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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기시인과 익산 *
글/사진 김경식
사월과 오월에 떠나는 문학기행은 살가운 그리움으로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겨우내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은 저마다 자기의 색상을 드러내며 녹색의 향연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숲도 자세히 보면 녹색이면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색상이 존재한다. 이런 색상을 표현할 단어가 우리에게 없지 않은가. 자연이 위대하다고 하는 말은 이제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월과 오월로 이어지는 시기에 숲의 변화를 보면 정말 자연은 신기하고 놀랍다.
이런 시기에 향기 지닌 민족문학의 작가 이병기시인(1891~1968)을 찾아 떠나는 문학기행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문학기행은 문화유산답사와는 사뭇 다르다.
문화유산답사는 역사적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문학기행은 문학적인 감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작가의 고향 언저리와 작품의 무대를 둘러보는 일임에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작가는 결국 자신의 문학 작품을 통해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병기 시조시인 생가
그런데 작가 중에는 생가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인근에 묘소까지 있는 분이 있다. 바로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이다. 작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리고 생가 인근의 묘지로 돌아가는 문인은 희박하다. 이런 복은 아마도 천복이거나, 자연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그의 이런 생은 하늘이 합당한 삶을 인정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선생의 유명한 시 ‘별’을 낭송하거나 노랫말로 된 가곡을 불러보면 그가 얼마나 아름답고 순박한 분이었나를 알게 된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西山)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병기 시조시인 묘소
이병기 시인의 고향은 전북 익산이다. 1977년 이리역의 폭파 사고로 유명한 이리시(裡里市)를 보듬어 안고 익산시로 통합되었다. 익산(益山)은 역사가 유구하며 아름다운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 깃든 서동요의 무대다.
문학기행과 역사문화 탐방이 동시에 가능한 곳이 익산이다.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이 교차하는 익산의 교통은 편리하다. 익산시를 방문하기 전에 미륵사지를 탐방하는 것이 예의다. 미륵사지를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익산 I.C에서 722번 지방도를 타고 익산시내 방면 금마 사거리(미륵사지 주유소)에서 우회전한다. 이곳에서 계속 미륵사지터 이정표를 보고 직진하면 오른쪽에 미륵산이 나타나고 그 들머리에 미륵사지 정문이 나온다.
고려의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한다.
“어느 날 무왕(백제30대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익산의 용화산(현재 미륵산) 밑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서 출현하였다. 수레를 세우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부탁하기를 이곳에 큰절을 지어 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
미륵산(430m)은 미륵사지를 품은 익산의 진산(鎭山)이다. 봉우리가 사자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불린다. 호남의 들녘에서는 매우 높은 이 산은 봉우리가 사자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불린다. 미륵산의 앞마당 약 5만평규모의 ‘미륵사지’는 예사롭지 않은 땅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광활한 폐사지이지만 당간지주가 반기며, 여러 곳에 박혀있는 주춧돌이 역사속의 실체를 전한다.
익산 미륵사지터
이곳은 백제 '무왕(서동)'이 서기 600년경 창건한 후 '조선'중기에 폐사된 사찰인 '미륵사'의 유적지다. 15년(1980~1996)이상의 발굴결과 미륵사의 배치구조는 3원(서, 중, 동)의 병립형으로 밝혀졌다.
탑과 금당(대웅전)을 세우고 사원 3곳을 나란히 배치한 매우 특이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3원에 각기 사찰을 세운 이유는 먼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 세 번의 법회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 정토를 실현한다는 '미륵신앙'에 기인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곳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의 하생을 바라는 민중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곳인지 모른다.
아울러 중원의 탑은 목탑이며 동원은 목탑을 축소한 석탑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다만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국보11호인 '서탑'만 해체되어 보수정비(1998∼2008) 중이다.
미륵사지의 광활한 터를 이리 저리 돌아보다가 복원(1989∼92)한 ‘동탑’속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 탑은 주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제작 된 것이 흠이다. 너무 깔끔하고 인공미가 가미되어 있어 오히려 미륵사터의 이미지를 손상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말이 복원이지 새롭게 제작한 것이다. 결국 미륵사지의 ‘서탑’이 복원되어야 새로운 기운이 돋아날 것이다.
미륵사지 동탑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제작된 우리나라의 최초의 석탑이기 때문이다.
석탑의 시원(始源)이 되고 있는 석조물이지만 형태가 목탑과 유사하다. 목탑의 양식을 나무가 아닌 돌로 쌓은 석탑이 특징이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돌아보면 이곳이 대단한 사찰(寺刹)이었음이 증명된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은 약 600평 규모다. 이곳 중앙전시실에 전시한 축소모형으로 된 본래 절의 규모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아마 미륵사지를 돌아보기 전에 이곳에 들려 예전 미륵사 모형을 보아야 제대로 답사가 가능하리라. 절터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들은 이곳이 오랫동안 호남지역의 신앙과 정신적인 도량이었음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마당에 서 있는 당간지주를 향해 걷는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눈이 부시다. 천년의 세월을 건너서 걷고있다. 잠시 잔디를 심고 능수버들을 심은 연못가에 앉아서 미륵산을 바라본다. 저 산과 하늘만이 유일하게 이곳의 전설 같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알고 있는 듯하다. 본래 이곳은 연못이었다. 연못을 매립하여 절을세운 것은 그 유명한 서동의 선화공주 사랑에 있다.
미륵사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과 힘 있는 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던 이를 위해 기념물을 세웠다. 결국 이곳도 자신이 신라의 공주를 목숨 걸고 사랑하여 아내로 얻고 백제의 왕이 된 후, 그녀의 소원을 들어 이곳에 ‘미륵사’라는 절을 세운 것이다.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당간지주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미륵산을 바라본다. 미륵산 너머에 가람 이병기 시인의 생가가 있다. 결국 가람 선생도 이곳을 탐방하였을 터이다. 사찰이란 뜻의 가람(伽藍)이라는 단어와 이병기 시인의 호 가람(嘉藍)과는 다르지만, 아마도 아름다운 절이란 뜻이 포함된다고 여겨진다.
나무 한 그루 속에도 그 지역의 공기와 온도, 햇살이 숨어있다. 이럴 진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미륵신앙을 전하는 이 터는 백제의 숨결과 더불어 무왕과 선화공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서 속삭인다. 저 산 너머에서 태어난 이병기 시인의 정서적 감성은 다분히 서민적이면서 자연적이다. 이 터에서 융성했던 신앙도 그냥 불교가 아니라 미륵불교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미륵은 영원한 희망의 부처이기에 침묵한다. 그러나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들은 그가 오시기를 갈망한다. 저 신라의 경주에 황룡사에 9층의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곳에 9층의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오늘까지 살아남아 미륵불교의 희망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미륵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민중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드는 희망의 산이다.
당간지주(幢竿支柱)를 향해 걷는다. 기단석에 앉아서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결국 이곳은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 미륵이 내려 올 것으로 믿었던 절망했던 사람들의 꿈과 희망의 땅이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 입구에 세웠으며,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에 이곳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걸었다.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기둥을 나무나 철재로 만들었기에 지금 남아 있는 곳은 별로 없다. 다만 기둥 양쪽에 세워 고정 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하는데 이것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역시 돌이라야 오래 남는다. 지금 이곳에 당간지주 2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기적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그대로 약 9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이 당간지주에 기대어 변하지 않은 미륵산을 본다. 이제 가람 이병기 시인의 생가로 떠날 시간이다.
금마면소재지에서 722번 지방도와 연결되는 1번 국도로 갈아타고 논산쪽으로약 8km 지점 가다보면, 가람 이병기시인 생가의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바로 우회전하고 100M쯤에서 2번 좌회전 하면, 시멘트 길이 길게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700M 올라가면 이병기 시인의 생가를 위해 만든 큰 주차장에 닿는다.
봄빛이 화려한 토요일 오후지만 자동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고 적막하다. 초가로 이은 지붕이 자아내는 옛 시골집 같은 시인의 생가를 보니 가슴 설렌다. 그 너머에 병풍처럼 펼쳐진 대나무 숲이 은밀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대숲은 죽어 있다.
이병기 선생의 생가 전경
생가로 다가서니 수령이 200년 된 탱자나무가 반긴다. 늙은 탱자나무는 모정(茅亭) 옆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흰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아직 물이 오르지 않고 그 붉은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을 읽는다. 이 표지판 아래 한국문인협회의 기념물이 생가 표지석과 함께 앉아 있다. 이 마을에 오랫동안 터를 잡아온 연안 이씨 가문의 내력이 숨어 있어서인지 생가는 비록 초가집이지만 선비적인 정결함과 반듯하다.
이병기 선생은 1891년 3월 5일, 6남 6녀의 장남으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이채(李採)는 전북 부안에서 변호사업을 개업 했으니 이 집안의 수준을 알만하다.
수우재(守愚齋)는 생가의 당호인데 집 이름이 겸손하다. 선생은 조부로부터 10여 년간 한학을 배웠다. 신학문을 알게 된 것은 양계초(청나라인)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양계초의 개혁적이며 계몽사상을 담고 있으며 한용운, 신채호, 최남선을 비롯한 우리나라 개화 지식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병기 선생의 생가 탱자나무
은밀한 사랑이 숨겨져 있을 듯한 죽은 대숲은 바람이 불 때 마다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로 요란하다. 싱싱한 대나무 숲이 되길 기원해 본다.
다시 선생의 행적을 더듬거린다.
19세 때 전주 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고 6개월 만에 졸업하고 이듬해인 1909년 당시에 전국의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한성사범학교에 합격한다. 주시경 선생의 문법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글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나라가 망하니 선생은 망연자실하여 중국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13년 한성사범을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박봉을 쪼개어 고서를 수집하고, 시조를 쓰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할 때 방학을 이용하여 빼앗긴 조국의 유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월급의 반을 수천 권의 고서를 사 모으는데 썼다. 선생은 이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이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연구회 간사를 맡으면서 우리말 연구를 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라고 여기면서 일했다. 1926년 ‘시조회’를 만들어 민족문학의 탐구와 보급에 앞장선다. 이후 일제의 한글에 대한 탄압이 악랄해지는 상황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틴다. 끝내 조선어학회(1942)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약 1년 동안의 감옥살이를 한다.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출옥 후 선생은 고향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칠흑 같은 일제의 암흑기를 보냈지만,
이미 그때 광복의 새벽을 예감하였을 것이다.
‘시조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으로 현대시조부흥운동을 시작한다. 술과 난초와 매화를 유독사랑 하였지만, 인현왕후전, 한중록, 춘향가, 계축일기, 어유야담 신재효의 판소리 등 귀중한 문학 자료를 발굴하였다. 우리말과 글의 보존을 위하여 노력하신 선생의 지조와 민족사랑은 그 가문의 뿌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생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인 이귀(李貴)의 11대 후손이다. 7대조인 이사한(李思漢) 때 공주(公州)에서 충남 연산(連山)으로 이주했다. 고조(高祖)인 이도술(李度術) 선생이 현재의 행정구역인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에 살기 시작했다.
1945년 선생은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정국의 여러 단체, 정당에서 많은 제의를 받았지만 나서지 않았으며, 학문에만 관심을 두었다. 가람은 현대시조를 짓고 장서를 모으고 국학에 관한 저작을 더 중시했다. 어떤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학자적 소명으로 일관했다.
이병기 선생 묘비
선생의 묘소는 매우 초라하다. 후손들이 풍수학적으로 닭이 알을 낳는 형국을 믿기에 상석을 포함한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묘소 참배객들이 이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생존해 있는 가람의 며느리 윤옥병 여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생가 입구에 있는 작은 시비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가운데 장이 누락 된 시조를 읽는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발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시비
우리나라 시조발전에 영향을 끼친 선생의 업적은 지대하다.
우리 시조가 옛 형태 속에서 머뭇거릴 때 현대적인 서정을 담아 서정시조의 길을 열었다.
육당 최남선과 함께 시조 발전을 위해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하는데 노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람은 후진의 발굴,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가람이 천거한 시인은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 등이다. 이들은 한국 현대 시조의 기라성이 되었다. 이들을 발굴하고 키웠기에 문단에서 가람을 현대 시조의 아버지'라 불러왔다. 시조집으로 저서에 ‘국문학 개론’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이 있다. 이중 ‘가람시조선’에는 시조에 열정을 보인 작품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또한 약 60년을 쓴 그의 ‘가람일기’는 유명하다. 가람일기는 단순한 개인의 일기가 아니다. 일제하의 체험과 사실적인 지식인의 일상사가 극사실로 그려져 있다. 이 일기 한 페이지를 읽으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1921년6월24일의 가람의 일기는 마치 어제일 같이 선명하다.
(비 오다 그치다. 익채(益采)군이 찾아와 그 중형(仲兄)의 공판(公判)이 오늘이라기에 용해 군을 데리고 재판소로 갔다. 비는 쫙쫙 쏟아진다. 제8호 법정에서 공판을 열다. 벌써 만원이라고 순사가 소리를 지르며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을 어거지쓰고 들어갔다. 최익한(崔益翰)군이 나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군자금 (軍資金) 1,600원 모집해 주었다는 것을 강도범(强盜犯), 경찰범(警察犯)으로 몰아서 징역 8년이라고 검사가 말한다. 익한 군의 말대답이며 변호사 김병로(金炳魯)의 변론이 다 바르고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판결할는지 오는 7월 1일에 다시 공판(公判)을 연다니, 그 때 보자. 쓸쓸한 판사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따뜻한 정이 없는 듯, 맨 뒤에 익한 군의 하고자 하는 말을 마구 바사 뜨린다. 간수(看守)는 곧 대들어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 용수를 씌우고 노로 허리를 묶어 가지고 나간다.)
이렇듯 가람일기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료적인 의미를 갖는다. 1909년부터 시작하여'조선어학회 사건'으로옥살이를 할 때를 제외하고 60년간 하루도 빠짐없다. 가람일기는 이 자체만으로도 당대의 역사서, 문학사 사회사다. 일제하 36년 동안 친일 문장도 남긴 일이 없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선생의 일기는 오늘 읽어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이은상과 함께 우리의 대표적인 시조 작가인 가람은 13세 때부터 시조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부로부터 한학을 익힌 이후 한시로 시를 쓰다가 한글을 사랑하여 한글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다른 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더욱이 가람이 제대로 시작 활동을 하던 1930년대는 서구의 모더니즘과 낭만적이며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작가들을 매료하던 시대였다. 많은 작가들이 소위 서구적인 사조에 세뇌 되어 우리 옛 문학을 골동품으로 취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가람은 끝까지 우리의 시조를 사랑하는 지조를 지켰다.
결국 가람의 시조들은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했다. 1939년 ‘가람시조집’ 출간되자, 정지용 시인은 가람을 송강 정철이후 최고 작가라고 선양했다. “가람 이전에 가람이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이 없다”는 발문으로 선배 작가를 선양했다. 발문을 통해서 정지용이 그의 지조와 문학적 업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것이다.
오후의 봄 햇살이 눈부신 날 선생의 생가를 거닐면서 주변을 살핀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서 천호산을 바라본다. 가까이에 국도 1호선의 차량들이 질주한다. ‘모정’에는 한 사네가 행복한 잠을 청하고 있다. 생가 옆에 사시는 셋째 며느리 윤옥병 여사(75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이분은 유일하게 가람의 임종을 지킨 분이다.
“아버님은 말이 통 없으셨어요, 사랑채의 끝 방이 서재인데 그곳에서 늘 책을 읽으시고
멀리서 손님이 오시면 사랑방에서 약주를 즐겨 드셨서요”
“아들 셋과 따님 한분이 계셨지만 아드님들은 모두 돌아 가셨지라요, 긍께 따님 한 분만이 서울에서 사시지라요.”
윤옥병 님은 마음이 넓고 인정이 많으신 분이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 귀찮게 할 터인데도 그런 불평이 없고 세상을 관조하시면서 사는 분처럼 보인다.
“저 앞에 보이는 백일홍 꽃 피면 이뻐요. 꽃이 한 백일 핍니다.”
그녀의 시 아버님인 가람의 자연관과 닮아 있지 않은가?
윤옥병 여사
선생은 서울대와 전북대 및 기타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지리산’, ‘춘향가’, ‘청구영언’, ‘해동가요’의 주해를 달았다. 백철 선생과 함께 만든 ‘국문학 전사’를 쓰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서민 중심의 문학사 서술방식을 시도했다. 이는 우리 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1956년 ‘우리말 큰 사전’의 발간을 기념한 한글날 기념행사에서 마신 술로 귀가 길에 뇌일혈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병마로 낙향하여 생가에서 1968년 세상을 떠나실 때 까지 명상하며, 대나무, 매화, 난초와 동무가 되었다.
생가인 ‘수우제’는 청렴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채와 안채, 고방(광)으로 이루어진 가람의 생가는 모두 초가집이 특징이다. 작은 연못가에 모정이 있어 농사짓던 선비 집의 배치구조를 하고 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과 산수유와 배롱나무, 탱자나무 등은 가람의 자연적인 취향과 정갈하며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채 옆 모정에 앉아 가람의 대표작인 시조 난초를 읽으면, 문학기행의 감성이 살아난다.
빼어난 가는 잎새 조는 듯 보드랍고
자주빛 굵은 대공 하얀 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가람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길을 내려오면서 대나무 숲을 들여다본다.
몇 시간을 머물러 있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 생가 주변에서 살포시 그리움을 가슴에 심으며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 가람 생가를 떠나야 한다. 며느님 윤옥병님께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선다.
이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을 찾아나서야 한다.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는 서동요로 시작된다.
훗날 백제 30대 무왕(武王)이 된 서동의 탄생 설화는 기막히다. 서동의 어머니가 익산 금마의 한 연못속의 용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성장하여 마를 캐어 팔아서 사람들은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이후 그는 야심만만한 청년이 되어 신라의 서울 서라벌로 떠난다.
어느 날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그녀를 차지할 생각을 한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인기를 얻고 서동요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이 유언비어 같은 노래는 신라의 서울에 순식간에 퍼진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 향가체의 서동요를 적어 본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薯童房乙(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이두는 넓은 의미로는 한자차용표기법이다. 알쏭달쏭 이런 이두문자가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양주동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무왕릉
현실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민요성격의 노래를 ‘참요’라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선화공주와의 은밀한 사랑을 퍼트린 풍자적인 4구체의 신라향가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가장 오래 된 향가이며 이는 향가가 동요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노래라 이렇게 오래도록 전해져 오늘에 이른 것이리라.
이미 서라벌에 소문이 난 이 노래를 들은 진평왕(신라26대)은 선화공주를 궁궐 밖으로 내 몰아 버린다. 그러나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선화공주에게 노잣돈으로 준다. 공주가 궁궐 밖을 나서는 것을 보고 서동이 기다렸다가 나와 맞이하였으며 공주는 서동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모르나 상황이 급박하여 그를 따른다. 선화공주는 후에 ‘서동요’가 백제인 서동이 자신과 혼인하기 위해 자작한 것을 알게 된다. 오매불망하던 서동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런 사랑과 신분상승의 욕구인 ‘참요’의 가사들은 민중들의 염원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노래들은 말을 통해서 이어지는 구비문학의 형태를 취하는데 반해 이 서동요는 아마도 신라 향찰로 전해지다가 신라의 노래를 이두문자로 풀어 삼국유사에 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향가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까지 널리 부르던 노래인데 신라의 향가인 서동요는 작자가 확실하여 그 신빙성이 있어 역사적 실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쌍릉’은 소나무 숲속에 있다. 동서로 약 200M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이 길을 걸으며 ‘서동요’의 전설같은 노래를 불러보는 것도 기행의 묘미를 더하게 될 것이다. 이곳은 서동이 고구마처럼 생긴 ‘마’를 심던 곳이기 때문이다.
‘쌍릉’은 이미 고려시대에 도굴이 되어, 아직까지 역사적으로 확실한 실체가 없는 실정이다.
익산시로서는 이 능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 되길 갈망하지만, 아직 사료적인 근거가 약한 실정이다. 만약 쌍릉이 이 두 사람의 능으로 밝혀지면 익산은 미륵사지터, 왕궁리의 백제왕궁터와 더불어 백제 유물의 보고가 될 것이다.
쌍릉을 탐방하는 사람들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임을 믿기에 멀리 이곳까지 찾아온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이 쌍릉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밝혀지기를 바라게 된다. 이 마음은 민중들의 염원이 된 서동요가 천년이상의 시대를 건너와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된 사랑의 노래로 다가서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제 백제 무왕의 고향 사랑이 담겨 있는 무왕이 건립하던 백제 왕궁터를 찾아 떠나야 한다.
백제 왕궁터 익산(益山)의 역사는 유구하다.
백제 왕궁터
마한시대에는 도읍지 역할을 하였다. 백제(도읍 예정지), 신라(옥아현, 금마저)를 거쳐 고려(955년) 전주에 속하다가, 비로소 고려(1345년)에 익주라고 불렀다. 조선 태종 13년(1413) 익산군(益山郡)이 되어 오다가 1931년 익산읍이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이리시(裡里市)로 승격되었다. 1995년 익산군과 병합하여 익산시로 옛 지명을 회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익산시는 지정학적으로 전북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완주군, 서쪽은 군산시,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인접하고 있다.
북쪽은 충청남도 부여군, 논산군과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2007년 현재 약 33만 명이다.
익산시민들은 백제 왕궁터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인 이곳을 탐방하다 보면 무왕의 고향 사랑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가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하지 않았다면 이곳이 백제의 수도가 되었을 터이다.
라일락향기 바람에 날리는 봄의 절정이다. 그러나 1400년간 숨겨져 있던 백제 왕궁터 발굴 현장은 스산하다. 푸른 비닐로 덮여져 있는 발굴 현장은 흙바람이 불고,
무왕의 백제 중흥의 꿈이 전개되다가 무산된 옛 역사는 나를 슬프게 한다.
이 황량한 벌판에 그래도 오층석탑이 남아 있기에 위안일 뿐이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왕궁리의 오층석탑(국보289호)는 언덕에 홀로 서 있다. 탑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천년을 버티고 서 있다.
비록 높이 8.5m이지만 멀리에서 조망이 가능하도록 언덕위에 세워놓은 오층석탑은
오늘도 나그네들의 지친 일상을 해소하고 있다. 이 탑이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백제 후손들의 정성어린 신앙심이었을 것이다. 고려전기에 와서야 이곳 왕궁터에 이 탑을 세웠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곳에 무왕이 백제의 도읍을 정하고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면, 이 탑이 존재 하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 할 수는 있어도 현실적인 실체는 아니지 않는가?
새벽길 떠나와 가람 이병기 시인의 고향마을과 미륵사지터와 쌍릉을 거쳐 이곳 백제 왕궁터를 돌아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다.
왕궁터를 돌아 걸으니 귓전에 아득히 들여오는 ‘서동요’가 들린다.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의 향기가 천년의 세월을 달려와 꽃바람 속에 흩어지고 있다. 일제의 무단 통치하에서도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의 고서를 읽고 아름다운 시조를 지으면서 버틴 가람 이병기 시인의 시조 가락들도 들린다.
왕궁터의 길섶을 걷는다. 역사의 뒤안길은 언제나 슬프다. 해는 기울지만 오층석탑이 아직도 선명하다. 왕궁터 들머리에서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팔자를 행복이라 여기며 붉게 물든 저녁놀을 본다. 이제 ‘가람 이병기 시인과 익산’의 기행을 가슴에 담아야 할 시간이다.
백제인의 미소와 사랑까지 담고 이병기 시인의 시조 ‘냉이꽃’을 기억하며 익산을 떠난다.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 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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