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23편 1-6절
목적:부귀영화가 절대적인 세상이지만, 나의 목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활동하던 시대는 12지파를 중심으로 한 ‘지파 체제’에서 벗어나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 체제’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사회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양과 염소를 치던 ‘목축 문화’에서 농사를 짓는 ‘농경 문화’로 넘어가던 시대였다. 유랑 생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은 점차 농경 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착 생활로 넘어가고 있었다.
문화가 변화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전까지는 여호와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들이 농경 문화의 중심인 바알로 그 중심을 옮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풍요에 빠질 때, 그래서 바알에게 빠질 때, 다윗은 오직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선포한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의 도움으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정착한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를 알현한다. 이때 애굽 문화를 잘 아는 요셉은 야곱에게 사전 교육을 시킨다.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창 46:24). 농경문화는 늘 목축문화를 가증히 여겼다. 다윗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농사를 짓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목자는 그때까지도 안정적으로 집에 거하지 못하고 광야를 떠도는 부랑자 정도로 인식되었다. 성서 시대 목자의 개념은 오늘날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는 노숙자 정도로 생각하면 가장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목자에 대해 낭만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사실 성서 시대 목자들은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는 극빈자들이었다.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마을과 농경지에서 먼 유대 광야로 점점 밀려났다. 풀이 없는 유대 광야에서 목자들은 몰래 남의 포도원과 과수원에 들어가 양들을 먹이곤 했다. 당시의 목자들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사회적 약자들의 대명사였다.
예수님 당시의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도 없는 존재였고, 남의 경작지에서 몰래 양들을 치는 ‘강도’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목자에서 다른 직업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회개했음을 의미하는 은어적 표현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부족하다”는 말은 궁핍과 결핍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성서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궁핍 가운데 살았다. 먹거리의 고민을 벗어난 것은 몇 년 안 된 이야기이다. 그 전까지 인류는 늘 부족함 속에서 살아야 했고,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해당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던 그 시대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다고 선포한다.
농경문화에서 부족함이 없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은 바알이었다. 바알에게 잘 보이면 많은 비와 함께 풍년이 보장되고, 바알에게 밉보이면 흉년의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그 바알은 여전히 대표적인 풍요의 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시 타작마당은 바알 신을 섬기는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이 집결된 종교의 중심지였다. 1년 농사의 모든 수고와 땀이 모이는 곳이 타작마당인데, 추수한 곡식을 탈곡하는 가나안 민족의 타작마당에는 반드시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바알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바알 신전에서는 성창으로 불리는 종교적 창녀들의 음행이 이어졌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실 수 있다고 선포한다. 유대 광야에서 여호와를 노래한 다윗은 이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여부스를 점령한 후 타작마당 자리에 여호와의 집인 성전을 짓고자 은 50세겔을 주고 매입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주신(主神)의 자리가 바알에서 여호와로 바뀌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시 23:2a). 광야에는 양들이 흩어져 안식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히 없었다. 가시덤불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한다. 자칫 양털에 가시덤불이 붙어서 양털 깎는 작업을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동물의 시체가 있는 곳도 피해야 한다. 주변의 득실거리는 파리 떼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도 풀이 있는 푸른 초장이 있다. 목자는 그곳으로 양들을 인도한다.
‘누이다’는 네 발 달린 짐승이 사지를 쭉 펴고 완전히 드러눕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눕듯이 쉬는 것을 말한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의 환경에서 일체의 경계심과 긴장감을 풀고 완전히 무장을 해제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모습이다.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2b). 광야에서 물을 찾는 일은 목자와 양 떼들에게 생명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광야 길에 익숙한 목자는 어느 곳에 쉴 만한 물가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물의 근원은 갑자기 내리는 비, 그러한 빗물이 고인 바위틈의 구멍들, 누군가가 애써 파놓아 주인의 허락 없이는 마실 수 없는 웅덩이 등이다.
곳곳에 고인 물을 발견해도 모두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썩어서, 혹은 독이 있어서 탈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광야에서 맑은 물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으며, 대부분은 마실 수 없는 흙탕물이다.
이토록 어렵게 만난 ‘쉴 만한 물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목자는 양들을 물가로 인도한 후에 먼저 지팡이로 물의 깊이를 재어 양들에게 물을 먹인다. 왜냐하면 양은 털이 무거운데, 물이 묻으면 더 무거워져 자칫 물에 빠져 그대로 익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바위에 고인 물도 위험하다. 염소와 달리 발목이 약한 양들은 바위를 오르다가 자칫 떨어져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뿐만이 아니라 맹수들도 쉴 만한 물가를 찾는다. 목자가 없다면 절대로 쉴 만한 물가가 될 수가 없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a).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면서 수시로 양들의 숫자를 점검해야 한다. 양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혹은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서 기력을 잃고 쓰러져 낙오된 양은 없는지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대열에서 이탈된 양은 몇 시간만 방황해도 탈진해서 죽거나 맹수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양은 쉽게 탈진한다.
양이 탈진하게 되면, 목자는 쓰러진 양을 그늘로 데려간다. 만약 그늘을 찾지 못하면 목자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물을 먹이고는,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전신 마사지를 해준다. 척박한 광야에서 양이 살아남는 방법은 목자 하기 나름이다. 목자의 사랑에 달려있다. 오직 선한 목자만이 양들을 살릴 수 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3b). 성서시대는 친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연히 옆집에서 방귀 뀌는 것까지 알 정도로 비밀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에게 양을 돌보는 은사가 있는지 훤히 알았다.
소문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다윗이다. 그래서 아버지 이새가 형들을 다 집으로 불러들일 때에도 굳이 혼자 형들의 몫으로 배분된 양을 돌보는 일을 다윗이 맡게 된 것이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도 다윗에게 양을 맡겼을 것이다. 선한 목자에게 양을 맡겨야만 양의 주인도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양들을 잘 인도하였으며, 한 마리의 양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을 입구에 있는 양의 우리로 돌아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그 이름과 명예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양 된 성도들이 목자 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목자 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시는 일은 절대로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부르짖는 양을, 사랑하는 주의 성도들을 살려주실 것이다.
‘의의 길’은 잘 포장된 정상적인 도로나 길이 아니다. 반복적으로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길이다. 양들이 많이 밟다보니 생긴 길이라 부드럽고 걷기 편한 길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생긴 길이 수백 개가 넘는데, 어떤 길이 ‘의의 길’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답은 목자이다. 목자는 어느 길이 ‘의의 길’인지 정확히 안다.
‘의의 길’은 ‘옳은 길’을 말한다. 반대말은 ‘불의의 길’이 아니라 ‘틀린 길’이다. 광야에서 만나는 수많은 잘못되고 틀린 길과 달리 쉴 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옳은 길은 한 개밖에 없다. 나머지 길은 ‘틀린 길’이다.
광야에 나 있는 수많은 길들은 사람들에게 착시 현상을 일으켜 열심히 길을 찾지만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돌게 만든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이 이곳에서 길을 잃고는 죽곤 한다. 나는 열심히 길을 걸어가지만 나중에 보면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길, ‘의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틀린 길’에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죽을 것 같으면 부르짖어야 한다. 힘들면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유능한 목자이시다. 반드시 당신의 이름을 걸고 살려주실 것이다. 죽어가는 양을 살려주심으로, 그 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실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a). 유대 광야 옆으로는 수많은 단층과 절벽들의 유대 계곡이 달리고 있다.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과 비교하여 작은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린다. 이곳에 서 있다가 뜨거운 햇볕으로 인해 잠깐 의식을 잃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문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기는 하지만, 무섭다고 회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양들을 먹일 수 있는 잔잔한 물가는 반드시 그러한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만나는 잔잔한 물가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골짜기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면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골짜기의 좌우 길목에는 동굴이 많은데, 그 안에는 한낮의 햇빛을 피하려는 맹수들이 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양이 혼자서 이 길을 간다면 맹수의 밥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겁을 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담대하게 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목자가 앞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b). 광야에서 양들을 치는 목자에게 지팡이와 막대기는 필수품이다. 이는 마치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이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나가는 것과 같다. 지팡이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로 만든다. 이것은 무척 길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바위턱처럼 위험한 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양들을 옮길 때 지팡이를 사용한다. 또한 양들을 물가로 인도한 후에 물의 깊이를 잴 때도 지팡이를 사용한다.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지팡이는 양들을 인도하는 필수품이다.
막대기는 올리브 나무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로 만드는데, 뿌리에서 나온 가지보다 훨씬 짧다. 막대기의 한쪽 끝이 뭉툭하게 두텁고 무겁다. 목자는 막대기를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갑자기 나타난 사자나 곰과 맹수를 물리칠 때 사용한다. 막대기에는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이미지가 있다.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며 양들은 안위함을 얻는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 주변에서 농사를 짓던 애굽, 이집트는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농경 민족이다. 애굽 민족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인류의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를 탄생시킬 정도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앞선 민족이었다. 이들이 이스라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늘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자신들과 달리, 이들은 1년에 2번 이상의 다모작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돌아다닐 염려도, 먹거리가 떨어질 필요도 없다. 늘 풍성하니까.
목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변두리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더럽고 귀찮은 야만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까지 천대받기 시작했다. 바알처럼 얼마든지 즐기면서 섬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거부하실까? 세상이 바뀌면 살아가는 방법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참 신기한 것은 목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도, 굳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목자의 이미지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실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암 3: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사람들이 목자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목자의 일이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상대가 사자라고 해도, 곰이라도 해도 양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렇게 싸우셨고, 끝내는 양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나는 선한 목자 예수님만 선택한다. 영원한 나의 목자이시다. 그 목자로 인해 부족함이 없으며, 그 목자로 인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그 목자로 인해 영혼이 살아나며, 그 목자로 인해 의의 길로 걸어갈 수가 있으며, 그 목자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하더라도 능히 담대함으로 걸어갈 수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2009.11.29 주일설교 (형제감리교회 박경수목사님 명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