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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역사와 기독교
수도 - 자그레브
시차 – 한국보다 7시간 늦음
언어 - 크로아티아어
화폐 – 1994년 이래 사용된 크로아티아 쿠나(HRK)는 종결, 23년 1월1일부터 유로화만 사용
여행 - 2023년부터 회원국끼리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솅겐 조약’에 편입
면적 - 880만 7천㏊ 세계113위 (2020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 - 400만 8,617명 세계129위 (2023 통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
GDP - 678억 3,779만 달러 세계72위 (2021 한국은행, The World Bank, 대만통계청 기준)
기후 - 전체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함, 두브르니크 경우 년 240일 이상 맑음
종교 - 가톨릭 86.3%, 세르비아정교회 4.4%, 그 외 이슬람교 등
크로아티아의 역사
크로아티아는 역사상 완전한 독립국이었던 적이 거의 없다. 크로아티아 민족 자체는 남슬라브계에 속하며, 언어도 옆 나라인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와 거의 같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불렸다.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대사
국토 측면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일리리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후 로마 속주로서 달마티아(Dalmatia)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현재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지중해에 면한 지역으로 유명한 달마시안의 원산지이다. 내륙지역은 판노니아(Pannonia)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4세기 게르만족의 거센 침공에 시달렸으며,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한 뒤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여러 혼란한 상황을 거쳐 동로마(비잔틴) 제국에 복속되었으나 8세기 슬라브족이 남하하여 차지했고, 이후 슬라브족의 영토로 계속 남는다. 크로아티아인의 정착과정은 콘스탄티누스 7세가 10세기경 저술한 《De Administrando Imperio》(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2. 중세사
크로아티아인의 발칸반도 정착이 동로마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 지역이 원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래 동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던 만큼, 원래 크로아티아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바르족이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국은 샤를마뉴의 대대적인 가톨릭정책으로 로마교회로 속하게 되어 닌(Nin)에 최초의 크로아티아 가톨릭교구가 세워졌고, 달마티아의 크로아티아 공국은 동로마 정교회에 남게 되어 서로 나누어졌다. 823년 동로마가 프랑크에 패배하면서 달마티아도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으나 즈데슬라브(Zdeslav, 재위 878-879) 재위기에는 동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관할에 잠시 속했지만, 즈데슬라브 사후 브라니미르(Branimir, 재위 879-892) 재위기에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갔다.
크로아티아 공국은 925년을 전후하여 닌의 크네즈(Knez: 대공) 토미슬라브(Tomislav, 재위 910-928)가 왕이 되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크로아티아 왕국은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Petar Krešimir IV, 재위 1058~1075)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는 1054년 동서교회가 분열된 후인 1059년에 로마교회에 사절을 보내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아 비오그라드(Biograd)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더불어 크로아티아 내에서 로마교회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또한 그는 크로아티아 해안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여 육성했는데, 그 결과 닌 외에도 쉬베니크(Šibenik), 스크라딘(Skradin) 등의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의 최대 업적은 대대적인 영토확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영토를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내륙지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지까지 확장시켰으며,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지역의 섬들이 크로아티아의 영토로서 확고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하지만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는 1075년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은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았고, 왕 자신은 노르만족에 의해 생포되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그는 석방을 위해 크로아티아 해안의 여러 도시들을 포기했지만,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노르만족의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가 아들이 없이 죽자 포사비나(Posavina)지역의 반(Ban: 부왕)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 재위 1075~1089)가 로마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즈보니미르 재위기에는 키릴 형제가 전해준 글라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발전했고, 중세 봉건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즈보니미르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1089년에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다가 국력소모와 재정파탄을 이유로 원정을 반대하던 귀족들에게 시해 당했다.
즈보니미르가 귀족들에게 시해당한 후 스트예판 2세(Stjepan II, 재위 1089~1091)가 옹립되었다. 하지만 그도 후손이 없이 죽자 계승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즈보니미르의 왕비 옐레나 리예파(Jelena Lijepa, ~1091)가 자신의 오빠였던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László I, 재위 1077~1095)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제안했고, 제안을 수락한 라슬로 1세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슬라보니아(Slavonia)의 반(Ban) 페타르 스나치치(Petar Snačić, 재위 1093~1097)를 왕으로 추대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반발에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얻지 못했다. 그 후 1097년 라슬로 1세의 뒤를 이은 칼만(Kálmán I, 재위 1095~1116)이 스나치치를 살해하고 슬라보니아 점령에 성공하지만, 달마티아 지역 귀족들의 저항에 못 이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되 칼만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는 것으로 합의함으로써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13세기 헝가리의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자 지역 영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제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으나 헝가리가 다시 중흥을 맞이하고 세르비아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위협을 떨쳐냈다. 그러나 15세기 헝가리 국왕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등 헝가리가 유럽 정세 한복판에 말려들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달마티아를 탈취하는 등의 영토 상실이 있었다.
3. 근대사 - 합스부르크 제국 (1526–1918)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의 파상적인 침략을 겪다가 16세기에 들어 1526년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여 모하치 전투를 벌였다.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3개국의 국왕을 겸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가문의 러요시 2세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헝가리군은 대패했다. 이때 러요시 1세의 자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러요시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당시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던 크로아티아 왕국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속하게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보헤미아, 서부 헝가리도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계속되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지의 문화와 자치권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크로아티아도 상당 수준의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에 귀속된 이후 크로아티아의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의 거듭된 공격을 받는 변경 지대로서 국토가 황폐되었으며 해적들의 약탈로 주민들은 내륙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1797년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결과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이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는데 베네치아가 다스리던 달마티아 역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이로서 지금의 크로아티아 전체가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는데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참패하면서 쇤부른 조약으로 프랑스에 할양되었다가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독일화, 헝가리인들에게는 마자르화를 강요하자, 이에 반발하여 크로아티아인들은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헝가리와의 사이는 최악이었는데 1848년 혁명 당시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맹세하며 헝가리 진압에 앞장선 덕분에 제한적이지만 동등한 주권을 얻을 수 있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자 헝가리 민족운동이 고조되어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중제국)이 수립되어 헝가리는 주권국이 되었다. 이때 크로아티아의 통치권이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넘어갔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를 완전 편입하고 헝가리 왕국 내 타 소수민족들처럼 마자르화를 시도했으나 이에 맞서 크로아티아가 주권을 주장하면서 서로 충돌했다. 이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나서서 크로아티아를 지지하며 압력을 넣은 덕분에 크로아티아의 주권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양 정책의 영향을 받았는데, 크로아티아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두보로써 그 비중이 매우 컸으며,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서도 크로아티아계 군인이 상대적으로 매우 많았다.
4. 현대사 (1918–)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 크로아티아는 몰락이 기정사실화된 합스부르크와 결별하고 남슬라브 통일운동에 합류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원래 국명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원임을 선언했다. 처음 남슬라브인 통일운동인 줄 알고 참여했던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인 위주의 대세르비아주의로 흘러가자, 이에 분개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크로아티아계가 반유고슬라비아 성향 국가인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지원을 얻어 아예 분리 독립을 추구하면서 사태는 더 심각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1939년 8월 크로아티아 농민당과 유고슬라비아의 섭정 파블레 왕자의 타협으로 크로아티아계 거주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폭넓은 자치권을 가지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a)로 재편되었으나 이미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1941년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을 비롯한 추축국의 침공에 맞서 병력을 소집했으나 크로아티아는 이를 거부했고, 도리어 독일-이탈리아-헝가리에 부역하는 반(反)세르비아 조직인 우스타샤가 정권을 잡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워 독일의 후원 아래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벌였는데, 어찌나 잔혹했는지 천하의 독일 국방군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 당시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당한 세르비아인이 30만 명에서 70만 명 사이로 추정되며, 2차 대전 직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이 100만여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인구의 20%에서 40%가 죽은 셈이다. 비율로 보자면 유대인 학살보다 더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지금도 크로아티아의 체크무늬 유니폼을 보면 나치가 연상된다면서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다.
1945년 이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렸으나, 1980년 티토가 죽은 뒤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대두되자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도 대두되었으며 1990년 총선에서 유고슬라비아 내 각 공화국의 총선이 민족주의 정파의 승리로 끝났다. 크로아티아도 1990년 4월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 선거에서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민주연합(HDZ)이 승리함에 따라 비(非)공산 민족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곧이어 5월에 투즈만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12월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구(舊)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으로부터 이탈하려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연방 내 최대 공화국인 세르비아와 민족적으로 강하게 대립했고, 특히 경제적으로 농업 중심의 남부 각 공화국에 비해 경제적 부담을 상대적으로 크게 졌던 것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1991년 5월 주민투표에서 ‘주권국가에 의한 국가연합’에 대한 찬성이 94%에 달해 1991년 6월 독립선언을 했다. 결국 크로아티아는 연방 유지를 지향하는 세르비아 공화국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따로 ‘크라이너’라는 공화국을 수립하여 크로아티아 측과 맞섰다.
같은 해 6월에는 연방군대가 크로아티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내전에 돌입했고 9월에는 연방군이 크로아티아에 대공세를 가했다. 12월에 세르비아인의 크라이너 자치구가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역시 12월에 독일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1992년 1월 EU도 이들의 독립을 승인했다. UN은 3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 지구인 동·서 슬라보니아와 크라이너 세 지구에 30개국 1만 4000명의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정전 감시활동을 전개했다. 크로아티아는 5월에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함께 UN에 가입했다. 1993년 1월에는 크로아티아군이 정전을 파기하고 크라이너를 침공하여 발발한 내전으로 1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994년 1월 신유고 연방 측과 관계정상화 협정에 조인하고, 같은 해 3월 크라이너 지역 세르비아계와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1995년 5월 크로아티아 군대는 서슬라보니아를 점령했으며, 같은 해 8월 크라이너 지역이 크로아티아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동슬라보니아는 UN의 통제 아래에 있다가 1995년 데이턴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에 따라 과도 행정부(UNTAES, UN Transitional Administration for Eastern Slavonia)를 설치했다. 1998년 1월 동슬라보니아에 거주하는 모든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 시민이 되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물가가 너무 치솟아 경제가 파산에 처했으나 화폐개혁을 단행하며 독일 마르크화에 페그를 거는 방식으로 물가를 안정시켰고 국제적인 재제로 투자유치에 어려움을 겼던 세르비아와는 다르게 크로아티아는 그 후 안정을 되찾았다. “민족적, 국가적 이슈가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언론, 경찰, 사법체계를 장악하고 통제하던 투즈만 대통령이 1999년 12월에 사망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헌법 개혁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의원내각제로 전환했으며, 2001년에는 상원을 폐지하고 단원제로 전환했다. 부패와 행정적 비효율성, 실업 등의 사회 문제 개선을 위한 개혁들도 추진해 왔다.
크로아티아는 1992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하고, 2000년 11월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원국이 되었으며, 200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2000년 평화를 위한 동반자협정(Partnership for Peace)을 체결한 이후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협상을 지속적으로 진행한 결과, 2013년 7월 유럽연합에 28번째 회원국이 되었고, 솅겐조약에도 가입했으며, 2023년 유로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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