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무 장 갑
우석여자중학교 1학년 공주원
부엌 설거지통 한켠에 고이 모셔둔 고무장갑 한 켤레가 무심코 눈에 띄었다. 어머니의 숨결과 체온이 식지 않고 고이 깃들어 있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순간 내 가슴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검은 바다가 되어 요동쳐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나의 손길 위에 감동으로 뒤범벅된 뜨거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내가 보아온 어머니는 늘 고무장갑과 함께였다. 설거지를 할 때는 물론이고, 욕실 청소를 할 때나,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울 때 모두.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참 싫기도 했다. 손에는 고무장갑을 낀 채로 늘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은, 어렸던 나의 눈에는 초라하고 구질구질함으로만 잔뜩 베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고무장갑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 새롭게 변화한 것은. 아마도 내가 어머니와 함께 김치를 담그던 날 이었을까 싶다. 배추를 절이고, 씻고, 양념에 버무리는 모든 과정을 고무장갑과 함께 하던 날.
그 큰 고무장갑에 고사리 같은 손을 넣어 헐렁해진 채로 배추 속에 양념을 채워 넣는데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그 날 처음으로 나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 행복감에 젖어 황홀했다.
그 날부터 나는 고무장갑과 함께 자랐다. 고무장갑 낀 어머니의 모습을 배경 삼아. 그러다보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어느새 익숙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 지 오래다. 세월은 물처럼 흐르고 흘러 어느새 중학생이 된 지금의 나에게 고무장갑을 끼면, 맞추기라도 한 듯 꼭 맞는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도 같은 세월을 타시면서, 그 손등은 점점 거칠어지고 주름도 늘어만 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똑같은 잔소리를 한다.
“엄마, 피부 관리 좀 해. 이게 뭐야 이게…. 잔주름 투성이잖아.”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도 늘 한결같다.
“얘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너희들 밥 해 먹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새끼를 위해 온갖 희생도 마다않다가, 끝내는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가시고기. 적들로부터 알을 지키기 위해 알을 등에 업고 지내는 물자라. 이들의 드높고 숭고한 사랑처럼. 그랬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그랬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지친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느라 제 몸 하나 가꿀 줄 모르시던 분. 그러면서도 늘 환하게 웃어주시던 그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늦둥이이다. 어머니가 삼십대이실 때 나를 낳으셔서 지금까지 금이야, 옥이야 길렀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이제껏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위해 드린 적이 없다. 그 반대인 경우는 많았지만.
오히려 나는 몇 년 후 임신하신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여가며 어머니의 지갑에 있는 돈을 몰래 꺼내 쓰거나,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과 늘 어딘가로 쏘다니곤 하였다.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아신 어머니께서 매를 드셨을 때, 나는 내 행동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적부터 많이 맞아가며 컸다. 당시 나는 기본적인 예의범절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친척 집에 가서도 꾸중만 듣곤 하였다. 어머니께서 사랑의 매를 드신 것은, 단순히 나의 잘못을 꾸지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참다운 인간으로 교육시키기 위하셨음이라.
‘만약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 나의 부모님이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나의 모난 점을 바로 잡아 주시며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매를 마다 않고 드셨던 우리 어머니. 인자하실 때는 그토록 인자하시면서도, 꾸지람을 하실 때는 오로지 자식에 대한 숭고한 사랑으로 회초리를 드시던 참으로 감사한 분이심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종아리를 맞은 날이면 눈물 젖은 손으로 다리를 쓰다듬으시는데,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그 손길로 어루만져주시는 느낌은 지금까지의 어떤 솜이불보다 더 달콤하고 보드라우며 폭신했다.
예전엔 그렇게 드높아 보이던 어머니의 키. 그러나 지금은 왜 이렇게 작아 보이기만 하는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볼 때면 한 없이 죄송한 마음뿐이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의 어느 날, 학교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것. 모든 일을 뒷전으로 밀어두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온 아버지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소 괜찮기만 하시던 어머니가 담석이라니. 그리 심각한 병은 아니었지만 울고 불며 병원에 남겠다는 나를 두 분께서 간신히 달래 집에 도착 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어머니의 고무장갑이었다.
그 고무장갑을 끼고 어머니가 하시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던 하루하루가 어린나이에 그렇게 침통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하염없이 기도를 올리던 도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가 갑자기 호전되셨다는 것.
기적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감기를 병원에서 잘못 판정내린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어머니께서는 다시 옛날과 같은 즐거운 생활을 하고 계신다.
나는 고무장갑을 사랑한다. 엉뚱하게도, 이제는 고무장갑을 낀 어머니의 모습이 진짜 우리 어머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짐해본다.
옷가게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두고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옷을, 나중에는 열 벌, 아니 백 벌이라도 사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오늘도 밤은 깊어만 가는데 어머니의 고무장갑 소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설거지가 또 밀렸는지, 팔을 걷고 나선다. 예전엔 어머니의 것이었던 고무장갑이, 이제는 나의 애용품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고무장갑.’
소감-
<강원문학상 당선을 축하합니다.> 처음 이 메일을 받았을 때에는 광고메일인 줄 알고 삭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카페를 통한 진실 여부 확인 후, 저는 다시금 놀랐습니다.
미숙한 솜씨로 입상을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웬지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진실로 아름답고 참된 글을 쓰기 위하여 보다 많은 문학작품을 접해보고,
다른 입상작품도 읽어보고, 대회경험도 많이 쌓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한결 성숙해진 모습으로 그 때 다시 찾아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9년 한 해, 모두에게 충만한 평화와 행복이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안류 평안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첫댓글 고무장갑 감동적인 글입니다. 가족을 위해서 쉴새없이 일하는 고무장갑.. 어쩌면 이렇게 매끄러운 글을 쓸 수 있을까? 놀라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