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차카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심야 공항버스를 타고 가는 데까지 가서, 다음은 택시를 탈 테니까 공항까지 나오지 말라!’라고. 아들이 여행 출발할 때도 데려다주었는데,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오지 말라고 말려둔 것이다. 문자 보내느라 늦게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갔더니, 호텔과 롯지와 텐트에서 9박 하는 내내 룸메이트였던 친구가 내 트렁크를 찾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여행 내내 친구가 내가 할 것까지 해버리는 통에 나는 친구에게 빚을 지고 살았다. 아들이 답 문자를 보냈다. ‘손자가 할아버지 오시는데 자기도 간다’고 해서, 지금 아들과 같이 가고 있고 곧 도착할 거라고. 여섯 살 손자 얘기를 들으니 불현듯 내가 여행을 무사히 잘 다녀왔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반겨줄 가족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차가 집까지 가는 것을 사양하는 친구 의사를 무시하고 아파트 현관까지 잘 모셔다(?)주었다. 아들 덕분에 친구에게 진 빚을 조금 갚을 수 있어서 흐뭇했다.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침마다 가는 산책길을 평소와 같이 이른 시간에 나섰다. 원시의 대자연이 숨 쉬는 캄차카도 좋았지만, 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건 너희들이란 걸 산책길의 들풀과 들꽃들에 말해주고 싶었다. 늘 보는 풀과 꽃들이지만 이날의 반가움은 여느 날과 같지 않았다. 활화산이라는 척박한 동토에서 피는 키 낮은 들꽃도 아름다웠지만, 내 산책길에서 만나는 익숙한 들꽃보다 훨 낫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번에 내가 나를 본 것은 나는 여행 체질은 아닌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고, 색다른 것을 체험하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에서 나는 별로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내가 젊지 않기도 하지만, 젊더라도 여행이 주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같이 즐겁게 여행한 12명의 친구들이 들으면 섭섭해할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우리는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비행시간만 5시간 10분 걸려 캄차카에 도착했다. 직항이 없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야 한다. 경유지까지 나눠서 비행시간을 보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시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캄차카까지는 3시간 10분이 소요된다. 시차는 3시간으로 우리보다 캄차카가 3시간 빠르다. 우리는 캄차카에 먼저 가서 9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박 하며 시내 관광을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우리 여행 계획은 대부분 캄차카에 비중이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1박 정도 경유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에 더 애착이 갔다. 그것은 따로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뭔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관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캄차카는 북위 50도~64도 사이에 위치하고, 서쪽의 오호츠크해와 동쪽의 북태평양 베링해 사이에 있는 반도이다. 이 베링해를 사이에 두고 알래스카와 마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남한의 4배 크기의 땅이지만 인구는 35만 명 정도이다. 캄차카에는 160개가 넘는 화산이 있고, 그중에서 활화산만도 29개가 있으니 과연 ‘불의 땅’이라 할만하다. 우리가 간 7~8월의 평균 기온이 15도 정도인데, 이때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35도~37도의 폭염 소식이라 우리만 더위를 피해 있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로 쾌적한 날씨였다.
이번에 내 마음을 들뜨게 한, 캄차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연구 결과를, 본인의 여러 논문과 강연을 통해 발표한 바 있는 배재대학교 손성태 교수는, 우리 조상들이 이 캄차카에서 출발하여 알류샨열도를 거쳐 알래스카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 북미와 남미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 한민족 대이동은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손 교수의 주장으로는 발해가 망한 AD 926년 무렵에 이곳 캄차카로 많은 수의 우리 민족이 이주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 주장의 근거로 캄차카반도 일대에 한민족으로 추정되는 길약 족, 예벤키 족, 코리약 족, 춥지 족을 들고 있고, 이들 족속이 산 흔적에서 백제금동대향로와 같은 문양과 울산반구대 벽화와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고, 이들의 이동 경로인 알류샨 열도에서 온돌 등 여러 유물이 발굴된 것을 들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캄차카반도 일대의 여러 지명에서 우리말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올랐던 ‘아바친스키 화산’이나 그 옆에 있는 ‘꼬략스키 화산’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어미에 붙은 ‘스키’를 빼면 우리말 느낌이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무튼 나는 손성태 교수 주장의 지지자가 되었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 여행 왔다고 생각했던 캄차카에 대해서 갑자기 친밀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곳 캄차카에 여행 온 사람들이 대부분 즐기는 프로그램을 우리도 똑같이 경험했다. 4개의 활화산을 등산했고, 릴낚시까지 할 수 있는 아바차 만 보트 투어, 비스트라야 강에서의 레프팅과 연어 낚시, 베이스캠프인 롯지나 텐트에서의 4박, 노천 온천 수영장 경험, 세 번의 킹크랩 시식,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는 곰도 몇 번 만났다. 날씨는 운 좋게도 대부분 좋았는데, 헬기 투어는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뜨지 않는다고 하여 체험을 못 해 조금 아쉬웠다.
우리가 캄차카에서 등산한 4개의 산 중에서 첫 번째 등산한 산은 ‘아바친스키’이다. 해발 2,741m, 걷는 거리 17km, 8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05:00에 일어났고, 06:00에 아침 식사, 07:00에 베이스캠프인 롯지에서 출발했다. 우리가 잔 베이스캠프가 900m 고지라니까 여기서 정상까지는 대략 1,800m를 더 올라가야 한다. 나는 이 정도 높이는 처음이라 조금 걱정도 되었다. 한 달에 두 번은 직장 동우회 등산을 다녔고, 매일 산책으로 15,000보 정도를 걸었으니까 별 무리 없이 감당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날씨는 좋았고 산을 올려다보니 정상 부근을 구름이 휘감고 있어 정상을 보여주었다 가렸다 한다. 우리 시간보다 3시간 빨라서 그런지 아침 7시인데 해는 벌써 정상 부근에서 우리를 눈 부시게 하고 있다. 나는 평소에 선글라스를 낄 때마다 마음이 조금 편치 않았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멋으로 끼는 것 같은 불편함 말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선글라스가 제격이었다. 나는 항상 맨눈으로 자연 색깔을 그대로 보는 것이 좋아 선글라스를 안 꼈다가, 해를 마주 보고 올라가니까 너무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낀 것이다. 롯지를 나서자 완만한 언덕으로 야생화 장관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8월인데도 아직 눈이 남아있는 곳이 보이고 이것이 이곳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고 있다. 화산이 좋은 점 하나는 풀과 들꽃만 조금 있지 나무가 없으니까 시야가 온통 열려있어 좋다. 안개나 구름이 가리지만 않으면 사방의 시야가 확 트인다. 화산 가스가 분출하는 지역은 유황 냄새로 눈이 맵고 목이 칼칼한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여긴 미세먼지하고는 거리가 멀다.
우리 팀은 15명인데 선두와 후미에 러시아 사람인 젊은 현지 가이드가 자리하여 모두 일렬로 올라간다. 다들 나보다는 베테랑들이라 나는 처지지 않으려고 선두 가이드 뒤에서 두세 번째 위치를 고수했다. 처질수록 더 힘드니까. 가끔 잠시 쉬는 곳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장관이 펼쳐진다. 역시 시야를 가리는 나무 같은 것이 없으니까 산 아래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인다. 앞에 가이드가 하도 동네 뒷산 오르듯이 가볍게 오르길래 이산을 몇 번 올랐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스물 몇 번인데, 동료 가이드 중에서 수백 번 오른 사람도 있단다. 가이드를 위해 직업상 산을 오르면 재미도 별로 없을 텐데, 가이드는 자기 직업을 즐기는 것 같아보였다. 올라가는 내내 앞가슴 쪽에 매단 블루투스 스피크로 음악을 듣고 있고, 화산가스를 내뿜는 곳 등에서는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중계방송을 하며, 연신 인스타그램에 동영상을 올리곤 했다. 정상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들은 대로 기온은 서서히 내려가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귀를 덮을 수 있는 방한 모자를 썼고 바지는 날씨 변화에 따라 껴입기가 불편하므로 얇은 바람막이 바지를 아예 하나 더 껴입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는 방한 재킷을 하나 더 배낭에서 꺼내 입었고, 장갑도 겨울용으로 바꿨다. 등산 가서 옷차림이 예상과 잘 맞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없다는 생각에 공감할 것이다.
정상이 300m, 바로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다 같이 롯지에서 싸 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은 우리 도시락과는 다르다. 사과 하나, 작은 샌드위치와 과일주스, 나머지는 모두 과자류이다. 입에 잘 맞을 리가 없다. 여기서 정상조와 하산조를 나눴다. 나는 단번에 내려가기로 했다. 올라올 때 무난하게 올라왔으니까 정상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힘들여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산을 몇 개 더 오를 계획이니까 그때 봐서 또 하기로 마음먹었다. 후미 가이드와 조기 하산조 네 명이 하산을 시작했다. 처음 듣기로는 하산 길은 경사가 완만한, 올라올 때와 다른 길로 내려간다고 들었다. 그런데 하산 길이 만만치 않았다. 하산도 몇 시간을 내려가야 하는데, 화산 모래와 자갈이 섞인 아스콘 같은 길을 끝도 없이 내려가다가 그 길이 끝나면, 약간 얼어서 단단해진 눈길이 또 계속 이어진다. 가이드가 없었으면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위험한 길이 계속되어서 힘들었다. 스틱을 짚고 조심해도 계속 1m 정도는 보통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거나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우리는 등산을 위한 베이스캠프인 롯지와 텐트에서 각각 2박씩을 보냈다. 새로운 경험이긴 하지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롯지는 들어가면 좌우로 문이 있고 각 방에 4명씩 잘 수 있는 2층 침대로, 좁긴 했지만 견딜만했다. 문제는 물이 귀해 제대로 씻을 수 없었고, 화장실은 푸세식이라 냄새와 파리․모기는 견디기 힘들었다. 장소를 옮겨 우리가 설치한 2인용 텐트에서의 2박은 롯지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우선 야생화가 즐비하게 피어있고, 바로 가까이 시냇물이 흐르는 캠핑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산악 길 오프로드용 특수차를 타고 오다가 우리는 중간에 차를 세우고 가이드 시범으로 다 같이 죽은 나무를 자르고 모아서 캠프파이어용 장작을 마련하여 차의 지붕 위에 싣고 왔다. 저녁 식사 후에 모닥불 주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맑은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오랜만에 별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이드가 곰 출현 가능성을 경고하며 과자류를 포함한 모든 음식물을 한곳에 모으라고 했고, 그것을 모두 우리가 타고 온 특수차 안에 두었다. 가이드가 당연히 해야 할 주의 당부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새벽 2시에 일어나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만든 간이화장실로 가는데, ‘이마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곰이 오는 게 아닌가?’ 불안해하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러고는 텐트에 돌아와 침낭 안에 누웠는데, 그 불안 공포 때문에 잠이 안 와 그날은 거의 잠을 못 자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다이닝텐트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곰이 출현했다!’고 누가 소리를 질렀다. 우르르 모두 나갔더니 정말 우리 캠핑 장소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곰 한 마리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전날의 공포가 ‘괜한 공포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 아바차 만 보트 투어는 내게는 이번 여행에서 최악이었다. 선착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배는 20인 승 정도의 일본산 유람선이었다. 배는 아바차 만을 벗어나 태평양 바다까지 나가고 중간에 ‘삼형제 바위’ 등을 구경하고, 운행 중에 낚시할 사람은 준비된 도구로 낚시를 하였다. 릴낚시에서 몇몇 친구는 가자미를 잡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명태를 잡아 올리기도 했다. 나는 낚시는 워낙 취미가 없어 구경만 하다가 친구 하나와 선실에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슬슬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다른 때는 뱃멀미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배에 오를 때부터 배 특유의 기름 냄새가 거슬리더니, 멀미가 나면 배가 육지로 돌아가기 전에는 내 의사대로 피할 수 없다는 압박감이 생기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배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보트 투어를 운영하는 사람이 대게를 삶아서 내놓았다. 좋아하는 메뉴라 몇 점을 같이 먹었는데 금방 멀미가 더 심해져서 배 밑의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먹은 것을 다 반납(?)하고 말았다. 앞으로 배 여행은 내게 맞지 않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캄차카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은 오프로드용 특수차 승차 경험이었다. 눈길은 물론이고 울퉁불퉁 날카롭게 솟아 있는 화산석 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특수차의 바퀴를 보면 놀란다. 내 눈에는 바퀴의 두께가 70cm는 족히 넘어 보였고 그 정도로 둔탁하게 생긴 타이어는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다. 등산할 때마다 특수차는 차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우리를 실어다 주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다른 차를 보면서 ‘차가 어떻게 저 경사지고 눈까지 쌓여 미끄러운 길을 올라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 궁금증이 우리를 실어다 준 차의 바퀴를 보면 이해가 갔다. ‘저렇게 바퀴의 폭이 넓은 바퀴가 여섯 개나 있고, 바퀴마다 깊게 홈이 파여 있으니 가능했구나!’ 하고! 그런데 승차감(?)이 보통이 아니다. 차가 길의 좌우에 높이가 다르게 불쑥불쑥 솟아있는 화산석 위를 지나갈 때는 차 안의 사람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스프링에 튕긴 것처럼 위로 솟구치기도 하면서 가게 된다. 이 덕분에 이번에 내가 신기록 세운 것을, 곰 때문에 잠을 설친 다음 날, 차가 이렇게 몇 시간을 요동치며 달릴 때마다 ‘계속 창문에 머리를 찍으면서도 잠을 깨지 않고 잘 자더라’고, 내 뒷자리와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증언하는 것을 듣고 알았다.
드디어 여행 9일 차, 이제 캄차카 일정을 다 마치고 오늘 14:15 발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이곳에 얽혀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구글 지도에서 북한의 국경 지역인 두만강 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직선거리를 재어보니 128km였다. 차로 간다면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극동지방 남동쪽 끝에 있는 연해주(프리모르스키 크레이)의 중심 도시이다. 그곳에 도착하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현재 인구는 75만 명이고 차량은 50만대 정도 된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시가 속해 있는 연해주는 우리 민족 국가인 고구려와 발해가 문화를 꽃피웠던 곳으로 우리 민족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된 지역이다. 이곳이 AD 926년 발해의 멸망으로 우리 한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가, 새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이 1860년 무렵이다. 1869년 조선에 큰 흉년이 들어 기근에 허덕이던 우리 조상들이 이곳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또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자 일제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으로 망명해 왔다. 두만강을 넘은 우리 조상들에게 연해주의 초원은 넓었고, 1년 중 절반이 겨울이지만 봄과 여름이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신천지로 보였던 것이다. 한인들은 여기서 고려인, 카레이스키로 불렸고, 1925년 무렵에는 25만 명이 넘는 인구로 불어났다. 그들은 이곳에서 땅을 일구고, 학교를 세웠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힘들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상해와 함께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또한 안중근 의사의 혼이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결의를 다지며 걷던 해변이 이곳에 있으며, 하얼빈으로 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1937년 구소련의 분리 독립 정책으로 이곳의 수많은 우리 조상들에게 일본 간첩 누명을 씌워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거나, 투옥되고 처형된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다시 역사는 흘러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개방이 이루어져 지금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는 그때 이곳으로 와서 정착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국제공항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숙박료가 비싸다는 롯데호텔 근처에 있었다. 우리가 묵을 게스트하우스는 엘리베이트도 없는 오래된 건물 4층에 있어서, 모두 끙끙대며 20kg 가까이 되는 트렁크를 들고 계단으로 4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뭐 이런 곳에다 숙소를 잡았을까?’ 실망이 되었지만, ‘하루 묵고 내일 집으로 갈 거니까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불만을 다스리고, 짐을 각자의 방에 두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 차로 내려갔더니 이곳 한국인 가이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캄차카에서는 가이드가 러시아 사람이라 서로 서툰 영어로 소통한다고 힘들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라니 좋았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상뜨페테르브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그곳에서 7년 살다가 여기로 온 지는 3개월이 되었다고 한다. 40대 초반의 착해 보이는 사람으로 나는 금방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우리가 처음 관광을 간 곳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지금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까 아마 ‘포크롭스키 주교좌성당’이었던 것 같다. 성당 안은 유럽의 성당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당 안 강대상이 있는 전면 벽을 온통 사람들 그림 혹은 사진으로 장식해 놓은 것이 특이했다. 아마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된 사람들인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놀랄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성당 건물에는 내부는 물론 뒤쪽까지 가 봐도 화장실이 없어서 옆에 있는 부속 건물에서 나오는 남자에게 물었더니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킨다. 가봤더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는데 화장실은 캄차카 롯지에서 만난 화장실과 꼭 같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관리를 잘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고, 화장실 악취는 롯지의 화장실과 똑 같았다. 잠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주로 신부나 수녀일 테니까 수도하는 의미로 고행을 자초한다는 뜻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같은 관광객이 많을 곳의 화장실을 그렇게 둔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다음 코스는 ‘독수리전망대’이다. 가면서 보니까 도로는 우리나라와 같이 차로 넘치고, 도로 옆 아파트나 건물의 주차 공간은 어디나 차로 빽빽하다. 설명 들은 대로 이곳 도시 인구 75만 명에 자동차가 50만 대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승용차는 대부분 일본산 차였고 가이드 말에 의하며 15만 km 정도 운행한 중고차를 일본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도 차량 매연 문제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독수리전망대는 금각만과 시코트 반도가 내려다보이는 200m 정도 높이의 언덕에 있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2012년 이곳에서 APEC이 개최될 때 건설했다는 금각만 대교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역 등 시가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그런데 여기야말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사람이면 누구나 들리는 관광 명소인데, 전망대 올라오는 계단부터 파손된 곳이 많았고, 군사시설 같이 설치된 철망 펜스가 녹이 슨 채로 방치되고 있어 조경 개념을 가지고 관리 되고 있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시 당국에서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재정이 어려워 손을 못 대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재정이 어려운 것은 비단 블라디보스토크뿐만 아니고 러시아 전체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올해 IMF가 발표한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우리나라가 29위로 $31,940인데, 러시아가 66위로 $11,190이다. 땅은 우리의 200배이고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가 우리와 이렇게 격차가 있는지 몰랐다. 투자와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것은 이곳 독수리전망대뿐만이 아니고, 도로를 달릴 때 가드레일의 도색이 벗겨진 채로 오래 방치되고 있는 흔적을 보면 국가 재정이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을 맞았다. 어제부터 게스트하우스 벽면에 게시된 것을 보고 기대한 것은 아침 식사로 나올 해장국이었다. 아침에 식당으로 갔는데 나는 해장국이면 시래기를 넣어 끓인 해장국을 기대했는데 미역국이었다. 아침 식사는 미역국이 있는 백반 한 상인 것이다. 기대는 빗나갔지만 캄차카․블라디보스토크를 통틀어 제일 맛있게 먹었다. 먹고 국과 밥을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 식사 중에 주인아저씨가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를 했다. 식사 후에 나는 감사를 표하면서 이것저것 더 물어보았다. 이곳 한인교회 장로라고 하고 이곳이 개방될 때인 1991년에 들어온 이민 1세대이고 옛날에는 이곳에서 사업도 크게 한 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하면서 자료가 혹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발행하는 한인 신문과 이곳 총영사관 초청으로 와서 ‘연해주 역사기행 강연회’를 가진 우리나라 어느 대학 교수의 강연 자료를 주었다. 딱 내가 찾던 자료라 너무 고마웠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가이드의 안내로 어제에 이어 오늘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관광을 했다. 개선문, 해군잠수함, 아르바트 거리, 금각만 대교, 연해주 청사, 한인촌, 블라디보스토크역, 혁명광장, 해양공원, 솔제니친 동상, 토카렙스키 등대, 루스키섬 등을 둘러보았다.
여행은 다녀온 다음 날 이번 여행팀의 단체 카톡방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것으로 이번 여행기의 에필로그로 삼으려고 한다.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깨달음은 장엄한 자연이나 들꽃이 주는 감동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은 인간인가를 알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또 한팀이 되어 동반한, 나보다 더 열심히 살고 남 배려하기를 힘쓰는 친구들로부터 받는 선한 도전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분들과 비행기 옆자리에서, 롯지 앞 테이블에서, 또 트레킹 길에서의 대화는 큰 수확이라 할 만큼 유익했습니다.
늘 고맙게 생각하는 입행 동기이며 친구인 강대진과 손용건, 이번에도 대장과 총무를 맡아 남 섬기기에 힘쓰는 모습은 진정한 리더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헌신으로 우리가 참 자유롭고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여 사진을 찍어서 올려준 친구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위험한 길과 순간이 많았지만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건강하게 다녀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도 동행한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넘치게 만드는군요. 모두 감사합니다!』
(2019.8.25.)
첫댓글 덕분에 캄차카와 블라디보스토크 간접 여행 잘 했습니다. 오랫만에 손용건회원과 몇몇 회원 얼굴도 반가웠습니다. 여행기를 감칠맛 나게 잘 쓰시는군요. 감사합니다.
50년 넘게 존경해 온 김영 선배님의 격려 말씀이라 큰 힘이 되네요!
저는 9년 전쯤 경향신문사의 글쓰기강좌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제가 감사로 재직 중인 '(사)국어문화운동본부(세종국어문화원)' 에서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데, 이 캄차카 여행기를 쓰고 그곳 글쓰기 선생님으로부터 호된(?) 지적을 받았죠!^^
"글의 에필로그를 그렇게 쓰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그 글쓰기 선생님 역시 제가 무척 존경하는 분인데,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의 지적에 따르지 않고 글을 그냥 두었습니다.
굳이 이유라면, 기행문의 정석에 따르는 것보다는 내 생각의 흐름대로 글을 싶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