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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스크랩 사라진 문명 3부, 브레이브하트
진길장 추천 0 조회 47 11.01.08 14: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스코틀랜드 최대의 영웅 브레이브하트의 출현!~

 

 

기독교 세계 최강의 대군이 침략을 시작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하지만 패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한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하며 스코트랜드 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스코틀랜드의 생존과 애국, 투쟁의 국가적인 상징이 되었죠."

 

그는 바로 훗날 '브레이브하트'로 알려진 윌리암 월레스로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친 스코틀랜드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인들의 가슴 깊이 각인되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 아만다 빔 박사, 스털링 대학교

 

새로운 연구를 통해 브레이브하트가 투쟁했던 당시 세계가 모습을 드러났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세대 무기에 대항하기 위해

웅장한 성이 곳곳에 세워졌고 왕들은 중무장한 마을들을 건설했다.

하지만 당시는 기술과 문화와 꽃을 피웠던 황금기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스코틀랜드 지하 비밀 통로를 통해

70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사라진 세계를 여행해 볼 것이다. 

 

"이곳에서 바로 엄청난 유물이 발견되었죠."

 

이제 드디어 브레이브하트가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사라진 세계의 문이 열린다.

 

 

 

 

1297년 9월 11일,

스코틀랜드 중앙에 위치한 스털링.

양국 군대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었다.

 

스털링에는 에드워드 1세의 명을 받은 유럽 최강의 군대 잉글랜드군이 주둔 중이었고 

그 반대편엔 씨족들로 다급하게 구성된 스코틀랜드군이 구성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지만

병력이 다섯 배나 많은 잉글랜드군 앞에서 스코틀란트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등장한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브레이브 하트'라 불리는 윌리엄 월레스이었다.

 

"월레스는 1297년 전투 전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이죠."

                                                                              - 피오나 왓손 박사, <해머 아래서> 저자

 

조국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의지에 불타고 있던 월레스에겐

그곳 지리에 정통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월레스가 스털링에서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인 이유는

스털링 다리가 스코틀랜드의 중요한 통과 지점이었기 때문이죠.

 

포스강이 스코틀랜드를 거의 반으로 가르고 있어서

스털렝 다리는 남북으로 진출 가능한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 피오나 왓손 박사, <해머 아래서> 저자

 

도하 작전이 승리의 관건이었고 전투의 행방과 더불어

브레이브하트의 이름이 역사에 자리매김할 기회가 이 다리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다리는 월레스 사후 새로 건축된 것이며

월레스가 걸었던 다리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스털링 다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다리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복원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 온 역사학자들은 

간단한 도구와 지역 사람들의 일련의 이야기들을 근거로 일련의 증거를 포착했다.

 

먼저 포스강의 흙탕물 속에서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초석을 발견했다.

초석의 위치를 알게 되자 수면 위에서도 여러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쪽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거대한 교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물결이 드러납니다.

이 교각은 강을 가르며 서 있던 두 개의 거대 교각 중의 하나로서

실제 당시의 다리가 이런 식으로 강 위에 놓여 있었죠."

                                                                                       - 캠벨 체스터만, 스털링 지역 사학자

 

이 유적은 여덟 개 교각 구조의 일부로 짐작되며

전투가 한창이던 시절 상징물이었던 스털링 마을 인장에 묘사된 다리와도 일치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다리는 로마인에 의해 완성 되었으며

그 건축 공법도 세세하게 남아 있다.

 

각각의 교각을 위해 방수 처리된 호포댐을 만든 후

회반죽을 바른 거대한 돌들로 메우고

중앙의 빈 공간은 세석으로 채웠으며 

위로 점차 가늘어지는 형태로 설계해 안정성을 구축했다.

 

 

 

 

 

인장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면 교각의 사이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무거운 하중을 견디기 위해 막대한 양의 목재가 필요했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중세 스코틀랜드에서는 목재가 희소품이었다.

따라서 교각의 형태와 목재 비용을 고려할 때 두 군데 사이 놓인 다리는 협소했을 것이다.

이 다리의 협소함이 월레스가 펼친 전술의 바탕이었다.

 

고대 기사도 정신을 따른 스코틀랜드군의 특성상

잉글랜드군은 그가 다리를 건널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월레스는 그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잉글랜드 기마대가 좁은 나무 다리를 건널 때까지 기다렸죠.

 

한 번에 두 명만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은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던 거죠."

                                                                                          - 피오나 왓손 박사

 

브레이브하트는 선발대로 나선 2천 명의 보병과 1백 명의 기마병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거대한 뿔나팔이 요란하게 울어대자 스코틀랜드군은 맹렬히 진격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쉘투혼이라 부르는 빽빽한 대형을 유지한 채

철장을 높이 세워 동시에 움직이며 잉글랜드군의 선봉을 향해 돌진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도망갈 곳 없는 기마대부터 공격을 했어요.

결국 잉글랜드 기사들은 적군의 창에 찔려 죽거나 포스강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었죠."

                                                                                                 - 피오나 왓손 박사

 

브레이브하트는 커다란 검을 들고 선봉에 나섰다.

전투는 치열하고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스코틀랜드군은 겁에 질린 잉글랜드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대학살의 현장으로 변한 전장에서 반대편의 잉글랜드군은

공포에 떨며 속수무책으로 전우의 죽음을 지켜만 봤죠."

                                                                                 - 피오나 왓손 박사

 

패배의 엄청난 충격에 휘말린 잉글랜드군은 무작정 도망치기에 바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군 역시 브레이브하트의 동료 사령관이었던

앤드류 머레이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곧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스털링 다리의 대승은 스코틀랜드 역사의 전환점인 동시에

윌리암 월레스라는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후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라 불리우며 조국을 이끌었다.

 

"월레스는 한 마디로 대단한 영웅입니다.

잉글랜드를 물리쳐 ?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동포들에게 되살려 줬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에 관한 희망을 불어넣었죠."

                                                                                                     - 피오나 왓손 박사

 

하지만 수 세기에 걸쳐 브레이브하트로 만든 전설은 어느 정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도 많이 사라진 상태다.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많은 기록이 런던으로 옮겨졌는데

17세기경 문서를 싣고 에든버러로 돌아가던 배가 침몰하면서

모든 문서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죠."

                                                                                         - 아만다 빔 박사, 스털링 대학교

 

학자들은 중요한 자료가 사라진 상황에서 중세 스코틀랜드인의 삶에 관한 증거를 찾고자

역사를 면밀히 검토하며 지하까지 탐사해야 했다. 

 

수 년간의 연구 끝에 브레이브하트의 사라진 세계에 대한 청사진이 완성되었다.

그 첫걸음은 월레스의 출생지부터 찾는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브레이브하트가 태어난 곳은 바로 이곳 엘더슬리 지방이다.

현재는 복잡한 대도시인 그래스고의 교외 지역이다.

 

고고학자 데릭 알렉산더는 이곳을 자주 방문하며 월레스의 어린 시절에 대한 단서를 찾아왔으며

127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증거들을 찾고 있는 중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가옥 뒤의 정원으로 가서 증거를 확인하는 겁니다."

                                                                        - 데릭 알렉산더, 스코틀랜드 문화 보호 협회

 

몇몇 역사 지도는 월레스의 생가를 이런 구도로 묘사하고 있으며 각기 정확한 경계선까지 표시했다.

데릭은 이 현대 가옥 뒤로 흐르는 도랑과 이 경계선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울타리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겠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기 때문에

이곳의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려면 이 수로를 살펴보는 게 최선이죠."

                                                                             - 데릭 알렉산더, 스코틀랜드 문화 보호 협회

 

이곳은 브레이브하트 시대 이후 7세기 동안 건축과 개발이 계속 되어온 곳이다.

따라서 겨우 작은 모퉁이 하나만 보존된 상태이며 데릭의 조사 역시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돌들은 현대적인 정원 담의 일부이므로 바로 이곳에서 도랑을 파기 시작했죠.

하지만 곧 최근의 쓰레기 더미와 수많은 도기류를 비롯해 유리 같은 잡동사니가 쏟아졌는데

그 아래에서 발견된 예전 담도 같은 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죠."

 

데릭은 이 유적의 밑바닥에서 찰흙으로 방수 처리한 넓은 도랑을 발견했다.

 

"수로의 폭을 가로질러 쭉 뻗어 있었기 때문에 해자로서 유용하게 쓰였을 겁니다."

                                                                            - 데릭 알렉산더, 스코틀랜드 문화 보호 협회

 

또한 데릭은 목재 울타리의 흔적도 발견했는데 해자와 함께 방어 진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데릭에게 이 해자의 연대를 가르쳐 준 것은 조그만 유물 하나였다.

 

"저희는 도기류 파편 하나를 발견했는데

13세기경 중세 도기의 일부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월레스 시대와 일치하므로 대단한 유물을 발굴한 셈이죠."

 

 

이 도랑과 다른 곳에서 나온 증거를 통해 브레이브하트가 살던 시대가 커다랗게 드러났다.

이곳은 험툰이라고 알려진 대규모 거주지였다.

 

몇몇 가구가 숙소와 회관, 마구간, 대장간을 공동 사용했으며

농장 일꾼들을 위한 작은 집도 있었다.

 

또한 이 모든 건물은 튼튼하게 설계되었다.

 

"목공과 가구 제조 기술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아주 높았는데

목재를 다루는 솜씨는 장인에 가까웠습니다.

지붕은 가까이서 보면 이엉이나 박달나무 껍질로 엮었죠.

기와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와도 쓰였을 텐데요.

특히 굴뚝 근처에 많이 쓰였을 겁니다.

화덕이나 난로를 지필 때 발생되는 불꽃이 지붕에 떨어지면 곧바로 집 전체가 불타 버릴 테니까요."

                                                                                          - 리차드 오람 박사, 스털링 대학교

 

수직 기둥을 토대로 들보의 기둥에 꽂아 건물의 뼈대를 구성했고

잔가지를 엮어 그 위에 진흙을 바르는 공법으로 벽을 세워

혹독한 스코틀랜드의 겨울을 막아주는 효과적인 단열재로 활용했다.

 

또한 데릭은 월레스의 거주지에 훌륭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다고 믿고 있다.

 

해자의 끝에는 시선을 끄는 지름 8미터 가량의 판상 열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데릭은 이것을 탑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수로가 이쪽과 저쪽 방향으로 흘렀을 테고

바로 이 모퉁이에 둥근 탑이 서 있었을 겁니다."

                                                                   - 리차드 오람 박사, 스털링 대학교

 

이 석탑은 침입자들은 물론, 중세 스코틀랜드를 배회하던 늑대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했다.

 

데릭은 험툰이 농장의 사령부였다고 믿고 있는데, 

월레스가 부유했다는 증거다.

 

"목재라면 구식에다 하등하다고 취급하기 십상이지만

당시에는 목재 건물이 상당히 고급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곧 월레스의 가문이 아주 희소한 목재를 구입할 만큼 부유했다는 뜻이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스털링 대학

 

이 사실은 브레이브하트가 미천한 평민이었다는 속설과 어긋나며

대신 토지와 부를 소유했던 부유한 귀족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지금부터는 지하 유적 탐사를 통해 이 부유한 귀족들의 삶을 조사하고

브레이브하트의 성장기였던 중세 황금기를 살펴볼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브레이브하트로 알려진 윌리암 월레스를 타고난 전사로 묘사했지만

 

월레스는 가족의 권유로 교황의 보호 아래 있었던

수도사 집단에 몸을 의탁했던 또 다른 과거가 있었다.

 

월레스가 고향의 농장을 떠났을 땐 인생의 항로가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곧 월레스는 상상도 못했던 길을 걷게 된다.

 

우리는 이 조사를 통해 베일에 가려진 월레스의 사라진 세계를 밝히고

중세 스코틀랜드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월레스는 고향 엘더슬리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페이즐리 대수도원에서 기거했으며

오래된 수도원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월레스 시절엔 이 수도원이 클뤼니 파키요리였는데

클뤼니파는 부와 재화가 풍부한 곳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수도원 역시 웅장한 건물로 유명했다.

 

 

 

 

"12세기경 페이즐리 대수도원을 설립한 스튜어트 가문

바로 월레스 가문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월레스와 그 가족들에겐 무척 친숙한 곳이었던 셈이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스털링 대학교

 

월레스의 교육비는 스튜어트 가문의 수장이 부담했으며

바로 이 페이즐리 수도원에서 월레스는 한때 수도사로서의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엄격한 수도사의 규율에 따라 살았을 겁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성당에서 수도에 정진했다는 얘기죠.

또한 동시에 빈틈없이 짜여진 수업 일정도 소화했을 겁니다.

아마 경전과 신학 공부에 여념이 없었을 텐데

즉, 다방면의 교육을 받은 중세 시대 지식인을 낳는 곳이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스털링 대학교

 

과거 13세기경의 페이즐리 수도원은 부유하고 영향력도 높았으며 오직 로마 교황에게만 복종했다.

대수도원은 거대한 수도원의 중앙에 서 있었다.

 

회랑으로 연결된 대수도원은 헛간과 마구간, 창고 등 많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모두 담장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사들은 격리된 시설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수도사는 고립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 수도원 지하에는 정교한 하수 시설까지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이 하수 시설은 주요 건물에 모두 연결되어 있었으며

매일까지 발생하는 오물을 밖으로 배출시켰다.

 

이 하수 시설을 통해 수도원이 외부 세계와 특별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무려 500년 동안 사라졌던 문명 사회가 드러났다.

 

"이곳은 원래 수도원 화장실의 하수가 흐르던 곳이었습니다."

 

이 하수 시설이 맨 처음 다시 공개되었을 땐 550년 동안 쌓인 씰트로 꽉 막힌 상태였다.

몇주간의 공사 끝에 씰트가 모두 밖으로 배출되자

고고학자들은 3개월 동안의 발굴 작업에 고고학적 연구에 매진했고

결국 허리띠 고리에서 조율용 핀에 이르는 수백 개의 유물을 찾아냈다.

 

 

"이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요강입니다.

아마 한밤중에 수도사들이 이곳에 용변을 처리했을 겁니다.

또한 인간의 소변을 모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는데

믿거나 말거나 세제나 의류 살균제로 사용했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유물 중에는 월레스가 수도원에서 들었던 음악에 관계된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손으로 쓴 성가대 악보다.

 

 

"이건 합창단 악보의 일부인데

현존하는 스코틀랜드 최초의 성가대 악보라고 할 수 있죠.

3개의 목소리 파트로 나눠어 있는데 더욱 흥미롭고 멋진 건

중세 수도원 성가대의 원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유물들은 유럽 본토에서 가져온 천으로 쌓여 있었는데

이는 곧 중세 스코틀랜드가 고립된 후진국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또한 향신료와 식물의 잔재는 국제 무역에도 발을 디뎠음을 시사한다.

 

"이곳은 더 넓은 세상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유럽은 물론 더 멀리 떨어진 동쪽과도 교역이 있었는데

인도네시아 같은 곳에서 수입된 유물도 발견됐죠."

 

씰트와 모든 유물이 드러났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그 뒤에 남은 흔적에 감탄하고 있다.

바로 하수구 그 자체인데 500년의 세월의 풍화를 견디고 찬란했던 건축 공법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건 아주 뛰어난 석조 건축물로 첨단 공법이 사용됐죠."

 

이 하수구들은 당시 건축의 엘리트였던 마스트 메이씽들이 건축한 것이다.

 

 

"이 최고급 벽돌 하나하나에는 당시 장인들의 숨결이 묻어 있어요.

그리고 제작자를 알리기 위해 돌에다 표시를 남겼는데

완성한 벽돌의 개수에 따라 임금을 받았죠."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중세 스코틀랜드가 원시적이며 야만적인 곳으로 묘사되지만

전문가들은 이 하수구를 조사하면서 브레이브하트가 발달된 문명 사회의 일원이었음을 밝혀냈다.

 

"중세 스코틀랜드에 관한 편견을 깨고 새로운 일면을 보여 주고 있죠"

 

중세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강력한 권력를 과시했는데

그 권력의 중심부는 바로 이곳 그레스고 대성당이었다.

 

 

 

이곳에서 월레스는 학자에서 '브레이브하트''라 불리는 전사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월레스는 이곳에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로버트 위샤트 주교를 만나게 된다.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임명한 위샤트 주교로부터 

위태롭기 그지없는 스코틀랜드의 정치와 군사 상황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위샤트 역시 월레스가 교회의 기치를 전장에서 세워줄 인물이라 믿었다.

그레스고 대성당은 스코틀랜드에 현존하는 가장 웅장한 고딕 건축물로써 완공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당시엔 이 성당을 최대한 높이 지으려 했습니다.

높은 건물은 중요성과 교양, 소요된 돈을 상징했으니까요.

결국 교회의 권위와 신의 영광을 알리려는 것이었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이 대성당은 완공하는데만 무려 300년이 걸렸으며

한정된 재료와 도구만 주어졌던 석공들에겐 힘든 과제였다.

 

"당시엔 종이가 없었으므로 아마 모래판에다 이 대성당의 설계도를 그렸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절단법이나 건축 공법을 남들에게 전달했겠죠.

그리고 돌을 자르는 도구 역시 아주 간단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거대한 망치로 정을 내리치는 거죠."

 

석공들은 돌을 30미터 이상 들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기중기는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 사람이 굴려서 움직였죠."

 

대성당 건축에서 가장 힘든 과제는 높이 솟은 대성당의 엄청난 하중을 견디는 것이었는데

석공들은 줄지어 선 아치들을 서로 연결시켜 위쪽의 탑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치를 지탱하는 기둥이 건물의 층을 통과하며 솟아 있었고

이를 통해 성당의 상부 구조를 떠받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방문객의 영적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죠."

 

500년 전 이곳의 모습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내부를 석회로 칠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화려한 색깔로 치장했던 찬란한 성당에서  

브레이브 하트는 위샤트 주교의 후원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관구의 세입을 관장했던 주교는 스코틀랜드 최고 부자 중 한 명으로

월레스와 그 군대를 위한 물질적인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주교는 교회 독립을 유지하는 일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

주교는 그의 독립이 위태로우며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깨달았고

브레이브 하트가 스코틀랜드 독립에 앞장 설 인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결국 1296년 잉글랜드군은 국경에 집결했고

스코틀랜드와 교회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고 레노크의 왕실 거주지에서 있었던 두 번의 살인이

스코틀랜드의 역사의 행보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2. 브레이브하트(윌리엄 월레스)의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 투쟁!~

             레너크 성 탈환에서 스털링 다리 전투까지!~

 

 

1296년 봄, 브레이브하트는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 국경을 휩쓰는 광경을 목격했고

마침내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전역에 걸쳐 부유하거나 상업도시를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당시 엄청난 빚에 허덕이던 잉글랜드 왕실은

스코틀랜드를 세금을 거둬드릴 부유한 나라로 여기고 있었죠."

                                                                                            - 리차드 오람 박사

 

당시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에드워드 1세는 돈과 병사가 필요했다.

 

"당시엔 전쟁을 두고 소문이 많았는데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의 모든 재원과 최고의 병사들을 차출해서

해외의 잉글랜드 전장에 투입시킬 거라는 내용이었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에드워드의 함대가 차례로 마을을 함락하는 동안 스코틀랜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러한 점령은 짧은 전쟁 이후 뒤이어 곧바로 진행되었습니다.

베릭 지방도 에드워드 1세 점령 이후 참혹한 약탈이 이어졌죠.

하지만 이는 계획된 테러 전술이었습니다.

이 전술이 효과를 거두자 스코틀랜드의 다른 도시들도 잉글랜드군에 꼼짝없이 당했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이후 잉글랜드는 래나크로 시선을 돌렸다.

 

최신 발굴을 통해 월레스 시절 이 마을의 모습의 복원이 가능해졌고

이곳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살인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월레스는 저항의 봉기를 세우게 된다.

 

"이곳은 월레스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원래는 한가운데를 시내가 가로질렀죠.

이렇게 건물들이 물러나 있는 건 이곳이 오래된 시장 마을이어서인데

건물은 많이 현대화됐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거리가 이렇게 넓은 건 장날이면 노점이 많이 섰기 때문이죠."

                                                    - 데이비드 로스, <윌리엄 월레스를 찾아서>의 저자

 

레나크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도시로 특별 지정된 곳이었기 때문에

아주 엄격한 지시 아래 계획되고 설계된 곳이었다. 

메널이라는 옆길은 시장 바깥으로 이어지며 바둑판 모양으로 구성된다.

 

 

 

 

 

 

"왕이나 그 대리인이 와서 땅에 표시를 하면

예컨대 작은 도랑을 끊으며 이른바 토지 보유권에 맞도록 면적을 분할하게 됩니다."

 

레나크와 같은 왕실 도시 건설은 큰 성공을 거두며 유럽 전역에서 상인들과 장인들이 모여들어

곧 왕에게 엄청난 수입을 안겨 준다.

 

"사람들로 북적대며 시끄럽고 냄새도 나지만 활기 넘치는 역동적인 환경이었죠."

 

중심 거리 끝 오래된 마을 담 너머엔 성 펜티컨 교회가 있었다.

속설에 의하면 이곳에서 월레스가 연인 메리언을 만났다고 하며

이 교회에서 결혼했다는 전설도 있다.

 

 

 

 

"월레스가 결혼 후 메리언과 래너크로 온 때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아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조국의 독립 투쟁이 월레스에 의해 이 마을에서부터 시작됐으니까요."

 

일설에 의하면 메리언이 잉글랜드 병사에게 살해 당한 사건으로 인해

월레스가 투쟁의 기치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절묘하게 결합된 격인데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된 거죠.

당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아마 메리언의 죽음이나

잉글랜드 주둔군의 지나친 만행에 지친 나머지 월레스가 투쟁을 결심하게 됐을 겁니다."

 

월레스는 곧장 잉글랜드군이 주둔 중이었던 래나크의 성으로 향했다.

 

이 성의 실제 위치는 오랫 동안 확실치 않았지만

역사가 데이비드 로스는 이 둥근 언덕을 월레스가 복수를 감행한 장소라 믿고 있다.

 

"이곳은 아래쪽의 도랑인데 이 도랑 역시 중세 래너크 성의 방어를 담당하던 지역의 일부였죠.

성은 제 뒤쪽으로 솟아 있는 언덕 꼭대기 자리 잡았는데 대부분 목재로 건축되었습니다."

 

 

 

작은숲에 자리 잡은 래너크 성은

주위의 방어용 도랑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언덕을 세워 그 위에 건축했다.

 

언덕 꼭대기에 목재 말뚝을 치고

전투용 연단을 세운 다음 내부에는 주지사의 탑을 건축했다.

 

가교를 놓아 작은 숲과 벨리라 불리는 아래쪽에 위치한 안마당과 연결했는데

이곳에는 병사들의 숙소와 마구간을 비롯해 창고가 위치했다.

 

"목재 성은 신속하게 지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고

그와 더불어 아주 튼튼하기까지 합니다."

                                                                        - 리차드 오람 박사

 

마을을 내려다보는 성을 보면 21미터 길이의 언덕이 단지 방어용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꽤 인상적인 장소였을 겁니다.

수 km 떨어진 곳에서도 언덕 꼭대기가 확연히 보이니까요.

물론 잉글랜드군도 점령지임을 표시하는 깃발을 내다 걸었겠죠."

 

겉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실제로 래너크의 이 목재 성채는 난공불락이었다.

1297년 어느 여름밤 브레이브하트는 불가능을 현실화 했다.

감쪽같이 성에 침입해 잉글랜드군 사령관이자 주지사인 헤슬릭을 처치한 것이다.

 

"월레스는 아내의 복수를 갚고자 이 성에 침입한 후 성 내부의 건물 어딘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살인자와 마주하며 이렇게 말했죠.

'난 월레스다! 죽어라 헤슬릭!'"

 

월레스는 목재 성을 탈출한 후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주지사 헤슬릭을 살해한 브레이브하트의 행동은 사실로써 역사에 처음 기록됐다.

 

"전설의 신비로운 영웅이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죠."

 

브레이브하트의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이 월레스 휘하로 모여들었고

독립 전쟁의 서막이 올라가기 시작했죠."

                                                                             - 데이비드 로스

 

1297년 여름 내내 브레이브하트 윌리엄 월레스는 잉글랜드 점령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해 나갔다.

마침내 스털링 다리전에서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제동을 걸었다.

 

"스코틀랜드에겐 커다란 승리였는데

정치적으로 스코틀랜드 정부가 잉글랜드 통치자를 축출할 수 있었고

독립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 아만다 빔 박사

 

전쟁 상황이 급변하면서 이젠 단지 침략군을 막는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축출할 수 있는 시점에 다달았다.

 

"월레스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독립을 수호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잉글랜드군을 스코틀랜드 성에서 축출해야 했죠."

                                                                                       - 피오나 왓손 박사

 

당시 스코틀랜드 전역에 산재해 있던 성은 군사력과 재력 및 권력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한때 웅장했던 모습은 빛이 바랬지만

이제는 브레이브 하트 시절 당시의 모습을 재현할 증거를 찾아냈다.

 

성의 함락은 월레스 전략의 핵심이었으며

성공하기 위해서는 늘 난관을 넘어서야 했다.

 

언뜻 보기에 노크리브는 강력한 성채 같아 보이진 않지만

서기 490년 이후부터 건축가들이 이곳을 천연의 요새로 지목해왔다.

 

 

 

 

이 성은 호수 중앙에 위치한 섬에 떠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브레이브 하트가 이 성의 함락을 위해

사력을 다했고 최전선에서 부하들을 이끌었다.

 

"월레스는 성쪽으로 헤엄쳐 나가 점령군의 배를 탈취했습니다.

이 깊고 차가운 호수에서 대단한 전공을 세운 거죠.

월레스는 다시 배를 강가에 대고 18명의 부하를 배에 태웠습니다.

요즘 같아선 강 수위가 성벽까지 차오르기 때문에 궁수에게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성을 둘러싼 성벽은 높이가 겨우 4.5미터 정도였으며

잉글랜드 점령군이 호수라는 지리적 이점만 철통같이 믿었던 탓에

브레이브하트의 게릴라 전술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월레스 일행은 점령군 30명을 죽였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살려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후 무려 7세기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이 돌벽이 건재하다는 겁니다.

월레스와 그 부하들이 기어올랐던 바로 그 벽이죠."

                                                                                                                                           - 데이비드 로스

 

당시로선 이런 석조 건물의 공사가 엄청난 모험에 가까웠다.

 

"이 오래된 성을 구경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 과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튼튼하게 지어졌다고만 여길 겁니다."

 

이 2.5미터 두께의 벽은 회반죽을 칠한 돌을 두 겹으로 쌓았는데

무거운 돌덩이리를 호수 너머로 운반한 다음 모양대로 잘라 제자리에 올려 놓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성의 건축과 관련된 자료는 전부 소실된 상태며

7세기 동안 내린 비가 모든 물리적인 증거를 물로 씻어버렸다.

 

"당시 석공들은 건축 공법상의 많은 난재를 극복하고서 이처럼 복잡한 건축물을 완공했을 겁니다."

 

이런 난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브레이브하트 시절의 성으로써 가장 보존이 잘된 보스웰 성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보스웰 성은 1296년 잉글랜드군 침략 당시 절반만 지어진 상태였는데

1년 후 브레이브하트의 군대는 이 돌 방벽을 차지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오늘날 이 튼튼한 방어 시설은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성들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지금 보시는 이 보스웰 성은 13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지어진 가장 웅장한 성일 겁니다.

이 성을 세운 사람은 윌리엄 머레이인데 정말 멋진 작품을 완성해냈어요."

                                                                     - 앨런 러더포드, 스코틀랜드 역사가

 

갑부로 알려진 윌리엄 머레이는 스털링 다리에서 전사한 브레이브 하트의 공동 지휘관 앤드류 머레이의 삼촌으로

그런 사적인 이유로 잉글랜드 점령군으로부터 이 성을 탈환하려는 월레스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이 성은 말 그대로 기반암 위에 건축되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죠."

 

이 유적을 통해 중세 성의 구조를 재창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성의 중심부에는 논존이라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는데 4층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우선 지하는 식량과 무기 창고로 쓰였으며 1층엔 웅장한 규모의 연회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그 위층은 하인들이 쓰는 일반적인 방이었으며 

꼭대기 맨위의 빈 공간은 멋진 욕실을 갖춘 펜터하우스로 거대한 창을 통해 바깥의 멋진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보스웰의 정교한 공법은 외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중세의 화장실인데

성 내부의 하수와 배설물을 모아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내벽을 보면 중세 건축의 공법이 그대로 드러난다.

 

"벽의 상부를 보시면 움푹 들어간 자국이 있는데, 이 성을 건축할 때 쓰였던 것입니다."

 

'발판 구멍'이라 불린 이것들은

발판이 실제로 두꺼운 벽 내부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바로 그 밑에 움푹 들어간 작은 것은 석공들이 집게나 쬐임새를 통해 

무거운 돌을 27미터 가까이 들어올리는 데 쓰였다. 

 

 

"아마 현장 공사를 책임진 사람은 마스터 메이슨이었겠지만

후원자로부터도 많은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

 

머레이는 지방 전역에서 기술과 예술 감각을 습득한 스코틀랜드 최고의 석공을 고용했으며

각 석공들은 완성한 작품에 자신만의 상징을 새겼다.

 

석공들은 18미터 높이에 두께가 4.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방벽을 쌓았고

화살 표시를 한후 흉벽으로 덮었는데

투석기와 같은 공성 무기의 공격에 견디기 위한 조치였다.

 

방벽이 완공되면 안마당엔 예배당과 창고, 두엄 및 마구간과 숙소가 들어서서

실제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요새화된 마을을 구성했다.

 

브레이브 하트의 공격에도 보스웰 성은 꺽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윌리암 머레이는 훨씬 더 인상적인 요새를 세우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웰 성 밖 정면에는 잔디로 뒤덮인 유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마 공격을 받아 파손된 성의 일부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발굴을 진행과 결과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의 일부로 드러났죠.

건축가들이 의도한 바는 이중탑을 가진 거대한 문루였을 것입니다."

 

이 기초들을 토대로 최초로 머레이가 품었던 꿈을 완성해봤다.

 

 

 

5각형 모양의 이 성은 8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스코틀랜드에서 지어진 가장 웅장한 성이었을 거라 보이며 강력한 점령군을 수용할만큼 넓었다.

 

하지만 머레이는 자신의 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잉글랜드군의 첫번째 침략 당시 사망했다.

브레이브하트는 완공되진 못했지만 여전히 튼튼한 보스웰 성의 방어를 뚫지 못하자

결국 마지막 남은 함락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바로 '호위 전술'이었다.

 

월레스 군대는 보스웰 성의 물자 공급을 차단한 후

14개월을 기다려 결국 굶주린 잉글랜드군을 성에서 끌어냈다.

 

보스웰 성은 그후에도 그 중요성 때문에 보수와 함락을 거듭 했다.

성의 보수와 함락에 너무 많은 물자가 수송되고 소모되어 큰 부담으로 작용하자

스코틀랜드군은 다시는 적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여기 보이는 거대한 돈존 유적은 스코틀랜드군이 파괴한 겁니다.

이 돈존의 일부를 무너뜨림으로써 잉글랜드군이 다시는 점령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하지만 브레이브하트에게는 다른 어느 성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성이 하나 있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인 스털링 성이었다.

 

 

수 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원래의 모습은 파괴되었지만

이제는 700년 전에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되살려 볼 수 있게 되었다.

 

13세기는 스코틀랜드 성 건축의 황금기였고

이는 곧 강력한 방어력과 방대한 거주지라는 차세대 건축물로 특징지어졌다.

 

이곳은 스털링 다리에서 거둔 브레이브하트의 대승리에도 한층 더 중요한 의미가 존재한다.

 

"스털링 성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이 성을 통해 스코틀랜드 북부를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만다 박사

 

브레이브하트가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서는 이 성을 반드시 차지해야 했지만

그때까지 스코틀랜드군은 천연의 요새인 스털링 성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성 중에선 최고의 입지를 자랑할 것입니다.

성이 자리 잡은 절벽 끝은 화산암 기반으로 3억 5천 년 전에 형성된 지형입니다."

 

깍아지른 듯한 76미터의 높이의 절벽 가까이에 자리 잡은 스털링 성은 최고의 군사 요충지다. 

하지만 스털링 성은 단순히 강력한 요새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상징적인 의미를 파악하려면 브레이브 하트 당시의 모습을 복원해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성의 건축에 숨겨진 놀라운 실체적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털링 성은 스코틀랜드 왕들의 거주지로써 조건이 완벽했다.

 

 

"이곳은 아주 중요한 왕실 소유의 성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건물이 모두 성 주위의 절벽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전체적인 성 구조의 가장 큰 장점이며 왕실 거주지로선 천혜의 요건을 갖춘 곳이었죠."

 

이 성은 무려 200년 이상 왕실의 거주지였다.

 

"당시 왕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건물들의 세련미를 유지하는 것이었죠."

 

따라서 브레이브하트 시절의 스털링 성은 현재와는 현격하게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돌벽은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고 늘 석회칠을 했는데

화려한 색상으로 칠했을 가능성도 아주 높습니다."

 

유행에 따라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확연히 보일 때만이 성의 존재 가치가 있었으며

스털링 성은 이런 점에서 가장 뛰어난 면모를 자랑했다.

 

"보통 성이라고 하면 거대한 요새로만 생각하고

늘 포위 공격에 대비한 준비를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런 성은 신분의 상징으로

부와 세련미를 과시하는 한 방편이었으며

자신의 권위를 표시하는 수단이었죠."

                                                                      - 리차드 오람 박사

 

월레스가 성을 차지하기 위해 왔을 때는 이미 결정타를 날린 뒤였다.

스털링 다리에서 자신의 부대를 앞세워 거의 모든 잉글랜드군을 괴멸시킨 것이다. 

 

몇몇 잔존 병력들도 보급품 부족과

브레이브하트의 예상치 못한 승리에 압도되어 모두 몇일 이내에 백기를 들었다.

 

브레이브하트가 스털링 성을 장악하자

이제 남은 잉글랜드군을 조국에서 축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패배에 자극을 받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다시 병력을 전쟁터에 투입한다.

 

곧 잉글랜드 국왕은 스털링에서 16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폴커크 마을에서 브레이브하트와 맞서게 된다.

 

이번엔 에드워드 국왕이 내세운 신무기가 승패를 결정지었다.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장궁을 사용해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어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앞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속수무책이었죠."

                                                                                            - 피오나 왓손 박사

 

브레이브하트는 목숨은 건졌지만 혜성처럼 나타난 1년 전처럼 몰락도 그만큼 빨랐다.

 

"월레스는 폴커크 패배 이후 수호자의 자리도 포기했어요.

그의 지도력은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폴커크에서의 패배 이후 지도자로서 부족함을 느꼈을 겁니다."

                                                                                       - 아만나 빔 박사

 

하지만 월레스는 투쟁을 이어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을 이어가기 위해 해외로 나섰다.

 

"이듬해에는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와 교황의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1304년 월레스가 사력을 다해 탈환한 성이 다시 잉글랜드군의 손에 넘어가자

브레이브하트는 다시 돌아와 최전선에서 싸웠다.

 

하지만 몇달만에 친구에게 뼈아픈 배신을 당하고

잉글랜드군에 붙잡힌 후 런던의 법정에서 반역죄를 언도 받았다.

 

 

 

월레스는 거리를 지나 스미스필드까지 끌려간 후

이곳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사지가 찢기며 천천히 고통스런 최후를 맞게 된다.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지만 월레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죠.

조국 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했을 뿐 아니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 줬으니까요."

                                                                                                - 피오나 왓손 박사

 

그후 42년이 흐른 후에야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쟁취하게 되지만

브레이브하트의 정신은 조국을 감동시켰다.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월레스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없어요.

그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스코틀랜드의 생존과 애국, 투쟁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으니까요."

                                                                                                                      - 아만나 빔 박사

 

윌리엄 월레스의 잃어버린 세상은 스코틀랜드 투쟁의 발상지였으며

월레스는 브레이브하트로서 조국 수호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

 

그리고 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스코틀랜드는 그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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