존성, 구성원들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연결망(network)’, 연결망 참여자들 간의 신뢰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게임적 상호작용, 그리고 정부로부터의 절대적인 자율성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 3의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거버넌스의 기본 전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사회문제 해결에 필요한 지식, 정보, 자원을 공유한다.
2. 사회문제의 복잡성의 증가로 어느 사회구성원도 단독으로는 사회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3.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의 경계와 책임이 모호해진다.
4. 상호의존적인 행위자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략적인 선택을 한다.
5. 자치적 네트워크가 사회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6. 거버넌스는 다양한 상호의존적인 행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공물이다.
7. 민주적 시민정신과 공공기업가정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복합조직의 지속적인 진화를 통하여 거버넌스와 관련된 집합행동의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8. 거버넌스와 관련된 집합행동은 조건에 따라 자발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므로 항상 강제적 통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집합행동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집합행동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9.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권력 및 자원의존성이 인류의 복지를 증진할 수 있는 다중심적이고 안정적인 정치․사회구조를 유지하는 필수조건이다(이명석, 2006a).
2. ‘신패러디임(new paradigm)’으로서의 거버넌스 패러다임
독자적인 패러다임으로서의 거버넌스 이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거버넌스 패러다임과 차별화될 수 있는 관료제 패러다임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료제 패러다임의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계층제를 통한 정부조직 구성과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King, 1999; Lynn 2001). King(1999)에 의하면, 전통 행정학은 일반시민은 공공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유능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공공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따라서 참여적, 민주적인 행정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기본적인 가정에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기본가정을 형이상학적 수준 패러다임으로서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가정에 근거하여 관료제 패러다임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관료들로 구성된 효율적인 관료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관료제 패러다임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기 어려운 관료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하여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행정학의 기초가 되는 관료제 패러다임의 핵심연구과제는 관료제의 역량강화와 민주적 통제 가능성이다(Lynn, 2001). 이러한 관점에서 관료제 패러다임의 핵심은 ‘조직구성원리로서의 관료제’가 아니라 ‘제3자에 의한 집권적인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이명석, 2002).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관료제 패러다임과 상반되는 기본가정에 근거한다. 계층제나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에 의한 사회문제 해결 등이 아니라 공식적인 권한에 의존하지 않는 자발적 협동에 의한 사회문제 해결을 강조한다(이명석, 2002; 2006). 전통적으로 자발적 협동에 의한 사회문제 해결은 작은 규모의 특수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Ostrom, 1989).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기업, 시민단체, 일반 시민 그 어느 누구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증가하고, 이러한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회구성원들 간의 ‘복잡한 협력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것은 다양한 사회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공식적인 규정이나 절차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중앙집권적인 조정이나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협력 네트워크란 공식적인 조정이나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의사결정이나 활동 등이 공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준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거버넌스 패러다임의 핵심연구과제는 다양한 구성원들간의 협력증진과 자발적 협력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가능성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관료제 패러다임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기본가정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근본적으로 상이한 연구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Ostrom(1989)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행정학 이론들은 관료제 패러다임의 근본가정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전통적인 행정학의 행정체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공공관리론의 경우에도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연장에 불과할 뿐, 관료제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라는 비판이 존재한다(Lynn, 2001; Dobel, 2001; Page, 2005). 물론,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신공공관리론은 계층제가 아니라 관리자의 재량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수준의 전문적 패러다임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신공공관리론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강조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관료제 패러다임과 공유한다. 또한 신공공관리론이 계층제적 통제가 아니라 재량권 부여와 관료제 내부시장의 경쟁원리를 통한 효율성의 제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Weber의 Ideal Type으로 대표되는 관료제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나, 정부관료제의 조직운영방식을 개선하는 새로운 대안이라는 점에서 관료제 패러다임과 통약불가능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20)
주20) 신공공관리론이 ‘조직구성원리로서의 관료제’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나, ‘제 3자에 의한 집권적인 사회적 조정양식으로서의 관료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원리의 도입 등으로 집권적인 사회적 조정의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것이 신공공관리론의 핵심이다.
양자물리학, 혼돈이론 등의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거버넌스 패러다임과 관료제 패러다임의 통약불가능성 또는 ‘타성(他姓, otherness)’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자연현상의 본질을 비선형적이고, 복잡하며, 무질서한 것으로 파악한다. 자연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영향으로 행정학은 행정조직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Neuman, 1996). 즉, 사회에 나타나는 혼돈과 복잡성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전체가 적응하고 유지하고, 궁극적으로 자율적으로 구성되는 조직에 의하여 초월하여야 하는 의미 있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다양한 복잡성으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고, 혼란을 통제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행정학의 논리는 부적절한 것이 된다(Dennard, 1996). 복잡한 문제는 복잡한 문제해결기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으며, 사회체제는 외부적인 통제 없이 구조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체제제의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 Dennard의 설명이다. 계층제적 구조, 규정과 절차, 그리고 공식적인 권력 등 잘 짜여진 기제에 의해 통제되는 전통적인 조직구성원리와 사회문제 해결방식은 상호연관성과 복잡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환경에서 적절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무질서하고 통제불가능한 상태로 인식되던 사회체제의 자치조직적 경향이 오히려 적절한 문제해결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복잡성과 체제의 자치조직적 특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많은 점을 공유한다. 복잡한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사회구성원들로 구성된 복잡한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네트워크에서 조정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체제를 통해서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거버넌스 패러다임의 핵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버넌스 패러다임의 이러한 사회문제 해결방식에 대한 가장 큰 우려는 중심적인 존재의 부재로 인한 책임성 확보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다(Pierre and Peters, 2000).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문제는 관료제의 역량강화와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제 패러다임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혼란이나 무질서 등을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나, 정부관료제 또한 혼란이나 무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므로 정부관료제의 책임성확보가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거버넌스 패러다임에서 공식적인 책임성 확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공식적인 책임성 확보장치를 갖춘 사회문제 해결기제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는데 필요한 수준의 복잡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거버넌스 패러다임에서 중요한 연구문제는 책임성 확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제 패러다임의 ‘마음의 습관(habits of mind)’은 책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공식적인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않는 거버넌스라는 문제해결방식은 불확실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관료제 패러다임과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통약불가능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관료제 패러다임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타성을 갖는 독자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21)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관료제 패러다임이 인식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사회문제 해결방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Ostrom의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대전환, 또는 행정학의 새로운 종합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버넌스 패러다임이 관료제 패러다임을 대체하였다는 의미에서 행정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또는 ‘정상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관료제 패러다임의 이례현상을 모두 설명하고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관료제 패러다임의 처방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21) 참고로, 이러한 기준을 적용할 경우 국제기구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라는 개념, 또는 이론은 거버넌스 패러다임보다는 관료제 패러다임에 가까운 이론이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거버넌스는 경제발전과 관련된 개념으로 안정적인 정치체제 구축, 법의 지배 확립, 행정의 효율성 제고, 건전한 시민사회 구축 등을 통하여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원조국이나 대출국의 경제발전, 보다 정확하게는 상환능력 등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발전행정론적인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Santiso, 2001).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좋은 거버넌스는 ‘민주적인 통제를 강조하는 관료제 패러다임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고, 민주적 통제가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연구과제라는 점에서 엄밀하게 구분한다면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거버넌스 패러다임보다 관료제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신공공관리론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수준과 범례적 수준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이론적 성과를 아직 이루고 있지 못하다. 정책네트워크, 네트워크 거버넌스 등의 거버넌스 패러다임의 이론들은 아직 완성된 이론이라기보다는 은유(metaphor) 수준에 머물고 있다(Dowding, 1995). 다양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자발적인 협력이 나타날 수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조건, 자발적인 협력에 의한 해결이 필요하거나 또는 적절한 사회문제의 유형 등에 대한 이론이 요구된다. 특히, 뿌리 깊은 관료제 패러다임의 영향으로 정부관료제의 중앙집권적인 통제의 불가피성과 자발적 협력의 가능성 및 책임확보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고, 자발적인 협력에 의한 사회문제 해결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경우에도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기도 한다(이명석, 2006c).
요컨대, 이러한 기준으로 평가할 때 거버넌스 이론은 Ostrom의 민주행정이론의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의 본질을 계승․발전시킨 종합 패러다임이며, 민주행정이론은 거버넌스 패러다임이라는 종합패러다임에 속하는 정치한 이론을 갖춘 일종의 미니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24) 민주행정이론의 경우처럼, 은유로서의 자발적인 협동이나 네트워크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자발적 협동의 가능성과 네트워크의 조건 및 기능 등에 대한 정교한 모델과 이론의 개발이 요구된다.
주24) 민주행정이론과 거버넌스 이론은 다중심 체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적 기반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행정이론의 구체적인 처방들이 공식적인 권위나 제도적 장치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적 제재 등을 통한 자발적인 협동이 아니라 공식적인 권한이나 계약 등의 활용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거버넌스 이론 또는 거버넌스 패러다임이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과 더욱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합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VI. 결론
최근 유행하는 ‘정부에서 거버넌스로(from government to governance)’라는 표현이 잘 말해주듯이 거버넌스는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전통적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이 거버넌스 이론이나 신공공관리론에 의해 완전하게 대체되었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응용사회과학인 행정학의 경우 Kuhn이 말하는 것과 같은 급진적인 패러다임 대체를 통한 과학혁명 자체가 가능한지, 그리고 바람직한지 여부는 재고가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행정학의 경우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이례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이례현상의 지속적인 누적으로 Ostrom(1989)이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중앙집권적인 문제해결방식이 언제나 최선의 방법이라는 마음의 습관을 극복하고, 민주행정의 대안이나 자발적 협력을 통한 사회문제해결 등 통약불가능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문제해결방식을 기존의 관료제 패러다임의 관점과 기준으로 평가하는 과오를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통적인 행정학의 관료제 패러다임이 인식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회적 조정양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관료제 패러다임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경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발적인 협동을 통하여 사회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되는 경우에도 자발적인 협동을 불신하여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간섭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사회문제가 오히려 악화되는 사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Ostrom, 1990; 이명석, 2006c), 거버넌스 패러다임의 학술적, 실천적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위상과 패러다임 대체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학술적인 주도권 다툼은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만을 초래할 뿐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특히 행정학과 같은 응용과학의 경우 자연과학의 패러다임과 같은 수준으로 성숙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고,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가 학자들뿐만 아니라 실무가들에 의해서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경쟁 패러다임이 병존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Golembiewski(1977)의 설명이 Kuhn의 과학적 혁명에 관한 설명보다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정학의 경우 패러다임의 전환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Rainey(1994)는 패러다임을 ‘가장 중요한 연구주제와 연구문제, 그리고 이들에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 등에 대한 공감대’라고 정의한다. 패러다임의 단절적인 전환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경쟁 패러다임은 연구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통약불가능하고, 상호학습이 가능하되, 의미 있는 방법으로 타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Henry(1975)가 구분하는 행정학 발전과정의 패러다임들은 정부관료제의 효율성과 중앙집권적 사회문제해결을 핵심연구문제로 공유한다는 점에서 모두 관료제 패러다임이라는 종합패러다임의 범주에 속하는 일종의 미니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Ostrom, 1989).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Ostrom의 민주행정이론 역시 거버넌스 패러다임이라는 종합패러다임에 속하는 미니패러다임이며, 새로운 사회문제 해결양식을 강조하는 종합 패러다임으로서의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전통적인 관료제 패러다임의 의미 있는 경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자연과학의 패러다임과 같은 수준의 성숙된 패러다임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패러다임이전 과학 수준에 머물고 있는 행정학의 패러다임의 경우, 형이상학적 수준뿐만 아니라 이론적, 범례적 수준 패러다임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수준의 이론적 발전이 요구된다.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행정학의 대표적인 종합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관료제 패러다임과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각자의 타성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단절적인 대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을 지속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을 통한 경쟁에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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