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려면
일본 규슈에 '가라쓰'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현해탄을 마주 보고 있는 이곳은 특히 가라쓰 도자기가 유명한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든 곳이라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총재와 우리 식구들은 이곳을 1980년대부터 여러 차례 방문했고, 나는 계속 관심을 기울이다가 2016년 가을에 찾아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중요한 과업 하나를 다시 시작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해저터널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가라쓰는 그 해저터널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입니다.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면 오세아니아만 제외하고 지구의 모든 땅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지구는 하나의 마을이 되어 모든 사람이 이웃처럼 오손도손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부부는 오래전부터 모든 대륙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평화의 길을 생각해 왔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의 알래스카와 러시아를 잇는 북극 바다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현해탄입니다. 이 두 곳에 길을 놓으면 인류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 불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반드시 이뤄야 할 최후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한국과 일본을 연결시키는 일은 두 나라 사이에 어두운 역사가 큰 장애물로 놓여 있어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부산과 일본의 가라쓰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뚫으면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우뚝 올라섭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무역선들의 정착지가 되어 모든 물자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실어 나를 수 있으며 수많은 여행자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 평화를 뿌리내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등과 반목에 발목이 잡혔던 두 나라가 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역사적 화해의 계기도 됩니다.
세계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세계평화고속도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인 1981년에 발표했습니다. 한일해저터널은 1986년 가라쓰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중단되었습니다. 나는 그 일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섬나라는 대륙을 그리워합니다. 일본과 한국이 하나 되어서 한일해저터널을 만들고, 남북이 하나되면 그것이 유라시아를 거쳐 전 세계로 향하는 평화고속도로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현재 몇몇 강대국들이 자기네 나라의 이익만을 계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치렀지만 서로 손잡고 도버해협에 유로터널을 만들었습니다. 한국과 일본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로 마음을 연다면 우리 시대에 한일해저터널을 만들수 있습니다. 우리는 30년 동안 그 일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마음을 활짝 열고 미래를 가꿔 가야 합니다.
세계평화고속도로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걸림돌은 북극의 베링해협입니다. 이곳에는 한일터널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베링해협은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힘겨루기를 하면서 한때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을 갈라놓던 이념의 바다였습니다. 이곳을 연결하는 것은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고 인종 · 종교 · 국가의 울타리를 허물어 인류를 대화합으로 이끄는 첫 번째 길입니다.
이를 위해 1980년대부터 해저터널 프로젝트를 꾸준히 실천해 왔습니다. 이 계획이 실현되는 날이면 아프리카 최남단에 있는 희망봉에서 남미의 칠레 산티아고에서부터 남북미를 거쳐 베링해협과 아시아를 통해 한국까지 연결됩니다. 한국은 인류가 고대하던 참부모가 탄생한 종주국이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에서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영국의 런던에서 미국의 뉴욕까지 누구라도 자동차로 혹은 자전거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단둘이 전 세계를 고향 마을 찾아가듯 편안하게 가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위대한 업적은 모두 어려움 속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베링해협에 충분히 터널을 뚫을 수 있습니다. 그 비용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전쟁에 탕진하고 있는 돈을 생각한다면, 각 나라들이 무기를 사들이는 돈의 절반만 있어도 베링해협을 하나의 길로 이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이사야>의 가르침처럼, 이제는 '총칼을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 때'입니다. 더 이상 전쟁을 위한 전쟁에 생명을 희생시키고 천문학적인 돈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거듭해서는 안 됩니다.
공사가 중단된 가라쓰의 해저터널은 아직 어두컴컴합니다. 그러나 잠시 중단되었을 뿐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곳은 세계를 하나로 잇는 화합의 문입니다. 나는 그 문을 활짝 열어 인종·종교·국가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이 그렇게도 소원해 오신 평화세계를 이룩할 것입니다.
동토의 왕국을 무너뜨린 대담한 발걸음
"이제 냉전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겠네요."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엄연히 소련이 버티고 있고, 공산주의가 아직도 여러 나라에서 득세하고 있는데, 평화가 그리 쉽게 얻어질까요?"
"쉽지는 안겠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내리라 믿어요."
1990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분명 겉으로는 화해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여전히 불안한 냉전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또 전 세계의 3분의 2를 지배하고 있던 소련은 자유주의 나라들을 공산화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세계를 옥죄는 냉전을 이제는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얼어붙은 땅, 모스크바로 들어가 고르바쵸프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결단은 이미 14년 전에 내려졌습니다. 1976년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 날인 9월 19일에 우리 부부는 중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대회를 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을 굴복시켜야 하나님과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무모한 돈키호테의 호언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한 말을 한 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와의 전쟁은 정치 체제나 단순한 구호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God or no God)'의 문제였습니다. 그 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공산세계 해방이었습니다. 냉전 시절에 자유세계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망설이고 있을때 수억 명의 공산세계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근근이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소련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내세우기는 했어도, 전 세계 공산주의의 우두머리로서 북극곰이라는 상징이 보여 주듯 철에 장막에 가려져 있는 막강한 철권의 국가였습니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며칠 전에 우리 부부는 통일교회 원로 식구들과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식구들 중에는 극구 만류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왜 위험한 공산주의 본거지로 굳이 가시려 합니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우리 부부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문 총재는 식구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바라보고는 뜻밖에 말을 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후임자가 누가 되어야 할지,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어요."
갑자기 나온 '후임자'라는 단어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문 총재는 다시 한번 식구들을 둘러본 후 진중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없어도 어머니만 있으면 돼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에게 '통일교회 제2대 교주'로서 막중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나 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을 구할 독생녀이자 평화의 어머니로서 그 사명은 이미 30년 전에 주어진 것이지만, 나는 문 총재가 전면에서 섭리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내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날 후임자를 발표한 것은 모스크바에서 혹여 일어날지도 모를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비해 차후의 일을 염두에 둔 비상조치였습니다.
이후 1990년 참부모의 날을 맞이해 미국 뉴욕에서 '여성 전체 해방권'을 선포하고 나는 통일교회 제2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이어 1994년 11월 27일 뉴욕 벨베디어 수련소에서 제2대 교주로서 나의 공적 사명을 새로이 공표하고 그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그때는 16만 일본 여성 교육과 각국 대회가 끝나 나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졌습니다. 그날 나는 식구들 앞에서 "모두 하나 되어 참부모의 전통을 세우는 가정이 되기를 맹세하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1년 6월, 캐나다의 클리어스톤 본관에서 일본 대표 부인 40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명성 선서 선포'가 있었습니다. 고명(顧命)은 '왕의 유언'을 뜻하는 말로, 문 총재는 자신이 성화한 후에도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 가도록 일본의 여성 대표들이 책임지고 참어머니를 받들어 나가야 한다는 유명(遺命)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 선포에는 일본이 어머니와 하나 되어 세계를 품고 나가야 한다는 사명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신이 부재할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습니다.
199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세계언론인대회가 열렸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대회에 참석한 세계지도자들을 크렘린궁으로 초청했습니다. 여성은 오로지 나 혼자였습니다. 소련 대통령 집무실은 여성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으나 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고르바초프에게 중남미통일연합(AULA)이 제정한 '자유통일대십자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축도했습니다.
"이 대통령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소서(God bless you, Mr. President)."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세계의 종주국인 소련 대통령 집무실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공산주의 체제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담소를 나눌 때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한학자 여사님은 한복이 잘 어울리시네요. 참 아름다우십니다."
나는 즉각 화답했습니다.
"라이사 영부인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세계 여성들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내일 라이사 여사를 뵙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남편이 이야기했지만 대통령께서도 참 미남이시군요."
덕담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점차 훈훈해졌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하늘에라도 오른 듯한 기분으로 활짝 웃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기도의 힘이요,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이뤄진 회담이 세계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남편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충고했습니다.
"소련의 성공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신론은 자기 파멸과 재앙을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이 살길은 공산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닌의 동상을 철거하고 종교의 자유를 시행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말했습니다. 이어 공산주의를 끝내고 하나님주의를 받아들이라고 대담하게 권고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으나 종내에는 우리 부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껏 크렘린궁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본 회담은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그때부터 소련은 급속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우리 부부와 통일교회에 대한 소련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믿음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 가히 혁명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5천 명이 넘는 소련 청년들과 교수들을 미국으로 불러와 교육시켰습니다. 그 후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나 잠시 혼돈기가 찾아왔습니다. 고르바초프가 개혁과 개방 돌풍을 일으키자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크리미아 반도의 포로스에 연금시켰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개방정책을 통해 소련이 민주주의로 가는 노정에서, 우리가 교육시킨 대학생과 청년들이 군부의 탱크에 맞서 육탄으로 저지함으로써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다시 손을 잡고 소련을 해체하고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문 총재와 내가 고르바초프의 집무실에서 했던 "이 대통령을 축복하소서"라는 축도가 천운을 불러 온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17년 전부터 유럽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소련과 동유럽에 지하 선교사들을 보냈습니다. 청년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그들이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들어가 꾸준히 활동해 소련이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이 이뤄지고 1년 후 소련공산당이 해체되고 동토의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1971년 볼셰비키혁명 이래 70여 년 동안 세계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서 수억 인류을 피흘리게 하고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드디어 그 붉은 깃발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의 세계관이 패망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나아가 갈등과 투쟁 그리고 증오의 철학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며, 공산당의 독재체제가 파멸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부부의 소련 입국과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일생일대의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그 힘을 잃어 세계의 판도가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고르바초프와 회담을 마친 후 우리는 장차 변화할 세계에서 평화를 실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단체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세계를 어둡게 하는 그림자는 종교의 쇠퇴와 도덕성 상실 그리고 공산주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부부의 50여 년에 걸친 노력으로 종주국 소련에서조차 폐기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문제는 무척이나 심각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분쟁을 막고, 피폐해져 가는 종교를 어떻게 다시 삶의 나침반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탕 위에서 도덕성을 회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120개 나라를 순회하면서 천주평화연합(UPF)을 창설했습니다. 진정한 평화세계를 일구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과 단체를 하나로 묶어 지구촌의 살핏줄이 되게 했습니다. 각계각층의 명망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뜻에 공감해 평화대사가 되었습니다. 2001년 한국의 12개 도시에서 시작한 평화대사 활동은 곧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들의 순수하고 뜻깊은 활동에 감명받아, 이제는 160여 나라에서 100만 명이 넘는 평화대사들이 참된 평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각 분야에서 여러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엔의 '경제사회이사회 특별자문 지위'를 받은 NGO가 되었습니다.
평화대사는 다양한 전문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해 세계 구석구석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실핏줄입니다. 분쟁이 있는 곳, 가난으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곳, 종교 갈등이 있는 곳, 질병으로 고통받지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아픔을 치유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헌신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찾아간 곳
나는 1948년에 자유를 찾아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남편 문 총재는 흥남감옥에 갇혀 있다가 1950년 10월 유엔국이 감옥을 폭격하면서 문이 열려 자유의 문이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유엔국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복역 기간이 오래된 수용자부터 어디론가 데려가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끌려갈 예정이었는데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늘은 그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고 유엔군을 통해 문 총재가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후 1991년까지 나와 남편은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으나 정작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북한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북한에서 남하한 실향민이라면 누군가 마찬가지겠지만,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그리움과 애달픔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북한에 가려 했던 이유는 단지 '고향이 그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한반도는 우리의 뜻과 관계없이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그것을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분단을 끝내고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대결과 갈등을 없애는 것은 세계평화를 열어 가는 첫 단추입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우리 부부는 1991년이 가기 전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결코 현실화할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문 총재는 광복 직후 북한에서 전도를 하다가 이승만의 첩자라는 혐의로 대동보안서에 갇혔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받아 죽기 직전에 풀려났습니다. 얼마 후에는 사회질서 문란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죄목으로 또 체포되어, 흥남감옥에서 복역하며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2년 8개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역시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주의 체제에서 옥에 갇혀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자유를 찾아 끝내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가족과도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 험난했던 탈출의 여정을 나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 1975년 6월 1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여의도광장에 모여 구국세계대회를 개최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승공운동을 벌이자 김일성이 우리를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도 여러 차례 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 두었습니다. 단지 남북화해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자 응답이 왔습니다. 1991년 11월 중순에 김일성 주석이 우리 부부를 초청했습니다. 꽁꽁 봉해진 초청장을 미국에서 비밀리에 받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는 겨울 옷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수련소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했습니다.
"하와이는 지금 여름인데 왜 겨울 옷을 가져가실까?"
우리 부부는 수련소 한쪽에 겨울 옷이 가득 든 가방을 놓아 두고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북한으로 가기 전 마음 한구석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모두 풀어야 했습니다. 40여 년 전 우리를 핍박했던 김일성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로만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자리, 어머니의 심정에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형장에 나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 어머니는 그 나라의 법이라도 바꾸려 합니다. 그것이 본연의 어머니 마음입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북한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무거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고 나자 굳건한 성이 무너졌듯이 하와이의 섬을 여러 차례 돌며 정성을 드렸습니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옛 감정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 부부는 그제야 몇몇 사람에게 북한에 간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원수를 만나러 그곳까지 가시겠다니······너무 위험합니다."
"북한에 가는 것은 모스크바에 가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김일성이 절대 입국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입국한다 해도 북한을 출국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위에서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별의별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사적인 감정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 그를 죽이려던 형 에서를 천신만고 끝에 지혜와 정성으로 감동시켰듯이, 김일성 주석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부모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담담한 마음으로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자 북한 대표가 공식 초청문서를 건네주었습니다. 초청장에는 평양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11월 30일, 우리 일행은 김 주석이 보낸 조선민항 특별기 JS215편을 타고 북으로 향했습니다. 비행기는 우리를 위해 남편의 고향인 정주 상공을 지나 평양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비행기가 평안도를 지날 때 청천강이 내려다보였습니다. 파란 물결이 마치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분명 우리 강토이건만 남북으로 갈라져 올 수 없었던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통한스럽기만 했습니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남편의 혈육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우리 집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우리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울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서는 폭포같은 눈물이 솟구쳤지만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습니다.
우리는 모란관초대소에 도착했고, 남편은 북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했습니다. 나와 남편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다음 날 우리 부부는 평생의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영빈관에 감시 카메라가 있었다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울부짖는 그 기도가 모두 녹화되었을 것입니다. 아침을 먹고는 평양 시내도 둘러보았습니다.
3일째에 만수대의사당에서 한 연설은 이제 전설이 됐습니다. 주체왕국인 북한의 심장부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으로는 남북한을 통일할 수 없다.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하나님주의와 두익(頭翼)사상으로만이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되고 전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고 큰소리로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의 상투어가 된 '한국전쟁은 북침'이라는 주장에 대해 '남침'이라고 정면에서 통박했습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권총을 허리에 찬 북한 경호원들이 금방이라도 총을 빼들고 달려들 기세였습니다. 동행한 우리 식구들의 손과 등에는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남편과 전 세계를 순방하며 각국 정상들을 많이 만났지만, 평양 방문 때는 정말로 비장한 각오와 심각한 결의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일째 되던 날 헬리콥터 두 대에 나눠 타고 정주에 갔습니다. 김 주석의 지시로 도로를 잘 닦아 두었고, 양친 산소에 떼를 입히고 비석도 세워 놓았습니다. 생가에는 페인트칠을 하고 토방과 마당에 모래를 깔아 새로 단장했습니다. 남편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꽃을 바쳤습니다. 나의 고향 안주 하늘이 아스라이 바라보였습니다. 아늑하게 나를 품어 주었던 고향집은 그대로 있을까, 뒷밭에는 요즘도 옥수수가 자라고 있을까, 외할아버지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모든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북한에 간 이유는 고향에 가고 싶어서도 아니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조국의 장래를 놓고 담판을 지으러 간 것입니다. 그 역사적 소명 앞에서 사사로이 내 감정을 내비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언젠가는 누구나 자유롭게 고향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었습니다.
7일째가 되어서야 우리는 드디어 김 주석을 만났습니다. 함경남도 마전에 있는 주석공관에 들어서자 김 주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관은 하얀 돌집이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김 주석은 서로를 반갑게 얼싸안았습니다. 김 주석은 한복을 입은 나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사냥이며 낚시 등 소소한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나눴습니다. 김 주석은 이듬해 계획된 3만 쌍 국제합동결혼식을 해당화가 아름다운 원산의 명사십리에서 하도록 추천했습니다. 원산항 개항도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할 말이 너무 많아져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40여 년 만에 만나는 원수를 깊고 진한 사랑으로 품었습니다. 김 주석도 그 진정성에 감복해 회담 내내 밝은 모습으로 우리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시절 북한을 찾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문 총재는 공산주의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종교 창시자인 동시에 세계 제일의 승공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땅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들어가 최고통치자에게 천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우리의 방북은 합작투자나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딴마음을 품고 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섭리의 뜻을 따라 진정으로 위하는 하나님의 마음, 참사랑을 품고 공산주의자들을 깨우쳐 진정한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함이었습니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국빈의 예우를 받았으나 하룻밤도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해 이산가족들이 서로 애타게 그리워하는데 평양에 와서 편히 누워 잘 수 만은 없었습니다. 밤새워 사무치는 기도로 천운을 연결시키고 하나님 앞에 통일을 위한 조건을 세우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정치협상이나 경제교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에 의해서만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성사된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으로 남북한 통일을 위한 새 장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8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자마자 연형묵 북한 경무원 총리가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조인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공산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목숨을 걸고 모스크바에 갔으며, 평양에도 갔습니다. 우리를 혹독하게 핍박했던 원수들을 반갑게 껴안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 화해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평화와 통일의 초석을 깔았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참사랑을 주려고 갔던 결과였습니다. 남편과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했고, 인류를 위해서라면 사랑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했습니다.
김일성을 만나고 온 후 북한에 평화자동차공장을 세웠고, 보통강호텔과 세계평화센터도 지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전부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이후 한국의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통일의 길을 찾아가는 성과를 거둔 것도 우리 부부가 뿌린 씨앗의 결실이었습니다. 이제 그 밑거름 위에서 평화와 통일의 싹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 싹이 활짝 꽃을 피울 때 우리 부부가 드린 통일을 위한 염원의 기도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5유엔사무국
"나는 굴복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무릎 꿇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영화 <안시성>에서 전투에 임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표현한 대사입니다. 전투를 앞두고 기필코 성을 사수하겠다는 각오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찬란했던 고구려가 점차 기울어 마지막 길을 가고 있을 때입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권력자인 연개소문을 지지하는 장군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안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희생을 불사하고 성을 사수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부모님이 현현하신 한반도는 장차 모든 문명이 꽃을 피워 결실을 맺는 미래의 영토이자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부모와 자식, 형제들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장벽에 막혀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야만 했던 불행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원한과 통곡의 분단선은 겉으로는 지리적 · 혈연적인 분단선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놓고 유물론과 유신론이 치열하게 대치해 온 사상과 가치관의 분단선이었습니다.
그동안 문 총재와 나는 분단의 원인인 냉전을 끝내고 남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성과 노력을 쏟았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겠다는 일념으로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과 국제승공연합을 꾸준히 지원했습니다. 대학가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승공강연도 많이 했습니다. 신세대들은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 왜 필요한지 잘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무엇보다 냉전을 이 지구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일에 실제적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세계 곳곳에서 승공운동을 시작해 공산주의의 허상을 드러내고, 1990년 고르바초프를 설득해 결국에는 공산주의를 몰락시켰습니다. 1991년 김일성 주석을 만나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완화시키고 통일을 위한 교류의 물꼬를 텄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통일에 국제사회가 적극 협조할 수 있도록 193개 나라에 평화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워싱턴타임스>와 같은 세계적인 신문사를 세워 북핵 문제의 해결과 한반도 긴장 완화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러한 밑거름을 바탕으로 2015년부터는 121개 나라가 참가하는 '피스로드(Peace Road) 프로젝트'를 추진해, 전 세계가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힘을 결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언어와 국가, 인종이 다른 수십만 명의 세계인들이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며 93일간의 세계 종단 프로젝트에 동참했습니다. 임진각에 모여 다 함께 한국어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 감동적인 드라마를 연출했습니다. 이 운동은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 창립과 더불어 각 나라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유엔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북한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폭풍'이라는 공격 명령하에 남한을 침범했습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적화하겠다는 야욕이었습니다. 곧바로 유엔군이 결성되어 16개 나라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로 왔습니다. 그 시절 한국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고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유엔군은 '코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도 모른 채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낯선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나의 남편은 죽음의 강제노동수용소라 불리던 흥남질소비료공장에 갇혀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유엔군의 참전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유엔군은 한국 땅의 구세주 독생자와 평화의 어머니 독생녀를 살리기 위해 힘을 합쳤고,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우리 한민족을, 역사적으로 어렵고 힘든 고비마다 보호해 주셨을까? 생각해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하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섭리의 완성을 위해 6천 년 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첫 번째 사랑을 받을 독생녀를 이 나라에 탄생시켰습니다. 그 독생녀가 인류의 구원에 관한 책임을 수행하기까지는 성장 기간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섭리를 이끌어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사명을 감당할 독생녀가 성장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선민으로 택한 한민족 가운데 인류의 메시아 참부모로 오신 독생자와 독생녀를 지키셔야 했으며, 이를 위한 유엔의 참전은 하늘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전쟁을 하늘의 역사적인 성전(聖戰)이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유엔본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벌써 70년이 넘었습니다. 뉴욕, 제네바, 빈, 나이로비에 대륙별로 4개의 유엔사무국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아시아. 태평양 시대로 접어들었음에도 아직 아시아에는 유엔사무국이 없습니다. 세계의 정세를 보면 지리적으로, 경제 · 정치적으로 그 중심이 점점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통일 문제를 놓고 세계, 특히 아시아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한국에 제5유엔사무국을 유치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자국에 유엔사무국이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 대회를 통해 한국의 상황이 속속들이 알려지면서 그 의의가 크다는 것을 세계인들이 널리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나라들은 물론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국에 유엔사무국을 개설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참부모가 탄생한 위대한 나라이며 하나님이 이 나라를 통해 뜻을 이루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유치를 하기까지는 여러 어려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나는 천주평화연합과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비롯한 여러 단체를 후원해, 70여 년 전 유엔군이 평화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이 땅에 제5유엔사무국을 유치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2000년 뉴욕 유엔본부에서의 비무장지대 평화공원 구상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나는 2015년 5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제3유엔사무국에서 비무장지대에 제5유엔사무국의 유치를 제안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비무장지대 평화공원 조성을 유엔에서 북한에 제안한 바 있습니다. 남북한의 지지를 받아 제5유엔사무국이 비무장지대에 유치 된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사랑은 국경을 극복합니다
"다문화가정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사는 게 다들 쉽지 않아 보여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사람이 가슴 아픈 말을 합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도 간혹 있더군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한국으로 시집온 새색시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해요."
세상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다문화가정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깊은 속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들의 아픔을 잘 압니다. 197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했던 나 역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서러움을 톡톡히 겪었습니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조차 그러할진대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시골 마을은 물론 도시에서도 다문화가정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다문화가정은 주로 한국인이 남편이고 아내는 개발도상국에서 시집온 여성들로 꾸려져 있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시집온 여성들은 말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달라 낯선 땅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문화가정을 보는 시선에 은근한 차별이 담겨 있기도 해서 말 못할 서러움을 적지 않게 겪고 있습니다.
그 아픔과 서러움은 내가 겪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대한민국에 정착한 이국의 모든 여성이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지원은 국경을 뛰어넘은 축복결혼식이 성사된 1970년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다문화가정의 시원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올림픽이 있는 1988년의 6500쌍 한일국제결혼입니다. 한국에서는 벌써 그때부터 농촌 총각과 결혼하려는 도시 여성이 별로 없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감정 때문에 일본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던 시절이라 일본인 배우자나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일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경제적으로 뒤처진 한국의 총각이나 처녀와 결혼시키려는 부모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대신앙과 절대 복종을 신조로 삼는 통일교회의 일본 신부들은 대부분 농촌으로 시집가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 여러 식구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국제가정을 이뤘습니다. 그녀들은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시고 아들딸을 여럿 낳아 다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병든 노모를 봉양해 효부상을 받는가 하면, 불구인 남편을 수발하고, 마을의 부녀회장이나 학부모회장을 맡아 시골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농어촌 마을마다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살림을 차린 국제가정의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고 2010년 다문화종합복지센터를 세웠습니다. 한국 사회 적응에 힘들어하는 이국의 신부들이 고향에서처럼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장애인과 한부모가정을 후원하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꿈을 갖고 공부할 수 있도록 참사랑평화학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일부 연예인이나 고위층 자녀의 군입대 기피에 관한 소식을 접합니다. 그런가 하면 2025년부터는 우리나라 군이 '다문화 군대'로 변신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국제 축복결혼을 받은 가정의 자녀 가운데 이미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수가 어느덧 4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국제 다문화가정 자녀에게는 이중국적이 주어져 다른 나라 국적을 선택할 경우 군대에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은 국제 다문화가정 자녀의 경우 스스로 입대해 4천 명 넘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자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문화가정'이라는 단어도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그 단어에 이미 차별성이 담겨 있습니다. 가정은 가정일 뿐 그 앞에 어떤 수식어도 붙여서는 안 됩니다. 국적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다 하여 다문화가정이라 부르는 것은 인류 보편적 사고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납니다.
일찍이 전 세계적인 축복결혼을 주재해 온 나와 문 총재는 이미 30년 전부터 결혼을 통한 인종화합을 꾸준히 실천해 왔습니다. 한국과 일본 간의 교차교체 축복결혼을 통해 국가와 민족간의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결혼을 받은 신랑신부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행복한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가정은 행복한 가정일 뿐, 다문화가정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종교가 가야 할 마지막 목적지는 종교가 없는 세상입니다. 인류 모두가 선한 사람이 되면 종교는 자연스레 필요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문화가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하나님 아래 한가족', '모두가 한 형제'일 때 진정한 평등세계, 평화세계가 만들어집니다. 그 평화세계의 가장 밑바탕에는 참가정, 참사랑이라는 주춧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주어도
<쇼생크 탈출>은 내가 인상 깊게 본 영화 중 하나입니다.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던 주인공은 오랜 노력 끝에 탈출해서 자유를 찾습니다. 문 총재 역시 억울한 옥살이를 여섯 번이나 했기에 옥에 갇힌 주인공의 고통에 공감이 컷던 감명 깊은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편지글이 나옵니다.
"희망은 좋은 거죠, 가장 소중한 것이예요.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희망, 사랑, 우정, 아름다움 등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도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도덕을 잃어버렸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아픔은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하는 참사랑으로만 치유됩니다.
나는 매일 새벽 눈을 뜨면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종교적 가르침이나 정치 · 사회적 개혁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행복한 세계가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추위에 떠는 이웃에게 양말 한 켤레를 정성껏 신기는 것, 때로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 베풀고도 잊어버리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세계의 종교로 자리 잡았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변변한 교회 건물이 없었습니다. 식구들이 헌금을 내면 그 돈은 전부 우리 사회와 세계를 위해 쓰였습니다. 선교사가 해외로 떠날 때도 낡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갔습니다. 임지에서 스스로 노동을 해서 그 돈으로 어렵사리 교회를 운영해 나갔습니다. 신도들의 헌금은 여러 나라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봉사활동을 하는 데 모두 쓰였습니다. 그런 봉사와 베풂은 지난 6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지난 60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봉사를 더욱 체계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1994년 사회단체 '애원은행'을 세워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모든 식구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무료급식, 국제구호, 애원예술단 공연 등을 쉬지않고 이어 와 나라에서도 크게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를 더욱 넓혀 나가기 위해 '원모평애장학원'을 만들었습니다. 원모는 '둥글 원(圓)'과 '어머니 모(母)'입니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중에 으뜸입니다. 한 가족이라 해도 성격이 들쭉날쭉한 식구들을 사랑으로 품어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평애(平愛)'는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며 높고 낮음 없이 수평을 이뤄 온 우주가 참사랑으로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참사랑의 씨를 먼저 뿌려야 참사랑의 싹이 터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나는 문 총재가 성화했을 때 전 세계에서 답지한 조의금 전체를 씨돈으로 넣었습니다. 또 선교용 헬기를 팔아 종잣돈을 키웠습니다. 가장 중점을 두는 일은 청년 인재를 키우고, 봉사와 나눔을 통해 평화의 꿈을 실현에 가는 것입니다. 장학사업은 원모평애장학원이 으뜸으로 여기는 과제입니다. 교육이 인재를 만들고 인재가 미래를 만든다는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덕성을 지닌 인재를 길러내는 일은 지구촌의 밝은 내일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는 꿈과 비전을 지닌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원해 미래의 지도자로 길러 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나 자신을 잊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첫머리에 놓을 때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 기쁨마저 잊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곁에 찾아오십니다.
아픈 배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은 약손
"엄마, 배 아파!"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무릎에 누이고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줍니다. 옹이가 박힌 거친 손길이지만 잠시 후 배는 씻은 듯 낫습니다. 설마 그럴까 싶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임에도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의술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따스했던 어머니의 손길을 아스라이 기억합니다. 그 손길이 바로 우주의 어머니이자 평화의 어머니로서 온 세상과 인류를 보듬는 손길입니다.
사람은 몸이 아플 때 가장 서럽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원하는 청복(淸福)은 비록 가진 재산과 권력은 없어도 자족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을 뜻합니다. 행복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은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가슴속에 깊이 새겨야 할 진리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병 없이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몸이 아플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간절히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내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나는 일제 치하의 척박한 시기에 가난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으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부상과 질병으로 삶이 일그러진 사람들을 무수히 목격했습니다. 성요셉 간호학교에 입학했을 때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기쁨과 자긍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와 우주의 어머니, 평화의 어머니가 되면서 그 천직은 잠시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각국을 순회할 때면 조금만 더 일찍 치료받았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아이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기를 놓쳐 실명을 하고 수족을 잘라 내야 하는 그 아픔은 내 가슴에 깊은 옹이로 남겨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진정한 건강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 가면 나 자신이 외국인으로서 몸이 아플 때 누구를 붙잡고 호소해야 할지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간사에서도 경험하듯, 어머니의 귀에는 유독 자녀들의 울음소리가 잘 들립니다. 어머니의 눈에는 자녀들의 아픔이 잘 보입니다. 아이가 아파 울면 어머니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혼신을 다해 달려갑니다. 어머니의 관심과 신경은 온통 자녀들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라도 서슴없이 뛰어드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나는 간호학교 다닐 때 품었던 꿈을 실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 고향에서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국제병원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영혼이 아픈 사람들을 보듬는 어머니가 되어야 했습니다.
1999년 설립 인가 이후 4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03년 물이 맑고 산세가 아름다운 청평에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구 청심국제병원)을 열었습니다. 이 병원은 그저 또 하나의 새로운 병원을 세우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건강의 참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탄생되었습니다. 건강은 몸의 튼튼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연의 인간은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통일된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의학은 통일의학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습니다. 통일의학은 참사랑과 원리말씀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새로운 통일의학을 가장 먼저 개발하고 실천하고 있는 곳이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입니다.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러 나라의 의사들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동안 소홀히 했던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과연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건강에는 마음과 몸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은 세계 최고의 의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영성 치유를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기술에서도 첫 번째 병원으로 꼽힙니다. 그 바탕에는 인류를 고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영육을 아울러 구원하고자 하는 독생녀, 참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늘 잊고 살아갑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라도 몸과 마음을 돌아볼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번성하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번성은 꼭 자손이나 물질적인 번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육체적 번성도 우리의 사명이자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입니다.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은 그 기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깁니다.
그동안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 의료팀을 주축으로 이에 함께하고자 하는 각계각층의 많은 봉사단원들이 매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의료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주사 한 대, 약 한 알이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팔다리를 절단하고 실명하여 빛을 보지 못한 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심지어 아스피린 한 알이 없어 귀중한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HJ매그놀리아 글로벌의료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의료재단을 설립한 목적은 단지 의료사업이나 병원의 운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저개발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짓고 장비를 지원하는 등 의료 봉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의료봉사를 시작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캄보디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보건소를 지어 운영했습니다. 많은 국가의 정부에서 고마움과 감사 표시로 감사패를 보내 왔습니다. 우리 몸 가운데 발가락만 다쳐도 그 통증은 온 몸의 고통으로 확대됩니다. '한 하나님 아래 인류 한가족'인 우리는 지구의 한쪽에서 겪는 고통이 지구전체 모든 사람의 고통과 아픔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