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티아고 해파랑길 11구간(봉길해변-감포-연동마을)
2017년 2월 5일 (일) 날씨 : 비온 후 맑음 기온 : 섭씨 3~11도
거리 : 18.8km 소요시간 : 5시간 30분 동행 : 귀연산꾼 42명
경로 : 감은사지-봉길해변(문무대왕릉)-이견대-나정해변-전촌항-감포항-송대말등대-오류해변-연동마을
<감은사지>
도보 여행의 성지로 여기는 스페인의 산티아고길!
스페인 북부 내륙을 지나는 산티아고 길에는 기독교 순례자들이 거쳐가는 명소들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스페인 자연 경관을 보고 걸으며 자신의 역경과 삶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반추한다.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하여 사그라들었던 에너지를 충전하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도보 여행자들은 언젠가는 가고 싶은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를 그리며 현재의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는 가깝게 살고 있는 내 나라 내 국토를 까맣게 잊고 있다.
진정한 도보 여행의 낭만이 살아 꿈틀거리는 국토 순례. 그건 바로 동해안을 따라 걷는 해파랑길이다.
그 길엔 산과 바다 그리고 주민들의 삶과 선조들의 흔적이 수두룩하다.
오늘 그런 길에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신문왕과 만난다.
대왕암, 감은사지 삼층석탑, 이견대를 만나고 민초들의 숨결이 가득한 감포항과 나정해변이 함께 호흡한다.
정감있고 포근하며 파란 바다와 송림이 반기는 해파랑길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장면 #1 관산성 전투
관산성 전투는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신중했던 성왕이 그답지 않게 저지른 단 한 번의 부주의로 목숨을 잃었다.
성왕은 관산성 전투의 초반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신라를 침공한 백제군의 장수는 태자 여창이었다.
성왕은 사비에서 백제군의 승전보를 받은 후 무엇에 홀렸는지 갑자기 친히 전장으로 가려했다.
지금의 옥천 지역을 지나던 성왕은 신라군 매복부대에 생포되었는데 고간 도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무엇 때문에 성왕이 이렇게 무모한 짓을 했는지에 대한 진상을 정확하게 알 도리는 없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이 관산성 지역으로 오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야전에서 고생하고 있는 태자 여창이 걱정되어서 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태자가 와병 중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성왕 정도 되는 통치자가 그런 감정 때문에 전선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한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지휘관인 태자 여창(餘昌)을 비롯한 백제군을 격려하면서, 신라를 물리친 이후에 대해 구상을 했을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이때 성왕을 죽인 신라 화랑 고간 도도는 삼년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백제군은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을 백골산성에서 잃어 국운이 쇠퇴하는 비극을 맞았다.
관산성 전투에서는 단순히 성왕만 죽은 것이 아니라, 왕과 함께 있던 좌평들, 즉 측근들까지 몰살해버렸다.
왕권을 지탱해주던 대들보들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관산성 전투 이후 하위 동맹자였던 신라는 경쟁자로 바뀌어 백제를 위협하게 되었다.
<감은사 동탑>
<감은사 서탑과 수로>
장면 #2 대야성 전투
642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한다. 신라 죽죽의 장렬한 전사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대야성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원인은 바로 대야성의 도독이었던 품석. 그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백제에 항복해, 부인인 ‘고타소’와 함께 참혹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이 부부는 바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김춘추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김춘추는 온종일 기둥에 기대어 선 채로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김춘추에게 닥친 더 큰 위기는 바로 사위인 품석의 행동이었다.
화랑도 정신인 임전무퇴를 저버린 사위의 항복으로 인해 대야성 패전의 책임과 비난이 김춘추에게 쏟아진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에서 김춘추는 결단을 내린다.
결국 고구려와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펼쳐 삼국통일의 깃발을 들게 되는데 648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동맹’이 맺어진다.
이는 당시로서 파격적인 김춘추 외교의 승리였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정권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당나라와의 굳건한 동맹을 바탕으로 한 김춘추의 정치력과 김유신의 군사력은 강력한 신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었다.
감은사지는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업적과 은혜를 기리고자 지은 감은사가 있던 절터이다.
그 터 위에 국보 제 112호인 감은사지 3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고,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 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하고 목탑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석탑 양식의 시원을 마련한 탑이다.
감은사지에서 발굴한 사리장치는 보물 366호로 지정되었다.
금당 아래 석축으로는 동해 바닷물이 드나들었는데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물과 함께 왕래했다고 전한다.
<귀연 해파랑길 단체 사진>
<국보 112호 감은사지 3층석탑>
장면 #3 신라의 삼국통일-삼년산성과 태종 무열왕
삼년산성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나당연합군의 합세로 백제를 무너뜨린 뒤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백제 유민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당의 고종이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파견하였을 때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왕문도를 맞이하였던 곳이다.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과 신라군이 관산성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의 부하 화랑 도도는 삼년산성의 장수로 백제 성왕을 공격하여 죽인다.
그리고 88년 후 성왕의 손자인 의자왕은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죽인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자 김유신 여동생의 딸 즉 생질이다.
5년 뒤 김유신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백제 장수 8명을 사로 잡았고 이때 김춘추의 사위와 딸의 시신과 교환한다. 김춘추는 딸 고타소의 죽음으로 백제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다짐하게 되며 13년 후 백제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에 항복한다.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문무왕)은 대야성에서 죽은 누이 고타소를 떠올리며 항복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한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하지만 부여융은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가게 되고 그 후에도 문무왕과 부여융의 질긴 악연은 지속된다.
김춘추는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를 배반한 모척과 검일을 잡아 찢어 죽인 후 강에 버렸다고 한다.
전투에서 대승한 김춘추 태종 무열왕은 7,000명의 군대를 남기고 삼년산성으로 돌아와 사위와 딸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국보 112호 감은사지 삼층석탑>
장면 #4 이야기로 전하는 문무왕의 유언(대왕암과 이견대)
문무왕은 이름은 법민(法敏).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기간 동안 백제저항군의 진압,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의 축출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비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삼국사기〉에는 왕의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진덕왕 때 당나라에 가 있기도 했으며,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 병부령(兵部令)이 된 뒤 곧 태자로 봉해졌다.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외모가 빼어나고 머리가 총명하기로 유명했다. 뛰어난 슬기와 계략으로 삼국 통일이라는 업적을 이루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인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지내라.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노라."
왕의 유언에 따라 신하들은 유골을 동해 감포 앞바다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그 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고 불렀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의 뜻을 기려 대왕암 근처에 '감은사'라는 절을 지었다.
그리고 대왕암이 잘 보이는 곳에 누각을 지었는데 신문왕이 이 누각에서 용이 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누각이 있던 터가 1970년에 발견되었는데, 새로 누각을 지어 '이견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탑>
<동탑>
<봉길해변>
<문무대왕릉>
<방생제>
장면 #5 역사서에 나오는 문무왕의 유언
문무왕(신라 30대)은 681년 음력 7월 1일 세상을 떠났다(김유신의 사망일과 같다). 그가 태자에게 남긴 유언에는 온갖 풍상을 겪은 왕의 감회가 잘 드러난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해 강토를 평정했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했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해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했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했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됐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오의 손권)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주(魏主: 조조)의 서릉에는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돼,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서국(西國: 印度)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해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三國史記, 「新羅本紀」 文武王 21年)
<방생제가 열리는 봉길 해변>
<갈매기 비상 모습>
굉장히 낯설고 의아한 광경을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길 해변에서 보았다.
많은 버스들이 길가에 줄을 섰고, 해변에는 불교 신자들과 무당들이 제물을 쌓아 놓고 바다를 향해 절을 한다.
전해 듣기로는 조계종에서는 이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천태종이나 선원 또는 유사 종교인들이 건강과 사업 그리고 승진이나 여러 가지 기원들을 대왕암을 향해 정성을 드린다고 한다.
좋은 의미에서는 무속신앙으로 치부되지만 행사의 모양이나 해변의 지저분한 쓰레기 더미들은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하얗게 빛나는 바다 가운데 문무대왕릉은 우뚝하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1,000년 전 문무대왕의 왜적을 막겠다는 호국의 의지가 들리는 듯하다.
<이견대>
대중천이 흘러들어 바다와 만나는 모래 톱이 이견대 앞까지 이어진다.
하얀 갈매기 떼들이 흡사 눈이 내린 듯 모래 톱에 가득한데 이견대의 전망 좋은 모습이 이색적이다.
<누군가의 발자욱>
<대종천과 이견대>
<대종천>
<신라 동해구 표지석>
<이견대에서 본 문무대왕릉>
만파식적은 신라시대 전설로 전해지는 피리로 원명은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지은 후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든 피리라 한다.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682년(신문왕 2) 5월 초에 해관이 와서 동해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왕래한다 하여 임금이 곧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산을 살펴보니, 그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이면 하나로 합쳐졌다.
이에 배를 타고 들어가서 그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이 들면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불 때는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그리하여 이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고 한다.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하며 모든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인 만파식적의 상징성이야 말로 모든 마음의 파도를 쉬게 하여 번뇌를 잠재우고 경건함과 평온을 갖게 하는 범종의 참뜻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그 범종에 이와 같은 만파식적 형태의 음통(音筒)을 만들어 놓았다.
<이견대>
이견대는 신문왕이 만파식적(피리)을 내려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정자에서 보이는 경치도 일품이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어 쉬어 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끄는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신라 왕 부자가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하는데 문무대왕릉에서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이라고도 한다.
이견대는 주역 건괘에 나오는 '飛龍在天利見臺人(비룡재천이견대인)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즐겁다'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견대 현판>
<감포 8km, 구룡포 36km>
대본리 해변을 지나며 바위에 홀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된다.
흙이 있을리 없건만 살기 위한 처절한 기생의 본능이 소나무의 자태에 가득하다.
<바위에서 생존을 위해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
<대본리>
나정리 해변을 가는 노정은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 그리고 이견대의 역사적 가치가 빝나는 문화재가 있어 역사 탐방길이다.
또한 경주 최대의 어항과 미항이 있는 생동감 넘치는 길이다.
이견대에서 전촌항으로 가는 숲길과 송림 그리고 확 트인 바다 풍경은 가히 해파랑길의 진수이다.
<할미소나무와 할아범 소나무>
수령이 오래된 노송 두 그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할미 소나무와 할아범 소나무가 함께 서서 마을을 지키는데 옆에는 가곡의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대본리 해변>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잔 자갈이 함께하는 해안 길은 낭만과 여유가 가득한 노정이다.
동해 주민들의 삶이 묻어 있는 생선 말리는 덕장과 그들의 일터는 한 폭의 그림이다.
<나정해변 칼국수 집>
나정 해변 근처의 칼국수 집에서 매생이 칼국수로 점심을 든다.
지난 번 해물 칼국수보다는 맛이 덜하지만 매생이의 독특한 맛과 막걸리 한 잔이 잘 어울린다.
낮도깨비님과 솜다리님의 한 턱에 훌륭한 점심이 되었다.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
나정 해변에는 특이한 라면이 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다.
조미미의 노랫말을 새겨 놓은 돌탑은 무슨 유래인지 모르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선점 효과로 관광지의 효자 노릇을 한다.
덴마크의 인어공주상도 별 것 아니지만 대단한 관광객 유인 효과를 가져온다.
지방자치제도의 큰 효과라면 지방에 산재한 문화재나 특산물 그리고 조상의 숨결이 숨쉬는 명소를 찾아내어 홍보하는 것이다.
숱한 유적과 자연 환경을 찾아 보는 묘미가 해파랑길의 묘미가 된다.
<나정 해변>
<용굴>
용굴은 용이 살았다는 곳으로 사룡굴과 담용굴로 불린다.
서로 엇갈려 뚫린 굴은 물에 사는 담룡과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는 사룡 그리고 동서남북을 지키는 4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굴을 통하여 건너편 군 초소가 보이고 확 트인 봉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용굴 인증 샷>
<나정리 제이스 CC>
<전촌항>
<전촌항>
전촌항으로 들어가는 해변에는 과매기 덕장이 있는데 다음 구간 구룡포 항에도 많이 있다.
근래에는 과메기의 진짜 맛을 내는 기름기 가득한 청어의 많은 어획으로 어부들의 웃음이 살아났다고 한다.
감포항에 가면 과매기 맛을 볼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과매기 덕장>
<생선 말리기가 한창인 전촌항>
<해파랑길 이정표>
<감포항>
감포항은 어선 출입이많은 동해 남부의 중심항이자 경주지역 최대의 어항이다.
싱싱한 횟감을 파는 재래 시장이 바다를 전경으로 형성되고, 방파제에서 보는 일출은 장관이라고 한다.
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에서는 손님 모시기에 바쁘다.
감포는 콩가루를 뿌려 먹는 참가자미 회로 유명하여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맛을 보아야 할 진미 중 하나이다.
감포항의 대부분 집들은 일본식 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봄의 전령 홍매화가 피었네>
<송대말 등대>
송대말은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라는 뜻이다.
등대 주변에는 수령 300~400년 된 소나무 숲이 무성하다.
등대 옆 건물 전시실에는 등대 및 바다에 관한 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 보는 감포항 풍경이 일품이며 근처에는 주상절리도 있어 눈길을 끈다.
<감포항 모습>
<오류 해변>
백사장 모래가 마치 비단을 펼쳐 자로 잰 것과 같다하여 이 일대를 척사(尺沙)라 부르기도 하는데 해송 방풍림 및 해안 산책로와 공원이 있어 걷기 좋다.
송림 속에는 방갈로 형태의 캠핑카들이 관광객을 부른다.
<고아라 해변>
<고아라 해변과 캠핑장>
<연동 마을에 경사났네!!!>
연동 마을이다.
길 가운데 현수막에 대학교수의 탄생을 알리는 글귀가 이색적이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 교수가 된 연동 마을!
아직도 한국적 시골 모습은 자식이 출세하고 승진하고 대학교수되는 것이 경사다.
부모들이 자식을 길러 잘 되면 그보다 축복이 어디있을까나.
<해와 바다 카페와 펜션>
차 한 잔 마시고 가고 싶은 카페를 지난다.
이름도 아름다운 해와 바다 카페.
다음 자전거로 해파랑길 나설 때 꼭 들러서 커피 한 잔 마시리라.
동해안 해파랑길에는 곳곳에 전망 좋고 운치 있는 카페와 펜션들이 많다.
<연동 마을 해변에 무지개 떴다!!!>
<선명한 무지개>
갑자기 비가 내린다.
다행히 많은 비가 아니어서 근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다.
잠시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해파랑길에 선명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떴다.
정말 빵강과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진한 색깔이 연동 마을 해변에 아름답다.
<연동 마을을 지나면 포항 구간으로 바뀐다>
연동 마을은 경주 구간 마지막이며 포항 지역과의 경계이다.
고려말엽 성씨가 다른 세 집이 이주해와 농토를 일굴 때 연못에 연꽃이 많아 연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태수바위 전설은 신라시대 왕비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려 태자를 낳았다고 하여 태바우, 태자암이라 했는데 감포항 축조할 때 이 바위를 깨트려 쓰고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경주와 포항 경계 지역에서 오늘의 해파랑길은 발걸음을 멈춘다.
지도에 나와 있는 감포초등학교는 폐교되었고, 감포읍내에 새로 이전되어 추후 이정표 관리에 착오가 없어야 겠다.
5시간 30분의 긴 여로에 함께 했던 엄청 큰 갈매기들의 동행이 나그네의 발길에 큰 힘을 주었다.
한국의 산티아고 길을 연상시키는 해파랑길은 그 길에 산재한 문화 유산과 주민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한국인의 길이다.
다음 구간부터 이어지는 포항 해파랑길도 즐거운 노정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Dawn Of A New Century - Secret Garden
첫댓글 해파랑길 트레킹후 후기글은 더욱더 실감나네요 ..청산님 고맙습니다~~^^
와아 저희는 회먹고 룰루랄라 하느라고 저바다위에 뜬 그림같은 🌈 를 못봤어요 ㅠ
아름다운 구간 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