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6.25回想>
(2) 쑥대밭이 된 용산
- 57년 뒤에 쓰는 일기-
1950년 7월 15일 (토)
전쟁이 터진 지 20일이 되었다.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그 동안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수원, 오산, 평택, 성환, 천안, 공주를 차례로 점령하여 전선(戰線)이 금강(錦江)까지 내려갔다. 동네 곳곳 담벼락에 8절지 크기의 김일성 흑백사진과 그 사진 옆에 같은 크기의 백지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백지에는 우리 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북한군이 점령한 도시를 매일 붓 대롱으로 빨갛게 찍어 놓는다. 사람들은 이걸 보고 매일의 전황을 알 수 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각각 임무를 맡겼다. 그 동안 학교에 장기 결석하는 급우의 집을 내일 쉬는 날에 찾아가 보라는 것이다. 피란을 가지 않았으면 학교에 나오라고 권유하라는 것이다. 전쟁이 터지고부터 20일이 되도록 장기 결석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와 둘이서 신공덕동에 사는 급우를 맡았다.
당시의 김일성 사진
1950년 7월 16일 (일)
교회 유년주일학교에 다녀온 후 친구와 둘이서 효창공원을 거쳐 신공덕동 급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효창공원 서쪽 언덕 너머 비탈에 들어선 축대가 높은 이층집들 중 하나다. 집집마다 컹컹 우렁차게 개들이 짖어대는 부자 동네다. 당시는 요즘처럼 애완용 개는 볼 수 없었고, 사냥개 같은 크고 사나운 개를 집 지킴이로 기르는 집이 있었다. 우리는 급우의 집 앞에서 큰 소리로 이름을 몇 번 불러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동네 개들만 더욱 요란하게 짖어댔다.
급우 찾기를 포기하고 되돌아 효창공원으로 내려왔다. 녹음이 짙은 효창공원 숲에서 매미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효창운동장과 백범기념관 등 건물들이 덩그렇게 들어앉아 공원 분위기가 좀 삭막하고 답답하지만, 그때 효창공원은 온통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의 운동장 자리에 연못이 있었고 연못 가운데는 작은 섬도 있었다. 연못에는 개구리와 올챙이, 소금쟁이, 물방개, 물맴이가 있었고, 잠자리도 많이 날아다녔다. 요즈음 잘 볼 수 없는 왕잠자리, 말잠자리, 물잠자리, 실잠자리도 있었다. 아이들은 철사를 둥글게 구부려 막대기 끝에 달고 거기에 거미줄을 겹겹으로 붙여 만든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덮쳐 잡기도 했다. 운이 좋아 머리와 몸집이 큰 연두색 왕잠자리 암컷을 잡으면, 꼬리에 실을 묶어 공중에 휘휘 돌리면서 “뚜뚜따라 뚜따라”를 연거푸 노래한다. 그러면 영락없이 수컷이 날아와 붙는다. 이 때 잠자리채로 덮쳐 또 한 마리를 잡는다. 큰 아이들은 망으로 만든 매미채로 매미도 잡았다. 학교의 자연 과목 숙제를 하려고 공원 풀밭에서 땅을 파고 개미와 개미 알을 유리병에 채집하기도 했다. 공원 북쪽 언덕에 있는 김구 선생과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역 서편에는 국민학교 마당만 한 작은 운동장이 있었다. 거기서 고무공을 가지고 공차기도 하고 큰 아이들은 야구도 했다. 봄이면 남쪽 공원입구에 벚꽃이 만발했고, 개나리도 곳곳에 피었다. 그야말로 효창공원은 도심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놀이터요 자연 학습장이었다.
녹음 짙은 최근의 효창공원
급우도 찾지 못한 채 효창공원 숲 속을 내려오면서 매미소리에 홀려 나무 위를 쳐다보고 있을 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 비행기 몇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이 비행기가 B29라고 알아차린 순간, 따!따!따!따! 하고 귀청을 때리는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비행기가 높이 떠 있는데 총소리는 바로 머리 위에서 나는 듯했다. 나중에 군대에 가서 알게 되었지만 그 총소리는 보통 총소리가 아니라 구경이 큰 기관총 소리였다. 난생 처음 듣는 어마어마한 총소리에 질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같이 갔던 친구와 함께 집을 향해 부리나케 달렸다. 왔던 길로 가자면 공원 남쪽 입구 쪽으로 해서 학교 앞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다급한 마음에 집을 향해 직선으로 질러서, 평소에 다니지 않던 학교 뒤편 언덕길로 달렸다. 언덕바지 어느 집 텃밭 옆을 지나는데 또 머리 위에서 따!따!따!따! 총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너무나 겁이 나 그만 텃밭 주위에 심어 놓은 옥수숫대를 붙들고 주저앉았다. 앉은 채 우리 집이 있는 남쪽을 내려다 보니 더욱 무서운 광경이 보였다. 집 뒤 철둑 너머 도원동, 용문동, 원효로 일대가 지상에서 하늘 높이까지 먹구름 같은 시커먼 연기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절반이 검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는 듯했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옥수숫대를 움켜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 날이 전사(戰史)에 크게 기록된 ‘용산 대폭격’의 날이었다. 이 날 무려 50여 대의 B29폭격기가 날아와 용산의 철도 조차장과 공작창 그리고 화폐를 찍어내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등 용산의 공장지대를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동쪽 이촌동에서부터 서쪽으로 원효로를 지나 마포구 도화동 공덕동에 이르는 지역이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전시 서울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시민 4250명 가운데 용산에서 죽은 사람이 전체의 37.3%인 1587명이었다니 이 날 얼마나 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서울에서 전쟁 고아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때가 이 용산 폭격부터라고 한다. (왼쪽사진: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
우리 집 바로 뒤 철둑 너머가 무시무시한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지만, 나는 집을 향해 다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검은 연기를 피해 반대로 언덕바지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 중에서 누가 나를 보더니 “아이고, 얘가 여기 오네요!” 하며 반갑게 소리친다. 몇 사람 뒤에 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참으로 극적인 만남이었다. 우르르 쾅! 쾅! 폭격 소리가 계속 나는 가운데 검은 연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 때 또 따!따!따!따! 하고 머리 위에서 총소리가 터지자 사람들은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마침 지름이 약 1미터 정도 되는 시멘트 하수관 입구가 보였다. 동네 사람들과 우리 식구는 그 하수관 속으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하수관 바닥에 물이 약간만 흐르고 있었다. 더러운 하수보다 다리가 긴 거미가 기어 다니는 것이 더 싫었다.
이날 내가 효창공원에서 이 언덕바지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이산가족이 될 뻔했다. 폭탄이 우리 동네 철둑 위에도 떨어져 레일이 휘어지고 구덩이가 파이면서 파편이 튀어 철둑 아래 집들의 기왓장과 유리창이 깨지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이 놀라서 이 언덕길로 피해 올라오던 중이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편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웃에 가 놀던 세 살짜리 동생을 찾으러 허겁지겁 이웃집에 가 보니 텅 빈 집에서 아이가 겁에 질린 채 홀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집 주인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자기네 아이만 데리고 나간 것이었다. 하마터면 이날은 우리 형제가 다 전쟁고아의 신세가 될 뻔한 날이었다. (왼쪽 사진: 집과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
폭격 소리가 멈춘 후 하수관 속에서 나온 우리 식구는 집의 유리창과 기왓장이 부서졌을 뿐 아니라 또 다른 폭격을 우려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용산선 철길을 따라 서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우리처럼 동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폭격을 당해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아이들도 있었고 피를 흘리며 가는 사람도 보였다. 우리는 공덕을 지나 동막 쪽으로 가서 어느 철길 건널목 부근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비교적 큰 집이었는데 안채의 주인 가족은 피란을 떠났고 바깥채에 세든 집 사람만 있었다. 세든 집의 허락을 받고 안채의 마루에 임시 머물게 되었다. 안채는 토방이 높아 덩그런 마루에 올라 앉으니 마치 우리가 주인인 듯싶었다. 집 앞 남쪽으로 철길 건널목이 있고 그 앞은 들판이었다. 북쪽으론 민둥산이 보였는데 지금 서강대학교가 들어선 노고산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우리가 머문 집이 지금 마포구 대흥동 지하철 6호선 대흥역 부근의 용산선 철로 건널목과 가까운 곳이라 짐작된다.
1950년 7월 17일 (월) ~ 7월 하순 어느 날
용산 폭격 이후 마포구 대흥동 어느 주인 없는 집 안채 마루에서 한 열흘 정도 머문 듯하다. 그 기간에 어떻게 지냈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다. 다만 바깥채에 세든 집에 나보다 두세 살 더 먹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그 아이가 어디서 탄알을 한 개 가지고 왔다. 동네 다른 아이들 서넛과 함께였다. 그 아이가 마루 앞 댓돌 위에서 탄알의 뾰족한 탄두를 두드려 빼고 화약을 쏟아내더니 탄피의 뇌관에 못 끝을 대고 돌멩이로 못대가리를 쳤다. 몇 번 치는데 갑자기 요란한 폭음을 내고 뇌관이 터졌다. 뇌관이 터질 것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바람에 그 아이가 손가락을 다친 기억이 난다. (계속)
탄피는 전쟁을 치른 50년대의 아이들 주머니에
몇 개씩 들어 있었던 소중한 장난감이었다.