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4강
말씀 / 누가복음 5:1-11
요절 / 누가복음 5:10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으로 유명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이 시몬을 제자로 취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조립해보면, 본래 시몬은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쉽게 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의 소개로 예수님 만나 게바라는 별명을 받았고 장모의 열병을 고침받았으면 예수님을 당연히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제자들은 그 정도에서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시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새벽부터 몰려와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시몬은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고기잡이 끝내고 퇴근 준비하는 것입니다. 장모의 열병으로 병원비가 많이 들어간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 복음이 너무 막연하게 들렸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고마운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지만, 자기생활을 희생하며 따를 정도는 아닌 분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그물을 씻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무관심에 빠져있는 시몬을 어떻게 건져내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우연을 가장한 의도적인 심방이었을까요? ‘어? 시몬의 배였네.... 잠깐 배를 띄워줄 수 있나요?’ 시몬은 장모의 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인해 차마 거절하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앉으사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은 한 편의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되어 갈릴리 호수에 울려 퍼졌습니다. 물론 무리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로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도 그리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일어나듯이, 예수님 말씀은 베드로 내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예상했던 것과 다른 차원의 세계를 가지신 예수님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몬은 한편으로는 은혜 받고 다른 편으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던 얼굴을 시몬을 향하여 돌립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당시 고기잡이는 야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밤이 되면 물고기들은 수면 가까이로 올라와서 활동하고 이제 동이 터오는 새벽이 되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것이 갈릴리 바다의 상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시몬은 밤샘 작업을 했고 그물 정리까지 다 마친 상태였기에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정도 상식, 그 정도 눈치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깊은 데로 가라,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방향을 제시하신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세계를 체험하라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시몬은 이성의 세계, 경험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도 나름의 이성과 경험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어찌 그리스도가 될 수 있겠어...’, 지금 시몬이 또다시 자기 이성과 경험을 앞세운다면, 순종은 커녕 한수 가르침을 주려고 나섰을 것입니다.“예수님은 목수 집안 출신이어서 바다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자기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예수님을 기대해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저 분은 내가 보는 것 이상을 보는 분이야,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실 수 있어’, 그런 마음, 그런 기대감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세계로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도 수많은 패턴을 분석하여 확률적으로 높은 수를 선택한 것입니다. 뭐든지 반복하며 익숙해지면 대부분 예측 가능해집니다. 노인들이 무릎 쑤시고 허리 아프면 비가 오는 것을 예측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예측하는 프로그램들이 발달합니다. 각 사람이 인터넷에서 검색한 데이터를 활용하여 쇼핑 경향과 품목을 예측합니다. 그와 같이 신앙생활도 예측 가능하다며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공부하고 예배하고 목자생활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에만 주목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봄학기에는 복음서 공부하고 여름에는 수양회 하고 가을에는 추수감사와 성탄, 해마다 흘러가는 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지식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기도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인생문제 해결 위해 기도하고, 해결안되면 포기하고...’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측량 불가의 세계입니다. 광활한 우주가 인간의 예측 너머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주권, 예수님의 나라는 인간의 예측 너머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인간의 계산을 벗어납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을 만큼 높고 깊고 넓습니다. 예수님의 주권은 어둠을 빛으로 뒤바꿀 수 있는 경륜을 담고 있으며, 예수님의 나라는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땅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이 깊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든, 기도를 하든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경공부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는 통로가 될 때,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는 깊은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문제해결만이 아닌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해 기도할 때, 깊은 기도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우리들도 예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초청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는데, 빈그물을 끌어올리면 어떤 마음이 찾아옵니까? 밤이 새도록 노력했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거나, 결혼이나 장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복음 역사를 섬겼으나 보이는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걸어 잠그고 무기력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화도 납니다. ‘나는 안돼! 더 이상 그물을 내리지 않을거야, 누구의 말도 듣기 싫어!!!’,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며 하나님을 향해 애꿎은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몬은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는 실패앞에 겸손해졌습니다. ‘말씀만 의지하는 것이 살 길이다’, 방향잡고 순종했습니다. 불신이냐 믿음이냐, 말씀을 의지하느냐, 자기 생각대로 하느냐, 이것이 갈림길입니다. 여기에서 무리와 제자의 인생길도 갈라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인생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으로 갈라집니다. 우리는 고민스럽고 어려울수록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역사를 보면, 낮추실 때에 낮아질 줄 알고 절망의 때에 순종을 배우는 사람이 변화되고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시몬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도와 달라 요청했습니다.(7) 동료들이 달려와서 두 배에 고기를 담았는데, 고기로 인해 배가 잠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었던 대박 장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거두게 될 열매를 상징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사람의 계산과 생각을 뛰어넘는 엄청난 열매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약속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당장에는 손해보고 어리석은 길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보이는 현실에 맞추어 사는 것이 더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평가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계산과 경험에 갇혀 버리기 때문에 위로부터 주어지는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계산을 뛰어넘는 열매, 성령의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시몬이 얻은 가장 놀라운 열매는 무엇입니까!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시몬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고 고기를 못 잡아도 그물을 씻어놓을 정도로 내일을 준비했습니다. 배 띄워 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정도 노력한 결과로 물고기를 잡았으니, 입에 침을 튀기며 간증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한마디! 예수님 믿고 물고기 많이 잡았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세리와 창기’같은 죄인으로 고백하며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그가 아내에게 폭력이라도 행사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남의 그물을 찢어놓고 뺑소니라도 친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봅니다. 다른 사람보다 게으르거나 다른 사람보다 스펙이 딸릴 때, 다른 이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을 때, ‘난 안돼, 난 쓰레기야’, 생각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스펙이나 실적을 쌓았을 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당당해집니다. 본문으로 비유하면, 물고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고기 많이 잡은 사람이 최고입니다. 성적 좋으면, 실적 올리면, 재산 많으면 최고입니다. 시몬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 한번 더! 부탁해요!’ 외쳤을 것입니다.
시몬이 죄를 고백하며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물고기가 아닌 예수님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물고기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 놀라우신 예수님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시몬이 지금까지 들었던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람, 존경스런 사람을 만날 때, 그에 비해 작고 천박한 영혼을 가진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을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는 태호 목자를 볼 때마다 거친 내면을 가진 자신이 드러나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항상 조용히 타인의 소리를 경청하는 성수목자 앞에 서면 쉽게 요동치는 저의 내면이 드러나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거대한 건물 앞에 서게 될 때,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빈약함을 느낍니다. 시몬이 예수님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크신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영혼의 초라함, 우리 영혼의 빈약함이 드러납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그러했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고 탄식하였던 이유입니다. 그는 두렵고 떨림으로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수록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집니다. 부끄러운 자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익으면 익을수록 주님앞에 엎드려 은혜와 긍휼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몬은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몬에게는 가장 부끄러운 그때, 예수님은 시몬에게 가장 큰 소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10절 하반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생포한다, 위험에서 건져낸다는 뜻입니다. 물고기를 물에서 건져내는 것은 돈 벌고 잡아먹기 위해서이지만,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는 것은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죄악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사람을 취하는 것은 물고기를 취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물고기 잡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살리고자 하면 에너지를 드려야 합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복도에 어항이 있습니다. 서홍일 목자의 도움을 받아 어항을 만들면서 물고기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많은 장치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어항에 물 받아놓고 보글보글 공기 넣어주고 밥만 주면 다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돗물을 정수해주는 정수기가 있어야 하고, 물고기들이 싼 오줌과 똥을 걸러내는 여과장치가 있어야 하고 수초가 자라나도록 이산화탄소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추운 날씨에도 일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히터도 있어야 합니다. 수시로 이끼가 발생할 때마다 청소도 해주야 합니다. 언젠가 한번 어항 청소를 하다가 탄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쳤지! 언제까지 얘들을 감당해야 하나, 물고기 평균 수명은 어떻게 되나? 검색해보자...’ 어항 속 물고기를 꺼내어 매운탕을 해먹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열대어의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고 건강하게 살도록 도와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물고기도 그러한데, 사람을 취하는 것은 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몇마디 언어 스킬로 사람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담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키가 하루 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니듯이, 인간의 내면 또한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든 내면이 고침 받고 교정 받아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 섬기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25년의 시간을 인내했습니다. 모세를 키울 때에는 40년의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일생 물고기만 잡아왔던 시몬, 혈기가 넘쳐나는 시몬이 어떻게 사람을 취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심리학을 배운 것도 아니며 인문학 박사도 아닙니다. 물고기 어부와 영혼의 어부, 단어만 비슷하지 완전히 별개의 인생입니다. 물고기 잘 잡는다고 사람까지 잘 돕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머리 좋다고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제 후로는’, 여기에는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시몬의 지금까지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듯, 이제 후로는 달라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모습으로 앞으로를 예상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이제까지 반복하여 실패했으면 앞으로도 반복하여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역사하시면 이제까지와 다른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영혼의 어부이시기 때문입니다. 거친 암석이 조각가의 손 안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듯이, 누구든지 예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사람을 건져내는 영혼의 어부로 살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유대율법주의자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운데 목자로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그러합니다. 누구도 처음부터 사람을 취하는 인생을 살겠다 결심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버거운 인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거듭나고 죄사함 받아 사람을 취하는 목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동료 어부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잡은 물고기,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물고기 잡으려고 말씀을 듣지 않았던 자들이 이제는 잡은 물고기를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오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오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고기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사람을 취하는 인생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보다 물고기, 구원보다 돈을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보십니다. 디니엘서 12:3절은 말씀합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추리라” 한 사람이 올바른 인생을 살도록 돕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토록 빛나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옳은 데로 돌아올 때,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그의 자녀들이 살아나고 그의 양들과 그의 동료들이 살아나고 그에게 속한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그들이 살아나면 그들을 통해 또다른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살리니,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대대로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실은 영원의 시간속에서 엄청난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의 부르심은 시몬 베드로에게 주어진 최고의 초청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사 말씀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을 취하는 위대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