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2] 내 고향 연못을 회상하며(2) - 대신사의 차녀 최완과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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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2017. 12.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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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내 고향 연못을 회상하며(2)
- 대신사의 차녀 최완과 후손들
필자 / 가혜당 이영혜_송탄교구
이 글은 수운 대신사의 차녀 최완과 외손 허균과 그 자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수운대신사의 외손자 허균(許均,1891~1959)은 대신사의 차녀 최완(崔婉, 1857~1926)의 큰 아들이며, 허균의 셋째 딸 허현은 이 글의 필자 가혜당의 모친이다. 필자 가혜당은 십여 년 전부터 집안 내력을 틈틈이 기록하여 본지에 기고하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실에서 『도원기서』 등 여러 기록과 대조하여 각주로 처리하였고 가혜당이 제공한 사진을 첨부하였다./ 편집자 주
허균의 네 딸과 막내 허선(1936년, 괄호 안은 나이) 왼쪽부터 허종(9), 허현(12), 허정(21), 허경(15), 앞쪽 허선(3)
사진01 청산 한곡리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해월신사께서 갑오년 9월18(음) 총기포령을 내린 것을 기념하여 세운 탑. 가운데 모자쓴 이가 필자
청산 저수지 아래 9월 총기포지에 지난 5월 수원교구 동덕들과의 기념사진입니다. 공원이 잘되어 있데요. 남달리 감회가 컸지요. 완 노인 4남매의 청산 한곡리 그 곳이지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그 해 가을 만삭 때(완의 둘째 곤을 임신했을 때)의 기막힌 혼란이 어떠했을지요. 어디서 어찌 해산하셨을지. 구암장**께서 늘 애달아 한 덕에 모두 무사했음도 올해 들어 새삼 묵상하게 됩니다. 완께선 청산 한곡을 못 잊어 늘 기억하셨지요. 정貞 큰 이모는 문막서 올챙이국수와 메밀 총떡을 먹던 맛을 늘 얘기하시고요. 선 외삼촌은 청산 한곡리 사실 때를 노래하셨다네요.
** 구암장은 김연국. 구암은 한때 해월신사의 따님 최윤, 신사의 부인인 의암성사의 여동생 등을 식솔로 두었다. 3.1혁명 후 재정형편이 어려웠던 천도교단이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스승님들의 후손들을 보살핀 구암의 공은 인정되어야. 또한 김연국의 시천교는 일진회 이용구의 시천교와도 달랐던 만큼, 시천교에서 전개된 교리와 역사를 천도교단에서 포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호에서 상술한다.(편집실)
정貞 큰이모 내외 사진. 맨 위에 대신사의 존영, 그 아래와 부모(허균, 이봉화)의 사진을 모시고 청수상과 과일 등 간단한 제물을 놓았다.
보은동학 공원 가보고서야 그곳 북실에서 하룻밤 사이(12.17~18) 동학군이 몰살당한 때가 1894년 눈 많이 온 연말이란 걸 알았지요. 이전에는 늘 허찬께서 강원도 홍천 자작고개 어디에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근래에 와서야 여성동학다큐 강원도 편 김현옥 님이 지은『님, 모심』을 보니 홍천 자작고개 동학군 집단 몰살지는 제삿날이 달라요.**
** 홍천 서석면 자작고개 전투는 갑오년 10월 22일(음), 보은 북실 전투는 갑오년 12월 17~18일(음), 허찬께서 돌아가신 것은 보은 북실 전투 직후인 12월 20일(음)로 최완께서 허곤을 출산(1894.11월, 음)한 지 한달 정도 뒤. 그때는 동학혁명 끝 무렵으로 혼란스러운 때라 허찬의 묘가 어디있는지 알수 없다고 한다. (가혜당 기록)
이은상(필자의 부친) 회갑 사진(1981년). 월남한 독실한 교인 이적규(이승민동덕 부친) 님이 주문을 써주셨다.
균 어른의 큰 아들 허진 은 경찰시험 쳐서 경찰생활하며 포천 객지에서 신혼살림하다 경무대 후생사업계에 근무하며 중앙청 관사 내에 신접살림을 차렸다네요. 어지신 본처 등지고 서울에서 딴 살림 차리고 시천교당 왕래하며 서울과 배방을 오갔다지요. 외로운 향처를 두고 두 살림 가장 노릇의 짐이 버거웠고, 직장 잃기도 하여 나락의 깊은 계곡으로 바빠지기도. 영등포 서사 ‘사무장’의 말년이, 모두 서글픈 가시밭길이었네요. 진鎭 외삼촌 1930년 혼인 뒤, 딸 다섯 잃고(주로 폐렴) 소사에서 1935년 생 정숙 생길 즈음, 갑 아우 함께 살았다네요.
똑똑하고 날카롭고 명석한 갑鉀 외삼촌, 경찰 시험 합격하여 훗날 총경, 서장으로 지내셨지요**. 문산에 거주할 때 1937년 이후 증자, 미자, 은자 낳을 즈음 부부 불화로 기어다니는 셋째 딸 은자를 마릿골 큰 엄마 손에 두고 이씨 외숙모 친정으로 별거했다네요.
** 허갑 : 평택경찰서장, 강화서장 등을 역임
대가족 부양하는 막내 외삼촌 선은 혹 쌀이 모자라, 온양서 2가마 사면 일꾼은 1가마 2말지고, 4학년 때부터 양손에 나누어 8말을 들고 구온양에서 산등성이 길로 오고, 두 형들(허진, 허갑) 왔다 갈 때면 어김없이 모산 3거리까지 밤이고 호두 보따리 들고 배웅하느라 오른 팔이 늘어졌다고. 높은 산 중턱 지게로나 오르던 짐이었는데. 일꾼보다 더 고달프게 잔심부름(비서 역)으로 대신사 외손자인 허균 님 생전에 기념식마다 발로 소식 전하느라 분주했다지요.
1950년 6.25때 모두 마릿골로 피신오니 하루에 쌀 1말이 모자라는 많은 식솔들. 수철리 산골짜기도 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네요. 한밤에 군인들(국군) 배불리 밥먹고 나란히 총대 세워두고 연못가에서 모두 씻은 뒤 사랑채에서 곤히 잠든 찰라 누가 다급히 깨워, 마루서 놀라 깬 균均 어른 대숲으로 월담하고 2-3명은 그 자리서 인민군 따발총에 난사당한 총격사건이 벌어져, 몇몇은 피를 흘리면서 뒷담을 넘어 도망쳤고. 마루 밑을 난사하던 총성을 잊을 수 없었다네요.
막내 선 외삼촌 6.25때는 마릿골에서 7~8명 국민방위군**으로 청도로 소집명령 받고 누비이불과 곡식 2말씩 지고 가는데, 몸 약한 사람 곡식 먼저 먹어 짐을 덜어주었고 기차를 제대로 타지 못해 고생이 심했다네요. 옥천 당도하니 멍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멈춘 기차마다 불지르고 총쏘아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것도 목격했답니다. 영동에 이르자 각자 흩어져 선 외삼촌은 날 저물어서야 대구 도청을 찾았고 택네**서 열흘을 앓고 ‘갑’형이 경찰증명서와 경찰복을 구해주어 큰 형 허진의 쓰리쿼터타고 대구에서 천안까지 갔다가 누이(허경)의 집에서 하루를 지내고, 거기서는 걸어서 길가는 트럭 신세지며 마릿골로 귀향했다네요. 못먹고 추운데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먹는 대로 설사가 나 죽도 먹지 못하니 애가 탄 부모님(허균, 이봉화)이 ‘안 먹으면 죽어’ 절규하시고, 겨우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네요.
**국민방위군 :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악화되어 가는 전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부는 <제2국민병소집령>을 발동, 약 50만 명의 장정들을 전국 각지의 51개 교육연대에 분산 수용하여 국민방위군 편성. 1951년 1·4 후퇴 때 혹한의 추위 속에 식량과 겨울 피복 조차 지급 받지 못하고 굶주린 채 이동 명령을 받은 50여만 명의 병사들 중 9만에서 12만여 명이 아사하거나 동사. 1951년 봄이 돼서야 이 사건이 국회(당시 부산)에서 폭로되었고 진상규명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은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군입대 기피현상 증가 및 이승만 내각의 신뢰도는 급격히 실추하게 된다.
** 허택 : 허원(허진의 아들)의 이복 동생
그 고생을 하고도 막내 외삼촌은 1952년도에 다시 군대에 징집되어 1957년 1월 제대 했으니 5년을 또 군생활 했답니다. 군대 생활 2년 만에 첫 휴가(보름)때 포항에 가니 인천부두 노동자로 끼니가 어려웠던 자형 박朴씨**는 이李 씨 자형(필자의 아버지 이은상) 식솔로 객지 고생 여전했고, 선 외삼촌은 용담정을 탐방하고 걸어서 경주역까지 갔다고 하네요. 선 외삼촌 동년배들은 8년 복무한 사람들도 있고 군생활하다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네요. ‘갑’ 형님이 손써서 2년 일찍 제대한 덕에 장가들어 고향 지키다가 부친 균님 장례도 치렀답니다.
** 박씨 : 허균의 막내딸 허종의 남편
대신사 탄신 134주년 기념사진(1958.10.28 음). 아산 배방면 수철리 860번지에서 시천교임시중앙대회도 겸하였다. 허균이 병석에 있을 때로 허균에게는 마지막 공식행사 사진.
선비로 살았던 허균 내외는 선(막내), 복(장손)**에 말 못할 짐을 씌워야 했던 한생. 1958 동짓달부터 위중한 균 어른을 낮에는 아내(이봉화)가 밤으로는 손녀 딸(현자, 온자, 증자, 미자...)이 교대로 간병하거나, ‘갑’ 서장의 자가용으로 서울의 은상 사위 운전하여 병원 오가는 고생 겪었답니다. 1891년 태어나 1910년 혼인하여 49년을 해로하다 1959년 68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니, 이봉화 님 너무 고통이 크셔서 가신 뒤 한동안 해 저물면 밖에 나가기 무서웠답니다. 현(鉉, 균 외할아버지의 셋째딸. 필자의 어머니) 남편 이은상이 관용차 운전수로 서울 있다가 송탄 정착 무렵, 균 외할아버지 초상이 나 수철리 산 속에 갔는데, 균 외할아버지 장례엔 K-55부대** 미군장교도 10여명이 조문**을 왔고, 만장 깃발이 98개 뒤따랐고 상복 두루마기로 여름 홑이불로 두고두고 쓰기도 했지요.
** 복 : 허진의 큰 아들. 순복으로 불림. 태양인 체질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어렸을 때 장손이라며 녹용을 먹였다가 말을 제대로 못하다 뒤늦게 말문이 열렸다고 한다. 장손(허순복)의 부인과 아들은 수철리 옛집 사랑채 자리에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있으며, 허순복은 광명시에 거주하고 있다.(가혜당 기록)
** 오산공군기지(Osan Air Base, K-55; Osan AB). 한국 전쟁 중 미군은 오산시의 오산천 둔치(현재의 오산종합운동장 일대)를 임시 비행장으로 잠시 사용하다가 송탄으로 비행장을 옮겼는데, 영문으로 표기할 때 송탄(Songtan)보다 철자 수가 적고 발음하기 쉬운 'Osan AB'라는 기지명을 그대로 사용. 1991년에 필리핀 클라크 공군 기지가 폐쇄된 이후 미국 공군의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큰 공군기지이며, 미국 태평양 공군 예하 제7공군의 본부. 2016년 기존 활주로의 북쪽에 제2활주로가 건설되었다. 주한 미군 군인과 그들의 가족들이 출입국할 때 많이 이용하고 있고, 미국 대통령 같은 주요 인물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할 때도 이용하고 있어 미군 입장에서는 한반도 수도권의 항공 관문 역할을 하는 곳.
** 허갑 평택경찰서장의 부친이 허균이었기에 미군장교들이 조문하였다.(가혜당 기록)
아산 수철리 선영에서(2002.12.1). 막내 외삼촌(허선, 당시 70세) 내외가 이봉화 님 기일을 맞아. 가운데는 이영달(필자의 오빠, 당시54세). 왼쪽 위쪽 무덤이 최완(1857년생, 대신사의 차녀)의 작은 며느리 홍민(허곤의 처) 무덤. 최완의 무덤은 그 위쪽(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음). 허선 외삼촌 내외가 앉아있는 곳이 허균-이봉화 묘소
선 막내 외삼촌은 1959년 봄 균 어른 장례 치르고 76만원 부의금 중 40만을 쓰고 36만원 쥐고 도회지 나와서 싸전 동업하다 장사가 쉽지 않아 계속 궁하여 고향가서 또 쌀 얻고 시골사람 쌀 맡아두다 갚지 못하고 쌀을 축낼 땐 등이 오싹했다네요. 동업자 심씨는 계속 혼자 수금해서 착복하고, 세상살기에는 너무 순박하였지요.
평택서장이던 ‘갑’형님의 작은 양복을 입고 장가를 들면서도 농사 밑천 소를 안 팔았는데, 송탄에 나와 싸전 동업 중 겨울 에 소(10만원)도 팔았다네요. 나중에는 쌀도 수업료로 자꾸 뜯기다 “센방간”**하던 우체국 앞에서 ‘차 사업’ 망한 뒤 경주가서 1달 살 때 이웃의 된장찌개 냄새를 잊을 수 없었다고. 도시 사람되는 비싼 수업료를 치른 것이지요. 억척스런 착한 한 씨 아내 덕에 중장비 자격 따서 해외나가 10년 상환 개간지 농토마련 할 동안 쌍둥이 두 딸은 문도 지붕도 미쳐 완성 못한 집에서 해산했지요.
** 센방간은 소형 공업사나 철공소 내지 차량 정비소. 갑 외삼촌 평택서장이던 1960년 대에 빌려준 터(송탄우체국 건너편)에 아버지(이은상)께서 서울공업사를 차렸고 선외삼촌은 볼트나 너트 등 차 부속품 만드는 시설을 나란히 운영했는데, 인근의 서일공업사가 로비를 하여 먼저 2급 허가가 나는 바람에 서울공업사는 마냥 기다리다가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가혜당 기록)
한씨는 큰 형부 5가마, 작은 형부 2가마 쌀 도움으로 서울 상도동에 와서 6개월 셋방 살다 쌍둥이를 가지고, 2천원 모아 공터 얻어 블록 집짓다가 지붕도 얹기 전 해산날 가까워 또 근숙 모母** 의 친척이 2만원을 꾸어준 덕에 지붕 얹고 문짝 달아 추위를 면했다네요. 근숙, 이웃사람에게 “우리 집 이불 속엔 빨간 아기가 둘 있다”고 외고 다니고. 배냇 저고리 조차 못 입혀 알몸둥이였다네요. 그 와중에도 남편을 중장비 기술학원을 보내어, ‘도저’동업했다 또 사기당하여 상처받았답니다.
**근숙 모 : 한씨. 근숙은 선 외삼촌과 한씨 외숙모 사이의 큰 딸.
명섭** 소개로 1975년부터 10년 상환으로 개간지를 얻고, 5년 동안 사우디 가서 돈 벌게 되나, 생이별의 뼈아픈 가시밭길을 걸었다네요. 한씨는 콩나물 길러 5남매 키웠고 지아비는 결국 귀농하여 땀 흘리고. 허선 막내 외삼촌은 부친 균 어른 초상 후 몇 푼 갖고 객지 나와 수차례 사기당한 비운으로 송탄을 떠나 노년을 보내고 있지요, 늘 고향을 그리시며.(다음 호에 계속)
** 허균의 둘째 딸 경 이모는 균 님의 제자 이상진과 결혼하여 5남 3녀를 둠. 명섭은 둘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