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15일 주일오후설교
성경낭독: 누가복음 12:13-21절
교리문답: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주일
설교제목: 허망한 위로와 참된 위로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2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2문: 이러한 위로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2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제일 첫 권인 창세기를 펴면, 하나님의 창조기사가 맨 머리에 나옵니다. 여기에서부터 덮을 것인지 읽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기사를 인정하고 믿을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창세기로부터 믿음에 대한 요구를 독자들은 받는 셈입니다. 창세기의 첫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문답을 열 때, 우리는 기로 앞에 섭니다. 요리문답교사는 묻기를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를 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 생존할 때나 죽을 때에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냐고 직설적인 돌 직구로 물어오기 때문입니다. 피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성도와 아닌 사람과의 구분이 시작됩니다. 대답의 내용에 따라 성도와 불신자가 갈라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유일한 위로는 선명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시고, 우리가 주께 속한 것이 살아 있을 때에나 죽었을 때에나 유일무이한 위로가 됩니다. 성도의 위로와 달리 믿지 않는 이들의 위로는 흔들리는 것들이고, 변색되고 퇴화되고 시간에 의해 산화되는 위로들입니다.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을 유일한 위로로 삼고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손에 잠시 쥐었다가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허무한 것에 터를 닦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허무하게 돌아가 버리는 것에 기반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와서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주를 붙들지 않는 이들에게는 참된 기초가 없는 셈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주께 매여 있고, 우리의 위로가 하나님께 기반 해 있을 때에야 질실 된 위로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3-21절의 본문에서 한 사람이 주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께 나아온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성경본문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던 메시야는 로마의 철권과도 같은 무서운 권세로부터의 해방과 공평 정대한 다윗 시대의 회복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지상적인 유대인 왕국의 도래를 통해서 한스럽고, 억울했던 모든 문제들을 풀어줄 지상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찾아 나온 이 사람은 주님을 위로자로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을 기다렸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과 유일한 위로로 기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당면한 재산의 문제, 즉 재산분배의 공정한 재판관이 되어줄 소망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참된 위로가 아닌 현세적인 삶에서의 위안과 도움을 위한 위로를 기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만을 유일한 위로로 삼는 이들과 탐심을 위로로 삼는 이들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요약합니다.
허망한 위로와 참된 위로
1. 부자의 허망한 위로 2. 성도들의 참된 위로
1. 부자의 허망한 위로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을 찾아 나온 사람은 주님의 세상의 통치자로 생각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으로 많은 문제들을 풀어준 것처럼, 지상의 주로 오신 분께서 자신의 재산 분배문제도 지혜롭게 해결해 주실 것을 바라고 나온 것입니다. 물질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님께서 가지고 계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오병이어 이적 이후에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한 것은, 참되신 생명의 주를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왕으로 삼고자 하심임을 알고 피하셨습니다.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 물질과 본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탐심의 충족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필요를 채워가는 것이 위로였던 셈입니다.
주님의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의 주로, 약속된 생명의 메시야로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이 드물었습니다. 현세적인 문제를 풀어주고 해결해 주실 메시야로 기대했습니다. 오직 현세적이고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당대의 삶이 너무도 고달팠던 탓도 있습니다. 식민지 삶의 퍽퍽한 인생과 세금을 거두어가는 악한 왕들의 횡포가 심했고, 억눌려 있고 억울해 있던 문제를 풀어주기를 간절히 고대한 것입니다. 아마도 형이 모든 재산을 불법하게 가져간 듯싶습니다.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응당 부모로부터 나누어 받을 재산을 몽땅 잃어버린 아우의 입장은 복창이 터질 일이었고, 큰 상심으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밥맛도, 살맛도 없었을 지경이었을 겁니다.
부모의 유산 문제로 형제간에 원수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삼성의 회장 이건희 회장과 형님집안과의 재산 문제로 법정 소송에 들어간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재물에 대한 탐심에는 끝이 없는 듯싶습니다. 왜 그렇게, 충분하게 여기지 못할까요? 걸신들린 사람들처럼 재산에 대한 탐욕을 가진 사람들의 욕망을 끝이 없습니다. 재산을 온통 움켜쥐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삶의 안전망 즉, 행복과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대우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떵떵거리고 살 수 있고, 큰소리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넉넉히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막대한 위로인 셈입니다. 이렇게 막대한 위로를 잃어버린 아우는 주님께 재산분배를 해 줄 것을 명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14, 15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우리가 사는 세상 가운데 가장 큰 유혹이 있다면, ‘탐심’일 겁니다. 머물고 있는 상태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 못하고, 보다 더 나은 것을 요구하고, 갈망하는 탐심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고 하와는 하나님께서 울타리지어주신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범죄 했습니다. 사람들의 싸움과 투쟁, 분쟁과 질투 그리고 시기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그 뿌리는 탐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족과 위로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찾기 때문에 심연 깊은 마음의 구덩이를 가집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다른 것으로 메우려고 노력 합니다. 하지만 메워질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찾아 나온 사람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주를 앞에 두고서, 만유의 주님을 찾아 나와서는 재산의 공의를 문제 삼았습니다. 불의한 세상과 공평을 바로 잡는 문제의 해결자로 주님을 삼았습니다. 만유를 회복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을 억울함을 해소하고,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편중된 관심 가운데 머무는 것을 경고하시면서,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6-21절입니다.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가던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가 투자한 밭에는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반복적인 풍년으로 넘치는 부와 성공으로 고민이 생겼습니다. 남들이 보면 사치스러운 염려였겠지만, 부자 입장에서는 심각한 고민이 발생했습니다. 곡식을 쌓아 둘 창고가 모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큰 곡식창고들을 짓기 위해서 이전의 창고를 헐고, 넉넉하게 채울 수 있는 큰 창고를 만들기로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고민하던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자 마음이 즐거웠던 모양입니다. 19절에서 보여주는 대로 행복한 독백을 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마음이 행복해지고 뿌듯해 졌습니다. 넉넉하게 지어질 곡물창고를 생각하고 그 안에 가득 찰 넉넉한 미래대비가 되었다고 마음으로부터 깊은 위로를 건져 올리는 모습입니다. 넉넉한 재물을 쌓아두고서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참 부러워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프로야구리그에서 뛰고 있는 추신수 선수가 1억불이 넘는 대박계약을 앞두고 있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금액입니다. 댓글들을 보자면, 젊은 친구가 살아갈 앞으로의 미래를 부러워들 합니다. 넉넉한 재력을 가진 재벌기업의 2세들을 부러워합니다. 사람들은 넉넉한 재물을 가진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를 어리석다고 말씀합니다. 20-21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재산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위로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이 없는 삶이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절대가난에 다름이 아닙니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어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재물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영혼조차도 잃어버리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잠시간 누린 짧은 위로 뒤로는 도대체 아무 위로 없는 재난 속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들 모두가 이러할 것입니다.
2. 성도들의 참된 위로
믿음이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위로는 죽음과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위로를 찾아 힘이 겹도록 헤매고 다닙니다. 보이는 것을 전부를 가지고 살기에 영원하신 주님으로 인한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약백성이 된 사람들에게도 주님만을 위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 나온 사람의 경우에도 현세적인 문제에만 몰두되어 있었습니다. 재산분배가 이루어져서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퍽퍽한 삶과 불의하게 빼앗긴 재산으로 물질적으로도, 마음으로도 큰 상심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긴박한 시름의 문제였고, 풀기를 원했던 간절한 문제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찾아 나온 대상은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 자체이신 분께 나왔습니다. 마땅히 언약백성으로 온당한 위로를 구해야 옳았습니다. 비유에서 부자가 구한 헛되고 일시적인 위로를 구한 것처럼, 주님을 찾아 나온 사람 역시 참된 위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구하지 않는 모든 위로는 참된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처절할 만큼 물질을 구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위로가 아니라 돈이 위로입니다. 사람들은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재산을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돈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돈에 매이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않는 인생은 반드시 다른 것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가 쥐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먹고사는 문제와 물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오늘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이든 매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로를 위해서, 재물을 위해서 일합니다. 돈이 신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나, 맘몬이 신입니다. 공산주의도 역시 물질의 노예입니다. 그러면, 수정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물질의 노예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역시 물질의 노예에 다름 아닙니다. 돈을 개인이 쥐느냐 사회나 공동체가 쥐느냐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주의 소유로 살아가는 않는 모든 사람은 다른 것의 노예로 사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살지 않는 이상, 재물이나 다른 것을 위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야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숭배하려하고, 추구하려하기에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일시적인 위안과 잠시의 배부름을 누리지만, 이내 사라지는 허무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뿌리내리지 않는 삶은 진실로 참된 위로를 맛보지 못하는 참담한 삶입니다. 떵떵거림이 있고, 성공이 있고,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에 오름이 있어도 사라지는 위로들입니다. 죽음 앞에 세우고 나서야 참된 위로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어찌 보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죽음의 실존 앞에 서야만,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늘을 의식하고서야,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지요. 죽음 앞에 인생을 세워보았을 때, 허무하게 녹아버리는 것이라면, 참된 삶의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입니다. 죽음의 실존 앞에서 소망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위로들은 거짓된 위로로 판명 나고 말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건강의 상태가 괜찮다고, 자녀들이 별 무리 없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자족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소유가 부족하지 않고, 윤택한 삶을 영위할 만한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을 위로하지 마십시오. 외면적인 환경과 가진 것으로 자신의 위로의 근원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부분적이고 참된 위로가 아닌 것으로 위로삼고자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잘못된 위로와 싸워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7:23절에서 지체 속에 한 다른 법과 싸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으로 족히 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뿌리내리고 살지 않는 다른 법과의 싸움입니다. 바울 역시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법을 알고, 싸워야했습니다. 성도들의 위로의 뿌리와 근본은 그리스도의 소유됨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고급 주택과 넓은 땅, 멋진 차와 은행 계좌에 찍힌 고액의 금액뿐이라면, 진실로 가난한 사람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면, 대속의 은혜와 섭리하시는 다스림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참된 위로는 없습니다. 부분적인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에,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데 있습니다.
성도들의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가장 큰 위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이고 있다 실종되고 사라지는 것에 소유되지 않고, 주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유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자신의 계획과 그늘 안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손 안에 매달려 있기에 안전한 까닭입니다. 아멘.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2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