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잔뜩 낀 날은 호박을 켜 넌다. 농사를 지은 것도 있고, 장에서 사 온 것도 더러 있다. 중대가리 같은 놈에 혹은 팔뚝 같은 그것을 바구니에 담고 도마를 챙겨 옥상으로 간다. 바닥에 도마를 놓고 칼질을 한다. 간단없이 떨어지는 조각이 똑 고르지가 않다. 두꺼운가 하면 얇고, 혹은 뒤둥그러진 채 썰어진 것도 많다.
호박고지는 보기보다 썰기가 까다롭다. 너무 얇으면 바닥에 들러붙고 두꺼우면 더디 마르기 때문이다. 써는 두께가 적당해야 겨우내 맛있는 호박고지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참 널다 보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빈 그릇을 모아 계단을 내려가면서, 지금은 계시지 않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가을이면 하루 종일 말리고 거둬들이는 일에 여념이 없으시던 분.
공부를 한답시고 객지 생활을 해 온 만큼 그런 일엔 전혀 문외한이었다. 그런 내가 가을이면 호박 등을 썰어 말리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가을걷이를 하는 틈틈이 밑반찬을 말리는 것으로 소일하던 어머니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되기 전 집에 있으면서 그것을 눈여겨 본 것이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한나절 만에 일어나면 집안은 늘 조용했다. 벌써 들어 나가셨나 하고 나와 보면 뜰에는 그렇게 온갖 곡식이 널려 있게 마련이다. 마당 한 가운데 널린 것은 메주콩이다. 일 차 탈곡기에 돌린 뒤 깍지만 멍석에 널어 말린 터이다. 얇게 펴서 양달에 말리면 배배 꼬이다 못한 꼬투리에서 수많은 콩이 튀어 오른다.
며칠이 지나면 아버지는 그것을 뒤적여 도리깨질을 하신다. 몇 번 내리치다 뒤집고 그러다간 다시 뒤적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콩도 어지간히 빠져 나온다. 빠져나간 꼬투리는 버리고 아직 알맹이가 남은 것만 모아서 그렇게 널어놓은 것이다. 그 다음 봉당에 있는 것은 녹두이다. 유난히 잘 튀는 것 때문에 그런 곳에 널어 두신 것 같다.
두 겹 세 겹 뒤틀려가는 꼬투리를 들추면 포로소롬한 녹두알이 바글바글하다. 밭일을 끝낸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몸빼 주머니에 조금씩 따 담은 것들이다. 종일 책을 보다 해거름 밖으로 나오면 잔뜩 지쳐 있던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꼬투리를 한 줌 꺼내는 게 보이곤 한다. 그런 식으로 한 열흘간 모아 말리면 제사 때 쓸 부침거리로 충분했던 것이다.
마당은 제법 넓었다. 갈볕이 찰랑이는 펌프샘을 돌아가면 헛간이 나온다. 초가집을 함석지붕으로 개조하면서 남겨둔 것으로 당장은 쓰지 않는 온갖 것들이 그 속에 들어 있다. 바늘이 빠진 축음기며 고장 난 라디오, 그리고 석유곤로와 심지가 바짝 마른 남포등이 되나 마나 팽개쳐져 있다. 그 때만 해도 귀했던 물건이지만, 당시로는 드물게 텔레비전이나 전기밥솥 등이 있는 우리 집으로선 벌써 켸케묵은 물건이 되고 만 것이다.
엄마가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은 바느질을 할 때였다. 시골 아낙 치고는 드물게 양장 기술이 있던 터라 우리들 교복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 입히곤 했다. 딸 형제가 많아서 물려 입는다 해도 맏언니 옷이 작아질 때는 다시 옷을 지어야 했고, 그 때마다 엄마는 골방지기처럼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바느질을 하는 것 외에 드나드는 것은 고추를 말릴 때이다. 그럴 때 작은 사다리는 늘 방 모퉁이에 세워져 있고 어머니는 아침저녁 그것을 타고 지붕을 오르내렸다. 며칠 전부터 다듬은 고추를 내다 말리는 것이다.
텃밭에 심은 고추가 빨갛게 약이 오르면 한 소쿠리씩 따다가 되는 대로 봉당에 쏟아 놓는다. 그 다음 고추 딸 때가 되면 또 한 소쿠리 정도를 또 펼쳐 놓는다. 그런 식으로 며칠 동안 두면 적당히 끄득끄득해진다. 그렇게 잊어버린 듯 돌아보지도 않다고 생각이 난 듯 꺼내는 것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이다.
엄마가 마루 끝에서 가위질을 할 때는 빗줄기가 생철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툭툭 투두둑 하는 소리의 강약에 따라 어머니의 가위질도 속력이 가중된다. 잔 것은 한 번 배를 가르고 씨를 털어낸다. 그러나 좀 더 큰 것은 두 번 쪽을 내고 앞서와 같이 씨를 털어서 밀어낸다. 그렇게 병이 든 것은 도려내고 멀쩡한 것만 바구니에 옮겨 담는다.
고추가 널릴 때는 온종일 붉은 서기가 오르는 것 같다. 멍석보다는 작고 둥구미보다는 작은 대발에 그것은 널려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통풍이 잘 되게 하려는 뜻이다. 기실은 그냥 말려도 될 일이었다. 고추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얼금얼금한 발이었으니 말이다.
고추가 마를 동안에는 또 잠자리가 내 돌아다녔다. 잠자리 중에서도 유난히 빨갛고 투명한 고추 잠자리였다. 싸릿대에서 졸던 잠자리 날개는 유난히 빨갛게 보인다. 붉은 날개에 햇살이 스며들면 날개는 더 붉게 보인다. 완연히 붉은 색인데도 속이 들여다보이는 게 며칠 간 널어 말린 고추살을 꼭 닮았다. 투명하고 말갛게 드러나는 붉은 빛은 곧 가을볕을 투과해야만 형성되는 빛깔이라 하겠다.
잠자리를 보면 누구나 잡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빙빙 무리지어 날 때는 감히 엄두를 못 내다가 앉기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늘을 선회하듯 돌던 잠자리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을 때면 나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헛간에서 울타리까지의 댓 걸음 정도를 오 분은 걸려 가는 성 싶다. 숨죽이며 가야 하기 때문에 제법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이었다.
성큼 걸음을 떼어 놓는 게 아니라서 더 힘들었다. 먼저 오른 발 뒤꿈치부터 내딛고 남은 발바닥은 땅에 살짝 붙인다. 그 다음 왼 발도 그런 식으로 내딛는다. 한 발짝만 떼면 울타리가 닿는 지점에서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손을 내민다. 이어 엄지와 검지를 나란히 하고 그것을 바짝 밀어 꽁지를 잡는다.
하지만 실패였다. 꽁지가 닿았다 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잠자리는 펄쩍 날아 오른다. 번번이 그랬다. 그리고 그 때마다 잠자리가 약을 올린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두어 걸음 앞에서 놓치는 게 아닌 꼭 마지막 순간에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도 하늘을 보면서 다 잊어버린다. 잠자리를 따라간 눈길에 닿는 하늘이 너무나 파랬기 때문이다. 물고기 등처럼 푸른 물결이 그 속에서 잠자리 역시 헤엄을 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잠시 잠자리가 다시 눈앞으로 내려오는 게 보인다. 서서히 그리고 날개도 가지런하게 앉을 곳을 찾는다. 말하자면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의 모습 그대로였다.
잠자리를 놓치고 나서 헛간을 따라 돌면 박덩굴이 나온다. 월에 씨를 뿌리고 나면 젖은 흙을 비집고 뽀조록한 싹이 쳐들렸지. 그 다음 비 올 때마다 쑥쑥 자란 덩굴이 지붕에까지 턱 어울리면, 웃음 문 박꽃이 잔뜩 피어났다. 이어 그것이 지면서 새알심 같은 열매가 달리고, 그러면 가을은 꽤나 깊어지곤 하였지.
저녁이면 메뚜기를 잡으러 간다. 땅 그늘이 제법 길어진 속을 헤집고 가다 보면 얼마 안 있어 텃논이 나온다. 익을 대로 익어 거둘 때만 기다리는 논에 들어서면 수많은 메뚜기가 튀어 오른다. 아직 이슬이 내리기 전이라서 그런가 하고 논둑에 잠시 자릴 잡는다. 이슬이 축축해지면 무거워진 날개로 도망가기 힘들어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갑자기 주위가 보랏빛으로 덮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노을이 지곤 했다. 거의 다 감긴 하루의 자투리에 불이 댕겨지는 순간이다. 가뜩이나 말라버린 계절에 가상이부터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이라고나 할까.
불꽃이 훨훨 잉걸불처럼 타오른다. 손에 땀을 쥐는 순간 갑자기 물새 떼가 서쪽 하늘을 가로지른다. 다음이면 또 불꽃이 스러지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물새의 젖은 깃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저녁으로 무거워지는 물새의 날개 때문에 불꽃이 잦아든다는 게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필경은 저물녘 강변이나 냇가에 앉아 쉬다가 예까지 날아왔을, 어쩌면 젖은 그 날개 때문에 하루의 마지막인 서쪽이 잦아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듯 타고도 타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또 다른 내일의 산실로 바뀌는 것으로도 생각했다.
산들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조차도 싱그러운 내음을 풍긴다. 그로써 속속들이 영글고 익어가는 계절을 생각했다. 쐐기나 송충이 등 징그럽기만 한 여름 벌레를 생각하면 잠자리나 메뚜기 등은 얼마나 상큼한 뉘앙스인가. 여름 이슬에 바짝 약이 오르는 뱀의 독을 생각하면 가을의 그것을 먹고 사는 귀뚜라미의 노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같은 이슬과 바람인데도 축축하고 냉한 여름의 그것에 비해 이 가을의 맑고 따사로운 내음은 그렇듯 쾌적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그렇게 있다 보면 짧은 가을 해는 곧 지고 말았다. 해가 떨어지면서 주위는 금방 캄캄해진다. 건너편 산에 성급한 저녁별이 뜨는 걸 보고 나는 그제야 집으로 향했다. 개울을 건너 고샅길에 이르면 곧 바로 우리 집 대문이다. 그리고 반쯤은 열린 사립문 틈으로 저녁을 먹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다.
어머니의 가을은 늘 그렇게 동동거리는 분위기였다. 부지깽이도 덤벙대는 가을이면 남달리 바쁘게 지내셨지. 그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까맣게 잊은 듯 겨우살이에 들어가던 어머니.
어머니가 병이 든 것은 내가 스무살 때였다. 언제부턴가 속이 좋지 않다는 말씀이 잦더니, 급기야는 위암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다.
가을볕은 또 얼마나 쨍쨍했던가.
아버지의 하늘
아버지가 맷돌을 돌리고 있다. 양지쪽에 자리를 깔고 앉아 검버섯 낀 손으로 맥없이 돌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그루팥이 오르르 쏟아진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이따금 맷돌을 돌리시던 아버지, 그 무렵 중학생이었던 나는 또 그것을 천둥소리 같다고 한 옛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간단없이 돌아가는 맷돌 소리를 듣고 웬 천둥이냐고 읊었다는 매월당 김시습, 그 때가 다섯 살이었다는데 어쩌면 그런 착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기만 하였다. 맷돌 소리가 두렵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리라. 비 올 때의 천둥소리도 사실은 무서운데 하물며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맷돌은 쓰고 나면 손잡이를 빼서 따로 간수하게 된다. 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하는데, 거치적거린다고 빼서 간수했다가 그런 낭패를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준비가 안 된 거라면 다시 시작할 수가 있지만, 맷돌과 곡식 자루를 갖다 놓고 탈 준비를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작을 못한다면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일일 밖에.
김시습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일찍 소년등과를 한 까닭에 벼슬을 잠시 보류할 정도로 영특한 그였다. 이제 나이가 차서 조정에 나가 가진 기량과 포부를 펴 보이려는 참에, 삼촌이 조카를 몰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는 상황을 목격했으니, 그 마음은 오죽했을 것인가.
그는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했다. 다른 것은 다 갖춰졌는데 어처구니가 없어 맷돌질을 못하는 것처럼, 어수선한 조정은 그가 설 자리가 아니었다. 타고난 재주로 일찍이 장래를 촉망은 터지만, 불의가 판치는 세상은 그에게는 역겨울 뿐이었다.
하기야 그도 억측일 수는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시습의 친구인 정창손이 의리를 배반하고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온갖 영화를 누린 걸 생각하면 대꼬챙이 같은 성격이 탈이랄 밖에 없겠다. 불의에 가담하고 영화를 누리느니 차라리 세상을 등지리라는 각오로 머리를 깎고 금강산에 들어간 것이다.
어려서 지었다는 글귀와 그의 행동을 비교해 본다. 맷돌이 돌아갈 때마다 들리는 천둥소리에서 그는 하늘이 무서운 의미를 거듭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 자신 남보다 빠른 출세가 보장되어 있건만 의리를 앞서 생각하는 그에게는 그저 부질없는 일이었다. 인륜이 떨어진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깍짓동만한 몸뚱이보다 손바닥만한 얼굴 때문에 산다고 그는 미련 없이 세상을 버렸다. 뜬구름 만도 못한 권세 따위야 그에게는 초개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막 재주를 펼쳐 보이려는 시점에서 본 삼촌이 조카를 배반하는 사건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돛폭에 가득 바람을 안고 항구를 떠나는 배에게 불어 닥치는 태풍 같이, 어수선한 정국은 이제 막 입신출세의 길에 들어선 그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세조가 던지는 미끼를 덥석 물었던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린 건 사실이다. 반면 미끼를 마다한 사람들은 사육신으로 죽음을 당한 바 되었다. 다행히 살아난 이른바 생육신이라는 사람들도 계속되는 정치적 압박으로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였다. 물가에 옮긴 단종 어머니의 무덤을 복원해 달라는 상소를 했다가 실패하자 추강 남효온은 일생을 유랑하며 보낸다. 영월로 가서 단종이 죽은 뒤 삼년상을 치른 원호도 순탄한 삶은 아니었다. 그 외에 성담수와 조여 이맹전 역시도 그랬다. 재주나 배경으로 보아 얼마든지 유복한 삶일 수 있을 텐데, 스스로 그런 길을 택하였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도 하늘의 섭리가 느껴지곤 한다. 수양대군에게 가담해서 누린 부귀가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는 모르지만, 기실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제의를 물리친 사람들은 이름을 천고에 길이 남겼다. 전자가 구차하게 산 대신 더러운 이름을 남긴 거라면, 후자는 깨끗이 죽어 이름조차 향기로운 인물로 남은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다섯 살 때 그런 시를 읊은 것 때문에 더 알려졌지만, 나중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곧은 의기를 떨친 것이다.
이 모든 얘기는 기실 아버지에게서 들은 터였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위인전에서도 읽은 바 있지만, 얘기의 윤곽은 어려서 이미 파악한 셈이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글귀를 읽고 나서는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 얘기의 요지는 곧 이 세상 가장 무서운 것은 하늘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까닭모를 혼란에 사로잡히던 기억도 난다. 하늘이 무섭다니, 언제나 푸르기만 하늘이 꼿꼿하기만 한 아버지에게 그렇게 두려운 공간이었을까. 터럭보다 가벼운 게 또 잇속이라면, 천금보다 중한 건 의리라는 말씀도 덧붙이곤 하셨다.
좀 더 자라서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 때문인 줄 알았다. 보통 때는 맑기만 한 하늘이 이따금 그렇게 표변하는 걸 본 느낌과 함께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그 때의 이미지를 되새긴 것이다.
그러다 이제 그 무섭다고 한 이미지는 섭리로 생각해 보았다. 벼락이 내려 사람이 죽고 나무가 타는 그것도 물론 두려운 일이지만, 더 두려운 것은 순리를 거스르고 정의를 외면하는 그게 아닐까 싶다. 더 놀라운 말은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어도 자기가 지은 업보는 피할 길이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또 하늘이 무서운 건 천둥번개가 치는 공간으로서가 아닌, 엄연히 내려다보고 있는 분명한 섭리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아버지의 말씀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책이나 매스컴에서 본 것 이상으로 기억에 담아두고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올해 여든넷이다. 그런데도 아직 허리가 꼿꼿하고 말소리가 쩌렁쩌렁한 아버지를 나는 보통의 노인들과는 달리 생각해 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양복 바지에 메이커 티셔츠를 입으면 날아갈 듯 경쾌하게 보이셨지. 그렇게 생전 늙을 것 같지 않던 아버지도 세월은 거스르지 못했는지 올 어 눕는 날이 많아지셨다. 그리고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버지에게서 대쪽같이 곧은 기질을 보곤 한다.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기질에서 손해를 본다 해도 바른 일이 아니면 손해를 본다 해도 과감히 물리칠 수 있는 기질을 배웠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런 애기에 끌리는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대쪽 같은 성격이라는 게 스스로 실감난다. 옳지 못한 얘기를 들으면 귀를 씻고 싶어질 정도였으니, 스스로도 어지간하지 싶다. 그러다 그 냇물에 말을 먹이러 왔다가 도로 끌고 갈 정도로 한 술 더 뜨는 얘기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고소를 한 적이 있다.
마을 뒤로는 울창한 숲이 많았다. 마을 앞을 지나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 가면 소나무 우거진 언덕이 나온다. 비늘 같은 껍질이 그 간의 세월을 말해 주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그 나무에 이따금 백로가 날아들 때면 그림자까지 푸르러질 것 같은 기세에, 보기만 해도 서늘한 느낌이다. 자칫 물이 들까 봐 까마귀 옆에는 가지도 않는 백로의 기개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무리에 끼어들지 못하고 결국에는 죽음을 자초한 또 한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에 반발했다가 새남터에서 처형된 성삼문이었다.
한 겨울 그 나무에 흰 눈이 덮일 때의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겨울이면 상록수를 제외한 나무는 다 잎이 떨어지는데, 혼자서 푸른 나무가 더욱이 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 때문이다. 성삼문은 곧 그렇게 한 그루 소나무를 그려 왔던 것이다.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이 되고 싶다고 했던가. 죽어서 한 그루 소나무 되었다가 세상이 눈에 덮일 때 혼자 푸르게 독야청청하리라던 기개가 새삼 떠오른다. 이어서 살았을 때 백이와 숙제를 결연히 탄하던 글귀가 스쳐 지나간 것이다.
백이와 숙제가 한 번은 왕의 그릇된 처사를 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간신들에게 둘러 싸여 있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벼슬을 내 놓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만 캐먹다가 죽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렇게 절개의 표상으로 되어 왔는데 성삼문은 그마저도 마땅치 않게 여겼다. 수양산 역시 주나라 땅인데, 거기서 생긴 나물은 왜 먹었느냐는 탄식이다.
자기 같으면 고사리조차도 먹지 않았을 거라는 기백이 산천을 떨게 했던 수양 대군 앞에서도 굴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마음은 꺾지 못하리라는 말에 수양대군도 떨었다고 하니, 그 의기가 얼마나 푸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소나무의 푸른 잎이 돋보이는 건 아무래도 겨울이다. 여름에는 다른 나무도 푸르기 때문에 겨울만치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다 잎이 다 떨어지는 겨울 게다가 눈이라도 쌓이면 언덕을 배경으로 한 푸른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불의가 독버섯처럼 퍼질 때, 의로운 사람 하나가 얼마만한 가치를 남기는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칼이 암만 잘 들어도 죄 없는 사람의 목은 베지 못한다는 것, 게다가 죽음마저도 죽음이 아닌 영원의 생명을 잉태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지금도 그 의로운 행동의 표상으로 단연코 그를 꼽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말씀을 참 좋아했는데, 엄마는 무척 힘들어 하셨다. 모르기는 해도 철두철미 매사에 틀림이 없는 그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릴 때는 그것을 보고 배부른 투정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도 이해할 만 하였다. 그나마도 우리는 자식이라서 존경한다고는 해도 어머니에게는 커다란 스트레스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다 더 자상한 성격이었음을 맏딸인 나는 알고 있다. 아들 둘에 딸이 다섯인데도 어느 자식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다감한 성품이었으니 말이다. 궁벽진 시골 마을에서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그래도 용돈만은 넉넉히 주시곤 했다. 가령 천원을 달라고 하면 이천 원을 주는 식이다. 너나없이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용돈을 달라 하면 으레 깎아서 주시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용돈만큼은 넉넉히 타 쓴 것 같다.
아버지가 무슨 돈이 많아서 그렇게 했을까만, 지금 생각하니 순전히 우리들을 위한 배려였다. 용돈을 깎아서 주면 자식이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아버지 나름의 지론 때문이다. 흉년이 들어 돈이 궁할 때는 빚을 내서라도 금고에 돈을 넣어두고 용돈을 주시는 것이다. 학창 시절 방학 때 어디 놀러 가기라도 하려면 책을 산다는 등의 거짓말로 돈을 타내던 친구들에 비해 우리가 떳떳이 놀러 간다는 말을 하고 돈을 타 낼 수 있는 것도 아버지의 그러한 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돈을 넉넉히 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술 담배도 못하는 까닭에 객쩍은 돈을 쓸 리도 없지만, 원래부터 검소한 성격이라 한 푼을 서푼으로 알고 쓰신다. 우리 남매 일곱과 엄마 아버지 등 아홉 식구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일 없이 살림을 꾸려 갈 수 있었던 순전히 그런 아버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또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강조하셨다. 힘들고 고역스러운 일을 누구나 피한다면, 기꺼이 그 일을 맡아 하라는 뜻이다. 딸 다섯이 결혼할 때도 그 이론은 틀림없이 적용되었다. 남들 부모는 맏이는 우선 제쳐 놓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그런 자리를 더 마음에 두시는 편이다. 사윗감의 성격이나 직장 등 겉으로 드러난 조건보다 잠재된 조건의 여부를 따지는 편이다. 아무리 많은 조건이 구비되었어도, 마음 바탕 하나가 바르지 못하면 소용없다고 하신다. 그 말은 또 여러 가지 조건이 부족하여도 마음 하나만 올곧으면 그게 차라리 더 낫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꼿꼿한 아버지도 예외는 있었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처사였다. 약한 사람이면 더 한 정성을 보이셨다. 아버지에게 비상국보다 싫은 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친절했으니, 아버지의 깊은 면모는 넓은 아량과 이해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런 정성은 어머니에게 특히 더했다.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아버지는 뭐든 들어 주셨다. 어머니가 거의 힘든 일을 모르고 산 것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다. 가령 한 겨울에도 아침밥을 짓는 것은 아버지였다. 읍내 학교로 통학을 하는 우리는 늘 새벽밥을 먹어야 했는데, 병 때문에 몸이 무거운 어머니에게는 아무래도 벅찬 일이었다. 대신 아버지가 그 일을 맡은 것이다. 물론 전 날 밤에 쌀이나 국거리를 씻어 안치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더불어 아침 밥상이나 반찬 등은 미리 다 준비해 두지만, 아침에 우리를 깨워 먹이고 도시락을 싸는 것은 아버지가 해 주신 셈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은 지금도 모를 일이다. 당신 세대의 완고한 가부장적 제도를 생각하면, 부부 사이의 금슬은 시대와 여건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돌아보면 병석에 누워 계신 날이 더 많은 어머니였다. 큰 살림은 아니어도 논밭 전지가 많았고 게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계신 터라 늘 일이 많았다. 그러나 무던한 아버지는 별다른 잡음 없이 살림을 잘 이끌어 나가셨다. 일을 척척 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그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늘 집에 두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말하자면 선비 타입이었다. 그런데도 바쁜 일과를 무리 없이 잘 치러내셨으니, 집에는 늘 머슴이 있었던 것이다. 꼭 머슴이 아니어도 농사철만 되면 동네 아저씨들이 번차례로 드나들며 일을 거들곤 하셨다. 어머니를 위해 안살림을 돌봐 줄 사람도 연신 드나들었다. 이를테면 가난하게 사는 이웃집 처녀애들이 집안 일을 많이 거들어 주었다. 세 끼 밥도 제대로 먹기가 어려운 그 때, 남의 일을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거의 일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또래의 대부분은 집안일에 시달리는 게 다반사였다. 특히나 맏딸은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는 게 상례인데, 나는 여고까지 졸업을 했다. 그리고 네 명의 여동생 중 둘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머지 둘은 대학을 졸업했으니 생각하면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들과 똑같이 대학을 보내고자 하신 만큼, 본인이 원치 않아 그리 된 것이라 이렇다 할 불평은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처사에 비해 인복은 없으셨던 것 같다. 아니 또 그런 것에는 연연하지도 않는 게, 할 만큼 일을 하고 나면 나머지 복은 하늘이 내려주는 거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뭐랄까 자기 할 일만 생각할 뿐, 그에 따른 대가나 보수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고나 할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얼마 전에 상처를 한 까닭이다. 중년에 상처는 망처라고 하지만, 막힘이 없는 아버지는 지금까지 혼자 너끈히 사는 터이다. 매사 막힘이 없는 성격 때문이었지만, 나는 우선 너무 잘해 줘서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이 분분할 정도로 금슬이 유별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유별난 성품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정평이 나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하루는 이웃 사람이 담배 열 갑을 사들고 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사양했다. 건넌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한두 번 그러시다가 받으실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는 자꾸 이러면 앞으로 자네 일을 대신 해 주지 않겠다고 언성까지 높이셨다. 무안해진 그 사람이 하릴 없이 방에서 나가자, 자네 그 담배는 아버님께 드리게 라고 하시던 부드러운 말씀이 지금도 쟁쟁하다.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만큼 관공서에 갈 일이 있으면 으레 아버지가 도맡아 처리하시곤 했다. 그 때도 그분의 아들이 무슨 사고를 저질러서 벌금이 나왔는데, 가난한 살림인 것을 뻔히 아는 아버지가 수 차례 읍내를 다니면서 벌금이 적게 나오도록 주선을 해 주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아버지가 너무한 것 같다는 항의를 했다. 자기 일을 잘 해결해 주어서 고마운 인사로 담배를 사들고 온 것인데, 그처럼 강경하게 물리칠 것까지야 뭐 있느냐고 딴에는 대담한 말을 했는데, 뜻밖의 말에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동네 사람 거의가 일자무식이고, 따라서 내가 앞으로도 그런 일을 맡아할 터인데 이런 식으로 계속 받다가는 나도 타성이 된다.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 어느 날 아무 것도 사들고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을 꺼리게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렇게 또 거절은 했어도 받은 거나 진배없다. 받지 않는 대신 담배를 좋아하는 자기 아버지께 드리게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생각하면 그게 벌써 사십 여년 전 일인데,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 비해 나는 마음이 참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만 보면 시댁 식구에게 잘해라 그저 무조건 잘해라 하는 말씀이 늘 역겨웠던 것이다. 아버지도 사실은 시댁의 내용을 뻔히 아신다. 그런데도 그런 말씀을 하느냐는 나의 반론이 꺼림칙했는지, 내가 그들이 사람스러워서 잘하라는 게 아니다. 정말 잘해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도 잘하면 그 사람이 잘 되는 게 아니라 네가 잘 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것을 의식하기보다는 누구에게든 잘해야 되는 게 사람이 도리인 까닭이다 라는 말씀을 꼭 덧붙이신다.
사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마음이 넓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으니 나로서도 딱한 일이다. 망나니 같은 시동생은 그렇다 쳐도 교활한 방법으로 친정 재산을 가로채는 시누이는 아무래도 잘 대해 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 시댁은 사고뭉치들만 모여 사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집에 맏이로 온갖 구답을 치르면서 나는 또 다른 집 아버지처럼 맏이 자리가 들어오면 왜 물리치지 않았느냐고 비방했다. 중매가 들어오면 우선 맏이인 경우는 퇴짜를 놓는 게 보통이 아니던가. 그런 데로 보내면 딸이 힘들다는 게 그 이유인데, 아버지는 그게 아니다. 맏이 자리가 힘들다면 그럴수록 괜찮은 자리라고 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곧 힘든 자리를 기피하면 세상의 구답은 누가 치르겠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후렴처럼 덧붙이는 말씀이 맏이 자리를 거부하면 내 집 며느리는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 때문인지, 나 역시 맏이라는 데 대한 두려움은 거의 모르고 살았다. 딸 다섯 중의 맏이라 해도 다른 집처럼 집안 살림에 진력이 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지 오 년 만에 들어온 맏이 자리도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멋모르고 하는 게 결혼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사나흘 일정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으로 들어온 날부터 시작된 풍파는 끝날 줄을 몰랐다. 시부모 내외는 그렇다 쳐도 여간내기가 아닌 시동생과 시누이는 늘 골칫거리였다. 무뚝뚝한 남편과는 달리 영악한 그들은 남의 비위도 잘 맞추는 이를테면 수단가였던 것이다. 집안 일만 해도 그랬다. 시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에도 남편보다는 시동생이 더 한 몫을 했던 것이다. 우직하기만 한 남편은 사람을 상대해야 되는 아버지 사업을 이끌어가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보니 맏이가 아닌 엉뚱한 자식들이 아버지의 사업에 관여했고 남편은 자연히 겉돌게 되었다.
남편은 한 마디로 못생긴 사람이다. 자기 성격이 그래서 아버지의 사업에 관여를 못한다면 농사라도 열심히 지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도 동생들이 자기의 주권을 뺏으려 한다는 불평만 일삼았으니 정말이지 딱한 일이었다. 시아버지도 작은 아들을 더 아끼시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았다. 시아버님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자식에게 넘겨주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자식이든 그 일을 잘 해 나가느냐 하는 게 당신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마음만 선량할 뿐, 맺고 끊는 게 분명치 못한 성격이라 늘리기는커녕 밑천만 까먹게 될 맏이가 아버지로서도 탐탁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게 아니었다. 자기 분수는 파악하지 않고 아버지의 처사만 갖고 불평을 일삼는다. 뭔가를 결심한다 해도 대부분 작심삼일이다. 선량한 반면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한 마디로 비적격자였고, 그 때문에 힘든 건 아무래도 나였다. 처음 결혼하고는 어찌어찌 지나갔는데, 문제는 아이들이 어지간히 자라고 시동생 이 결혼을 한 다음이었다. 아수 동서로 들어온 여자가 시동생 못지않게 교활한 점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별나게 강직한 성격이다. 고분고분하게 굴다가도 비위가 틀리면 거침없이 바른 말을 쏘아붙인다. 나의 이런 점을 보고 시어른은 버릇이 없다고 하시지만,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나는 주변에 있는 여자들, 즉 부모님 모시기 싫어 남편을 꼬드겨 살림을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그리고 재산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끝없는 선물 공세를 펴다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돌아보지도 않는 추세에 남달리 분개하곤 했다.
그 즈음 시아버님께서 병이 나셨다. 노인이 되면 흔히 찾아오는 반신불수 증상이 찾아온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화장실은 드나들지만, 숟갈질이 서투르셨다. 할 수 없이 시어머니가 진지를 떠 먹여 주시는데 그게 아무려면 당신이 잡숫는 것처럼 만만할 리는 없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역정을 내고 심지어 반찬 그릇을 집어 던지기까지 하신다. 하루 이틀 아니고 그런 일이 계속되자, 지겨워진 어머니는 밖으로 다니기 시작하셨다. 거저 나가시기는 그랬는지 텃밭을 가꾼다는 구실로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나가서 저녁 때 들어오신다.
그러다 보니 음식 수발은 내가 들게 되었다. 며느리라 어려워서 그런지 어머니가 시중들 때보다는 얌전히 받아 잡수신다. 그런 모습이 안 되어서 부러 말을 붙이면, 아픈 사람을 두고 밖으로만 돈다고 어머니 흉을 보신다. 그 말에 내가 또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아버님은 잘도 나가시던데요? 하면 엄마 편을 든다고 역정이다.
그런 날 밤이면 또 어김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한참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아버님이 옥상 계단으로 올라가는 기척이 들린다. 그렇게 계단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호통을 남기고 올라가면 어머니는 또 어쩔 줄 모르고 따라 가신다. 정말 말씀대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겁을 내는 기색이다. 병간호에 지쳐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그러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곤 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다시는 떨어져 죽는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실 터이다. 그것도 모르고 올라가는 것을 말리니까 더 길길이 날뛰는 것을 어머니는 미처 깨닫지 못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차라리 어머니의 처사가 더 현명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에 나처럼 그런 성격이라면 밤중에 계단을 올라가 떨어진다는 해프닝은 벌어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으니, 그 후로도 아버님은 사흘돌이로 그런 소동을 피우신다. 그러면 어머니는 또 죽자 하고 따라가셔서 끌고 내려오신다. 그 다음 땀에 전 옷을 벗어 한 밤중에 빨래를 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이다.
아버님은 그렇게 꼬박 삼년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걸핏하면 화분을 던져 거실을 흙투성이로 만들어 놓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더니, 결국 삼년을 넘기지 못했다. 화분을 던진다 해도 흙만 쏟아질 뿐 한 번도 깨지지 않은 것을 보면 거저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 돌아가신 지 삼년이 지난 지금 그 심정을 헤아려 본다. 원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해도 병이 들면 누구나 짜증을 내게 마련이다. 아픈 데 없이 멀쩡해도 방 안에 들어앉아 있으려면 기실 답답한 노릇인데, 수족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병에 걸려 갇혀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싫은 사람과는 대화하는 것조차 꺼리는 내가 그만큼 이해를 한다는 것은 나로서도 드문 일이다. 당연한 일이기는 해도 남편보다는 둘째 아들과 시누를 더 편애했던 시아버지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아버지의 돈을 빼돌린 다음에는 병 든 아버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일의 결말이 그렇게 나는 게 정석이기는 해도 그들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상대를 않는 대신 속으로 담아둔 생각은 있었다. 자칫하면 제 무덤을 제가 파는 수가 있음을 생각했다. 꼴리는 대로 한 번 해 봐. 욕심에 빠져 살면 그 말로는 뻔한 걸 아는 이상 겁날 게 없어.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 돈을 가로채 봤자 손해 보는 사람은 따로 있어. 가질 게 아닌데 염치없이 갖는 사람은 그 가진 두 배를 잃을 것이요. 가질만한 계제인데 양보하면 양보한 오히려 두 배로 얻을 게 있음을 믿곤 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 대해서는 남다른 신념으로 일관하는 터였다. 그 생각이 확신에 가까울 정도인 것도 기실은 그 때문이다. 얼핏 보면 불공평한 세상 같아도,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구나 하고 이해될 만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신념으로 굳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괴롭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무지 신경 쓸 게 없는 두 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자취를 할 때도 빨래 한 가지를 시키지 않으며, 심지어 반찬까지 제 손으로 해 먹는다. 딸이라면 혹여 몰라도 아들이 그렇다면 누구든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이들 문제만큼은 장담할 게 없음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인데도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대가 없이 치러 온 자신의 수고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힘들게 살고 있다. 아이들 문제만 빼놓고는 무엇 하나 해결된 게 없는 상황이다. 그래 하루는 며칠 작정을 하고 친정에 간 일이 있었다.
어려서 살던 낡은 집이 저만치 보이자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대문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봉당에서 맷돌질을 하고 계신다. 웬일인가 싶어 여쭈었더니 그저 웃기만 하신다. 짐작에 이따금씩 그렇게 거저 맷돌질을 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모르기는 해도 어머니 생각을 하셨을 테지. 우리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저런 식으로 가끔 꺼내서 돌려 보고 하셨을 게 눈에 선하다.
그런 마음도 잠시 버릇대로 아버지께 푸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게 뭐 그리 문제냐고 일축을 하신다. 세상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더 많은 법이라고 하면서 그걸 일일이 말하다간 입만 아프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자식 편을 들지 않는다고 고까워했던 나도 곧 아버지의 심중을 알아차렸다. 어려서 수없이 들어 온 하늘이 무섭지 다른 건 겁날 게 없다고 하시던 말씀도 아울러 떠올랐다.
아버지는 내게 너무 정확한 게 탈이라고 하셨다. 세상 이치나 경우를 따지는 데 너 만한 사람은 드물다 하면서도, 그게 오히려 발목을 걸고 있다는 귀띔을 주신다. 똑똑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던가. 지혜로운 사람은 또 너그러운 사람을 당하지 못하는데, 똑똑하고 지혜로운 대신 너울가지가 없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느냐는 것이다.
여자는 밉지 않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터였다. 지나치게 예뻐도 흠이라고 했다. 반면 보기 싫은 얼굴이서도 곤란할 테니, 그저 밉지 않으면 된단다. 당초에는 그렇게 애매한 말이 어디 있나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았다. 밉지 않다고 해서 예쁜 것은 물론 아니다. 예쁘지는 않아도 밉지는 않은 얼굴이 사실은 더 드물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마음을 더 중요시한 게 아니었을까. 불의에는 대꼬챙이 같으면서도, 올바른 경우에는 무조건 굽히는 당신 마음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쁘기만 한 것보다, 얄밉지 않게 예쁜 얼굴을 추구한 게 아니었을까. 그저 깐깐한 것보다는 경우 앞에선 물러나기도 할 줄 아는 사람이길 원했을 것이다.
친정에 다녀오면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줄곧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바른 소리를 최대한 지양하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생각과 말이 빠르다 보니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빨랫줄에 이불이 가득 널려 있다. 애들 아빠가 어머니의 이부자리를 널어놓은 것인데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다. 대부분 무거운 솜이불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할 수 없이 내가 걷어야 했다. 방안의 이불을 다 내다 넌 것이라 여간 많지가 않았다. 게다가 전기장판 등은 워낙 무거운 것을 추단할 때는 짜증까지 났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이불을 내다 너는 날은 꼭 늦게 들어온다는 소리를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내가 웬만하면 시키지도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 바람에 나는 또 언제 이불 같은 것 걷은 적이 있느냐고 대꾸를 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여든이 넘으셔서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그전에는 모든 일을 다 척척 했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사실이 그랬더라도 듣기 좋은 말은 아닌데, 현재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빙자해서 사실을 부풀리는 건 성격상 묵인할 일이 아니었다. 당신 젊어서 일 한 번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했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말할 필요야 어디 있는가.
어머니는 김장 한 번도 혼자 하신 적이 없다. 메주 쑤는 일은 물론 장 담그는 일도 꼭 내가 거들어야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에 대한 불평은 결코 아니다. 나 역시도 일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만큼, 즐겨 도와 드리기는 했다. 그런데도 대소사 일을 혼자 다 해 온 것처럼 말하는 건 아무래도 역겨웠다. 혼자 한 일이라 해도 공치사 할 일은 아니다. 일하는 솜씨 또한 각자 다른 것인데, 현재의 불리한 상황을 악용하는 그 것만은 그냥 넘길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또 밉지 않은 얼굴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릇이 작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릇이 커야 곡식이 많이 들어가고 마음이 넓어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데, 나는 왜 그런 말투를 수용하지 못하는 걸까.
천둥 같은 맷돌 소리와 함께,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린다.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것은 우선 남이 아닌 내게 우선 적용되어야 하는 것을 요즈음 깨닫곤 한다. 즉 나의 잘못은 즉 티 같이 작은 것이라 해도 대들보 정도로 부풀려 반성하라는 것을 생각했다. 반면에 남의 과오는 대들보 같다 해도 티끌 정도로 다독여 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범주는 나 또한 덮어 주는 편이다. 잘못이나 실수라면 그렇게 얼마든지 묻어갈 수 있는데, 앞서 말한 의도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그것만은 아무래도 덮어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또한 잘못이나 실수처럼 받아들여야 함을 알았다. 자신이 그랬다 하면 물론 추상같이 엄해야 되지만, 남이 그런 거라면 그것을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싫어하고 꺼리는 사람도 이따금 스승이 된다는 것은 그 때문임도 새삼 알겠다. 역겨운 행동을 보게 되면 우선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자신을 돌아본 후가 아닌, 다만 역겹다는
이유로 비난을 한다면 그보다 무책임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더 많은 게 세상이기는 하다. 그래도 무심하지는 않은 게 하늘이었으니, 못된 짓을 하던 사람이 벼락을 맞고 죽는다는 얘기가 두서없이 떠오른 것이다. 천둥이 칠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에 앞서 잘못한 일은 없는지 돌아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맷돌을 볼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수없이 겪어야 하는 세상살이와, 천둥소리 같은 위력은 언제고 한 번은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으니, 저지르는 사람은 천벌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 재앙이라는 것 또한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닌 스스로 만든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섬뜩해질 때가 많다.
나보다 동생이 많은 재산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면 마음
엄마가 서울에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는 까닭 없이 긴장했다. 성격이 까다롭거나 유별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모처럼 다니러 오셔서도 와이프가 힘들어 한다고 당신이 잡술 밑반찬이며 부식을 준비하는 분이다. 아니 그것을 핑계 삼아, 내가 좋아하는 잡채며 탕수육 등을 맛깔스럽게 요리해 갖고 오신다.
그 날도 두 시 버스로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어머니가 처음 오신다고 할 대 나는 강변역까지 모시러 갈 생각을 했었다. 회사가 강남에 있기 때문에 내가 가는 길도 만만치 않으나,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전철을 갈아 탈 생각을 하면 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응하지 않으셨다. 내가 좀 힘들어도 그게 낫지, 남의 눈치 보는 줄 뻔히 아는데, 나 편하자고 나오랄 수는 없다고 우기신다. 근무 시간이라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이시다. 어쩌다 있는 일이고 또 부모님을 위한 일이라, 말하기도 좋다 했더니 그게 탈이 된다며 어머니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신다. 서울에 올 때마다 마중 나오면 은연 중 타성에 젖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피치 못할 일이 있어 오지 못할 때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느냐는 게 말씀의 요지였다. 그리고는 어려서 들려 준 얘기를 벌써 잊었느냐는 언질을 주곤 하신다.
참 그러고 보니 어려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문제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려운 살림을 핑계로 동화책 등을 사 주지 못했던 어머니는, 대신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대부분 교훈적인 내용이라 딱딱한 감도 있었지만, 퍽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약용이라는 인물이었다. 벼슬자리에 오른 그가 모처럼 선물을 준비해 가면 어머니는 되레 역정을 내셨다. 요즈음 말로 하면 공직에 있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 같다. 듣고 난 아들이, 이것은 봉급을 절약한 것이고 과히 비싸지도 않은 거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또 한 번 어머니의 호통이 떨어졌다. 내용인즉 한 번 받고 끝나면 몰라도 자꾸만 받다 보면 나도 사람인 이상 욕심이 동할 것이다. 그러면 더 값진 선물을 바랄 테고 그러다 보면 너 또한 효도를 한답시고 봉급으로는 턱없는 물건을 생각할 게 아니냐. 그러다 보면 공금을 축내지 않는다고 못 할 터이니 이야말로 아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몰아붙였다는 내용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강직한 분이셨다. 들려주시는 얘기의 골자도 그렇고, 주관이 뚜렷한 기질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매사에 철저한 자세로 대응한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남의 얘기를 하는 보통의 아줌마들에 비해 확실히 달랐다. 시간이 나면 틈틈이 취미 생활을 즐기셨다. 여가란 것도 기실은 잠자는 시간을 아끼고 외출도 줄이면서 만든 시간이다. 매사에 빈틈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다른 사람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당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간 셈이다.
자신에게는 그렇듯 철저한 분인데도, 남에게는 한량없이 너그러웠다. 자기 눈에 있는 티는 최대한 골라내면서도, 남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우정 덮어줄 줄 아신다. 그럴 때마다 어린 나는 또 어머니 삶의 소신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나부터도 남의 단점은 잘 보는 대신 자신은 합리화하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래 어느 때는 어머니의 본을 받아 실행하고자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보면, 어머니의 그것은 천성인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어머니는 말 대신 행동으로 모본을 보이는 편이다. 자식인 내게도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잘못이 있다 해도 스스로 깨우치게 할 뿐, 이런 저런 말로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없으시다. 그러면서도 잘 한 일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칭찬을 하신다. 절도가 있었다고나 할까. 대부분 칭찬에는 약하고 꾸중은 가차 없이 내리는 걸 보면 나는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지곤 하였다.
모처럼 시골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맷돌을 타신다. 아니 내가 가기도 전에 벌써 맷돌질은 끝났으니, 도착할 즈음이면 정성스럽게 지진 녹두 부치미가 다과상에 올라 와 있다. 연하게 치자 물을 들이고 그 위에 김치와 쪽파가 수놓은 것처럼 가지런하다. 늘 그랬지만 그럴 때마다 먹기가 아깝다는 생각에 잠깐 머뭇거리다가 손으로 뜯어 간장을 찍어 먹곤 하였다. 귀찮은 것 때문에도 요즈음 흔한 믹서를 쓰실 만한데도 여전히 맷돌을 고집하시는 어머니, 하지만 나 역시도 그런 어머니를 구태여 만류하지 않는다. 여렸을 때 바깥 광 한 편에 자리를 깔고 맷돌을 돌리실 때마다 울리던 천둥 천둥 하던 울림이 오래된 기억으로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무슨 습관처럼 맷돌을 돌리셨던 것 같다. 양지쪽에 자리를 깔고 앉아 검버섯 낀 손으로 맥없이 돌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그루팥이 오르르 쏟아진다. 그 무렵 중학생이었던 나는 또 그것을 천둥소리 같다고 한 옛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그도 사실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얘기지만, 맷돌을 돌릴 때마다 연상이 되는 것을 보면 나도 어머니의 생각에 젖어든 셈이다. 간단없이 돌아가는 맷돌 소리를 듣고 웬 천둥이냐고 읊었다는 매월당 김시습, 그 때가 다섯 살이었다는데 어쩌면 그런 착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기만 하였다. 맷돌 소리가 두렵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리라. 비 올 때의 천둥소리도 사실은 무서운데 하물며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맷돌은 쓰고 나면 손잡이를 빼서 따로 간수하게 된다. 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하는데, 거치적거린다고 빼서 간수했다가 그런 낭패를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준비가 안 된 거라면 다시 시작할 수가 있지만, 맷돌과 곡식 자루를 갖다 놓고 탈 준비를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작을 못한다면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일일 밖에.
김시습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일찍 소년등과를 한 까닭에 벼슬을 잠시 보류할 정도로 영특한 그였다. 이제 나이가 차서 조정에 나가 가진 기량과 포부를 펴 보이려는 참에, 삼촌이 조카를 몰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는 상황을 목격했으니, 그 마음은 오죽했을 것인가.
그는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했다. 다른 것은 다 갖춰졌는데 어처구니가 없어 맷돌질을 못하는 것처럼, 어수선한 조정은 그가 설 자리가 아니었다. 타고난 재주로 일찍이 장래를 촉망은 터지만, 불의가 판치는 세상은 그에게는 역겨울 뿐이었다.
하기야 그도 억측일 수는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시습의 친구인 정창손이 의리를 배반하고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온갖 영화를 누린 걸 생각하면 대꼬챙이 같은 성격이 탈이랄 밖에 없겠다. 불의에 가담하고 영화를 누리느니 차라리 세상을 등지리라는 각오로 머리를 깎고 금강산에 들어간 것이다.
어려서 지었다는 글귀와 그의 행동을 비교해 본다. 맷돌이 돌아갈 때마다 들리는 천둥소리에서 그는 하늘이 무서운 의미를 거듭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 자신 남보다 빠른 출세가 보장되어 있건만 의리를 앞서 생각하는 그에게는 그저 부질없는 일이었다. 인륜이 떨어진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깍짓동만한 몸뚱이보다 손바닥만한 얼굴 때문에 산다고 그는 미련 없이 세상을 버렸다. 뜬구름 만도 못한 권세 따위야 그에게는 초개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막 재주를 펼쳐 보이려는 시점에서 본 삼촌이 조카를 배반하는 사건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돛폭에 가득 바람을 안고 항구를 떠나는 배에게 불어 닥치는 태풍 같이, 어수선한 정국은 이제 막 입신출세의 길에 들어선 그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세조가 던지는 미끼를 덥석 물었던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린 건 사실이다. 반면 미끼를 마다한 사람들은 사육신으로 죽음을 당한 바 되었다. 다행히 살아난 이른바 생육신이라는 사람들도 계속되는 정치적 압박으로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였다. 물가에 옮긴 단종 어머니의 무덤을 복원해 달라는 상소를 했다가 실패하자 추강 남효온은 일생을 유랑하며 보낸다. 영월로 가서 단종이 죽은 뒤 삼년상을 치른 원호도 순탄한 삶은 아니었다. 그 외에 성담수와 조여 이맹전 역시도 그랬다. 재주나 배경으로 보아 얼마든지 유복한 삶일 수 있을 텐데, 스스로 그런 길을 택하였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도 하늘의 섭리가 느껴지곤 한다. 수양대군에게 가담해서 누린 부귀가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는 모르지만, 기실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제의를 물리친 사람들은 이름을 천고에 길이 남겼다. 전자가 구차하게 산 대신 더러운 이름을 남긴 거라면, 후자는 깨끗이 죽어 이름조차 향기로운 인물로 남은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다섯 살 때 그런 시를 읊은 것 때문에 더 알려졌지만, 나중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곧은 의기를 떨친 것이다.
어머니의 얘기를 바탕으로 나는 나름대로 그 분야에 대한 분석을 하게 되었다. 순간의 욕망에 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른다 해도 필경은 서도 읽은 바 있지만, 얘기의 윤곽은 어려서 이미 파악한 셈이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글귀를 읽고 나서는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 얘기의 요지는 곧 이 세상 가장 무서운 것은 하늘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까닭모를 혼란에 사로잡히던 기억도 난다. 하늘이 무섭다니, 언제나 푸르기만 하늘이 꼿꼿하기만 한 아버지에게 그렇게 두려운 공간이었을까. 터럭보다 가벼운 게 또 잇속이라면, 천금보다 중한 건 의리라는 말씀도 덧붙이곤 하셨다.
좀 더 자라서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 때문인 줄 알았다. 보통 때는 맑기만 한 하늘이 이따금 그렇게 표변하는 걸 본 느낌과 함께 하늘 무서운 줄 알라는 그 때의 이미지를 되새긴 것이다.
그러다 이제 그 무섭다고 한 이미지는 섭리로 생각해 보았다. 벼락이 내려 사람이 죽고 나무가 타는 그것도 물론 두려운 일이지만, 더 두려운 것은 순리를 거스르고 정의를 외면하는 그게 아닐까 싶다. 더 놀라운 말은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어도 자기가 지은 업보는 피할 길이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또 하늘이 무서운 건 천둥번개가 치는 공간으로서가 아닌, 엄연히 내려다보고 있는 분명한 섭리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어머니의 말씀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책이나 매스컴에서 본 것 이상으로 기억에 담아두고 살았던 것이다.
그 어머니도 올해로 벌써 여든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허리가 꼿꼿하고 말소리가 쩌렁쩌렁한 어머니를 나는 보통의 노인들과는 달리 생각해 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스커트에 블라우스만 입으면 날아갈 듯 경쾌하게 보이셨지. 그렇게 생전 늙을 것 같지 않던 어머니도 세월은 거스르지 못했는지 올 어 눕는 날이 많아지셨다. 그리고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머니에게서 대쪽같이 곧은 기질을 보곤 한다.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기질에서 손해를 본다 해도 바른 일이 아니면 손해를 본다 해도 과감히 물리칠 수 있는 기질을 배웠던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의 그런 애기에 끌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대쪽 같은 성격이라는 게 스스로 실감난다.
마을 뒤로는 울창한 숲이 많았다. 마을 앞을 지나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 가면 소나무 우거진 언덕이 나온다. 비늘 같은 껍질이 그 간의 세월을 말해 주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그 나무에 이따금 백로가 날아들 때면 그림자까지 푸르러질 것 같은 기세에, 보기만 해도 서늘한 느낌이다. 자칫 물이 들까 봐 까마귀 옆에는 가지도 않는 백로의 기개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무리에 끼어들지 못하고 결국에는 죽음을 자초한 또 한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에 반발했다가 새남터에서 처형된 성삼문이었다.
한 겨울 그 나무에 흰 눈이 덮일 때의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겨울이면 상록수를 제외한 나무는 다 잎이 떨어지는데, 혼자서 푸른 나무가 더욱이 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 때문이다. 성삼문은 곧 그렇게 한 그루 소나무를 그려 왔던 것이다.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이 되고 싶다고 했던가. 죽어서 한 그루 소나무 되었다가 세상이 눈에 덮일 때 혼자 푸르게 독야청청하리라던 기개가 새삼 떠오른다. 이어서 살았을 때 백이와 숙제를 결연히 탄하던 글귀가 스쳐 지나간 것이다.
백이와 숙제가 한 번은 왕의 그릇된 처사를 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간신들에게 둘러 싸여 있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벼슬을 내 놓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만 캐먹다가 죽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렇게 절개의 표상으로 되어 왔는데 성삼문은 그마저도 마땅치 않게 여겼다. 수양산 역시 주나라 땅인데, 거기서 생긴 나물은 왜 먹었느냐는 탄식이다.
자기 같으면 고사리조차도 먹지 않았을 거라는 기백이 산천을 떨게 했던 수양 대군 앞에서도 굴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마음은 꺾지 못하리라는 말에 수양대군도 떨었다고 하니, 그 의기가 얼마나 푸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소나무의 푸른 잎이 돋보이는 건 아무래도 겨울이다. 여름에는 다른 나무도 푸르기 때문에 겨울만치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다 잎이 다 떨어지는 겨울 게다가 눈이라도 쌓이면 언덕을 배경으로 한 푸른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불의가 독버섯처럼 퍼질 때, 의로운 사람 하나가 얼마만한 가치를 남기는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칼이 암만 잘 들어도 죄 없는 사람의 목은 베지 못한다는 것, 게다가 죽음마저도 죽음이 아닌 영원의 생명을 잉태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지금도 그 의로운 행동의 표상으로 단연코 그를 꼽지 않았던가 말이다.
어머니는 또 보다 자상한 성격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여러 식구가 사는데도 짜증 한 번 내시는 법이 없다. 엄격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우유부단한 아버지와 나이가 차도록 미혼인 삼촌은 내가 봐도 골칫거리였다. 그런데도 어느 가족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다감한 성품이었다. 그런 중에도 우리들 용돈만은 넉넉히 주시곤 했으니 천원을 달라고 하면 이천 원을 주는 식이었다. 어머니가 무슨 돈이 많아서 그렇게 했을까만, 지금 생각하니 순전히 우리들을 위한 배려였다. 용돈을 깎아서 주면 자식이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어머니 나름대로의 지론 때문이다. 돈이 궁할 때는 빚을 내서라도 금고에 돈을 넣어두고 용돈을 주셨다. 학창 시절 방학 때 어디 놀러 가기라도 하려면 책을 산다는 등의 거짓말로 돈을 타내던 친구들에 비해, 우리가 떳떳이 놀러 간다는 말을 하고 돈을 타 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돈을 넉넉히 쓰느냐 하면 그도 아니다. 사치라곤 전혀 모르는 성격이라 객쩍은 돈을 쓸 리가 없다. 그런데도 한 푼을 서푼으로 알고 쓰신다. 농사라야 일 년치 양식 뿐이고, 텃밭에서 양념이나 푸성귀 따위만 해결하는 살림에도 돈을 꾸는 일 없이 살림을 꾸려 갈 수 있었던 것도 검소한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또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강조하셨다. 힘들고 고역스러운 일을 누구나 피한다면, 기꺼이 그 일을 맡아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 그래야만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들지 않다는 말씀이다. 하기 쉬운 일만 하다 보면, 어려움이 닥칠 때 헤쳐 나갈 수가 없다는 뜻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일리가 있었으니, 세상 모든 결과는 인고의 결정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그런 정성은 아버지에게 특히 더했다. 이렇다 할 능력이 없는 아버지는 그 알량한 농사를 짓는 것도 늘 버거워 하셨다. 매사에 철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는 정말 무능력자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타박을 하지 않았다. 지는 뭐든 들어 주셨다. 어머니가 거의 힘든 일을 모르고 산 것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다. 가령 한 겨울에도 아침밥을 짓는 것은 아버지였다. 읍내 학교로 통학을 하는 우리는 늘 새벽밥을 먹어야 했는데, 병 때문에 몸이 무거운 어머니에게는 아무래도 벅찬 일이었다. 대신 아버지가 그 일을 맡은 것이다. 물론 전 날 밤에 쌀이나 국거리를 씻어 안치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더불어 아침 밥상이나 반찬 등은 미리 다 준비해 두지만, 아침에 우리를 깨워 먹이고 도시락을 싸는 것은 아버지가 해 주신 셈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은 지금도 모를 일이다. 당신 세대의 완고한 가부장적 제도를 생각하면, 부부 사이의 금슬은 시대와 여건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돌아보면 병석에 누워 계신 날이 더 많은 어머니였다. 큰 살림은 아니어도 논밭 전지가 많았고 게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계신 터라 늘 일이 많았다. 그러나 무던한 아버지는 별다른 잡음 없이 살림을 잘 이끌어 나가셨다. 일을 척척 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그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늘 집에 두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말하자면 선비 타입이었다. 그런데도 바쁜 일과를 무리 없이 잘 치러내셨으니, 집에는 늘 머슴이 있었던 것이다. 꼭 머슴이 아니어도 농사철만 되면 동네 아저씨들이 번차례로 드나들며 일을 거들곤 하셨다. 어머니를 위해 안살림을 돌봐 줄 사람도 연신 드나들었다. 이를테면 가난하게 사는 이웃집 처녀애들이 집안 일을 많이 거들어 주었다. 세 끼 밥도 제대로 먹기가 어려운 그 때, 남의 일을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거의 일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또래의 대부분은 집안일에 시달리는 게 다반사였다. 특히나 맏딸은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는 게 상례인데, 나는 여고까지 졸업을 했다. 그리고 네 명의 여동생 중 둘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머지 둘은 대학을 졸업했으니 생각하면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들과 똑같이 대학을 보내고자 하신 만큼, 본인이 원치 않아 그리 된 것이라 이렇다 할 불평은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처사에 비해 인복은 없으셨던 것 같다. 아니 또 그런 것에는 연연하지도 않는 게, 할 만큼 일을 하고 나면 나머지 복은 하늘이 내려주는 거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뭐랄까 자기 할 일만 생각할 뿐, 그에 따른 대가나 보수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고나 할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얼마 전에 상처를 한 까닭이다. 중년에 상처는 망처라고 하지만, 막힘이 없는 아버지는 지금까지 혼자 너끈히 사는 터이다. 매사 막힘이 없는 성격 때문이었지만, 나는 우선 너무 잘해 줘서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이 분분할 정도로 금슬이 유별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유별난 성품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정평이 나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하루는 이웃 사람이 담배 열 갑을 사들고 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사양했다. 건넌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한두 번 그러시다가 받으실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는 자꾸 이러면 앞으로 자네 일을 대신 해 주지 않겠다고 언성까지 높이셨다. 무안해진 그 사람이 하릴 없이 방에서 나가자, 자네 그 담배는 아버님께 드리게 라고 하시던 부드러운 말씀이 지금도 쟁쟁하다.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만큼 관공서에 갈 일이 있으면 으레 아버지가 도맡아 처리하시곤 했다. 그 때도 그분의 아들이 무슨 사고를 저질러서 벌금이 나왔는데, 가난한 살림인 것을 뻔히 아는 아버지가 수 차례 읍내를 다니면서 벌금이 적게 나오도록 주선을 해 주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아버지가 너무한 것 같다는 항의를 했다. 자기 일을 잘 해결해 주어서 고마운 인사로 담배를 사들고 온 것인데, 그처럼 강경하게 물리칠 것까지야 뭐 있느냐고 딴에는 대담한 말을 했는데, 뜻밖의 말에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동네 사람 거의가 일자무식이고, 따라서 내가 앞으로도 그런 일을 맡아할 터인데 이런 식으로 계속 받다가는 나도 타성이 된다.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 어느 날 아무 것도 사들고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을 꺼리게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렇게 또 거절은 했어도 받은 거나 진배없다. 받지 않는 대신 담배를 좋아하는 자기 아버지께 드리게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생각하면 그게 벌써 사십 여년 전 일인데,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 비해 나는 마음이 참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만 보면 시댁 식구에게 잘해라 그저 무조건 잘해라 하는 말씀이 늘 역겨웠던 것이다. 아버지도 사실은 시댁의 내용을 뻔히 아신다. 그런데도 그런 말씀을 하느냐는 나의 반론이 꺼림칙했는지, 내가 그들이 사람스러워서 잘하라는 게 아니다. 정말 잘해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도 잘하면 그 사람이 잘 되는 게 아니라 네가 잘 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것을 의식하기보다는 누구에게든 잘해야 되는 게 사람이 도리인 까닭이다 라는 말씀을 꼭 덧붙이신다.
사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마음이 넓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으니 나로서도 딱한 일이다. 망나니 같은 시동생은 그렇다 쳐도 교활한 방법으로 친정 재산을 가로채는 시누이는 아무래도 잘 대해 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 시댁은 사고뭉치들만 모여 사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집에 맏이로 온갖 구답을 치르면서 나는 또 다른 집 아버지처럼 맏이 자리가 들어오면 왜 물리치지 않았느냐고 비방했다. 중매가 들어오면 우선 맏이인 경우는 퇴짜를 놓는 게 보통이 아니던가. 그런 데로 보내면 딸이 힘들다는 게 그 이유인데, 아버지는 그게 아니다. 맏이 자리가 힘들다면 그럴수록 괜찮은 자리라고 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곧 힘든 자리를 기피하면 세상의 구답은 누가 치르겠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후렴처럼 덧붙이는 말씀이 맏이 자리를 거부하면 내 집 며느리는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 때문인지, 나 역시 맏이라는 데 대한 두려움은 거의 모르고 살았다. 딸 다섯 중의 맏이라 해도 다른 집처럼 집안 살림에 진력이 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지 오 년 만에 들어그럴 때마다 나는 어릴 때보다 더 지극하신 어머니의 정성을 보곤 한다.
샘가를 돌아가면 동산의 소나무 정도는 될 법한 치자나무가 한 그루 있다. 겨울에는 얼어 죽기 때문에 방에 들여 놓아야 하는데도 어머니는 벌써 이십 여 년 이상을 키우신 터이다.
가을이면 그 나무에 노란 치자가 수없이 달렸다. 떨어져 있는 낙엽이 가랑잎으로 굴러 다닐 때면 치자는 열매도 잎도 노랗게 물이 든다. 작기는 해도 상록수인 까닭에 노란 색깔의 묵은 잎보다는 푸른 잎이 더 많게 마련이다. 화분을 들여 놓기 전에 일단 그 잎은 떼어 버리고, 이어서 노란 열매도 따서 거실 한편에 겨우내 널어두고는 내가 올 때마다 두어 개씩 물에 담갔다가 그 물로 부치미 반죽을 하시곤 하였다.
웬만한 관상수처럼 커진 치자 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색다른 걱정이 생겼다. 이제는 볼 수 없이 쇠약해지신 어머니가 저 나무를 다루기가 아무래도 힘들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 번은 얼핏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너 올 때마다 쓰는 것인데 어찌 버릴 수 있느냐고 하신다. 그 말씀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것은 장에 가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이렇게 손수 가꾸실 필요가 뭐 있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내 맞받아서 하는 말씀이 그렇다면 녹두 부치미는 사 먹을 수가 없어서 만들어 주는 줄 아느냐고 웃음 섞어 말씀하신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의 속마음을 알아 차렸다. 시골에 내려갈 거라는 기별을 보내면 그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할 것이다. 하기야 나를 위하는 것이라 해도 도착하기 하루나 이틀 전에 준비하면 충분할 터이다. 하기야 그것도 생각하면 나의 짧은 생각이기는 했다. 그깟 부치미가 서울에는 없어서 고향에까지 와 먹으라는 전갈을 보내시겠는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기력은 쇠하셨다 해도 결혼하신 지가 사십 년 가까운 어머니가 그깐 부치미 댓 장 정도를 엄두를 내지 못해서 며칠 전부터 부산을 떠시겠는가 말이다.
어머니는 고향에 다니러 갈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 말씀대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터에도 날 위해 그런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순전히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내가 먹을 음식은 늘 별도로 준비해 오신 터였다. 어머니가 그럴 정도로 입맛이 까다로운 건 사실이나, 자라서 그래도 식성이 좋아진 다음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리 하셨던 것을 보면 어머니는 날 위해 뭔가를 하는 그 자체를 즐기시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뚝배기의 밥을 먹어 왔다. 그것도 한 사발 분량의 밥이었다. 우선 쌀을 씻어서 우선 한 시간 정도 불리셨다가 가스에 올려놓으셨다.
나는 어려서도 뚝배기의 밥을 먹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름 아닌 내가 어려서 함께 살던 이모의 말이다. 젖을 떼고 난 다음의 이유식으로 어머니는 늘 뚝배기에 죽을 끓였다던가. 먼저 참기름으로 한 숟갈의 쌀을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이면 죽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건더기 또한 일주일 간격으로 변화를 주었단다. 주로 미역이나 콩나물 버섯이 주를 이루었고 이따금 밤이나 잣 같은 것으로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그럴 때의 이모는 도대체 엄마는 나만 안다는 식으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 다음 후렴처럼 곁들이는 말은 또 너 힘들까 봐 언니는 병도 나지 않을 걸? 하고 혼잣말처럼 뇌까리곤 하였다. 그래도 나는 불쾌하게 생각은 않았으니, 이모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그런 줄은 알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편이다. 어려서는 나를 위하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받아 들였지만, 지금은 어쩐지 어릴 때의 마음 같지가 않다. 부담스럽기보다는 이렇게 나가면 나는 언제까지고 받기만 하는 아들이 될 것 같은 염려 때문이다.
어려서 나는 어머니께 늘 잘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 뚜렷이 어떤 방법으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았으나, 막연히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내가 뭐 효자라서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면 어떤 아들이라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중학교 때였던가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입대하면 가까운 데 혼자 방을 얻어 사실 거라고까지 했다. 내가 시험이라도 볼 때는 외출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걱정이 되신 아버지는 말이 생신 때도 온다 해 놓고 딴청을 피우신다. 버스로 소요되는 1시간과 전철로 오는 1시가
서울에 계시는 며칠 동안도 어머니는 분주하게 지냈다. 맞벌이 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서 대청소를 하신다. 그것도 우리 있을 때는 하지 않으시다가, 출근을 하면 하시는가 보았다.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서면 뭔가 한 가지씩
작은 딸인 소희는 할머니가 온다 그날부터 손꼽아 기다린다. 그럴 때마오셔서도 어머니는
지금도 우리 애들은 자립해서 살고 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터이지만,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며 산다.
어른한테도 처음에는 시동생 둘이 아버지의 일을 거들다가 막내는 결혼하면서 자기 몫을 떼어가게 되었다. 봄이면 파랗게 어우러진 덤불을 헤쳐 가며 찔레 순을 꺾어 먹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새 하얀 장미 같은 꽃이 피고 매운 내가 풍기면 뱀이 나타난다고 한 동안 가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무렵 또래의 남자 아이가 뱀에게 물려 며칠 동안 하교에도 나오지 않은 일이 있어서 더 가까이 못하였던 것이다. 남은 한 줄기는 두무수라는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가파른 곳으로 언제나 위험했다. 거기서 왼편으로 난 길을 꺾어 올라가면 작은 연못이 하나 나온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언제나 어두웠으며 검푸른 물가에는 해묵은 잎사귀나 짚으로 덮이곤 했었다. 내 어려서도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언덕에 있는 연못이 늘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물은 수평일지 몰라도 비탈진 길이라 비스듬하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하기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그대로 적응되는 성질은 있다. 그보다는 모든 것에 자신을 맞춰 가는 양상을 느낀 것이다.
장마철이면 개울은 엄청나게 불어난다. 한 여름 어느 때 아침이면 무섭게 휩쓸려 가는 물소리에 잠이 깨곤 했었다. 그래 잠결에 놀라 나와 보면 도도한 물결이 기세로 내려가곤 하였다. 그렇게 며칠 비가 내리면 강물이 넘쳐 주변의 논으로 차오르곤 했다. 아, 그 무렵 멀리 느티나무 사이로 보이던 하얀 물줄기가 마치 꿈결의 은하수 같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오월이면 마을은 신록에 덮인다. 특히 아랫마을로 통하는 빈 터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누구네 것인지도 모를 산소가 셋이나 있었다. 언제나 파란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어 아무리 넘어져도 다칠 염려가 없었다. 반면 제멋대로 구르고 넘어지는 바람에 옷은 풀물이 들기가 일쑤였다.
빈 터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동산이 하나 있다. 대 여섯 그루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토질이 별다르게 참흙이라 우리는 그것을 뭉쳐서 공작품을 만들곤 했다.
그 흙은 유난히도 끈기가 많았다. 그래서 잘 뭉쳐지지도 않았으나 일단 뭉쳐 놓으면 무엇이든 만들기가 수월했다. 그것을 고르게 다진 뒤 나뭇잎을 대고 찍으면 그물맥이 선연히 드러나서 또 다른 잎사귀가 피어나곤 한다. 잎이라면 얼핏 푸른색인 줄만 알고 있던 내게 나타나는 촘촘하고 세밀한 선에서 알 수 없는 경이의 존재를 느끼곤 했다. 사소한 잎 하나도 이렇게 유다른 느낌을 주는데 이 세상 모든 창조물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피조물들이 사실은 무한의 섭리로 만들어진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 빈 터에서 개울로 통하는 소롯 길을 따라가면 그야말로 우리 마을의 상징인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그 당시에는 나무의 나이 같은 건 생각도 없이 다만 평평하니 굵은 가지에 올라 책을 읽곤 하였다. 가운데 뚫린 구멍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다. 어느 때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때 아닌 비라도 만나면 허둥지둥 달려 와 비를 긋던 곳이다. 한 동안 내리던 비가 잠시 기세를 늦추면 잎 가에맺힌 물방울이 일시에 떨어질 것 같은 신비로움에 한참을 그대로 서 있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 나무는 굉장히 컸었다. 한 여름 자리를 깔고 누우면 잎 사이로 구름이 닿을 듯 스쳐 가곤 했으니, 가히 짐작할 수있는 일이다. 여러 해 묵은 가지는 더러 죽기도 하고 밑동에서는 새 움이 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일은 구름이 끼거나 해거름이면 그 어슴푸레한 빛에 드러난 기이한 모습이다. 죽거나 잘려 나간 그루터기에서 돋는 잎은 멀쩡한 가지의 그것과는 판연히 다른 이미지를 풍긴다. 그대로 죽어 버려도 그만인 가지였다. 그런데도 한 가닥 비집고 나오는 푸른 잎이라 그 같은 경외를 풍기는 것이다. 죽음을 담보로 해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 그런 것이었을까.
느티나무 길을 돌아 나가면 근방에서는 드물게, 가시 울이 쳐진 과수원이 나온다. 자두와 배 그리고 사과나무가 심어진 이 밭은 학교를 오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늘 설레게 하였다. 한 여름 아카시아 숲에 어울려 피어난 흰 꽃들은 봄바람에 실려 끝없이 퍼져 나간다. 무더운 여름 자두가 익을 무렵이면 한 번 따 먹지도 못하면서 마음을 졸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오이 밭에서는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도 매지 말라는 이야기 때문에 일부러 그 길을 피해 다니기도 하였다. 듣기에 따라 어린 나이에 무슨 그런 생각을 했겠느냐고 할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에 관심이 많았었다. 우리 생활에 지침이 되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다른 길로 가면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욕심에 대한 갈등은 누구에게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곤 하였던 것이다.
과수원 길을 지나 둑에 오르면 남한강의 지류인 달래 강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 더 돌아가 달천을 지나 탄금대에서 흐르는 물과 만나는 것이다. 이 강은 강원도 삼척의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영월을 지나 평창 강에이른다. 이어 단양을 거쳐 충주호에 유입된다. 그러다가 북서로 갈라져 다시 청미천과 여주를 지나 양평의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된다.
우리 마을 앞의 달래 강은 바로 달천으로 이어 지는데 강폭이 넓어 늘 나룻배를 이용했었다. 초여름이나 가을에 잔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나가는 배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게다가 꽃구름이라도 올라오면 사공 아저씨의 삿대는 푸른 하늘을 가를 듯 아름다웠던 것이다.
노을이 지면 강은 그대로 한 폭 그림이었다. 서산에 걸린 해는 붉은 구슬 그대로였다. 그것이 또 어느 순간 잔물결에 비치면 해는 그야말로 산 너머로 지는지, 물결 속으로 가라앉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 어디선가 물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하늘은 울먹이는 듯 붉게 충혈되곤 하였던 것이다.
마을 정면에는 높이가 거의 200m는 됨직한 산이 솟아 있었다. 멀리 수안보 쪽에서 이어져 온 산은 마을 뒷산을 지나 이류면까지 이어졌다. 그 산 꼭대기에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어, 장날이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곤 하였다. 날개 깃 흰 새가 걸음을 떼어 놓는 것 같은 모습이, 마치 꿈속처럼 아련한 느낌이 들곤 했다. 게다가 산모퉁이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어 늘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일요일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그 산을 넘어 가 본 적이 있었다. 그 너머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몹시도 궁금했던 것이다. 보기보다 높은 산이라 우리는 몇 번이고 쉬어야 했다. 그렇게 얼마 후 고개 마루에 올라 선 우리는 적지않이 실망하고 말았다. 그 곳에는 우리 마을보다 더 낡은 초가집이 늘어서 있을 뿐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화전으로 일군 밭과 척박해 보이는 논이 있었다. 그 곳에는 모두가 아름다울 거라는 막연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골짜기에 떠가는 도화 꽃을 보고 거슬러 올라가 도원경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 이야기일 것이다. 꽃잎 하나를 바라 힘겹게 찾아 왔는데 극히 평범한 곳이었다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렇게 의도적으로 지어낼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가까이 가는 게 탈이었다는 생각이 줄곧 드는 기억이었다. 말하자면 산 너머 무지개가 있다는 말에 찾아 헤매다가 기운은 쇠하고 터럭만 남더라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우리가 거기 가서 안 거라면 그 커다란 나무가 느티나무였다는 것 외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어려서 그 고개를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때의 기대가 무너진 실망이 얼마 안 되는 기억 속에 손실을 주었다는 기억이 난다. 가보지 못한 데의 호기심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는 것인데, 너무 빨리 실망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가끔은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곤 했던 것이다.
산에 대한 기억이라면 또 있다. 바로 동네 뒷산이었는데 그 곳에는 진달래가 유난히도 많았다. 붉은 황토 흙이었던 것과 커다란 바위가 생각이 나곤 한다. 우리는 여기서 숨바꼭질을 자주 했었다. 그리고 진달래 포기에 숨어 있을 때마다 예기치 못 한 상상이 떠오르기도 하는 조금은 떨리는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무더기로 어울린 진달래꽃이 가끔은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문둥이 때문이었다. 눈썹도 없이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문둥이가 이 꽃을 들고서 어린이를 유괴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생간이나 인골이 그들 천형의 병에 특효약이라니 어쩌면 그럴 수가 있나 싶었다. 좀은 괴기한 속설이기는 해도 엄연히 떠도는 만큼 그 때 유난히 고운 진달래 숲에서 문둥이가 꽃으로 위장하고 있었을 거라는 상상과 살아서 냉대를 받아 오던 한 시인이 죽어서 파랑새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그 마음과 겹쳐 늘 마음 아프게 와 닿곤 하였다.
하필이면 사람의 생간과 인골이 특효약이라는 그 병, 특히 지칭하여 천형이라고 하여 하늘만이 안다는 병이었다. 누구도 받아 주지 않는 외로움에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도 못하는 그들의 숙명은 시인 한하은의 파랑새에서도 잘 나타나 있거니와, 인간의 측은지심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피해를 받지 않는 범주 안에서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을 향한 그 호의가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보다 더한 오류는 없다는 것이다. 더러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드러나는 인정이라면 그야말로 고도로 승화된 인격의 발로이겠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늘 자신을 감추는 전제가 아니고서는 그 깊은 의미가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가을이면 마을은 꽃 병풍을 두른 듯 곱다. 이맘때면 나는 늘 도장골이라는 골짜기를 즐겨 찾는다. 그 곳에는 달래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들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때로는 달래 강 철교를 지나는 기차도 볼 수 있었고 눈길을 모으면 어렴풋이 탄금대도 보였다.
들녘은 온통 황금벌로 바뀐다, 여문 낟알이 무거워 고개 숙이는 벼들이며 울창한 상수리나무 숲은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보이게 하였다. 이곳에 오면 늘 도토리가 들판을 보고 열린다는 속담이 생각나곤 한다. 똑같은 거둠이래도 들판의 그것과 산에서 나는 소출이 다르다는 뜻일까. 하기야 도토리뿐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추나 참깨 농사가 잘 되면 김장 채소의 작황이 좋지 않단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재복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인복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마음이 편하지만 돈이 많으면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보곤 하였다.
이웃 마을로 통하는 언덕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 나무가 흔하지만 그 때는 무척 귀했던 터라 가을이면 나는 금빛으로 물드는 잎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부채살 같은 잎 사이로보이는 파란 하늘이 시리게 다가오면 은행나무는 황금 비단을 두른 듯 눈부시게 빛나곤 했다.
이렇게 가을이면 색색 가지 아름다운 잎에 끌려 다녔지만 그 단풍이 곧 나무의 신진대사가 떨어진다는 의미임을 알고 한 동안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무성했던 초록을 다 버리고 기나 긴 겨울의 침묵에 들어서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해서 명년의 봄을 기약하고 우리는 또 그 모습을 보면서 추위 속에 깃들어 가는 찬란한 봄의 일면을 꿈꾸어 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함께 간 언니에게서 은행나무는 마주 보아야 열매가 달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말이다. 더구나 이 나무는 암수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으니 가지가 위로 향한 것은 숫 나무이고 아래로 처진 것은 암나무라는 것이다. 지금 기억에는 그 나무에 은행이 달린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근처에 다른 은행나무가 없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것이 수나무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으로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무 열매 하나에도 그런 이치가 숨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하였다.
아홉 살이 되면서 나는 시내에 있는 교현 초등학교에 전학을 했다. 딸만 하나인 큰아버지께서 언니가 결혼을 하자 나를 데려 가고 싶어 하신 것이다. 큰 집에서는 당시 인쇄소를 경영하고 계셨는데 살림집은 중학교 앞에 있는 야현동 이었다. 골목에는 굉장히 큰 연탄 공장과 경찰서가 있었다. 뜰에는 일 년 내 붉은 단풍나무가 있어 담 너머까지 늘어지곤 하였다. 그 때 알게 된 것은 가을에 비로소 물드는 것은 청단, 그리고 일 년 내 붉은 것이 홍단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다 어느 때 나는 뜰에 면한 건물이 유치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앞을 지나기가 두려워졌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생각지도 않고 나는 다만 멀쩡한 사람을 가둔다는 그 사실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인간이 인간을 가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재판이 성행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늘 하곤 하였다.
서로 타협이 되지 않으면 법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사회 질서를 위해서는 법의 규제가 필요한 줄 알지만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없다는 마음이었다. 지구 자체가 커다란 새장인 것을 생각한 것이다. 무한의 창공 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그보다 훨씬 작은 공간에 갇혀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아닌가. 이들은 후천적인 죄악 때문에 이곳에 왔을 테지만 너나 없이 원죄를 타고난 우리도 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이 많은 것이다. 스스로도 감당치 못하는 과오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신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가 비록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어찌 그들을 핍박한단 말인가.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해도 그 이면에는 똑같이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소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만화를 즐겨 읽었다. 학교가 파하고 나면 가방을 던져 놓고 만화 가게 부터 찾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때는 만화라도 유익한 것이 많았다. 나는 그 당시에도 역사에 관한 내용을 즐겨 읽었다. 인현왕후전과 동명성왕, 그리고 흥선 대원군 등은 정말 유익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인어 공주였다. 지금 기억으로 그 만화가가 지금도 조카들의 인형을 그린다는 것을 알고는 까마득히 어린 시절 만화에 빠져 해지는 줄도 몰랐던 기억이 다시금 새로워지는 것이다. 바다 속 용궁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을 위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인어 공주의 얘기가 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아니 그렇게 살다 간 말로가물 거품으로 끝나는 것을 보고는 한 동안 혼란에 빠지고 말았던 기억이 나곤 했다. 자기의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집착했던 영혼이란 대체 무엇일까. 당장의 유복한 생활이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내게 그것은 말하자면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에서야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가 아닌, 하찮은 명리와 이익을 위해서였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포기하는 몰지각한행위일 밖에 없다. 꿈같은 인생에 그나마 작은 의미라도 보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름대로의 미적 대상을 찾는 일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더 보태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어진 것이다.
일요일이면 가끔 집에를 다니러 갔었다. 집까지는 거의 시오리 길이었다. 한 시간 남짓 걷다 보면 충렬사가 나온다. 일망무제 넓은 들판 한 가운데 뻗은 길 양편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얼마 전까지 다니던 단월 초등학교에서 심었다고 한다. 그 길은 약 800m에 이르렀는데 볼수록 정말 장관이었다. 아울러 그 더운 여름에 물을 주어 가며 꽃모종 했던 것을 생각하니, 꽃 잎 하나하나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눈길을 끄는 아름다움이라면 숨은 고뇌와 노력이 깃들게 마련인 것이다. 신이 처음 만들었다는 , 그래서 그 이름도 혼돈이라는 뜻의 코스모스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손질이 덜 된 듯한, 가는 줄기는 바람조차도 이겨 내지 못하고 쓰러질 듯하지만, 이슬 맞아 연연히 피어나는 모습은 가히 초가을의 전령이라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따금 오셔서 용돈을 주고 가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돈에는 무관심했었다. 얼마 전 고모님께서 그 얘기를 하셨다. 돈이 떨어져 있어도 돈을 줍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나는 아버지가 주신 돈은 책 사는 것 외에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매사 느긋한 성격이지만, 책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래 웬만한 책은 친구네 집에 놀러가 있는 잠깐 새 읽기도 하였다.
나는 물질 만능주의를 배격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사는 양상이 짐작이 될 만한 일이었다. 잘 나도 못나고 못 나고도 잘 난 돈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건 또 엄연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렴치한도 돈이 있으면 귀빈 대접을 받는다. 돈 있는 집 개는 멍첨지라고 불리고 귀신도 떡을 주면 고개를 숙인다 하니 돈은 실로여의주 못지않은 위력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돈의 힘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물질에 국한되어 있다. 진정 값지고 높은 이념이나 사상은 돈과는 전혀 별개의 차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생활의 최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도 없다.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고 금전에만 치중해서 살다가는 언제 자신에게서 떠나갈지 모르는 그 속성 앞에 통탄할 때가 있을 것을 생각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우리 학교는 내 살던 그 강변으로 가을 소풍을 가게 되었다. 하늘은 높고 바람이 맑은 날이었다. 강물은 많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조약돌이 굴러 있는 강변은 따가운 햇살에 더없이 빛나 보였다. 눈을 들면 고향마을의 초가집들이 마치 푸른 산이 품고 있는 산새 알 같아 나는 꿈같은 감회에 젖어 들고는 하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담장의 나무들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의연했고 오솔길에는 햇살이 밀리는 듯 은빛으로 반짝였다. 한 나절이 되자 우리는 점심을 먹고 강변을 돌아 다녔다. 늘 이 강을 건너서 다녔지만, 그 때처럼 조약돌이 많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하기야 물이 마르는 갈수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찬란한 가을빛에 바래서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조약돌의 양상은 천태만상이다. 색도 가지가지여서 검은가 싶으면 엷은 갈색이다. 그 밖에 회색얼룩이나 단조로운 무늬 등 여러 가지였다. 그렇게 똑 같은 무늬와 색이라도 느낌은 전혀 다르다. 물결에 닳고 닳아 이렇게 변한 것이었을까. 일순 이 조약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생각해 본다.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헤아림보다는 막연한 상상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변한다. 태양도 밤하늘의 별빛도 이제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으니까.
생각하면 지금 이 작은 돌이 또 어떻게 변할는지 우리는 그것도 잊은 채 다만 지금의 색깔이나 모양에만 신경을 쓴다. 그래 서로 우겨왔던 그것이 후일 언젠가 전혀 달라질 것과 함께 지금의 언쟁과 시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생각하곤 하였다.
3학년 2학기 때였다. 교실이 부족해서였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하여튼 우리 반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본관 서쪽으로 자리 잡은 아담한 건물 앞에 이 순신 장군 동상이 있었다. 주위는 온갖 나무가 우거졌었다. 프라타너스 숲 그늘이 언제나 회색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청소가 끝나고 아이들이 다 가고 나면 나는 늘 혼자 남아 책을 읽곤 하였다. 각 나라의 동화며 위인전 그리고 이솝 우화 등은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림 형제의 전래 동화집이나 안데르센의 작품은 거의 다 욀 정도로 반복하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아이들의 동화를 즐겨 보곤 한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더욱 그 때는 단순히 생각했던 대목이 지금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 올 때는 까닭 모를 기쁨에 젖기도 했다. 예를 들어 벌거벗은 임금님을 그 때는 그저 재미있는 얘기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권력과 세도 앞에 아첨하고 굽신거리는 어른들의 약점을 풍자한 것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된 말을 예사로 하고 교묘한 위선으로 자신을 방어 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아이들 눈에는 그렇게 역겨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랄히 비평하고 꼬집어낼 수 있는 건 바로 천진한 어린이의 마음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임금님의 행렬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거침없이 외치는 그 마음보다 더 값진 것은 없었던 것이다. 닥쳐 올 후환이나 체면 때문에 느낀 대로 말을 못하는 어른들이 의외로 많다. 그 중에는 물론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명리를 위해서인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너나없이 몸을 사리는 비열한 풍토에서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용기와 이해를 따지지 않는 용단과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길 은연 중 기대해 본다.
우리 반에는 전쟁고아들이 대 여섯 명 있었다. 우리들 태어난 시기가 휴전을 직후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큰아버님의 인쇄소 맞은편에 고아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늘 옷이 더러웠고 도시락도 싸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옥수수 빵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곧 미국의 원조 물자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이 그렇다는 것 뿐 그 때는 그런 것도 생각 없이, 그것을 친구에게 나눠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애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도시락이라도 싸온다는 생각에 아낌없이 주었던 것이다.
5학년이 되던 해 식목일, 우리는 계명산 기슭으로 나무를 심으러 갔다. 지금은 난방으로 휘발유와 가스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땔감은 거의 나무에만 의존했기에 민둥산이 많았다. 물론 일제 시대에 쓸 만한 재목을 많이 베어낸 탓도 있었다. 그래 조금만 비가 내려도 흙탕물이 넘치고는 하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거라면 외국의 관광 엽서에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빌딩이 들어선 도심을 끼고 흐르는 물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운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회색 건물에 드러난 녹음은 가히 인상 깊은풍경이었다.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뭄과 홍수를 조절하고 건조한 모래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이다. 국토의 반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로서는 임산 자원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잣이나 밤 같은 것은 뛰어난 영양 식품이다. 그런데도 길을 넓힌다는 구실로 산줄기를 마구 끊어 놓으니, 이는 실로 자연을 거역하는 행위라 하겠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6학년 이 학기 때 선생님께서는 각자의 희망을 글로 써 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때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써 보겠다고 했는데, 하필 내 것을 읽어 주시는 바람에 그만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깊은 생각도 없이 다만 책을 좋아하는 까닭에 그런 내용을 썼지만, 그것이 그래도 유일한 자극이 되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이다.
책은 그렇게 좋아했지만 글은 별로 쓰지 않았다. 글짓기도 책 읽는 것만큼이나 즐겼지만, 뚜렷하게 작문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어느 해 겨울 방학에는 독후감을 써서 두꺼운 책만큼 엮기도 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는 다 소실되고 말았다. 단편이나 일기, 혹은 나름대로의 생각도 적어 왔는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 보여 준 일도 없었고, 웬만한 것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결벽증 때문에 보관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지만 보다 더한 거라면 마음속에 간직된 그 이념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돌리곤 한다. 좋은 글귀나 유익한 내용을 적는 동안에 마음은 벌써 아름다운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히 왔던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두 달 간 나는 거의 책에 묻혀 지냈다. 그렇다고 집에 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이웃집에 가 살다시피 하였다. 연증이네 집이었는데 거기는 정말 책이 많았다. 나는 잠깐 동안에도 동화책 한권 정도는 읽을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날이 저물고 해서 집에서 찾으러 오면 그제서야 책을 놓곤 하던 날들에서 나는 지금도 무슨 일이든 정신없이 몰두하는 성격이라 남들과의 트러블도 많은 편이지만 구태여 고칠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을 잊고 빠질 정도의 집념은 사실 오래 전부터 추구해 온 터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암굴왕이라는 작품이었다. 친구의 모함으로 종신형을 받은 젊은이가 14년 만에 탈옥하는 줄거리이다. 그는 감옥에서 만난 신부의 보물을 양도 받아 거부로 살지만 절망과 빠져 지내던 지난날을 거울삼아 경건하고 진지한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늘 희망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소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내가 지금도 이 책을 즐겨 읽는 것은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다는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곤 한다. 설령 뜻 같지 않은 날들이면 어떠랴. 가슴 속에는 이상이 타오르고 자신에 차 있으면 그 나날은 더없이 값진 것이다.
마거리트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말할 것도 없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글귀인데, 그 말이 늘 의미심장한 의미로 다가 온 것이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그것을 여느 때와는 다른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지 모른다. 그 외의 수많은 명작들이 대부분 어려움을 참고 견딘 다음이라야 진정한 행복이 찾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읽을 때는 그저 사건의 풀림과 얘기에 마음이 끌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숱한 곤란을 딛고 일어선 작가들의 뼈아픈 자기 성찰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큰댁에는 심부름 하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기순이라고 하는데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했다. 방학이면 음성에 있는 그의 고향을 가곤 하였다. 지금 같으면 이웃 마을을 다녀오듯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 때는 차편도 드물어 모처럼 마음먹고 가는 나들이였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한 시간 가량 걸어가니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그 동네 이름을 알아 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집은 부모님과 아이들 셋이었는데 나는 거의 열흘 정도는 묵었던 것 같다. 저녁이면 논둑으로 나와 반딧불을 잡으며 놀았다. 무더운 여름 밤 별도 없이 캄캄한 하늘의 그 불빛은 마치 꿈나라로 인도하는 듯 언제나 아련한 빛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지쳐 집으로 돌아 가면우물에 채워 둔 수박을 먹는다. 논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밤은 깊어 가는데, 문득 떠오르는 반딧불 얘기에 또 한 번 빠져 드는 것이다.
중국 춘추 시대의 차윤이라는 선비는 집이 무척 가난했다. 그래도 여름이면 개똥벌레를 잡아 주머니에 넣고 그 불빛 아래서 공부를 했다. 또한 같은 시대의 손강이라고 하는 사람은 겨울만 되면 창틈으로 새어 드는 눈빛에 의지해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노력하여 끝내 성공하는 형설지공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얘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바하는 다락방 문으로 비쳐 드는 달빛에 의지해 악보를 적었다고 하니 극도의 빈곤은 바로 잠재된 능력을 일깨우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어려서 읽은 위인들 중부유한 환경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어칠이나 나이팅게일과 슈바이처 멘델스존등, 극히 소수에 이르렀으니 역경 속에 더 드러나는 예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벽이면 그 가족들과 버섯을 따러 간다. 얼마 전 장마로 인했음인지 참나무 등걸에는 우산 모양의 버섯이 많이 돋다 있었다. 나는 그 버섯을 따기보다는 숲 속 작은 요정들이 필연 살았으리라고 짐작되는 귀여운 지붕을 유심히 보았다. 누군가 만들어 낸 것 같은 모습을 보면 어쩌다 햇빛이나 비긋는 장소로 되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순이는 그 중 색깔이 선명한 것을 가리키며 독버섯이라고 하였다. 식용 버섯과 유독 버섯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색깔이었던 것이다. 식용 버섯이 회색이거나 검은 색인데 비해 독버섯의 화려하고 눈에 잘 띄는 그것은 눈길을 끄는 것일수록 주의하고 경계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그로고 보니 독초와 약초를 식별하는 방법도 알 것 같았다. 잎이 무성한 것은 잡초이다. 약초는 잎이 앙상한 대신 뿌리가 충실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두드러지거나 눈길을 끄는 것이라면, 한 번쯤은 경계해야 될 대상인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참외 원두막으로 갔다 밭에는 수박과 참외가 탐스러웠다. 지금이야 과일이 사철 끊이지 앉지만 당시에는 칠팔월이 아니면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평소 과일을 즐기지 않는 나였지만 그 날은 꽤 많이 먹고는 배앓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둑해질 무렵 나는 삿갓 모양의 원두막 지붕을 보면서 지난 해 읽었던 오성 이 항복의 얘기를 떠올렸다. 조선 중기의 명신이었던 그가 어렸을 때 외가에 간 적이 있었다. 평소 장난을 좋아했던 그인지라 동네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져 참외 서리를 다니게까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지독히도 맛없는 참외를 먹었다. 같이 먹던 동네 아이들도 그럴 줄 알았다며 한 입씩 물어 뱉는 것이다. 밭주인이 얼마나 구두쇠인지 거름마저도 아끼는 탓에 그처럼 맛이 없다는 것이다.
가만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항복이는 모른 체 집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여름밤도 어지간히 깊어간 새벽에 문제의 그 밭으로 가서 대못으로 수박마다 구멍을 내 버렸다. 이윽고 날이 밝자 온 마을이 당연히 뒤집힌 것이다. 밭주인은 누구네 집 아이가 참외 서리의 명수인가 하는 것쯤은 환히 알지만 이렇게 온 밭을 망쳐 버린데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참외 서리를 하는 아이라면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과일이 잘 익어야 참외 서리도 할 텐데 말이다. 그것을 모르는 주인이 아니지만, 일 년 농사를 망쳐 놓은 화풀이를 말하자면 애꿎은 아이들 한데 하는 것이다. 밤이 깊어 웬만큼 소동이 가라앉자 아이들도 이상하다고 했다. 그들 자신 자타가 공인하는 장난꾸러기이기는 해도 이렇게 밭 전체를 망쳐 놓은일은 엄두도 못 내는 터인데 누가 과연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다. 그제야 항복이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한 일을 얘기했다. 너희에게는 미안하지만 밭에 거름을 보태 주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 해 여름이 지나 이듬 해 여름에 다시 외가에 간 항복이는 일약 칙사 대접을 받는다, 문제의 밭주인에게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구멍 뚫린 수박이 거름이 되어 올 농사가 전에 없는 풍년이라고 했다. 농사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였지만, 농사의 진정한 묘리를 파악한 그의 뛰어난 경륜은 후일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일등 공신에까지 이르게 된다.
저녁을 먹고 나면 멍석에 앉아 별을 헤아렸다. 여름밤의 별은 특히나 아름다운 법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어도 나는 유난히 별을 좋아했다. 그건 언젠가 이 지구도 한 개 별이라는 것을 알고부터였다. 강변의 모래알보다도 많은 별, 우리들 수많은 얘기보다 더 많다는 생각이 들면 어쩌다 별이 뜨지 않는 밤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던 기억이 난다.
다락방을 좋아한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유감스럽게도 다락방이 없었다. 큰 집에도 물론 없었다. 지붕 밑에 있는 다락방이라면 별을 다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다락방에서 지내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 크고 넓은 창문이라도 있다면 아침저녁 노을과 언덕 위 느티나무에 지어진 까치 집을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 그런 꿈같이 아름다운 곳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고향을 가보기는 해도 어릴 때의 졍겨운 느낌은 와 닿질 않는다. 우선 마을 앞길이 포장된 것부터가 거부감을 일으켰다. 새 알같이 둥근 초가지붕은 원색으로 칠해진 슬라브 지붕보다 더 한 운치를 자아내곤 한다. 낙엽송이 하늘을 찌를 듯 우거진 산은 군인들의 사격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늘을 가르는 듯한 금속성 소리가 얼마나 듣기 거북했는지 모른다. 그 옛날 우리가 산에 올라 갈 때의 푸근한 메아리는 간 곳 없이 훤하게 트인 찻길만이 한 때 오솔길이었음을 말해 줄 뿐이다.
봄이면 인쇄소 직원들과 노루목이라는 곳으로 소풍을 갔다. 충주에서 수안보 쪽으로 약 이십 리쯤 가면 오른쪽 산을 끼고 흐르는 강이 있다. 이곳에는 조개와 다슬기가 많았는데, 골짜기가 깊어서인지 검푸른 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어 아직 어린 나는 늘 주의를 받곤 했다.
생각해 보니 고향 앞을 흐르는 달래 강이 바로 이 물줄기였던 것이다. 어쩐지 다슬기도 많더라니. 초여름의 흐린 날 저녁이면 떼로 몰려 다녔었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있었던 나는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잡지 못하였었다. 그래도 달팽이처럼 감아 올라 간 모습은 어린 내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들어가면서 좁아지고 나올 때는 넓어지던 다슬기가 생선이 귀하였던 그 무렵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점심을 끝내고 나면 각자 행동을 취했다. 어른들은 풀밭에 자리를 깔고 쉬셨다. 그러면 나는 혼자 강물을 거슬러 가 본다. 물이 끝나는 곳은 바다 하나였지만, 근원은 여러 군데라고 하는 게 풀 수 없는 의문으로 다가 오곤 하였다. 이 물이 바로 남한강의 지류인 것은 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처음 발원지였다. 그리고 그 물이 가다가 수많은 골짜기와 합류되고 이어 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봄날은 길었다. 종일 산을 끼고 걷다가 꽃을 꺾다가 했지만 해는 넘어갈 줄을 모른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던 해거름, 나는 문득 바위틈에서 자란 돌단풍을 보았다. 수수하게 보얀 꽃이 그런대로 소담스러웠다. 왜 하필이면 거친 돌막위에서일까 싶었던 것이다. 바위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도 그랬다. 시원한 물 한 줄기, 산새 하나도 머물지 않는 바위투성이 골짜기에는 바람만 거세게 불어 갔던 것이다. 한 편으로는 마음이 시려워졌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메마른 바위였기에, 그보다는 깎아지른 곳이었기에 돌단풍과 담쟁이덩굴이 그토록 대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곡절도 없이 순조로운 날들은 무의미하다. 우순풍조 똑 고른 날씨에서는 곡식도 영글지 않는다. 똑바로 하늘 바라 밋밋하게 자란 나무는 아무런 운치가 없다. 바람에 굽고 태풍에 시달린 나뭇가지에서 우리는 바람서리 이겨 온 나무의 연륜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뒷집에는 혁기네라고 하는 타성받이가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언제나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특히 개울을 건널 때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발짝을 떼어 놓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니 앞이 잘 안 보였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나이가 먹으면 다 저렇게 되나 보다 하고 여겼지만, 어느 날 그 할아버지의 전철을 전해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친 적이 있었다.
혁기네 모친은 두 번째 부인이었다고 한다. 첫 째 부인이 무슨 연유로인가 나갔다가 돌아 왔는데 그 때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 날 돌아 왔던 그 할머니는 밖에서 그만 얼어 죽었다고 한다. 마치 옛날이야기처럼 황당한 면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 할아버지는 눈이 점점 더 나빠져 결국에는 그렇게 눈이 먼 것이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형편없이 망해서 생계조차 막연하다는 얘기를 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난다.
가난을 특정한 누군가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남에게 야박하게 굴었던 일은 틀림없이 받는 것 같다. 어쩌다 눈이 먼 그 할아버지, 집이라고 찾아 온 사람을 그렇게까지 대접할 게 뭐 있었을까. 과거에는 서로가 죽일 듯 원수 같은 사이였어도 궁한 사세 앞에서는 인정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짐승을 멸시하면 먹을 게 안 생기고 사람을 멸시하면 재앙을 면치 못한다는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남을 공경하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요, 자기보다 약한 자를 깔본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비하시키는 만큼, 사람을 대할 때는 남녀 노유를 막론하고 있는 성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게울 너머 밭에는 밤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나무가 어찌나 컸던지 다만 두 그루인데도 꽤 많은 밤이 열리곤 하였다. 겨울이면 땅에 묻은 밤을 꺼내어 화로에 구워 먹곤 하였는데, 그럴 때는 껍질에 흠을 냈었다. 안 그러면 밤이 튀어 다치기 쉽다는 것이다. 유난히 단단한 조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매달린 밤송이도 늘 갈라져있었다. 다른 과일은 익으면 그냥 떨어지는데 말이다.
나는 이것을 보고 청청하니 맑은 하늘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창공에 어찌 아니 그러랴 하면서도, 그런 시적 감상을 떠나 보다 궁극적인 원인이라면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식품인 까닭이었다. 말하자면 속 내용물이 귀하고 소중할수록 다치고 상할까 보아 험하고 거친 외양에 덮이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듯이 속 알맹이가 부실한 것일수록 화려한 겉보다는 전혀 다른 유형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토록 맛 좋은 밤이래도 일단 상하고 나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차라리 배 같은 것은 썩는다 해도 도려내서 먹을 수는 있기에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주고 배 썩은 것은 딸을 준다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우유와 버섯 등의 고단백 식품도 잘못 섭취했을 때의 식중독은 치명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높은 이념일수록 잘못 쓰일 경우의 독소가 생각났던 것이다.
일요일이면 나는 집을 다니러 갔었다.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울행 버스를 타고 달천에서 내려 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안보 쪽으로 가다가 내리는 길이었다.
강둑에서 내려다보면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이 하나 있다. 대림산 푸른 숲에 자리 잡은 사당은 오색 찬란한 단청 때문에 늘 가까이 하기 어려웠지만 그 묘가 이웃 마을인 하풍 마을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까닭없이 경건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더구나 이곳이 출생지였던 만큼 이 마을에는 임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임경업은 인조 때의 무신이었다.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에는 오랑캐인 가달을 물리쳐 호국에서 벼슬을 살기도 했었다. 조국에 돌아 와서는 변경을 지키는 데 힘쓰는 한편 병자호란 때는 다시 청국으로 건너 가 수많은 양민과 세자 대군 일행을 귀국하는 데 힘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남의 공을 시기하는 무리는 있게 마련이다. 평소 그를 미워하던 김자점 일파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임경업 장군을 거짓 어명으로 가둔 뒤 얼마 후 죽이고 만다.
나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하곤 한다, 적당히 타협하고 굴신하면 오히려 수월한 것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길이 아님을 알기에 그처럼 힘든 길을 자처하며 자기의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강직하고 올곧은 사람은 적이 많은 법이다. 나쁜 일을 꾀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인물이 꼭 장애물로 남는 것이다. 불의 앞에서 죽기를 무릅쓰고 항거하는 이들을 말릴 자 그 누구랴. 그러니 악인들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일 터였다.
임경업도 어지간히 불의를 용납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듯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차한 삶은 죽음보다 더 한 치욕이었기에 그들은 소중한 목숨이라도 초개같이 여길 줄 알았던 것이다. 비겁한 사람은 삶에 연연하고 의로운 사람은 죽음에도 태연하다고 한다. 더구나 부당한 처세로 온갖 부귀를 누린 사람은 죽어서도 자손에게 누를 끼친다. 언젠가 나는 한 매국노의 자손이 선친의 결백을 주장하는 글을 읽었다. 역사란 물론 왜곡될 수도 있어서 정확한 규명이 필요하겠지만, 그들이 좀 더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면, 그래서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고 깨끗이 살았다면 애초 그런 오명은 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울러 사람이 죽었다 해서 죽은 것은 아니듯 살아 있다고 해서 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차한 삶은 죽음보다 더 한 치욕이었기에 그들은 소중한 목숨이라도 초개같이 여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또 그렇게 한 점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올바른 역사가 이어져 내려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감상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꽃보다는 나무를, 그리고 나무 중에서도 늘 푸른 상록수를 좋아했다. 꽃은 잠시 동안 피기 때문에 꺼렸던 것 같다. 화려하고 고운 빛깔보다는 푸르고 맑은 기운을 더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상록수라고는 해도 늦가을이면 묵은 잎은 조금씩 떨어진다. 그것은 물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언제나 푸른 그 모습은 생활에 찌든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상록수에는 여러 가지가 많다. 사철나무와 소나무 전나무 등이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소나무를 좋아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글귀를 접하고부터 그 마음이 더했던 것 같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육신은 노량진에서 참형되었다. 똑같이 거사를 꾀하고도 살아남은 자는 생육신이라 하며 김시습 이 맹전, 조 여, 원 호, 성담수, 남효온 등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충절을 숭상해 온 우리 민족은 사철 푸른 기상을 기려 왔었다. 대의명분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늘 최상으로 쳐 왔다. 일견 그와 같은 충의지사가 있었기에, 반도에 딸린 우리나라가 수많은 외적의 침입에도 그나마 부지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의 특징은 옮겨심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내 언젠가 산에서 캐다가 심어 봤는데 번번이 죽기만 했다. 소나무의 뿌리는 일직선이다. 기질 그대로 잔뿌리가 없다. 뿌리 혹 박테리아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뿌리에 붙은 알갱이가 떨어지면 죽는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새로운 것에의 적응을 원치 않는 직선적이고 의로운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중학교 3년 동안 소풍이면 으레 가는 곳이 있었으니 곧 탄금대였다.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이 명승지는 충주시를 북서쪽으로 흐르는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다. 기슭에는 탄금대라고 하는 절벽이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는 푸른 강물이 노도와 같이 굽이치고 있었다.
가야국의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 악기를 만들어 폭군이었던 가실왕의 실정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지만, 바로 그 가실왕의 딸인 일타 공주 때문에 조국을 등지고 신라로 망명한다. 그래서 진흥 왕의 배려로 이 곳 충주에 와서 제자를 가르치며 신기에 가까운 음률을 쏟아 놓았던 것이다.
그 곳은 또 임진왜란의 명장인 신립이 몸을 던진 열두 대가 있다. 풍우같이 밀려드는 왜적을 막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흐르는 물보라는 늘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으로 열 두 번이나 굽이쳐 흐른다는 것이다.
후일 사가들은 그의 배수진이 무모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승승장구의 여세로 진군하는 왜적들의 호기는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조총이라고 하는 새로운 무기까지 있었기에 육지에 상륙한지 단 사흘 만에 한양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온 나라데 몰리는 먹장구름 때문에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한 장군의 피눈물이 대문산 곳곳에 뿌려져 있는 것이다.
열일곱 살이었던가, 나는 동생과 함께 뒷산에 올라 간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진을 찍기 위해 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무튼 그 곳에서는 온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동구 밖 구부러진 오솔길이며, 은빛 푸른 강과 그 너머 굼실굼실 떠가는 듯한 초가지붕이 마치 조개껍질같이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렇게 한참 취하다 보면 저 멀리 달천 강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보이곤 했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흔해서 그에 대한 별다른 감회가 없겠지만, 그 때는 아니다. 기차라고 하면 우선 느낌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워낙 먼 거리여서 상자 크기만 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는 아름다운 영상이었다.
기차가 지나 간 뒤의 산은 더 먼 듯이 느껴지곤 했었다. 정면으로는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의 푸른 숲이 아련히 보이고 그 뒤로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산들이 하늘을 버티고 있었다. 송강 정 철은 이것을 보고 하늘에 대해 무슨 말인가 아뢰고 싶어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하늘과 땅을 군신지간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산은 말이 없다. 뭇 짐승이 그 안에서 먹이를 얻고 다녀도 산은 불평 한 마디가 없다. 봉우리마다 구름이 머물러도 성가시게 여기는 기색이 없다. 얼마 후 구름이 제 풀에 생겼다 없어져도 일언반구 질책도 없는 것이다. 기름진 흙과 맑은 물 서늘한 공기의 혜택도 다 제 터에 자라는 나무의 공으로 돌릴 뿐, 그저 하늘을 향해 구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늘 무슨 말인지 할 듯 말 듯 하늘 바라 늘어선 바위까지도 산의 표상인양 숙연한 느낌이었다.
저녁으로 달이 번차례 드나들어도 산은 못 본 체 한다. 이따금 지는 노을에 스스로 붉게 타올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때로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은 그러나 말없는 속의 배려를 결코 잊지 않는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산은 그제야 깨어나 숲을 온통 구슬 성으로 만들어 놓는다. 더욱이 그 때까지 집에 가지 못한 별을 불러 내리어 숲 속 연못에 머무르게도 해 준다. 그러다 얼마 후 햇살이 들면 이들을 모두 하늘에 띄워 올린다. 그래야 우리 밤 되면 또 다시 별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산자락에 자리한 마을 풍경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푸근해 온다. 휘돌아간 오솔길과 구불구불 이어진 시냇물에서우리는 까닭 모를 향수에 젖곤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산이 우리의 정서 함양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인 것이다.
산자락에 휘감긴 곳이면 어김없이 자리한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어 다시 또 산, 그리고 뻗어 나간 야트막한 등성이의 끊이지 않는 그것 때문에 죽어서의 요람으로 되는 것 같다. 맑은 바람과 옥 같은 물, 폭폭이 어우러진 양지 뜸 등성이야말로 모두를 잠재우는 안식처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산이었기에 우리 때로 고향의 모든 것은 다 잊었어도 그 곳은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로 남는다. 동기간은 물론 몸담아 살았던 집마저 간 곳이 없어, 순간 망연해질 그 때, 그 완만히 뻗어 내린 등성이보다 우리 마음을 달래 주는 게 또 있을까. 누구나 그 곳에서 진달래와 산철쭉을 꺾던 일을 떠올린다. 찔레 순을 꺾어 먹으며 봄볕에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른. 그러다 가을이면 밤 말이나 따가지고 의기양양 집에 돌아오던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그러나 늦가을 단풍에 마음이 설레다가도 하루아침 비바람에 낙엽 질 때의 슬픔은 또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도 우리의 감상일 뿐 산은 아무런 내색이 없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이다 떠난 겨울 날, 눈을 쓰고 있는 산은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는 모습 그대로였다.
산은 늘 변함이 없다. 아니 변하지 않는 속에의 고요한 움직임이 있다. 그 속에서 오로지 자기만의 세계를 가꾼다. 다만 그것이 너무나 미세한 움직임이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절기와 시각에 따라 미세한 반응을 보이는 그게 산이었던 것이다. 첫 새벽 아침노을과 저녁의 그것은 분명 다르다. 어느 때는 섬 같이 보이는 웅장한 산등성이가 더러는 새 깃처럼 포근해 보이는 것도 그랬다. 계절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금강산은 아니어도 모든 산은 그렇게 저마다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별 빛 고운 밤이면 산은 또 한 개 섬으로 떠오른다. 더러 달도 없이 캄캄한 밤이면 산은 또 하늘을 받쳐 주는 성벽이 되곤 했다. 그 뿌리야 비록 흙에서 비롯되지만, 하늘로 치솟은 봉우리는 영락없는 하늘의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게 또한 산이다. 우리 아무리 나무를 베어 내고 산열매를 훓어 가도 말이 없는 나직한 위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이 너그러운 산도 영 용납하지 않는 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연을 거스르는 않는 일이었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잘못하면 나약한 삶이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말하자면 운명의 개척이니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배제된다는 것이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다르다. 다만 불평 없이 살아가는 양상을 의미할 뿐,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란 비길 데 없이 경건한 과제였기에 묵묵히 나아가면서, 결과보다는 힘든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천만 년 오랜 세월의 곡절에도 변함없이 오직 한 자리 지켜 서 있는 산처럼 우리의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삶이기를 꿈꾸어 본다.
겨울 방학이 되면 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