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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웹북》제5회 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 이병희
찹쌀떡을 먹기까지
차가운 눈이 내리던 날, 어둠 속에서 달리던 나는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좁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던 어머니는 길거리에 쓰러져 나를 낳았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보다 앙, 다문 잇새로 새어나오는 피를 먼저 보았다. 어머니는 멀뚱멀뚱하게 보고 있는 오빠에게 턱짓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오빠는 어머니가 입학 선물로 사준 가위로, 색종이나 수수깡을 자르기 전에 탯줄을 먼저 잘랐다. 어머니는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입가의 피를 훔쳤다. 나는 깊은 주름 같은 골목길에서 그렇게 가족과 만난 것이다.
어머니는 춥고 외로운 콘크리트 구석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나를 꼭 안고 있었다. 타닥타닥, 어머니의 가슴은 타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의 가슴에서 온기와 열기가 전해져 왔다. 나의 몸은 피로 덮여 있었고, 어머니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댈 곳 없이 힘들게 몸의 중심을 잡고, 뜨겁게 부은 손으로 나의 머리에 묻은 피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피도 훔쳤다. 코끝을 쏘는 비릿한 어머니 냄새. 믿어지지 않지만,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은 내 몸 어딘가에 고이 남아 있다. 촉촉한 눈망울로 나의 눈을 보며 힘들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눈과 손의 비릿한 냄새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다급하게 뛰어오는 오빠의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오빠는 어머니에게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물수건을 건넸다. 오빠의 손엔 빨간약도 들려져 있다.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고 있는 오빠의 붉어진 눈동자.
“죽지 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들은 말은 ‘죽지 마’라는 오빠의 외침이었다. ‘신기해’나 ‘예쁘다’는 말이 아닌, ‘죽지 마’라니. 오빠는 나를 만지지도, 만질 생각도 없는 듯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오빠의 얼굴에선 그냥 눈물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때 무엇인지 확인이 불분명한 어두운 물체가 우리를 내려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너무나 어두워서 투명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길에서 어머니, 오빠, 어두운 물체를 처음으로 봤다.
*
어머니는 나를 한 번도 때리지도, 윽박지르지도, 혼을 내지도, 닦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딱 한 번 어머니가 나를 닦달한 적이 있었다. 군에 간 오빠에게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생리가 시작되고, 사춘기였던 나는 어머니에게 반항하며 편지 쓰는 일을 계속 미뤘다. 쓰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귀찮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편지지와 만년필을 사다줬다. 어머니는 겨울에 보일러도 켜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주전자로 물을 끓여서 찬물과 섞어서 씻는 사람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비싼 만년필을 사온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편지를 붙이기가 무섭게 오빠의 답장은 바로바로 왔다. 오빠는 ‘특급 이등병’으로 고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특급 열차도 아니고, 특급 이등병이라니, 하면서 나는 웃었다. 그리고 오빠는 군대에 와서 많은 것을 배워서 좋다고 했다. 일주일 안에 중대 인원 100명의 이름과 계급을 모두 외워야 했기에 암기력과 집중력이 좋아졌고, 전국에서 모인 사병들로 인해서 사투리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기 전에는 매일매일 아침마다 알통 구보를 하기 때문에 체력이 좋아졌고,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해서 추위에도 강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작력이 늘어났다고 했다. 매일매일 주간에 한 번, 야간에 한 번씩 보초 근무를 서는데, 그때마다 야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보초 시간을 알차고도 빠르게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오빠는 군대에 가서 암기력, 집중력, 체력, 창작력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매번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어머니와 나랑 같이 했던 이불 때리기를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청결이 중요하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마당에 이불을 널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 방망이로, 오빠는 오빠 방망이로, 나는 내 방망이로 함께 이불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오빠는 나에게 축하한다며 선물로 웃긴 얘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오빠가 또 어떤 얘기를 해줄지 궁금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오빠가 입을 열었다.
“나 기스트야.”
“오빠, 바보구나. 기스트가 아니라 기프트라고 하는 거지.”
“기스트가 아니라 기프트가 맞아?”
“당연하지. 선물은 영어로 기프트지.”
오빠가 잠시 입을 달싹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내가 기프트다.”
나는 겉으론 웃으며 좋아했지만, 오빠의 행동이 싱겁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좋은 소식.”
“뭔데?”
“나, 예비군 면제됐다.”
“치, 그게 뭐야.”
“예비군 훈련 가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
“그냥 놀다 온다면서?”
“노니까, 귀찮지.”
“피, 그게 뭐야.”
오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오빠와 나는 서울의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평상에 앉아서 노을이 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오빠가 가만히 나의 손을 잡고, 심심하다면서 이불을 털자고 했다. 오빠와 나는 서로 물장난을 치듯, 한참 동안 신나게 이불을 털었다. 숨을 헉헉거리던 오빠가 슈퍼에 가자고 말했다. 오빠는 내 손을 꼭 잡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슈퍼에서 맥주 두 캔하고 쥐포를 샀다. 오빠는 나에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집으라고 했다. 나는 없다고 말하면 오빠가 서운할까 봐, 생리대를 하나 집었다. 오빠는 생리대를 집는 나를 보고 웃으며, 내가 좋아하는 미니쉘 초콜릿을 계산대에 올려놨다.
63빌딩 전망대보다 높은 곳, 남산 타워 전망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우리 집 평상에 앉아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 봤다. 오빠가 맥주 캔을 따서 나에게 건넸다. 오빠는 나에게 건배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오빠는 건배를 하면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자고 했다. 오빠와 나는 동시에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고 맥주를 마셨다.
“메멘토 모리가 뭐야?”
내가 오빠한테 물었다.
오빠는 소풍을 가는 아이의 얼굴을 하며 말했다.
“로마 황제들이 전쟁에 이기고, 전사한 적들의 시체를 보면서 축배를 들 때 하는 말이야. 지금은 이렇게 축배를 들지만, 언제 저들처럼 죽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이지. 즉, 메멘토 모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며 축배를 드는 행위야.”
축하의 건배도 아니고,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축배를 들다니. 그럴 거면 차라리 전쟁을 하지 말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갔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 남매를 스치고 흘러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이 연이어 불어왔다.
*
나는 몇 달이 지나서야 알았다. 오빠가 ‘기스트’라는 위장관기저종양이라는 암에 걸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암에 걸린 지 5년째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빠는 악성 종양이라서 근치적절제가 불가능하며, 방사선요법으로도 효과가 없고, 절제술도 불가능하고, 다른 암종에서 사용되던 항암제로의 치료도 5%미만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요점은 오빠의 건강이 심각하다는 거였다. 오빠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약은 글리벡이라고 했다. 오빠는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타닥타닥. 오빠는 위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위에 보관된 연료를 빨리 태워버려서 소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날이 갈수록, 조금만 걸어도 피로해 했고, 아기들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잤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글리벡이라는 약까지 효용이 없게 되었다. 위에 있던 악성 종양이 간으로 전이됐고, 뼈까지 전이됐다고 했다. 오빠는 글리벡 대신 임상 실험 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의사가 설명해준 부작용이 나타났다. 오빠의 손과 발에는 갑각류의 껍질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돋았다. 쉽게 건조해진 오빠의 발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피가 흘러나왔다. 오빠의 튼튼한 사지는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사위어 갔고, 음영이 깊게 질 정도로 볼은 깡말라 갔다. 오빠는 머리숱도 적어졌고, 반백(斑白)이 되었다. 나에게 시간을 조절하는 권능이 있다면, 잠시나마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아니,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나는 들끓는 열망과 열정으로 없는 시간도 쿵쿵 만들어 쓰면서, 열심히 살아온 오빠에게 왜 그런 나쁜 병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빠의 열망과 열정을 관(棺)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 집어넣고 다시는 열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질해 버린 기스트라는 악성 종양이 미웠다. 나는 오빠가 누리지 못한 청춘의 꽃을 앗아간 기스트가 발발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오빠가 ‘나 기스트야.’라고 말했을 때, 나는 오빠의 말을 ‘내가 기스트야.’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오빠가 ‘기프트’를 ‘기스트’로 잘못 발음한 줄 알았다. 오빠는 학원도 한번 안 다니고, 학교 수업만으로 명문대학을 입학하고, 졸업했다. 그런 오빠가 선물이 영어로 기프트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는데. 나는 그때 왜 ‘기스트’를 ‘기프트’로 잘못 알아들었을까. 오빠에게 핀잔을 줬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
오빠는 병세가 더욱 악화 되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오빠는 산소 호흡기를 끼고, 링거액을 주렁주렁 달고, 불규칙한 호흡을 힘들게 뱉어 냈다. 침대 곁에는 심전도와 혈액 속의 산소 포화도를 모니터링 하는 기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저 기계들은 몇 명의 생명을 지켜봐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끼니 거르는 것은 절대 참지 못했던 오빠였는데, 지금은 한 숟가락 정도만 먹어도 금세 토해버리고 말았다. 잠들어 있는 오빠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오빠의 상태를 체크했다. 간호사의 기계적인 손동작과 일정한 패턴들. 나는 그런 간호사의 기계적인 패턴들이 싫었다. 오빠의 상태를 체크하던 간호사가 다급하게 호출을 했다. 의사와 다른 간호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얼굴을 찡그린 채 병실을 나갔다.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으로 떨어지자 삐-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심전도 기계가 아우성을 쳤다. 의사는 목에 걸치고 있던 쇠붙이 청진기를 오빠의 심장에 갖다 댔고, 오빠의 감은 눈을 뒤집어 까고 동공의 크기를 확인했다. 그리고 의사는 흰 가운을 살짝 걷어 올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9시 33분 수길종 환자 사망하셨습니다.”
의사가 오빠의 사망선고를 내렸다. 의사의 말이 병실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의사는 시트를 올려 오빠의 얼굴을 덮었다. 오빠의 하얀 속눈썹이 파리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하얀 시트 위로 삐져나온 오빠의 하얀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있다. 가는 빗줄기에 연약한 벚꽃이 떨어지듯, 하얀 시트 밖으로 오빠의 오른 팔이 축 늘어지며 떨어졌다. 툭-. 그렇게 힘없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고 겨울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무심한 시선으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강에는 얼마나 많은 한(恨)과 피(血)가 쌓이고 흘러갔을까 하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과 피를 흘리고 간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한강이 저리도 큰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영정 사진으로 쓸 사진을 골라서 병원으로 갔다. 저녁이 될 때까지 빈소는 내가 지키기로 했다. 그동안 어머니는 생선가게를 정리하고, 집에 들러서 속옷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리고 친지들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보였다. 적어도 겉으론 슬픈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병원 원무과에서는 영안실 2호실을 지정해줬다. 빈소에서 나는 오빠의 영정 사진을 바라봤다. 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오빠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순간 놀랬다. 오빠가 저렇게 튼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암이란 놈, 종양이란 놈이 오빠의 육신을 다 먹어 치웠구나, 하는 생각에 분함이 올라왔다. 오빠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며 건배를 하자고 했던 것은 ‘내 삶을 기억해줘, 나를 기억해줘, 나 더 살고 싶어.’라는 절박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오빠는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힘든 내색 한번 안했던 사람이니까, 오빠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쳤던 것은 내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이팅을 해줬던 것 같다.
첫 문상객은 생선가게 할머니였다. 80살이 넘어서도 생선을 팔고 있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오빠의 영정에 재배(再拜)를 올리고, 나와 맞절을 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버지가 친구 보증을 잘못 서서 어머니의 생선가게가 경매로 날아갔을 때가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요즘 힘이 부쳐서 사람을 한 명 구하려고 한다면서, 어머니에게 같이 일하자고 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생선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거절을 못하는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보증을 더 섰고, 대부분 아버지에게 보증을 맡긴 사람들은 잠적했다. 그리고 그 짐은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 되었다.
나를 임신 했을 때, 어머니는 찹쌀떡이 먹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멀어지는 찹쌀떡 소리를 따라서 슬리퍼를 끌고 눈길을 달렸다. 아버지는 가파른 언덕길에, 눈까지 쌓인 길을 달린 것이다. 멍청한 건지, 절실한 건지. 눈길을, 그것도 가파른 언덕길을 슬리퍼를 신고 뛰어 내려가는 사람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찹쌀떡을 사러 가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오빠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그때 오빠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아버지를 먼저 발견했다. 아버지는 눈길에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죽은 것이다. 그래서 오빠는 내가 길거리에서 태어났을 때 ‘죽지 마!’ 라는 말을 제일 먼저 했나 보다. 피로 감싸인 나를 보고, 한없이 울던 오빠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아무튼 남아 있다. 아버지가 찹쌀떡을 사러 가다가 죽고 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보증으로 생긴 빚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었지만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부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빚을 졌다면, 아버지가 갚아줬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더 이상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의금 접수업무는 오빠 친구들이 맡았다. 어머니는 부의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부의금대신 문상객들의 이름만 적게 했다. 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없을 텐데. 나는 어머니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참기로 했다.
다행히도 문상객들은 많았다. 재래시장의 아줌마들, 아저씨들, 물건을 납품하는 사람들, 오빠 대학 같은 과 학우들, 동아리 회원들, 군대 동기와 선후임들, 내 친구들과 외갓집 어른들까지. 그런데 친가 쪽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가에서는 친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할아버지의 땅을 팔았다. 5남매였던 아버지 형제들은 장남이 30%를 가져가고, 나머지 4남매가 똑같이 분할하기로 했는데, 아버지는 죽은지도 오래됐고, 할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5%만 준다고 했다. 큰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는 오빠에게 큰아버지를 만나보라고 했다. 큰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온 오빠는 어머니랑 같이 한참 동안 이불을 두들겼다.
새벽 2시 정도가 되어서야 모든 문상객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던 할머니가 상에 음식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오빠 친구들은 집에 갔다가 내일 밤에 다시 온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화장실을 가면서 영안실 복도를 훑어봤다. 2호실 앞에는 할머니가 보내온 조화가 유일하게 빈소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오빠는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따라 가고 싶었다. 나는 딱 한 번 오빠가 검사를 받으러 갈 때 동행했다. 오빠는 피 검사, 소변 검사, 가슴 사진 촬영, 그리고 방사능 주사를 맞았다. 몸에 방사능 주사를 맞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잠시 대기하다가 PET-CT 검사를 받으러 들어갔다. 우주선처럼 생긴 커다란 장비였다. PET-CT를 검사하는데 30분에서 4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화장실을 다녀왔고, 대학 병원 1층을 둘러 봤다. 1층에 설치된 5대의 ATM 기계 앞에는 은행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유리문 밖 흡연 장소에는 환자복을 입은 무리들과 의사 가운을 입을 무리들이 간격을 두고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검사를 받고 나온 오빠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하긴 어제 저녁을 먹고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오빠는 떡볶이와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 남매는 길거리 포장마차에 서서 순대와 떡볶이를 먹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분식점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오빠는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그때 팔았던 떡볶이가 가장 맛있었다고 했다. 장사도 정말 잘 됐다고 했다. 그런데 왜 떡볶이 장사를 그만뒀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보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오빠는 창밖 풍경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둘째 날도 문상객은 많았다. 잠을 못자서 그런지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문상객들과의 반복되는 맞절로 인해서 무릎과 허리가 많이 아팠다. 그리고 오빠의 전 여자 친구가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오빠의 전 여자 친구는 오빠 영정에 절을 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빠의 전 여자 친구는 나와 맞절을 한 후, 일어나서 나에게 목례를 하는가 싶더니, 바닥에 철푸덕 쓰러져서 통곡을 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문상객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오빠가 복학을 하고 나서 사귄 여자 친구였다. 나랑도 같이 몇 번 밥을 먹은 사이였다. 둘 사이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몸이 안 좋아진 오빠가 일방적으로, 아무런 설명 없이 헤어지자고 한 것이었다. 10여 분 동안 오빠의 전 여자 친구는 울음을 쏟아냈고, 오빠의 친구들이 오빠의 전 여자 친구를 데리고 나갔다. 참고 있던 눈물샘이 울렁댔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좌변기에 앉아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빠 친구들은 화장터까지 따라와 줬다. 오빠 친구들은 오빠의 육신이 잠들어 있는 관을 옮겼다. 오빠의 관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빠 친구들은 오빠의 관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그 다음 어머니가 굵은 손으로 관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쓰다듬었다. 나는 오빠의 관에 손을 올리고, ‘메멘토 모리’라고 읊조리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검은 그림자가 오빠의 관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의 관이 소각로로 들어가고 가스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오빠의 인생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닥타닥. 오빠가 살아온 뜨거운 삶만큼 오빠는 타들어 갈 것이다.
빈소 사용료와 장례절차에 든 모든 비용은 할머니가 값을 치렀다. 어머니가 만류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모든 값을 치른 상태였다. 자식들을 이북에 두고 온 할머니는 남한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혼자 살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환갑쯤의 나이였을 때 자궁암에 걸렸는데, 검사를 받으러 갈 때마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갔고, 병간호까지 정성스럽게 해줬다고 했다.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만큼 따뜻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번번이 사기를 당했고, 그 빚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늘어만 갔다. 그때 진 빚을 어머니는 아직도 갚고 있다.
아버지의 유골을 뿌렸던 곳에, 오빠의 유골을 뿌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혼미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불을 빨랫줄에 널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개장수가 개 패듯 이불을 때렸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머니의 방망이질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말릴까 하다가, 방망이를 들고 어머니 옆에서 같이 이불을 때렸다. 이불 호청이 찢어지고 이불솜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이불을 때렸다. 나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는 속상하거나, 화나거나, 슬플 때마다 이불을 때린다는 것을.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잤다. 어머니는 징그럽다며 나를 몇 번 밀쳤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파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타구니 쪽이 찜찜했다. 이불을 들춰보니 생리혈이 흘러나와 있었다. 생리일도 아닌데 웬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3일 동안의 피로가 쌓여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생리대를 찾았지만 빈 포장지만 남아 있었다. 나는 마당에서 이불 호청을 널고 있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생리대 없어?”
“왜, 생리해?”
“어.”
“그럼, 슈퍼 가서 사 와.”
“엄마 꺼 없어?”
“엄마, 폐경기야. 몰랐어?”
나는 어머니가 폐경기라는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는 언제부터 폐경기였을까. 어머니는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문득 문상을 왔던 수지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손을 보니까 깨진 손톱 위로 새 손톱이 자라고 있더라며 네일 케어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수지는 부의금을 받지 않아서 공돈이 생긴 것 같아 찜찜하다면서 공짜로 네일 케어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불 호청을 널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살펴봤다. 손톱 곳곳이 깨져 있었다. 생선을 토막 내다가 다친 상처일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엄지손톱은 3겹으로 층이 져 있었다.
“엄마, 오늘 네일 케어 받으러 가자.”
“돈 없어. 3일 동안 가게도 비웠는데, 나가 봐야지.”
“네일 케어 받고 같이 가자. 내가 도와줄게.”
“비린내 나서 싫다면서, 괜찮겠어?”
“응, 괜찮아.”
간지럼을 안타는 어머니는 네일 케어를 받으면서 자꾸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 세포는 손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와 네일 케어를 받고 생선가게를 깨끗이 치웠다. 다행히도 가게를 비운 사이에 옆 가게 부부가 생선을 팔아줘서 상한 생선은 하나도 없었다. 생선 가게를 일찍 정리하고 어머니랑 오랜만에 장을 봤다. 떡, 오뎅, 파, 양파, 당근, 당면, 만두, 계란, 북어, 무, 청양고추, 미나리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먹구름이 꼈고, 주위가 고요하게 느껴졌다. 꼭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제 터트린 이불 호청에 헝겊을 덧대고 어머니랑 같이 이불을 꿰맸다.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이불 호청을 정성스레 꿰맸다.
나는 야채를 씻어서 적당한 크기로 잘랐고, 어머니는 떡볶이 육수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끓는 물에 북어대가리와 무, 파, 청양고추를 넣고 육수가 완성될 즈음에 미나리를 넣었다. 보고 있던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미나리는 왜 나중에 넣어?”
어머니가 웃으며 답했다.
“국물 맛도 시원하게 해주고, 향도 좋아.”
맹물에 고추장, 설탕, 다시마를 넣고 떡볶이를 만들던 나는 떡볶이에도 육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완성된 육수를 맛보라며 나에게 국자를 내밀었다. 나는 국자에 입을 대고 맛을 보았다. 국물은 개운했다. 육수를 목으로 넘기고 나자, 미나리의 산뜻한 향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어머니는 물에 담가 놓은 떡을 건지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다시 어디론가 귀를 기울였다.
“이 소리 들려?”
나는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무슨 소리?”
“잘 들어봐, 들리지?”
“무슨 소리?”
“찹싸아알-떠억.”
희미하게 들리던 찹쌀떡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어, 들린다. 근데 요즘에도 찹쌀떡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네.”
“그러게. 가서 불러와.”
“찹쌀떡 먹게?”
“응.”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고, 밤송이만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들렸다. 사박사박-.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박사박-. 사근사근.
찹쌀떡 장수는 야상 점퍼에 군화를 신고,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는 찹쌀떡 장수에게 들어와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보일러를 켜라고 했다. 나는 보일러를 켰다. 찹쌀떡 장수는 잠시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찹쌀떡 장수에게 씻고 나오라고 했다. 찹쌀떡 장수는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사이, 찹쌀떡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춰봤다. 하나도 못 판 듯 꽉 차 있었다. 뜨거운 물에 씻고 나온 찹쌀떡 장수의 몰골이 말끔해졌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낯이 익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낯이 익었다. 죽은 오빠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긴 해도 닮아 있었다. 눈매가 선하고 볼이 두툼한 것이 오빠와 빼다 박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분명 모르는 사람이었다. 찹쌀떡 장수는 씻고 나와서 가장처럼 상 앞에 앉았다. 빈 상은 어느새 어머니의 음식들로 가득 채워졌다. 떡볶이, 미나리무침, 북어 국, 파김치, 조기 세 마리, 포기김치, 어머니가 만든 떡볶이에는 만두와 당면까지 들어가 있어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맛 또한 일품이었다. 오빠의 말대로 어머니가 만든 떡볶이의 맛은 최고였다. 찹쌀떡 장수는 떡볶이를 세 그릇이나 먹은 후, 나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일어나서 밥 한 공기를 퍼왔다. 찹쌀떡 장수는 떡볶이 국물에 밥을 비비고 나서, 포기김치를 손으로 북북 찢어서 밥 위에 올려서 맛있게도 먹었다. 서글서글한 얼굴의 찹쌀떡 장수는 식사를 하는 내내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내가 만든 음식은 아니었지만 뿌듯했다. 식사를 마친 찹쌀떡 장수가 물을 마시며 입을 헹구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창고로 가서 방망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손때가 묻어 있는 오래된 방망이였다. 어머니 것도, 오빠 것도, 내 것도 아닌 처음 보는 방망이였다.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아버지가 쓰던 방망이인 듯했다. 어머니는 찹쌀떡 장수에게 방망이를 건넸고, 찹쌀떡 장수는 아무 말도 없이 방망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찹쌀떡 장수는 찹쌀떡을 4개나 내려놓고 갔다.
그날 밤 어머니는 밤새 보일러를 끄지 않았다. 등이 따뜻한 밤이었다. 나는 네일 케어를 받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찹쌀떡 장수는 왜 부른 거야?”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을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아?”
“아까 봤잖아. 그 사람의 몰골과 식성을.”
“하긴, 그래도 그렇지 그 사람이 만약 해코지라도 했으면 어떡하려고?”
“해코지 할 사람이면 달동네 꼭대기까지 올라왔겠니? 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찹쌀떡 하나도 편하게 못 사먹는 사람들인데… 아마도 처음이라서 모르고 여기까지 올라 왔을 거야.”
“하긴 그러네. 엄마, 일어나서 찹쌀떡 먹자!”
“그럴까?”
“응.”
나는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다.
“춥게 문은 왜 열어?”
“여기가 경치는 죽이잖아. 운치도 있고.”
함박눈은 더욱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마당에도, 장독대에도, 빨랫줄에도,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에도, 63빌딩 전망대에도, 남산타워 전망대에도, 서울의 붉은 야경에도.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어머니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찹쌀떡을 먹었다. 축 늘어진 여러 개의 젖을 출렁이며 고양이가 열린 대문으로 들어왔다. 고양이는 툇마루 아래에서 어슬렁어슬렁거렸다. 보고 있던 어머니가 찹쌀떡을 던져 줬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고양이가 혀로 찹쌀떡을 핥으며 먹었다. 나도 찹쌀떡을 하나 던져 주었다. 고양이는 뒷걸음질치며 잠시 경계하더니 찹쌀떡을 물고 대문을 나갔다.
어머니가 한 손을 뻗어 눈송이를 만졌다.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등을 바라봤다. 삶의 묵직한 무게감을 무심함으로 이겨내며 살아온 어머니의 등을, 나는 바라봤다. 둥그런 어머니의 어깨가 유연하게 들썩였다. 어머니의 손위로 떨어진 눈송이가 사르르 녹자 어머니가 웃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웃음 세포가 있는 것이 맞나 보다. 나는 가볍게 어머니의 등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의 등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 아니었다. 은근한 불길로 오래오래 타는 참숯이었다. 타닥타닥. 참숯이 타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가 타는 소리가 눈 속으로 파고든다.
☆ 당선소감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전화를 받았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밥 때에 든든한 수상 소식을 들었다.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아마도 ‘은’이 적절한지 ‘이’가 적절한지에 대한, 조사 하나하나에 씨름하던 시간들이 몸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관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편한 장소 중에 하나다. 보이지 않게 뿜어져 나오는 책의 냄새가 좋고,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정겹게 느껴져서 좋다.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나가는 이곳, 삶의 안식처 같은 이곳에서 삽 대신 모나미 볼펜을 들고 언젠가부터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아직 무딘 볼펜이긴 하지만 열심히 써 나갔다. 뼈를 만들고, 그 위에 살을 붙이고 다시 불필요한 살들을 발라내며 균형이 있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위해 읽고 쓰고, 쓰고 읽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고통의 침묵과 맞닥뜨린 순간, 삶의 비린내가 풍기고, 응어리져 있던 육신의 긴장이 풀리는 그 순간의 허무가 값지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살아가는 건 고통의 연속이다. 그 고통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었던 선배들의 글들이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내가 쓴 글이 상처와 고통을 감싸주는, 차갑게 언 가슴을 녹여주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정진해 나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로 속을 헤매던 시간들과 외로웠던 내게 주신 이 상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겠다. 보석이 아닌 원석 같은 글을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계간웹북 사측에도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생의 꺼지지 않는 등대인 어머니, 묵묵히 바라봐주시는 아버지 그리고 동생 내외와 조카 수연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글을 써보라고 격려해 준 성환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불어오는 바람에 휘둘리지 말고, 바람을 멈출 줄 알아야 내 바람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채워야 할 242개의 비늘 중에 이제 하나를 채웠다. 마음 산책을 하고, 또 다시 빈방의 문을 열고 비늘을 구하러 가야겠다. 머리도, 손도 아닌 마음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
이병희 : 1978년 서울 출생. 대전고. 현재 용인대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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