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육 기초공사 오리알터
1.무자년 팔월 십오일 성모님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도장의 터가 좁다고 하시면서
둘레로 터를 넓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시어
시월 십일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하니 그날 밤에 성모님께서
“비록 터를 넓히는 역사라 할지라도 개기제를 지내야 할 것인즉,
내일은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더라.
이튿날 개기제를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오셔서
“이 자리에 집을 집으면 패운이 곧 들어오게 될 것이니
오리알터 밤나무밭을 사서 새집을 짓도록 하고
이곳에 있는 기왕의 건물도 뒤이어 이축토록 하라”고
명령하시니 웬일인가 하고 크게 걱정하더라.
그때에는 물론 금성. 장대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교세는 아직도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동곡에 성전을 지은 지 이년 남짓하여
더구나 터를 넓히다 말고 새로운 기지를 잡아 그곳에 이사한다 하면
아무리 신명이 시키는 일이라 해도
힘드는 일을 싫어하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의 마음이라
더욱이 공사를 직접 받들어 오는 오십여명의 식구들은
아직도 초근목피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명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닌터에
그러한 인심을 휘어잡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님에
여러 가지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더라.
그러나 명령을 받들을 때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언제고 길을 열렸던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소신하는 바 확고부동한 것이 있었음으로
우선 식구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저 당분간 터 고르는 것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그렇게 하자고만 하여
일을 중지시킨 다음 오리알터 기지를 사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니라.
정사는 비밀리에 염탐해보니 수백 그루의 밤나무가 서있는 그 터는
정읍에 서는 이판옥의 소유 임야로서 그 좌우에 명당을 찾아 쓴 각각의 분묘가 많았고
또 토질이 양호하여 토끼 사육장을 세울 수도 있다 하여 원매자가 적지 않아
묘주는 묘주대로 수년을 두고 삼사인이 반갈아 그 산을 사고자 드나들고
토끼사육장을 세우겠다는 사람도 몇 차례나 드나들어 교섭을 해나오는 중이었으나
산주의 형편이 넉넉하여 도무지 팔 의사가 없어서 허행만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아니라.
이와 같은 형편에 당장에는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음식을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시월 십일 아침 진지상을 올리고 방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함으로 문틈으로 내다보니
양복을 입은 손님이라 공연히 가슴이 떨리더라
그때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안정을 차릴 수 없는 사회상태였고
신앙자간에는 하두 모략중상이 심해서 그동안 몇 번이나 공연한 일에 경을 친 판이라
양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그저 가슴부터 서먹해오던 터이더라.
그러나 찾아온 손님을 밖에 두고 거절할 수도 없어서 맞아 드리고 보니
전번에 차중에서 서로 인사한 바 있는 산주 이씨라
반갑게 맞이하고 점심을 같이 마친 뒤 그는 앞문을 열고
건너편에 내다보이는 율목림을 가르키면서
저것이 나의 소유 임야로서 평수는 약 칠정보나 되는데
수년전부터 몇 사람이 드나들며
매도하라고 조르는 것을 팔 마음이 없어 거절해 나오던 중인데
전일 김선생을 차중에서 만난 뒤로 웬일인지 매일과 같이 같은 사람이 와서
현금까지 내놓으면서 사업관계로 꼭 필요하니
그보다 낳은 산을 구하고 양도 해달라고 조르는 사람,
선산을 삼겠으니 매도하라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번갈아 찾아와서 성화를 대는지라
번잡하기 짝이 없어 팔아버릴 마음을 정하고
어젯밤에 생각하니 선생께서 동곡에 기지를 정했다 하니
치성때에 실과도 필요할 것이며 또한 관리하기에도 용의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이 되니 다른데 팔기 전에
찾아뵙고 말이라도 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하더라
성부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운영하시는 모든 일은
이처럼 척척 사우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 이미 상식화 된 사실이거니와
음식가지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반갑고 신기한 마음 한이 없어
산주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사기를 결정하되 십이월까지만 연기해주면
그간에 대금을 주선하리라고 단 둘이서만 약속하고 그를 배웅해 보내니라.
그러나 아직도 죽과 나무뿌리를 면치 못한 처지에 어찌할 방책이 생각나지를 않아
이러저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온 산주는 전일에 십이월까지 약속했으나
날마다 졸리고만 앉아 있을 수 없은즉
찾아드는 사람들 응대에 딴 일을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니
만일 사지 못할 형편이라면 딴 곳에라도 매도해 버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다시 왔노라고 하더라.
그렇지 않아도 주야로 노심하던 차에 이런 급한 통지를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으나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일주일만 더 참아준다면
그 안에 좌우간 결정을 짓겠다고 사정하여 응답을 받고 백방으로 주선한 끝에
겨우 아는 이의 농우 한 마리를 빌려 원평 장날에 파니 꼭 육만환이라,
그 길로 정읍에 가서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찾아가니 산주는 반갑게 맞아주더라.
지체할 것이 없이 매매에 대한 계약서를 들고 대금을 물으니
다른 원매자들이 팔. 구만원을 보니 알아서 달라고 하기에
육만환에 줄 수 없겠느냐고 떠보았더니
“그럴 수야 있겠소 남이 보는 정도로는 주셔야죠” 하기에
매매계약서를 구만환으로 기입하려 하니
산주는 계약서를 뺏어가더니 오만 오천환이라 기입 하니라.
뜻밖의 일에 “어찌 된 일이요”하고 물으니
이번일은 자청해 하는 일로서 피차간에 서로 신사적으로 상의하는 것이니
이해를 불문하고 드리겠다고 하더라.
성부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미리 깨달을 수 없는 것임을 또한번 명심하면서
남은 돈 오천환은 마침 나와 인사하는 그 집 아들 오형제에게 나누어 주니 사양하는지라,
산주를 대하여 내가 꼭 육만환을 지니고 왔기에 처음 육만환을 말씀드렸다가
선생의 특지로서 오천환이 남은지라
준비해온 금액을 다 드리고 가야 되겠으니 받도록 권하시오, 말하고 나오니라.
이제 성부님께서 말씀하시던 오리알터를 도득할 수 있게 되니
나를 듯 마음이 가벼워지고 언제나 앞길을 열어 주시는 하늘에 감사하여 마지 않더라.
2.무자년을 보내고 기축년을 맞게 되어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정월 이십일에 오리알터에서 개기토록 하라.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삼.사월에는 큰일이 있을 터이니
너희들은 속히 일을 착수하도록 하라”하시고
다시 “너희들은 정월 십사일 저녁나절에
이곳으로부터 오리알터로 건너가는 냇물에 섬 다리 열두개를 놓되
그속에 엽전 한푼씩을 넣을것이며 내 양편에 오색등 하나씩을 달도록 하라.
너희들은 머지않아 이 곳을 발로는 다니자 못하게 될 것이니라” 하시니라.
십사일 저녁무렵에 전일 하명하신대로 실행하고
이십일에 오리알터에 건너가 개기제를 올린 다음
성도와 경주를 데리고 밤나무 숲속에 이곳저곳에 측량 푯말을 세우니
작업은 이튿날부터 시작하니라.
동곡에서 터를 닦다 말고 엉뚱한 산기슭에서 나무를 베고 터를 다듬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행인들과 근처 사람들이 무엇을 할려기에 또 그것을 파재키느냐고 묻는지라.
집칸이나 세울가 하여 터를 닦는다고 대답하니
모두들 그 진펄 속에 집이 무엇이냐고 비웃으며
그 줄기에는 묘 한장도 없는 것을 보지도 않았느냐고 하면서
거기는 지나가는 행인마저 쉬어갈 곳이 못된다고 하며
돈자랑을 할 셈이냐고 비소하는 자 적지 않더라.
하루는 근동에 사는 지사 서씨노인이 찾아와서
어떤 비결에 오리알터에 가활백만지지가 있노라고 하였기에
이곳에 많은 지사들이 들어와서 답산이 빈번하여 묘는 많이 섰으나
이 줄기만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이라고 하며
나도 당지를 찾으려고 이곳에 이사까지 와서 있지만
여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터가 될만한 혈이 없노라고 평하는지라
우리는 객지사람으로서 바쁜 일에 좋고 궂은 것을 가릴 처지가 못되니
아무데나 우선 마음에 내키는 대로 터를 닦을 수밖에 없노라고 대답하니
대사를 경영하려거든 신중을 기해야 되니라고 만류하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은 즉 생각하고 권하는 말도 듣지 않으니
한심할 노릇이라고 하며 하릴없이 돌아가 버리니라.
이와 같이 헐뜯고 비소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일을 착수하여 아는 이가 있나보다고 저희끼리 수군거리고도 하더라.
그러하던 어느 날 다시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나침반을 놓고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전날에는 형편이 없는 진펄이더니
이제 와서는 그 질퍽거리던 물로 간 곳 없고
전장지비한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더라.
서노인은 그 뒤 그 일로 말미암아 노심하던 끝에 패철을 내어 던지고 말았으니
한번은 와서 평생에 그럴듯한 터 하나를 잡아 보지도 못하고 한탄하더니
그 뒤로 득병하여 신음하다가 사망하니라.
3.이월 십오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니
성모께옵서 하명하시되 “너의 아버지 묘각이 그래 가지고는 장구하게 계실 수 없으니
오리알터에 영영 안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니라
4.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미리 당부하신 바 있어
각 기관장을 청하여 대접하고 있자니
밖에서 웬 백발노인이 찾는다고 하여 나가보니 곽봉훈 노장이라.
그는 불교학자로서 수년 전에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팔십 노구로서
전부터 지면이 약간 있었는데 무엇인지 책보에 싼 것을 내 놓으며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을 할 때에 어느 날 김응종이란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가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가 없는데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니다.”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것을 받아서 들고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내력을 말하고 하도 모략이 많은 세상이라
혹 무슨 계략이나 있지 않나 염려되기도 하여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열어서 보기로 결정하고 성전에 들어가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인장이 들어 있어,
한권에는 중화집이라 한자로 쓰여있었고
또 한 권은 전자체로 된 친필집이였으며 인장갑안에 쓰여 있는 글은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銅谷”이었다.
이날이 기축 삼월 초삼일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너무나도 신기한 일에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일은 교중 형제들만이 알 일이 아니라하여
대접 중이던 손님들과 봉훈장을 성전으로 창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니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봉운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십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와 인장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속의 글을 보니 기축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이곳에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이라 하니 정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하더라.
봉운장은 유소시로부터 불경을 읽은 유명한 학승으로
그때 나이 이미 팔십사세였으나 어느 절에고 찾아 들면 우대를 받든 터인데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 본교에 계시게 되니라.
5.이월 십오일 성부께서 하명하여 말씀하시되
“오는 삼월 십오일에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오리알터는 나와 너의 어머니의 영원한 안장지니라.
이날에는 장례라 하지 말고 장사라 하여라
이날 장사는 천하장사 지하장사 인간장사 천지대장사니라”하시니라.
명령을 받으니 일편 기쁘고 일편 서러워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라.
이 한날을 위하여 성인의 피를 홀로 받아
넓고 넓은 대해중에 외로운 일엽편주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죽음길에서 간신히 그 짝을 찾아 피눈물로 결정된 두 알의 진주처럼
천지의 보화를 홀로 간직했건만 아직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숨막히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안고 숨어서 지성으로 기도에 이은
기도의 생활과 잇달아 내리는 명령의 봉행에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길을 생사를 걸고 지나온
피맺히는 과거의 역정이 있지 않았던가
실로 오늘의 이 한 명령을 얻어 모시기 위하여 바쳐나온 반생이라 할진대
오늘이야 말로 반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 아니랴.
그 동안 외로운 화은당선사님을 받들어
정사와 더불어 합심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어 나온
교중형제들의 보람도 이제는 빛날 수 있고
머지않아 열려올 용화극락문을 맨 처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이제 그들에게 완비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소냐.
그러나 돌이켜 현실을 두고 생각하면
넉넉지 못한 경제에 당일일도 걱정이려니와
그동안의 준비가 여간 바쁘지 않은지라
정신을 차리어 눈물을 거두고 영전을 물러나와 형제들로 하여금
각기 분담하여 건축을 서두르고 성묘기지를 닦으며 꽃상여를 만드는 동안
만단 준비에 눈코 뜰 사이도 없이 준비 하니라.
그 뒤 당일 행사절차에 대한 성부의 지시기 계시니
유공한 도생들로 하여금 운상하되
그들에게는 모두 삼베로 양복을 만들어 입히고
상여마다 좌우 삼십명씩 백이십명으로서 운상토록 하라 하시니라.
명령대로 다시 준비를 보충하여
삼베양복 백이십벌과 수백개의 상건이며 상복을 만들고,
당일의 비용과 식량등을 삼월 십사일까지 모두 준비완료하니라.
각지로부터 모여든 교중형제들로 동곡 오리알터 할 것 없이
온 집안이 들썩이는 것을 볼 때 금성 장대시절이며
구미안 동곡시절의 참담하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여
화은당선사님을 바라보니 그도 또한 동감인 듯 울며 웃으며 하니
이날의 감상과 만반의 감회를 표할 길이 없더라
6.삼월 십오일 장사식을 거행하니 삼베양복을 입은 운상군 육십 명이
맨 앞 상여는 하얀 백상여로 성부의 옥체를 모시고
역시 삼베양복을 입은 육십 명의 운상자가 메고 뒤따르는
상여는 오색 꽃 상여로서 성모의 옥체를 모시니라.
그 뒤에 따르는 상주와 수백명의 복 입은 신도들 실로
그날의 장사행렬은 장엄하기 비길데 없더라.
앞에 가는 백상여 운상 채 위에 올라선 인보자가 태극기를 좌우로 서시히 흔들며
천천히 메기는 우주영가의 구절구절을 운상군들은 구슬프게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내어 딛어 나아가고 그 뒤에는 복인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정연하게 열지어 뒤따르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수백장의 만기들이 이러 저리 너울거리는 가운데
끼인 하얗고 울긋불긋한 두 채의 상여는 봉학인 듯 공작인 듯 아름답고 숭고한데
그 안에 성부 성모님의 옥체는 누워 계시고
두 동자를 비롯한 온갖 천지의 신명들이 둘러싸고 옹위하며 따르나니
행열은 구리골로부터 출발하여 구로로 나서 수양산 서편 마루 밑을 돌아
신작로로 올라서서 오리알터 장지에 이르게 되는데
앞에는 만기를 든 수백명의 형제들이 열을 짓고
뒤에는 또한 상보입은 수백명의 형제들이 열을 지으니
장사의 진을 친 듯 온 길에 뻗치니라.
가소로다 가소로다 세상사가 가소로다 이내몸이 생겨나서 삼십구년 낭도타가
초당에 깊이든잠 일몽으로 화해나서 한곳으로 돌아드니 십주연화 분명하다
무기궁에 깊이앉아 사면을 살펴보니 철통같이 굳은속에 일로를 난통이라
태화기운 부여잡고 영심만을 굳게지켜 오는때를 기다리니 홀연뇌풍 상복소리
건곤이 진동하며 무기궁이 요란터니 음양이기 네닦거늘 나도따라 나서오니
삼리화 벌려있고 삼청일월 밝았는데 벽목삼궁 여기로다 음양을 따라나서
청림새 좁은길로 차츰차츰 내려가니 상중하 섯는청림 정이삼월 경이로다
이수를 요양하니 한달에 삼천육백리 삼월이수 마련하니 만팔백리 뿐이로다
천왕씨 목덕운은 만팔천세 하였는데 이네운로 어이하여 만팔백년 뿐이런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다
칠천이백 연기때어 칠십이둔 마련하던 강태공의 조화수단 이금에 안재재요
팔백연화 나열하고 석가여래 무궁도술 자고로 유명하다 미륵전 높은집에
뚜렷이선 저금불은 나를보고 반기는듯 구성산 높은봉에 울고가는 저봉황은
성인이 나게시니 황하수 일천년에 다시한번 맑았구나 동구에 배례하니
적송자 나왔구나 장자방은 어디가고 요지연만 진동하고 서황모의 상존인가
안기생을 보았는가 청춘작반 호환향은 두자미의 지은글귀 나를 두고 일렀던가
양안도화 협거진은 어주자가 지시하니 무릉원이 여기로다 해상에 삼신산은
구름밖에 둘려있고 눈앞에 모악산은 반공에 솟았는데 닦고닦는 제생들은
나의부탁 아니잊고 일일상면 가애로다
백발이 소소하야 선풍이 헌랄이고 금풍이 지저귀로 옥경대에 올랐도다
책자에 치부법문 그다지도 못깨닫고 지동지서 혼침한가 개명장 나는날에
일체개심 하여서라 동자야 비를 들어 동자들아 비를들어 만정락화 쓸어내라
동방일월 대명시에 만세동락 하여보세
(일부생략)
앞뒤로 메기고 받는 운상소리는 좌우산천에 울려 메아리를 부르는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앞서가고
뒤따르는 수백의 도생들이 외우는 염불소리도 장엄한테
발맞춰 엄숙하게 한발두발 뒤어 놓는 운상꾼들의 조련된 행진,
아아 이날이 있고 또 이날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화은당선사님의 고애로운 그 생애는 출천대효로서 보람으로 빛나게 된 것이었고
교중형제들의 지극정성도 그 보람을 찾게 된 것이었으니
화은당선사님과 더불어 굴건하고 상장막대를 짚으면서
정사의 가슴은 오히려 메이질 듯 벅차고만 있더니라.
우리의 장사행렬을 구경하려고 원근으로부터 구름같이 모여든 관객들은
산과 들에 인산 인해를 이루었으니 장지가 있는 수양산은 종일을 두고
사람들로 하여 마치 눈에 덮인듯 하얗게 되었더라.
이튿날에는 풍진이 일고 일기가 몹시 요란하더니
구성산 으로부터 봉황 한 쌍이 내려와서
성부님의 묘소가 있는 수양 영봉 둘레를 빙빙 돌며 소리를 지르더니
얼마 후에 다시 구성산 쪽으로 날아가더라.
그날 청년들과 풍악을 울리고 구릿골을 다녀서
지금의 금평호수 자리에서 춤도 추고 소리도 하여 종일토록 즐겨 노니라.
그러나 성부님의 옥체를 봉안한 곳에 습기가 심하니
식당의 웃방에 모셨다가 오는 사월 구일에
다시 묘소에 보안하라는 지시가 계시어 그대로 하니라.
7.사월 이일 이경우의 부친 이종허 노인이 칠십칠세로 작고하시니
금성곡 장대곡 기초시로부터 현재까지 도장기초를 다지는데 역할을 함께 하면서
왜경의 눈을 피해 단석산에 터를 잡고 성모님의 체백을 이장했던 일이며,
교중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였더니 작고하신 후에는 상의할 곳 전혀 없어
막막한 마음 견줄대 없고 비통한 마음 억제할 수 없었더라.
사월 팔일 기념에 서울로부터 류동열장군 일행이 내려오니
그 이튿날인 구일에는 도청을 비롯한 각 기관으로부터 내림한 귀빈들의 참석하에
다시 전일과 같이 상여를 운상하여 예식을 거행할 때에
과거 십여성상을 두고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모시고자 하던
일편단심으로 많은 고생과 파란곡절을 겪던 것을 생각하고
오늘날 귀빈의 참석 하에 성부님의 옥체를 영영 안장하게 되니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와 하늘을 부르고
통곡하는 화은당선사님의 모습을 대하는 사람마다 눈물을 머금고
유동열 장군은 화은당선사님을 붙들고 그의 충천대효에 감격하여 마지않았고
다른 모든 이들도 감동된 어조로 여러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시더라.
여기에서 유동렬장군을 소개한다.
류동열 장군은 서울에 올라가서 화은당선사님의 부모를 위하는
지극한 효성에 감격해 마지않는다는 뜻에서
진지상에 사용하도록 수저 한벌을 보내주었는데
거기에 새기기를 “봉정증산선생영전지용 류동열”이라 하였더라.
장군은 또 성부님의 도덕 광창을 위하여
김청강 이청음 서화송 이남주 김금석 김국보등
성부님을 받드는 교중 원로들을 비롯한 각 교단 대표들과 상의하여
서울에 증산교통정원을 조직하여 여러가지로 활동하였던 바
그와 정사는 함께 경상도 일대를 순방하면서 지방조직에 힘쓴 바도 있었니라.
그러한 처지에 우리는 서로 남매의 의를 맺었으며,
이듬해에는 장군의 칠십일순 생신을 당하여 초청을 받고 서울에 가니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장관과 유지들이
연석에 동참하여 종일토록 즐기며 그의 생신을 기원하니라.
이튿날에는 장군 스스로 안내를 하면서 서울시내의 명승고적을 구경시켜주고 나더니
어느 식당에서 점심까지 사면서 성부님의 도덕 광창을 위한 사업 전반에 대하여는
자기가 적극 활동할 것인즉 추호도 염려 말라 하고
또 나는 그 동안 신앙에 정신을 않드릴 수 없을만한
여러 가지 신기한 동기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을 돌고 보니 모두들 말할 수 없이 곤란하게 지내면서도
정의 면에서나 신앙 면에서 그렇도록 선량하고 돈돈한 사람들을 처음 보았노라고 하면서
과연 증산교와 같은 교단은 찾아보기 힘드노라 하며 여러 가지로 말하더라.
정사는 앞으로의 사업진취에 한 지팡이를 얻으듯 반가웁고 감사하기 짝이 없었는데
장군은 불행하게도 육이오사변 당시에 이북으로 납치당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8.오월 단오절에 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이 하강하시와
“성전을 짓고 열석자 금불상을 조상하여 모시라”하시고
“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일에 착수토록 하라” 하시와
그 뒤 성전 건축을 붙일 정지 하는데 유월 십칠일 야반 여러 가지 걱정이 되어
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장과 재목이 벌판에 있음으로
밤 열두 시경에 그 둘레를 순회하고 성묘앞에 참배하고 나니
서편 산봉에서 마치 대포알이 터지는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며 정신이 아득하여 그 자리에 엎디려 그쪽을 바라보니,
한 소나무 밑에서 화광이 비쳐 중천가지 뻗쳐 있음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일꾼을 데리고 가서 그 자리를 파보도록 하였더니
너댓자나 바윗 돌을 떨어내니 바위틈에서 생수가 터지더니
순식간에 구덩이를 채우는지라.
어제 밤의 동기는 이 물을 주시기 위함이었구나 싶어
그 곳을 우물로 정하니 사람마다 놀라더라.
본시 오리알터에는 샘터 될만한 곳이 없어 지사를 불러 찾아보기까지 했으나,
정하지 못한 채 곤란을 받아 나오던 중이었는데
산 기슭에 이와 같이 석간수가 나니 실로 기적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물맛이 아주 감미로와 특수함으로 분석해보니 위생최적이라는 감정이 내려졌는데
하명하시기를 “이 샘은 유정이니라” 하시더라
9.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천지신장이 강림하여 말하기를
“성부님께서 미륵불상으로 지상에 현현하시게 되니,
천상에서도 대회를 열었노라”고 하시면서
“성부님께서 찬상 마리지 일월삼용에 누어 계시다가 열석자의 금불로 화현하시게 되면
그 삼용도 서게 되신다”고 하시더라.
또 “십이월 이십육일에 불상조상을 마치고 예불을 드리도록 하라” 하시더라
또 “기념치성이 끝나면 바로 불상조성을 시작하되 조각자 마음대로는 하지 못할지니
선사님께서 천상에 오르내리시면서 전반 지시를 받도록 도수를 두었는 고로
조각자는 일일히 선사님의 지도를 받아 조각을 하게 될 것인즉
그리 알고 천상에 대하여 치성을 자주 올리기 바란다”고 하시더라.
그 뒤 조각자 김일섭은 선사님의 교시하심에 따라 미륵금불상을 조성하는데
시월 이십칠일에는 개안이 되시는 날이라 개안식을 올리고 나니
천지가 모두 황금색으로 변하여 사람을 보나 산천을 보나 모두 금빛이요
불을 보면 이상하게도 본색으로 보이지 않고 더욱 붉게 보이고 하더니
삼일 후에는 다시 원색으로 보이게 되더라.
그 뒤 성전 단청까지를 끝내게 되었으니
십이월 이십삼일에 준공하여
이십육일을 재생신 기념일로 정하고 불상봉안식을 거행하니라.
이와 같이 삼청성전을 짓고 열석자의 미륵금불을 모시게 됨은
성부님의 명령계시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니
그것은 재세시에 나는 미륵이노라 하신 말씀과
또 나는 장차 열석자의 몸으로 나타나리라 하신 말씀과
또 남겨 놓으신 문명 가운데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이라 하신 말씀들을
모두 이루시기 위한 것이니라.
재 생신을 약속하신 성부님의 문명은 다음과 같으니라.
無奈八字至氣今至願爲大降
무내팔자 지기금지 원위대강
欲速不達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욕속부달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九年洪水七年大旱千秋萬歲歲盡
구년홍수 칠년대한 천추만세세진
佛 仙 儒
불 선 유
一元數六十三合爲吉凶度數
일원수 육십삼합위 길흉도수
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
10.경인년 정월에 동곡 옛 성전을 뜯어다가 서별당으로 개조하고
응접실 및 산문을 사월내로 완축하고 나서
오월사일에 용암리에서 부치는 열다섯 마지기 논에 모내기를 감농하고
점심을 마친 뒤에 돌아와서 성전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니
불상께서 하명하시되 “성전 정문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못을 치도록 하라”고 하시며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는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한 시각을 지체말고 속히 대구를 향하여 떠나도록 하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시니라.
그리하여 선사님께서는 그날 밤에 치마를 무치어 방마다 돌아다니며
자는 사람들을 깨워 성전 앞마당에 모이도록 하신 다음
목수들에게 명하여 긴 통나무를 가져다가 성전 정문에 대고 못을 박도록 하시고
“부모를 위한 일을 하다가 경제상 곤란이 막심하여
경상도 방면으로 구걸차 내려가면서 부득이 이와 같이 철봉하고 떠나오니
내빈 제위께서는 그렇게 짐작하시고 용서하시옵소서”라고 써서 붙이도록 하시고 나서
성부님의 추상같은 명령이 내리시매
하는 수 없이 정사와 더불어 내일은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나 다녀올 동안 어떠한 세상변동이 있을지라도
진심을 지키어 잘 믿고 기다리라고 지시하시니라.
집안 식구들은 뜻밖의 일에 어이 된 일인가 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동족이 밝자 김제를 향하여 집을 나서시니
정사와 이환우 이우형 배달석 네사람이 따라 나서니라.
김제에 나가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수원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이튿날 식전에 대전에 도착하니 온통 인심이 들떠 정신들을 잃을 지경인데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하여 벌써 서울가지 밀고 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불시의 명령의 내리신 뜻을 그제서야 깨달은 우리는
서울방면으로부터 물밀 듯 내려오는 피난민 틈에 끼여
겨우 기차에 올라 대구에 내리게 되니
그곳의 교중 형재 이교태의 장자 종회의 집을 찾아서 가니라.
그 집에서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께서 말씀하시되
큰일 이로다 대구는 최수운이 참사를 당한 자리라
수운은 대혁명 사상가로서 나라를 개명시키고자 하는 사상을 가졌음으로
이번 일도 그가 하는 일이라 하시며
내일은 수운을 위하여 치성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에서 치성을 드리되
창호지에다 이 난리가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범치 못하리라고 써서 설상 앞에 펴놓고
치성 예를 올린 다음 소화하라”고 명령하시니라.
그 이튿날 명령대로 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에 가보니
공원안은 피난민등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치성을 올릴만한 장소가 없더라.
이리 저리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한 모둥이에서 사람이 없고 고요한 곳이 있어
이곳 나무밑에서 진설하고 예를 행하되 사람이 오면 앉아 노는 척 하며
내왕하는 사람들의 거동을 살핀 연후에 행사를 계속하고 하엿나니라.
예를 마친 뒤 하명 계시대로 축문과 지도를 불사르니
수운신사께서 하강하시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
발을 굴리시면서 “이놈들아 물러가거라 대구 부산까지는 못 들어온다”하시며
너희놈들이 대구 이남을 침범하여 끝까지 난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라가 없어진다.”고 호통을 치시더라.
11그날 밤에 집에서 치성준비를 하여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사되 “큰일 났도다
그러나 너희들은 염려를 말고 날이 새면 밀양으로 내려가 돌고 하되
우형을 먼저 보내어 거처를 정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우형이 내려가더니 밀양 김덕만이 와서 동반하여 함께 내려가니
종남산 구배리 이화학의 집에 자리를 정하니라.
난리통에 놀랜 동리 사람들은 피난 갈 보따리를 싸놓고 어쩔줄을 몰라 방황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주 헐값으로 소와 돼지를 사서 치성을 올린 다음
동회를 열도록 하여 이번 난리는 대구 이남은 침범하지 못할 것인즉
피난갈 필요가 없노라고 선포하여 모두들 안심케 하고
우리는 그곳 교우들과 더불어 날마다 천지에 대하여 치성을 올리고
북을 울리며 춤을 추고 뛰어 노는데 마산 진해에 떨어지는 폭탄소리가
그 동리까지 울려와서 온 동리가 들썩들썩하더라.
종남산 위에는 마침 미군이 방위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쏘아대는 연발대포 소리에 고을안이 귀먹을 듯 요란스러운데
우리는 약 오백미터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매일같이 공사를 행하되
풍악을 잡히고 수십 명의 인원이 회집하여 일체 행사를 보게 되니라.
주인 이화학은 그 동리의 이장이었는데 매사에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사람으로서
마을 사람들 간에 종남산 호랑이라는 별호로 불리우던 사람으로서
관민간에 모두들 앙시해오던 터이니라.
하루는 미군이 내려와서 우리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화학이 여러 가지로 말하여 아무런 주목을 당하지 않았더라.
그곳은 미군이 담당한 지역이 되어서 경찰은 일체 들어오는 일이 없었으며
제반공사를 진행시키는데 매우 편안하니라.
이윽고는 치성음식을 화학이 들고 미군막에 갔다 주면
자기들도 여러 가지 야전용 음식을 나누어 주어서 아주 재미나게 지낼 수 있었더라.
미군부대에는 한국 군인도 끼어 있어서 자주 내려와서는
미군 식료품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식사를 하고 가기도 하여
군인과 우리는 썩 다정하여 졌음으로 전세에 대한 형편도 잘 살필 수 있었더라.
밀양으로부터 부산에 내려가라는 명령이 내리었음으로
우리는 명령대로 부산에 내려가 누차에 걸친
어머어머한 공사를 해변이며 섬중에서 행하게 되었던 바 남하 생활 수개월이라
그동안 북한의 인민군은 마산 진해까지 침범해 왔으니
물론 본부에도 큰 환을 당했을 것이라고 선사님은 자나깨나 염려하시더니라.
선사님은 본부를 부르시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시기를 매일 두 세차례씩이나 하시니
애끊는 그의 울음소리는 가슴에 사무치더니라.
정사 또한 염려되는 심정 그지없었으나,
선사님을 위로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호소해 마지않으니
본부는 혈심으로 지어낸 성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도 없어졌을 것이며
삼사십명의 청년들도 모두 죽었으리라고 생각이 미쳤을 때
실성할 듯 염려되는 심정 금할 길이 없더라.
12.구월 그믐날 평리 박성근의 집에서 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께서 하명하시기를 “이제는 인민군도 물러가고 차차 평온해 가니
곧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지시하시니라.
얼싸 좋아라 하고 행장을 갖추어 부산을 떠나 삼랑진역에 도착하니
그 이상은 더 올라갈 수가 없던 차에 전주를 싣고 가는 미군 화물차에 근근이 부탁하여
나무더미 위에 올라 앉았는데 차는 세 정거장 만에 하룻밤을 쉬는가 하면
이튿날에는 겨우 한 정거장을 떠났을 뿐으로
또 쉬게 되는데 말을 통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차는 정차하였다가도 무전연락만 받으면 불시에 출발하므로
언제 어느 때에 무전이 올는지 몰라 나무더미에 올라앉은 채
마음 놓고 내려와 쉴 사이도 없이 밤도 차 위에서 새우게 되니
머리 위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더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나서 겨우 김제에 도착하였으니
삼랑진으로부터 팔일간 하고 반나절이 더 걸렸더라.
거리에서 지면이 있는 사람을 만나 본부의 소식을 물으니
식두들도 무고할 뿐 아니라 성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모두 무사하다 하는지라
마음은 놓았으나 그래도 조바심이 일어 궁금하기 비길데 없어
보따리를 메고 걸어 나섰는데 오는 도중 검문이 자자서 빨리 올수가 없어
눈물바람으로 선사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들어오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적마다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이 무사하다는 것이었으나
그래도 워낙 염려하던 끝이라 그 소리가 귀에 진실로 들리지 않더라.
이와 같이 하여 근근이 본부 근처에 도착하니 가족들이 울며 불며 맞아드리는데
식구들이 쫓아나와서 서로 붙들고 큰 울음이 터져 나오니라.
본부에 들어와 성전에 뛰어 들어가 불상앞에 엎드려
다시 애통하며 그칠 줄 모르시는 선사님을 겨우 위로하여 만류하고
그날 저녁에 모두 회집하여 동란중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하고
위로한 다음 청년들에게 경과사를 물었더라.
13.모든 식구들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으나 별로 큰 변은 없었더라
만약에 집에 폭탄이나 떨어지고 가족이 살해나 당했다면
아주 휘발유 한 통을 사다가 집에 뿌려 불을 질러놓고
뛰어들어 죽기로 결심을 하고 왔던 길인데
이렇토록 무사하니 과연 성덕의 위력이 아닐 수 없다.
성부께옵서는 하늘도 땅도 뜯어 고치시고
비록 목석이라도 기운만 붙이면 된다고 하셨는데
미륵부처님으로 오셔서 후천 용화세계를 건설하실 어른이
만일 그가 계시는 성지에 폭탄이 떨어지게 하신다면
무슨 면목으로 성부의 도덕을 다시 숭배할 수 있으며 덕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만약 그런 일이 있고보면 우리가 먼저 의심할 지경이라
남을 대하여 성부를 신앙하도록 권할 아무런 조건도 서지 않을 것인데
부처님의 명령대로 남하 피난하였기에 다행이지
그대로 본부에 머물렀다가는 물어볼 것도 없이 죽었을 것이 분명한즉
무사히 난을 피하여 돌아와 보니 약간의 욕은 보았다 하더라도
일등이 무사하니 실로 성부의 덕화와 힘이 지중함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더라.
그러나 지난 오월 십육일에 이명규의 부친 이준민 노인이 육십오세를 일기로 작고하니
일찍이 금성 장대곡 기초시로부터 현금까지 육기초 공사를 물심양면으로
지극정성 다하면서 도중안의 어려운 일들을 앞장서서 처리하고
도인들의 믿는 마음 용기로 북돋우고 괴로운 일에 힘이 되어 동고동락하였는데
작고하신 이후에는 통정할 곳 전혀 없어
막막하고 슬픈 마음 달랠 길이 없고 비통한 마음 억누를 길 없었더라.
14.난을 피하여 무사히 식구들과 만날 수 있었음에
선사는 기뻐하시며 술을 받아오도록 하여 온 식구가 한 장소에 모여서
풍류도 하며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 마음껏 놀도록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빨갱이야 물러가라”고 큰소리로 외치시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부르시니 모든 식구들은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더라.
그때까지도 아직 인민군 패잔병이며 빨치산이 산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민가를 습격하여 금품을 탈취해가는 수가 허다한 때라
그런 말씀을 드리며 만류하니 높은 소리로 따라부르지 않으면 모두 죽으리라고 하시니
식구들은 명령을 어길 도리가 없어 수십명이 합창하게 되어
만세 소리는 앞뒤 산에 크게 울려 메아리쳐 돌아오더라.
이에 정사는 겁이 나서 당장 밖을 둘러보니
산 사람들이 수십명이나 담장 밖에 서서 선사의 욕하시는 소리와
만세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저런 소리는 안하셔도 좋을텐데 하면서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질겁을 하였으나,
선사는 아랑곳없이 계속 욕을 하시고 만세를 부르시더라.
근동 청년들 가운데는 인공때 활약하다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자도 있어
그날 밤에 내려온 일당 중에도 얼굴을 짐작할만한 자들이 있었으므로
그 뒤 매사에 주의하면서 지내니라.
15.신묘년 정월 십사일 동곡으로부터 오리알터에 건너오는 냇물에
전과 같이 섬다리 열두개를 놓고 오색등에 불을 켜고
금성공사시에 사용하던 반근이나 되는 엽전을 섬다리에 넣게 하시더니
이 다리는 마지막 다리라 너희들이 이 뒤로는 발을 못건너다닌다 하신지라.
16.사월 이일에 정사 친상을 당하매
각처로부터 많은 형제들이 문상차 본부에 모여든 가운데
영일에 사는 정상택 정봉영 양인이 마침 동참하게 되었던 바
양인은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하던 촉망된 젊은이들로서
전자에 상탁이 일차 내교하여 교리를 듣고 감동된 바 있어 입교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에 내려가서는 포교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의 친척이자 동지인 정봉영에게 전도하여
본부의 형편을 보이기 위하여 먼 길을 올라왔더니라.
장례식을 끝마치고 밤에 수십명이 한 자리에 앉아 도담을 교환하고 있는데
어느 사이에 내려온 수백명의 빨치산이 사면으로 교당을 둘러싸고는
그 중 수십 명이 뜰에 들어와서 선사님과 정사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하는데
선사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면서 “내가 강순임이다” 하고 외치니
한놈이 총을 가슴에 대고 “너는 어느 나라를 지지하느냐”고 물으니
서슴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노라”고 대답하시는지라
곁에 있던 자들이 “쏘아라 쏘아라”하고 한참 떠들석하니라.
그러나 선사님께서는 기를 낮추시는 일이 없어 가슴을 풀어 재치시면서
“무엇이 아쉬워 너희들 대하여 빈말을 하겠느냐
너희가 너의 나라 지지하는 것이나 내가 우리나라를 지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정말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사람인즉 쏠 테면 쏘아봐라”고 하시니라.
이런 아슬아슬한 광경이 벌어진 그동안에
다른 놈들은 여기 저기 온 집안을 뒤지어 살림살이를 털고
수십 명의 손님 가방을 털어 시계며 금가락지 의복따위에
수만 환의 헌금을 닥치는 대로 모두 탈취하고 나서
대장은 선사님을 속히 끌어내어 총살해버리라고 명령하더라
그리하여 선사와 도생 모두가 생사미판 순간이라
정사 그들을 제지하면서 중죄를 져 사형을 시킬 경우에는
최후의 남길 말을 묻고 집행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법이라
오분간만 참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하니 그자들은 말해보라고 하기에
정사는 위엄있는 어조로 조용히 말하되
그대들은 “삼십좌우의 청년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부모 형제 처자를 불고하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하니
그 충성심에 감동하여 하느님께서 잘 돌보아 주실것이오.
그러나 예부터 성공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초목을 사랑하고 미미한 곤충까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을 사랑하여
해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썼던 분들이 성공하기 마련이었는데,
그대들처럼 가옥을 방화하고 순간적으로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귀중한 인명을 살해한다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원혼의 저해를 받아
이르는 곳마다 복잡을 당하게 될 것이며 성공은 어려울 거싱요.
그러기에 우리 양인을 죽인다면 큰 해를 입을 것 같소.
우리 양인은 보통 사람과는 영신이 다른지라
죽은 후이라도 그대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그대들의 하는 일을 방해할 것이며,
또 우리 교중 형제들이 이 부근에 칠팔십호나 살고 있는데
모두 우리들 따라서 천리 타향에 왔다가
우리가 그대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 많은 형제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며
그대들을 잡아 원수를 갚기 위하여 사력을 다할 것이니
그대들에게 해가 있을지언정 이익 될 것은 없을 것이오.
그러하기에 우리 두 인명을 살해한다면
그대들은 그 몇 배의 피해를 입고 말것이니 잘 생각하여 하도록 하오” 라고 말하니
대장은 부하 책임자와 무어라고 수근수근 이번에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살림을 모두 털어가게 되어서 미안하나
불원간에 와서 다 돌려 주겠다고 허울 좋은 인사를 하고는
출발명령을 내려 모두 이끌고 산으로 간후 십분쯤 뒤에 경찰대 수십명이 와서 조사하니라.
아슬아슬한 판을 넘기고
먼 곳에서 온 형제들과 손님들을 살펴보니
본교에 갓 들어온 상택과
그와 동반하여 처음 온 봉영은 뒷 구석에서 정신없이 앉아 있는지라.
말을 들어보니 금시계며 의복이며 행장일체를 탈취 당하였을 뿐 아니라
좌중에서 나이 가장 젊은 그들은 모두 고향에서 우익 청년단체를 지도하고 있었으므로
여러가지 특수기관의 증명을 소지하고 있었던 터에
발각이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인즉
만일 사태가 악화된다면 어차피 죽는 마당에
평소에 달련된 솜씨를 부려 한바탕 싸울 결심을 하고
둘이서 서로 눈짓으로 마음을 통하고 기회를 엿보았는데
다행히 적발됨이 없이 끝났다고 하더라.
이튿날 성전에서 공사를 보는데 명령이 내리기를
“불의사월래라고 하였는데 불이 또 한번 들어올것이라고”고 하시니
이것은 빨치산의 재차 습격을 예고하시는 말씀이었더라.
전날밤 대담하게도 굽히시지 않은 선사님의 언동에 기가 떨려 견딜수 없었던 상택은
선사님을 대하여 어이 그렇게 위험스러운 말씀을 하셨느냐고 사뢰니
성부께서 시키시니 그대로 말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대답하고 웃으셨니라.
이 삼일 동안데 짚신 십여족을 사오고 헌 의복을 구해 입히고
약간씩의 여비를 구해 나누어 주어 길을 떠나도록 하였는데
상택 봉영 두 사람은 교통이 몹시 불편하여 트럭을 타다 말고
걷기로 하여 육십명 고개를 넘어 안의 거창으로 빠져
때로는 타고 때로는 걸어서 겨우 고향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들을 때
미안한 마음 말할수 없더라.
신앙을 위하여 본부를 찾아 왔다가 그러한 고생을 하였으니
믿기는 고사하고 좋지 못한 평을 하여 반대나 하지 않을까 하여 저윽히 염려되더니
그뒤로 누구보다도 분발하여 지극히 믿게 되어
오늘날에는 각각 중요한 책임부서를 맡아
그들은 불고가사하며 교중의 일체 사무를 독당하다싶이 하고 있으며,
봉영 또한 대구에서 지부감의 중책을 맡게 되었으니
실로 “삼생의 인연을 지니지 않고는 나를 찾지 못하리라”고 하신
성부님의 말씀 그대로 전생의 인연이 지중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라.
빨치산의 습격을 당한 뒤로 하루 밤도 마음을 놓고 잠들 수 없던 판에
오월 이십사일에 다시 습격을 당하게 되니라.
그날 밤은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기에 동곡으로 피신하였던바
선사님 내외의 소지품 일체를 탈취 당하였을 뿐 인명에는 아무 피해가 없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당하고 나니 도저히 안심 할 수가 없어
김제읍 교동리에 이주하여 일년이상을 피난했다가
임진 삼월 초이튿날에 본부로 돌아오니라.
17.임진년 정월 십오일에 기념치성을 드리니
천존신장과 구목신장이 하강하시와
“금년에는 천사님의 묘각을 건축하여 천지도수에 부합되도록
십월 십사일에 상량토록 하라” 하시니라.
난세에 지방 연락도 끊어지고 경제상태는 곤란한데
또 묘각을 지으라고 하시니, 방책이 묘연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청년들을 회집하여 그와 같은 하명이 계셨음을 발표하고
신계의 명령을 거역할 수 도 없을 뿐더러
성부님 묘각은 어느 때에 지어도 지어놓아야 우리의 본분을 다하는 것임을 말하니
그들은 모두 상의하여 수십명의 청년이 총동원하여
모악산 산판에 가서 품을 팔아
그 대가로 모각에 쓸 재목을 구하도록 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이와 같이 결정이 되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역하여 산판일을 하게 되었는데
개중에는 아직 일에 손이 익지 않은 청년들도 있었고
또 가정들이 곤고하여 제대로 양을 채우지도 못하면서
큰 나무를 운반하여 하산하느라고
산비탈에서 둥글며 엎으러지며 일하는 광경은 실로 눈물겨웁더니라.
이와 같이하여 구한 재목을 집안 목수들은 다듬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까지도 식량사정은 펴이지 않은 채
본부의 식구들은
초근목피에 의존하는 비참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처지이므로
산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점심마저 싸갈 형편이 못되어
심지어는 송피죽을 쑤어 단지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일을 하였다.
한편 목수들은 부황이 나서 기진맥진한 가운데에도
타처에 다른 사람의 건물을 맡아서 지어주고
그 임금으로 백미 두가마니를 사서 본부의 식구들이 연명하고
또한 영대의 건축에 충당하였던 것이니,
오늘날 화려한 단청과 교묘한 장식으로 화려하게 마련되어
성묘를 보호하고 어렷이 서있는 영대는
이와 같이 교중 식구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영대에 갈 때 마다 당시의 말 못할 정경이 회상되어 가슴이 서리치고 사무치니라.
이 정상은 당시에 동참하여 실지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치도 못하리라.
식구들의 이러한 성심의 결정으로서 이룩된 영대는
임진 시월 십일 도령의 탄생기념일에 상량을 하게 되었다.
18.이해 팔월에 수리조합 연합회에서 직원들이 출장나와서
금평수리조합 공사 예정지를 일일이 측량하게 되니
그때에 실시된 측량에 의한 제일차 설계는
현재의 댐자리보다 일미터 정도 윗 지경에 정하고
금산사까지 이르는 도로의 설계는 본부 경춘대 자리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들은 여기저기 푯말을 밖았더니라
오래터로 성전을 옮기도록 명령하실 때 냇물에 섬다리를 놓게 하시면서
장차 이곳은 발로 걸어서는 다닐 수가 없게되니라 하셨으며
또 동곡에서 오래터로 이사하지 않으며 곧 패운이 들어온다 하시더니
우리가 기지를 옮긴 뒤에
그 자리가 수몰지구로 편입되고 말았던 사실을 생각하더래도
필경 설계가 변경될 수 있도록 정리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러나 막상 기지내에 푯말이 박히고 보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는 없더라.
그날 저녁에 성전 불전에 예를 올리고 이러한 사정을 심고하니
성부님께서 하교하시되
“염려말라 연전에 공사시에 너희가 원평을 다녀온 일이 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화은당의 이마를 깨어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제방자리를 미리 표시한 바 있고
그날 밤에 천불을 내려 전반적인 표시를 한바있으니
천지에서는 벌써 정해져 있노라
동곡의 냇물에 섬다리 열두개 씩을 해마다
정월 십사일 밤에 놓게 한 것 역시 이 저수지 관계라.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앞거리를 바라보고 남조선 뱃길이라 하며
냇가 변두리 느티나무에 배를 매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동곡마을이 없어지게 되어 거기에서는 장차 고기를 낚게 될 것이며,
또 뒷날에 도사들의 별장이나 짓고 살터가 되리라고 했을 때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인으로 여겼지만
그 당시에 벌써 천지도수에 정하여 놓은 것이니라.
그러나 천지사는 정성을 드리지 않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이니
무사히 풀리게 해 주시기를 불전에 충심으로 발원하도록 하라.
그런다면 신명들이 너희 몸에 힘을 주어 무사히 되리라” 하시니라.
그 뒤 정성껏 기도를 올렸더니 설계가 변경되어
제방자리가 오십여미터나 물러나게 되니
도로도 역시 물러나게 되어 현위치에 푯말을 다시 박게 되니
기지에는 아무런 침해가 없게 되었다.
수년 전에 동곡으로부터 집을 뜯어 옮길 때 보는 사람마다
집은 왜 지었다가 뜯었다가 하며,
또 널찍한 평지를 버리고 산비탈에 그처럼 힘을 들여 할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경상도 사람은 멍청하더니
거대한 집을 지었다가 이삼년 만에 이축한다는 것은
정말 멍청한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소하면서
순전히 돈 지랄을 하는 것들이라고 욕을 하며 별별 모략이 많았더라.
그러나 그 뒤 수몰공사가 착수되고 동곡이 수몰지대가 되어 물속에 들어가게 되자,
모두들 놀라면서 이상한 일이다.
지금에 와서 보니 만일 오래터에 개기하지 않고 그대로 동곡에 머물렀더라면
그런 낭패가 없을 터인데 미리 알고 터를 옮긴 것을 보면
아마도 오래터에는 큰 지혜자가 있는 모양이고
도통한 교인도 많은 것 같다고 말들을 하면서
옛날의 그처럼 심하던 비소는 간곳 없고 인사차로 찾아와서 찬양하는 소리가 자자하더라.
당시의 정항을 아는 자는 교중 형제는 물론이요
밖의 사람들도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감탄하더라.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이한 것은
우리 교중의 경제관계가 핍박하여져서 건축공사를 중지하면
저수지 공사도 역시 중지하게 되고
교중 경제가 풀려 건축공사가 잘 진척되면 저수지 공사도 또한 활발하게 진행되어
칠판년 동안을 두고 한결같이 그 모양으로 진행되었으니
이것은 우리의 영대와 음양대대로 진행되는 영소 공사가
천지의 도수 소관으로 진행 되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니라.
19.계사 오월 칠일 아침 불전에 예식을 드리니
성부님께서 강림하시와
“오늘 저녁 안으로 세월가를 지어 진지상을 올릴 때 부르고 불사르도록 하라.
운장이 와서 천상에 접수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지체하지말고 곧 짓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정사는 마침 전주에 볼 일이 있었던 고로
우형과 조진명 두 사람에게 정성을 들여 작사하도록 지시하고
전주에 나갔다가 석양에 돌아와서 상을 올리는데
두 사람이 세월가를 읽으니 성부님과 운장께서 웃으시고 웃으시면서
“가사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로다
가사라 하면 곡조를 부쳐서 누구나 노래 부르도록 해야 될 것인즉
다시 지어올리도록” 하라 하시며
“저녁 열시에는 천상에 돌아갈 것이니 그안에 짓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정사는 저녁밥을 먹지 않은 채 정성드려 작사하니
그때부터 수년을 세월가로 부르다가
단기사천이백구십삼년 경자로부터 시대가로 수정하야 영가함이 다음과 같으니라.
(歲月) 時 代 歌
一 時代야 歲月이야 開明하온 時乎로다.
東靑龍 三八木에 北玄武 一六水라
水生木 東南風에 陰陽和合되는구나
二 時代야 歲月이야 風雨霜雪너머간다.
一樹花發 萬樹春에 春和氣和 절로절로
無窮花 이江由에 三淸日月 밝아온다.
三 時代야 물결이야 술렁술렁 드러온다
母岳山下 金生水에 萬化歸一 되는구나
靑龍黃道 大開年에 旺氣浮來 太乙般을
四 時代야 歲月이야 修養山陰 절로절로
天절로 地절로하니 山河大運이 절로절로
心靈神臺 바로가면 先靈蔭德 鳥乙失口
五 時代야 歲月이야 時乎時乎 祥瑞로다
童子의 비를드러 掃除獨氣 절로절로
時乎時乎 좋은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밤 열시에 성전에서 다시 지은 세월가를 세 번 부르고 나니
운장께서 “소축하라 천상옥경으로 떠난다”하시며 승천하시더라.
십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니
운장상제 천존신장 선관선녀가 모두 하강하여
“육기초 공사는 천상만 못하더니 세월가는 천상보다 잘 지었다.”고 하시며,
서로 천거하시더니
“너희들은 모두 세월가를 경문과같이 불러야 하리라”고 하시더라.
21.계사 구월 십구일 탄 강 기념치성에는 큰 소를 쓰라고 명령이 내려
어려운 처지에서도 월전에 준비하여 두었더니
선사께서 치성에는 산소를 올리라시며, 잡지 말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하더니
구월 십구일 탄 강기념치성에 다른 치성물은 모두 준비 되었으나,
우육만이 없었는데 선사님께서는 진설이 다 되자
“소를 몰아 성전 앞뜰에 세우라”고 하시고
잔을 올릴 때마다 이 소가 삼헌까지 울어야지
만일에 소가 울지 않으며 너희들이 하는 일은 허사가 되디라”고 하여
모든 사람이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행사는 진행되어 초헌을 올리니
그때까지 조용히 섰던 소가 큰 소리로 울음으로 우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감격하여 숨을 죽이고 다음 행동을 주시하는데
종헌에 맞추워 소가 세 번씩이나 울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비결에 이르기를
인지명은 양명지종야 신지명우명지종야라하며
이러한 일은 참으로 현묘지의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더라.
이로부터 교세는 확장하여 팔천신도에 이르렀나니라.
계사년 십월 이십육일 교명을 증산선불교 증산천사법문연구회로
공보처에 등록번호 제백칠십구호로 등록하고
교명을 정식으로 세상에 선포하였다.
해원 보은 상생을 교리로 하며 신상은 증산미륵불을 신앙대상으로 숭앙하고
이십일개의 지방조직을 완성하고 결성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로부터 합법적인 포교로 교세가 발전되었다.
20.계사년에는 태평전과 구룡사 수운전를 건립하여
갑오 삼월 삼일에 도내 관민 유지 수백명이 모인 가운데
단군 성조의 체상과 순국 충의 열사와 수운선생의 체상 봉안식을 거행하니라.
그동안 수년에 걸쳐 여러채의 건물에 단청을 완료하게 되니,
각 당우의 칭호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그리하여 그 이름은 천추만대를 두고 불리 울 것이니 신중을 기하기로 하였던 바
단군성상을 모신 전각은 국내에서는 대게 단군전이니 또는 대덕대진전이라 하였으나,
다른 곳에서 쓰지 앟는 이름으로 할 것을 마음먹고 생각한 결과
단군께서 탄생하신 태백산의 윗 자를 따고
또 단군 한배께서 도읍터로 정하신 평양의 윗자를 따라서
합하여 태평전이라 명명하니,
그곳에 봉안한 단군 성상은 금성골 지하 중궁에 모셨던 성상이요
또한 성상 좌우에는 단군이후의 창업주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어
삼천년에 걸친 우리 민족의 역사 노정과
거기에 얼룩진 겨레의 얼과 넋을 찾아서 모을 수 있도록 하니라.
묘각은 성부님의 성령이 내왕하시는 총묘 천지신이라 하시니 영대라하고
미륵불을 모신 성전은 천상 삼계를 본 따서 삼청전이라 칭하고
수운전은 수운신사계서 경주 구미 용담에서 탄생하였으므로
그 윗자를 따서 구룡사라 칭하고
순국 충의열사를 모신 곳은 호국사라 칭하여 그 결과를 글로 써서 상고하니,
성부님께옵서 “잘 되었도다 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니라.”고 하시니라.
21.갑오 오월 단오절에 현재의 남별당 자리에 그네를 메고
선사님께서 원삼에 족두리를 쓰시고 그네를 타며 치성을 올리고 공사를 보는데
성부성모께서 하강하시와 명령하시되
“동곡별당을 뜯어온 재목으로 이 자리에 남별당을 지어라”하시며
“오늘 개기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명을 받들어 봉행하고 나서 뒤이어 터를 닦고 보니 종종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났으며,
구성산을 안으로 삼는 대지가 되었더라.
별당 건축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밤이면 큰 호랑이가 내려와서
별당터에서 놀다가 각 성전을 돌아서 가는 적이 수차 있었더니라.
그 해 가을에 대구에 사는 박귀동이 납명하고 본교를 신앙하게 되었는데
본부에는 미쳐 와보지도 않은 채 거액의 성금을 헌납하였으므로
그것으로 경춘대 재목을 구하여 이층 건물을 시작하여
갑오 을미 양년에 걸쳐 준공하게 되니
안으로 영대와 삼청전을 대하고 밖으로 금평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그 건물은
우리 본부의 정문으로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니,
모든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경치를 볼수 있는 높은 자리가 되었다고 칭송이 자자하니라.
수운선생의 유전 가사중에 사십구년 설법가라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르기를 삼십육궁 도시춘이 만방안락 태평일세
춘아 춘아 태평춘아 사시동락하여 보세”하는 구절이 있으니
장래 있을 용화 극락세계의 사시장춘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태평춘가를 노래할 날도 머지 않으리라.
22.을미 구월 십구일 성부님의 화천기념일에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옵서 하명하시되
“각 문중 도선영이 천상공정에 모여 천지공사에 수종해 왔으나,
지금은 지상에 한 자리를 정해야 할 것이라”
각 성 각가의 도선영 사당을 짓고 봉사자의 명부를 작성하여
각 성별로 위패를 봉안하되 금성중궁에 있던 내 영상을 갈라서
선영의 위패를 조각하다가
부족하거든 모악산에 가면 한 율목이 있으니 그것을 쓰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먼저 앉아야 선영이 좌정된다.
모든 선영이 자리를 정하면 나는 나가게 되느니라.
위패에는 본관성씨 직선조 하감지위라 써서 봉안토록 하라.
그러므로서 각 가의 선영신들이 지상의 후손들에게 응기하여
성자성손으로 교양하여 다음에 올 용화회상에 할 수 있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 뒤로 다시 명령하시기를
“당우를 짓되 그 자금을 각각 각성의 자손들에게 성의를 표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교중의 여러 형제는 명령을 받들어 성심으로 기금을 모아서
그것을 자금으로 사당을 건립하여 병신 십이월 이십육일에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게 된 바
봉안한 위패는 이백사십여위에 달하니라.
정유 정월 십오일 기념일에 사당의 첫 제사를 오리게 되었는데
각위마다 술 한잔 건포 한마리 떡국 한 그릇 과일 한 접시씩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는 도중
운장상제와 오악산왕 사해용왕이 강림하시와
제사 지내는 광경을 보시고 춤을 추며 풍유를 하시면서 잘 되었다고 하시니라.
23.정유 정월 십칠일 아침에 성부님께옵서 명령하여 말씀하시되
“천상의 대신장들로 지상에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하나니
신명사를 올 해안으로 짓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이튿날 각 지방의 지부감과 회의를 가진 결과
건축에 대한 모든 합의가 원만히 진행되어 제반 절차를 결의하게 되었던 바
대구에 사는 이구락이 자기는 도문에 납명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용화도장 건설에 아무런 공적이 없음으로
이번 신명사 대령전은 자기가 단독으로 부담하여 건축하겠다고 간청하므로
놀라운 정성이라 하여 허락하니
그의 단독희사로서 대령전은 준공을 하게 되니 그의 공적을 표창하고
지부감 회의 결과에 의하여 거출된 일반 성금은
각 전각의 수리 및 공사비용에 충당하니라.
구락은 동년 시월에 입공하여 십일이 경과되었으나
아무런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없었다 하여 딴 곳으로 신앙처를 바꾸게 되었으며,
자기가 성금한 대령전 건축 비용 일체를 반환해 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오니라.
구락의 이와 같은 처사는 삼척동자의 수작도 아니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
세상에 부처님 존전에 시주해 놓고
수공 십일만에 영험이 없으니 시주한 모든 것을 돌려달라고 하는
그런 일이 어디 또 일을까보냐고 모두들 어이없어 했으나
장차 올 용화선경세계의 기초를 열어 나가는 공사 절차에 있어
한 사람이라도 척을 지으면 아니 될 일이라
그의 척원을 풀기 위하여 반환해 주기로 결의하여
교중 전답을 팔아 거액을 반환하면서
이는 오로지 도의적인 면에서 돌려주는 것이지
현행법에 비추어 반환해야 할 하등의 책임이 없음을 밝혀 말해주니라.
24.무술 정월 일일 신년을 맞아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또 집을 짓도록 하라.
이번에는 높은 자리에 터를 잡아야 되겠은즉
처음 기초시에 산중턱에 터를 본 자리가 있느냐”고 하문하시므로
“있습니다”고 상고하니 “술상을 차려서 가자”하심으로
술상을 차려 그 자리에서 올라 갔더니
성부님께서 보시고 “터가 썩 좋구나” 하시면서
“이 자리는 대학공부하는 자리라 너희들이 겁기를 벗을 집이 될 것이니
성의껏 지어 공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계속하여 “금성골로부터 전라도까지 집은 열세채를 지으면 될 것이라고 한 일이 있나니,
이집으로 집짓는 일은 끝이 나리라.
그러한 즉 더욱 정성을 드리도록 하라.
집모양은 구궁으로 하여 우물정자 형으로 하되 통로를 두도록 하라.
그 집에서 한차례에 남녀 삽십삼명씩 공부하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뒤 혈심 전력을 다하여 집짓기를 마치고
내부 단청도 십월 초순에는 완료하게 되었음으로
무술 십월 십일에 입공하게 되니라.
입공식을 행하는데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이번 공부에 읽을 주문은 태을주로 위주하야 지극히 많이 읽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성부님의 명령대로 무술 시월 십일부터 기해 오월까지
수십 회에 걸쳐 본부의 식구와 각 지방 형제들이 수공하게 되었으니
이 집이 곧 천하전으로 수련도장이다.
또 이 천하전을 지은 것은 금성산 지하에서 모셨던 형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지는 것을 천하전이라고 한다.
제8장 선화
1.선사님께서는 무술년 십월부터 득병하여 신음하시더니
그 뒤로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제반공사를 주제하시고
교중사를 일일이 지도하시더니 기해년이 되면서 점차 중태에 빠지시니
정사를 비롯한 교중 형제들의 우울하고 염려스러운 마음 그지없는지라.
백방으로 치료를 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던 중
하루는 원평병원에 입원하시겠다는 말씀이 내리신지라.
수종을 들고 있던 임원들은 반대하여 말씀드리되
“누님의 병환은 천상에서 아시는 일이라
천상의 의원들이 맡아 치료하실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또 인반에서는 인반대로 있는 힘을 다하여 치료해야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오나
그러나 다른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르거니와
적어도 증산천사님의 따님으로서 인간세의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면
일반의 비소를 면치 못할 것이니
정히 필요하시다면 의사를 불러다가 곁에서 시봉하도록 할지언정
친히 내려가시는 것은 도리에 합당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 말씀하니
선사님께서는 평생에 일신사에 대해서는
비록 재하자라도 의견이 있을 때에는 즐겨 침착하시고 따르시는지라.
이번에도 그럴 일이라고 더 말씀이 계시지 않더라.
그러자 삼월 초순이 되며 선사님께서는 다시 입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이는 아무래도 무슨 공사를 보시기 위하심인가 싶어 말씀을 받들기로
식구들 사이에 상의가 돌아 삼월 사일 아침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는데
차를 준비하려는 것도 말리시고 친히 걸어 나서는지라.
상택은 마스크를 하시도록 권해드리니 물리치신 뒤에
손수래로 모시고 가니 수인의 내외 식구들이 뒤따르니라.
병원에 입원하신 다음날 선사님께서 입고오신 치마에 혈수가 묻었는지라.
시봉자는 대경실색하고 내출혈인가 걱정하여
황급히 서둘러 의사로 하여금 지혈제를 놓아드리도록 부탁하여
의사가 주사를 놓으려고 하는데 선사님은 웃으시면서
“이놈의 아들아 내 막내 하나 낳으련다”하시매 깨닫고 보니
그것은 내출혈이 아니라 경도로 인한 혈수임을 비로소 알게 되니라.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현상에
식구들이 모두 이상해 하며 정사도 또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니라.
선사께서는 십여년 동안 경도를 보신 일이 없었으며
다만 도령 두 형제를 나으실 즈음에 돈짝만큼 비쳤을 뿐으로
더구나 갑오년 이후로는 정사와는 별거하다 싶이 하여
동침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차에 수개월을 신음하여
쇠약하실 대로 쇠약하신 선사님의 몸에 그런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었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하룻밤에는 성모님의 명령이 내리시는지라
명령을 받어 봉명하시는 선사님께서 노래 부르시듯 풀어내시니
그 음성이 어찌나 큰지
병원 의사는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하며 놀래더라.
모든 식구는 병원에 입원하셨으니
이제 완치되어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원 의사는 이미 당시의 그 체력 가지고는
도저히 생명을 유지해 갈 수 가 없노라고 판단하여
방금이라도 주사기운만 떨어진다면 운명하실 것이라고 하는 판에
입원하신지 사흘 만에 퇴원하시겠다는 말씀이 내리시니
식구들은 또 한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선사님께서 자리를 일어 나서 앞장을 서다싶피 하시니
수종하던 자들도 하는 수 없이 본부로 되짚어 돌아오니라.
2.본부로 돌아오신 선사님께서는 남별당에는 드시지 않으신 체
바로 천하전에 올라가시더니 갑자기 치성준비 명령 하시니라.
식구들은 온갖 정성을 드려 시키는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개 두 마리와 술 다섯말 밥 두 가마니를 위시로 대소 제물을 장만하는 동안,
선사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신 후 그대로 천하전에서 머무시더니,
그날 밤에 준비된 제물을 진설하여
천지 부모와 제대신장을 대접하기 위한 대 치성을 올리게 되니라.
그때는 마침 제사회 공부생들이 입공중이었는데,
온 밤을 두고 공사를 주제하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많은 신장들이 내려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빙빙 돌며 빙글빙글 웃기만 하는 것을 보니
천상에 이미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고 하시니라.
소위 사일구혁명 전야 열두시
삼청전 미륵불상에서 땀이 흘러 내려 좌대가 모두 젓고
수건으로 닦아서 짜낸 물은 서되도 넘더라.
모든 사람들이 무슨 큰일이 있으리라고 하며
신기함에 빠져 있는 중에 날이 세면서 혁명방송이 흘러나왔다.
3.삼월 이십칠일이 되면서 선사님의 병세가 그날을 못넘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생들의 공부를 중지시키려고 하니
선사님께서 말리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는 것은 나의 할 일이요, 저희들의 공부는 저희 각자의 책임인데
어찌 공부를 그만두도록 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내가 떠날지라도 공부를 정지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이에 정사는 “사람이 죽는데 무슨 정신으로 공부를 하겠소”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시면서 다시 당부하시는지라.
“그럼 이 판국에 무슨 주문을 읽도록 하리까”고 물으니
“읽는 주문이 생각나니 않거든 나를 생각하여 울도록 하시오
그도 역시 공부이외다”고 하시니라.
선사님과 목천포에서 만난 뒤로 이십사년 동안 지내온 정상을 생각할 때에
실로 꿈 같은 경로야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평소에 선사께서는 분명코 천상의 연분이 지중하다고 하시더니
웬일인지 칠팔년 전부터 합방거처도 못하게 하시면서
조석도 따로 가져오라 하시며
심지어는 아침 저녁으로 상면을 할지라도 안색이 변하고
혹 상의할 일이 있어 이런 말 저런 말을 주고 받다가도
불쾌한 어조로 돌변하여 빨리 나가라고 욕을 퍼붓기도 하여 정을 떼는지라.
그런 일을 당하면서 정사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어 그러하리라고 짐작할 때도
혼자 하시는 말씀이 “내가 멀지 않은 앞날에 죽고 보면
저 영감은 혼자서 뛰다가 울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리라 불쌍한 노릇이요
그러나 내가 먼저 떠날지라도 앵무새같이 일러주마”고 하시더니
또 오년전 부터는 나의 대신을 구하라고 조르듯 말씀하시는지라.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왔는데 오늘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되니
지난번 병원에서 돌아오시어 천하전에서 하시던 말씀이
모두 뜻이 있어 하셨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말씀대로 행하여 드리지 못하였음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쓸데 없는 일이라 비감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더라.
4.그 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온 식구가 침식을 거두다 싶이하여 간호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왔으나
오륙개월을 두고 시병한 사람들은 기원 춘도 종호 명성 오반택 식모등이었더라.
삼월초에는 대구로부터 입공차로 왔던
김선도 여인이 선사님의 병세 위급함을 보고는
공부보다도 시병이 급하다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진심갈력으로 이십일을 봉양하는 가운데
때때로 눈물바람을 하며 또 피를 빼어 수혈을 하여 드리려 했으나
선사님께서 굳이 응하지 않으시니
선사님을 대신하여 목숨을 받치겠아오니 무량도법의 혜택을 입어
선사님께서 소생하실 수 있게 하여 주시라고 수십일을 두고 기원한 바 있었으며,
한편 각 지부 신도 남녀일동은 수차 치성을 올리고
명산대천에 축원하기를 그치지 않을세,
선사님께서도 그들의 간호를 받으시면서
많은 형제자매를 두고 먼저 떠나시게 되니
남는 형제들의 전정을 생각하심인지
깊으신 참뜻은 몰라도 “어쩔거나 어쩔거나” 그 말씀을 되풀이 하시니라.
5.삼월 삼십일에 입공한 도생들이 공부를 마치어 졸공하고 도장을 떠나게 되어
저녁에 선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일 일찍 떠날 것을 고하고
서른 세 사람이 모은 돈 이천오백환을 드리면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사서 잡수시라고 말씀드리니,
선사님께서는 그 돈을 받아 가슴 안에 넣으시면서
“잘되었다. 내가 이 시간에 멀리 갈려는데 여비가 없더니 참 잘되었다.”하시니,
모두들 웃으며 우리 누님 정신이 좋으시다고 하면서
저만하면 회복하실 날도 멀지 않았다고 회색이 만면하더라.
그러나 선사님께서는 곧 요에다 나를 뉘인 채 떠밀라 하심에 그대로 행하니
손으로 요를 쳐들어 높이 올리고 밀라고 하시어
수종드는 사람들이 높이 떠메고 나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시기에 그대로 행하니,
선사님께서 “높기도 높구나 나는 태전으로 간다”고 하시더니
다시 “멀기도 멀다”고 하시며 정사를 대하여 “여비가 부족하니 여비를 더 내라” 하심에
몸에 지닌 돈은 없고 선사님 몸에 이천오백환이나 있음을 아는지라
더 들이지 않은 채 예사로 생각하고
근 한시간이나 메고 돌다가 다시 방으로 모시니 말이 어둔하신지라.
성태가 천하전으로부터 내려와서 하는 말이
“하늘에 저구름을 보시오”라고 함으로 나가보니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지붕위로 오색 구름이 무지개처럼 뻗치었더라.
정사를 비롯한 성도등 간부들은 어쩔줄을 몰라 이저리 서성거리는데
환우 상택등 몇 사람이 하는 말이
삼월 말만 넘어가면 무사하리라는 동기가 있었다고 하면서
열두시가 얼만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지내면 삼월 말이 다 간다고들 고대하는 마음으로 주고 받는지라.
그러나 정사의 생각에는 누류인간삼월우라 하시었는데
오늘을 지낸다 하여도 내일은 곧 사월이라,
그 사월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 현무경에 불의사월래라 하시었으니,
아무래도 사월 그믐이 다가고 오월달이 와야 안심이 될 것만 같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전주 노송동에서 지낼때에도 중병에 빠져 운명할 지경이 되어
치상준비까지 하여 놓고 절명하기만 기다라고 있었는데
불시에 도령형제가 들어와서 약을 먹이니
약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면서 곧 쾌유하여 기동하게 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워낙 중환이라 인세의 약으로는 도저히 안될 줄을 생각하면서도
온갖 수단을 다하여 치료와 간호에 전력을 다하기는 하면서도
극도에 이르르면 또한 무슨 신기한 동기가 있을라고 바라고 왔었는데
두해 동안을 두고 신음에 신음을 거듭하셔도
성부 성모님과 도령형제며 모든 신명께서도 한마디 걱정도 없으시니
무슨 연고인지 알 도리가 없는 채 이상한 생각만드니라.
전번에 금성산에 있을적에는 몸살만 나도 천상의 약을 주시고 애지중지하셨으며,
처음에는 “나의 복동아”라고 부르시다가
다음에는 “나의 혈식아” 하시고 또 그다음으로는 “내 꽃아”라고 부르시고,
천지 신명도 선사님의 말씀이면 여율령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이처럼 아무런 소식이 없음은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라
성부님의 말씀에 “비록 나무나 돌이라도 기운만 부치면 쓰는바 되리라”하시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또 죽음을 바라면서까지 받들기 어려운 명령을 받들어
수십년 동안을 쉴 사이 없이 일하여 겨우 기초를 마치고는
그 동안의 무리로 육탈이 되고 기진맥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더욱 신고하게 되었어도 영영 불고하시니,
공사에 사정을 두지 않아야 성공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탓인가
사람의 좁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성부님의 도덕이 속속히 판단을 내리소서.
비통한 마음과 불효스러운 심정금할 길 없나이다 하고 심고하니라.
갑을이 기두하여 무기로 구비친다 하셨으니,
아무래도 올해 기해년이 그대로 넘어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도 환우 상택등도 모두 우리가 생각해도 안심할 수 없노라고 통탄해 마지 않니라.
6.이튿날 기해년 사월 초하룻날 아침에 성도와 환우가 들어와서 보더니
오늘은 영가망이 없을 듯 싶으다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곁에 앉는데 천하전에서 수공하던 공부꾼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간밤에 천상에 올라가 보니 선사님께서 천상 대법관으로 임명을 받아
우리 인간의 선악과 천지공사에 대한 공로의 유무를 심판 결재하시는 책임을 맡으셨으니
법석을 마련하여 모든 법관들이 시위하고 기다리고 계시더이다.”라고 하니
모든 식구는 운명하실 시간이 가까워지는가 싶어 더욱 서러워하니라.
오후 두시경에 정사는 선사님을 안고 약물을 두 번 떠 넣으니 잘 받아 드시고 나서
손을 들어 정사의 얼굴을 이리 저리 쓰다듬어 어루만지시더니
눈을 바로 뜨신 채 숨소리가 점점 줄어드시므로
성도가 식구들을 불러들여 앉히니 모여든 식구들을 두루 살피시고 하시는 말씀이
“본부 식구들은 물론 일반형제들도 꼼짝 말고 수도나 잘하면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나는 태전으로 간다. 하시고
곧 눈을 바로 뜨시더니
전광을 돌린 듯 빛나고 눈동자를 그대로 눈감지 않으신 채 선화하시니라.
7.지금까지 오직 대신하는 존재로 성부님을 대하듯 의지하고 지내온 선사님께서 선화하시니,
온 식구의 곡성은 천지에 진동하는지라.
애통스러운 정 금할 길이 없으나 근근이 정신을 수습하여
각 지부에 전보를 치고 부근의 신도와 지방유지에 부고를 보내는 등
장례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니라.
그러나 묘지도 막연하고 당시의 경제상태 또한 곤란한 때라
어이 일을 치루어야 할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우선 세상 사람들의 욕이나 면하기로 외봉이나 하였다가
정식 장례식은 후일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부고에도 임시장사라고 통지 하였는데,
그날 석양에 뜻밖에 지사 한 사람이 찾아오는지라.
무슨 뜻이 있는 일인가 생각되어서 답산을 부탁한 결과
현 남별당 뒤 산록에 묘지를 정하기에 정사도 자세히 살펴보니
그럴듯한 생각이 들어 그 장소에다 시멘트로 방과 같은 모양의 강중을 만들어
그 속에 관을 모시도록 하니 이는 선화하시기 수년전부터
“내가 죽거던 묘안을 방안같이 하고 몸을 결속하지 않은채
자는 듯 뉘여달라”고 당부하시던 산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니라.
8.기해 사월 팔일에 장례식을 거행함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교중형제는 물론이요
증산교 각파의 원로를 비롯한 많은 신도가 문상하게 되니
보는 사람마다 묘지가 썩 좋다고들 말하니
혹은 금부포란이라고도 하고 혹은 유지앵소 혈이라고도 하면서
복인이 봉길지라 하더니 정말 대명당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니,
그런 땅에 모시게 되었음으로 다시 이장할 필요가 없게 되어
영영 안장지로 결정하고, 장례위원회가 결성되어 부회장인 환우를 위원장으로
각 지부장이 위원으로 장례식을 구일장으로 정하고,
초 종례식은 교례에 의해 결정하고 준비가 완료되어
선사님의 채백이 본교를 떠나는 영결식에는 내외신도와 많은 사람들의 통곡소리는
수양산도 참담하고 일난풍화한 사월에 햇볕도 슬픔을 더해주고 바람마저 잔잔하여
온 수양산록이 문상객의 흰옷으로 백화를 이루었고 염불소리는 그치지 않고,
수백의 만장과 조기는 일산을 이루어,
장지에 당도하여 하관하고 평토재사를 지내고 반혼하여 초위제례를 행할재,
이재 화은당선사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수월전에도 경춘대를 들어서면 선사님의 음성은 온집안이 훈훈하였는데
자애하신 그 음성은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으리오.
내외도생들의 통곡소리는 본부가 떠나갈 듯 슬피울었다.
재우삼우를 모두 마치고 장례위원회를 해체하는 동시에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선사님 당부하심을 명심하여
슬픔을 참고 천하전 수련은 계속되었다.
일부 교단이며 외부측에서는 말하기를 증산선불교는 끝났다고 비판이 자자했으며,
허령에 빠진 도생 몇사람이 이탈했으나 별일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교인이 화은당선사님을 더욱 사모함은 형제. 숙질. 자매지 의로 모인 정이 깊었고
상제님의 따님과 맺어진 인연에 감회가 더욱 깊었더라.
그 뒤 수공생이나 가족에게 자주 현몽하사되
“내 누운 자리가 매우 편안하다”고 하시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더라.
하루는 한 내수교인이 공부중에 천상에 올라가보니
선사님께서 수다한 사무원을 두시고 문서를 기재하시기에 다망하시어
인사를 받으실 여가도 없으신데 간신히 인사를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지상에 오르내리실 때에 나의 법신을 보내노라”하시며,
또 “천상에서 나를 보았다고 지방 형제들에게 안부나 전하라”고 하시더라 말하니라.
9.이십사년을 두고 주야로 서로 마주앉아 천지사를 상론하면서
신약한 선사님을 마치 유아 기르듯 일신양력으로 전심하여 받들어 오다가
사사 사람도 처상을 당하면 고분지통이라 하는데
지중한 천연가약으로 성부님의 인도하심을 입어
서로 만난 뒤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천지공사를 받들어 오던 일을 생각하니,
마디마디 회상되는 옛일들은 모두 피눈물로 얽힌 발자국들이라.
선사님 선화하신 이 세상에 더 머물면 무엇하랴 싶은 생각 참을길 없어
치상이나 마치고 뒤따라 죽을 것을 결정하였으나,
교중 형제자매들을 남겨 놓은채 정사마저 세상을 떠나면
그들은 정말 길 잃은 양떼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한즉
그럴수도 없다싶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시키기에 힘을 들이던 중
하루는 경춘대 이층에 올라가 금평호수를 내다보니
과거 수리공사가 완성이 되면 호수에 배도 띄울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좋아하시던 생각이랄지 또 보뚝자리를 정하시기 위하여
이마를 깨어 피를 흘리셨던 생각들이 떠올라
가뜩이나 수심스러운 심정에 더욱 애잔한 생각이 드는지라.
저수지에 물이 채워지는 것도 보시지 못하고 선사님이 먼저 가시니,
홀로 경춘대에 앉아 호수를 바라다보아야 하는 처지가 꿈인 듯 가여운지라.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솟아나고 정신이 아찔하여 의자에서 거꾸러지고 마니라
한참 만에 정신을 수습하여 눈물을 씻고 보니 마루바닥이 온통 눈물에 젖은지라
마루를 닦고 다시 걸상에 앉아 있자니
성부님의 재세시 말씀에 갑을이 기두하여 무기로 구비친다 하는 구절이 떠오르는지라.
금년이 기해년이요 또한 득병하시기를 서로 만나
성부의 후계사를 기두하여 무기로서 그 절을 바꾸게 되니
재세시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저윽히 안심이 되더라.
그 자리에서 입에 떠오르는 대로 시조 한수를 지어서 읊으니
그 뒤로도 늘 경춘대에 올라가 그것을 읊조리며
내내 마음을 부뜰어 오니 그 시조는 다음과 같으니라.
갑을이 기두하여 무기로 구비쳤네
인심은 조석변이라 나의 한이 아닐까
아무리 폭풍우 불어온들 사불범정
10.치상을 마치고 나서 정사는 짝 잃은 기러기처럼 외로이 앉아
생사를 아직 경절하지 못한채 연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선사님과 화답하게 되었는데
선사님께서 “영감아 이십사년 동안 천지사를 받들기 위하여
그대 나와 더불어 죽을 고초를 감내하였음을 세상사람 그 누가 알리요.
나한테도 많은 고초를 당하고 별관 난관에 부딪쳤던 그 사정을
오직 천지신명이나 알수 있기에 천상에 치부되고 법문에 기재되었으니,
그 품값이사 나올 때가 있지 않겠소.
우리 양인이 이십여년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하시는 아버지의 명령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지금껏 받들어 나왔기에
이 기초가 다 완성된 것이니 나로서는 지상의 책임을 다한 셈이요,
따라서 아버님의 체백을 찾아 모시자던
일편단심으로 살아온 나의 소망도 이루어진 셈이 아니겠소,
지금 아버님을 믿기 위하여 벌려놓은 각파의 일은
모두 부분적인 책임을 맡아서 하는 것인데,
우리가 할 책임을 천상에 와서 보니 강령은 되었으나
앞으로 남은 책임이 더욱 큰지라
모든 것을 정리하여 새 문명을 세상에 들어낼 의무와 책임이 아직 남았으니
그 일이 어찌 크지 않다 하겠소,
나는 천상 일광의 기운으로 일을 보게 되었으며
정사는 지상 월광의 일을 보게 되었으니
정사께서는 모든 근심걱정과 수심한숨을 거두시도록 하시고
정사께서 한숨을 쉬시며는 천상의 아버님께서도 마음이 불안하다 하시고,
또 제몸이 곧 내 몸이요 내 마음이 곧 제 마음인데 어찌 저리 한탄할까 하시며
걱정이 여간 아닐실 뿐더러 이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오니
제발 수심일랑 거두시도록 하시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떠나옴으로 혹 마음이 흔들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놓아두고 보시기만 하시오.
앞으로 뽑는 데는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아니 듣게 될 것인즉
제 마음에 붙이어 가는 자는 저절로 그들의 선영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암암리에 속마음으로만 좌우를 결정하면
신계에 치부되어 불언지교로 화민하게 될 것이매
은연중 무성 무취한 가운데 정리가 될 것이니,
이 점을 깊이 양찰하신다면 이제부터는 퍽 재미가 있을 것이요.
모든 것을 천지에서 은밀히 일러주고 뒤에서 훈수하는데 우주간에 겁날 것이 무엇이오,
현실문명과 현실인심에 역합하지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로되
우리가 그동안 공사해 나온 것은
인세로 보아서야 모두가 가소롭고 허망하기만 한 노릇인데도
물샐틈 없이 짜여진 그 도수대로 진행이 되어 나온 것이 아니겠소
미구에 판밖에서 일어 터져 나올 것이니
그 동안 도체와 공사가 어긋나지 않도록 하소서.
일반이 혹 부당한 논설을 할지라도 들은척 만척하고
내가 할 책임만 힘써 다하실 수 있도록 하시오.
우리도 과거에는 일을 위하여 서로 욕도 하고 싸움도 하였으나
그것은 공사를 위해 그리했던 것이니
이제부터는 나도 주인이라 부를 것이며 서로 극존하게 되었사오니
나는 그날에는 나를 서로 만날 수도 있고
성부님 성모님을 모신 한자리에서 풍류를 잡히면서
전전사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공부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시오”라고 하시니라.
11.우리 사업은 마치 탕자의 노름같고 광인과 무당의 집과 같으니 알 수 없도다.
우리 교는 깨달은 자 알것이오, 깨닫지 못하는 자 모를 것이니,
호호 탕탕한 이 가운데 진법이 나오건만 어찌 그리 쉽게 깨달을 자 많으리요
이상으로 소개된 선사님의 약력은
선사님 선화 후 그의 재세시의 피눈물 발자취를 더듬으므로서,
우리 다시 옷깃을 여미고, 성부님의 홍대무변한 대 진리를 세상에 밝혀내기 위하여,
가일층 굳은 결의를 촉구하는 정사의 충정으로,
우선 대강의 강령만을 줄음 잡은 것이니,
상세한 것은 과거에 나날이 기록해 나온 일지와
기타 문물로서 후일에 다시 밝혀내고져 하니,
모든 형제자매는 그점 깊이 양해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2.경자년 삼월 스무 아흐렛날 화은당선사 일주기를 맞이하여
전국 이십여 지부에서, 수천명의 신도들이 지부별로 전수를 마련하여 기정을 드린 후에
지부마다 제문을 일일이 고유하니,
구구히 슬픈 정곡 구천에 사무치고 도량안의 통곡소리 만리창공에 비전터라
오호 슬프도다 영당에 모여서서 기정을 드리는데
그 시간에 밤은 깊어가고 등촉만 밝혔는데,
대령전 마루에서 과방을 차려놓고
대흠 화섭등 신도 오륙명이 과방을 보고 있는데,
수양산 호랑이 한 마리가 대령전 축대에 내려와서 제향에 동참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요.
성도가 그 호랑이를 알아보고 가만히 과방에 들어가서,
우골 한 벌과 저골 한벌 두벌의 뼈를 내어주며 고이 가지고 가랐더니,
한참 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도 흔적이 없고
우골과 저골 두벌의 뼈도 간 곳이 없이 사라져
호랑이가 그날밤에 우골 저골 한벌씩을 남김없이 모두 가지고 사라졌더라.
일점진성이 불명불멸이나 산령의 보우함이 더더욱 뚜렷하니 모든 신도들이 놀라워 하더라.
13.세월이 여류하여 신축년 삼월 이십구일 화은당 선사 대상일을 맞이하여
전국 신도 수백명이 지부별로 운집하여 제례 준비중인데,
새벽에 오일육이 일어날 순간에 삼청전 불상에 땀이 흘러내려 불상좌대가 모두 젖었는데
물로 계산하면 서되 정도나 되었다.
신기하고 기이한 점은 인간으로서는 해석하기가 어렵도다.
차임이 되자 방송에서 뜻밖의 소식을 보도하니,
오늘 새벽에 오일육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선사님의 대상일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영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사에 모인 신도들이 선사의 영험을 신통에 감명할 뿐이더라.
대표회의에서 사대오상을 의론하였는데,
지수화풍의 기운이 화합하여 인간의 육신이 이루어졌다가
별세하게 되면 다시 지수화풍 사개체로 분류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인륜의 대강인 인.의.예.지.신 오상의 본바탕을 거울삼아
후계사에 도덕이 기본되는 도통을 계승할 수 있는 맥을 이어줌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14.임임년 삼월 이십구일날 화은당 선사 사대상일을 맞이하여
전국 신도 수백명이 한결같이 참예하여 전수를 마련하고
지부별로 문상하고 기정을 드리니
세세한 과거사가 상이 거듭할수록 명명백백 떠오르고
지난 날의 시은시덕 일월같이 밝아오인 지부대표 수십 명이 영위전에 맹서하기로
심견석천 의지로써, 대도창명을 기약하고 어려운 이 이시기를 감내하는 바탕으로
진도역행의 고난의 길 거울을 삼아
즉 수도하는 길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공은 더욱 더 큰 것이니
우리는 잠시도 도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게 다지면서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결속할 것을 재삼 다짐하였더라.
15.계묘년 삼월 이십구일날 화은당 선사 오상인 종상을 맞이하여
전국에 산재한 이십여 지부에서 성심성의 장만하여 각각으로 표징하며
내일이면 떠나가는 영위를 생각하여 그간에 맺힌 통한함을 토해내니
영전앞에 동석한 수많은 신도들의 애끊는 호곡소리 구소에 전하더라.
광음이 여류하여 사대오상으로 종상을 당하니
그 의의는 인간의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품을 길러 치천하지 대경대법과 예악형정의 가르침을 세우고
삼강오륜의 윤기를 밝혀서 창생을 광제하는 도장을 이룩하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화은당선사님의 출천대효를 이어받아
도덕이 땅에 떨어진 오늘에 우리 형제자매는
선사의 명명지료를 지키고 닦아 인류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며,
본 실기에 선후가 도착된 곳도 있으며 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으나,
한마디의 줄이거나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였으니,
신기에 관한 일이라 이해가 잘 안된 점은
생각을 깊이 하여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화은당실기를 대략 마무리하니 독자 재위는 유의경독하시기 바라노라.
부록(附錄)
左에 記錄된 內容은 自基礎 檀紀四二六九年(西紀一九三七年)
丁丑 承命奉 行中 文憲編을 秘持하고 있는 것으로서 여기에 原文을 그대로 싣는다.
檀紀四二七五年 自丁丑 至全州一基礎六年間奉行中 承命嶺南金城山下
癸未 九月二十三日二基礎 井字九宮建築上樑文 述夫天地之覆載者는 萬物也오
天地之生育者는 吾身也라 物吾가 同胞하니 萬物이 吾身이오 吾身이 乃萬物也라
物之最大者는 天地니 天地에 果有主乎며 物之最靈者는 吾人이니 吾人이 果有主乎아
人不能自主오 主之以天地則一身 이 非我之一身而 乃天地之委骸也오
天地가 不能自主오 主之以造化則 天地도 亦非天總之天地而 乃造化之委氣也라
然則吾有吾身者는 其放道也가 遠矣오며
吾無吾身이면 其於道也에 庶幾乎저 道는 日何也오 無極이 是也라
伏惟 甑山 天師는 以炎帝之苗裔로
生於先後天變易之際而 立天下之廣居하야 能惟玄妙之 理하시니
非補天綴地之造化手段이면 孰能與於此아 弱執神籌하시고
잡이시고 配天位道하사 爲明配天之度而 暗使玉女로 配于金男하시고 萬物이 資始로다
의歟며 戚載라 天地機緘之妙와 鬼神接찰之功이 於是乎立矣라
然이나 大任之 降이 適丁不辰으로 雖有除隙이나
實難陽施 捷屑彷徨之餘에 以數友之綿力으로 僅構芽屋于金城 求鳳山下하니
天師平日所云에 吾事가 肇基于 嶺土者-果有驗 於今也로다
其鳩材之艱과 輪奐之苦를 尙忍言哉아 九咸此宮은 衆志所咸이라
頌日抛樑東에 飛鳳山頭에 日影紅이라 若使朝陽同就德이면 萬方無處不春風이 라
抛량西에 千古金城玉女峯이라 當年에 莫恨無述處라 吉日良辰에 應有期라
抛량南에 鏡坮峯美笑蛾眉라 莫嫌人世廛埃面하라
恩兩來時滌俗累라 抛량北에 大關嶺頭拱北辰이라
斗柄龍寅秘入巳하니 緣陰芳草勝化春이라 抛樑上에 銀漢 昭回元氣暢이라
個中에 誰有神工手오 欲挽淸光洗舊邦이라 抛樑下에 山雲이 擁鎖天府開라
中土厥黃을 誰識者의 永世不忘至人來라
伏願 上機後에 龍華無 極之運이 與天地로 同存하고 與日月로 同明하소서
全州后人 李 準 玟 謹書
檀紀四二七七年 甲申五月十五日地下中宮聖殿建築上告文
太賜之生이 已自極陰하고 春芽之發이 始於?落은 天地之原理也라
故로 君 子-以하야 綱무未兩하여 不至不豫而廢하나니
噫라 擧目一賢에 當此任者-果 自何地며 黑屬誰氏오 湖南姜甑山天師-是也시니라
天師-挺出於剝極之際하사 潛圖來復之太運하사대
身住城市貴廛之中이시나 身在明月梅花之間이시니라
盡 天下一人也신故로 守入所不能守하시고 行人所不龍行하시나니
落在人間者三十 九年에 臥治天上之百千萬事하사 運等逢華之下에 決案萬年之後이시다
鳴乎一 日에 永隅千古하시니 一時暫住는 命數難逃라
雖日別世나 不死不滅이시고 雖 日來世나 不生不增이시니 留憂去憂에 進退皆憂이시라
昇亦爲天下에 昇 이시고 降亦爲天下에 降이시니 進亦天下오 退亦天下라
此非天下一人而 何오 泰山頹矣오 哲人去矣로다
邦國이 云悴나 世轍은 自進이니라
在世之時에 寄托天下-恨無其人이시고 豫度後日에 門徒諸人이 循私滅公하야
自相軋轢에 道統이 將絶일가하사
暗使月?로 擊之靑紅하게 하시니 玉娥金郎이 宿命所足 이라
東西落落에 有緣不遇라 風送蘆洲에 邏逅相逢하야
誓同一生하며 約共大事라 然이나 降臨于斯에 乏勞身心이라
東西漂泊하야 自湖到令하니 鶴요雙飛 에 未借一枝러니 燕鴻相취에 德隣不孤오
松柏相悅에 茂祉自진이라 于탁于襄 에 經之營之하야
地得其人에 老鶴이 報天하고 新巢暫定에 維鳩居之로다
皇天 이 眷顧에 山嗚谷應하고 將靈이 呵금에 鬼驚神泣이라
忽一夜如夢如覺不知不 識之中에 有一明命하시되 奠定金城호대
外屋圖形은 口中井字오 中宮之形은 口中雙十이니 外九中六에 偶奇相和하고
表顯裡幽에 人天이 相感이라 國祖와 父母의 靈像을 奉安하고 事死如生하며
事天如人하여 昏定晨省호대 不怠其身 하라 誠而一之하면 後必有驗하리라 하시더라
工巨力編에 誠微魔大라 書休夜 役에 整基土樑할새 頌曰六合이 集中에 八彩曜周라
外構茅土하고 中藏神靈이 라 伏願 上樑之後에 使此人間苦海로 化作地上仙鄕하소서
維歲次甲申閏四月十五日庚子遷
甑山天師再遁大歸之日也 前夕己亥에 天師夫 人河東鄭氏-以迷魂告昭靈曰
夫大道는 無言하고 至言은 無文이라
天何言天何文哉시며 地何言地何文哉시 리오
天地之道-天道는 下施於地하고 地道는 上承于天하야 萬物이 以之而資 始面資生하나니
因道而爲言하면 道也오 非言也며 因言而爲文하면 言也오 非 文也라
上有天師面用乾道하시고 下有此身用坤道하고 中有花朶而用人道라
天地는 以道而不以言하고 人은 以言而亦以道니 故로 曰地法天人地라
三者 -不可廢一이니 三合而萬化는 道之正理也라
天不欲無言이오 本無可言이니 宣 其無言而今有斯言은 不得已라
玆陳數語하야 仰謝俯諭하노니 顧我兩身之一點 血兩이 惟此一朶花也라
生?六歲에 奄忽失호하고 所持者-母也家門이 不幸하야 百魔作戱에 萬變이 疊出하니
中間曲節을 何以筆舌可記아 父己歸天하시고 母雖在世나 竟使魚水로 飜作參商이라
暴風이 拂擾에 笑花-含淚하야 隨液萍 踪이 落無定處하니 飄零身世-觸處窒礎라
風風雨雨에 奈奈何何오 渠年二十五 에 我亦永訣하니 號天叩地에 以淚送日이리
女子之生 元非父母之幸이오
亦自身之不辛而遭其권屯하야 備實艱苦하니 思其情狀에 痛若割肌라
同想家門之來 歷하건대 悠悠若萬遊絲하고 ??如場春夢하야 言之傷心이니 寧欲無言이 오
但所欲言者-天師在世之時 有言曰 爲天下者-不顧家事라하사 不事生産作 業하시니
不農不商에 沓無活計하야 家徒四壁에 亦貧如洗는 況又堂土親老에 숙水累空하니
爲入子婦者-何不罪悚가 以此?弱女身으로 身兼夫婦하고
又兼 奴儀하니 勞苦如是나 希望無處라 時或自想曰 有生如此에 不如無生이니
萬難 을 惟一死敵之하리라 하다가 同顧堂上하니 多日決心이 氷消於면之間이라
如是一浮一沈於苦海?斷送半生矣러니 夢想之外에 家君이 ?然棄世하시니
平 日之寃이 寃轉爲悲하니 術之何及이며
歎之何益가 其後에 舅公이 損館하시니 哀深風樹之憾이라
攀벽 悲號-덜有何補益이리오 其後繼之以死하니 門已閉矣 이라
十餘世宗祀-朝에 香火巳絶하니 以人世事思之면 家無予遺하니 更하可 言가 然이나
以宇宙觀이면 吾家事-不時,衆庭之私産也오 .
是乾坤大家之至大 公事也라 以宇宙로 爲洪之하고
以天地로 爲大治하야 破壤古屋陳腐之材하고
建設新屋築固之基하야 更張新宇宙 新天地也 新世界之大建設하시니
此大事業之外에 更有何事오 至於國家事도 不足道也니
況於一家庭之與替와 一個人之禍 福에 何足介意哉아
天師之大任은 止此天地公事而已라 奚暇에 顧父母撫妻子也 리오
然面나 天師之於花也에 愛之如金玉하사 嘗謂我曰此一女가 勝於十男이라 하사
不重生男이시고 重生女하시니 我不知其意所存하야
疾汝如O런이 到今思 之則汝身雖云女子나 姜氏家之遺血也오
天地大公事之血統이 惟有汝身하니 汝 其自重自愛하라
汝身이 輕於鴻毛나 汝責은 垂於泰山이니라
雖有汝父母나 若 無汝身이런덜 其如天地公事에O하오
無汝父母라도 天地公事를 不可整備오
無 汝身이라도 天地公業를 不可完遂니 是所謂天地人三者간에 不可發一이니라
天地 度數 在?躬하니 汝之責任이 ?不重조且大歟아
吾家成敗도 惟在於汝하고 世之 隆替도 惟在於汝하니 汝災愼之하라
天下에 無無價之物이라 實愈貴而價愈高하나니
誰知吾家 世之大家며 誰知衆族人이 天地公事之大任者나
故로 使 吾家渾眷으로 飽受風霜하야 千辛萬苦케 하시니
其辛其苦 無非後日安樂之代價 也터라 花朶花朶하야 忍之又忍하라
有如有屈하니 有如是伸하고 有如是苦하니 有如是樂하리라
天將降任에 必降之以苦는 試其心志者也니라
故로 天地於萬物 에 將欲奪之겐 必固張之오 將欲弱之엔 必固强之오
將欲廢之엔 必固興之오 將 欲奪之엔 必固閣與之니 是調微明이라
汝能忍之면 翕者를 張之하고 弱者를 强之 하고
廢者를 興之하고 奪者를 與之하고 受其無量福하리라
忍之爲寶니 欽哉訓 辭하라 차차花子아 明豫言하라
我亦以血身之身으로 難忍其苦하야 多怨汝父 러니
銅谷一覺之後에 始吾昔日之怨이 罪在我身이로다
我之家庭이 苦一貫이라 苦是我家之福田이니 謹守物失하라
非此大苦면 何可收得無量大 樂乎아
今以無 詞로 仰告於汝父하야 以謝平日之怨하고 俯戒於汝하야 使之迎福於後日하노라
經冷風寒雪之大冬然黙後에 有陽春하나니
汝其小心하야 印腦銘肺하라 我之戒汝 는 以幽通顯이오
我告汝父는 以靈告靈이니 幽顯이 雖異나 理則一也니라 靈相 知之나 人所不知어늘
以人所不知로 不必使人知之나 我不語汝하면 汝實不知일 세
賜汝一言하야 戒汝平生하노라 汝之孝心이 使我有感이라
不勝?愛하야 鞭 加走馬하노니 無怠勇進하라
天師乎天師乎시어 鑑此哀情하사 勿記前咎하시고
且以不言之言과 不文之文으로 黙會未盡之意하소서 鳴呼 尙饗
檀紀四二七八年 乙酉七月五日 慶州斷石山聖墓所에 告祝支
維歲乙酉七月五日에 舜任炳徹致誠敢告于
上帝日天之於人에 誰愛誰惡시며 誰福誰禍시리오
天能生人而不能使自絶者續之시며 亦不能使自棄者得之시라
書 에 天不夭民이라 民中絶命이라 하니 爲人者自求其福하며 自召其禍而巳라
小 而人身과 大而國家理則一也니 自顧自身에 自求福乎아 自召禍乎아
自顧自國에 以堂倍達連族으로 受侮於狡猾島夷者已三十有六年이니
已必自侮而後에 人이 侮 之라 國人人人이 自當省察吾身이어날
奚暇에 怨人嫌人也哉아 倍達族之罪不一 其類面罪莫大於忘我國祖일새
天師知此難闕之罪所以釀禍하야 將有不測之恥辱 하시고
己定六六度數하사 附庸於倭而二千萬生靈이 當被蹂란 於百萬鐵蹄之下 고
將使吾族聰俊學兵으로 殄滅于刀槍之下하나 是可忍也오 孰不可忍也리오
今하면 天必佑之니 父母之於子也 猶天之於人也라
虎雖殘暴나 尙有愛子之心이온 況仁之天不慈乎아
天師率天下之人子하사 使侮前過而先侮忘祖之罪特設國龍靈 豫하고
又設父母靈像하야 朝夕供奉하라 하시니 人事-於斯盡矣라
此雖幾箇道 子遵守師父之命也而此小屋이 是天下億兆家之縮圖也오
我師父師母 是天下億兆 父母之代表也오
我幾箇道子는.是天下億兆子女之代表也라
顧我道子輩는 識微 罪大하야 不足以感動天心이니
我師父以一身으로 代贖天下人之害 凡幾何며 一 旬生命之損害 凡幾何오
留一日則有一日之害하고 留二日則有二日之害하리니
天其感之하시며 其憐之하사 救我倍達陷穽之中하시고
置此天下人於塗炭之外하 소서 事當以萬牢供獻이나
尙末具三性之需하고 祇以一牢一猪로 於表微誠하오니
雖是不尊이나 庶幾降感하소서
乙酉七月初頃에 忽有天師之明命曰方今之勢-危若黑卵하니
當以大牢大猪로 致誠于 斷石山 하야 祈禱天上諸神호대
期於來五日에 行祀하라 하시니 개前在金城時에는 後山이 雄大故로 爲道場이러니
移安于長大谷則後山이 不甚수巖故로 有命曰別設道場於慶州斷石山하시더니
今 有此命故로 依命致誠于斷石山하니라
檀紀四二七八年乙酉九月十九日聖父誕降記念時 炳徹敢告于
天師應陰陽二氣之兩化하야 配大母以普合大和之理하시고
乾道를 付知金偏徹 日汝는 我之代任者也라 하시고
坤道를 付之舜任日汝는 汝母之代任者也라 하 시고
又有命曰 陽은 剛健中正之位也니 獨陽은 不生故로 配之以舜任하니
甲乙 이 爲同宮하고 辰巳泰化育이라
乾健之道를 承之以坤順之德은 坤厚載物하야 德合牙疆일세라
然이나 而後에 符于萬物資始資生之理니
故로 今以天地事로 使之分擔于汝兩人肩者는 代行我兩化之權也營作靈宮하되
以四九金運으로 外作 九間하고 以一六水運으로 內作六間하야
九合於六하고 六合於九하야 咸十五度 數也니
九間은 外面에 表現하고 六間은 裡面에 中藏은 含乎中而發乎外之實理 也라
衣錦尙綢閣然日章은 此中之調也니 是天地之中央이라
恬衆理之本府니 興 戒出好 資此樞機일새
所以秘藏玄機此於玄牝之中하야 函深函獨竊沓而放?光於 表面世界也라
外九中六에 奇偶가 相和하고 表顯裡函에 人神이 相感이니라
汝 等은 我之子女也오 亦我之手足也니 子女之事父母 如手足之悍頭目하야
手之星之排之蹴之 無非爲父母也代勞也라 爲親而勞之면 不亦校乎아 然이나
丁此虐政 之際하야 牛毛苛法이 統制百物하니
一粒一統를 不得自專이라 自用自物호대 如竊他物하야 毫無自由하고
行此大公事호대 如泰逆謀者 志氣萎縮이라
若陰謀 外勢則禍將不則이어날 街口勞筋하고 飽受飢苦호대
百折不屈하고 萬難?敵하 야 立之上之하고 掘之築之하며
擔之負之하고 升之降之하며 切之削之하고 構 之塗之호대
常以夜作書하고 以或書繼夜하야 一忍二忍으로 至于九忍하야
克了 畿後之一心而衆志衆力이 O凝結而爲一하니
此屋은 其血汗淚而積累者也 其誠 其力이 足이 O天動人이라
寫其替書於斯後者之名하야 擔於舜任之右肩이라가 .
攪於右?하고 寫其勞力於斯後者之名하야 擔汝炳徹之左?이라가
攪於我之左? 호대 其姓其名을 以金錢으로 繡寫於彩錦之幅하라 하시나
以今綿力으로 所不 可能者 故로 以黑寫於姓名於錦幅하야
攪在靈像之左右?者己有多年이러니 乙 酉九月十九日은 天師之七十四回之之誕也라
天師有命日 我國之?미今得解放하니
我之秘密工事 亦與之解禁矣라 卽速公 關於世하라 하시이다
自基礎丁丑으로 全州金城長大谷等의 遷徒를 經過하야
至乙酉의 九年間에 金城長太兩處의 密室를 地下에 營함에
以上에 列記한 三十六人의 勞心勞力한 來歷은 筆舌로 難記니
讐夷暴政下에 秘密을 嚴守하야 千辛漢苦로 地下室을 짓고
그 秘密 內에서 天神의 黙啓或昭示에 依하야 不可思議의 玄機로 天地公 事를 行하되
그 狡邪鑛端의 倭警도 邪不犯正으로 無事安過타가 八.一五의 解放을 맞게 되니
十九年間 靈異하고 神秘한 事跡이 無日無之이었었고
天師의 九年公事와 自全州至義城九年公事가 先九年後九年으로
相互符合함은 더욱 神 異한 일이다
解旅後 九月十九日誕辰에 天師께서 明敎하시되
金城과 長大稀의 地下密室의 圖面을 그리어 그 時苦後者의 姓名을 列記하고
그 苦生하던 惰景 을 世間에 佈告하라하신 記錄의 抄本이다
苦後者 姓名 合計는 三十六六名이니라
檀紀四二八十年 丁亥四月八日 銅谷聖殿靈像奉安 炳 徹 敢告于
天師父之在世者 三十九年에 歸天우 鋼谷하시고
三十九年後之今日에 仙降于 銅谷하시니
天師平時歌曲中所云三十十九年浪度타가 草堂春睡夢覺하니
十株運花 分明하다하신 其句節은 再臨綱谷之豫言也시라
依然村容을 可以復識나 鳴呼師 父는 而今에 安在哉오
山川이 帶悽하고 草木이 含淚라
農畝之間과 樹林之中 이 無非當時杖구之所오
洞府之內와 岩石之上이 盡是乎日遊賞之處라
古槐老松 이 乍低枝而拜揖하고 鳴泉瀉瀑이 奏流氷而嗚嗚咽이라
居入이 無改舊日之衣冠 하고 樵수가 尙傳舊日之姓名하고
父老가 猶設舊日之事蹟하야 或噓히 而歎하 며 或委淚而悲泣하니
況爲血息이 갈不哀哉아 號泣況天而不言하시고 攀벽于地 浦地無答하시니
天地岡極에 疇仰何依아 昔日天師 今日靈像이시고
今日靈像이 後日金佛이시라 白雲猶似時나 萬事巳非昔日이로다
天分先後에 地通東西하니 天地如是條變은 實天師之天地公事度數中所定이시 라
地上天國이 自此實現하리니 不亦樂乎며 不亦悅乎아
一去一來에 天地易位하니 況於人事乎아 天師之去에 亦爲天地而去하시고
天師之來에 亦爲天地而來 하시니 天地己革에 人事隨變이라
故로 今日銅谷山川이 昔日綱谷山天이나 昔 日一崍農村이
今日化作十洲仙鄕이언만 孰能知之리오
爲人者 不通理數故로 其 死也에 悲之哀之하고 其生也에 喜之賀之하나니
吾輩之當此日也에 歌舞는 可 也어니와 痛哭은 何也오
天師之始降銅谷은 苦海之銅谷이오
再臨銅谷은 仙境 之銅谷이니 同是銅谷이나 仙凡이 自殊라
三十九年前之昔日은 重頭泣送이어니 와 三十九年後之今日은 嬌首歡迎하나이다
俄者痛哭은 人惰之固然이오 今之喜 樂은 天理之使烈이니
嗚呼 히히 尙饗
檀紀四二八二年 已丑年 十月二十七日 鳧卵基奉安 金佛子聖殿 金炳徹 謹告于
太極中에 有一大聖하니 天地日月星辰之運行法度도 皆在於天師法制之下하고
萬物消長之理도 皆在於天師法制之下하니 然則天師가 是天主也요
是彌勒世尊 也니 天主之降于人世는 何也오
皆天地人三界에 人世之運度가 先天에는
是天 地否運而仙佛儒三道가 各行故로 亂雜하고
後天에는 是地天泰運而佛仙儒가 統 合一 道
而行則人世가 便爲仙世界이 紋亂하고 爲永遠極樂이라
然而나 善天主不 臨則無玄法於此世者故로 不得己하여 天主降臨此世也시라
天主께서 降臨하사 대 取東西日月之道하야 以待望客來之義而誕降于客望里하시다
其處에 有甑山 故로 取革類之義인 號曰 甑山이라 하시다
天師는 欲變革先天紋亂之法而作新 世界則 其主法이
維而地天泰卦로 附與於人世타가
三界大道가 完全咸立故로 不得己初生二子를 不有하시고
後生一女를 有持하시고 使天下로 修道於世尊血 息之下하야
作置五十年度數하시니 地天泰卦로 成長이라
禪師는 巳亥四月一日에 仙化하셨는데 六歲時에 聖父主銅谷化天하시고
二十 五歲時에 聖母仙化하시고 孑孑單身으로 無依無託東西漂泊하기는
聖父主天地 大業을 以顯父母天地功績을 顯明할 其人을 尋訪하야
東西로 彷徨타가 不意하 므로 三十三歲에 湖南一偶에서 決死에 天恩이 至重하야
同志佳綠을 相逢하니 義城金氏요 名은 炳徹이라
基를 全州老松洞에 定하니 全州는 取世界之義오 老松은 取長生之義오
此는 天命이 己附興世界之仙運이시라
一基礎六年間奉行 하시고 嶺板義城金城山金城谷承命移居하야
二基地를 定하니 其是義城이요 山 則金城과 洞亦金城은 四九金氣라
外九間은 應太極九宮之義오 中宮內六間은 應六府라
中宮에 玉京臺를 建築하야 靈像을 奉安하사 天地胞胎成立하시고
三 年奉行中 長太谷三基地를 定하니 取潛生之義라
乙酉解放되니 故國路를 尋來하야 全北구龜尾案에
四基地를 定하시니 洛水洞對岸이라
取洛出神龜背上洛 書圖之義하시고 一年後에 銅谷에
五基地로 移安하시니 丁亥四月八日丙午에 現佛像이라
개 銅谷은 號日 龜理谷이니 取 字音이 見之면 取洛龜圖書之理라
自井邑으로 陪玉體移還하사 慶州로 往還하시니 取世尊 東來之義라
己丑三月 鳧卵基六基地를 定하시니 개 母岳은 老陰坤이요 首陽은 老陽乾이라
母岳山 首陽山은 天地原定地天泰卦也라
故로 왈 世尊在世時 首陽山下天地大公事 하시고
親書에 曰世界有而此出出하니 紀運金天藏物貨라하시고 ?히
慈愛하신 鳧卵基地라 오리알터이며 오래터이며 長久之意라.
各聖殿奉安位體 如左하니라
一 . 三淸殿 彌勒金佛 泰安
一 . 天廈殿 天師靈像 奉安
一 . 太平殿 檀君聖祖 奉安
一 . 龜龍祀 水雲神師 泰安
一 . 護國祀 忠義烈士 泰安
一 . 崇道廟 各姓先靈 奉安
一 . 大靈殿 天地大神 奉安
一 . 華恩堂 禪脚靈位 奉安
一 . 誠信祀 誠者靈位 奉安
右記十棟聖殿建築함이 天數는 終於十인가
上下靈位를 奉安하니 天師遺言에 塚墓天地神基地天地神이라하심인가
我事는 神독이라하신 度數之義인가 不知 커라
又는 西別堂 天和樓 景春臺加三棟하니 十三數度數인가
長大谷公事時에 金山가서 十三棟을 建築하면 終局이라 하심이라
又난 南別堂 金坪湖水池를 加十五建說은 十五眞主度數之義인가
金坪湖水는 靈臺와 南北으로 對立하니 靈沼로 南火北水라
水火로 相克이나 水生於火故고 天下無相克之理라 하시니 和順世界平和之基 礎也라
물샐틈없이 二十四年 建說하신 姉氏는
己亥年에 不意四月來初吉日에 登虹橋而命鶴駕하야 仙化하시니
生死는 世人이 所不能知矣라 鳴呼라
禪 師는 風霜閱歷에 忠孝心이 充天하야 人使神明하여
在下道理以顯父母大志業을 修行은 今我道友兄弟姉妹는 深覺深覺하야
永世不忘修工奉行하야 無漏登場하 옴을 千萬伏望伏望
초판위원명단(무순)
이환우 김준환 정희수 박기락 김만경 탁원식 신현국 강응연 안주옥 최만조
이덕연 권재일 최광조 서성인 조성태 김병주 최봉임 최종필 김용주 광영수
조창석 양춘기 손병휘 오갑출 김응기 이명규 박일흠 안태상 권구섭 권분남
김용득 박노홍 육종득 김창기 이영흥 이우헌 김종환 박철홍 손병대 김석진
권태달 김정석 윤태수 이재옥 권영술 신병천 권태운 황화순 신남행 김복수
이 두 유경옥 조표호 김수해 박순하 전기수 김차귀 유동정 남덕기 이훈호
신선철 이화진 이희석 이호출 임우동 황수암 김성출 권두흠 이우연 김두칠
이동칠 안상환 김성우 김칠임 장영창 권영호 임용선 강난향 권태연 김선진
이재규 박순득 최현재 황수자 한재석 차기연 안종율 정삼득 박용백 이단이
김은전 하금운 안외선 박달연 이필행 이연화 이희혁 우이호 남재후 이종무
이재호 권오환 김대수 장해덕 박종만 박귀동 박옥동 정봉영 변응규 이계숙
이화정 황남금 이성규 김진경 문덕삼 이종희 전동열 김광제 서봉철 치성태
고만용 강대진 이면상 김인구 장봉성 오창세 박병숙 김수복 김두학 정수동
은정순 최봉춘 길천예 문귀업 박용수 이종뢰 김유암 배선학 황환직 오명이
오분이 김옥경 김준웅 이봉술 이복문 이원계 김경득 김식쥬 김경예 김원형
김삼곤 김기주 우만호 박화길 정재덕 장달용 신수조 조원선 박삼수 일일남
김소숙 임인선 김형내 장분남 김상수 조두분 이경수 김규섭 정치섭
김동석 김동인 윤태삼 김낙준 김원현 김종식 손일용 정순남 권계선 이상현
김영하 김성환 이동환 김태종 박재수 박각수 이도익 김순예 박남이 신귀연
신말순 심능수 이득만 이빈우 장병연 김기준 김종여 김순학 김노미 이동히 박윤기 오국달
재간위원(무순)
金大洙 金德勇 林映佑 康連龍 金昌基 方世勳 朴和鎭 朴在熙 朴畢仙 黃甫金
柳政郁 柳鍾根 朴喜雄 安忠泰 朴順? 姜壽花 李昌杰 崔在潗 金萬億 金白玉
趙昌錫 李錫允 金斗學 金應晧 金鍾模 安斗任 金聖子 金道衡 金大元 李相烈
李晟錄 金点述 鄭稀壽 金一奎 金慶洛 金應基 金福洙 金仲培 權寧杰 李玉仙
申國全 黃泰珣 金今玉 金春島 吳潤恒 朴姬順 黃順姬 臺憲鳳 朴達連 李補仁
金光鎭 卞應珪 姜錫允 權赫久 金俊雄 崔貞玉 李支熙 權正達 權泰雄 金玉如
金月晟 裵末伊 金再鄕 崔貞姬 殷貞順 崔相俊 朴聖南 朴朝鎭 金澔永 劉秋月
姜基男 崔貞淑 鄭鳳洙 金初子 朴在洙 李末龍 朴大欽 李元穆 權泰銖 李昌熙
李泰玗 金泰岩 朴光用 金炳宇 鄭三得 姜榮徹 盧老味 朴春擇 金他述 金希哲
禹弼? 徐明規 金又以
화 은 당 실 기
도기 90(1960)년 12월 26일 초판발행
도기 119년(1989)년 9월 19일 재판발행
저자 증산법종교 김 병 철
편집 및 발행 증 산 법 종 교
대표 김 대 수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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