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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세계관의 변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끊임없이 생각에 도전을 주며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변화는 필수적인 것인데, 가시적이든 내면적이든 간에 어떤 변화이든지 그것은 세계관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그 변화의 과정과 변화에 부수되는 모든 현상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인간 내면의 고민과 갈등 등은 어디서나 거의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독자들이 비록 스와힐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여기서 발견되고 찾아진 변화의 원리나 성경적 원리를 자신들의 교차문화적(cross-cultural)인 상황에 잘 적용하여 좀더 성경적인 관점에서 폭넓은 인간 이해와 그로 인한 사랑의 식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세속주의적 세계관, 혹은 post-modernity의 세계관에 잘 대처하여 삶이 건강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변화가 무쌍한 이 시대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지도자로 성숙하게 되기를 또한 간절히 바란다.
7.1. "성경적 세계관"과 "기독교인 의 세계관"의 개념 정리의 필요성
복음전달자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일할 때에 성경적 세계관을 갖도록 돕는다고 하면서 많은 경우에 자신들의 문화적 세계관을 피선교지에 주입(imposing)시키는 경우가 선교 역사상 무수히 많았다. 그 이유는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성경적" 가르침 및 가치들과 문화적으로 상대성을 가질 수 있는 비절대적 가치들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른바 "the Christian worldview"을 추구하여 왔다. 즉, "기독교적 세계관"은 하나이며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목소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차문화적인 상황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문화권마다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들이 비록 "성경적인" 진리와 가치들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미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다른 사회처럼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공유된 성경적 진리와 가치들로 인하여 서로 닮아가는 부분들이 훨씬 더 많아지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에는 너무 다양한 문화적 요인들이 인간의 삶 속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Christian worldview"라고 하는 개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진리로써 세계를 이해하게 될 때에 크리스천의 세계관은 형성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관점을 그동안 자신이 세계를 이해해 왔던 문화적 관점에 적용하면서 세계관의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과 가치를 갖게 될 때에, 성경적 관점이 이 구원받은 사람의 세계관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앞에서 내가 Charles Kraft의 세계관 개념을 소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관의 변화란 문화적 전제 혹은 문화적 믿음(cultural assumption or cultural belief)들과, 문화적 가치들(values) 그리고 충성(allegiance)의 대상의 내용에 전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문화권에 살든지 성경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그동안 갖고 있던 세계 인식과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회심(conversion)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의할 것들이 있다. 우선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완벽하게"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회심(conversion)은 과정이지 완성은 아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완벽하게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의 세계관은 "성경적으로 성장한다"고 말해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먼저 정의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성경적 세계관 (Biblical Worldview)"
때때로 크리스천들은 "성경적"이라는 말을 과용 내지는 남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든지 사전적으로든지 이 용어를 정의하고 사용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biblical)"이라는 말은 교의학에서도 성경신학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본문비평학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특별히 자유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적이라는 말은 성경이라고 하는 책과 관련된 문헌적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통"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적"이라는 말은 "정통적"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학자들보다도 일반 성도들이 훨씬 더 신앙적인 의미에서 "성경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성경적이라고 말한다면 사탄의 말이나 욥 친구들의 틀린 신학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세계관 등까지도 성경적이라고 말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적"이라는 말을 좀더 좁혀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이 말이 "세계관"을 수식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Kraft 교수도 바로 이러한 "성경적 (biblical)"이라는 용어의 모호성 때문에 절대유일한 성경적 세계관의 개념을 비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은 용어의 문제일 뿐이므로 우선 그 용어를 정의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성경적 세계관"과 "크리스천 세계관"의 차이를 이해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될 세계관의 입장을 세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관점"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세계 이해, 하나님의 인간 이해, 하나님의 자기 이해 등이야 말로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천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궁극적인 지식들을, 좁은 의미에서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문화권에 사는 기독교 학자나 지도자가 "신학적 내지는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Francis Schaeffer 같은 이들은 성경적 세계관과 크리스천 세계관을 구별하지 않고 일종의 "the" Christian worldview의 개념을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신적 관점의 절대성은 이해하였지만, 다양한 문화권에 사는 그리스도인 들의 세계관의 상대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사고이다. 그와 같은 많은 학자들이 서구 정신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기독교 철학적 세계관"을 많이 전개하였는데, 이들의 세계관의 개념과 필자가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전개하는 세계관의 개념과 차이가 있음을 독자들은 이미 간파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가치관, 하나님의 충성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내용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적 세계관을 다 파악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계신 관점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성경적 세계관 안으로 자라갈 뿐이다.
"크리스천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 (Christian Worldview)"
이렇게 한편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정의하면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또 한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의 세계관"이다.
"성경" 안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문화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 사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들의 사고와 씨름하시는 것을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본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씨름으로 인하여 개인이나 혹은 민족들이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고 인정하여 자신들이 잘못 생각하였음을 고백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을 성경은 또한 종종 증거한다. 소위 말해서 "회개(repentance)"라고 하는 행위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사고의 극적 변화 혹은 "패러다임"의 변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계관의 변화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 전체 안에 국부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고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은 그동안 같은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조금씩 다른 사고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문화권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살지는 않는다. 즉, 아직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동일한 의식주 문화생활을 계속 한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신앙 때문에 꼭 바꾸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전통적인 관습들을 계속하여 지켜 나간다. 인사를 하는 것이나 예의를 지키는 것이나 그 사회의 여러 가지 종류의 질서를 따르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의 세계관 안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자라온 문화권의 세계관의 내용들을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분들과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으로 인하여 완전히 생각이 바꾸어진 부분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앞에서 언급한 "성경적 세계관"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며, 절대적인 "성경적 세계관"과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적 세계관"이 절대적인 가치로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관점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은 문화적인 세계관의 틀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를 보는 시각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 개인의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에 의하여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하지만 그 변화의 장(場)은 신학적 사고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성장해 온 문화적 틀(cultural frame) 안이라는 것이다.
구원을 진정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증대하면서 자신의 사고 내부에서부터 "문화 변혁"을 시도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의 문화 전반에 적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던 세계 이해와 가치들을 자신이 새롭게 이해한 성경적 관점으로 평가하게 되고, 만일 자신의 문화적 세계관과 성경적 세계관이 상충하는 영역이 발견되면 후자를 선택하기 위하여 애를 쓰게 될 것이다.
7.2. 비성경적 세계관들의 도전: 종교주의와 세속주의의 도전
앞에서 나는 "성경적 세계관"과 "크리스천(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은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관점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 하나님의 관점을 갖고자 애씀으로써 성장해 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모든 문화를 초월한 초문화적 하나님의 관점을 가리킨다면, 크리스천 세계관은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성경적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문화적 세계관에 변혁이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고는 늘 변화하게 되어 있다. 특별히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의 사고의 변혁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하루아침에 전적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몽땅 다 갖게 될 것이라고 믿지 않으시며, 이러한 깊은 인간 이해로 인하여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참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아주심 속에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하며 그분의 시각으로 점점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이 "성경적 세계관"에 부합되는지 확인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관점에서 자라가는 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관점을 자신의 삶의 철학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관점을 가진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세속적인 세계관에 너무 젖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관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자 하거나, 혹은 너무도 "종교적"이어서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보다도 엄한 절대 군주로 모셔놓고 많은 무슬림들처럼 종교 행위로써 불안한 마음들을 자위하려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오래 살면서 필자가 종종 느끼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삶은 전통적으로 너무도 종교적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모든 인간관계의 구조를 수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격성은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리를 당신의 보좌 앞까지 높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격성을 가슴으로 체험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이 어느 순간, 그동안 당연하게 그러려니 하고 믿고 있던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일들을 겪게 된다. 그 전에는 자신의 문화적 개념 때문에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동안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신이 바로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적인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이 어떤 위기를 통해서건 혹은 성경 공부를 통해서이든 간에, 이미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에 대한 관점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바뀌게 될 때에 사람들은 전통적인 종교적 신관에서 나와 성경적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하여 세계관의 변화는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믿음과 가치와 충성의 변화인고로, 행동에도 역시 변화가 수반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현상을 서구 사회에서 보게 된다. 심각하게 세속화된 서구 사회들을 보면 종교적인 냄새는 거의 사라진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의 존재는 마치 고물 장사의 취급물처럼 하대를 받는 것을 본다. 종교를 이야기하고 예배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패배자들이나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의 애환의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 역시 인간의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좋은 그 어떤 것일 뿐, 절대적인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세속사회는 믿는다. "절대"라는 개념 자체는 인간이 허약해졌을 때에 종교가 줄 수 있는 위로이지만 허상일 뿐이라고 세속주의는 말한다. 특별히 이러한 인식은 북미 사회보다도 유럽사회가 더 심각한 것을 본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며 세계화 경쟁 속에 뛰어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이러한 세속주의 세계관을 은연중에 받아들인 것을 우리는 한국 사회나 일본 그리고 대만이나 싱가포르 등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세속주의는 특별히 지난 200년간 "modernism"을 주도한 서구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주의 내지는 과학/이성주의에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교회들 역시 세속주의와 은연중에 타협함으로써 "서구식 혼합주의(western syncretism)"를 만들어내었다. 신학교들은 신학의 세속화 과정을 거쳐 소위 자유주의로 치우치든지 아니면 극단적인 근본주의를 취함으로써 더욱더 극우적인 종교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 복음주의 자들 역시 세속주의의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하다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우리의 기독교 역시 얼마만큼 세속화되었는지, 또 얼마만큼의 "성경적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우리는 신중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필자가 섬기는 아프리카의 학교에 종종 북미나 유럽에서 학생들이 와서 아프리카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한다. 그 중 풀러 졸업생이 필자의 과목을 몇 개 수강하면서 함께 리서치를 설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함께 가설을 세운 내용은 북미 사회의 세속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혼합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확실한 빙거들을 찾을 수 있는데, 그 하나가 극단적인 복합주의/다원주의 현상이다. 이 복합주의(pluralism)적 세계관은 획일적인 지난 modernism에 반항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모든 기존 이론이나 틀을 깨고자 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의 한 모습이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로도 나타나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치관에도 도전하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세속주의가 서구 계몽주의 이후의 과학주의 내지는 이성우월주의였다면, 오늘날의 세속주의는 post-modernism의 정신에 흡입되어 기존 틀을 벗어버리고 개인의 존재를 모든 가치 위에 두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세속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The Church between Gospel and Culture: The Emerging Mission in North America (George Hunsberger and Craig van Gelder, eds. Eerdmans, 1996) 참조 바람.)
7.3. 세계관 변화와 "사랑"의 관계
오늘날 후현대주의적 세속주의의 부상과 도전 앞에서 우리는 세계관의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곧 "사역"이며 이것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일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이 "성경적"으로 바뀔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의 세계관의 변화를 어떻게 유도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나는 근본적인 원리들을 성경적 관점에 기초하여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7.3.1. 세계관 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사랑"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세계관의 복잡한 변화 뒤에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 문제가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고 그 결과 죄의 통치 아래에 있게 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형상인 신적 사랑 안에서 계속하여 건강하게 자신을 성취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인 사랑과는 정반대의 소욕에 이끌리어 살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항상 극도로 외롭고 불안하며 두려운 심리와 씨름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죄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세계관, 그리고 죄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세계관은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생각이며 그러한 사고의 결과는 "사망"일 뿐이다 (롬 8:6-7). 이러한 세계관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해 놓은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십자가에서의 "사랑"의 사건이다. 십자가의 사건이 가르쳐주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만이 죄인들의 세계관을 정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뀜"을 성경적 및 신학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회개 (repentance)"이다. 즉, 회개는 생각의 변화 혹은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회개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 자체 역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생각의 돌아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세계관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역은 그 "사랑"에 근거할 때에만 비로소 진정으로 타인의 세계관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경험에서도 증명이 된다. 누군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상을 받아들인 케이스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은인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수호자가 된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본다.
7.3.2. 곡해된 두 가지 관점을 치료하는 사랑
죄성에 갇힌 인간의 사고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관점을 지속적으로 갖는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요일 4:7, 16). 인간의 지식은 개념들의 범주화(categorization)에 있어서는 선험적(a priori)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들은 "문화적 교육 (enculturation)"의 결과로 얻어진 경험적 지식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사랑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그 사랑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세계관 자리에 뿌리를 내린 “변혁된” 지식이 아니라 그저 신학적이고 정보적인 지식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심하게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곡해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마리의 말을 동시에 타고자”하는 교인들을 주변에서 종종 보기도 한다. 모든 참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획득되기 어렵다.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기 시작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경험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관점/패러다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두번째 오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 신" 곧 사탄의 관점이 지배적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윤리 및 도덕을 주창하였지만 인간의 존재 가치가 신적임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는 못하였다. 그들의 세계관에는 역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귀함의 극치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였으면 창조주 신은 그 아들을 인간으로 보낼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신의 저주를 받게 하였는가 말이다. 성경적 인간관은 인간이 죄인인 것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원래 가치와 그 고유한 위치 및 존귀함을 또한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존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보게 된다.
결국 "사랑" 즉 십자가에서 증거된 신적 사랑만이 인간의 곡해된 세계관을 성경적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우선되어야 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7.4. 세계관 변화의 agent와 세계관 변화의 유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는 삶의 부분을 진실하게 나눌 만큼의 관계를 먼저 형성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계의 기초 위에서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영향력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이 진술은 우리 모두가 다 이미 인정하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 친구"는 자신의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cf. 요 15:11-15). 전도/선교는 복음을 나누는 대상이 "불쌍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기 때문에" 존귀케 하신 주를 소개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친구로서 찾아가는 것 자체가 " 진리의 대결 (truth encounter)" 이다. 왜냐하면 본인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존귀하게 대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한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자 찾아가는 것 자체가 또한 "능력의 대결 (power encounter)" 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친구의 사랑 혹은 우정이 그들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힘들을 약화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친구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적인 힘뿐만 아니라 "영적인 힘“을 갖는다. (여기서 필자는 truth encounter나 power encounter의 용어와 개념들을 Charles Kraft의 것들을 빌어서 그대로 쓰고 있으나 Kraft의 개념을 좀더 확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렇게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며 친구의 이야기는 힘 있는 메시지가 된다.
친구의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우리의 신앙을 광고하는 것은 오늘날 다원주의 및 극단적인 종교 난립 시대에서는 먹혀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갖기 힘들다. 오히려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상대주의가 편만한 종교 시장에 내다 파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예수 같은 친구가 되었을 때에 친구가 할 일들은 무엇일까? 친구의 역할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험한다. 여기서 "친구"의 개념은 peer group과 같이 단순한 또래 내지는 지인(acquaintance)을 가리키지 않는다.
7.4.1. 세계관 변화의 agent인 "친구"의 성경적 의미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준 많은 상황들 중에서 친구들의 영향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옛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친구의 영향은 지대한 것을 본다. 물론 문화권마다 친구에 대한 개념 정의가 조금씩 다르고 또 친구의 범주도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친구는 특별히 요한복음서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의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요한복음서 15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존중 (respect)"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당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중하고 존귀히 여기실 충분한 이유가 됨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인간들을 위해서 내어주실 수 있었다. 인간을, 즉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친구"라는 표현 속에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친구"가 된다고 말할 때에 그 의미는 상대방의 인격과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의 생각과 가치관이 비록 내 것과 다를지라도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로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친구"의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만남과 교제의 충분한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친구가 되는 것은 거의 본인의 의지의 결단이다. 즉, 친구를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면서 필자는 많은 아프리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오늘도 친구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확인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인생들과의 관계 회복인 것을 보여준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들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없으리라.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친구"의 원리로써 사람들을 찾아 오셨던 것을 본다. 이방의 문화적 삶을 살아 왔던 아브라함에게 어떤 새로운 문화적 규준들을 요구하시기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유도하셨다. 그것은 상당히 긴 과정의 시간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집트의 이방 문화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들로부터 자유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에서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다. 그리고 당신 곁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세를 인하여 이스라엘은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순간 우리의 모든 문화적 사고나 행동양식이 순식간에 변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실하고도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하여 메시지는 전달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그들의 친구가 되는 일이 우선 중요하다. 친구가 되는 시간이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진지하게 우정을 갖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메시지를 어떻게 상대방이 이해하도록 전할 것인가 하는 부분도 친구라고 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졌을 때에 파악이 된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우리의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섬기고자 하는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주지해야 할 것은 변화는 서서히 일어날수록 좋으며, 조속한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지식이 완전히 자신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변화이든지 그 변화가 서서히 완만한 속도로 차분하고도 견고하게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원래의 토양에 제대로 뿌리를 내릴 시간을 갖기 때문에 건설적인 변화로 나아갈 것이지만, 만일 급한 변화가 찾아올 경우에는 대부분 혼합주의적으로 빠지기 쉬우며, 더 나아가서는 많은 경우에 오히려 파괴적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친구”는 건강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대리자 혹은 다음 항에서 말할 “옹호자”에 대한 성경적 은유(metaphor)이다. 앞으로의 선교나 기독교 사역은 이 “친구”의 메타포를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가지 필자가 참고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친구”의 메타포는 우리의 “자세(attitude)"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사회적 등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신 친구의 의미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은유하고 있음으로,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또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인간관계는 친구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도란 친구를 많이 만드는 것이 된다.)
7.4.2. “선교사”의 개념과 역할: 친구이자 변화의 옹호자 (advocate)
특별히 기독교 복음을 타문화권에서 나눌 때에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을 인격적인 관계의 통로가 아닌 단순히 일방적인 “선포”로만 전한다면, 예를 들어 아프리카와 같이 신 개념이 일반적으로 강한 지역에서는 성경적 의미들이 제대로 전달되기가 어렵다. 이제 진정한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은 다음의 과정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첫째, 선교사는 그 문화권의 외부인인 고로 좋은 것을 소개해주고 그 좋은 것을 선전해 주는 “옹호자(advocate)"라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한다. 선교지에서 우리는 마을이나 혹은 도시 전체가 복음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변화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대형 전도 집회도 개최하고 세미나들을 열어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럴 때이면 선교사들은 그 이유를 현지인들의 완악함이나 선교 방법 또는 도구의 부적절함에서 찾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큰 이유가 될 때가 많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인은 현지인들 가운데 자신들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변혁자 (innovator)"가 없다는 데에 있다. 현지 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근본적인 "패러다임" 의 변화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자기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나눔으로써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내부인 (influential insider)"의 부재가 큰 문제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외부에서 온 선교사가 내부인이 해야 할 일들을 대신 해주는 것을 본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수고를 통하여 그 사회의 외형적 변화와 생활수준의 향상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 사회의 근본적인 내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내부인이 없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발전 혹은 복음화는 아직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선교사는 항상 외부인으로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현지인들과 거의 가깝게 살 수는 있겠지만 역시 선교사는 아무리 현지화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리더십이나 주체성은 현지인들이 갖도록 처음부터 유도해야 하며 본인은 항상 섬기는 자, 혹은 옹호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둘째로, 선교사는 디모데 후서 2장 2절에 있는 말씀처럼, 현지의 디모데 한 사람을 잘 찾아야 한다. 이 데모데야말로 이 지역을 복음화하고 성경적 세계관을 소개할 현지 변혁자이다. 현지 변혁자는 거의 항상 외부에서 온 변화의 "옹호자 (advocate)"의 영향에 의하여 생긴다. 신뢰할만한 변화의 옹호자를 만나게 될 때에 사람들은 생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근본적인 세계관 차원에서의 변화를 경험한 내부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변혁자가 된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현지의 디모데를 찾았을 때에 비록 선생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철저히 “친구” 즉 변화의 옹호자의 위치에서 디모데가 동족이나 같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친구"로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선교사는 이제 디모데가 그의 사회 안에서 변혁의 옹호자로서 자신의 또 다른 디모데를 배출할 수 있도록 계속하여 친구로 섬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사역의 원리는 “현지인의 원리 (Principle of Locals)"라고 하는 수용자 중심의(Receptor-oriented) 사역 철학이다. 이것은 성육신적 사역의 원리이기도 하다. 결국 ”옹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로 곁에 있어 준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 원리이기도 하다. 즉, ”보혜사(parakletos)"의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선교사는 현지의 디모데와 끝까지 함께 해주는 진정한 친구요 옹호자(advocate)요 상담자(counselor)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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