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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왕릉여행◈ 스크랩 제4대, 영릉(英陵)-최고의 성군, 최선의 내조로 찬란한 업적을 남기다. 세종, 소헌왕후
길손旅客 추천 3 조회 157 12.06.12 09:41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제4대,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 합장릉(合葬陵)

영릉(英陵)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43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031-885-3123

 

세종 이도

1397(태조6년)~1450(세종32년)

조선4대왕 (재위 1418~1450)

아버지는 조선3대왕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어머니는 태종의 원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로 4남4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명은 도(陶)이며, 자는 원정(元正)입니다.

 

소헌왕후 심씨

1395(태조4년) ~1446(세종28년)

조선4대왕 세종의 비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청천부원군 심온(靑川府院君 沈溫)의 딸입니다.

태종8년(1408년)에 충녕군과 혼인하며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지고, 태종17년(1417년)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습니다. 태종18년(1418년)에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봉해지면서 경빈(敬嬪)에 봉해졌고, 세종이 즉위하며 공비(恭妃), 세종14년(1432년)에 왕비(王妃)로 바꾸어 봉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8남2녀를 두었으며, 왕세자 향(珦, 조선5대왕 문종), 수양(首陽, 조선7대왕 세조), 안평(安平), 임영(臨瀛), 광평(廣平), 금성(錦城), 평원(平原), 영응(永膺)의 8남과 정소(貞昭), 정의(貞懿)의 2옹주를 두었습니다.

그 외 세종은 후궁을 10명을 두었으며, 10君 2翁主로 모두 2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세종대왕(世宗大王),

너무도 많이 잘 알려진 세종은 우리나라 역대군왕 중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종을 왕중의 왕 이라 하여 대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54세로 승하하며 32년간을 왕으로, 살아생전의 업적도 있지만 세종과 소헌왕후가 잠든 영릉(英陵)은 풍수지리에 입각한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왕릉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원래 아버지 태종의 뒤를 이을 사람은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입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한 생활은 결국 신하와 태종까지도 등을 돌리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둘째형인 효령대군이 있었습니다만, 그의 그릇은 왕이 되기에는 부족한 듯 합니다. 결국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봉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 양녕의 폐위를 반대하던 황희(黃喜)등의 조정대신들은 숙청당하거나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효령대군은 왕세자 책봉에 기대를 하였으나 그렇지 못하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됩니다. 

처음부터 충녕이 냉큼 왕세자의 자리에 올랐던 것은 아닙니다. 이유인즉, 태종의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까닭이고, 정치적인 변화가 있을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세종은 비 소헌왕후 심씨의 간언대로 왕세자의 자리를 몇번을 사양하였고, 끝내 태종의 양위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님을 알게 되자 태종18년(1418년) 6월, 왕세자로 책봉이 되고, 같은 해 8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4대왕으로 즉위합니다. 이렇듯 강하게 밀어부친 왕세자의 자리, 그 이면에는 태종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양녕의 방탕한 생활에 효령과 충녕 세아들과 그 주위의 대신들이 권략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것이지요. 태종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불러온 골육상쟁을 자신의 아들들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종에게 왕위를 안전하게 계승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는 군사권한과 국가중대사안에 대하여는 친히 관여하겠다 하였으니까요. 이에 세종은 사실상 형식적인 임금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태종의 힘을 등에 업고 왕의 기틀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세종은 하나하나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 많은 업적을 남깁니다.

세종2년(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면서 유교적인 제도를 정비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을 만들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합니다. 심지어 세종의 왕세자 봉위를 반대 하다가 파주로, 남원으로 유배를 간 이조판서 황희를 불러들임으로 바른 사람을 옳은 자리에 앉히는 등용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지요. 

세종은 명나라와의 조공정책에서도 금과 은등의 세공을 말등으로 바꾸었으며,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회유정책을 ?으나, 당시 막부 일본의 상황에서는 통제가 되질 않았고, 우리나라 남해안의 노략질은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세종1년(1419년), 이종무(李從茂) 장군을 보내어 무력으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는 대마도 정벌입니다. 당시 이종무는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릴수도 있는 방법으로 안이하게 정찰대를 조직하여 보냄으로 180여명을 죽게 만들었지요. 끌내는 대마도 도주가 항복함으로서 대마도를 경상도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니 알고보면, 독도도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인것이지요. 

세종4년(1422년)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두만강변의 6진과 압록강변의 4군을 개척하기에 이릅니다. 이로서 두만강, 압록강의 이남지역까지 조선의 영토가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종28년(1446년) 음력9월, 조선에 고유문자가 탄생을 하게되니 '훈민정음(訓民正音)'입니다.

집현전 학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선로(李善老), 정인지(鄭麟趾), 이개(李塏), 최항(崔恒)등의 연구를 통해 반포하게 됩니다. 한자를 모르고 지내던 백성들이 글을 쓰고 일게 한것이지요. 처음에는 언문등으로 불리었으나, 20세기 들어 주시경선생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글자가 됩니다. 이로서 집현전 학자들을 통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에 이르고, 기존의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 병진자(丙辰字)등을 주조하여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학문적인 성과는 기술적인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장영실(蔣英實)등을 도모하여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고,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 측우기등을 발명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박연(朴堧)등에 명하여, 중국음악인 아악을 정리합니다. 또한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된 공법(貢法)을 제정하기도 하는등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어학을 비롯하여 정치, 농업, 의학, 법률, 역사, 문학, 지리, 천문등 과록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어리시절부터 몸이 허약하였습니다.

거기에 책을 좋아하여 늘상 책만 보고 있어 몸은 약해졌습니다. 그로인해 육류위주의 식단을 좋아했으며, 대식가로 몸이 비대하였습니다. 집권 후반, 중풍과 노안등에 시달리며 병석에 자주 눕는일이 잦아들다가 세종32년(1450년), 가장 애지중지하더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보령54세로 승하합니다. 

 

세종이 승하한 때는 소헌왕후가 승하한지 4년 뒤로, 

효자인 세종은 부왕 태조를 죽어서도 모신다하여 헌릉의 서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하였고, 스스로도 그 자리에 수릉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지관들은 길지가 아님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세종의 뜻에 따라 소헌왕후와 합장 하였으나 풍수상 흉당으로 예종 즉위년(1468년)에 지금의 여주로 천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서지 않고 세종의 뒤를 조용히 보필한 내조가 있었으니, 소헌왕후 심씨입니다.

심씨의 어린시절은 제법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심온과 항라아버지 심덕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당대 명문인 청송심씨의 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상류층 사대부의 집안에서 자란 규수로 언문과 학문등을 배웠으며, 사대부를 이끌어 가기 위한 예법을 배우고 있었지요.

 

그러던 14세가 되던 해,

충녕군의 간택령이 내려지고 심씨가 충녕군의 배필로 정해집니다. 당시 우승지의 벼슬에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왕자의 부인이 됨을 크게 기뻐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아직 태종이 두 눈을 부라리고 외척 숙청에 나서고 있을 때인 것입니다. 충녕군과 혼례를 올리고 경숙옹주로 책봉이 되어 대궐에서 나와 살게 되었는데, 사실 충녕군은 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실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야욕을 가진 왕자였습니다. 심온 역시 태종의 사돈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친 인물입니다. 이쯤 된다면 태종은 세종의 왕권을 위해서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심씨 집안에 타격을 주게 될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할때 즈음,

충녕은 정치적 야심을 깊이 숨긴채 양녕의 패륜을 여기저기 알리고 있었지요. 여기에 맞추어 심씨는 아버지를 통하여 충녕이 어진 인물임을 조정대신들에게 은근히 알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세종은 부인 민씨와 장인 심온의 전략으로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목적은 양녕을 폐하고 다음 왕세자를 정할때 대신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충녕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것입니다.

태종의 비 민씨는 양녕의 장자를 세워야 한다 주장하였고, 황희는 끝까지 양녕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로 보이지 않는 암투속에 태종은 형제들끼리의 싸움이 일어날까 걱정되어 충녕을 왕세자로 올리기로 마음을 먹게 된것입니다. 

 

정치적인 변화가 있을때마다 피비린내를 풍긴 태종,

심씨는 충녕에게 전위를 사양하라 이르게 됩니다. 물론, 세종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요. 태종이 누구였던가요?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인물입니다. 또한 민씨응 어떠한 인물인가요? 태종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가 센 여장부입니다. 감히 양위를 받았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세종은 세자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충녕은 이를 거두어 줄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태종의 결심은 이미 굳은듯,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종의 정권에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볼수 있겠지요.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결국 충녕군은 왕위에 올라 조선4대왕 세종이 되었고,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세종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군사와 중요정치사안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관여를 하고 있던 태종이었습니다. 

 

이 후 심씨는 충실한 왕의 내조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본인의 마음과 달리 세상은 그리 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심온의 권세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음입니다. 국왕의 장인이었고, 영의정에 제수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온은 명나라에 세종이 전위받은 사실을 알리고 그에 대한 사례를 하는 사은사로 뽑히게 됩니다. 그렇게 명나라로 떠난 뒤,

'강상인의 옥사(姜尙仁 獄事)'가 터지게 됩니다.

이는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에 관련 된일을 태종이 아닌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두고 강상인은 의금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강상인(姜尙仁)과 박습(朴習)은 태종의 사병으로 훗날 병조참판과 병조판서를 주어 태종이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심복으로 심어 놓은, 말 그대로 상왕의 오른팔들이었습니다. 강상인의 옥사로 병조판서 박습의 이름이 거론 되었고, 기어이 심온의 이름이 거론 되었습니다.이로인해 심복이었던 강상인과 박습을 사형에 처했으며,

결국 이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음에도 심온은 명나라에서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옥사의 수괴로 몰아 심문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처형을 하게 됩니다. 훗날, 이것은 심온의 세력이 커져 세종이 왕권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것으로 생각한 태종의 방편이었습니다.

 

이는 곧 당대 명문가였던 심씨집안을 천민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건이 됩니다. 

친정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으나, 심씨는 눈물조차 흘릴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 이후 여전히 세종과 신씨는 태종의 문안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태종은 며느리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알게 되지요. 당시 궁중에서는 '아비가 대역죄인이거늘, 그 딸이 왕후로 있을수는 없다'면서 왕후 퇴출을 주장하였습니다. 태종은 이에 소헌왕후 민씨의 페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도록 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살벌하던 시대는 태종의 승하로 막을 내리고, 

세종6년(1424년), 세종은 심씨를 위하여 친정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합니다. 외조부집을 찾는다는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친정어머니를 만나게 주선한 것입니다. 천민으로 전락한 민씨집안에는 여인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상인의 옥사와 함께 처형 되었고, 남은 몇몇도 노비로 끌려 갔던 것이지요. 이 후에도 세종의 소헌왕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국가의 중대사한 일이 생길 경우에도 심씨와 먼저 의논을 할 정도였다 합니다. 

결코 왕후스럽지 않은 삶을 살다간 비. 소헌왕후는 세종28년(1446년), 둘째 아들 수양의 집에서 보령52세로 승하 하였습니다. 

 

 

금천교와 홍살문

길게 이어진 참도의 끝에 정자각이 보입니다.

 

원래의 영릉(英陵)은 헌릉의 옆이었습니다.

지금의 영릉으로 천장한 것은 예종1년(1469년)의 일로, 그 자리가 풍수상 흉당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영릉의 정문을 들어서면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 세종전이 자리를 합니다. 세종의 위업을 만날 수 있도록 전시해 좋은 공간입니다. 또 하나의 문인 훈민문을 지나면 광대한 능역입니다. 

연못과 금천교, 홍살문이 서고 수복방과 수라간이 좌우에 그리고 중앙에 정자각이 섭니다. 그 뒤로 사초지 위로 능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봉분은 같이 하였으나 석실은 다르게 꾸며져 동쪽이 소헌왕후, 서쪽이 세종의 능침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최초의 동봉이실의 합장릉입니다. 영릉의 릉은 훗날 천장한것으로 세조의 광릉을 조성한 뒤가 됩니다. 이에 합장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현궁의 석실 제도도 회격으로 바꾸었습니다.

능침 주위로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의 동자석주에는 한자로 12지를 표시하여 방위를 표시하였습니다. 능침앞에는 혼유석 둘을 놓았고, 장명등석을 놓아 합장릉임을 알립니다. 봉분 주변으로 석호, 석양을 좌우로 2쌍씩 8마리를 놓아 능을 수호하고 있으며, 도, 서, 북의 세방향에 곡장을 둘렀습니다. 중계에 문석인 한쌍과 석마를 놓았고, 하계에 무석인 한쌍과 석마가 놓여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영릉,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조성하였습니다.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능역의 광활함이 상쾌하여 언제 찾아도 좋은 곳으로 특히, 봄이면 능역의 우측능선을 따라 진달래 꽃밭이 화려하게 피어납니다. 또한, 여주 남한강변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신륵사가 자리하는데, 이곳이 영릉의 원찰입니다.  

조선 최고의 성군, 그리고 성군을 만들어 받쳐주던 내조자가 잠든곳, 경기도 여주 영릉(英陵)입니다.     

 

정자각

 

다른 정자각과 달리 영릉의 정자각에는 세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정자각을 오르는 동편의 계단으로 신계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두개의 계단이 설치 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비각

 

조선최초의 동봉이실 합장릉

하나의 봉분아래 왕과 왕비 두개의 광을 마련한 합장릉으로 혼유석이 두개로 합장릉임을 알리고 있으며, 고석이 5개에서 4개로 바뀌었습니다.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열두칸 돌렸으며, 동, 서, 북으로 곡장을 둘렀습니다.

 

장명등석

 

 

 

 

 

 

 

 

 

 

 

INFO...

영릉(英陵)제향일 매년(양력) 4월 8일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43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031-885-3123, 3124

관람시간 하절기 09:00~18:30, 동절기 09:00~17:30

관람요금 대인 500원, 소인 300원 ※한장의 티켓으로 세종 영릉과 효종 영릉을 관람 가능합니다.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주차요금 무료

 

 

 

 

by 박수동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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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6.12 09:57

    첫댓글 역사 공부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 작성자 12.06.13 10:09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 12.06.12 10:33

    세종대왕에 대한 능과 주변의 발명품에대한 설명을 잘 보고 갑니다 고생하셧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2.06.13 10:10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중입니다.

  • 12.06.12 17:59

    역사 공부 했읍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 작성자 12.06.13 10:10

    조선의 역사가 생각보다 무지 복잡하네요.ㅡㅡ;;
    열공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 12.06.13 09:50

    위대한 성군의 업적을
    두루두루 소개하셨네요.
    좋은 내용과 알찬 역사적 사료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2.06.13 10:11

    감사합니다.
    혹여 틀린 글이나 내용이 있으면 바로 지적 부탁 드립니다.

  • 12.12.08 11:16

    좋은그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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