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禪) 이야기<참고자료>
다음에 싣는 이야기는 프로그램을 하며 필요에 따라 선택해서 활용할 수 있다.
내용은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선종의 이야기와 전승 그리고 참고가 될 만한 선사들의 이야기 등이다.
이야기 하나. 달마스님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우리 친구들은 달마 스님에 대해 알고 있나요?
달마 스님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무척이나 유명한 큰스님입니다. 달마 스님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스님에 대해서 우리 어린이들이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선생님이 달마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어른들은 이 달마 스님을 복을 가져다주는 스님이라고 여겨서 달마스님을 그린 그림을 걸어두면 신비한 기(氣)가 나온다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핸드폰 열쇠고리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집안에 걸린 커다란 액자그림에 이르기까지 집안에 하나쯤 없는 집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우리 친구들의 집에도 부모님이 몸에 지니거나 혹은 크고 작은 액자를 집안에 걸어놓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 친구들 중에도 달마 스님을 지니고 있는 친구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항상 친근하게 있는 달마 스님에 대해서는 우리 친구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달마 스님은 어떤 분인지 우리 친구들과 함께 달마 스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겠지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질문 하나 할게요. 달마 스님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중국이요.) 정말 그럴까요? 대부분 달마 스님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달마 스님은 남인도 향지국이라는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달마 스님의 아버지인 향지국의 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몹시 받들어 불교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폈습니다. 왕에게는 세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달마 스님은 이 왕의 마지막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왕은 막내 왕자에게 ‘보리다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장성한 후에는 그를 출가시켰습니다. 자신의 아들 중 한 왕자는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스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왕자의 신분으로 출가하여 큰 가르침을 펴신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답니다.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천태종을 일으키신 대각국사 의천 스님도 왕자 출신이며,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불리는 교각 스님도 신라의 왕자 출신이셨습니다.
출가한 보리다라 왕자는 그 당시 인도의 최고 선지식(스승)이라고 칭송받던 반야다라 스님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게 되었습니다. 스승인 반야다라 스님은 어느 날 가르침을 전해 받은 보리다라스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이미 모든 법을 다 깨달았다. 이제 그대를 보리달마라고 하겠으니, 보리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며, 달마란 진리를 말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때부터 보리다라를 ‘보리달마’라 부르게 되었고 더 줄여 ‘달마’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남인도에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던 달마 스님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이제는 중국에서 더 크게 꽃 피울 때가 되었으니 중국으로 가라는 스승의 당부를 듣게 되었습니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중국은 양나라가 지배를 하고 있었고 무제라는 황제가 양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부처님의 나라 천축국(인도)의 큰스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마 스님을 몹시 뵙고 싶어 했습니다. 무제는 평소에도 스님들이 수하는 가사를 입고 있을 정도로 매우 불심이 깊은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달마 스님을 궁에서 만난 무제 황제는 달마 스님께 말했습니다.
“달마 스님! 저는 황제가 된 후 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새기며, 스님들의 공양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
황제는 자신의 불심이 얼마나 큰지 달마 스님께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달마 스님께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마 스님은 황제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깜짝 놀란 황제는 달마 스님의 단호한 대답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황제는 따지듯이 달마 스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달마 스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과 속세의 작은 인연은 될지 몰라도 그것 또한 변하지 않는 참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참된 공덕이 됩니까?”
“진정한 공덕은 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 마음은 낮추어 드러내지 않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때문에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칭찬을 들으려 했던 황제는 오히려 달마 스님에게 창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달마 스님은 황제가 스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는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 땅에 있는 소림사에 들어가서 수행을 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소림사에서 굴에 들어가 동굴의 벽만 보고 앉아 수행을 했는데, 사람들은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달마 스님을 ‘벽관 바라문’이라고 불렀습니다. 벽관 바라문이란 벽을 바라보고 명상하는 인도스님이라는 뜻입니다. 달마 스님은 인연의 때를 기다려 소림사의 토굴에서 면벽수행을 하며, 중국에 참다운 불교를 전하기 위한 때를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있는 숭산 소림사에는 그때 달마 스님께서 면벽 수행을 하셨던 굴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굴은 달마 스님이 수행하시던 곳이라 사람들은 소림굴이라 불렀습니다. 소림굴에는 한 자리에서만 움직이지 않고 수행을 하신 달마 스님의 그림자가 바위에 저절로 새겨져 지금도 달마 스님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하지요? 우리 친구들이 나중에 중국 소림사에 가서 꼭 확인을 해 보기 바랍니다.(... 웃으며) 자! 그럼 그 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이야기 둘. 달마스님 법을 전하다
달마 스님의 면벽수행은 9년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9년째 되던 해에 신광이라는 스님이 달마 스님을 찾아 왔습니다. 신광 스님은 자신이 공부를 하면서 막혔던 것에 대한 답답함을 풀어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달마 스님은 소림굴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면벽수행을 하며 묵묵부답,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신광 스님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더욱 노력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과연 신광 스님은 달마 스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
밤새 밖에는 큰 눈이 내렸는데, 신광 스님은 달마 스님이 선정에 든 소림사 소림굴 앞에서 꼼짝도 않고 추운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새벽이 되자 눈은 무릎이 넘도록 쌓였습니다. 달마 스님은 그때까지도 꼼짝 않고 눈 속에서 서 있는 신광 스님을 보고 계셨습니다. 달마 스님은 왜 신광 스님을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요? (…이야기를 들어 본다.) 그래요. 달마 스님은 신광 스님이 그 동안 기다려 왔던 인물인가를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다. 눈을 맞으며 달마 스님이 계신 소림굴 앞에 서 있는 신광 스님에게 달마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진리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부처님의 위없는 진리는 오랜 세월 동안 부지런히 노력하고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며, 참기 어려운 일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한데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것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구하려고 하느냐?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대사님! 단 한 말씀이라도 일러 주십시오.”
“네게 믿음이 있다면 그 표를 내게 보여라.”
달마 스님의 말씀에 신광 스님은 자신의 마음이라도 꺼내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신광 스님은 갑자기 칼을 빼어들고는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습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한겨울에 여름에나 피어나는 파초가 땅에서 피어나 신광 스님의 왼쪽 팔을 고이 받쳐 들었습니다. 파초 잎이 어떻게 생겼냐구요? 파초 잎은 꼭 바나나 잎처럼 생겼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신 달마 스님은 신광 스님에게 ‘혜가’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혜가 스님의 잘린 왼쪽 팔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가 붙었습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대사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주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신이 아닌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저의 마음이 편하지를 못합니다. 부디 저를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오.”
“불안하더냐? 그렇다면 네가 불안해하는 그 마음을 지금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스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혜가야, 이미 나는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느니라.”
달마 스님의 이 말에 혜가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린이 여러분들은 달마 스님과 혜가 스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나요? 많이 어렵지요? (…예.)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많이 어려워 알아들을 수 없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선문답이라고 합니다. 우리 친구들이 오늘처럼 선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또 의문을 가지면서 늘 진리를 깨달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겁니다. 아무튼 달마 스님께서 고향인 인도에서 동쪽에 멀리 떨어진 중국으로 오신 뜻은 아직은 중국에 없었던 새로운 불교인 선불교(禪佛敎), 즉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건너와 처음 만났던 양나라 무제 황제는 자신이 펼치려던 선불교와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이어 달마 스님은 양자강 북쪽의 위나라 숭산 소림사의 소림굴에서 면벽수행을 하며 새로운 불교인 선종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제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혜가 스님은 이렇게 중국 선종의 1대 조사인 달마 스님의 뒤를 이어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혜가 스님은 삼십사 년 동안 달마 스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선종의 가르침을 펴다 552년에 제자인 승찬 스님에게 3대 조사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달마 스님이 전한 선종의 가르침은 그렇게 중국에 전해져 오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종단 조계종도 바로 달마스님께서 전한 선종의 가르침도 달마스님께서 전한 선종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달마 스님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아주 존경받는 분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달마 스님의 상은 중국, 한국, 일본 할 것 없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그림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달마 스님의 그림을 집안에 걸어두거나 지니고 다니면 기가 넘쳐 안 되는 일도 잘 된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떤 일의 성공을 기원할 때 달마 스님의 상을 만들어 눈에 눈동자를 그리는 것부터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삼국 모두가 달마 스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달마 스님은 2대 조사가 된 혜가 스님에게 법을 전해 준 것을 증명하는 가사와 발우를 함께 전해 주셨습니다. 이 가사와 발우는 중국 선종에서 제6대 조사인 혜능 스님에까지 전해졌다고 합니다.
달마 스님은 게송을 지어(시를 지어) 제자 혜가 스님에게 전했습니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함이니, 한 송이의 꽃이 다섯 잎 피우면 열매는 스스로 맺으리.’
자! 이제 우리 친구들이 달마스님이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알게 되었나요?
이야기 셋. 나무꾼이었던 혜능스님 법을 전해 받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선종 불교는 초조인 달마 스님의 뒤를 이은 2조 혜가 스님에게 전해졌습니다. 혜가 스님은 다시 3조인 승찬 스님에게 법을 전했고 다시 선종의 법은 4조인 도신 스님에게 전해졌습니다. 도신 스님은 다시 5조인 홍인 스님에게 법을 전했습니다. 5조 홍인 스님에게 전해진 법의 맥은 다시 6조인 혜능 스님(638~713)에게 전해졌습니다. 6조에 이르러 비로소 선종 불교는 마침내 큰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달마 스님에 이어 선종 불교의 큰 꽃을 피워 6조가 되신 혜능 스님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어떤 스님이신지 선생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잘 들어 주기 바랍니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법이 전해져 6번째 법을 이어 받으신 혜능 스님은 당나라 태종 정관 12년(638년)에 중국의 남쪽 작은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은 노 가였으며, 세 살 때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어려서부터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아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살았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모두 힘이 들다보니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운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비단결 같고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산에서 나무를 해다 장에 팔러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탁발하는 스님의 독경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
‘마땅하게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우리 어린이 친구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요? (…아니요.) 그래요. 우리 어린이들에게 알 듯 말 듯한 이 말은 배움이 없었던 나무꾼의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나무꾼은 독경을 외고 있던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지금 외고 계시는 경은 무슨 경이옵니까?”
“《금강경》이라고 합니다.”
“그 경을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나는 이 경을 황매산에 있는 동선사라는 절에서 구하였습니다. 그 절에는 달마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으신 5조 홍인 대사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계신데, 제자가 천여 명에 이릅니다. 5조 큰스님께서는 이 《금강경》을 잘 읽고 실천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된다고 가르침을 주시니, 나도 열심히 독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무꾼은 곧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무꾼은 어머님의 허락을 얻고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수십 일 만에 황매산의 동선사에 계시는 홍인 스님을 찾아뵙고 예배드리자, 스님께서 나무꾼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그리고 무엇 때문에 왔느냐?”
“저는 영남 신주에 사는 백성으로, 멀리까지 와 스님을 뵙고자 함은 오직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해서입니다.”
스님은 나무꾼의 이야기를 듣고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너는 영남사람으로 오랑캐가 아니더냐? 그런데 어떻게 네가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사오나, 부처님의 마음(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인 저의 몸이 비록 스님의 몸과 같지는 않으나, 부처님의 마음으로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오랑캐인 주제에 제법 똑똑한 체 하는구나. 후원에 가서 일이나 거들도록 하여라.”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 마음이 스스로 항상 지혜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복을 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 스님께서는 다시 일만 하라 하십니까?”
“허허, 그 녀석 아는 소리 말고 방앗간에 가서 방아나 찧도록 하여라.”
그 뒤 나무꾼은 후원에서 장작을 패고 방아를 찧는 일을 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나무꾼이 홍인 스님을 찾아 동선사에 온 지도 여덟 달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홍인 스님께서 나무꾼이 일하고 있는 방앗간에 들르셨습니다.
“내 너의 생각이 쓸만하다고 생각하나, 악한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 너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느냐?”
“예, 제자도 스승의 뜻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홍인 스님은 제자들을 아침 일찍 모두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일인데 겨우 복이나 닦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너희들은 이제 그 동안 수행하여 깨달은 마음을 시를 지어 오너라. 만일 지어 온 시 속에 큰 뜻을 깨우쳐 품은 사람이 있다면, 달마 스님으로부터 나의 스승이신 도신 스님에게 전해져 5조인 내게 온 발우와 가사를 전하여 나의 뒤를 이을 제6대 조사로 삼으리라.”
홍인 스님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발우와 가사를 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신수라는 스님이 5조 홍인 스님의 법을 이어받아 6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수 스님은 고심 끝에 시를 지어 스님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이름도 밝히지 않고 붙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신수 스님이 써넣은 것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를 써 놓을 스님은 신수 스님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수 스님의 깨달음의 시는 이랬습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 / 마음은 밝은 거울 / 언제나 털고 닦아 / 먼지 묻지 않도록 하리.
이 글을 본 많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했습니다. 홍인 스님도 지나다가 이 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홍인 스님은 “이 시에 의지하여 도를 닦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큰 이익이 있으리라.”고 시를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조용히 신수 스님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은 시를 보니 너는 아직 깨달음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구나. 다만 문 밖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에는 들지 못하였다. 그러한 견해로는 커다란 진리를 구한다 하여도 얻지 못할 것이니, 더욱 수행에 힘쓰거라.”
그렇지만 홍인 스님과 신수 스님의 대화를 알지 못했던 대중들은 신수 스님의 시를 자랑스럽게 외우고 다녔습니다. 한 사미승이 외우는 소리를 우연히 들은 나무꾼은 사미승에게 게송이 적혀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신수 스님이 써 놓은 시 앞에 선 나무꾼은 마침 그 곳을 지나는 스님에게 정중히 말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이 없어 글자를 모르니 이것을 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나가던 스님이 소리 내어 읽어 주자, 다 듣고 난 나무꾼이 또 다른 청을 부탁했습니다.
“제가 아직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또한 한 시를 짓겠으니 받아 적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나무꾼의 이 말에 그곳에 모인 대중들은 우습게 생각하여 비웃기까지 하며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무꾼이 다시 말했습니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처음 마음을 낸 사람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처음 마음을 낸 사람에게도 높은 지혜가 있을 수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도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는 법이니, 행자라 하여 가벼이 본다면 한량없는 죄가 될 것입니다.”
나무꾼의 거침없는 이 말을 듣고 대중들은 움찔하였습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스님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말이 옳소. 내가 받아 적을 터이니 시를 읊으시오.”
나무꾼은 시를 불렀다. 스님은 나무꾼의 시를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적었습니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 밝은 거울 또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 어느 곳에 먼지가 일어나리요?
이 게송을 들은 스님들은 모두 놀라며 감탄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겉모양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더니 어찌 우리가 도인을 몰라보고 일만 부려먹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홍인 스님께서 다가와 나무꾼의 시를 훑어보고는 신발로 문질러 지워버리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 시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글이다. 가서 일들이나 하거라.”
홍인 스님은 그러고는 급히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또 다시 술렁거렸습니다.
“그럼 그렇지.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에 이제 절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돼 절의 방앗간에서 방아나 찧고 있는 자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다고….” 사람들은 나무꾼의 주변을 모두 떠나갔습니다.
선생님이 보기에도 아주 훌륭한 시인데 홍인 스님께서는 왜 이 시를 깨달음이 없는 시라고 하셨을까요? 분명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 넷. 혜능스님에게 법이 전해지다
글도 모르는 나무꾼이 자신의 시를 다른 스님에게 써 줄 것을 부탁을 했는데, 홍인 스님께서는 그 글을 읽어 보시고는 깨달음이 없는 글이라며 땅에 쓰여진 글을 발로 지우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이었습니다.
홍인 스님은 몸소 나무꾼 행자가 일을 하고 있는 방앗간으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방아는 다 찧었느냐?”
“이미 찧은 지는 오래 되었으나 아직 키질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홍인 스님은 지팡이로 디딜방아를 세 번 ‘탁 탁 탁’ 치고는 말없이 방앗간을 나가셨습니다. 나무꾼 행자는 홍인 스님이 방아를 세 번 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늦은 밤 삼경에 5조 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홍인 스님은 방안을 병풍을 쳐 가리고는 나무꾼 행자에게 《금강경》을 설법해 주셨습니다.
“마땅하게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하는 구절에 이르자 나무꾼 행자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마땅하게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지요? 그래요, 나무꾼이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감동을 받아 출가를 결심했었습니다. 나무꾼 행자는 홍인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나고 죽지 않음을 알았겠습니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흔들림 없음을 알았겠습니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진리를 배워도 유익함이 없고, 자신의 마음을 바로 알면 곧 이것이 참다운 수행자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며 부처인 것이니라.”
이 말씀과 함께 홍인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와 달마 스님에게서 전해진 가사와 발우를 나무꾼에게 전했습니다.
“이제 너는 6조가 되었다. 부처님의 법을 잘 받들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라. 달마 대사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으므로 가사와 발우를 전하여 믿음의 표시로 삼았느니라.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믿음에는 관심이 없고 가사와 발우만을 탐하니, 이후로는 전하지 말도록 하여라. 나쁜 무리들이 너를 해칠지도 모른다.”
홍인 스님께서 나무꾼 행자의 시를 발로 지웠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깨우칠 것인가 보다는 발우와 가사가 있으면 깨달음을 얻은 6조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앞서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되는 나무꾼에게 법이 전해진다면 발우와 가사가 전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무꾼 행자가 오히려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을 한 홍인 스님은 그 동안 스님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깊은 밤에 홍인 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혜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나무꾼 행자는 이제 행자가 아닌 6조 혜능 스님이 되었습니다.
가사와 발우를 전한 홍인 스님은 육조 혜능 스님에게 그날 밤 절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홍인 스님은 법을 전한 혜능 스님이 남쪽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혜능 스님은 남쪽으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가는 배가 있는 강가로 갔습니다. 홍인 스님께서 직접 배웅을 나와 손수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려고 하자, 혜능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 노는 제가 젓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앉아 계십시오.”
“아니다. 내가 너를 건네주리라. 앞으로 불법이 너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리라. 나는 삼 년이 지나면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너는 되도록 남쪽으로 가거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 불법을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혜능 스님은 5조 홍인 스님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계속 남쪽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혜능 스님에게 법을 전한 홍인 스님은 며칠이 지나도록 설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긴 대중들이 홍인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아니다. 다만 의발이 남쪽으로 갔을 뿐이다.”
의발이란 가사와 발우를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중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혜능 스님에게 전해진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수백 명이 혜능 스님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출가하기 전에 군대에서 장군의 지위에 있었던 혜명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남보다 더 빠르게 혜능 스님을 쫓아갔습니다. 바로 뒤까지 쫓아온 혜명 스님을 본 혜능 스님은 가사와 발우 때문에 쫓아온 것을 알고는 큰 바위 위에 가사와 발우를 올려놓고 말하였습니다.
“가사와 발우는 법이 전해진 믿음을 표시한 것인데, 어찌 힘으로 다투려 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혜능 스님은 숲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혜명 스님이 달려들어 가사와 발우를 가져가려고 하였지만, 가벼운 가사와 발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혜명 스님은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어 혜능 스님이 숨어 있는 숲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행자여, 나는 법을 듣기 위하여 온 것이지 가사와 발우를 얻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혜능 스님이 이 말을 듣고 숲에서 나오자 혜명 스님은 육조 혜능 스님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고는 스님에게 설법을 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하여 왔다면, 모든 번뇌와 망상을 다 버려라. 내 그대를 위하여 설법을 하리라. 착함도 생각하지 않고 악함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참된 면목인고?”
혜명 스님은 혜능 스님의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기쁨에 넘쳐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 동안 5조 홍인 스님의 문하에 있었으나 실로 제 본래의 성품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르침을 받으니 사람이 물을 마실 때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느껴 아는 것과 같나이다. 스님께서는 이제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 뒤 혜능 스님은 조계산 보림사를 개원하고, 온 중국에 선종불교의 선풍을 크게 드날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의 선종은 육조 혜능 스님에 이르러 크게 꽃피게 되었던 것입니다.
혜능 스님에게 꽃 피워진 선종불교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또한 달마 스님과 혜능 스님이 펴신 선종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육조단경》이라는 경전에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스님의 말씀을 기록한 글을 경이라고 붙이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만큼 혜능 스님의 가르침이 선종 불교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글자도 모르는 스님이지만 그 지혜로움이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신분이 미천하고 배움도 없었던 나무꾼을 육조의 재목으로 알아보신 홍인 스님도 참으로 대단한 분입니다. 아무리 보배로운 보석이라도 그 보석을 참 가치를 알고 갈고 닦아야만 더 빛나는 보석이 되는 법입니다. 우리 친구들도 홍인 스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바로 보고 또 내 마음 속에서 커 나가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인 불성을 갈고 닦아간다면 분명 더 빛나고 가치 있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부처님과 달마 스님, 혜능 스님의 큰 가르침입니다.
이야기 다섯. 기왓장으로 거울 만들기
육조인 혜능 스님께서 어느 날 제자인 남악 회양 스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네 문하에 준마(駿馬 - 뛰어난 말)가 날 것인즉, 그가 이 세상을 깨뜨릴 것이다.”
세상을 깰 준마라…. 오늘은 혜능 스님이 말씀하신 준마, 바로 마조 도일 스님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마조 도일 스님은 중국의 사천성 출신의 스님으로 스님들 중 유일하게 속가의 성씨를 그대로 썼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본래 가지고 있던 성씨를 버리고 보통 석가모니부처님의 석 자를 따서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속가의 성을 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조(馬祖)란 마씨인 성씨 뒤에 사람들이 존경을 나타내는 조라는 말이 합쳐져서 부르던 이름입니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의 석가모니가 부처님의 속가 성인 석가(샤카)라는 성을 따고 모니는 성인이라는 뜻을 지녀 ‘석가족의 성인’이라고 불리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도일이라는 법명보다는 마조라는 이름으로 스님을 불렀기 때문에 지금도 도일 스님하면 잘 몰라도 마조 스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조 스님의 아버지는 본래 청소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12살에 출가하여 육조 혜능 스님의 제자였던 남악 회양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회양 스님은 출가를 하러 온 그를 보고 큰 그릇이 될 것을 이미 알아보셨다고 합니다. 스님이 되어 도일이라는 이름을 얻은 마조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다른 스님들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도 마조 스님이 벽을 보고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스승인 남악 회양 스님께서 보시게 되었습니다. 남악 회양 스님은 좌선을 하고 있는 스님을 불러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 너는 좌선을 해서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느냐?”
마조 스님이 그 물음에 답을 했습니다.
“예, 저는 부처가 되는 성불을 하기 위해 좌선을 합니다.”
마조 스님의 말에 남악 회양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남악 회양 스님은 깨어진 기왓장을 한 장 들고는 마조 스님이 자주 지나가는 길목에 앉아 기왓장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마조 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도 남악 회양 스님이 무얼 하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마조 스님이 스승인 남악 회양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기왓장은 무엇에 쓰시려고 갈고 계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태연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 있느니라.”
어린이 여러분! 정말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래요 우리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이 말을 들은 마조 스님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으며 말했습니다.
“스님! 원 어떻게 기왓장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 수 있다고 하십니까?”
“그러냐.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찌 좌선만 한다고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한단 말이야? 앉아만 있다고 성불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차라리 이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것이 더 빠를 것 같구나.”
스승의 말에 마조 스님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스승인 남악 회양 스님께서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고 하신 것은 잘못된 수행을 하고 있는 자신의 수행을 바로잡아 주려는 것이었음을 알고는 스승에 대해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님! 그러면 어찌하면 성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악 회양 스님이 제자 마조 스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내가 다시 묻겠다. 너는 만약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소를 매질해야 하느냐? 아니면 수레를 매질해야 하느냐?”
“그야 소를 매질해야….”
“그런데 너는 어찌 수레를 매질하고 있단 말이냐? 선(禪)이란 앉고 눕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처님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지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것에 머물지 마라. 앉아서 성불하고자 함은 부처님을 죽이는 일일 뿐 영원히 도를 이루지는 못하느니라.”
그 때부터 마조 스님은 더욱더 열심히 수행을 해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스승인 회양 스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육조 혜능 스님의 말씀처럼 뛰어난 준마처럼 중국 선종의 맥을 이어 큰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마조 스님은 스승의 곁을 떠나 강서에 있는 한 절의 방장스님으로 추대되어 갔는데 그 곳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마조스님은 절 근처에서 사냥을 일삼는 석공이라는 사냥꾼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짐승을 죽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냥꾼과 중생을 살리는 스님과의 만남 때문인지 사냥꾼은 놀라 먼저 멈추어 섰습니다. 당황해 하는 사냥꾼에게 먼저 마조 스님이 물었습니다.
“보아하니 사냥꾼 같은데 화살 한 개로 몇 마리나 잡을 수 있는가?”
“화살 하나로야 한 마리를 잡지요.”
“아주 보잘것없는 솜씨구만.”
마조 스님의 말에 약이 오른 사냥꾼은 스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스님! 스님도 화살을 쏘실 줄 안단 말입니까? 그럼 스님은 한 개의 화살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그야 내가 쏘았다 하면 한 무리는 잡네.”
사냥꾼이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스님이 어찌 짐승의 생명도 귀함을 모르고 그렇게 많이 화살을 쏘아 죽인단 말입니까?”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네가 쏘는 것은 불쌍한 중생이지만, 내가 쏘는 것은 중생의 어리석음일세. 자네는 불쌍한 중생을 쏠 뿐 어찌하여 자네의 어리석음은 쏘지 않는가 말일세.” 이어 마조 스님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이 자는 오랜 겁의 무명 번뇌를 쌓아왔으나 오늘 갑자기 멈추기는 했는데….” 스님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사냥꾼은 활을 던지고 스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제자로 받아 가르침을 달라고 했습니다. 스님은 사냥꾼이던 석공을 출가시켜 자신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석공이 부엌에서 공양을 하고 있는데, 마조 스님이 이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석공아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예 스님! 저는 지금 소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습니다.”
“그럼 소에게 어떻게 먹이를 먹이느냐?”
“예. 소가 풀밭으로 가려고 하면 저는 사정없이 고삐를 당깁니다.”
그러자 마조 스님은 껄껄껄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소치는 방법을 아는구나.”
아니 왜 공양을 하다말고 소 이야기를 서로 한 걸까요?
불교에서는 소는 곧 마음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를 찾는다는 것은 진리, 즉 마음을 찾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절에 보면 대웅전의 바깥벽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는데 역시 소를 찾아 나서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소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찾아나가는 구도의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조 스님이 석공 스님에게 마음은 잘 찾고 있는지를 물은 것이고, 석공 스님은 그 마음을 찾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마조 스님은 주로 법문을 통해 “마음 밖에서는 부처가 없다(심외무불 : 心外無佛).” 는 말씀을 설법하시며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셨다고 합니다.
마조 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친구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래요.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 또한 흉내만 낸다면 부처님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사냥꾼의 이야기에서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생명을 죽이는 화살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는 지혜의 화살을 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가르침입니다.
듣고도 생각만 하거나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면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마음 닦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해 보는 그런 어린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야기 여섯.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라.
이번 시간에는 마조 스님의 법맥을 이은 백장 회해 스님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백장 스님이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다가 부처님 상인 불상을 보고는 훌륭해 보였던지 자신도 커서 부처님이 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적 말대로 스님이 되었습니다. 백장 스님은 <백장청규>라는 책을 쓰신 스님으로도 유명하신 분인데, 이 <백장청규>라는 책은 처음으로서 선종 사찰의 직위와 제도를 마련하여 각자의 임무를 부여하고, 스님들의 법규를 기록한 책으로서 후에 선종의 종통을 이어 나가게 하는 제도로 정립이 되었습니다. 백장 스님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는 5계를 철저히 지키게 하고 또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이든 일반스님이든 일을 하게 해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며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날 젊은 스님들이 백장 스님에게 설법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우선 밭에 나가 일을 해라. 일이 끝나면 내가 불법을 설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젊은 스님들은 열심히 밭에 나가 백장 스님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돌아와 다시 백장 스님에게 설법을 청했지만, 백장 스님은 스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님이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일, 밭을 가는 일, 풀을 메는 일 등 해야 할 일을 해내는것이 바로 불법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을 말없는 가르침을 통해 젊은 스님들에게 설하신 것이었습니다.
백장 스님은 94세의 나이에도 제자들과 함께 들에 나가 일을 했는데 제자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스님이 평소에 쓰시던 농기구를 감추어 놓았다고 합니다. 백장 스님은 자신의 농기구를 찾다 찾다 못 찾자 그날부터 공양을 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일도 안 했는데 어찌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고집이셨습니다. 결국엔 감추어 둔 백장 스님의 농기구를 다시 돌려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스님은 들에 나가 일을 하시고는 돌아와 공양을 다시 드셨다고 합니다. 백장 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의 제자들은 게으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백장 스님이 95세의 나이에 열반에 들자 31년 후 당나라의 무종 황제가 즉위를 하자 국가의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불교는 커다란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모두 일은 하지 않고 백성들이 바치는 공양물로 호의호식하며 배불리 먹는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물론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당시 이런 불교 탄압으로 당나라의 불교 사찰 중 4만 8천 6백 개나 되는 많은 절들이 폐허가 되고, 26만 명의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을 당했으며, 1만 5천 명의 스님들이 노비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벌을 받을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스님들이 서로 몸을 숨기고 살 길을 찾을 때, 오로지 불가(佛家)의 대 재난 중 오로지 선종(禪宗)의 사찰들만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선종의 사찰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동안 백장 스님의 말씀에 따라 모두 일을 하며 모두 자급자족을 했기 때문입니다. 백장 스님의 지혜로운 혜안이 몇 십 년의 앞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불가의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선종은 왕성하게 발전을 해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신하들을 불러 놓고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성공의 비결에 대한 책을 써 오너라.”
몇 달 후 신하들은 제각기 심혈을 기울여 책을 지어 왔는데, 그 분량이 한 수레 정도는 족히 되었다고 합니다. 왕은 다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백성들이 다 볼 수가 있겠느냐? 한 권으로 압축을 해 오너라.”
기일이 되어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역시 두툼한 분량의 책 한 권이었습니다. 왕은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책이 두꺼우니 시간이 없는 백성들이 어디 볼 수가 있겠느냐? 한 마디로 요약해 오너라.”
신하들이 한 권의 책을 요약하고 또 요약해서 왔는데 그 한마디는 우리 친구들도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무엇이었을까요? (…생각을 들어본다.) 참 많은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답이 있을까요? (…웃으며) 신하들이 요약을 해 온 그 한마디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웃어넘길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는 백장 스님의 말씀 또한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신하들의 요약정리와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고서 어떻게 부처님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옛날 어떤 곳에 아들 삼형제를 둔 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하나같이 모두 몸이 허약하거나 게으름뱅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들의 장래가 늘 걱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이도 많이 들고 병도 나서 죽을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아버지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유언을 했습니다.
“우리 밭은 토박하고 좋지 못하지만, 그 속에 내가 일찍이 금덩이를 묻어 두었으니, 너희는 내가 죽은 후에 그것을 발굴해서 잘 써라.”
아버지가 이 말을 마치고 눈을 감자 아들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는 삼형제가 각각 삽과 괭이, 호미를 들고는 밭을 모두 일으켰습니다. 그 밭을 다 파 보았으나 금덩어리는 찾지 못하고 모두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은 이왕 땅을 깊게 파서 이룬 땅이니 그저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곡식을 심었는데, 예년보다 곡식이 두 배나 더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아들들은 두 배나 곡식이 더 수확되자 재미가 붙어서 매년 그 밭을 갈아 곡식을 심어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를 열심히 지은 덕분에 형제들의 생활도 부유하게 되고 몸도 건강해져서 모두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백장 스님이 정하신 청규처럼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도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일을 하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으로 받아 들여야겠습니다. 어쩌면 백장 스님께서는 삼형제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은 아니셨을까요?
우리 친구들도 백장 스님께서 정하신 청규처럼 우리 친구들에게 하루하루의 의미를 찾아 각자의 청규를 정해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이야기 일곱. 엄지손가락 스님
구지 스님은 중국 무주의 금화산에서 몇 십 년 동안 오로지 부처님의 법을 구하기 위해 수행에만 힘쓰고 계셨습니다. 스님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많은 사람들이 스님께 가르침을 구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불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일뿐 아무 말도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구지 스님께서 절을 떠나 며칠 출타하시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이가 먼 곳에서 구지 스님에게 법을 물으러 왔습니다. 절에는 구지 스님은 출타 중이라 계시지를 않았고 구지 스님을 시봉하던 어린 동자스님 만이 절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법을 묻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이렇게 왔는데, 마침 구지 스님께서 출타 중이시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에 법을 구하러 온 사람은 동자스님에게 그 동안 큰스님을 모시며 들었던 법문이라도 기억이 나면 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동자스님은
“우리 스님의 법문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들으시나 큰스님에게 들으시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동안 많이 보고들은 바가 있어 저도 스님처럼 법문을 할 수 있습니다.”
동자스님의 말을 들은 사람은 기뻐하며 비록 구지 스님은 뵙지 못하게 되었지만,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동자스님이 먼저 말했습니다.
“그럼 먼저 저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참다운 도리인지를 물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불법입니까?”
정중하게 동자스님에게 질문을 하자 동자스님은 구지스님처럼 엄지손가락을 바로 세워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동자스님은 질문을 받을 때 마다 구지 스님이 하는 대로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불법을 얻으러 왔던 사람은 의아했지만, 큰스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아쉬운 맘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법을 구하러 왔던 사람이 산을 내려가던 길에 마침 출타를 마치고 절로 올라가던 구지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지 스님은 그 사람으로부터 절에서 동자스님과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 동자스님에게 들었던 엄지손가락 법문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구지 스님은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야기해도 다를 바 없으니 잘 생각하여 수행에 전념하시오.”
하지만 구지 스님은 절로 돌아오면서 몹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절로 돌아오자 동자스님이 달려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고는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스님! 스님! 제가 스님이 안 계실 때 어떤 손님이 법문을 듣고자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안 계신다고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제가 보기에도 안 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가 큰스님 대신 법문을 했습니다.”
동자스님은 구지 스님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으로 의기양양하며 말했습니다.
“그래. 잘했구나. 어떻게 해 주었느냐?”
“스님께서 늘 하시던 대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을 뿐입니다.”
“아까 네가 그 사람에게 한 법문을 나에게도 한 번 해 다오.”
“스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가 너에게 한 번 듣고 싶구나. 어떠한 것이 불법의 참뜻이냐?”
그러자 동자 스님은 우쭐대며 이전과 같이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세워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구지 스님은 동자의 엄지손가락을 미리 준비해 둔 예리한 칼로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자 스님의 엄지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동자스님은 갑작스런 스님의 행동에 구지 스님을 원망하며 절을 떠나려고 짐을 쌌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만약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견을 들어본다.) 그래요, 우리 친구들도 무척이나 당황하고 놀랐을 겁니다. 동자스님이 울며 짐을 싸 절을 떠나기 위해 막 일주문을 나가려는 순간 동자 스님에게 구지 스님이 큰소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동자야! 어떤 것이 불법의 참뜻이냐?”
이 소리에 동자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버릇처럼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 보인 동자스님의 엄지손가락은 이미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구지 스님이 잘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이미 동자스님의 엄지손가락은 구지 스님께서 잘라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동자스님은 있고 없는 것이 둘인 듯하나 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잘린 동자스님은 다시 구지 스님께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더 열심히 수행 정진해서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동자스님처럼 뜻도 모르면서 흉내를 내는 것은 흉내일 뿐이지 깨달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내가 어떤 마음과 뜻을 지니고 하는 행동인가에 따라 참된 행동이 되기도 하고 거짓 행동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잘 알아야겠습니다. 흉내가 아닌 바르게 알려고 하는 참 마음이야말로 우리 친구들을 한층 더 키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은 이만 여기서 이야기를 마쳐야겠습니다.
이야기 여덟. 교만한 마음은 하늘보다 높다.
도림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항주에 이 지역을 다스릴 ‘백거이’라는 자사가 새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백거이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당대의 이름난 시인으로 알려진 ‘백낙천’이라는 분으로, 본명인 백거이라는 이름보다는 다른 이름인 백낙천으로 더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또한 경륜이 풍부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본래 학식과 견문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벼슬이 자사에까지 오르니 자못 우월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백낙천이 항주자사로 부임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주에서 멀지 않은 사찰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다는 도림 스님을 찾아 행차를 나섰습니다. 백낙천은 자신의 학문이 당나라에서는 따를 자가 없다고 늘 생각해온 터라 학식이 있거나 도가 높다는 이가 있으면 찾아가 어려운 질문을 해 창피 주기를 즐겨했습니다. 사실 지금 그가 도림 스님을 찾아가는 것도 당나라에서도 이름 높았던 큰스님인 도림 스님을 만나 저울질해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는 나쁜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어디 얼마나 도가 높은지 내 한 번 직접 시험을 해보리라.”
백낙천은 수행원들과 함께 도림 스님이 계시다는 절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도림 스님은 83세의 고령으로 날이 청명한 날이면 으레 사찰 입구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했습니다. 항주자사 백낙천이 도림 스님을 찾아오던 날도 날이 매우 맑고 좋아 도림 스님은 늘 오르던 늙은 소나무에 올라가 좌선을 하고 계셨습니다. 절 입구까지 온 항주자사 백낙천은 늙은 소나무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던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백낙천은 이 모습이 매우 아슬아슬하고 위태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백낙천이 소나무 위의 스님을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스님의 거처가 너무 위태하고 위험해 보입니다.”
이 말을 들은 도림 스님은 수행 중이던 눈을 떠 아래를 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더 위험하네.”
그러자 백낙천이 다시 스님을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벼슬이 이미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또 이러한 안전한 땅을 밟고 섰거늘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다는 말이오?”
백낙천이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를 했습니다.
도림 스님은 그가 학문과 벼슬에 대한 자만심이 큰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이 기회에 그의 교만한 마음을 깨우쳐 주려고 곧바로 쏘아붙였습니다.
“티끌 같은 세상의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쉼 없이 타고 있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큰스님들은 정말 다르신 모양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시고 이렇게도 옳은 말씀을 해 주시니 말입니다. 백낙천은 자신의 교만하고 자만한 마음을 스님에게 들키고는 자사라는 벼슬에 있음에도 그만 기가 팍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백낙천은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도림 스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제가 좌우명으로 삼을 법문을 한 구절 들려 주십시오.”
처음 스님을 저울질해보려는 불손한 마음을 바꾸어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도림 스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니라.”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모든 악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하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도림 스님에게 무척이나 대단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말씀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도림 스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백낙천이 신통치 않다는 듯 말하자 도림 스님은 백낙천의 말을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알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이야기이지만 팔십 먹은 늙은이도 행하기는 힘든 법이니라.”
이 말을 들은 백낙천은 비로소 깨우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그 가르침을 실천해 이바지하지 않으면 교만과 번뇌만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당대의 대 문장가요 대 학자요 정치가였던 백낙천은 이렇게 그 동안의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부처님 말씀에 귀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공부하고 수행하는 불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백낙천은 불제자가 된 후 스스로를 ‘향산 거사’라고 부르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부처님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 땅보다 무거운 것이 무엇이고, 하늘보다 높은 것이 무엇이고, 바람보다 빠른 것은 무엇이고, 온 세상의 풀보다 많은 것은 무엇입니까?”
수수께끼와도 같은 질문을 받으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셨다고 합니다.
“계율의 덕은 땅보다 무겁고 교만한 마음은 하늘보다 높다. 과거를 기억함은 바람보다 빠르고 떠올리는 잡념들은 풀보다 많으니라.” 《잡아함경》
우리 친구들이 이 부처님의 말씀을 잘 이해를 못 하더라도 “교만한 마음은 하늘보다 높다.”는 말씀만은 꼭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을 향해 저울질을 하고 자신의 학문이 최고라고 여겼던 백낙천의 교만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참된 진리와 자신을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마음임도 꼭 알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