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경주최씨의 유래(慶州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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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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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성여왕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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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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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로 관(貫)을 삼는 최씨는 우리나라 모든 최씨의 대종(大宗)으로 신라 개국전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를 득성 원조로 하고 그의 후손인 문창후 최치원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비교적 다른 성씨에 비하여 고려이후 조선이 개국되면서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써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국난에 처할 때마다 충의 열사가 지방도처에서 발기하여 가산은 물론 가솔까지도 돌보지 않고 활약하였다. 이는 오직 구국의 일념에서 우러난 충정으로 몸과 마음을 받쳤던 것이며, 두려움을 모르고 왕앞에서 직간하는 기질은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는 바 불의에 굴할 줄 모르는 품성을 대병해 주고 있다. 이는 경주 최씨뿐 아닌 거의 모든 최씨의 기질이요.품성이라 하겠으며 최씨 특유의 전통이 아닌가 여겨진다. |
관향지(貫鄕地) 신라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1. 간성최씨의 유래(杆城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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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漢良(최한량)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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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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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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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을 관향으로한 최씨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첨의(僉議) 평리(評理)를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라 간성군(杆城君)에 봉군된 휘(諱) 지순(之洵)을 득성조(得姓祖)로 하고 있다. 득성조 지순은 강릉(江陵) 최씨 대경공(大卿公) 휘(諱) 흔봉계(欣奉系)에서 분적(分籍) 이관(移貫)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조선조에 직장(直長)을 역임한 공천의 3남인 휘(諱) 한량(漢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구려 때는 수성군.
고려 995년(성종 14), 삭방도 간성군이 됨.
근대 1896년, 강원도 간성군이 됨. | ||
참고문헌 |
2. 강릉최씨의 유래(江陵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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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崔必達)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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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崔必達): 고려 태조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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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崔必達): 경주최씨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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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최씨는 관향이 같은 단일동족이 아닌 삼대계파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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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崔必達)계는 고려조 태조왕건의 창업을 도와 고려개국찬화공신(高麗開國贊化公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에 올라 경흥부원군에 봉군된 최필달을 경주최씨에서 분적하여 시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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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한(崔文漢)계는 고려조 충숙왕때 부마로서 군기시사를 거쳐 삼중대광에 오른 부마공계로 최문한을 시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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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흔봉(崔欣奉)계는 고려 태조때의 부마로 왕건 태조를 도와 삼한개국익찬공신에 되어 대경에 오른 최흔한을 전주최씨에서 이적하여 시조로하는 대경공계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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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3. 강진최씨의 유래(康津崔氏의由來) |
유래(由來) |
관향지(貫鄕地) 고대 마한 때는 구해국.
고려
조선
근대 1936년, 강진면이 읍으로 승격. |
참고문헌 |
4. 강화최씨의 유래(江華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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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후(崔益厚)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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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종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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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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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원류(氏族源流)를 보면 최익후(崔益厚)는 최충헌의 아들로 정당문학(政堂文學)·상서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를 지었다 라고 하는데 최근에 발간된 해동범최씨통사에서는 최익후는 경주최씨의 시조인 문창후의 후예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사정(司僕寺正)을 거쳐 인조조에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하였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5. 개령최씨의 유래(開寧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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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崔淵)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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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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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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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를 관으로한 최씨는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대사성을 역임하였던 휘 연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시 상계보에 의하면 사성공 휘 연은 청주 최씨에서 분적하여 득관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후계가 분명치 않고 문헌 역시 고증하기가 어렵다. 다만 개령최씨가 있었다는 것으로써 참고할 뿐 이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6. 개성최씨의 유래(開城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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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달(崔佑達)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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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조말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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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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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을관으로 삼은 최씨는 신라말기에 대승에 오른 최우달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인 대상공(大相公)최우달은 황주의 토산현(평남중화군)출신으로 그의 아들 최응(崔凝)이 고려 개국초에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올라 개성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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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7. 거창최씨의 유래(居昌崔氏의由來) |
유래(由來) |
관향지(貫鄕地) 신라
고려
조선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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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9. 계림최씨의 유래(鷄林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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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순(崔允順)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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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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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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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최씨는 신라조말에 계림부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는 휘(諱) 윤순(允順)을 시조로 조선씨족통보을 비롯하여 만성보(萬姓譜) 등에 나타나 있으나 경주최씨에서 분적되었다는 것 외에 다른 문헌을 찾지 못하여 세계를 상고(相考)할 길이 없다. 다만 후손 휘(諱) 강(江)이 있어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고 되어 있고 또한 휘(諱) 세준(世俊)이 조선 선조조에 공신에 책록(策錄)되어 계림군에 봉군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계림 최씨의 후손인지 아닌지 계림(慶州古號)에서 거주함으로써 계림최씨로 하였는지 분명치 못하다. 옛 고전에 계림최씨가 나타나있으므로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수록하여 둔다. |
관향지(貫鄕地) 신라
고려
조선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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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10. 고부최씨의 유래(古阜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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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崔陟)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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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단종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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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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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로 관(貫)한 최씨는 경주최씨의 시조인 문창후 최치원의 후손으로 조선 단종조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평북 귀성으로 낙향하여 은거한 봉상사사(奉常寺事) 휘(諱) 척(陟)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후손들이 선조의 전 거주지인 전북 고부를 관향으로 하고 있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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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11. 고죽최씨의 유래(孤竹崔氏의由來) |
유래(由來) 고죽(孤竹) 최씨는 조선조에 해주(海州) 최씨에서 분적한 휘(諱) 치(峙)를 시조(始祖) 하고 있다. 그러나 후계에 관한 문헌(文獻)을 찾고자 각급(各級) 도서관(圖書館)과 전국(全國)을 헤매었으나 찾지 못하여 본(本) 최씨에 대한 세계(世系)를 상고(相考)할 수 없다. |
관향지(貫鄕地) 고죽은 황해도 해주의 옛 이름이다 |
참고문헌 |
12. 곡강최씨의 유래(曲江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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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崔湖)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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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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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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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으로 관(貫)한 최씨는 전주 최씨의 사도공계(司徒公系)의 시조(始祖)인 휘(諱) 균( )의 후손(後孫)으로 전주(全州) 최씨에서 분적하였다.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역임(歷任)하고 곡강부원군(曲江府院君)에 봉군(封君)된 휘(諱) 호(湖)를 시조(始祖)로하고 그의 후손(後孫) 여실(汝實)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근대
참고 - 곡강(曲江)은 흥해의 다른 이름임. 그 이름은 흥해분지를 가로질러 동해로 유입되는 곡강천에서 유래함
고대
고려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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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13. 광양최씨의 유래(光陽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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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崔湖)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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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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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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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光陽)으로 관(貫)한 최씨는 휘(諱) 한(漢)영(英)을 시조(始祖)로하여 세계(世界)를 이어오고 있으나 선(先)계(系)는 문헌이 나타나지 않아 미상(未詳)하며 그의 아들 신(新)제(齊)공(公) 휘(諱) 산(山)두(斗)의 영달(榮達)로 하여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한성(漢城)판윤(判尹)에 추증(追贈)되었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14. 광주최씨의 유래(廣州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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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득보(崔得寶)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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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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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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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廣州)으로 관(貫)한 최씨(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始祖)이신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예(後裔)로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훈도(訓導)를 역임(歷任)한 휘(諱) 득보(得寶)를 시조(始祖)로하여 세계(世界)를 이어오고 있으며 후손(後孫)들은 평안도(平安道) 안주(安州)에서 세거(世居)하면서 전(前) 세거지(世居地)인 광주(廣州)로 관향(貫鄕)을 정(定)하고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15. 괴산최씨의 유래(槐山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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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진(崔世珍)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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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연산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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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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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槐山) 최씨(崔氏)는 문헌(文獻) 시조(始祖)를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중추부사(中樞府使)에 오른 휘(諱) 세진(世珍)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그의 선계(先系)나 후계(後系)를 상고(相考)할 문헌(文獻)을 찾지 못하여 정확(正確)히 밝힐 수 가 없다. 만성보(萬姓譜) 등에는 시조(始祖)를 휘(諱)정발(正潑)로 하고 있으나 휘(諱) 세진(世珍)과의 세대차(世代差)가 분명치 않아서 동족(同族)임에는 틀림없으나 계촌(系寸)을 가릴 수 없다. 후계(後系) 역시 자손(子孫)의 세거(世居)지(地)나 집성촌(集姓村)등이 나타남이 없어 이 이상 기록(記錄)할 수 없으며 다만 참고(參考)하기 바랄뿐이다. ?∼1542(중종 37). 조선시대 중국성운학자(中國聲韻學者). 본관은 괴산(槐山). 자는 공서(公瑞). 사역원정(司譯院正) 정발(正潑)의 아들이다. 자세한 것은 역대인물편 참조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16. 금천최씨의 유래(衿川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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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정(崔淑精)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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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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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陽川)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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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衿川)으로 관(貫)한 최씨(崔氏)는 양천(陽川) 최씨(崔氏)의 시조(始祖)인 휘(諱) 원(遠)의 후손(後孫)으로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휘(諱) 을 최씨(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계(後系)에 관(關)한 신빙성(信憑性)있는 자료(資料)가 없어 고문헌(古文獻)에 나타난 기록(記錄)만을 등재(登載)하여 후세(後世)에 참고(參考)하기 기대할 뿐이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17. 길주최씨의 유래(吉州崔氏의由來) |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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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吉州) 최씨(崔氏)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의 길성군파(吉城君派)의 파조(派祖)인 길성군(吉城君) 휘(諱) 유정(有井)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그 외(外)의 기록(記錄)이 나타나지않아 후계(後系)를 상고(相考)할수 없다. 길성군(吉城君) 후계(後系)에서 길성(吉城) 최씨로 분적(分籍)되어 갔는지 경주최씨의 길성군파(吉城君派)가 와전(訛傳)되어 오기(誤記)된 것인지 분명(分明)하지 않다. 다만 길주(吉州) 최씨가 고문헌(古文獻)에 나타남으로써 후세(後世)에 참고(參考)하도록 기록(記錄)하는바 이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참고 - 경상북도 안동(安東)이 고려 성종 14년에 길주(吉州)로 개칭된 적이 있음. | ||
참고문헌 |
18. 나주최씨의 유래(羅州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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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崔井元)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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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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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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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로 관(貫)으로 한 최씨(崔氏)는 탐진(耽津) 최씨(崔氏)의 계파(系派) 중조(中祖)인 휘(諱) 정원(井元)을 시조(始祖)로하여 세계(世系)을 이어오는 청양파(靑陽派)와 진사공(進士公) 휘(諱) 택(澤)을 시조(始祖)로 하고 휘(諱) 논금(論金)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는 보령파(保寧派)로 합보(合譜)를 못한채 양대파(兩大派)가 같은 충청남도(忠淸南道)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한편 탐진최씨의 세보(世譜)에 의하면 휘(諱) 정원(井元)은 탐진최씨의 중조(中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후계(後系)를 이어오고 있으나 근년에 탐진파 (耽津派) 중조인 휘(諱) 준양계(浚良系)에 합보(合譜)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서로가 특별한 이해(利害)의 관계(關係)이전에 탐진(耽津) 최씨(崔氏)의 중조였던 휘(諱) 정원(井元)의 후계(後系)가 분명치 못한데서 연유(緣由)된 듯 하다 세보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 또는 중조인 휘 정원의 손자인 금남공(錦南公) 휘(諱) 부(溥)가 나주(羅州)출생인(出生人)으로 조선(朝鮮) 성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호당(湖當)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는 등 문명(文名)을 떨치었으므로 후손(後孫)들이 충남(忠南), 보령(保寧), 청양(靑陽) 등지에 세거(世居)하면서 금남공(錦南公)의 전 세거지(世居地)인 나주(羅州)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늘에 이른것 같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조선 근대 | ||
참고문헌 |
19. 낭주최씨의 유래(朗州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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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흔(崔昕)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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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덕왕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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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주 |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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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주(朗州) 최씨(崔氏)는 신라조말(新羅朝末)에 원보상(元輔相)에 오른휘(諱) 흔(昕)을 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나 그의 선계(先系)는 확실한 문헌의 기록(記錄)이 없어 상고(相考)하기 어렵다. 원보공(元輔公)께서 영암(靈岩) 땅에 定着하여 세거(世居)하게 됨으로써 후손(後孫)들이 번성(蕃盛)하여 고려조(高麗朝)에 전객령(典客令)을 역임(歷任)한 휘(諱) 희소(希沼)를 일세조(一世朝)로 하여 계대(系代)하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
관향지(貫鄕地) 고대 고려 근대 | ||
참고문헌 |
20. 대녕최씨의 유래(大寧崔氏의由來) | ||
시조(始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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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렴(崔子廉)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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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
선계(先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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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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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大寧) 최씨(崔氏)는 고려조(高麗朝)에 태사(太師)에 오른 휘(諱) 자렴(子廉)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조선씨족통보(祖先氏族統譜)와 만성대보(萬姓大譜)에 시조(始祖)의 휘자(諱字)만 있을 뿐 그의 선계와 후계가 문헌(文獻)에 나타나지 않아 상고(相考)하기 어렵다. 대령은 해주(海州)의 고호(古號)이므로 해주(海州) 최씨(崔氏)에서 분적(分籍)되지 않았나 사료(思料)될 뿐이다. 다만 참고(參考)하기 위(爲)하여 지명(地名)과 시조(始祖)를 밝혀 둔다. |
관향지(貫鄕地) 고려 태조조에 본부의 남쪽이 바다에 임한 까닭에 해주라 개칭하고 1896년에 도청소재지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